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박원순 시장 논란을 계기로 직장에서의 성범죄 피해를 호소하기 시작한 여성들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편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만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 매 순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제와서 호소라도 할 수 있으니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일까. 그런데 한 편으로 그래서 여기서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들의 편을 들게 되면 여성주의자들이 더 득세하는 것은 아닌가.

 

여성을 수단으로 앞세우니 생기는 부작용이다. 여성주의를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로 앞세우려 하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문제들인 것이다. 여성주의가 권력화되어 기성의 권력과 결탁한 뒤 자신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모두를 억압하려 하고 있다. 검찰을 이용해서 여성 검사를 징계하려 하고, 경찰을 움직여서 자신들에 비판적인 이들을 2차 가해라며 처벌하려 하고, 심지어 대통령마저 압박한다. 일베라면 모를까 그런 여성주의자들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여성주의자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약화시키기 위해 여성주의자들이 앞세우는 여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여성의 문제란 여성주의자들의 부정하고 부당한 권력을 정당화하는 근원이자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을 최소한 더 강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실의 여성문제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의 입장에 조금이라도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여성주의자들이 먼저 적이기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닌 여성주의자이기를 선택했고, 보편적인 인간이 아닌 오로지 자신들이 주장하는 여성만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단지 남성인 내가 여성의 편에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편에 서야만 하는 것인가. 어차피 적일 텐데?

 

오랜 세월 동지였었다. 어쩌면 기성의 남성들 가운데 가장 든든한 그들의 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이었다. 그래서 적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빚져 온 그보다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의 편에 당연하게 서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인연조차 외면한 채 죽음마저 모욕하며 시신까지 난도질하려고 하고 있다. 안티페미란 놈들이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에게는 박원순 시장이라는 오랜 동지조차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단죄해야 할 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여러 논쟁들에서 여성주의자들의 편을 들어 본 적 있는 대부분 남성들이 한 번 쯤 겪어 본 상황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같은 편이 되어 논쟁하다가도 결국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여 비난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다름이 틀림이 되고 단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단지 내가 저들과 같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란 이유 때문이다. 내가 여성주의자들과는 절대 어울릴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보다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이 더 커져서는 안된다. 언론과 검찰과 보수권력과 손잡은 여성주의자들이 의도한대로 앞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이 앞세우는 여성의 문제들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조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정치적인 수단이니까. 권력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여성 자신들조차. 과연 여성주의가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것인가.

 

여성주의는 정치다. 여성주의는 권력이다. 여성과 여성주의는 단지 기득권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을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손잡는 대상이 여성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수구언론과 검찰이란 것이다. 정의당이 감히 검찰개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언론개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페미니즘은 더이상 사회적 약자를 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부한다. 저들의 여성주의를. 박원순 시장 논란이 남긴 성과다. 선을 긋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