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자 좋아했다며? 젊고 예쁜 여비서라 그런 거라면서? 그런데 평균연령 36살이면, 더구나 자칭 피해자의 나이가 20대인데 어디까지 나이가 올라가는 것일까? 그냥 실력과 업무평가 기준으로 아무나 뽑았구만. 그런데도 문제...

 

결론은 아무 일 없으려면 남자의 경우 비서는 여자로 안 쓰는 것이 답이란 것이다. 평균연령 36살이면 정년 60세 기준으로 부장급 아래로는 다 포함일 텐데, 야 이거 진짜 누구를 데려다 써도 다 문제가 될 만하다. 

 

더이상 여자 비서는 없다. 아니 다른 업무에서도 혹시 모르니 여자는 배제하는 것이 낫겠다. 여직원들은 여자 상사 아래서만 일을 하게. 아주 제대로 미친 년들이란 생각이다. 기자가 기사로 쓰니 문제가 된다. 언론이 언론한다.

바로 작년까지 나 또한 여성할당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미투가 처음 시작되던 무렵에는 어렵게 용기를 낸 여성들의 고발에 남들처럼 크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떠한가? 물론 한 번에 바뀐 것은 아니다. 그동안 여성주의자들이 하는 짓거리 보면서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인권보다도 위에 있다며 마음대로 갖다 붙이는 성인지감수성을 보면서도 사람으로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번을 계기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성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사회의 해악이며 죄악이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한때 한겨레나 경향의 기사를 읽고 노무현을 욕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겨레나 경향이 진보언론이라 여겼었고 기자들도 조중동과는 양심과 사명감에서 남다른 참기자들이라 믿었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가? 지금 와서 한겨레와 경향이 조중동이나 국문세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의문스럽기만 할 뿐이다. 방향만 다를 뿐 이념과 지향이 다르다고 서로 토론을 통해 경쟁하며 여론을 만들기보다 그냥 다른 관점에서 민주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하는 하나에만 힘을 모으고 있을 뿐이다. 최저임금을 올리지 말라고 주장하는 언론과 맞서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기보다 최저임금을 자기들 뜻대로 올리지 않았다고 정부와 여당을 욕하는 기사들만 열심히 써대는 언론인 것이다. 뻔히 취재까지 하고 오보인 것을 알면서도 조중동의 보도를 그대로 따라갔던 조국사태와 정의연 논란을 보라. 익성실소유주 의혹은 한겨레를 통해서 가장 크게 제기되었던 것이었다. 한겨레가 그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원래 조중동은 언론취급도 안했고, 조중동 기자것들은 사람취급도 안했다. 그런데 한겨레와 경향도 그와 다르지 않다. KBS 역시 한때 매일같이 챙겨보며 판단의 근거로 삼았던 시절이 무색하게 인터뷰를 왜곡하고, 검언유착을 가리기 위해 자발적인 오보를 내는 등 전혀 다르지 않은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취재도 안하고, 설사 취재를 했더라도 다른 언론과 보조를 맞추느라 자기들이 취재한 사실조차 무시하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타인에 상처가 될 기사를 집단으로 쏟아내기만 한다. 이런 놈들은 과연 언론이라고 기자라고 인정하고 예우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 좋다는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 이런 놈들에게 적용되면 얼마나 사회에 해악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놈들을 위해서 언론의 자유는 지켜져야 하는 것인가.

 

역시 최근 몇 년 크게 바뀐 것들 가운데 하나다. 한 때 언론의 자유가 무엇보다 소중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론이 자유롭게 자기들이 취재한 바를 바탕으로 기사를 쓸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 여기던 시절이었었다. 언론의 정상화를 위한 투쟁에 발벗고 지지하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었다. 하지만 지금 언론의 자유 같은 건 밤새 술마시고 토한 위에 우글거리며 달라붙은 파리떼나 다름없는 그저 흉물스런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똑같은 소리를 서로 베껴쓰느라 바쁜 것들인데 굳이 언론사가 몇 개 씩이나 필요한가 하는 생각까지 가지게 된다. 그냥 모든 언론사 통폐합해서 정부에서 운영해도 지금보다 더 크게 나빠질 것은 없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손석희를 제외하고 다른 보도를 내보내는 언론이 있기는 했었는가.

 

물론 어떤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나도 전혀 변함없이 일관적이기는 하다. 한겨레가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을 반성한다고 했던 것이 한명숙 전총리의 기획수사를 그대로 받아쓰며 동조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는 것이다. 조국이나 윤미향이나 이번에 박원순이나 역시 한겨레의 행동패턴은 당시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정확히 언론이다. 그러나 당시는 오해했다 하더라도 진실을 알고 나서 그런 언론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것이 그리 잘못된 일일 것인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은 커녕 그냥 벌레새끼들일 뿐이었다. 차라리 밟아 짓이겨 버리는 쪽이 세상을 위해 좀 더 유익한 일을 터였다. 그런데 전처럼 언론을 존중하고 예우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원래 유명한 사상가나 저술가들도 생애주기에 따라 주장하는 것이나 쓰는 내용들이 약간씩 다 다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험이 다르면 생각도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지면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모두 달라지게 되어 있다. 결혼하기 전과 자식을 낳은 뒤와 자식마저 먼저 떠나보낸 뒤의 생각이나 글이 아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썼던 글들과 지금 행동이 맞지 않는다? 과거 했던 말들과 지금 하는 말이 서로 다르다? 그래서 뭐? 그냥 달라졌나 보지.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법에 과거와 말이 바뀌면 처벌한다는 조항 같은 건 없다. 대신 거짓된 보도로 당사자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고 피해를 입혔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은 거의 인류보편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어차피 이제와서 말 바꿨다고 더이상 실추될 명예도 없을 텐데 말바꿨다고 비난을 듣는 대신 법적인 책임을 지게 한다면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다.

 

웃기는 것이다. 그래서 조국 전장관이 과거 언론에 대해 했던 말과 지금 고소하는 행동이 다르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비난할 만큼 언론들이 조국 전장관에게 최소한의 인격이나 명예 같은 것을 남겨두기나 했느냐는 것이다. 지금도 태연히 조국 전장관과 그 가족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인 양 조롱하고 비하하며 모욕하는 것이 바로 그들 언론들인 것이다. 새삼 말바꾼 사실 하나 더해진다고 조국 전장관이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기자들에게만 남아 있다. 잘만 모으면 원래 있던 재산에 더해 강남 건물주는 물론 따님 포르쉐도 모델별로 장만해 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기사만 무려 100만 건이 넘었으니 죄다 받아낸다면 재계서열까지 바뀌게 될 지도.

 

언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병신들인 것인가. 진중권은 진짜 여전히 병신인 것이다. 새삼 말바꿨네 뭐네 하는 소리가 타격이 되기에는 너무 막다른 상황까지 내몰린 뒤란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론 조국 전장관 입장에서도 일관된 자신만의 입장이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길고 복잡하니까. 그냥 자신들이 놓인 처지를 일깨우는 정도로 그치려 한다. 말을 바꿨어도 처벌받는 것은 기자들 자신이다. 말바꿨다고 비난을 들어도 배상액을 물어내야 하는 것은 기자들 자신들인 것이다. 기자 너희들은 그냥 욕해라. 조국 전장관은 너희를 처벌하고 배상금을 챙기면 그만일 테니. 진중권도 걸리는 게 꽤 있을 텐데.

 

신이 나서 지켜본다. 물론 요즘 기자것들은 돈이 많다. 한겨레 경향마저 부동산 정책에 저리 미쳐 날뛰며 비판기사를 내는 이유일 것이다. 십시일반으로 도와주라. 그 고통을 겪었는데 조국 전장관도 번듯하게 건물 몇 채 장만해야 하지 않겠는가. 언론사를 망하게 할 수 없다면 기자라도 망하게 할 밖에. 아무튼 윈윈일 것이다. 기자들은 말바꿨다 비난하고, 조국 전장관은 기자들로부터 받아내서 한 재산 만들고. 그리고 조국 전장관을 본받아서 고소고발로 대가를 치르게 할 사람들이 계속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언론을 위한 시간이다. 기자들의 시간이다.

작년 기자간담회에서 조국 전장관이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호소한 바 있었을 것이다. 아직 20대인 자기 딸이 혼자서 사는 오피스텔에 건장한 남성 기자들 몇이 밤늦게 찾아와서 취재한답시고 문을 두드리는데 제벌 그것만은 말아달라. 당연히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도 밤늦게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하면 마음이 두렵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출연한 여성 기자에게 그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니 대답이 재미있었다.

 

"기자라면 취재를 위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서에게 속옷심부름 시켰다고 저리 미쳐 날뛰는 여자 기자란 년들이 지껄인 소리들인 것이다. 낮잠 자는 것 깨우게 했다고, 혈압 재도록 시켰다고, 기분 맞춰주라 주위에서 시켰다고 저리 돌아서 날뛰는 기자란 년들이 그따위 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조국 딸이어서. 그리고 기자라서. 아마 속옷심부름도 남자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그리 한 것이라면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며 웃어 넘기지 않을까. 여자 혼자 사는 집 문을 밤늦게 떼로 몰려 찾아가 두드리는 것과 속옷심부름 가운데 어느 쪽이 당사자 입장에서 더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울 것인가.

 

기자란 년들의 이른바 성인지감수성이란 것에 대해 전혀 공감도 동의도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자기들이 스스로 고백했는데. 기자는 예외다. 취재대상도 예외다. 그러니까 장자연씨의 죽음에 대해서 언론사에도 여자 기자들이 있을 텐데도 정작 지금처럼 크게 목소리를 내는 경우를 보지 못한 것이다. 김학의는 어떨까? 서지현 검사는? 그나마 김지은 씨는 대상이 안희정이라 마음놓고 여성주의를 부르짖을 수 있었다. 그런게 바로 언론의 여성주의라는 것이다.

 

새삼 당시의 기억의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금도 라디오 듣다 보면 그때 그 기자가 나와서 여성 어쩌고 잘도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 번 그 집 문을 밤 늦게 덩치도 큰 남자들과 함께 떼거지로 찾아가 두들겨 보고 싶다. 혼자 살든 가족이랑 살든 상관없다. 아마 신고도 안하겠지. 나 역시 취재를 위해 하는 일인데. 박원순 시장이 기자가 아니라 저 지랄들이란 것이다. 이소정이라는 KBS 앵커 역시. 기자였어도 저들은 저리 용감하게 여성을 부르짖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더욱 여성주의를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물런 여성과 관련한 모든 이슈들에 대해서도 최소한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성들 자신이 타인의 어려움을, 심지어 같은 여성의 억울함마저 외면하고 있으니까. 여성 스스로 문제라 여기지 않는데 남성들이 나서서 거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박원순 시장의 경우에서 보듯 어차피 뒤도 좋지 못하다. 여성 문제는 여성들끼리. 아 그조차도 못되는가? 여성주의란 참 버러지같다.

이재명이 아주 정확하게 봤었다. 맞다. 사람 아닌 것들을 사람이라 여기고 대하면 오히려 더 크게 당하는 법이다. 여성주의자들을 사람이라 여기고 동지라 여겼던 박원순 시장이 죽어서까지 그 가족마저 짓밟고 짓이기려 드는 당장의 모습들을 보라. 여성주의자는 사람이 아니다. 짐승도 아닌 그냥 벌레다. 그러면 괜히 뒤통수맞고 억울할 일도 없어진다.

 

작년 이른바 조국 사태의 첫째 원인은 조국 전장관이나 청와대에서 상황을 너무 낙관하고 느긋하게 대처한 것에 있었다. 나경원을 보라. 바로 언론보도가 불리하게 나오니 고소고발부터 들어가지 않던가. 나경원이 언론사와 기자를 고소하니 바로 기사들이 사라진다. 진짜 작심하고 대응에 나서면 언론의 자유고 나발이고 바로 꼬리내리고 입다무는 것이 언론의 속성이란 것이다. 언론의 자유란 만만한 대상을 만났을 때 마음껏 찧고 까불 수 있는 자유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언론의 보도가 어떠했었는가. 되도 않는 근거들로 정부를 공격하는 의혹보도를 쏟아내는 한겨레가 당시 정부들을 상대로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가. 박근혜 앞에서 두 손 곱게 모으고 그저 받아쓰기만 하던 기자것들 가운데는 그 잘난 자칭 진보언론 기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 떨어졌다고 저리 좋아 날뛰고 있는 것이다. 강희철이 자백하지 않았는가. 이명박근혜 시절이 차라리 더 좋았다고.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정부보다 언론의 자유따위 화장실 변기에 넣고 내려버린 정부를 더 좋아하는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어차피 언론의 자유따위 언론이 진정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준다고 언론이 좋아해주지 않는다. 언론의 자유를 아무리 존중해준다고 언론이 마주 존중해주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이 대상을 존중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단 하나, 공포 뿐이다. 이명박근혜가 그랬던 것처럼, 혹은 홍준표나 나경원이 그랬던 것처럼 힘으로 찍어누르거나 불이익을 주어 이래서는 안된다는 기억을 본능레벨에 각인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감히 보수정당과 정치인들을 비판할 때는 민주당을 대할 때처럼 무례하고 무도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언론의 보도만 보면 민주당 정치인들은 지나가다가도 한 번 씩 걷어차 주어야 하는 비루먹은 똥개들이고, 미래통합당 정치인들은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존귀하신 분들이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이해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아마 조국 전장관도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마지막으로 몇 번 더 경고를 했었던 모양이다. 제발 기계적 중립이라도 지켜달라. 재판정에서 나온 발언들을 균형있게 사실 그대로만 다루어 주기라도 해 달라. 그런데 개무시했지. 아마 믿었을 것이다. 민주진영 인사이니 감히 언론을 상대로 언론탄압이라 부를 만한 폭압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은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미래통합당은 고소당할까봐 무서워서라도 기사를 쓸 때 조심 또 조심해야 하지만 민주당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정부에 대한 오보조차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내도 정부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선을 넘은 순간 조국 전장관도 자신의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게 되었다. 저놈들은 좋은 말로 달래서 들을 놈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동안 보수진영에서 언론을 길들이던 방법 그대로를 그대로 따라하려 한다. 정당한 권리이기도 하다. 더이상 장관도 뭣도 아니니 언론이 뭐라 반발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자신의 일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일반인인 가족을 앞세운 조국 전장관의 행동에 언론이 더이상 무어라 할 말이 있을 것인가. 그동안 자기들 마음대로 기사를 써 왔으니 그 대가를 치를 때가 돌아 온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신나게 기사를 썼던 만큼 그에 대한 대가는 당사자였던 조국 전장관이 직접 청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조국 전장관만은 아닐 것이다. 청와대 역시 한겨레의 오보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을 예고한 바 있었다. 하긴 운좋게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게 된 얼치기들 제외하고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이들 가운데 언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드물 것이다. 김해영이나 전재수 같은 찌그래기들이야 민주당이 언론에 의해 혹독하게 다루어질 때 원내에 있지도 않았었다. 그로 인해 억울하고 원통한 일들을 수도 없이 겪는 동안에도 그들은 원외에서 구경하는 입장에 머물러 있었다. 최소한 기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놈들은 인간으로서 존중할만한 자격조차 없는 버러지 새끼들이란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죄다 잡아다 동해바다 한 복판에 헤엄쳐 돌아오라고 던져버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으니 가능한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더이상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올가미를 죄려 한다.

 

당장은 그동안의 기사들에 대한 법적대응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로, 그래서 더이상 두려워서라도 그런 식으로 막나가는 기사를 쓸 수 없도록. 세상에 가장 쓸데없는 것이 언론의 자유라는 사실을 더욱 새삼스럽게 깨닫게 만드는 언론들이란 것이다. 저런 버러지 새끼들에게 언론의 자유 같은 걸 주어봐야 세상에 해악만 더 커지는 것이다. 언론정상화? 내가 그래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KBS가 저 지랄 할 것을 알고 아예 파업하던 당시에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YTN놈들이 설마 바뀔 것이라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이 있기는 하던가. 기자를 기자답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공포고 억압이고 강제 뿐이란 것이다. 슬프지만 현실이고 사실이다.

 

아무튼 조국 전장관도 이제는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훨씬 전부터 깨달았을 테지만 그래도 신사라 행동까지는 조금 늦었다. 속옷심부름도 성추행이라는 버러지들이 오밤중에 여자 혼자 사는 오피스텔 찾아가서 남자 여럿이 문두들기는 행위조차 그럴 수 있다고 변호한다. 그것도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기자들이 하는 소리다. 지금 열심히 박원순 욕하면서 2차 가해를 떠드는 것들이 같은 기자들의 행동에는 항상 우호적이다. 만일 기자가 아닌 다른 남성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런데도 그런 기자들을 존중하며 신사적으로 대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버러지는 그냥 버러지다. 모기가 앵앵 거리면 일단 때려잡고 보는 것이다. 차라리 민정수석이던 시절 그런 사실을 알고 대처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언론은 일단 때려잡고 보는 것이다. 기자것들은 그냥 조져버리고 시작하는 것이다. 청와대와 민주당 역시 이미 깨닫고 있을 것이다. 언론은 악이다. 원래부터 그랬다. 진실이며 명제다.

내가 586선배들을 보면 하는 말이 있다. 민주화운동 같은 것 왜 하셨어요? 민주주의 따위 개나 주라 그러고, 오히려 민주화운동 했다는 이유만으로 남들처럼 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며 비난하고 떠밀어내려고만 하는 사회분위기를 보면서. 남들처럼 돈 벌어서 자식 좋은 대학 보내고, 유학도 보내고, 자기도 건물 사서 풍요로운 노후를 보내려 하면 늬들이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닌가. 그나마 내가 만날 수 있는 선배들이라 해봐야 그런 논란의 대상조차 못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박원순 시장이 유독 죽어서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여성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받는 피해와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면 그냥 정계은퇴하고 눈앞에서 사라지는 정도로도 오히려 동정론이 나올 것이 박원순 시장이기 때문에 죽는 것조차 2차 가해라며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까지 난도질하려 한다. 아니 아예 유가족이나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마저 연좌하여 단죄하려 한다. 거의 영락제가 했다던 10족멸을 보는 듯하다. 사상검증까지 한다. 그래서 박원순을 욕하겠는가? 아닌가?

 

그래서 드는 생각인 것이다. 박원순 시장이 쓸데없이 여성들을 돕겠다고 나서지 않고 남들처럼 변호사해서 열심히 돈이나 벌면서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비난을 들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시민운동을 하더라도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입 한 번 벙긋하지 않고 아예 모르는 일인 양 여겼더라면 여성주의자들도 죽어서까지 저리 가혹하게 책임을 물으려 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오로지 박원순이기 때문에 고소당한 순간 이미 유죄가 확정되고, 죽음까지도 더한 비난의 이유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서 안된다는 것인가.

 

나경원의 아들이 무슨 돈으로 유학을 갔는가 궁금해 하는 대중이나 언론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나경원의 아들이 어떻게 대학에 갔는가 일부러 파헤치려는 언론들도 없다. 장제원이나 홍정욱의 자식들이 어떻게 법의 선처 아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가 문제제기하는 언론들 역시 아예 없다시피 하다. 조국 전장관에 대해서는 저리 분노하는 정의당이 이들에 대해 공개적인 논평을 내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왜? 정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정의롭게 살려 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남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그조차도 죄가 된다. 반대편에서는 그보다 더 한 일이 있어도 절대 죄가 될 수 없다. 진중권 나부랭이들 떠드는 소리들을 보라.

 

그런 점에서 나 역시 박원순 시장이 잘못 살았다 생각한다. 여성의 인권따위 애써 신경쓰며 도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굴레가 되고 족쇄가 되어 떠나는 마지막 길까지 편치 못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특히 남성이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은 진짜 쓸데 없는 일이고 자기 인생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 일이다. 많은 것을 각오해야 한다. 아니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여성주의란 것이다. 새삼스런 깨달음이다.

 

정의롭게 살려 했기에 더 가혹해지고, 정의롭게 살아왔기에 더 잔인해지며,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에 더 관대해지는 사회. 그러면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자기 자식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과 언론들이. 지식인이란 것들이. 더럽게 살아라. 추악하게 살아라.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만 살아라. 다행인 것은 그 수가 절대적인 정도까지는 아니란 것이다. 그래도 조금 줄었다. 얼마나 더 죽어야 더 줄어들까. 개같은 것이다.

사실 사주가 있는 기성언론들처럼 여성주의와 거리가 먼 존재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마초 그 자체인 검찰조직이 여성주의와 가까울 수 없다. 성폭행마저 자체적으로 은폐하고 넘어가려 한 집단이 바로 검찰이란 것이다. 여성검사들을 대상으로 수도 없이 성범죄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그런 사실들이 외부로 거의 알려지고 있지조차 않다. 사주가 있는 기성언론들은 여성에 대한 가해자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과연 여성주의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들을 비판하고 있었는가. 아니 보수정당의 경우만 해도 수많은 성추문이 있었지만 그 태도는 지금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거의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나서서 조금의 이론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며 2차 가해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검찰과 언론과 협력하고 있는 지금에 비해 보수정당이나 언론, 검찰과 관련한 이슈에서는 단지 당사자만 조금 비판하고 마는 정도가 전부였었다. 그나마도 당이나 조직에서 조치를 약속하면 거의 바로 인정하고 물러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보수정당에서 성추문이 일어났다고 대통령에게 입장표명을 요구하거나, 혹은 검찰내부에서 성범죄가 일어났다고 검찰총장의 사과까지 요구한 경우가 과연 있었는가. 장자연씨의 경우도 엄연히 가해자 가운데 보수언론 관계자가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왜이겠는가?

 

자칭 진보들이 보수진영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민주진영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일관하는 이유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는 그래도 된다. 왜? 기득권이니까. 저들이야 말로 지금 우리 사회의 정통성있는 지배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규준이 되고 그 규준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저들의 동의와 허락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감히 저들을 거스르려 해서는 안된다. 반면 민주진영은 정통성없는 찬탈자에 지나지 않는다. 찬탈자이기에 더욱 엄격한 규준을 적용하여 저들의 자격을 심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왕의 아들은 단지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자격 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지만 왕의 아들이 아니라면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시험까지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보수권력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가며 관대하지만 민주정부에 대해서는 더 엄격하게 자격을 시험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보수권력과 입장을 같이 하며 그들로부터 인정받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당장 진중권만 하더라도 언제 진중권이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아 본 적 있었는가. 거의 모든 언론이 진중권의 말 한 마디를 받아쓰기 위해 그의 SNS에 상주하고 있을 정도다. 심지어 자사의 이름을 건 기사와 사설에서조차 진중권의 말들을 인용해서 근거로 삼고 있을 정도란 것이다. 진보정당이 가장 크게 높은 대우를 받을 때도 바로 민주정부를 공격하는 대열에 함께 하게 되었을 때였다. 지난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던 당시와 민주당에 보다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지금의 모습에 대한 언론의 태도를 비교해 보라. 그러니까 더욱 자신들의 인정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보수의 편에서 민주정부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필요가 그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라고 다를 것인가.

 

제법 목소리도 크게 내는 여성주의자 가운데 사회적 약자라 할 만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좋은 집안 출신에, 좋은 대학 나와서, 남들 부러워 할 만한 배우자에, 남들이 우러르는 직업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들이란 것이다. 아니더라도 여성운동을 통해 쌓은 명성으로 정치인이나 언론이, 지식인 등 그래도 저명한 사회의 고위인사들과 교류도 나누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박원순 시장도 이런저런 경로로 인연을 맺은 여성주의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곧 여성의 지위이며 여성주의의 현주소다. 그것은 그들의 진심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받는 대우야 말로 현실에서의 여성의 지위이며 권리다. 그러면 과연 그런 여성주의자들이 여성과 여성주의를 위해 연대해야 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이겠는가. 진보를 자처하는 여성주의자 가운데 검찰이나 언론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이가 거의 없는 현실도 이를 반영한다. 오히려 검찰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같은 여성 검사를 억압하려 할 뿐이다. 왜이겠는가.

 

지난 2012년에도 여성주의자들은 민주와 진보, 정의, 인권과는 거리가 먼 박근혜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지한 바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 여성주의자들이 여성대통령에 기대서 정부의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었다. 박근혜가 탄핵당하던 당시 역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한 바 있었다. 여성 대통령 아래 자신들이 대우받던 시절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남성 대통령이 집권한 지금보다 여성대통령이 계속 집권했으면 자신들의 처지가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 김재련이 여성주의를 지금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재련 변호사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총궐기하는 상황이란 것이다. 언론과 검찰까지 함께 손잡고서.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과연 우연이겠는가.

 

언론이 힘을 실어준다. 검찰이 손을 빌려준다. 보수정치권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준다. 그 순간 그동안 여성의 인권을 위해 함께 해 온 시간들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과거의 동지마저 버려야 할 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보다 여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던 시절이 과거에 과연 있었는가. 이 모든 것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주의가 나가야 할 바는 하나다. 기성언론과 검찰과 보수정치권과 손잡고서 기득권이 되어 정통성없는 찬탈자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진짜 여성주의를 위한 시대가 돌아온다.

 

기생페미니즘이라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물론 시작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권력에 기대려는 민주진영의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기성언론에 기대고, 검찰에 기대고, 가부장적인 보수권력에 기댄다. 그들의 힘을 빌어 여성주의의 성장과 향상을 이루려 한다. 뒤바리나 퐁파두르가 누리던 지고의 지위와 권력이 마치 여성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대변하는 양 여기는 모습들이다. 그냥 기성 권력에 기대어 그 힘으로 찍어누르기만 하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논쟁하며 설득하고 공감을 이끌어내겠는가.

 

내가 얼마나 높은 사람과 가까운가. 내가 얼마나 권력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가. 권력이 얼마나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가. 얼마나 내 마음대로 그 권력을 이용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내가 말한 대로 그 권력이 움직이며 나 자신의 의지를 대신하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일제강점기 하층민 출신의 친일파들이 양산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그렇게 완장을 찬 하층민 출신들이 많았었다. 연민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않으면 어찌 그나마라도 권력이란 것을 누려 볼 수 있겠는가. 다만 당장 내가 성가시니까. 나에게 피해가 돌아온다. 당연한 것이다.

가만 보면 한겨레나 kbs나 검찰과 관련해서는 사과도 빠르고 아주 정중하기까지 하다. 한겨레는 거의 오체투지를 넘어 육체투지로 자궁환관의 경지를 보이는 듯했고, kbs의 사과는 당사자들의 고발이 이루어지는 순간 바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면 엄연히 인터뷰가 왜곡당해 방송되며 자산관리인으로서 명예가 실추되었던 김경록씨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 인터뷰 왜곡이 노린 당사자인 조국 전장관에 대해서는 또 어떨까? 유시민 이사장이나, 민주당 국회의원들, 그리고 정부에 대해서는 어떠했는가. 너무 비교가 되지 않는가?

 

더구나 기시감까지 든다. 막 유시민 이사장이 알릴레오에서 김경록씨의 인터뷰가 왜곡되어 내보내진 사실을 알리고 검언유착이 대중들 사이에 회자되려는 무렵 한겨레는 마치 윤석열 검찰총장을 저격하듯 내용도 불확실한 보도를 단독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민주당 지지자 일부는 환호했지만 검언유착 의혹은 철저히 묻히고 말았었다. 이번에 탁현민과 관련해서 오보를 냈던 김완이 유시민더러 악의적이라 말했던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사실은 의심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덕분에 조국 전장관을 무리하게 수사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던 윤석열은 갑자기 정권과 진보언론의 희생양이 되었고 여론의 지지 속에 당시 국면을 돌파하며 더 강경한 수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윤석열이 여러 논란으로 힘든 상황에 놓이자 바로 무릎꿇고 용서를 빌어 그 체면을 살려주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과연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우연이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프레임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래 한동훈이나 이동재 등이 주장하던 것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권력과 언론이 손잡고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렸다.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유인해서 함정에 빠뜨린 결과 지금의 검언유착 의혹이 시작된 것이었다. 자신들은 권력과 언론의 희생양이고 피해자다. 아니나 다를까 공영방송인 kbs에서 자신들과 관련해서 오보를 내고 범죄자로 단정짓는 보도까지 내고 있었다. 여러 언론들이 kbs의 보도를 받아 쓰는 가운데 kbs에서 공개적으로 오보를 인정하고 사과까지 하고 있었다. 검언유착의 가해자가 오보의 피해자가 되고, 나아가 권력과 언론이 유착한 공작의 희생자가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역시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너무나 구조가 닮아 있지 않은가. 당시 한겨레와 지금 kbs가. 역할극 하기에도 좋다. 한겨레는 그래도 진보정부에서 자칭 진보언론이었고, kbs는 정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공영방송이다.

 

이래서 내가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이나 '저널리즘 토크쇼J'같은 면피용 방송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알리바이 만들기다. 저들이 그렇게 자사의 보도마저 비판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kbs는 검찰을 제외한 다른 대상에 대한 모든 오보에 대해 반성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투는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냥 소수가 이런 목소리도 있다며 물타기를 시도하는 정황까지 보이고 있을 정도다. 뭐가 달라졌을까? 그래서 결론은 그래봐야 kbs는 kbs일 뿐이다. 아니 언론은 그냥 언론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언론과 검찰의 유착이란 얼마나 끈끈하고 단단하기만 한 것인가. 이렇게까지 자사 보도의 신뢰성까지 희생해가며 지켜야만 할 정도로 그렇게 절실하고 절박한 가치이기까지 한 것인가. 내가 기자가 아니니 알 수 없다. 다만 앞으로도 절대 kbs의 보도따위 신뢰해서는 안된다는 확신만 가지게 된다. 언론의 보도따위 믿을 것이 못 된다. 더욱 정부와 검찰과 관련해서는. 그냥 kbs가 kbs한 것이다. 언론이 언론한 것이다. 어째서 여성주의자들이 언론과 결탁해서 박원순 시장을 공격하는데 하나가 되어 있는가. 쓰레기는 쓰레기고 벌레는 벌레다. 당연한 사실이다. 추악하도록.

그동안 상사의 지시마저 무시해가며 최대한 내 관리 아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더 많이 쉴 수 있도록 많은 부분들을 배려하려 노력해 왔었다. 당연히 내 책임 아래 있기에 다른 지시가 있으면 그 지시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팀과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치에 있기에 그 부분도 신경써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온전히 내 팀 만 신경쓸 수는 없는 상황이란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평소 배려하며 신경써 주던 부분은 싹 빠진 채 최근 조금 관리를 엄격하게 하며 서운하게 한 부분만 이유로 들어 말하고는 직원 하나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 사실을 전해들었을 때 내 기분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잘못했는가? 그 다음에는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가? 그래서 내가 지금보다 뭘 얼마나 잘해 줄 수 있겠는가? 아니 잘 해 준다고 무슨 보람이 있기는 할 것인가? 모든 것이 허무해져서 화도 잘 나지 않더라. 화도 나지 않고 밉거나 싫지도 않고 그냥 기운만 빠진다. 덕분에 너무 팀원들 풀어준다고 상사로부터 몇 번이나 질책도 받고 했었는데. 그래서 보이는 데서는 너무 티내지 말라면서 나 혼자 안달복달하고는 했었다. 당연히 그러는 것을 알아도 실제로 그러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일 테니까. 자기 편한 사정은 이야기하면서 내 곤란한 사정 같은 건 헤아리지 않는다. 그래서 말했다. 지금보다 잘하지는 못할 테니 그냥 나 자르라 말하라고. 다른 사람 팀장 시켜달라 말하라고. 그래서 잘리면 잘리는 거고.

 

문득 박원순 시장이 피소사실을 알았을 경우를 가정하고 당시 박원순 시장의 심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평생을 여성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전혀 터무니없는 이유로 성추행으로 고소당하게 생겼다. 더구나 그동안 동지로써 가까이 지내던 이들마저 자신을 성추행범으로 낙인찍고 비난하는 말들을 하고 있다. 검찰과 언론이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를 박원순 시장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서울시장으로 있던 내내 보수정당과 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으며 가족까지 크게 곤란을 겪었던 경험도 있을 터였다. 과연 지금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씨발 그냥 그만두라면 그만두고 말지 손 놔 버린 내 상황과 당시 박원순 시장의 처지가 크게 봤을 때 어느 정도 통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화도 그다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덤비고 까불어도 그다지 밉거나 하지 않다. 그냥 필터라도 하나 걸친 양 현실감 없이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래서 사람들이 굳이 아랫사람을 위해서 윗사람과 다투기 보다 윗사람 눈에 들기 위해 아랫사람을 희생양 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상사가 시키는대로 갈구고 다그치기만 했다면 상사도 굳이 내게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을 테지. 그러면서도 또 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자기에게 게기며 팀원들만을 챙기고 있었는가도. 확실히 서로 마음 통하는 것은 상사 뿐이었던 것일까. 이러거나 저러거나 결국은 나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더이상 신경쓰기도 싫고 마음쓰기도 싫다. 다만 언론과 정치권의 표적이 될 일은 없으니 다행이다.

 

자살은 공포를 회피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공포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이 때로 허무일 것이다. 그동안의 삶이 허무해지고, 앞으로의 삶까지 공허해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 심연보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뭐가 어떻게 되는 나와는 상관없을 것이다. 당연히 팀원들이야 뭐가 어떻게 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순간 팀원들 개개인이 사라지고 팀원이라는 이름 하나만 남게 된다. 애정과 관심이 사라지면 개인이 아닌 전체만 인식 속에 남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일부만 일부만 떠들며 특수한 사례임을 강조해도 외부인들 눈에 모두 똑같이 보이는 이유다. 그러니까 결론은 뭐다? 그냥 좆같다. 사람이 이렇게도 죽을 수 있다. 출근해야 한다.  

그래도 박원순 시장 논란을 계기로 직장에서의 성범죄 피해를 호소하기 시작한 여성들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편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만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 매 순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제와서 호소라도 할 수 있으니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일까. 그런데 한 편으로 그래서 여기서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들의 편을 들게 되면 여성주의자들이 더 득세하는 것은 아닌가.

 

여성을 수단으로 앞세우니 생기는 부작용이다. 여성주의를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로 앞세우려 하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문제들인 것이다. 여성주의가 권력화되어 기성의 권력과 결탁한 뒤 자신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모두를 억압하려 하고 있다. 검찰을 이용해서 여성 검사를 징계하려 하고, 경찰을 움직여서 자신들에 비판적인 이들을 2차 가해라며 처벌하려 하고, 심지어 대통령마저 압박한다. 일베라면 모를까 그런 여성주의자들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여성주의자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약화시키기 위해 여성주의자들이 앞세우는 여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여성의 문제란 여성주의자들의 부정하고 부당한 권력을 정당화하는 근원이자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을 최소한 더 강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실의 여성문제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의 입장에 조금이라도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여성주의자들이 먼저 적이기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닌 여성주의자이기를 선택했고, 보편적인 인간이 아닌 오로지 자신들이 주장하는 여성만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단지 남성인 내가 여성의 편에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편에 서야만 하는 것인가. 어차피 적일 텐데?

 

오랜 세월 동지였었다. 어쩌면 기성의 남성들 가운데 가장 든든한 그들의 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이었다. 그래서 적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빚져 온 그보다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의 편에 당연하게 서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인연조차 외면한 채 죽음마저 모욕하며 시신까지 난도질하려고 하고 있다. 안티페미란 놈들이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에게는 박원순 시장이라는 오랜 동지조차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단죄해야 할 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여러 논쟁들에서 여성주의자들의 편을 들어 본 적 있는 대부분 남성들이 한 번 쯤 겪어 본 상황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같은 편이 되어 논쟁하다가도 결국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여 비난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다름이 틀림이 되고 단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단지 내가 저들과 같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란 이유 때문이다. 내가 여성주의자들과는 절대 어울릴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보다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이 더 커져서는 안된다. 언론과 검찰과 보수권력과 손잡은 여성주의자들이 의도한대로 앞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이 앞세우는 여성의 문제들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조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정치적인 수단이니까. 권력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여성 자신들조차. 과연 여성주의가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것인가.

 

여성주의는 정치다. 여성주의는 권력이다. 여성과 여성주의는 단지 기득권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을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손잡는 대상이 여성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수구언론과 검찰이란 것이다. 정의당이 감히 검찰개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언론개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페미니즘은 더이상 사회적 약자를 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부한다. 저들의 여성주의를. 박원순 시장 논란이 남긴 성과다. 선을 긋는다.

그러고보니 여성주의자들이 습관처럼 하는 말 가운데 그런 게 있었을 것이다. 직업이나 직책 앞에 여성을 붙이지 마라. 여류작가, 여의사, 여배우, 여선생, 여직원, 여의원 등등등...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앞에 여자를 붙이지 않는 만큼 하는 일에도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성이 하는 일을 남성도 하고, 남성이 하는 일을 여성도 한다. 그러면 과연 비서의 일이란 무엇일까?

비서란 말 그대로 보좌하는 일일 것이다. 하는 일도 많고 책임도 무거운 사람들이 보다 자기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소한 일들을 대신해 주는 사람들이다. 주말이든 새벽이든 자기가 보좌하는 이가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거나 하면 동반해야 할 때도 있고, 잠시 분주한 일과 가운데 잠시 짬을 내서 눈을 붙이거나 하면 때맞춰 깨워주기도 해야 한다. 나이가 있으니 건강관리를 위해 혈압을 재려 하면 역시 혼자서 재는 것보다 남이 재 주는 편이 훨씬 빠르고 편하다. 체력관리를 위해 운동을 마쳤으면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 주는 정도도 업무에 포함될 수 있다. 그래서 비서가 여성이니까 이런 일도 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사실 박원순 시장도 잘한 것은 없다. 비서가 여성이라도 화를 낼 때는 화를 내야 하고, 짜증날 때는 짜증도 내야 한다. 그랬어야 비서들이 여성인 비서를 앞세워 방패막이로 삼지 않는다. 여성 비서를 앞세우면 화내고 짜증낼 것도 그만큼 더 참더라. 자는 것 깨우면 불편한 표정을 짓거나 할 때도 있는데 여성 비서가 깨우니까 그런 게 없더라. 왜 사람을 차별하는가? 여성 비서에게도 야단도 치고 질책도 하고 불편한 기색도 내보였으면... 아, 그래도 여전히 욕먹었을까? 여성인 비서를 함부로 대한다고?

어차피 누군가 갈아입을 속옷을 가져다 줘야 한다면 여성 비서가 아니면 남성 비서가 그 일을 하게 되었을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굳이 남성 비서가 해도 되는 일이었는데 여성이라서 그 일을 시킨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비서가 하는 일이니 남녀 구분 없으 그냥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그 일을 하게 된 것인가. 더구나 속옷심부름을 시키는데 어떤 성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었는가. 그냥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라 시킨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남자 비서들은 아무래도 박원순 시장이란 사람을 마주 대하기가 몹시 불편하다.

아무튼 웃기는 것이다. 여성이니까 시켜서는 안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해서는 안되는 말이나 행동들이 너무 많다. 대부분 남성이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일들이다. 그런데 여성이라서 문제라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한 마디로 여성은 특별하다는 것이다. 특별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성은 다르다. 그러면 비서 앞에도 여성을 붙여서 여비서라 불러야겠지. 당연히 여비서라 불리는 만큼 하는 일도 달라야 한다. 그것을 바라는 것인가. 남비서 할 일 따로 있고 여비서 할 일 따로 있다. 시킬 수 있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들도 서로 전혀 다르다.

여성을 거짓말을 않는다. 여성을 사실을 왜곡하지도 편취하지도 않는다. 여성은 항상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성추행으로 고소한 순간 이미 가해자로 유죄가 확정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주의가 바라보는 여성의 정체란 것이다. 세월이 너무 지나 버린 것일까. 더치페이를 문제삼는 여성주의를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여성은 전혀 별개의 존재로 전혀 다른 일을 시킬 목적으로만 채용하고 대우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나 역시 인정한다. 인간이 아닌, 보편의 개인이 아닌 단지 여성이라면 굳이 일반적인 일을 위해 채용할 필요가 없다. 여성에게 시킬 일에 대해서만 여성을 채용하면 된다.

여성주의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다수 여성의 입장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많음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런 여성들과는 신분부터 다르신 분들이란 것이다. 여성주의를 팔아먹는 여성을 수단화하는 특별한 여성님들이다. 그게 바로 여성주의의 현주소다. 없던 여성혐오까지 생기려 한다. 대단한 여성주의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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