사람의 몸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세포는 여러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분자는 당연히 원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에는 다시 원자핵과 전자가 있다. 원자핵 안에는 양자와 중성자가, 그리고 양자와 중성자 안에는 쿼크가 각각 들어 있다. 그러면 그것들은 다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러나 그 전에 원자의 크기란 원자핵과 전자의 거리이며 거의 원자핵 지름의 2천배에 이르고 있다. 즉 그 나머지는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인식하느 사물이란 촘촘하게 결합된 입자들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단일체도 아니다. 오히려 느슨하게 대부분은 빈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포와 세포 사이, 분자와 분자 사이, 원자와 원자 사이, 그리고 원자핵과 전자의 거리처럼. 아마 실제 질량을 가진 입자들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그려본다면 대부분은 빈 공간으로 그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그것을 양감으로, 질감으로, 색감으로 인식한다. 그 인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때 게임업계에 몸담았던 탓에 게임그래픽에 대해 이해하며 불현듯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컴퓨터 본체 안에는 그저 cpu와 메인보드와 ram과 그래픽카드와 기타 ssd와 케이스를 잇는 여러 케이블들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게임을 통해 보는 산이나 강이나 건물들, 그리고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데이터가 저장되는 ssd 역시 마찬가지다. 메모리반도체가 집적되어 있을 뿐 그곳에도 다른 세계의 우주나 행성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순간 사용자들은 게임을 통해 그것이 실제 있는 것처럼 여긴다. 실제 만질 수도 있고, 집을 수도 있으며, 부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러면 과연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최초의 우주는 0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주 이전은 지금의 우리들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주의 탄생 이후에 생겨난 것들이다. 우주 이전에는 지금 인간이 알고 있는 공간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러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0이이란 그러면 무엇인가. 0으로부터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이, 이 끝도 없는 우주가 만들어졌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ssd에는 그토록 방대한 세계가 담길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확실히 절대자의 말씀에서 이 세계가 탄생했다는 히브리의 신화는 놀라운 직관을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사람들이 노란색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노란색'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직 회색과 녹색이 분리되기 전에는 사람들은 두 가지 색을 같은 색으로 여겼었다. 즉 다시 말해 우주는 어쩌면 여전히 0인 채인지도 모른다. 이 방대한 우주를 모두 더하면 여전히 처음과 마찬가지로 0인 그대로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인간이 없다면 의식하지 않는 그곳에서 그것은 아무 의미없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우주가 방대하다는 것도, 우주의 공간과 시간과 질량이라는 것 역시도. 에너지란 무엇인가. 어쩌면 우주란 인간이 세상에 나타나면서 인간의 감각속에 존재하는 허상일지 모른다.


과연 인간이 인지하는 우주와 실제의 우주가 같을 것인가. 인간이 인지하는 우주의 모습이 실제의 우주 그대로인 것일까. 우주 이전의 우주가 의미가 없듯 인간이 인지하기 이전의 우주 또한 의미가 없다. 인간 이외의 존재가 인지하는 우주란 인간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그리고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 바로 말씀이다. 인간의 언어이고, 인간의 지성이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질서다. 인간조차 그저 무無의 허공에 존재하는 허상이 아닌가.


컴퓨터그래픽은 0이다. 전원이 들어가고 하드웨어들이 작동하기 시작할 때까지 ssd에 저장된 게임의 데이터란 0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으며 인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전원이 들어오고 모니터에 화면이 보이는 순간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시간과 공간들이 존재한다. 인간과 새와 동물과 나무들이 존재한다. 다르지 않다. 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그는 어쩌면 프로그래머가 아닐까. 프로그램이란 무수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망상이다. 게임과 게임그래픽에 대한 글을 쓰려다가 느닷없이 이런 헛생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런 헛생각들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무려 수 천 년 전 붓다는 그것을 고민했었다. 장자는 꿈을 꾸었었다. 부질없다고 말한 것은 공자다. 그곳에 숨은 진실을 찾으려는 것이 이데아였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리란 인간의 의식 너머에 있다. 끝이 없는 의식의 도돌이표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존재한다.

현대과학에 대해 알면 알수록 결국 불교의 사유에 빠져들고 만다. 정확히 고대 인도인들의 상상력이다. 인간과 그리고 우주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은 물음이다. 과연 우리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우주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러나 시간을 거스르고 또 거슬러 고대인도인들이 찾아낸 대답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시작은 없다. 당연히 끝도 없다.


우주의 탄생 이전에 대해 상상해 보자. 불가능하다. 우리가 경험으로, 혹은 선험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지금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인간의 지식이란 존재하는 우주 가운데서도 아주 일부만을 인지하고 인식할 것이다. 그런데 우주는 바로 우주의 탄생 이후 당연한 말이지만 생겨난 것이다. 수십억년의 광대한 공간도, 시간도 모두 우주과 더불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이 탄생하기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무엇이 있었는가고 묻는 자체가 공간과 시간을 전제하는 것이다. 공간도 시간도 없는데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존재했을까? 최소한 인간이 아는 형태의 존재는 아닐 것이다.


의식을 넓혀간다. 인간에게서 지구로, 태양계로, 은하계로, 우주로, 그리고 그 너머로. 우주는 과연 얼마나 넓은가? 우주 밖에서 보는 우주는 얼마나 거대한가? 공간도 시간도 존재하기 이전의 우주 이전의 우주를 기준으로 우주는 얼마나 거대해졌는가? 공간이 없으니 우주가 얼마나 거대해졌는가의 기준도 없다. 시간이 없으니 우주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의 기준도 없다. 우주라고 하는 자체가 없다. 태양이라는 거대한 천체 가운데 원자 하나에서 전자가 지나가는 경로에 있던 한 지점이란 태양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존재하지 않는 한 점에서는 과연 지금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러면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간은 인지할 수 있을까?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그토록 인간이 진화를 통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오랜 과학적 추론과 관찰, 실험의 결과가 어째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는가. 어떻게 우연이라는그 불확실한 과정을 통해 인간이라는 무엇보다 특별한 존재가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유일한 존재인데 우연이 그런 존재를 만들어냈다는 가정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 인간중심의 사고다. 인간이란 특별한 존재이기에 다른 특별한 존재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을 것이다. 지구와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그 특별한 존재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인간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수소원자 표면위로 전자가 스치는 궤적의 작은 흔들름만도 못한 존재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한에 가까운 우주에서 고작 태양계 하나, 그 태양계 가운데 행성 하나, 그 행성 위에 존재하는 고작 50억의 개체들에 불과하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인간과 같은 존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인간이 아무리 진화라고 성장하더라도 우주적인 차원에서 끼칠 수 있는 영향이란 거의 없다시피하다. 과연 지구에만이라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훼손하고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지구적인 규모에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해도 좋을 정도다. 그저 때되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태풍조차 미리 예방하거나 중간에 없애지 못한다. 멸종한 종은 새로운 종이 대체할 것이고, 바뀐 환경은 그에 적합한 새로운 종을 출현시킬 것이다. 인간이 마침내 사라졌을 때 지구와 지구의 환경에는 어떤 영향을 남기게 될 것인가. 그 영향은 과연 얼마나 이어지게 될 것인가.


그냥 우연히 무작위로 키보드를 두드리도록 세팅해놓은 컴퓨터에서  수십억년의 시간 동안 한 부분을 떼어 놓고 보니 세익스피어의 문장과 유사한 것이 발견되었다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의 어느것도 완벽하지 않다. 완결되어 있지 않다. 수많은 허점이 있고 나머지 짜투리가 있다. 그 가운데 유의미한 몇 가지만이 현실에 발현되어 존재한다. 인간의 게놈 가운데 그 역할이 밝혀진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수십억년이다.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 시간이다. 그 시간을 인간은 제대로 묻기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묻고 묻고 또 묻는다. 사유하고 사유하고 또 생각한다. 한바탕 물거품과 같다. 비로소 빅뱅을 통해서 우리가 아는 시간이 생겨났다. 공간이 생겨났다. 비로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간이 아직 없다면 공간을 인식할 수 없다. 시간이 아직 없다면 시간 역시 의식할 수 없다. 얼마나 큰가도 알 수 없다. 얼마나 작은가도 알 수 없다. 얼마나 오랜가도 당연히 알 수 없다.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찰라이기도 하고 영원이기도 하다. 다행히 인간의 의식은 제한적이나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다만 그 너머의 것까지 보기에는 인간의 의식은 한계가 있다. 우주란 과연 무엇인가. 그 우주에서 인간이 가지는 위치란 어떤 것인가. 인간이란 우주적인 규모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때로 허무하기도 하다. 히틀러의 학살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우주적 규모에서 본다면 그냥 아주 찰라의 원자핵보다도 작은 티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 자기가 한 만큼 당연히 대가를 받게 된다. 그만큼 각자의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그러나 당장 한국에 사는 자신에게 브라질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살인사건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어린 소녀를 강간한 범인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 얼마나 대단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 선도 악도 없다. 죄도 벌도 없다. 현상만이 존재한다. 의미는 인간이 만든다. 빅뱅 이후 태어난 시간과 공간처럼.


하기는 그래서 더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마저도 없다면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은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가. 그냥 인간의 의식이 인간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없이 단지 인간의 의식이 인간을 현실에 존재할 수 있게 한다. 존재할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하고 색을 칠한다.


논란의 해법은 간단하다. 우주적 규모에 있어서 지구의 위치는, 그리고 인간의 크기는. 우주씩이나 신경쓸 필요도 없다. 수십억년의 지구 가운데 모두가 이간에 신경쓸 필요도 없다. 단지 인간이 특별한 것이 문제다. 인간인 자신이 특별하다. 특별한 곳에서 왔다. 재미있다.

유비가 이릉에서 육손에게 크게 패한 것이 서기 221년,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 상심하여 백제성에 머물던 유비가 병을 잃고 사망한 뒤 불과 4년 만에 제갈량은 조위를 상대로 북벌을 시작한다. 이릉에서 상당한 인적자원을 잃고 유비라는 구심점까지 사라진 상태에서 제갈량은 불과 5년도 지나기 전에 조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여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조위를 상대로 무려 7년 동안 주도권을 잃지 않는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반전이었다.


사실 유비가 죽는 순간 촉한의 운명은 그것으로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촉한은 오로지 유비가 있었기에 세워질 수 있었던 나라였다. 고작 익주 하나였다. 변방이었고 인구도 물자도 모두 터무니없이 적었다. 혼자서 세력을 이루어 살아남기란 이미 조조가 한의 천하 대부분을 발아래 두고 있던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처음 장송도 익주 혼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기보다 제발로 조조의 품으로 들어가 그 보호를 받고자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유비의 존재가 그같은 장송의 결심마저 바뀌게 만들었다. 유비라면 촉이라는 변방을 기반으로 천하를 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대의명분이었다. 당장 유비 자신이 황제의 먼 친척이었고, 그동안 끊임없이 무모할 정도로 조조에 맞서버 부딪혀 오고 있었다. 원소마저 사라진 당시의 천하에서 패자가 되어 황제를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조조와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유비 한 사람 뿐이었다. 아직 한의 천하를 기억하고 조조에 반대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유비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당장은 조조의 지배 아래 있지만 아직 한의 천하를 잊지 못하고 있기에 기회만 되면 유비를 따라나설 이들이 천하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관우가 조인을 번성으로 몰아넣고 우금을 포로로 잡았을 때도 그래서 조조의 천하는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바로 그 유비가 있기 때문에 촉은 반조조의 중심인 것이고, 바로 그 유비가 있었기 때문에 한이 망하고 한을 이은 또다른 한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유비가 죽었는데 촉은 전처럼 하나의 나라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전례를 보더라도 유비라고 하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공백에는 당연한 수순처럼 분열이 뒤따랐다. 권력층이 분열하고, 혹은 통제를 잃은 관료층이 부정과 부패로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가만 내버려두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촉한은 망해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서촉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유비가 죽고 촉이 가장 큰 위기에 놓였을 때 오히려 조위가 그를 방치했던 이유였다. 굳이 자신들이 먼저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당장 말해야 할 나라에서 어느날 군대가 출병하더니 옹양주 일대를 한순간에 모두 차지하고 말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바로 그것이 제갈량이 대단한 점이다. 선주 유비의 고명을 받으며 유비가 가진 명분까지 모두 계승했다. 이엄의 숙청은 자칫 분열될 수 있는 촉한의 내부를 제갈량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로 묶기 위한 과정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주군 유비를 대신하는 존재가 된다. 그것을 모두에게 납득시킨다. 사실 제갈량이 촉의 승상이 되어 이룬 모든 업적보다 이것이 가장 대단했다. 오로지 유비에 의해 유비로 인해 세워진 촉이었기에 유비가 죽은 지금도 유비가 필요했다. 제갈량 자신이 유비가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해 모두의 동의를 받아낸다. 이후는 그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내정을 안정시키고, 그리고 군비를 키운다. 불과 4년이었다. 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북벌에 나서게 된 것이. 그러고도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군사적으로도 주도권을 잃지 않으면서 내정도 전혀 피폐해지지 않았다. 과로사했다는 말이 허투루들리지 않는 이유다.


군재가 부족하다지만 그것은 재상으로서의 중국역사상 한손에 꼽히는 능력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이지 당시로 한정했을 때결코 정확한 평가라 볼 수 없었다. 당장 당시 조위의 최고 명장이었던 장합이 제갈량의 함정에 빠져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조진을 이은 도독 사마의가 회전에서 제갈량에게 패한 뒤 다시는 모험을 않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지휘관인 한신이나 백기 같은 인물들도 그토록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에서 안정된 적을 상대로 그같은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었다. 모험을 시도하기에는 촉과 위의 현실적인 차이가 너무 절대적이었다.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위를 약화시켜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나 역시 만약 유비가 살아서 제갈량 대신 북벌에 나섰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재상으로서의 역량은 과연 소하와 장량에 비견할 수 있고, 군지휘관으로서도 한신과 비교해 그의 상대는 항우가 아닌 사마의였고 조위였다. 거의 유비로부터 물려받은 것 없이 빈손에서 시작했다. 마이너스였다. 유비에게 오로지 황실종친이라는 명분만이 있었듯이 제갈량에게도 유비의 고명대신이라는 명분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같은 초기족건을 충실히 활용하여 역사를 움직인 것은 개인의 역량이었다. 대단하다 여기는 부분이다. 어쩌면 소설보다도 실제의 제갈량은 더 대단하다. 바람을 부르지도 미래를 내다보지도 못해도 역사를 바꾼다. 심지어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장완과 비의, 그리고 강유까지 그가 남긴 인재들이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촉을 지탱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남기듯 제갈량은 그들을 남겼다. 삼국지 후반의 주인공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사를 이유로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유명한 이들은 다시 평가받고, 상대적으로 무명인 이들에 대해 다시 평가된다. 정사에 비해 연의의 제갈량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다. 과장된 것이지 모두가 거짓인 것은 아니다. 삼국지연의가 있기 전에도 제갈량은 명재상의 상징이었다. 당징 손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서진에서부터 제갈량의 평가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갈량과 같은 시대였다.

원래 포유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척추동물은 척추가 수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수평으로만 움직인다. 바다에서 헤엄치는 상어와 고래를 비교해 보면 더 분명해진다. 상어는 수직으로 난 꼬리지느러미를 좌우로 움직여 추진력을 얻는데 반면 고래는 수평으로 난 꼬리를 위아래를 움직여 추진력을 얻는다. 육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마뱀이든 악어든 땅위에서 달리려면 요란스러울 정도로 몸을 좌우로 비틀어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이든 바다든 땅이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속이야 크게 상관없지만 중력의 영향을 크게 받는 육지에서 이전처럼 척추를 좌우로 크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가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몸 전체를 움직여야 하니 에너지소모도 크고 그만큼 속도도 거의 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한다. 초기포유류가 돌연변이를 통해 척추를 수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면 그럴 수 없었던 초기공룡의 일부는 아예 상체를 일으켜서 척추를 움직이지 않고 두 뒷다리로만 이동하는 방법을 진화를 통해 획득하게 된다. 앞발까지 합친 만큼 거대해진 뒷다리로 일어서서 달리게 된다면 척추를 움직이느라 몸 전체를 비틀어야 하는 비효율과 비능률을 피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그러고 났더니 이제는 앞다리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같은 진화과정에서 뱀도 출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뱀의 진화는 먼저 앞다리의 퇴화에서 시작되었다. 아예 어깨뼈부터 앞다리가 사라지며 뒷다리까지 퇴화되어 몸에 묻히게 되었다. 땅위를 빠르게 달리는데 앞다리는 필요없다. 뒷다리만 비정상적으로 크고 강하게 진화하며 앞다리는 점차 작아져 흔적만 남게 된다. 티라노사우르스의 위압적인 모습과는 달리 앙증맞기까지 한 앞다리가 이를 보여준다. 과연 티라노사우르스에게 있어 앞다리란 어떤 의미였을까. 어떤 유의미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까. 


물론 앞다리가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았다. 뒷다리로만 서서 달리다 보면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 갑작스럽게 방향을 전환하거나 할 때 중심을 잡기도 어렵다. 그럴 때 새들은 날개를 펴서 균형을 맞춘다. 날개를 활짝 펴서 속도를 조절하고, 때로 날개를 빠르게 움직여 필요한 움직임을 더하기도 한다. 공룡의 앞다리에 깃털이 - 그것도 아주 큰 깃털이 자라기 시작한 것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다. 처음부터 날기 위한 도구로서 깃털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어린 새끼이거나 아니면 개체의 크기가 작을 때 깃털은 어느새 항온동물로 진화한 공룡의 체온을 보존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점차 깃털이 진화하며 퇴화된 공룡들의 앞다리에 역할을 부여하게 되었다. 공기의 저항을 이용하여 항력과 양력을 부여함으로써 육상에서 달릴 때 더 효과적으로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다. 단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익룡이 새의 직접적인 선조라 여기는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이처럼 처음 공룡의 깃털은 날기 위한 것보다 다른 목적을 위해 생겨났고 진화하고 있었다. 앞다리의 큰 깃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다리로서 기능을 잃은 앞다리가 커다란 깃털로 인해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게 되었다. 빠르게 달리면서 날개짓을 통해 얻게 된 양력은 이후 공룡들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었을 것이다. 더 크고 더 강력한 날개가 더 큰 양력을 부여한다. 어떤 공룡들은 여전히 땅위를 달리고 있지만 어떤 공룡들은 아예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다른 차원의 세계로 날아가게 되었다. 땅위를 잃은 대신 공룡들은 새로운 하늘의 지배자가 되었다.


물론 모든 공룡이 새가 된 것은 아니었다. 공룡 가운데서도 조반류만이 살아남아 새로 진화하고 있었다. 효율의 문제였다. 중생대 말 갑자기 밀어닥친 환경의 변화는 보다 새로운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종들에게만 생존의 기회를 남겨주었었다. 하늘을 날 수 있었고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빠른 수직이동이 가능했다. 육상에서는 새롭게 진화하기 시작한 포유류에 밀리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일부 새들은 땅위에서 빠르게 달리며 자신들의 영역을 지켰다. 단, 인간이 나타나기 전까지. 인간의 자연파괴는 아주 일찍부터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현재진행형이다.

아주 오래전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닭이나 타조와 같은 새들은 원래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날 수 있었는데 지상에서 오래 생활하는 사이 날개가 퇴화되어 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 배웠었던 것 같다. 원래 날개가 있는 모든 새들은 하늘을 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몇몇 종류의 새들은 하늘이 아닌 땅에서 생활하느라 땅위에서의 생활에 알맞게 진화하느라 날개가 그 역할을 잃은 것이다. 한 마디로 닭이든 타조든 결국 날지 못하는 새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로 - 그래봐야 최초의 가설이 나오고 거의 십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 원래 새들 가운데는 하늘을 나는 새가 있었고 땅위를 달리는 새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더 정확히 공룡은 멸종한 것이 아니었다. 공룡 가운데 조반류 일부는 살아남아 지금 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공룡 가운데 다수는 깃털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공룡 가운데서 앞발 사이에 피막이 생기며 하늘을 날 수 있던 익룡의 종류도 나타나게 되었다. 원래는 땅에서 생활하며 깃털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그 가운데 하늘을 날게 된 공룡이 있어 새는 하늘을 날게 된 것이었다.


퇴화가 아니었다. 당연히 날기 위해 깃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화석으로 남은 공룡 가운데 일부는 실제 타조처럼 생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보면 육상생활을 하는 조류 가운데 타조는 물론 도도새 등 상당히 체격이 큰 종들이 적지 않았던 점도 공룡과의 관계를 입증해주는 듯하다. 과거에는 그보다 더 컸지만 변화된 환경으로 인해 조금씩 거대조류는 사라지고 지금처럼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조류들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체구의 차이로 인해 오해하게 되었을 뿐 그마저도 오랜 진화의 결과였다.


아무튼 유전적으로 공룡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티라노사우루스와 유전적으로 가장 유사한 것이 닭이라 하는데, 문득 이해가 되었다. 수탉놈들 얼마나 성질이 사나운가. 그 성질머리에 덩치까지 컸다고 생각해 보라. 날지도 못하면서 동남아의 정글에서 무수한 포식자 사이에서 인간에 의해 사육되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알을 많이 낳았던 것도 있지만 다 큰 수탉의 경우 암컷과 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울 수 있는 용맹함이 있었다. 그 용맹함은 어쩌면 먼 조상인 티라노사우루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지금도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성격을 두고 수탉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진화에 있어 퇴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새가 날개를 가지고 날 수 있거나, 혹은 날개가 있는데도 날 수 없거나. 진화란 현상이다. 법칙이나 진리가 아니다. 하나의 정답이 없다. 무수한 오답 가운데 살아남은 답들이 정답이 되는 것이다. 먼 과거에는 날개없이 땅위를 지배하던 거대한 육상조류가 있었고, 지금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들이 생존에 더 적합하다. 착각하는 것이다. 진화란 진보다. 그런 것은 없다. 진화에 의지는 없다.

윈터펠 전투에서 존 스노우와 산사는 싸움에 임하는 동기도 목적도 자세도 모두 달랐었다. 존 스노우는 스타크의 성을 물려받지 못한 말 그대로 서자에 불과했다. 당연히 윈터펠을 상속할 권리 역시 롭의 유언장이 전해지지 않은 지금 그에게는 없었다. 윈터펠 전투에 참가할 당시 존 스노우는 단지 스타크 가문의 일원일 뿐이었으며, 윈터펠이 아닌 오로지 스타크를 위해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반면 산사는 윈터펠의 영주 에다드 스타크와 그의 아내 캐틀린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였다. 어쩌면 산사가 릭콘의 죽음을 방관하자고 주장한 것도 이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에다드와 캐틀린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 중 행방이 밝혀진 것은 산사와 릭콘 뿐이었기에, 만에 하나 릭콘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윈터펠을 수복하게 된다면 아들인 릭콘이 에다드의 정식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산사의 늑대는 너무 일찍 죽었다. 고향인 북부가 아닌 킹스랜드에 너무 물들어 버렸다. 꿈에서 깨고 그동안 보아온 것이 세르세이와 조프리, 그리고 리틀핑거였다. 탐욕과 모략과 살육에 익숙해 있다. 굶주린 개를 풀어 램지를 살해하는 장면은 그것을 보여주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스타크의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냉혹함과 잔인함을 보여준다. 윈터펠을 가지겠다. 자신이 윈터펠의 주인이 되겠다. 그를 위해 리틀핑거를 용서하고 그의 군대를 이용한다.


바로 그 차이였던 것이다. 윈터펠인가, 아니면 스타크인가. 윈터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스타크라는 이름을 위한 것인가. 그럴 자격조차 없었다. 그런 자각마저 없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릭콘의 위기를 보자마자 바로 말을 달려 뛰쳐나갔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릭콘을 구하려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롭과 에다드가 보여주었던 스타크의 모습이었다. 그에 비하면 산사는 자신의 영지를 되찾고자 하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냉정하고 치밀하며 그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존 스노우마저 도구로 사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베일의 기병이 램지군의 뒤를 치며 전세가 역전되자 존 스노우가 바로 몸을 일으켜 램지를 뒤쫓은 것도 무슨 거창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없었다. 그냥 어머니는 다르지만 자신의 형제이자 마지막 남은 스타크의 아들인 릭콘을 죽인 범인을 어떻게든 잡아 죽여야겠다는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슬플 정도로 초라하게 그는 램지를 뒤쫓아 성문을 부수고 다시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램지를 잡아 때려누인다. 무기가 아닌 맨주먹이라는 점이 그래서 무척 인상적이다. 무기란 권력이다. 하다못해 램지의 굶주린 개조차 권력이라는 수단이다. 램지를 내리치는 동안 존 스노우의 손까지 피로 물든다. 그냥 하나의 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아닌 존 스노우라는 개인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


바로 롭과 존의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태어나면서부터 롭은 스타크의 후계자였다. 적장자로서 아주 어렸을 적부터 스타크의 후계자로서 길러졌었다. 스타크와 윈터펠, 북부에 대한 고결한 책임과 의무는 그때부터 이미 롭과 하나였다. 그러나 존 스노우는 단지 에다드 스타크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어머니조차 알지 못하는 사생아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트워치에서도 그는 사실 그렇게 리더로서 책임을 느낄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나마 산사는 윈터펠의 상속자로서 이리저리 떠넘겨졌고 킹스랜드와 리틀핑거, 특히 램지로부터 직접 겪으며 배운 것들이 있었다. 스스로 군주이고자 하는 자와 군주라는 자각조차 없는 자와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개인이었다. 단지 존 스노우였다. 에다드 스타크와 이름도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으며, 롭과 산사와 아리아와 브랜과 릭콘의 형제였다. 그래서 형제를 위해 스타크를 위해 싸움에 나섰다. 아무런 공식적인 작위도 직함도 없이 그냥 스타크라는 이유만으로 싸움에 나선 것이었다. 다만 이 싸움의 결과 산사가 윈터펠을 차지한 이후가 중요할 듯하다.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고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아마 소설보다 드라마의 존 스노우가 훨씬 나이가 많을 것이다. 드라마가 시작되고 상당한 시일이 지났으니 더 나이가 들어 버렸다. 그래서 착각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존 스노우는 그냥 철부지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롭 스타크도 결국은 그런 미숙함이 자신의 죽음과 스타크의 파멸을 불러오고 말았었다. 도대체 작가는 소설을 언제나 끝내려는 건지. 나이도 적지 않고만. 가장 큰 불안요인이다. 성장하기에 아직 남은 시간이 충분하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에도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평생을 통틀어 단 한 번 싸움에서 패했었다. 바로 다케다 신겐과의 미카타가하라전투였었다. 당시 아직 젊었던 도쿡가와 이에야스는 무모했고 결국 그의 용맹은 전국최강이라 일컬어지던 다케다 신겐의 군대에 대부분의 병사와 가신들이 몰살당하는 참패로 이어졌다. 하지만 바로 이 싸움을 반면교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음흉할 정도로 진중하고 교활할 정도로 냉정한 책략가로 거듭난다.


한 편 이릉싸움에서 참패하며 모든 기반을 잃었던 유비도 있었다. 유비가 삼국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제까지의 다른 전쟁과는 달랐다. 그냥 신하였다. 탁군에서 처음 거병했을 때부터 함께였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도 관우와 장비는 자신을 주군으로 받드는 수많은 신하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신하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기반을 걸고 복수전을 벌였다. 오히려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기에 유비는 신화가 될 수 있었다. 설사 싸움에서 패했어도, 결국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어도, 그러나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이었다.


형제를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로 적진을 향해 달려간다. 어쩌면 그가 서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친형제였기에 산사는 릭쿤에 대해 냉정할 수 있었다.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에다드 스타크의 아들임을. 롭과 리쿤의 형제임을. 스노우가 아닌 스타크임을. 전투에서 입었던 피해는 오히려 그에 비하면 사소하닥고 할 수 있다. 명분을 가진 사람에게 사람은 모인다. 존 스노욱가 나이트워치에서 모두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정규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하나의 군을 이끌고 싸워본 경험이 없었다. 하나의 무리를 대표해 본 경험도 없었다. 무모했고 어리석었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낸다. 형제를 구학기 위해 목숨을 건다.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단지 형제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누가 진정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는가. 산사의 늑대가 일찍 죽은 것은 예언과 같다. 역시 인간과 역사에 정통하다.  

"여어, 일어났나?"

"어, 고든?"


아마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 사이 200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200년만에 만나는 고든의 얼굴은 15초 전에 보았던 그대로일 뿐이었다.


"이래서야 원 잔 것 같지도 않군."

"흐흐흐... 그렇지?"


무려 1091년에 걸친 원정이었다. 그러나 실제 원정에 자원한 승무원들이 인식하는 시간은 고작 일주일 정도에 불과했다. 200년마다 한 번씩 번갈아 깨워서 데이터로 추출한 의식의 상태를 점검하면 그때나 겨우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는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매번 데이터형태의 의식을 완벽하게 이식하기 위해서 이전의 몸과 똑같이 완벽하게 몸을 구성해서 준비해 놓기 때문에 어색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바로 어제, 아니 바로 의식이 추출되기 직전에서 눈만 잠시 감았다 뜬 듯한 기분이었다.


"별다른 건 없지?"

"그거야 에고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고..."

"하긴..."


사실 우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최소단위가 수십년이었다. 조금만 거리가 멀어지면 수백년은 기본으로 넘어갔다. 인간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다. 몸은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정신이 견지디 못했다. 


그래서 전쟁도 원래는 인간이 아닌 컴퓨터가 도맡아 했다. 인간이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원칙 때문이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원정을 위한 우주선에 탑승하고 있는 인원도 실제 전투원이라기보다는 전투가 끝난 뒤 점령하고 지배하는 행정적인 절차를 수행할 이들이었다. 기본적인 무기조차 한 번도 다루어 본 적 없는 이들이 그래서 절반을 넘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121년."

"금방이네?"

"네 번 째니까."

"아, 그렇지."

"자각이 없네."

"아아..."


주위를 둘러봐도 어차피 하얀 벽 말고 보이는 것은 없었다. 흔한 창문조차 없었다. 어차피 깨어있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하루 정도이니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장식 같은 것도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필요치 않았다. 바깥풍경을 보고 싶어도 수십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인 막막한 검은 공간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도 보통의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깨어나서 잠시 수다나 떨다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컴퓨터가 상태를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나면 다시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데이터로 돌아가 컴퓨터에 저장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미친 짓이야."

"당연히 미친 짓이지."

"도대체 나는 왜 이런 미친 짓에 자원한 거지?"

"인간이니까."

"아아..."


자원하면서도 항상 회의하고 있었다. 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무려 1091년이다. 그나마 공간도약이라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 넓은 우주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의 행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 정도 거리는 기본이었다. 고작 행성 하나에 자신의 깃발을 꽂기 위해 1091년이라는 막대한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것도 벌써 여섯번째였다.


"이번에는 몇 년이나 갈까?"

"뭐 몇 년이나 가겠냐?"

"이번엔 네가 바로 하게?"

"못할 게 뭐 있어?"


고든의 말처럼 그런 게 인간이다. 불가능인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것. 단지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떠나고 보는 것. 그래서 여섯번째다. 여섯번이나 그곳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는 떠났고, 그리고 그때마다 반란이 일어나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 사실이 본성에 전해지면 다시 자원자를 모아 원정군을 꾸리고 징벌을 위해 떠나보낸다.


"내가 반란을 일으켜도 그 사실이 본성으로 전해지기까지 최소 천 년 이상, 어차피 나는 죽고 없을 테고 후손이 있어도 천 년이 넘어가면 그다지 느낌이 없어. 아마 지금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최초의 반란군과 유전적으로 이어졌는가조차 확실치 않은 전혀 생소한 누군가일 걸? 어쩌면 그 사이 본성보다 기술이 더 발달해서 군사적으로 우리를 압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말야. 한 마디로 일단 진압에 성공한다면 말이겠지."

"재미있겠는데?"

"그러라고 자원한 거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우주선에 타고 있는 원정군 가운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꽤 상당할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최소 3세대는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본성에서 그곳까지 사절이 도착하는데도 기본으로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말이 본성이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국의 존재를 3대가 지나도록 여전히 의식하며 정체성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시간은 갈수록 짧아졌다. 이번 반란 역시 도착하고 기존의 반란군과 손잡고 반역을 선언함으로써 고작 천 년만에 다시 원정군을 꾸리게 된 경우였다. 천 년만에 반란사실이 전해졌고 다시 천 년에 걸쳐서 진압군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여튼 부지런한 녀석들이라니까."

"그러자고 자원한 거라구."

"쯧..."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천 년이다. 왕복해서 2천년이다. 굳이 본성을 위한다고 반란진압에 목숨을 걸어봐야 오고가고 결과가 보고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기본으로 필요하다. 살아서가 중요하지 죽고 나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미 오래전 과학이 발견해 낸 유일한 진실이었다. 본성에 충성하려 원정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시공의 거리를 의식하는 순간 거리만큼 희석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만 문제라면 과연 오로지 전쟁만을 위해 세팅된 우주선과 컴퓨터를 어떻게 제압하는가 하는 것이다. 말했듯 전쟁은 컴퓨터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알아서 할 일이었다.


"바쁘게들 살아. 바쁘게들."

"흐흐흐흐..."


아직 한 번의 잠이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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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영역은 교통과 통신에 비례한다. 한 마디로 힘을 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명령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에 하나 외적이 침입하거나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 바로 전력을 투입하여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늦지 않게 받을 수 있고 그에 대한 대응을 적절한 순간에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제국의 영토가 역사의 발전과 비례하여 더욱 넓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아주 고대에는 도보로 이동했다. 전차는 이동에 제약이 있었다. 말이 등장했다. 역참이 등장했다. 배는 말보다는 느리지만 지형의 제약도 크게 받지 않으면서 한 번에 더 많은 인원과 물자를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철도가 등장했다. 전신이 등장했다. 무선이 등장했다. 비행기가 음속을 넘어 하늘을 날아다녔다. 사실상 지금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영토는 지구 전체다. 굳이 고정된 국경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하루만에도 타국을 무력화시킬 수단을 미국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 수단들에 들어가는 비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상 많은 제국들이 끝내 무너지고 만 또 하나 이유였다. 제국에 한계는 존재한다. 제국이 가질 수 있는 영토의 한계는 명백히 존재한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무리해서라도 한계를 넘어서까지 영토를 넓히려 한다. 알렉산더는 그렇게 넓힌 영토를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현지화를 시도했었다. 당제국은 한계를 넘어선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절도사를 두었었다. 하지만 조금만 틈을 보이면 한계를 넘어서 획득한 영토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는 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노리는 창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었다. 한계를 넘어선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비용이 들어가는데 정작 조금만 약점을 보여도 오히려 반란을 걱정해야만 했다. 제국의 최전성기는 그래서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는 지점이라 보아도 좋았다.


과연 우주에서도 지구에서와 같은 전쟁은 일어날 것인가. 건담에서와 같은 태양계 내에서의 전쟁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아직까지 인간의 지식으로 가능한 한계다. 은하계의 지름만 무려 10만 광년이다. 빛의 속도로 10만년은 날아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거리라는 뜻이다. 이 넓은 우주에 인간이 자리잡고 살아갈만한 조건의 행성은 몇 개나 될까? 그런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소설에서처럼 광속을 뛰어넘어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시공간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한계는 존재한다. 극단이기는 하지만 한 번 원정을 떠나는데도 수십수백년이 걸린다. 겨우 전쟁에서 승리해서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반란이 일어나면 알려지는데만 다시 수 세대가 걸린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데도 인간이 우주에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가능할까?


만일 외계인이 실제 존재하더라도 많은 SF에서 묘사하는 것 같은 그런 침략은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UFO가 실제 외계인의 우주선이라면 압도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지구와 지구인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익이 없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지구를 침략해서 지구를 정복하면 무엇하는가. 그래서 무언가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이 있으니 그런 수고도 감수하는 것이다. 설사 생기는 것이 있어도 남는 것이 있어야 비용이든 시간이든 투자할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역대의 모든 제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먼 미래도 역시 멍청한 짓거리를 반복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 항상 합리만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항상 합리만을 쫓았다면 지금의 인류의 문명은 없다.


바보짓이다. 한 마디로. 우주에서의 전쟁이란. 우주를 무대로 벌이는 정복이란. 하지만 원래 인간이라고 하는 자체가 바보들이다.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같은 바보짓을 반복한다. 이것이거나 아니면 이것이거나. 새벽의 망상이다. 오지 않을 먼 미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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