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많은 일본인, 혹은 그에 동조하는 한국인들이 그리 주장하고 있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일본에서도 2군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일본의 진짜 주력은 일본 본토에 남은 채 조선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만일 이들까지 조선으로 갔다면 조선은 망했을 것이다. 조선은 단지 일본의 2류 무장들에게도 고전한 한심한 나라였다. 이순신도 고작 그런 이들만을 상대로 공을 세운 정도에 불과했다. 과연 그럴까?


역사상 일본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관서였다. 관동이 관서보다 더 중요해진 것은 에도시대 이후로 불과 몇 백 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일본의 경제와 문화와 정치와 군사의 중심은 쿄토의 서쪽 관서지방에 있었다. 일찌감치 포르투갈을 통해 조총을 받아들인 것도 역시 서쪽의 큐슈 다네가시마였었다. 워낙 전국을 통일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이고, 그의 가신이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마침내 바쿠후가 열렸기에 관동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전국시대 중요한 싸움들 역시 거의 관서지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기후를 근거로 전국의 주도권을 잡기 전까지 가장 큰 세력도 모두 시마즈, 오우치, 오토모, 모리 등 서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다케다나 우에스기나 이름만 높았지 고작 몇 만 명 동원하는 것도 버거운 시골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인식의 오류란 오로지 결과만으로 그 과정과 원인까지 정의하려 할 때 발생하기 쉽다. 결국 전국을 제패한 최후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 전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였고, 그 전에는 오다 노부나가였었다. 모두 관동에 속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이들이 전국의 주도권을 쥐기까지 싸운 상대들 역시 관동의 인물들이었다. 실제 전국을 통일했다고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싸우고 승리한 상대들 역시 다케다와 우에스기, 사이토, 롯가쿠, 아사쿠라, 아사이 등 미요시를 제외하고 동국의 다이묘들이 거의 전부였다. 모리와는 말년에 사소하게 부딪혔을 직접 전력을 기울여 싸우거나 한 적이 없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탁월한 정치력으로 아케치, 시바타. 그리고 호조만을 직접 상대했을 뿐 모리 등 서국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승리만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도쿠가와가 전국을 통일하게 된 세키가하라는 동국과 서국이 서로 뒤섞여 있었으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오로지 승자인 오다, 토요토미, 도쿠가와만을 기준으로 나머지 인물들도 평가해야 했기에 아무래도 서국의 - 그것도 패자가 된 이들에 대한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바로 어떤 멍청이들에게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코에이의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이었다. 직접 싸운 적도 없는 이들이 이런저런 - 그나마 공식적인 사료도 아닌 기록들을 근거로 능력이 계량되어지고 수치로 정의된다. 단지 주인공이 되는 이들과 직접 싸우고 훌륭히 싸웠기에 높은 수지를 받고, 주인공들과 직접 부딪힌 적이 없었기에 간접적인 비교 결과 객관이라는 이름 아래 낮은 수치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그런 건 역사가 아니다. 살아남는자가 강하다지만 살아남았다고 모두가 강한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역사에 무지하게 알아서 빠지고 마는 함정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었는가. 제대로 조선에 상륙한 병사들에게 보급이 닿지 않고 있었다. 먹을 쌀과 필요한 최소한의 물자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겠는가. 세키가하라 싸움의 승패를 결정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순신이었다 말하는 사람마저 있는 이유다. 조선과의 전쟁에서 그토록 많은 인력과 물자를 소모하고도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가문은 그리 많지 않았다. 큐슈의 패자 시마즈마저 세키가하라에는 그저 명목만 세울 뿐인 병력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보유한 모든 병력과 물자를 전쟁에 쏟아붓는 것은 게임에서만 가능하다. 현실의 전쟁은 그보다 더 복잡하고 그래서 더 가혹하다.


쵸쇼카베다 나베시마, 다치바나 같은 이름들이 그리 가벼운 이름들이 아니다. 모두 서국의 주력으로 조선에 출병했던 이들이다. 시마즈와 모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초전에서의 놀라운 승리와 달리 평양성전투 이후 육전에서마저 번번히 패퇴하거나 고전을 피하지 못했다. 보급에 한계를 느끼고 해안에 틀어박혀 농성했던 정유재란의 마지막이 딱 일본이 가진 한계였다. 물론 피해가 더 컸던 것은 조선이 분명하지만. 역사는 냉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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