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天之下 天生聖人 爲世作則

해석하자면 '빛나는 하늘 아래 하늘이 성인을 내시어 세상을 위해 도리를 만들었도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인은 당시 황제이던 주원장으로 글쓴이는 황제를 칭송하고자 이 글을 썼었지만 도리어 주원장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빛이란 반짝이는 대머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승려생활을 했던 주원장의 불우한 과거를 비꼬는 것이며, 도리를 가리키는 칙則은 도적을 가리키는 적賊과 발음이 같으므로 홍건적 무리에 속했던 자신의 전력을 비방하려는 것이다. 말이 안되는 트집이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의 뜻이었기에 감히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청 옹정제 때는 사사정이라는 한인관료가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에 있는 '백성이 머물러 사는 곳維民所止'이란 귀절을 시제로 냈다가 다시 황제를 능욕했다 해서 처벌받은 사례가 있었다. 이유인 즉 옹정雍正에서 머리부분을 빼면 止가 되는데 이마저 民所라는 글자로 갈라 놓았으니 대역무도한 의도가 있다 여긴 것이다. 역시 말도 안되는 트집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그렇다니 그리 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혹시라도 꼬투리잡힐까 과거 이미 있던 문헌을 고증하는 것으로 학문을 대신한 결과가 바로 청대에 유행한 고증학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잘랐으니까, 특정 단어들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의도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 과거 전효성이 '민주화' 발언을 했다가 욕먹은 것도 '민주화시키지 않는다'라는 명백히 민주화를 부정하는 의도의 표현 속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사투리의 '노'와 일베식 표현의 '노'를 구분하는 기준 역시 마찬가지다. 운지니 부엉이니 하는 단어들 역시 어떤 맥락 속에 쓰였는가에 따라 일베인가 아닌가가 결정된다. 하긴 일베 놈들 입장에서야 자기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 가지고 괜히 트집잡는다 여겼을 것이다. 자신들은 악의로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의 언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 일상의 언어가 광주의 희생자들을 조롱하고 세월호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점이 그놈들의 정체를 보여주고 있을 테지만. 아무튼 그래서 과연 짧은 머리와 특정한 단어들이 그런 맥락으로 읽혀지고 있는가.

 

숏컷은 역사도 아주 유구한 헤어스타일이다. 반드시 여성주의자라서가 아니라 미적인 목적으로, 혹은 실용적인 이유에서 숏컷을 선택하는 여성이 현실에 넘쳐나도록 많다. 실제 남성 가운데도 여성의 숏컷 스타일을 무척이나 선호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헤어스타일까지 강제하려는 것인가? 페미니스트가 되기 싫으면 머리를 길게 기르라. 그러면 머리를 길게 기른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인가. 정의당 강민진도 머리가 무척 길더만. 특정 스타일을 특정 부류와 연관지으려면 그 역의 관계도 성립해야만 한다. 페미니스트라서 머리가 짧다. 따라서 머리가 짧으면 페미니스트다. 숏컷이 아닌 단발의 여성주의자들은 무어라 말하려는 것인가.

 

오조오억은 그리 자주 보지 못했지만 웅엥웅은 아주 오래전부터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으면 조롱하는 용도로 인터넷에서 자주 쓰이던 표현이다. 혹은 자신의 말을 어물거리며 넘길 때도 웅엥웅이란 표현을 쓰고는 했었다. 남성의 어떤 특징을 비하하여 만든 표현이 아니라 그장 말을 어물거리는 자체를 의성어로써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웅엥웅 해보라. 그게 어떤 식으로 들리는가를. 오조오억 역시 내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삼십육만육천과 비슷한 의도였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밥을 사야 하는 이유를 삼십육만육천가지만 대 보라. 여성시대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니까 페미니즘 용어고 남성비하 언어다. 그러면 바보 병신도 남성비하가 되는 것일까? 하긴 여성비하이기도 하다.

 

맥락을 배제하고 단어만 남기면 발생하는 문제인 것이다. 요즘도 국어를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모르겠다. 전체의 유기적 구조와 맥락적 이해가 아닌 개개의 어휘와 표현에 집착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역시 권력인 것이다. 지난 보궐선거 이후 20대 남성을 부쩍 추켜올리면서, 여기저기서 특히 20대 남성을 대변하는 곳으로 특정 사이트를 주목하면서 기왕에 주어진 관심과 권력을 어떻게든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렇게 인민재판하듯 여러 혐의자들을 만들고 사냥을 주도하기도 했었다. 이번에는 올림픽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정신적 모국인 일본이 조롱받는 도쿄올림픽이다. 일본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인 선수를 용서할 수 없다.

 

재미있는 건 차라리 김건희는 옹호해도 안산 선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성주의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김건희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저리 큰데 안산 선수를 위한 목소리는 일부러 찾아듣지 않으면 안될 정도다. 원래 여성시대나 워마드, 메갈리아는 일베와 뿌리가 같다. 성향도 같다. 그러고보니 여성주의자들이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이유도 그렇게 맥락상 이해가 된다. 워마드와 메갈리아의 성향은 항상 일관되게 반문친박이었다. 내가 여성주의자들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박근혜 사면이라 주장하는 이유다. 어이가 없다. 

원래 여성주의에서는 집안에서 살림만 해도 배우자의 사회적 성과를 공유해야 한다 주장한다. 배우자가 밖에서 사회활동에만 오로지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집안일을 책임지며 '내조'한 공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반 시민이어도 그런데 하물며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이다. 심지어 국가수반의 배우자는 반드시 국가수반과 동행하지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격식과 예우를 받게 된다. 그런데 대통령 배우자 되겠다는 사람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검증하지 말아야 하는가?

 

윤석열의 부인 김건희씨의 과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다. 김건희 자신은 물론 그 친정어머니까지 윤석열이 검사시절 수많은 범죄에 연루된 의혹들이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이 검사로서 자기 직분을 이용해서 이들 사건들을 강제로 덮었거나 오히려 피해자를 수사해서 처벌한 정황들이 드러났다. 그런데 당사자는 아니라 하니 이런저런 근거들을 찾는 와중에 과거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여성을 대상으로 그런 식의 검증을 한다는 것은 가혹하다. 여성은 내버려두라.

 

윤석열이 얼마전 주 120시간 근로 발언을 한 사실을 잊은 모양이다. 정확히 상관없을 것이다. 말하지 않았는가. 전 검찰총장 부인이자 대선후보의 배우자가 아니었다면 정의당도 저런 식으로 변호하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여성주의에서 여성은 전문직 여성이다. 혹은 그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여성이다. 자신이 전문직이거나, 혹은 배우자가 전문직이거나,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여길만한 위치에 있는 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윤석열이 노동에 대해 무어라 발언하든 여성주의자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당한 집권자에게 권력을 넘겨주어 불의한 찬탈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정의'가 우선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윤석열을 지지한다.

 

그냥 남자문제가 아니다. 그냥 과거 직업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든 행적들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들과 연관되기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 되겠다는 이의 배우자 아닌가. 장차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세계의 정상들과 만나야 할 사람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대통령을 대신해서 얼굴을 비추게 될 사람이다.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진보인가. 그 전에 상식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여전히 윤석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정의당과 경향일보를 보면서 새삼 떠올리게 된다. 여성주의는 진보가 아니다. 진보적 가치가 아니다. 저들의 여성주의는 윤석열이 국민의힘에 입당한 이후에도 그 지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그런 가치인 것이다. 그래서 여성후보인 박영선이 아닌 보수후보 오세훈을 지지했던 것이었다. 민주당 정치인들의 부동산 문제에 그리 민감하던 자칭 진보가 김현아를 대하는 것을 보라. 이제는 자칭 진보라는 말조차 너무 저들을 인정해주는 것은 아닌가 자괴감마저 든다. 벌레는 벌레다. 예외없다.

아주 오래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였다. 베스트극장이었는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지금은 고인이 된 김무생씨가 주인공을 맡아 우연한 선행이 알려지며 세상의 주목을 받고 파멸해가는 어느 식당주인을 맡아 연기한 바 있었다. 갑작스런 세상의 관심에 더 큰 관심을 받고자 선행을 베풀다가 재산을 다 날리고, 자식들까지 주워다 기른 아이들로 만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마지막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라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 아내는 밤거리의 여자였다!"

 

아마 이 또한 자신의 선행으로 미담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지리라 믿고 그리 홀로 외쳤던 것이리라. 그러고보면 오래전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던 사람 가운데 아내가 다방 종업원이었던 이가 있었을 것이다. 법무부장관이었던가?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 합격해서, 사방에서 한 지위 한 재산 하는 집안이 열쇠까지 몇 개 씩 챙겨들고 달려드는 상황에 오로지 사랑 하나만 보고 과거를 묻지 않고 지금의 배우자를 선택했다. 오히려 불우하기에, 비참하고 참혹했기에,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그 용기와 그 결단은 칭찬받을 만하다. 

 

정의당이 김건희를 두둔하고 나선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였었다. 김건희의 과거와 상관없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윤석열이란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다. 민주당 지지자들까지 비난하는 과거를 가진 여성을 아내로 맞아 지금까지 해로하고 있으니까. 정의당의 윤석열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과연 국민의힘에 입당한 지금도 - 하긴 상관없다. 이미 지난 보궐선거에서 정의당은 오세훈과 박형준을 공공연히 지지한 바 있었다. 주호영과 김현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박주민을 비난했었고, 김학의 사건을 수사했다는 이유로 기소당한 이성윤을 비판하는 공식논평까지 냈었다. 아무튼 그런 여성까지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윤석열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사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었다. 그래서 굳이 김건희의 과거를 공개적으로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니 그 전에 김건희 자신이나 윤석열이나 일부 인터넷매체에서 문제삼는 줄리는 자신이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부인한 바 있었다. 사실을 알 수 없으니 인터넷 매체의 주장만 믿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설사 사실이더라도 그것이 오로지 사랑이란 감정에 의한 것이었다면 남자로서 윤석열을 칭찬해 줄 만하다 여겼었다. 나라도 그런 과거를 가진 여성이라면 어지간히 사랑하지 않고서는 몇 년이나 같이 살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한 쪽에서는 부정하면서 한쪽에서는 애써 문제가 아니라 주장하는 모순된 태도일 것이다. 부끄럽지 않다면 어째서 부정하는 것이며, 애써 부정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어째서 문제가 아니라 주장하는 것인가.

 

당당하면 까면 된다. 그러면 지지해 줄 용의도 있다. 최소한 사랑해서 그런 과거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면 그 하나만은 분명 인정할만한 부분인 것이다. 다만 그렇다면 자신과 상관없는 특정 여성에 대한 관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긴 정의당이며 김경진이며 장제원이며 당사자는 아니라는데 왜 자꾸 사실로 못을 박으려 드는 것인지. 그리고 단지 줄리를 조롱했을 뿐인 그림에 어째서 윤석열 자신이 직접 나서야 했던 것인지.

 

아무튼 이낙연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제대로 먹인 느낌이기는 했었다. 조선시대 남녀의 성기를 표현하는 단어가 '더러운 아래'였었다. 역모로 국문이 열리면 죄인들의 말 가운데 차마 옮겨적지 못할 내용들을 '참담하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었다. 벽화의 내용이 사실이든 허구든 사실 썩 보기에 좋은 내용은 아닌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게 중요하다. 사실이든 아니든. 사실일 경우에 오히려 더욱. 절묘하긴 했다.

한국 여성주의는 이 셋만 기억하면 된다. 이화여대, 개신교, 그리고 김활란. 참고로 이 씨발년들은 여성주의의 시작을 개신교의 포교로 잡고, 그 개신교의 자유로운 포교가 이루어진 일제강점기를 근대화의 기점으로 여긴다. 한 마디로 식민지근대화론자이며 친일옹호자들인 셈이다. 그러니 김활란에 대한 추앙으로 이어진다.

 

이화여대의 선민의식은 서울대의 그것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다. 급은 당연히 서울대와는 거리가 먼데 자신들은 그 정도 급은 된다 여기는 것들이다. 하긴 이화여대는 전통적으로 있는 집 자식들이 지원해 다니는 학교였었다. 중산층만 되어도 위화감 느껴서 다니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 것이 8,90년대였다. 민주화운동 시기에도 가장 소극적이던 부류였었고. 그 선민의식이 여성주의와 만난 것이 지금의 한국 여성주의다. 여성주의이기는 한데 힘없고 돈없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은 대상이 아니다. 여성주의자들이 청소노동자나 주방노동자 여성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걸 본 사람.

 

같은 여성인 비정규직노동자, 일용직노동자, 저임금노동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도 역시 여성주의에 포함될 터였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여성운동과 전혀 다른 것이다. 여성주의를 표방한 이후 정의당은 노동자를 버렸다. 최저임금인상도 반대, 근로시간 단축도 반대, 대체공휴일도 반대, 다 반대다. 과연 여성주의가 진보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인가.

 

아무튼 또 이화여대란 이름이 나오네. 개신교란 종교가 나오고. 꽃길만 걸었을 여성이다. 한 번도 가장 어려운 곳에서 평범한 여성들이 겪었을 현실의 문제들을 경험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대개 한국 여성주의자들이 그렇다. 정의당에도 이제 그런 경험을 한 이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현실이 그렇다. 좆같지만.

초나라 섭공이 공자에게 자랑했다. 우리나라에는 아주 정직한 사람이 있어서 아비가 양을 훔친 것을 알고 바로 관청에 고발하더라. 그러자 공자가 반박했다. 우리나라에도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아비가 아들 한 일을 감추고 아들이 아비 한 일을 숨겨주더라. 우리나라 법에서도 범죄자를 숨겨주거나 도주시켜준 사람을 처벌하는데 가족과 친족은 예외로 두고 있다. 인륜보다 중한 게 천륜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가족이라면 편들어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작년 박원순 시장이 세상을 떠나고 여성주의자들이 했던 짓거리를 기억한다. 평소 박원순 시장을 잘 알았고 그래서 그의 인품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성추행당했다는 여성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거나 유보하려는 이들에 대해 대뜸 2차가해라는 말부터 꺼내들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아예 아무 입장도 밝히지 않으려는 것조차 2차가해라는 정체도 알 수 없는 논리를 앞세워 바로 직전까지 친구이고 동지였을 이들에게 침을 뱉고 비난을 퍼부으라 강요하고 있었다. 심지어 가족이 고인을 보내는 앞길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떠나는 이를 추모하는 이들에게조차 추모하지 말 것을 강제하려 했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기로서니 가족을 잃은 슬픔조차 드러내지 말 것을 대놓고 강제하는 것은 군사독재시절에나 있었던 일이었다. 하긴 원래 여성주의는 군사독재에 빌붙어 기생하던 것들일 터다.

 

내가 수 십 년 신뢰해 왔던 손석희를 하루아침에 벌레새끼 취급하기 시작한 이유다. 정경심 교수가 자연인으로서 방어권을 행사하려는 것조차 대놓고 비난하고 있었다. 민주당 관련 인사들은 시민으로서 권리도 주장하거나 행사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여성주의자라는 것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지 박원순 시장의 지인이고 친구고 동료고 동지고 가족이었다는 이유로 죽은 이에 대한 친분과 연민과 슬픔을 드러내는 자체를 부정한다. 무엇보다 시민으로서 자신의 가족이 부당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법적인 수단으로 구제받고자 하는 것마저 금기시하는 중이다. 여성은 시민보다 상위다. 여성이란 인간보다 우위에 존재한다. 그런 대가리속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말했듯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은 있는 집 자식들이다. 혹은 그런 여자들과 어울리며 자기도 그런 줄 아는 것들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 사람이 존재한다. 자기들 위에 존재하는 자기들에게 함부로 해도 좋은 사람과 자기들 아래 존재하는 자기들이 함부로 대해도 좋은 사람. 이를테면 김학의가 전자에 속한다면 김학의의 피해자들은 후자에 속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정의당이나 한겨레가 단 한 번이라도 피해자들을 위해서 2차가해라는 프레임을 사용하거나 한 적이 있던가. 그게 바로 국민의힘과 민주당에 대한 태도에도 드러난다. 국민의힘이 되도 않는 이유로 고소고발을 남발할 때 정의당이 단 한 번이라도 논평을 내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것이다. 설사 박원순이 성추행 정도가 아닌 도저히 용서못할 추악한 성범죄를 저질렀어도 가족이 가족으로써 무고함을 믿고 소송을 거는 것까지 막아서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물며 지금껏 나온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저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의 일방적인 주장에 근거한 것일 뿐 박원순 자신이나 주변의 반박을 고려하여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일방의 주장만으로 유죄결론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민주국가에서 가능한 일인가.

 

아무튼 하는 짓거리 보니 장혜영이 왜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했는가를 알 것 같다. 권인숙이 조만간 전두환 찾아가서 용서를 구할 것이라 예상하는 이유다. 인간이 사라지고 인간의 존엄이 사라지고 인간의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 자리에 남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성인지감수성이다. 남성을 이해하거나 설득하려는 노력 없이 권력에 기대 일방적으로 자기들 논리만 강요하려 한다. 벌레들인 것이다. 인간이 아닌 이유다.

올초 뜬금없었던 사면발언 이후 이낙연도 아마 깨달았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후광 없이 자기 힘으로 대통령은 어림도 없다. 민주당 경선도 통과하기 어렵다. 사실 지금 이낙연이 이나마 지지를 받는 것도 문재인 대통령이 알게모르게 이낙연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아예 대놓고 이낙연과 선을 그었으면 지금 지지율은 추미애와 같이 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이낙연의 한계다. 자기 힘만으로는 국회의원 배지 한 번 달기도 쉽지 않다.

 

언론이 만든 의회독재 프레임에 누가 그리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가 굳이 살펴볼 필요조차 없다. 문제는 그런 놈들이 민주당 안에 적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놈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국민의힘과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가 민주당에 - 심지어 개혁파로 여겨지는 이들 가운데서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의원총회에서 의결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대선후보 가운데서도 그들과 입장을 같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언론의 의회독재 프레임부터 풀고 나서 당당하게 국민의힘과 경쟁하고 협상하며 개혁을 이뤄 나가자. 이미 기득권인 정치인들의 사고방식은 별 것 없는 시민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낙연이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처음부터 지지하며 나섰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당원과 지지자들의 반대가 워낙 뜨거우니 - 더구나 자신의 핵심지지층인 똥파리들조차 송영길과 윤호중을 욕하면서 반대하고 나서고 있으니 이대로 자기 신념대로 지지하고 나서기에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먼저 추미애가 치고 나가면서 정세균까지 한 마디 거든 바 있었다. 일단 합의는 지지하는데 법사위의 과도한 권한을 제한하는 조치는 필요하다. 그냥 넘기는 게 아니라 법사위가 더이상 개혁입법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존재하지 않도록 아예 그 기능 자체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 법사위의 특권을 축소하지 않으면 양보는 없다.

 

솔직히 포기했었다. 의원총회 결과를 보고 이건 그냥 특정한 누군가의 분탕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주당 다수 국회의원들의 합의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합의에는 청와대도 예외가 아니었었다. 소수 국회의원들이 자기 신념을 걸고 반대하고 나섰지만 결국 민주당의 핵심 가운데 다수는 이번 합의에 동의하고 있었다. 설마 바뀌겠는가. 그런데 참 극성스런 지지자들 덕분에 꽤나 기대해도 좋을 만한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면 이해해 줄 필요가 없지. 이해라기보다 포기다. 원래 그런 새끼들이니까. 그런데 바뀔 수 있으면 바꾸는 것이 옳다.

 

자구체계심사 이외의 다른 심사를 못하게 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60일 이내에 심사를 마치도록 하는 정도로도 부족하다. 자구체계심사 자체를 폐지하고 대통령의 거부권과 마찬가지로 설사 수정할 부분이 있어도 해당 상임위에서 직접 하고 다시 올릴 경우 무조건 표결로 부쳐 상정하도록 체계를 바꿔야 한다. 그러면 법사위를 양보해도 크게 문제삼지 않겠다. 그런 정도라면 법사위 양보하든 말든 그보다 야당과 협치하는 이미지에 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욕심을 부려 보련다. 민주당에 대한 마지막 기대다. 기대할 것이 없는데도 혹시나 싶은, 지지자들에 걸고 믿어보는 기대인 것이다. 민주당의 딜레마다. 민주당처럼 당과 지지자가 따로 노는 정당도 드물 것이다. 민주당을 가장 싫어하고 의심하고 미덥지 못해 하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민주당 지지자 자신들이다. 그래서 항상 긴장관계다. 그 지지자 버리고 싶어 민주당은 또 항상 국민을 팔고 다니는 것이고. 이번은 어떨까. 하여튼 개새끼들이다.

그동안 내각제 노래를 부르던 인간들이 어떤 놈들이었는가 떠올려 보자. 한 마디로 토호들이다. 자기 이름이나 혹은 당의 이름을 앞세워 출마하면 거의 무리없이 당선될 수 있는 지역구를 최소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놈들이다. 대통령 선거까지는 무리더라도 지역구 선거에서라면 거의 필승을 자신하고, 그렇기 때문에 지역구 선거만으로 한 번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자리에도 한 번 앉아보자. 대체로 어떤 놈들이냐면 민주당에서는 주로 호남 지역구인 놈들이, 국민의힘에서는 영남이 지역구인 놈들이 그따위 소리를 지껄인다.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자기 이름만으로 몇 선이나 내리 당선된 이른바 중진들이 헛된 꿈을 꾸며 내뱉는 소리다. 그러면 나머지는 무엇인가?

 

물론 이낙연이라도 다수 계파를 거느리고 민주당의 공천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호남에서 충분히 토호 노릇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남에 기반이 미약하기는 하지만 민주당이 가진 기반에 기대 계파를 배경으로 민주당의 이름을 앞세울 수 있으면 다수  계파의 수장으로서 보다 수월하게 더 주도적인 위치에 오를 수도 있다. 문제는 호남 바깥이다. 충청이 민주당의 텃밭인가? 서울과 경기가 민주당의 안마당인가? 전국 어디에 호남을 제외하고 민주당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지역구가 몇 개나 있기는 한가? 이번 보궐선거에서 드러났을 것이다. 서울에서도 민주당이 전패하는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현실을. 민주당의 이름을 앞세운다고 당연하게 표를 주는 유권자따위 호남에도 이제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지지자 다수가 반대하는 내각제를 관철해서 과연 금배지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박병석의 자가발전일 가능성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멍청하기로 이제 갓 국회의원 배지를 단 초선 나부랭이들이 지역구만 잘 받는다고 재선하고 삼선하고 그래서 중진이 되어 내각제에서 한 자리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당장 경선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대통령 자리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이낙연이 그런 괜한 수작에 넘어갈 머저리는 아닌 것이다. 차라리 경선에서 이길 새로운 전략을 고민하면 고민했지 내각제는 지금 이낙연에게 해당사항이 없다. 대통령을 꿈꾸는 자가 대통령의 권한을 나눈다? 이낙연의 지능이 박근혜 이하라면 가능하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내각제라는 것인가?

 

지난 총선에서 공천이 그렇게 이루어졌었다. 다수 중진들이 경선에서 탈락하며 내각제가 되더라도 한 자리 노릴만한 인물들이 상당수 국회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기 영향력만으로 이후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 현실을 모른다는 자체부터 지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한 방에 역전이 가능한 대선을 포기하고 이길지 질지도 불확실한 총선에 모든 것을 걸면서 지지자를 등지는 멍청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른다면 더 큰 문제다. 사악한 것보다 더 사악한 것이 책임있는 자가 무능하면서 그 무능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그런데 저 새끼들 대가리는 똥통이라. 구더기가 괜히 들끓는 게 아니다. 더런 새끼들.

시작은 임대차 3법이었었다. 압도적인 의석을 바탕으로 국민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접안을 민주당의 의지만으로 관철시켰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여론의 비난과 지지율의 추락 뿐이었다. 의회의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으니 그 책임 또한 집중된다. 선의에 의한 것이고 결과가 나쁘지 않은데도 언론의 사실왜곡에 얼마든지 여론이 돌아설 수 있다. 그렇더라도 밀어붙여서 결과로써 보여주었으면 상관없었을 테지만 거기서 너무 우물거리며 힘을 빼고 말았다. 압도적인 의석과 모든 상임위를 독점한 상황과 그럼에도 주저하며 많은 것을 하지 못한 과정들이 중첩된다. 지금 상황에서 민주당의 의지만으로 밀어붙이면 반드시 여론의 역풍을 맞는다.

 

어차피 민주당이 주류정당으로 거듭나려면 당연하게 감수해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선명함만을 바란다면 정의당으로 족하다. 모두가 한 가지 개혁만을 추구하려 한다면 정의당 정도가 충분하다. 이 사회의 주류 기득권이 자신들의 신념과 지향, 목적을 위해 다른 정당이 아닌 민주당을 선택한다. 성공한 기업가, 법률가, 사회활동가들이 민주당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들의 성향은 과연 진보에 가까울까? 보수에 가까울까?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부분에서는 - 특히 자신의 이해와 관련한 부분에서는 보수에 가깝기 쉽다. 그렇더라도 차마 국민의힘에 공천을 신청하기란 꺼려지는 것이 많다. 지난 총선에서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들이 많았음에도 민주당에 공천을 신청한 주류기득권에 속하는 인사들이 상당했음을 떠올려 보라. 

 

가진 것이 많고 지킬 것이 많으면 당연히 겁이 많아지고 행동은 굼떠진다. 좋은 뜻으로 정치하면서 욕까지 들어먹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어떤 욕을 듣더라도 굽히지 않을 순수함이란 현실정치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질적 존재인 것이다. 크게 되면 아주 크게 되겠지만 대개 그 전에 싹부터 꺾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이낙연의 리더십이 중요했는데 이낙연 또한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이니. 따라서 이미 힘이 빠질대로 빠진 지금 민주당이 개혁의 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의회독점이라는, 덕분에 책임이 집중되는 지금 상황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 일단 국민의힘이 국회에서 개짓거리를 좀 해 주어야 민주당의 지지율에 도움이 된다. 워낙 국회에서 힘을 쓰지 못하니 평소 당연하게 싸지르던 개짓거리도 못해서 지지율만 오히려 오르고 있는 중이다. 원외에서 자기들끼리 보이는 개짓거리를 보면 기회만 조금만 주어도 당장 예전의 비호감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국민의힘이다.

 

적이 있어야 한다. 그보다 자기 손에 들린 너무나 과도한 힘을 줄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느닷없이 로또에 맞아 버린 일용직 노동자의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겨우 한 달 100만원도 쓰지 못하던 구차한 삶에 한 번에 무려 수 십억이라는 돈이 들어오고 말았다. 오히려 무섭다. 오히려 불안하다. 더구나 그로 인한 언론과 여론의 공격도 너무 치열하다. 리미트도 되어 준다. 이제 다시 위원장 자리가 국민의힘에 넘어가면 그나마 추진하던 개혁법안도 좌초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안되니 서두를 것은 서두르자. 소인배들이라 그렇다. 그런 수준을 벗어나 오롯이 자기길을 갈 수 있어야 큰 정치를 할 수 있다. 언론에 중요하게 이름이 오르내리는 정치인이란 대개 그런 이들이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이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미국 민주당을 보면 된다. 어째서 샌더스가 민주당 지지층 안에서 크게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는가. 그리고 또 어째서 그럼에도 민주당 지지층에서 그를 비토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 결집하게 되었을까. 미국 민주당은 한국 민주당보다 오히려 더 보수적이다. 그들 자신이 또 하나의 기득권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서로 다른 기득권을 대변하며 그로 인해 서로 다른 성향과 지향, 목적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벗어나 있던 것이 샌더스였던 것이었고. 버락 오바마의 일부 진보적인 정책은 다수 보수적인 정책들과 균형을 이룬다. 

 

어차피 지금도 그리 나쁘지 않으니 더 나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진 것이다. 유시민이 한나라당 집권을 바라보던 시각도 이와 유사했다. 민주당 주류 입장에서 지금도 크게 문제가 되는 것들이 없기에 그저 적절히 더 큰 문제만 일어나지 않게 조율하고 관리하는 정도만으로 더 크게 나빠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름대로 좋은 결과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럴 위치에 있는 인간들이기도 한 것이다. 변호사에, 기업가에, 성공한 전문직들이 얼마나 사회적 약자의 시각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인가. 이입하며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당하는 놈만 당하고 억울한 놈만 억울하다. 나와는 상관없다. 그게 보수란 것이다. 그런 놈들끼리 서로 합의하며 가능한 것들을 바꿔나가는 게 사실상 현실정치란 것일 테고.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요즘 내가 많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치의 폭이 좁아졌다. 사실 더 거대한 더 미래의 정의란 것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연금이나 받으며 살아가게 될 나에게 크게 해당사항이 없다. 그런 건 아직 남은 세월이 길고, 혹은 남겨주어야 할 후손이 있는 이들의 몫인 것이다. 한 걸음만 나가도 좋다. 아니 그 한 걸음을 물러서지만 않아도 크게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이명박근혜의 사면은 아니다. 그게 내가 이낙연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건 후퇴도 너무 큰 후퇴다.

 

아무튼 의원총회의 결과만 보더라도 민주당 정치인들의 속내나 사정 성향등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더구나 상임위원장 자리의 양보라는 것도 원래 작년 원구성하면서 민주당이 제안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법사위의 운영에 대해서는 국회법에 명시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크게 걸리기는 하지만 뭐 어차피 중요한 법안 다 통과시키고 나면 크게 문제도 아니다. 남은 기간 동안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역시 너무 더워서 힘이 빠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송영길이 당대표가 되고 기대치를 크게 낮춰 버린 탓일까? 그보다 이낙연 체제의 민주당에 너무 실망해서 이나마라도 의지를 보이는 것이 반가운 것일까? 민주당은 이제 주류정당이다.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운동가의 시대는 끝나가는 듯하다.

이재명을 보면 젊은 시절의 유비를 떠올리게 된다. 유비가 괜히 공손찬과 형아우하며 같이 놀았던 게 아니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오로지 자기 실력만으로 인정받고 그 위치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런 만큼 때로 오만하고 무례하며 완고한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안희현 현승으로 있던 시절 독우가 내려와 뇌물을 요구하자 바로 매질하고는 도망쳐 버린 것이 그 한 예다. 내가 옳으니 세상이 뭐라 하든 나는 옳다.

 

자수성가한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내가 지금의 위치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나의 노력과 실력 때문이다. 나의 판단과 나의 방식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의 조언도 가려서 듣게 된다. 내가 옳다고 여기면 좋은 조언이고, 아니라 여기면 다 쓸데없는 헛소리들이다. 공손찬이나 원소나 그런 점에서 자기에 대한 확신 때문에 한 시대를 풍미한 만큼 결국 그것이 결점으로 작용하며 몰락한 이들이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공손찬과 유비가 다른 점이다. 공손찬은 하북을 거의 평정한 상태에서도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런 자신을 밀어붙였지만 유비는 어느새 천하의 대의에 귀를 열고 여론과 명분에 마음을 여는 법을 깨우치고 있었다. 역사가 유비를 기억하고 공손찬을 기억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패한 관리를 두들겨패고는 관직도 뒤로 하고 도망치는 모습에 환호하더라는 사실만 기억한다. 후련하다. 시원하다. 통쾌하다. 하지만 그 결과 유비는 그나마 얻은 관직도 내던지고 일개 군벌인 공손찬에 자신을 의탁해야만 했었다. 과연 후한의 관리를 폭행하고 관직마저 무책임하게 내던진 채 도망친 자를 후한의 체제는 이후로도 다시 발탁해서 기회를 주려 할 것인가. 그래서 유비가 공손찬 휘하에 있는 동안 자기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변신을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공융을 도와주려 북해로 간 이후의 유비와 독우를 두들겨패던 유비는 다른 사람이라 봐도 좋을 정도로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독우를 두들겨패던 당시의 유비와 닮은 것은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하겠다고 이릉으로 쳐들어가던 당시의 유비였을 것이다. 그게 유비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대부분 생을 유비는 천하의 대덕으로써 인애와 관용의 대명사로써 살아가고 있었다. 이재명에게 가장 기대한 부분이었다. 유시민이 기대한 부분들일 테고.

 

지난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재명이 민주당 안에 강한 비토층을 만든 이유였을 것이다. 자기에 대한 강한 확신은 자기의 적이라 여기는 상대에 대한 강한 적의로 흔히 나타나게 된다. 자기를 절대시하다 보니 자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쉽게 단정하고 적대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경선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역시 성장했구나 싶었는데 역시 본질이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지지자가 자기에게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문자로 쏟아냈다고 바로 그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공개적인 장소에 올리다니. 자기에 대한 강한 확신이 부당하다 여기는 요구나 질책 비판등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재명을 속좁다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재명이 유비처럼 되러면 진짜 몇 번은 죽었다 살아나는 시련이 필요한 것일까.

 

분명 많이 발전하기는 했다. 정치인으로서 확실히 비약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때때로 보이는 이런 모습들이 불안감을 부추긴다. 공손찬의 최후가 너무나 비참했던 것처럼, 유비가 이릉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순간들처럼 자기에 대한 너무 강한 확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쉽게 좌절로 절망으로 바뀌고 만다. 그래서 그릇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재명의 그릇은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아쉬운 부분이다. 지금으로서는.

처음에는 뭐 이런 호로잡놈 새끼들이 다 있나 욕부터 나왔다. 민주당은 정말 끝났구나. 다시 열린우리당 꼴 나는구나. 이제 지지할 일 없겠다. 그런데 추가된 내용을 보니 또 그게 아니네?

 

작년 총선 끝나고 원구성하던 무렵 흘러나온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예 국회의 입법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는 법사위의 기능을 약화시킨 뒤라면 임기 후반기 쯤 법사위를 국민의힘에 양보할 수도 있다. 뭔 말이냐면 지금 법사위가 문제인게 상임위 위에 상임위로 아예 법사위에서 뭉개려 작심하면 모든 법안의 상정 자체를 막을 수 있었는데 더이상 그러지 못하도록 장치를 마련하고 나면 누가 법사위원장이 되든 문제가 되지 않게 될 것이란 이야기였다.

 

법사위에서 심의하는 기간도 60일로 단축하고 심사내용도 자구 등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나면 앞으로 누가 법사위원장이 되든 이전과 같은 혼란은 없을 것이다. 그것만 가능하다면 법사위를 두고 지금처럼 서로 싸울 이유가 없다.

 

민주당의 문제가 뭐냐면 무엇보다 너무 민주적이란 것이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타도해야 할 악 쯤으로 여기는데 민주당은 대부분이 그런 국민의힘까지도 함께 국정을 책임져야 할 파트너로 여긴다. 지지자들이야 왜 저딴 새끼들이란 대화하고 협상하느냐고 비난하지만 원래 민주주의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내주는 것도 있어야 하고 그 결과 애초 목표에 미달하거나 상당부분 방향이 틀어지는 것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 100을 원한다고 온전히 100을 다 가져가는 건 독재자도 감히 하지 않는 짓거리다.

 

민주당이 적폐정당이라서가 아니라 원래 민주당 성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당처럼 입으로만 주장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의석이 부족할 때라도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협상을 시도하고 양보하며 타협을 이끌어내려 한다. 그래서 항상 뭔가 아쉬운 결과를 내놓는 경우가 많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그런 타협 자체를 거부하는 국민의힘이 문제인 것이지 민주주의 국가에서 타협을 통해 정치를 한다고 욕먹을 일은 아닌 것이다. 다만 지지자 입장에서 열받긴 한다.

 

정치적 부담이 사실 아주 없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상임위 전체를 민주당이 독식하고 있다는 건 정치저관여층인 중도층이 보기에 그다지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민주당 혼자서 뚝딱 모든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도 정치적인 부담이 적지 않을 터다. 그렇게 개혁을 이루면 지지자들이야 만족하겠지만 부동산법 등을 보더라도 반드시 옳은 법이라 해서 유권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을 것이란 기대는 너무 성급하다. 

 

혁명을 원하지 않기에 정의당이 아닌 민주당을 지지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납득해야만 하는 부분이라는 게 있다. 다만 중요한 건 법사위에 대한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나아가 그 전에 검찰개혁과 언론개혁과 사법개혁까지 완료하지 않으면 안된단 것이다. 거기까지 하고서야 비로소 민주당이 양보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답답하다. 하지만 원래 민주당 놈들 스타일이 이렇다. 송영길 잘못을 묻기에는 송영길 스타일과 거리가 상당히 멀다. 내부에 다른 힘이 작용한 결과다. 하여튼 이래저래 마음에 안드는 놈들이다. 비러머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