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예 처음부터 작심하고 체계를 갖추지 않는 이상 소규모 집단은 개인의 인연이나 인정에 이끌러 운영될 수밖에 없다. 지인들로 구성원을 만들고, 혹은 구성원이 서로 지인이 된다. 엄격한 규범이나 규칙보다 개인의 인정과 의리가 집단을 유지하는 질서이자 구조가 된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선진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적인 방식의 소규모사업장 같은 경우 그냥 사장과 임원, 직원들이 거의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낸다. 실제 그 가운데 다수가 가족이거나 친척이거나 친구인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을 일일이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려 해서는 그래서 곤란할 수 있다.


고작 4년짜리 고용이다. 4년이 지나 재선에 실패하면 뿔뿔이 흩어져 남남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재선실패 이후에도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시 선거에서 이기기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국회의원의 친인척채용이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누구나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일할 권리가 있다.


차범근 축구교실과 관련한 논란도 결국 그런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적당히 좋게좋게. 서로 좋은 의도로 만났으니까.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매몰차지 못했고 엄격하지 못했다. 곳곳에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런 정도는 허용범위인 것이다.


털려고 하면 얼마든지 털 수 있다. 개인의 인정에 의지해 유지되는 집단인 때문이다. 허술한 구조로 인해 편법이나 탈법들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런 것까지 컨트롤하는 것이 리더십일 테지만 처음부터 그런 리더십같은 것은 생각지 않은 경우라면 더 어쩔 수 없다.


침묵한 보람이 있었다. 어지간하면 언론보도는 믿지 않는다. 개인에 대한 보도는 더 신중해진다. 언론은 이미 갑이다. 강자다. 얼마든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위력적인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자칫 그 무기가 다르게 잘못 사용된다면?


그나마 보아하니 그동안의 경험으로 축구교실의 운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만큼 규모도 커졌고 익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잘려나간 누군가가 그 동안의 관행을 고발한다. 자기는 남인 것처럼. 언론은 받아쓴다. 대중은 부화뇌동한다. 한바탕 헤프닝이었다.


국가란 가장 크고 강력한 단위권력이다. 어떤 개인도 집단도 결코 국가를 넘어설 수는 없다. 국가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개인이나 단체가 국가를 이기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개인, 혹은 단체와 연대해야만 한다. 최소한 국가에 위협이 될 정도의 세력을 만들어 국가와 맞서야 한다. 그러면 이들 다른 개인, 다른 단체는 어디에서 오겠는가?


성주군 혼자만의 힘으로 정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성주군민의 힘만으로 정부가 하겠다 밀어붙이는데 그것을 과연 거부할 수 있겠는가? 정부 뿐만 아니라 정부에 우호적인 개인이나 단체 역시 정부의 편에서 성주군민들을 압박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여전히 성주군민들은 혼자의 힘으로만 사드배치저지와 원점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과연 공정한 싸움이며 가능한 싸움인가 묻게 된다.


외부세력이라 말한다. 결국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이다. 비단 성주군만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다. 혹은 아시아, 혹은 세계 전체. 하기는 그래서 세월호참사 때도 세계인들은 그것을 세계적인 비극이라 여겼는데 한국의 다수는 단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만의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성주군만의 일이다. 성주군 이외에는 끼어들지 말라. 성주군에 거주하는 성주군민을 제외한 누구도 이 일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분리한다. 조각조각 나눈다. 그렇게 나뉜 조각은 언제나 약하다.


그런데 크게 걱정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그동안의 여론조사들을 떠올린 때문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최소한 사드의 성주군배치에 대해서만큼은 그다지 적극적이 되지 않는 이유다. 정부의 결정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거부하려는 성주군민의 노력은 그다지 동조하고 싶지 않다. 성주군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문제지만,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누구의 문제일까? 불과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밀양에서도 공권력에 맞서던 지역쥔들이 뿔뿔이 찢기어 흩어지고 말았다.


정부가 강하기 때문이다. 국가란 개인이나 특정한 단체가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때문이었다. 그래서 개인이 힘을 모은다. 단체들이 손을 잡는다. 쉽지 않은 대상이 된다. 위협적인 상대가 된다. 최소한 턱밑까지는 치고 올라갈 수 있다. 찢기고 난 조각들은 얼마나 허무한가. 굳이 긴장할 이유마저 찾지 못한다. 결국 개인과 단체들은 국가가 의도한대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손을 잡는 것이다.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학교에서부터 그렇게 배우지 않는다. 남을 이기고, 남을 꺾고, 그 위에 군림하기를 가르친다. 함께 사는 법은 집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평생 타인과의 연대를 거부하다가 비로소 외부세력의 도움이라도 필요한 때가 온다. 도울 것인가. 도움을 받을 것인가. 우습다.

모든 권력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권력의 대상이 되는 모든 피지배층의 단합이고 단결이다. 피지배층의 존재야 말로 권력에 대한 증거이고 증명이다. 모든 피지배층이 권력을 부정한다면 권력은 그 존립근거를 잃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권력자는 피지배층을 분열시키려 노력해 왔었다.


전국민이 하나가 되어 저항하면 더구나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만일 국민이 분열한다면 정부는 그 가운데 분열된 일부만을 상대하면 된다. 그 일부만을 다른 국민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다면 고립된 소수는 전혀 정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참 오래된 레파토리다. 당신들은 단지 소수일 뿐이다.


하기는 그래서 성주가 선택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소수로 만들기 적당하다. 어차피 주민의 수도 많지 않고 주민들이 반대하더라도 그 영향력도 그리 크지 않다. 지역이기주의로 몰아간다. 개인의 이기가 문제다. 개인의 그릇된 욕심이 문제다. 그 과정에서의 폭력성을 부각시킨다. 도덕성에 흠집을 낸다. 그러므로 성주 주민들은 다른 국민들과 같지 않다. 전혀 다른 존재다. 


새월호 때도 그랬었다. 거슬러거슬러 노무현 정부에서도 부안군민들을 그렇게 정부와 당국이 몰아세우고 있었다. 불순한 외부세력이 있다. 불순한 외부세력이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다. 더욱더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가 나온다. 시민들이 연대해서는 안된다.


솔직히 나 역시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그다지 나서기 꺼려진다. 연대란 상호적인 것이다. 내가 상대의 손을 잡아주면 상대 역시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같은 신뢰야 말로 연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여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성주 주민들은 어떠했는가. 그같은 연대의 시도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여주고 있었는가. 그동안 수많은 이슈에 있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여론조사들을 찾아본다. 과연 그들은 연대할 수 있는 대상일까.


그동안 많은 - 특히 보수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빨갱이라 몰아세웠던 사람들이 같은 과정을 거쳐왔을 터였다. 사소한 꼬투리로 이기적이고 불순한 목적을 가진 집단으로 몰아세워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그에 부화뇌동하며 빨갱이라 욕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그들이 같은 처지가 된다. 이성으로는 그래서는 안된다 여기는데 감정으로 나랑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심드렁해지는 이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은 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권력과 맞서기 위해서는 약한 개인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배신당할지라도 내민 손을 잡아줄 수밖에 없다. 그래야 권력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당장의 감정을 이유로 고개를 돌렸다가 결국 개인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일방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최소한 지역주민의 동의를 오랜시간에 걸쳐 보다 철저하게 구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동안 정부와 여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온 지역들인 것이다. 진심을 가지고 설득했을 때 들어주지 않을 리 없다. 목적이 문제가 아니라 방법이 문제고 절차가 문제다. 대통령은 결정만 하고 해외로 떠나버리고 총리는 일부러 폭력사태를 유도하는 듯 지역주민들을 자극한다.


갑갑하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들이 반복되고 마는 것일까. 너희는 따로다. 너희는 소수다. 나머지는 문제없다. 진짜 문제없다는 듯 나머지는 모두 침묵한다. 그렇게 하나씩 점령되어간다. 밀양 역시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가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말한다. 사드를 배치할 수는 있다. 그 장소가 성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식이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 국가다. 민주주의 국가에 어울리는 절차와 과정이 있다. 그에 반대한다. 성주라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분노한다.

원래 포유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척추동물은 척추가 수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수평으로만 움직인다. 바다에서 헤엄치는 상어와 고래를 비교해 보면 더 분명해진다. 상어는 수직으로 난 꼬리지느러미를 좌우로 움직여 추진력을 얻는데 반면 고래는 수평으로 난 꼬리를 위아래를 움직여 추진력을 얻는다. 육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도마뱀이든 악어든 땅위에서 달리려면 요란스러울 정도로 몸을 좌우로 비틀어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이든 바다든 땅이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속이야 크게 상관없지만 중력의 영향을 크게 받는 육지에서 이전처럼 척추를 좌우로 크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가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몸 전체를 움직여야 하니 에너지소모도 크고 그만큼 속도도 거의 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한다. 초기포유류가 돌연변이를 통해 척추를 수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면 그럴 수 없었던 초기공룡의 일부는 아예 상체를 일으켜서 척추를 움직이지 않고 두 뒷다리로만 이동하는 방법을 진화를 통해 획득하게 된다. 앞발까지 합친 만큼 거대해진 뒷다리로 일어서서 달리게 된다면 척추를 움직이느라 몸 전체를 비틀어야 하는 비효율과 비능률을 피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그러고 났더니 이제는 앞다리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같은 진화과정에서 뱀도 출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뱀의 진화는 먼저 앞다리의 퇴화에서 시작되었다. 아예 어깨뼈부터 앞다리가 사라지며 뒷다리까지 퇴화되어 몸에 묻히게 되었다. 땅위를 빠르게 달리는데 앞다리는 필요없다. 뒷다리만 비정상적으로 크고 강하게 진화하며 앞다리는 점차 작아져 흔적만 남게 된다. 티라노사우르스의 위압적인 모습과는 달리 앙증맞기까지 한 앞다리가 이를 보여준다. 과연 티라노사우르스에게 있어 앞다리란 어떤 의미였을까. 어떤 유의미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까. 


물론 앞다리가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았다. 뒷다리로만 서서 달리다 보면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 갑작스럽게 방향을 전환하거나 할 때 중심을 잡기도 어렵다. 그럴 때 새들은 날개를 펴서 균형을 맞춘다. 날개를 활짝 펴서 속도를 조절하고, 때로 날개를 빠르게 움직여 필요한 움직임을 더하기도 한다. 공룡의 앞다리에 깃털이 - 그것도 아주 큰 깃털이 자라기 시작한 것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다. 처음부터 날기 위한 도구로서 깃털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어린 새끼이거나 아니면 개체의 크기가 작을 때 깃털은 어느새 항온동물로 진화한 공룡의 체온을 보존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점차 깃털이 진화하며 퇴화된 공룡들의 앞다리에 역할을 부여하게 되었다. 공기의 저항을 이용하여 항력과 양력을 부여함으로써 육상에서 달릴 때 더 효과적으로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다. 단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익룡이 새의 직접적인 선조라 여기는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이처럼 처음 공룡의 깃털은 날기 위한 것보다 다른 목적을 위해 생겨났고 진화하고 있었다. 앞다리의 큰 깃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다리로서 기능을 잃은 앞다리가 커다란 깃털로 인해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게 되었다. 빠르게 달리면서 날개짓을 통해 얻게 된 양력은 이후 공룡들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었을 것이다. 더 크고 더 강력한 날개가 더 큰 양력을 부여한다. 어떤 공룡들은 여전히 땅위를 달리고 있지만 어떤 공룡들은 아예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다른 차원의 세계로 날아가게 되었다. 땅위를 잃은 대신 공룡들은 새로운 하늘의 지배자가 되었다.


물론 모든 공룡이 새가 된 것은 아니었다. 공룡 가운데서도 조반류만이 살아남아 새로 진화하고 있었다. 효율의 문제였다. 중생대 말 갑자기 밀어닥친 환경의 변화는 보다 새로운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종들에게만 생존의 기회를 남겨주었었다. 하늘을 날 수 있었고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빠른 수직이동이 가능했다. 육상에서는 새롭게 진화하기 시작한 포유류에 밀리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일부 새들은 땅위에서 빠르게 달리며 자신들의 영역을 지켰다. 단, 인간이 나타나기 전까지. 인간의 자연파괴는 아주 일찍부터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현재진행형이다.

병자호란 당시의 일이다. 너무나 빠른 청군의 진격에 강화도로도 가지 못하고, 더구나 물자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틀어박혀 농성하기만 아마 한 달 여, 결국 견디지 못하고 화친을 주장하던 신하들의 의견을 쫓아 청에 항복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항복문을 쓴 것이 주화파의 핵심이었던 최명길이었다. 그리고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은 끝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최명길이 써온 항복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찢는 사람이 있으면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때 김상헌이 찢어놓은 항복문을 주워 다시 이어붙이며 최명길이 했던 말이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이런데 끝까지 무모하게 항전을 주장하는 것도 어리석고, 그렇다고 한 나라의 대신들씩이나 되어서 당장의 곤궁함에 꺾여서 무작정 항복만을 주장하는 것도 한심한 것이다. 누군가는 현실을 쫓고 누군가는 이상을 지킨다. 누군가는 현실을 위해 모든 수모와 굴욕을 견디며 누군가는 이상을 위해 고고한 자존심을 지킨다. 그게 정치다.


더민주의 정체성만 놓고 보자면 사드배치 반대가 맞다. 하지만 더민주가 보다 오른쪽으로 외연을 확장하자면 안보이슈에서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자칫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과 관계된 것이다. 더구나 정부가 핑계삼고 있는 것이 북한이고 수도와 대한민국 영공과 영토의 방어다. 그같은 정부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는 유권자마저 더민주는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양자를 모두 만족시킬 것인가.


지난 총선에서도 김종인은 이른바 친노를 쳐내며 비노반노성향의 유권자들을 만족시켰고, 한 편으로 문재인은 안에서 원래 지지자들을 다독이며 후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김종인이 명분을 주고 문재인이 안에서 실리를 다진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원래 김종인과 문재인이라는 어쩌면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전혀 상반된 성향의 인물들이 더민주라는 울타리 안에 공존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보수의 입장은 김종인이 대변하고, 원래 야당지지자들의 바람은 문재인이 대신한다. 김종인은 더민주가 완전히 보수와 등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문재인은 더민주가 여전히 지지자들이 바람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희고 검은 늑대가 서로 싸우면 그 가운데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어느 한 쪽만 있다면 더이상 누구에게 먹이를 줄까 신경쓸 필요가 없다.


이러라고 김종인을 영입한 것이다. 보수적인 한국유권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여전히 당대표로서 중요한 사안마다 보수정치인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더민주의 맨앞에 내놓는다. 김종인이 입장을 정리하면 이어서 더민주에서 다른 목소리들이 섞여 나온다.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것은 당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파국을 바라지 않으며 확실한 중심이 있다는 사실이 더민주를 안전하게 노선투쟁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사실 투쟁도 아니다. 이런저런 논의가 있고 갈등이 있고 그 가운데 당론이 정해진다. 그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비난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만큼 김종인은 야당에 있어 이질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마저 포함해서 더민주는 집권정당으로 가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김종인마저 아우른다. 김종인과도 공존한다. 보수와 진보가 더민주 안에서 하나가 된다. 더민주에 비판적이던 보수적인 유권자들을 안심시킨다. 어떻게 해도 김종인은 경제민주화라는 아젠다를 가지고 더민주에서 큰 일을 해낼 사람이다. 크게 본다. 단지 과정이다. 나가고 있다.

사실 이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해 온 내용이다. 군인을 민간법정에 세우면 된다. 군검찰과 군판사가 아닌 민간인 검사와 민간인 판사가 수사하고 판결내리도록 하면 된다.


대개 상급자다. 혹은 상급자와 동기이거나 선배이거나 후배다. 영향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강한 군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제대로 된 판결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군사법정이란 결국 군에 대해 지은 잘못을 심판하는 곳이다. 민간에서 집장 좀 임의로 빠졌다고 무슨 처벌씩이나 받을 일이겠는가. 상사의 업무지시에 불복하면 그냥 징계받거나 잘리고 나면 그만이다. 그마저도 실제 심각한 물질적 피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검찰이나 법원이 나서서 판단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방산비리는 군에 대해 지은 군인의 잘못인가.


나라의 세금이다. 대한민국은 문민통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국방예산이라고 그게 모두 군의 재산이 아니다. 민간의 재산 가운데 군이 필요하다 해서 나누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누가 누구에게 물어야겠는가. 너무 당연해서 굳이 말을 덧붙일 의미가 없다. 나라의 세금을 도둑질했으면 나라가 그 죄를 물어야 하고 나라의 법정에서 심판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마저 군사법정에서 자기들끼리 하겠다 주장한다.


이미 군의 사법체계는 군내부의 비리에 대해 엄단할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그동안의 판결들을 통해 모두에게 입증한 터다. 군은 결코 같은 군인에게 - 더구나 고위장성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들을 처벌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들이 저지르는 죄가 끊이지 않는다. 답은 명확하다. 단지 어쩔 수 없이 부패한 군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특정정치집단의 이해가 그것을 막아서고 있을 뿐.


군인에게 명예란 없다. 특히 한국의 군인들에게 명예란 단지 사치에 불과하다. 진짜 명예를 안다면 저따위로 판결을 내릴 수 있을 리 없다. 법을 어기고도 자기들끼리 입과 손을 맞추며 죄가 아니라 주장한다. 모두가 죄라는 걸 아는데 자기들끼리만 아니다. 명예를 모르는 자를 존중할 필요는 없다. 


한국군에서 특히 국방과 관련한 비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자기들끼리 죄짓고 수사하고 판결까지 내린다. 선배 후배 동기가 모여서 죄짓고 수사하고 결론까지 내린다. 대단한 군대다. 그저 웃을 뿐이다. 저놈들이 애국을 말하고 안보를 말한다. 대한민국이다.

감독이 이제 그만 내려오라는데 투수가 마운드에서 버티고 있다. 감독이 판단해서 교체하려는데 오히려 선수가 달려나와 감독에게 항의를 한다. 아마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팀이 있고 선수가 있는 것인데 아무리 스타플레이어라고 감독의 지시를 거부해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에이스니까.


에이스란 한 마디로 책임지는 사람일 것이다. 팀이 연패에 빠졌다. 그렇다면 당연히 에이스가 마운드에 올라가서 그 연패를 끝내줘야 한다. 거꾸로 팀이 연승을 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역시 에이스가 마운드에 올라가서 연승을 이어가야 한다. 하다못해 운이 따르지 않아 결국 지게 되더라도 불펜이라도 쉴 수 있게 이닝이라도 많이 먹어줘야 한다. 최소의 실점으로 에이스의 패배가 아닌 팀의 패배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에이스까지 무너지면 더이상 기댈 곳이 없다.


팀이 지고 있다면 그라운드에 선 동료들의 눈은 자연스럽게 당장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로 모이게 된다. 이 사람이 공만 잡을 수 있다면.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이 사람에게 공만 넘기면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고 골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모두의 기대를 현실로 만들어줄 때 그를 에이스를 넘어 리더라 일컫게 된다. 굳이 일일이 말로 지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를 중심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모이게 된다. 그를 중심으로 모든 플레이가 이루어진다. 그가 있기에 희망이 생기고 그가 없으므로 모두가 절망하게 된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포르투갈팀의 주장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대해 그리 비판해 왔었다. 너무 욕심이 많다. 지나치게 이기적인 플레이를 한다. 하지만 그는 데뷔초반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자신이 소속된 팀의 에이스로 군림해 왔었다. 호날도 자신이 돌파구를 열어야 했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의 수비를 뚫고 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끌었어야 했다. 양보하는 에이스는 에이스가 아니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고 여기는 에이스 역시 에이스가 아니다. 누구도 그런 에이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못해도 단 한 사람 내 몫까지 모두 대신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에이스라 부른다. 보통의 경우라면 욕심이 많은 것이지만 에이스라면 그것은 책임감이 강한 것이다. 


다리가 완전히 꺾였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심각한 부상으로 보였었다. 몇 번이고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와 경기를 계속하려 했지만 절뚝거리는 다리로는 장기인 헤딩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이상 팀에 도움은 커녕 오히려 짐만 될 것이기에 교체되어 나가면서도 그는 울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라운드에서 팀의 승리를 이끌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고 분노였다.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몫이다. 설사 더이상 뛸 수 없게 되었어도 그는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한다. 감독의 자리마저 꿰차고 극성스러울 정도로 팀을 독려한다. 분명한 것은 호날두가 부상으로 교체되고 프랑스팀은 집중력을 잃은 반면 포르투갈팀은 이전보다 더욱 집중해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같은 의지가 자연스럽게 동료들을 감화시키고 그의 의지에 자신을 동화시키게 만든다. 더이상 호날두는 그라운드에서 함께 뛸 수 없지만 이미 그는 자신들과 함께였다.


최소한 책임있는 자리에 있어 양보란 미덕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비겁이다. 무책임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해야만 한다. 어떤 욕을 듣더라도. 어떤 비난을 듣더라도. 욕심쟁이라 비아냥을 듣더라도. 그래서 결국 모든 책임을 자신이 다 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동료의 공까지 빼앗아 자신이 본 그 자리로 공을 몰아 힘껏 슛을 날린다. 이기는 것이야 말로 에이스에게 지워진 책임이며 의무다. 뒤가 없다. 오로지 앞만이 있다. 모두가 패배를 두려워할 때도 자신만은 승리를 믿는다. 자신이 모두를 승리하게 만들 것을 믿는다. 에이스의, 리더의 탐욕은 그래서 미덕이고, 리더의 집요함은 모두의 든든한 신뢰이자 기대가 된다.


2012년의 문재인은 분명 그같은 리더의 조건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었다. 무엇보다 대선에서 과연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는가 의심스러운 모습들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애초에 대통령후보로 선거에 나온 것부터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위에서 그를 떠밀었기에 나왔던 것이었다. 그랬던 만큼 내가 안되면 다른 사람도 못되는 것이라는 각오로 독하게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대로 생긴대로 성실하게 선거운동에 임하는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길 수만 있다면 발을 진흙탕에 담그고 손을 오물에 더럽히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그런 과감함이나 지독한 모습이 없었다. 인간적으로는 신뢰할 수 있지만 과연 정치인으로서 그를 기대해도 좋은 것인가.


인상이 바뀐 것은 작년 당시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경선에 출마하면서부터였다. 물론 그때도 여전히 그는 올곧았고 올바랐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 오로지 자신이어야만 한다. 당대표가 되기 위해 신념을 꺾고 박정희 묘소에 참배하겠다는 공약까지 내세웠다. 2012년 선거에서 문재인이 직접 박정희의 무덤과 생가를 찾아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당대표가 되고 바로 치러진 재보선에서 참패한 이후 당내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흔들었을 때도 그는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쉽지 않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관철시켜야 할 혁신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혁신안만 제대로 자리잡으면 더민주는 달라질 수 있다. 전처럼 지리멸렬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자신이 해야 한다. 그리고 약속대로 당대표에서 물러난 뒤에도 아무런 당직도 없는 몸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총선의 승리를 위한 지원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홀로 빈 역사에 허탈하게 앉은 모습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렇기때문에 문재인을 중심으로 벌써 모여든 사람이 한가득이다. 문재인 자신이 진흙탕에 발담그기를 꺼려하기에 누군가는 직접 기꺼이 진흙탕으로 들어가려 한다. 참여정부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참여정부에서는 노무현이 언론과의 싸움까지 모두 도맡아 했어야 했었다. 이번에는 손혜원이 그 역할을 맡는다. 손혜원은 정면에서 야당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언론과 맞서 싸우고, 표창원은 야당에 적대적인 종편에 출연하여 야당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아마 이 가운데 일부는 필요하다면 기꺼이 악역도 맡아 줄 것이다. 결국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이 모든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자신들에게 있어 자존이며 명예이며 긍지다. 그만한 신뢰를 심어줄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을 움직여 자기가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있다.


안철수는 아니라 여기는 이유다. 유승민도 결국 자격을 잃고 말았다. 지난 총선에서 탈당까지의 과정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당의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승리해서 당도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었어야 한다. 단지 유승민 개인의 승리였다. 그것도 당의 패배를 전제한 승리였다. 새누리당 골수지지자들이 유승민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안철수는 야권지지자들로부터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패배를 이야기하며 자신이 원래 속했던 정당을 위기로 몰았다.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으려 했었다.


말 그대로 지금 문재인은 제 1야당 더민주의 에이스다. 당대표경선을 하는데 정작 문재인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이들마저 하나같이 문재인의 눈치를 보며 그와의 관계를 앞세우고 있다. 당내 최대계파의 수장으로 당대표는 물론 앞으로 당의 행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다만 이를 자각하는가. 그리고 이를 얼마나 어떻게 활용하는가. 때로 독단적일 정도로 당을 움직이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필요도 있다.


아무튼 새삼 펠레와 마라도나가 메시와 호날두에 대해 했던 대화들을 떠올려보게 되는 계기였을 것이다. 메시에게는 없고 호날두에게는 있는 그것. 바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척 불편하게만 여겨지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당신들이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해주지 않으니 안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리더십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내 탓인 이유는 내가 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실력과 자격이 있다. 야당대표일 때는 잘만 하더니. 우스울 따름이다.

약자에게는 반드시 친구가 있어야 한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손내밀 수 있는 크고 강한 친구면 더 좋다. 유사시 든든한 방패가 되고 평시에는 믿음직한 배경이 되어 준다. 물론 그에 따른 대가는 필수다. 손해와 수모를 인내하지 못한다면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란 무척 힘들다.


하지만 한 편으로 약자에게는 적이 있어서는 안된다. 결국 도움을 청하더라도 실제 도움을 줄지 말지는 강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만에하나 도움을 거절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약자 자신이다. 그러므로 만일을 대비해서 든든한 우군을 만들어 놓되 그렇다고 앞장서서 다른 누군가와 적대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누군가의 편에 서서 그와 함께 하더라도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조차 자신은 적이 아님을 각인시켜야 한다. 최소한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적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멍청한 짓이었다. 그러고 싶다고 우리나라가 이제와서 미국과의 동맹을 저버리고 중국과 함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대한민국을 이루는 대부분의 중요한 부분들이 미국과 맞물려 발전해 왔었다. 미국 없이는 대한민국도 없다. 여전히 반미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이른바 진보진영도 반성을 해야 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행태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그같은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적 행태로부터 자유로운가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이익이 된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된다. 누구와도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지금 가장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미국일 터였다. 그런데 그런 미국마저 등져가며 중국에 다가가는 모양새를 취했으니.


아차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한국이 중국과 헛짓하는 사이 일본은 더욱 미국에 밀착하고 있었다. 더이상 미국은 한국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과거 미국과의 동맹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역대정부였다면 굳이 사드배치를 하지 않더라도 미국이 그리 불쾌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여전히 한국은 소중한 우방이고 신뢰할 수 있는 맹방이다. 그런 한국이 중국과 적대관계가 되어 손해를 보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더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만한 대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보증을 요구하는 것이다. 중국과 적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미국과 이익을 함께 할 것을 확인시켜준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위안부협상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중국의 대응이다. 미국의 편인 것은 알았다. 미국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맹방인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가까이 있는 중국과 적대하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당연히 그럴 리도 없었다. 그런데 중국 자신이 불편해할 것을 알면서도 한국영토에 사드를 배치하겠다 선언하고 있었다. 미국의 편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첨병에 서기로 한 것이다. 미국의 친구인 동시에 중국의 적이다. 중국에게는 자신의 적을 곤란하게 만들 - 더구나 미국도 아니고 한국같은 작은 나라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들이 제법 많이 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현재 러시아를 넘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 가운데 하나다.


아주 곤란해졌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사드 빼자는 말은 못한다. 그 말은 곧 한미동맹 끝내자는 소리다. 그렇다고 사드배치를 강행하다가는 중국과 적대하게 된다. 중국과 맞물린 경제적 이익만 치명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다. 이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냥 배치하겠다 말로만 끝낸다. 언제 어디에 배치할지는 결국 이러고저러고 따지다 보면 다음 정부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우리가 책임은 지지 않겠다.


하다하다 이렇게 외교 뭣같이 하는 정부도 처음본다. 그나마 가장 미국과 긴장관계를 이루었던 참여정부조차 일단 미국이 하자는 것은 거의 들어주는 방향으로 갔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국의 현실에서 미국과의 동맹 없이 무언가를 독자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중국을 믿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기 자신을 믿은 것인지. 배신당했다며 사드배치 밀어붙이는 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최악의 외교이고 최악의 결과다,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누군가의 친구가 되는 것은 좋지만 누군가의 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국은 중국의 적이다. 그렇게 선언했다. 그러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찍지도 않은 나까지 결국 그 피해를 함께 받는다. 어처구니없다.

유학은, 더구나 특히 그 가운데서도 가장 원리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은 엄격하게 청렴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이기를 넘어 국왕과 백성에 대한 극단의 이타를 강요한다. 그것이 바로 군자이고 선비가 이르러야 할 궁극의 목표였다. 유자의 길이었고 사대부의 길이었다.


그러나 정작 성리학을 원리주의적으로 추구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건만 실제 현실에서는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는 모습들이 일상적으로 발견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같은 시대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 보더라도 조선의 사대부들만 특별히 더 부패했다는 느낌은 그다지 없다. 지금도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나라들에서조차 공직자의 부정과 관련한 이슈가 거의 끊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리학을 추구하는 유학자이기도 했던 당시의 선비들의 부패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째서?


별 것 없다. 그들이 성리학을 배우는 이유가 그것이었으니까. 송나라 진종이 권학가를 지으며 그렇게 선비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책속에 쌀이 있고, 돈이 있고, 집이 있고, 미인이 있다. 책을 읽어 학문을 닦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면 그 모든 욕망을 이룰 수 있다. 지극히 욕망에 솔직한 중국인다운 사고방식이다. 돈을 벌기 위해 공부를 하고, 더 큰 집과 더 아름다운 미인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고,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공부를 한다.


과거공부라는 게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혼자서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니 한 사람의 노동력이라도 소중했던 농경사회에서 한창 일할 나이의 장정 한 사람이 아무것도 않고 공부만 하고 있다는 자체가 가계에 큰 손실이다. 적당히 사교육도 받아야만 한다. 유행하는 과거문제가 있고, 그 문제들에 대한 모범답안이 있다. 어떤 식으로 답을 써내야 채점에 유리한가 하는 정보도 얻어야 한다. 성리학의 나라이면서도 정작 성리학의 경전이 정식으로 유통되고 있지 않았기에 책 한 권 구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자면 자신이 부자이거나, 아니면 문중의 힘을 빌어야 했었다. 이게 다 빚이다. 문중의 힘으로 과거에 급제했는데 관직에 나가서 문중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까?


사적으로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공적으로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난 다음에 국가에 대한 충성이고 백성에 대한 헌신이다. 그마저도 후기에 이르러 아예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파는 지경이 되고서는 백성들을 상대로 본전을 챙기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라가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개인의 이기와 가문의 욕망을 위해 관직에 나갔으니 공적인 책임이야 항상 뒷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굳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목적이다. 자식들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어느 공직자가 사석에서 민중은 개돼지라 당당히 이야기했다 기사가 나왔었다. 우리 사회에는 신분제가 필요하다며 자신 역시 더 높은 신분으로 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 말했다 보도하고 있었다. 너무 솔직하다. 모두가 그같은 생각을 하지만 굳이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다.


검찰이 국민의 눈치조차 보지 않고 마음대로 사건을 결론짓고 기소내용까지 결정하는 이유다. 홍만표에 대한 수사발표를 하며 그들이 과연 국민의 여론 같은 것이 신경이나 썼을까? 까불면 잡아들이면 된다. 국회의원이라고 다를까? 언제부터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회의원이었을까? 그런데도 그런 국회의원들을 좋아라 반복해서 뽑아준다. 국민을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그만큼 누려야 한다. 국민 자신이 느리는 부당함이나 불편함조차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대가다.


부패마저 개인의 권리다. 높은 자리에 오르며 그만큼 해먹는 것이다. 그만한 자리에 오르지도 못하고 해먹는데 문제이고, 그만한 자리에 올랐으면서 해먹지도 않는 것도 문제다. 그만한 자리에서 그만큼 해먹으면 자신 역시 그만한 자리에 오르면 그만큼 해먹을 수 있다. 권력은 사유화된다. 사유화된 사회적 지위와 책임이야 말로 신분의 다른 말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과 다른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가진 별개의 존재다.


그래서 불법과외까지 시켜가며 자식들을 보다 좋은 대학에 보내려 발버둥친다. 보다 사회적으로 더 큰 책임과 의무를 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개인의 이익과 집안의 영화만을 위해서. 한 사람 출세하면 가족이 모두 달라붙는다. 괜히 청렴한 척 해봐야 친척들 사이에 안 좋은 소리만 돈다. 나름대로 청렴하다는 정치인치고 집안문제가 없는 경우가 드물다. 국회의원 보좌관에 친인척을 밀어넣는 관행도 이해할 만한 이유다. 오히려 적당히 먼 친척일 경우 청탁의 대상이 되기가 더 쉽다. 건너 건너 들어오는 부탁이 더 거절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라 말하는가. 권력은 트로피다. 사회적 지위란 타이틀이다. 그에 따른 보상이 필요하다. 공적 자산은 그를 위해 준비된 보상이다. 전정부의 부정에 대해 정작 사회가 크게 분개하지 않는 이유다. 그만한 자리에 있었고 그만한 능력이 있었으니 그만큼 해먹은 것이다. 자기가, 자기 자식이 해먹지 못한 것이 원통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먹은 것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항상 그같은 문제제기를 할 때마다 특히 기성세대로부터 들려오는 말이 있다. 배아파서 그러는 것인가. 억울하면 출세해라. 출세해서 너도 그렇게 해먹으면 된다. 떡을 만지다 보면 콩고물이 묻기도 한다. 콩고물을 묻히려 떡을 만진다. 달라지지 않는다. 뿌리부터 썩어있다.


아주 오래전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닭이나 타조와 같은 새들은 원래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날 수 있었는데 지상에서 오래 생활하는 사이 날개가 퇴화되어 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 배웠었던 것 같다. 원래 날개가 있는 모든 새들은 하늘을 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몇몇 종류의 새들은 하늘이 아닌 땅에서 생활하느라 땅위에서의 생활에 알맞게 진화하느라 날개가 그 역할을 잃은 것이다. 한 마디로 닭이든 타조든 결국 날지 못하는 새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로 - 그래봐야 최초의 가설이 나오고 거의 십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 원래 새들 가운데는 하늘을 나는 새가 있었고 땅위를 달리는 새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더 정확히 공룡은 멸종한 것이 아니었다. 공룡 가운데 조반류 일부는 살아남아 지금 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공룡 가운데 다수는 깃털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공룡 가운데서 앞발 사이에 피막이 생기며 하늘을 날 수 있던 익룡의 종류도 나타나게 되었다. 원래는 땅에서 생활하며 깃털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그 가운데 하늘을 날게 된 공룡이 있어 새는 하늘을 날게 된 것이었다.


퇴화가 아니었다. 당연히 날기 위해 깃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화석으로 남은 공룡 가운데 일부는 실제 타조처럼 생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보면 육상생활을 하는 조류 가운데 타조는 물론 도도새 등 상당히 체격이 큰 종들이 적지 않았던 점도 공룡과의 관계를 입증해주는 듯하다. 과거에는 그보다 더 컸지만 변화된 환경으로 인해 조금씩 거대조류는 사라지고 지금처럼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조류들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체구의 차이로 인해 오해하게 되었을 뿐 그마저도 오랜 진화의 결과였다.


아무튼 유전적으로 공룡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티라노사우루스와 유전적으로 가장 유사한 것이 닭이라 하는데, 문득 이해가 되었다. 수탉놈들 얼마나 성질이 사나운가. 그 성질머리에 덩치까지 컸다고 생각해 보라. 날지도 못하면서 동남아의 정글에서 무수한 포식자 사이에서 인간에 의해 사육되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알을 많이 낳았던 것도 있지만 다 큰 수탉의 경우 암컷과 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울 수 있는 용맹함이 있었다. 그 용맹함은 어쩌면 먼 조상인 티라노사우루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지금도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성격을 두고 수탉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진화에 있어 퇴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새가 날개를 가지고 날 수 있거나, 혹은 날개가 있는데도 날 수 없거나. 진화란 현상이다. 법칙이나 진리가 아니다. 하나의 정답이 없다. 무수한 오답 가운데 살아남은 답들이 정답이 되는 것이다. 먼 과거에는 날개없이 땅위를 지배하던 거대한 육상조류가 있었고, 지금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들이 생존에 더 적합하다. 착각하는 것이다. 진화란 진보다. 그런 것은 없다. 진화에 의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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