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 이미 조선에 의병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이항복 등 당시 조선의 대신들이 의병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당장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그해 1592년 7월에 유곡찰방에 임명되었고, 1차 진주성 싸움 당시 김시민을 외곽에서 도왔던 10월에는 조방장, 이듬해에는 무려 성주목사까지 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홍의장군 곽재우의 군대는 그해 7월부터 관리가 이끄는 관군이었다.


원래 학봉 김성일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로 임명받아 경상우도로 내려갔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무너진 행정조직을 복구한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무하고, 관리가 없는 곳은 관리를 임명하면서, 스스로 일어난 의병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관군에 편입하도록 했었다. 흔히 아는 사실과는 달리 그래서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에 경상우도는 빠르게 수복되어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진주성 싸움을 지휘한 김시민에게 목사를 제수하도록 한 것도 김성일이고 보면 그 공과에 대해서는 따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과연 의병이란 그저 민초들에 지나지 않았는가. 갑작스럽게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며 경상우수사 원균과 좌수사 박홍은 싸우지도 않고 배와 물자를 불태우고 바로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남은 관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제승방략에 의해 이일이 경상도로 내려왔을 때도 미처 관군이 모이기도 전에 일본군이 공격해 온 탓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었다. 그러면 그때도 남은 관군들은 모두 일본군에 죽임을 당했던 것일까? 칠천량 싸움에서도 정작 대부분의 조선수군은 싸우기도 전에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 모든 배가 불타고 수군이 죽어나갔으면 명량에서의 싸움 이후 그렇게 빨리 조선수군이 재건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조선의 대단한 점이다. 군대는 흩어졌지만 병사들은 남았다. 지휘관마저 도망친 뒤에도 병사들은 남아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병사들의 싸움을 대신 지휘했던 것이 이른바 의병장들이었던 것이다. 군사경험이라고는 없는 의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군사지식도 일천한 양반출신 의병장들을 도와 전술을 구상하고 실제 병력을 운용했다. 싸움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병사들은 이후 조선의 행정조직이 복구되자 바로 관군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지휘광이 죽거나 도망치고 주위의 고을과 백성마저 적이 온통 점령한 상황에서도 처음에는 관군으로, 그 다음에는 의병으로, 다시 관군으로 마지막까지 싸웠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단지 조선을 폄훼하려는 시도가 굳이 그들을 관군과 분리해서 의병이라 이름짓게 만들었을 뿐.


역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 실제 싸움에서도 지휘관이 혼자서 모든 궁리를 끝내고 병사들에게 이리하라 저리하라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일까. 삼국지의 조인이나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쳐들어왔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혼자서 싸움을 잘해서 그 많은 전공을 세웠던 것이었을까. 물론 지휘관 자신이 뛰어나서 참모진마저 주도하여 이끄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전근대사회에서도 지휘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을 갖춘 참모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판단과 결정은 지휘관이 내리더라도 그를 돕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휘하에 있는 참모들이었던 것이다. 의병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그 이름을 의병장들이 대신하고 있을 뿐.


그러면 다시 어째서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의병의 활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가. 오히려 대부분의 의병들이 관군으로 편입된 뒤에도 관직을 받지 못하고 의병으로 남아 있는 경우란 어떤 경우이겠는가. 이미 조정의 명령을 받기를 거부하거나 스스로 세력을 이루어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는 양반이기보다 양인 이하의 신분인 경우가 많았을 테고. 개인적으로 이런 의병을 소재로 드라마를 한 번 만들어 보았으면 싶다. 비천한 신분으로 임금도 조정도 믿지 못하여 스스로 무장하고 일어섰으나 결국 반역자로 이름없이 스러져간 이들에 대해서.


의병의 활약은 전쟁이 시작되고 초기 몇 달 간 잠깐 집중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문부도 의병이었다. 엄연히 조정으로부터 받은 관직까지 있던 무관이었지만 함경도가 모두 일본군의 지배아래 들어가며 군도 행정조직도 사라지자 의병이 되어 비공식적인 투쟁을 주도했다. 당시 정문부가 세운 업적들이 나중에야 알려지게 된 이유였다. 모이면 관군이고 흩어지면 의병이다. 초유의 국난에도 조선을 지탱한 진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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