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권위의 차이는 강제성과 자발성에 있을 것이다. 복종하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복종하게 되는 것이 권력,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복종하게 되는 것이 권위, 사실 권위가 권력보다 더 높다. 다만 권위를 가지고 지키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과 헌신과 절제와 희생이 필요하다. 하긴 그래서 권위인 것이다. 기꺼이 복종하는 것만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올 것이란 굳은 신뢰다. 권력은 그냥 주어진 권력을 휘둘러 복종케만 만들면 된다.

 

그래서 원래 소인일수록 권력을 탐하고 군자일수록 권위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부처가 제자들더러 이래라저래라 강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공자가 강제로 자기를 따르라 해서 제자들이 모여든 것이 아니라 공자의 인품과 학식에 대해 전해들은 이들이 그를 배우기 위해 찾아간 것이었다. 초창기 교회 역시 굳이 군사를 보내 이교의 사원을 부수고 성직자들을 내쫓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서 그 교리를 쫓아 개종도 하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개종을 강제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권력이란 미끼를 던지기 시작한다. 종교가 권력이 된다. 사실상 종교의 권위가 떨어지고 그 권위를 지킬만한 깜냥이 되지 않으니 권력이란 폭력에 기대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얻어지는 권력에 도취하게 된다. 종교가 타락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믿지 못해도 법원의 판결은 믿는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었다. 그래도 판사라면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른 올바른 판결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는가. 사소한 실수가 있어도 인간이기에 저지르는 사소한 오류일 뿐 그 자체로 판사들을 불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역시나 불과 십 수 년 전까지 언론이 떠들면 사실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기자라면 정의의 상징으로, 오로지 이 사회에 진실과 정의를 전하는 지성으로 진심으로 믿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슬퍼런 깡패들 앞에서도 당당히 야단칠 수 있었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깡패들조차 그런 기자들을 존중하며 양보했었다. 그러나 피곤한 것이다. 항상 바른 판결을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작은 실수조차 세상의 비난을 받아야 한다. 항상 올바른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사소한 오류로 인해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한다. 그에 비하면 권력과 손잡고 그의 손발이 되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탐나고 부러운 일인가.

 

물론 판사 자신은 오로지 법리에 따라서만 전광훈을 풀어주고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가 비상인 상활에서 최소 수 천 이상의 다중이 모이게 될 집회 역시 허가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판사들의 그런 판단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동안 판사들이 보여 온 모습들 때문인 것이다. 바로 직전 손혜원 전의원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이미 온라인을 통해 공개된 자료가 비밀자료가 되고, 증여세까지 모두 내고 양도한 것을 차명소유라 정의한다. 증여라는 법적 정의를 무력화시키는 판결인 것이다. 내가 사거 법적인 모든 절차를 거쳐 공증까지 받아 소유를 넘겨주는 행위가 바로 증여인 것인데, 그 모든 과정과 절차를 부정하고 최초의 소유만을 인정하여 차명소유로 정의한다. 이게 과연 납득이 되는 판결인가. 조국 전장관은 물론 청와대에 대해서도 그렇게 무차별로, 심지어 압수수색할 대상조차 특정하지 않은 부실한 영장신청을 받아서 발부한 행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가.

 

전광훈이 저리 난리치는 이유야 분명하다. 전광훈만이 아니다. 이번 광화문 집회로 인해 대부분 개신교 교회들이 욕먹는 이유일 것이다. 전광훈이 대표하고 있을 뿐 그동안 대부분 대형교회들의 태도와 행동들은 한결같았었다. 원래 다른 대형교회들이 각자 따로 하던 일을 전광훈이 대표하며 전면에 나서서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개신교를 국교로 만들겠다. 국가의 모든 정책에 개신교의 영향이 미치도록 만들겠다. 그 결과 교회가 권력과 결탁한다. 교회라는 말만 들어도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언론이 더해진다. 언론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코로나19로 인한 반발여론이 커지기 전 광화문집회를 그대로 받아서 정부를 까대던 언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 

 

바로 보수정당이 여전히 기득권으로서 대한민국 여론의 중심에 있는 이유인 것이다. 역대 보수정당의 주장들을 보면 한결같았다. 욕망을 긍정한다. 욕망을 인정한다. 사회적 정의와 규범을 무시한 채 오로지 개인의 무한한 욕망의 추구를 긍정하며 보장하려 한다. 법원이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도, 언론과 종교가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 하는 것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부추기며 지원한다. 일단 기득권의 범위 안에 들어오면 그들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집을 가지고 임대를 주어 임차인에 대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권력이 될 수 있게 그를 도우려 한다.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기득권이면 마땅히 보수정당을 돕는 것이 옳다. 민주정부는 항상 법원으로부터, 언론으로부터, 종교로부터 기득권을 빼앗으려고만 해 왔을 테니까.

 

그런 구조가 집약되어 드러난 것이 바로 이번 광화문 집회였던 것이었다. 법원이 전광훈을 풀어주고, 뻔히 예상되는 전광훈의 집회를 허가하고, 그를 통해 코로나의 급속한 확산을 사실상 도왔다. 코로나가 급속히 확산되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어야 경제는 더 어려워지고 정부의 지지율도 떨어진다. 자신들의 기득권도 강화하고 지킬 수 있게 된다. 홍문표가 멍청했던 것이다. 다만 멀리서 마음만 보내려는데 직접 몸을 움직여 찾아간 정치인이 있었다. 아니었으면 미래통합당 입장에서도 확실하게 꼬리자르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한국 보수의 정체와 그들이 결탁하는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종교와 사법부와 언론이 어떤 동기에 의해 하나가 되어 함께 행동할 수 있는 것인가. 자칭 진보언론마저 보수정권이 차라리 나았다며 한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홍세화며 진중권 같은 자칭 진보지식인들이 보수정당을 위해 기꺼이 행동에 나서는 이유인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어째서 그토록 민주당에 적대적인 것인가. 보수는 권력을 나눠주고 민주정부는 그 권력을 낱낱이 해체하고 흩어놓아 누구도 독점하지 못하게 만든다. 구조와 제도속에 숨겨 누구도 전유하지 못하게 만든다.

 

문재인 대통령이 분노한 지점이 아닐까. 일부 교회에 대해서만 분노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결탁한 사법부와 언론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일 게다. 이제와서 아닌 척 교회를 공격하는 언론들의 태도야 말로 저들의 본색인 것이다. 저런 놈들이 지금 현정부의 개혁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여론은 때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고. 마지막까지 현정부와 여당을 지지하며 반드시 정권재창출을 이루어내야 하는 이유다. 역겨운 현실이다.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김활란이다. 일제강점기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 가운데 하나였으며 군사독재 당시에는 가장 적극적인 부역자이기도 했던 김활란은 그러나 한국 여성주의의 주류인 이화여대의 총장까지 역임했기에 여성주의 진영 내부에서 끊임없이 재평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화여대에서 김활랑의 이름을 딴 상까지 제정하여 주고자 했던 것이었다. 매매춘에 그렇게 혐오를 드러내는 여성주의일 텐데 모윤숙이 주도한 매춘로비집단인 낙랑클럽의 총재를 맡았던 사실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친독재성향은 유명했었다. 일단 여성주의자들 대부분이 좋은 집안에서 나고 자라 여대를 다니며 공부한 이들이란 것이다. 태생적으로 기득권에 더 가까운 이들이었는데, 더구나 그들의 정신적 뿌리라 할 수 있는 김활란이나 모윤숙과 같은 여성지식인 상당수가 친일파에 친독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화 이후 오히려 여성주의라는 진보적 담론으로 민주화를 주도한 진보진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박근혜가 나타나며 바로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다. 과연 여성주의자들이 박근혜를 지지한 것이 그가 생물학적 여성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기득권적인 본성을 가릴 유용한 대상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덕분에 박근혜 정부에서 그들 여성주의자들은 다양한 요직을 맡으며 철저히 박근혜 정부와 한 몸이 되다시피 했었다. 어느새 여성주의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김재련이 바로 당시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위안부문제를 지나간 과거로 묻고자 시도했던 화해와치유재단의 요직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김재련만 그랬느냐면 박근혜가 대선에 출마한 그 순간부터 촛불혁명으로 탄핵되어 물러난 이후까지 여성주의는 철저히 생물학적인 여성으로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뒤에조차 박근혜의 복권을 주장하는 메갈이나 워마드 등 극렬 여성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다. 과연 자신들이 박근혜라는 굴레를 벗고 다시금 여성주의의 리더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것인가.

 

미투가 그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어 주었던 이유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미투가 있으면 무조건 피해자의 입장에서 지지하며 가해자로 지목된 이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만일 함께 돌을 던지지 않으면 그도 가해자와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돌을 어떻게 던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미투를 주도하는 여성주의자들 자신이다. 어떤 미투는 크게 키우고 어떤 미투는 없는 것처럼 묻어 버리고 그렇게 최초의 미투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서지현 검사는 오히려 내부로부터 음해를 당하면서 온갖 불명예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었다. 과연 여성주의자 가운데 누가 서지현 검사를 적극적으로 도우려 했었는가. 무엇이 여성주의자로서 자신들의 힘과 영향력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부정한 과거를 지워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결국에는 정의연 논란마저 불러일으켰던 것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의당과 자칭 진보의 스탠스를 알고 있다. 여성주의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정의연 사태 당시 이들 자칭 진보, 자칭 여성주의자들이 보인 모습은 일단 어찌되었거나 정의연부터 죽이고 보자는 것이었다. 왜이겠는가? 정의연이 대표하는 위안부문제의 역사적인 해결이라는 부분에 대해 명분을 약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박근혜 정부 당시 지지했던 정치적 타협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김재련이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을 들고 나오며 그런 노력들에 보답을 했던 것 아니었는가. 만일 정의연 사태를 통해 위안부문제에 대한 피해자중심의 역사적 해결이라는 기존의 방향에 대한 명분이 약화되지 않았다면 화해와치유재단 출신의 김재련이 여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나서서 설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위안부문제의 역사적 해결을 말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마저 조롱하는 댓글들이 넘치도록 달리게 된다. 박근혜 방식도 괜찮지 않았는가. 이명박의 방식도 상관없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굳이 정의연이 주장하는 완전한 해결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아가 친일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게 되면 김활란과 모윤숙을 다시 끄집어내어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오랜 숙원이다. 어째서 정의당과 녹색당이 한 데 뭉쳐서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외치고 있는가. 그런 여성주의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서다. 여성주의의 과거를 정당화하여 현재로 끌어오기 위해서다. 원래 여성주의와 민주화는 별개였었다.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이들이 억압받는 여성의 해방이라는 당위에 동의해서 여성주의를 지지하게 되었을 뿐 그 출발도 전개도 발전도 전혀 별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되었든 그동안 진보와 여성주의는 하나라 여겨지며 함께하고 있었는데 박근혜를 통해 그 균열이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여성주의는 민주화진영과 함께 갈 수 없다. 여성주의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여성주의는 민주화세력과 단절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성주의는 진보가 아니다. 단지 여성의 기득권만을 위한 운동이가.

 

그래서 여성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한 자칭 진보진영에서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목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권력의 분산과 견제라고 하는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동의 역시 사라져갔다. 검찰의 권력독점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검찰의 힘을 빌어 자신들에 동의하지 않는 서지현이나 진혜원 등을 압박하고, 사회적 권력을 사용해서 같은 여성인 계약직 방송인을 내쫓고, 그 대가로 여성인 앵커는 공영방송 뉴스를 통해 자사의 오보가 빌미가 된 수사심의위의 권고를 앞세워 검언유착 수사를 비판한다. 바로 자살도 가해라며 떠들던 바로 그 앵커였다. 이해가 되는가. 원래 여성주의가 가고자 했던 그 길로 돌아가는 도중이란 뜻이다.

 

정의당 내부에서 여성주의와 관련해서 일고 있는 논란들은 바로 이를 반영한 것이다. 어째서 진보를 자처하던 한겨레와 경향이 철저히 기득권의 개가 되어 똥이나 핥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가. 진보가 아니다. 그냥 여성주의가 진보인 양 여겨지던 시절 여성주의를 추종하던 놈들이 이들 언론으로 흘러가며 진보를 자처하게 되었을 뿐. 지금 경향일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이 과연 진보의 가치에 부합한다 생각하는 것인가. 검찰의 절대권력에 대해 오히려 옹호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여성주의의 본질에 더 가까운 모습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꿈에서 깨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군사독재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으니 이제는 남성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 저들이 바라는 여성주의는 그런 여성의 해방이 아니다. 여성인 자신들이 여성을 무기로 권력을 가지는 여성주의인 것이다. 박근혜를 지지하며 박근혜가 임명한 자리에서 박근혜의 입맛에 맞게 반여성적인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그런 여성주의다. 김재련을 옹호하는 것을 보라. 김재련이 박근혜 정권 시절 보인 행보들이 과연 여성주의의 가치에 맞는다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미 여성주의 그 자체가 되어 있는 상태다.

 

여성주의는 분명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중요한 진보적 가치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성주의가 진보적인가는 다시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전환자나 성소수자에 배타적인 여성주의를 과연 진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기득권 여성에 의한 약자인 남성과 심지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학대, 착취 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 것인가. 그래서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기만 한 것인가. 대영제국의 일개 노동자도 식민지 인도에서는 우월한 백인이며 영국 시민이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항상.

아니나 다를까 그놈의 여성주의라는 것도 참 선택적이다. 그 똥같은 성인지감수성이 사람을 가리면서 적용된다. 한국사회에서 미투의 시발점이 되었던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부로부터 조직적인 음해를 당했는데 그에 대한 수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작 언론이나 여성계 어디에서도 서지현 검사를 도우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검찰 내부의 음해만 믿고 서지현 검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중이다.

 

어째서 박원순 시장과 관련해서 서지현 검사에게 그토록 시험하듯 발언을 압박하고 있었는가. 그리고는 자기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그를 비판하고 있었는가. 그런데도 전혀 성인지감수성이나 미투의 피해자중심주의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상식 위에 여성이 있고 여성 위에 검찰이 있는 것이다. 언론과 여성주의자들 모두가 결국 한 몸이었던 것이다. 검찰을 위해 기꺼이 여성마저 희생해야 한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아, 김활란과 모윤숙이 한국 여성주의 초창기 지도자들이었을 것이다. 쌍년들.

 

서지현 검사의 경우를 보니 언론과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가 확인하게 된다. 현직 검사에 의해 성추행당했고 검찰출신 정치인에 의해 방조되고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던 피해자는 외면하고, 단지 주장만 있을 뿐인 박원순 시장의 고소인에 대해서는 사실검증을 위한 최소한의 의심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여성인 계약직 방송인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실작하도록 압박한다. 이 쌍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냥 자기 편하려는 여성주의인 것이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여성주의는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민주당과 관련해서만 성추문 사건이 끊이지 않는가. 보수정당은 성문제에 있어 청정구역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동안 보수정당을 지켜봐 온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심지어 자칭 진보정당조차 성문제에 있어서는 깨끗하지 못하다. 여성혐오에 빠질 것 같다. 정확히 여성주의 혐오다. 딱 일베 가서 놀면 제격인데. 벌레들.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언론과 자칭 전문가들의 비판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가장 우스운 것이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한 편으로 개인의 이윤추구의 결과인 부동산 가격까지 안정시켜야 한다는 요구다. 모순된다.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이윤추구를 제한해야 한다니. 이윤추구는 제한해야 하는데 개인의 욕망을 억압해서는 안된다니. 도대체 어느 정당에 맞추란 것인가?

 

물론 그들에게도 논리가 아주 없지는 않다. 다시 19세기로 돌아가서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공급량을 늘리면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가격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수요공급의 법칙이 나오는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토지를 소유하고 그를 통해 이익을 누리는 지주계급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토지란 고정되어 더이상 추가하거나 늘릴 수 없는 한정된 자원일 텐데 이를 소수의 지주가 독점함으로써 정작 시장에서 도전과 노력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부르주아들의 이익까지 최종적으로 갈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주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부르주아들이 알아서 공장을 짓고 상품을 생산하며 사람들이 도시에 몰리는 과정에서 땅값이 올라가고 지대수입도 늘어난다. 부르주아들도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이익의 상당부분을 지주에게 지대로 지불해야 한다.

 

정부에서 모든 서울시민들이 한 채 씩 아파트를 다 가질 수 있도록 공급계획을 세운다면 과연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있을 것인가? 물론 가능은 하다. 서울을 경기도 전체로 넓히면 된다. 멀리 평택이며 양주까지도 서울로 편입하면 어찌되었거나 서울 안에 충분한 아파트를 지어 공급한 것이 된다. 아니라면 지금 있는 서울의 경계 안에 아파트를 새로 지으려 해도 땅이 그리 많지 않다. 북한산자락에다 빼곡하게 아파트를 채워 넣을까? 아니면 인왕산 정상에까지 아파트를 지어 올릴까? 그도 아니면 모든 아파트를 50층 100층짜리 고층으로 지어 올려야 하는가? 그런다고 무려 천 만이 넘는 서울시민들을 각종 편의시설까지 포함해서 함께 담아내기에는 서울이라는 공간의 제약이 심하다. 도대체 어디에 얼마의 아파트를 더 지으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강남 아파트가 그렇게 비싼 것이다.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동네이니 당연히 경쟁이 붙으며 아파트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남을 무한히 넓힐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강남에 무한히 층수만 높여 가구수만 늘릴 수 있을 것인가. 재건축으로 용적률만 높여서 더 많은 가구를 지어 올린다고 강남에 살고자 하는 모든 욕망을 해소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단지 강남과 가깝고 강남과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강남을 따라 아파트 가격이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과연 강남에 새로 얼마나 많은 아파트를 공급해야 그 모든 욕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무엇보다 어째서 사람들이 강남에 몰려와 살고자 하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재건축에 대한 규제가 필요한 것이다. 그나마 실거주를 목적으로 한 다른 수요들과 달리 재건축은 단지 강남의 높은 부동산 가격만을 노린 수요이기 때문이다.

 

낡은 아파트를 재건축하면 용적률을 높여서 더 많은 가구를 지어 비싼 가격에 분양까지 하면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 그렇게 신축아파트의 공급이 중요하다 하면서 낡아서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구축아파트들이 오히려 끝도 없이 오르기만 하는 이유인 것이다. 오히려 재건축을 앞둔 구축아파트들의 가격이 오르면서 주변 아파트 시세까지 끌어올리고 덕분에 재건축된 아파트의 분양가격까지 올리는 연쇄반응까지 일어나게 된다. 재건축만 아니면 그런 낡은 아파트를 그렇게 비싼 돈까지 지불해가며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낡은 아파트까지 샀으니 재건축하면 더 많은 돈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용적률을 높이고 분양가도 올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말한 것처럼 주변 아파트 가격까지 올라간다. 과연 강남의 아파트가격이 실수요자들에 의해서만 그렇게 올라간 것인가. 그러면 재건축이 이익이 되지 않을 때도 이들 구축 아파트들이 강남 부동산 가격을 이끌게 될 것인가.

 

바로 지금 정부의 주택공급 정책을 두고 언론과 자칭 전문가들이 비판을 쏟아내는 지점인 것이다. 인터넷 등에서 반발여론이 크게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언론과 자칭 전문가들이 말하는 공급확대란 곧 재건축 확대다. 이미 재건축이 예정된 구축아파트를 중심으로 용적률을 높여 더 크게 더 많이 짓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공급을 늘리겠다며 여기저기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여 발표하니 반발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도 안되고 저기도 안되고 그러니까 강남 구축을 다시 밀고 용적률 새로 지어 기존의 집주인들 돈 더 많이 벌게 하자. 그러니까 기존의 집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공급은 늘리는 신의 한수와 같은 계획인 것이다. 그러나 말했다. 바로 그 재건축 때문에도 강남의 아파트 값은 끝간 데 모르고 오르고 있다고.

 

공급물량이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어디에 공급을 하느냐는 것이다. 강남에 더 많은 공급을 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강남에 더 많은 아파트를 지어야만 한다. 그러면 누가 이익을 본다? 이미 강남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들이다. 재건축 단지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은 물론 그로 인해 덩달아 가격이 뛴 주변의 아파트는 물론 이후 신축이 들어서며 분양될 경우 오르게 될 가격의 영향을 받게 될 집주인들인 것이다. 그래서 반발하는 것이고. 세금을 더 올려받기보다는 그렇게 집주인들이 이익을 보게 하면서 공급을 늘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정부에서 내놓은 대안이 아예 재건축 용적률 지금보다 더 높여줄 테니 절반을 임대아파트로 지어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공급이 중요하다면 임대로라도 물량을 늘리는 것이 중요할 텐데 여기에는 또 반대다. 집주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최선의 대안이었을 것이다. 이재명의 기본주택 개념이 언론을 통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것을 매우 아쉽게 여기는 편이다. 그렇게 강남의 수요에 맞춰 공급을 늘려야 한다면 임대주택으로 늘리면 되는 것이다. 더 많은 임대주택을 지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강남에 살 수 있도록 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한다. 직값을 잡기 위해 공급을 늘려야 하는데 그로 인해 집값이 떨어지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논란의 본질이다. 집값을 잡아야 하지만 집값이 떨어지면 안된다. 그리고 언론의 그런 농간에 집없는 서민들까지 놀아난다. 집주인들이 이익을 누릴 수 있어야 자신들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 개뿔. 덕분에 집값만 끝간 데 없이 집주인들을 위해 오르고 있는 중이다.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공급이 문제가 아니다. 어디에 공급해야 하느냐고, 그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집값은 잡아야 하지만 집값이 떨어져서는 안된다. 집주인들에 손해가 가서는 안된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통합당이 아무것도 않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않는 동안에는 티도 나지 않을 테니. 본질을 모르면 먹힌다.

 

어차피 지금 아파트 짓기 시작해도 다음 정권이나 되어어야 공급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 공급되는 신축 대부분이 박근혜 시절에 짓기 시작한 물량들이다. 장기적인 대책도 못되는데 그렇다고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기도 힘들다. 정부 입장에서도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란 것이다. 역시 어떻게 해도 공급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언론만 열심히 떠든다. 여론이 정부를 움직인다. 본질과 한참 벗어난 헤프닝인 셈이다. 웃긴다.

착각들 하고 있다는 게 공무원을 움직이는 것은 정당의 지지율이 아니다. 국회에서 어느 당이 다수당이 되든 공무원들이 알 게 무언가. 인사권을 가진 것은 장관이고 그 장관을 임명하는 것이 대통령인데.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에 따라 자신들의 앞날도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자기가 무사히 승진도 하고 좋은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행동과 사고의 기준까지 달라진다.

 

미래통합당이 아무리 더불어민주당보다 지지율이 높아도 지금 미래통합당 소속이거나 출신인 정치인 가운데 차기 대선후보로 지지율 10%라도 받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의 지지율은 35%를 넘어가는데 정작 대선후보 지지율은 당 소속도 아닌 현직 검찰총장 윤석열이 7% 넘게 받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지지율 40% 밑으로 내려갔다고 함부로 덤비고 게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고 당장 누군가를 밀어서 더불어민주당 차기 대선후보들을 넘어설 정도로 만들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모르겠는데 윤석열조차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금 미래통합당이 받는 지지도 단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반발이지 온전히 미래통합당을 지지해서는 아니란 것이다. 도대체 뭐가 그리 두려운가.

 

그런 점에서 이재명의 존재가 참으로 고맙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이재명 같은 인물이 열린우리당 안에 있어서 노무현과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노무현 정부보다 더 과격하고 더 급진적인 주장을 실제 행동까지 동반해서 보이는 인물이 있었다면, 더구나 차기 유력 대선후보이기까지 했다면 그렇게까지 보수진영이 노무현 한 사람만 집중해서 공격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낙연까지 추월했다. 오로지 자기 실력만으로 어느새 차기 대선주자 1위에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주장하는 바가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그것보다 더 선명하고 강경하다. 행동력까지 겸비했으니 더 위협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언론이 이재명의 존재를 감추려 하는 이유다.

 

덜떨어진 문빠들이야 이재명이라면 이를 갈겠지만 이재명 같은 인물이 전면에 나서 주어야 문재인 정부나 민주당 입장에서도 입지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재명보다는 온건하다. 이재명보다는 타협적이다. 한 편으로 민주당 안에는 이재명처럼 선명하고 강경하며 행동력을 겸비한 또다른 주장도 존재한다. 문재인 아니어도 이재명이 그 뒤를 이어 민주당의 정권을 이어갈 수 있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적 자산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문재인과 이재명이 서로 긴장관계에 있으면서 외연을 넓히고, 서로 협력하면서 신뢰를 키운다. 그 앞에서 윤석열 검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차라리 조국이 더 나았던 것처럼 차라리 문재인이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냥 문재인과 이쯤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검찰을 위해서도 낫지 않겠는가.

 

정의당처럼 작은 정당이야 하나로 뭉치는 것이 중요하다. 정의당만한 정당에서 서로 정책이 다르고 지향이 달라서 싸움만 하고 있다면 그저 콩가루가 되고 말 뿐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니다.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주장들이 치고받고 싸우며 세간의 이슈들을 모조리 민주당이란 거대한 그릇 안에 흡수해 담아낸다. 미래통합당 지지자조차도 심지어 민주당 안에서의 논쟁에 끼어들어 누가 옳네 누가 그르네 간섭하기 시작하게 된다. 정의당이 망한 이유다. 정의당이 제기한 이슈조차 민주당 안에서 논쟁이 시작되면 민주당이 모두 흡수해 가져가고 만다. 지금 민주당의 위기는 그런 이슈파이팅이 민주당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데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책은 있는데 이슈가 없다. 법안은 있는데 논리와 주장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성으로 판단하기보다 정책과 법안들에 대한 직관적인 반응이 지배하게 된다.

 

이재명이 정책이슈를 던지면 다른 정당이 아닌 민주당에서 받아야만 한다. 이재명과 청와대가 논쟁하며 때로 갈등하고 때로 협력해서 정책을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재명만이 아니다. 이낙연도 김부겸도 김경수도 가능한 모든 구성원들이 그런 논쟁들을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싸움이 아니다. 결국 그럼에도 결론이 내려지면 당론으로 모두가 따른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또한 정당정치의 기본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튼 그래봐야 이재명 이낙연 합치면 30%의 지지율에 다른 경쟁자가 보이지 않는 현실이 그냥 웃음만 짓게 만든다. 여유를 부려도 좋다. 다만 여유가 느슨함이어서는 안된다. 더욱 강하게 조이되 조급하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과정을 거치면서 그러나 확실하게 결과로써 보여준다. 차기 대권을 예약해 두고 있는 민주당의 지지율이 현재 무슨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총선은 4년 뒤고 대선은 2년 남았다. 간단한 산수다.

2012년 당시 문재인이나 안철수나 정치인으로서 보여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차기 대선주자로써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2007년 당시도 보여 준 게 뭐 있다고 문국현이 대선후보로 출마해서 5%가 넘는 표를 얻은 바 있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2002년 당시에도 지지자들 사이에서나 대통령감으로 여겨졌을 뿐 대부분 국민들에게 듣보잡이나 다름없던 노무현이 갑작스레 나타나 바람을 일으킨 바 있었다. 당시 노무현 바람이 한 순간에 꺼져버린 이유였다. 청문회스타의 이미지만으로 막연하게 지지하던 유권자들의 바람이 그의 정치적 행보에 바로 식어버린 때문이었다.

 

2017년 대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랬었던 듯하다. 국민들은 정치인을 싫어한다. 그래서 최대한 정치와 거리가 먼 사람에게 기대하며 호감을 보이곤 한다. 그래서 오히려 정치인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따라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기에 특히 정치저관여층에서 지지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정작 정치인으로서 무언가 보여주려 소신껏 행동하기 시작하면 바로 실망하며 이탈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2012년 당시 안철수도 그랬었고 문재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다만 2012년 대선 이후 보여준 두 사람의 행보가 정치인으로서 두 사람의 현재를 결정했다 봐야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결국 국민이 선택하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즉 정치인으로서 무언가를 보여준 사람인 것이다. 대선때마다 항상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결국 대통령이 되는 것은 오랜동안 검증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언가 해 보려 해도 압도적인 의석수의 여당을 상대로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지난 20대 국회에서처럼 국회를 보이콧하며 장외투쟁을 해 보려 해도 여당 혼자서 모든 법안을 심의하고 처리할 수 있는데 괜히 발목잡는다 욕만 들어먹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말만 한다. 아무것도 않고 그저 입으로만 떠들려 한다. 별 의미없는 보여주기식 이벤트에 모두가 몰려다니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정작 국회에서 정책을 가지고 여당과 야당이 붙을 일이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은 오르는데 야당으로서 잘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어째서 20%의 유권자들만이 그렇다 대답했던 것일까? 바로 그 설문에 진실이 있는 것이다. 여당인 민주당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정작 야당인 미래통합당은 아무것도 않고 입으로만 떠들고 있다. 여당인 민주당이 추진하는 정책들에는 부정적인 부분도 보이고 하는데 어차피 아무것도 않고 있으니 미래통합당에는 그런 것도 없다.

 

더불어민주당 단독 176석에 놀란 것은 비단 야당들만이 아니란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표를 주었던 유권자들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렇게까지였을까. 그래서 한 편으로 미래통합당에 대한 미안함이나 안쓰러운 감정 같은 것들도 생긴다.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있었다지만 2017년 대선부터 2018년 지선에 2020년 총선까지 3번 연속 더불어민주당에 압승을 안겼으면 이제 미래통합당에도 벌을 줄 만큼 주었다는 생각도 들 법 하다. 더구나 176석대 103석이라는 차이는 유권자 입장에서도 너무나 당황스러운 현실이란 것이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들에 부정적인 부분들이 어찌되었든 보이는데 그것을 막아설 대안으로서 미래통합당의 존재가 절실해진다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의 독주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라도 야당인 미래통합당에 힘을 실어 줄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야당으로서 하는 것도 없는데 지지율만 높은 진짜 이유인 것이다. 잘하는 건 없지만 어찌되었든 정부와 여당에 대한 견제를 위해 미래통합당이 필요하다. 그러면 지금의 높은 지지율이 온전히 미래통합당의 것이라 여겨도 좋은 것인가.

 

어쩌면 함정일 수 있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맞게 무언가를 현실에서 해보려 하는 순간 지금의 지지율은 거품처럼 꺼져 버릴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에는 그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안티테제로서 그들에 대한 반감을 지지율로 흡수하고 있지만 무언가 하려는 순간 그에 대한 판단이 생겨나고 마는 까닭이다. 그래서 전세제도가 아예 사라질지 모르니 전세임대인을 위해 혜택을 주는 법안을 입법하려 하면 지금 새로운 법안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는 임차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겠는가. 윤희숙 의원이 실제 한 발언의 내용도 잘 알지 못한 채 언론이 떠드니 뭔가 그럴싸한 소리를 했나보다 여기는 사람이 태반이란 것이다. 귀에 들어오는 것은 자칫 전세 임대인들을 압박하다 보면 전세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 뿐. 그런데 과연 사실이었는가.

 

현재 기록적인 폭우와 홍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가운데 그냥 입으로만 떠들 수 있으니 그들은 점수를 딸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실제 정책으로 집행하는 것은 정권을 쥐고 있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다. 트집거리 잡아서 비난하는 것이야 나같은 일개 블로거도 할 수 있는 짓거리다. 그래서 황교안과 나경원이 역대급이었다 말하는 것이다. 야당노릇보다 쉬운 게 없다. 더구나 지금처럼 모든 언론이 편드는 상황에서 야당을 한다는 게 얼마나 속편한 일인가. 그런데도 지지율을 그렇게 깎아먹었으니. 심지어 검찰이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편을 들고 있었음에도 정작 선거에서 참패하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그래서 차마 황교안과 나경원을 욕하지 못하겠다. 민주당 입장에서 이보다 큰 은인이 또 있을까.

 

아무튼 그래서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사실을 민주당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열린우리당 시절을 경험한 이들이 이제 중진이 되어 당을 이끌고 있는 중이다.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망했는지 직접 몸으로 겪었던 이들이 어느새 제법 목소리도 낼 수 있는 정도가 되어 당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지지율 떨어진다고 지레 겁먹고 여론의 눈치만 보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결과 바로 얼마전까지 민주당에는 무능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과반의 여당을 상대로 모든 개혁법안을 막아낸 한나라당은 국민들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았었다. 지지율 신경쓰다가 할 일 못하면 그대로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지지율은 따라오는 결과로 보고 개혁에 박차를 가했을 때 최소한 무능하다는 소리라도 듣지 않게 된다. 정치인에게 가장 최악의 평가는 바로 무능하고 무용하다는 것이다. 그런 정치인을 어디에 쓰겠는가.

 

정책의 결과만 제대로 나온다면 지지율은 얼마든지 반전이 가능하다. 지금 그것을 막을만한 인물이 미래통합당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머리 좀 쓰는 인간들은 거의 수도권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데, 이번에 수도권에서 당선된 면면들이 그들을 대신할 정도가 아니다. 정책대결로 가면 절대 민주당에 유리하다. 그것을 필사적으로 가리려 언론이 저 난리를 피고 있는 것이고. 정책대결 하지 말라고 말싸움만 중계한다. 넘어가서는 안되는 이유다. 모든 정책을 현실로 옮길 힘이 있다면 때로 유연하게 굽히고 양보하는 모습도 보이면서 여유를 부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봐야 결과는 민주당 하고 싶은대로이지 않겠는가. 뭐라 떠들든. 뭐라 주장하고 어떤 행동을 보이든.

 

103석이기 때문인 것이다. 176석인 때문인 것이다. 열린민주당에 무소속까지 더하면 바로 180석이다. 그래서 더 국민들은 민주당에 엄격해지는 것이고 미래통합당에는 관대해지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이 좋아라 떠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황교안 시절이었으면 그런 난리도 없었을 텐데. 김종인이 그래도 황교안보다는 낫다는 이유다. 김종인이 중심을 잡아주니 주호영도 유능해 보인다. 착시다. 여전히 주도권은 민주당에 있다. 언론이 아무리 가리려 해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민주당이 잘 알고 있다. 미래통합당도 안다. 국민도 안다. 눈가리고 아웅이다.

그러보니 전에도 말했을 것이다. 지금 기자놈들 입사지원서 조국 전장관 자식들 털듯 털면 아주 재미있을 거라고. 과연 과연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진실일까? 당연히 한 눈에 바로 알아볼 정도의 거짓말을 대놓고 입사지원서에 넣는 짓은 그래도 기자들인데 안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놓고도 기자질하는 것이라면 부정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런데 이걸 조국 전장관 자식들 털듯 검찰이 총동원해서 털면 어떻게 될까?

조국 전장관 아들이 인턴십 프로그램의 세미나에 몇 번 참석했는가를 두고 재판에서 다투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참석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한두번인지 두세번인지 서너번인지 가지고 지금 다투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인턴확인서가 개근하고 만근했을 때만 주어지는 것이던가.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인턴이라는 자체가 정규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사용자 마음이란 것이다. 집에서 자료조사만 해도 되고, 그냥 꾸준히 얼굴만 비쳐도 되며, 한 번 만 나와서 자기를 찾아와 인사를 했으면 그것만으로도 증명서를 발급할 수 있다. 그래서 입시든 채용이든 그런 인턴증명서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다. 당연하다. 그거 심사하는 사람들이 발급한 당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어차피 10년 가까이 오래된 일이라 사람들 기억도 희미하고 따라서 봤네 안 봤네 그 회수까지 디테일하게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참석했는가 아닌가. 증명서를 발급할 요건을 갖추었는가 아닌가. 그래서 발급권자가 직접 자기 도장을 찍어 발급했다니까 또다시 공소장을 변경하며 뭐라뭐라.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듯 또 언론은 기사로 써준다. 도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인턴증명서 하나로 온 세상이 떠들썩해질 정도의 나라였었는가.

불과 얼마전이다. 연세대에서 대학교수들이 자식들 입시와 관련해서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교육부 감사를 통해 드러난 바 있었다. 조국 전장관은 그냥 정해진 법과 규정 안에서 편의를 추구한 것이라면 이들은 대놓고 법을 어기고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 언론의 보도를 보라. 그 잘난 대학생들의 태도를 보라. 나경원에 대해서도 이토록 언론과 청년들은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가. 그러고도 자기들은 기자라고 거들먹거리겠지.

역시나 내가 옳게 봤다. 바로 강진구 기자가 말한 후배권력이란 것일 게다. 인터넷에 리플 달 듯 기사를 쓴다. 저놈들 기사를 인터넷에서 더 잘 더 많이 더 즐겨 소비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 게 진짜 기자가 기사를 쓰는 방법이다. 선배들은 낡았다. 그런 주제에 조중동처럼 사주가 있는 언론에서는 충실한 개가 되어 꼬리를 흔드는 것이 그놈들의 속성이다. 사과할 디스를 왜 하는가. 언제부터 디스에 사과가 따라붙었는가. 일베도 참 한심한 것들이다.

아무튼 마친 민사도 걸리고 했으니 KBS 기자들부터 입사지원서를 뒤져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조국 전장관이 고발한 기자들 역시 입사지원서부터 차근히 살펴봤으면 하는 것이다. 과연 이 놈들의 입사지원서는 얼마나 정직할까? 그 내용들이 까발려지면 몇이나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있을까? 기자를 사람취급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론의 자유란 한국 기자들에게는 개발에 편자에 불과하다. 불쌍해지는 것이다.

태양광발전과 산사태 사이에 연관성을 주장하고 싶으면 일정한 통계가 일치해야 한다. 이를테면 전체 산사태 가운데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곳에서 일어난 산사태의 비율이 몇%이고, 전체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산지 가운데 몇% 정도에서 산사태가 일어났다고 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산지와 그렇지 않은 산지 사이에 산사태의 발생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있음을 통계로써 입증해야 한다. 그래서 전체 산사태 가운데 태양광의 비율이 몇%가 되는가. 태양광이 아직 충분히 설치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면 전체 태양광 발전소 가운데 몇%에서 산사태가 일어난 것인가.

 

보아하니 전체 천 건 넘는 산사태 가운데 고작 12건 만 태양광 발전기가 설치된 곳에서 일어난 모양이다. 전체 1만 곳이 넘는 태양광 발전소 가운데서 따지면 0.1%도 안되는 확률이다. 과연 이런데도 태양광 발전과 산사태 사이에 유의미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유독 태양광 발전소가 있는 곳만 0.1%라도 사고가 났으면 태양광 발전소 때문이구나 하겠는데, 아니면 전체 산사태 가운데 태양광 발전소가 있는 곳만 유의미하게 비율이 높아도 태양광 발전소가 원인이구나 말해도 좋을 것이다. 비가 많이 와서 지반이 물러지면 태양광이고 뭐고 아무리 나무가 많아도 그냥 한꺼번에 쓸려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산사태가 일어난다. 설사 태양광이 원인이었다 할지라도 비율로 보았을 때 설치와 관련한 안전기준을 강화해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정도란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인데, 대한민국의 야산 가운데 원시림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보면 된다. 오죽하면 일제강점기 조선 하면 떠오르던 이미지가 바로 붉은 산이었다. 난방한다고 하도 나무를 베어댄 탓에 산에 나무가 거의 없었다. 해방 이후 정부와 민간의 노력이 지금의 푸른 산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원시림을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이용하던 산림 가운데 일부를 다시 태양광 발전을 위해 활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 사고가 나면 복구가 불가능한 방사능과 패널을 치우고 나무만 다시 심어도 얼마든지 다시 복원 가능한 산림이 비교가 되는가. 어째서 태양광을 안전하고 깨끗한 차세대 에너지로 선진국에서도 주목하는 것인가. 전체 산지 가운데 태양광이 차지하는 비율도 아직 얼마 되지 않는데 그렇게 나무만 아까워 안달이다.

 

아무튼 그냥 비가 많이 와서 지반이 약해진 탓에 나무가 있어도 산이 허물어지는 상황이란 것이다. 방송에 나오는 산사태로 집이 온통 뒤덮인 현장 가운데도 그래서 태양광 패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일부러 그런 곳만 찾지 않는 한 전체 가운데 비율이 1%, 혹은 그 이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섬진강 홍수를 4대강 재평가를 위한 기회로 이용하더니만 이번에는 산사태라는 재해마저 태양광 정책을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 기록적인 폭우와 홍수가 언론과 정치권만 신나게 만들었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말할 가치도 없다. 뇌가 구더기똥이다. 벌레똥들. 

물론 경향과 한겨레가 이명박과 박근혜를 문재인 대통령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 스스로의 입으로 직접 털어놓은 바 있었다. 이명박근혜 시절이 지금보다 더 나았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자신들의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당연히 문재인 정부의 여당인 민주당 역시 문재인 정부의 일부로써 미래통합당보다 더 혐오하고 증오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대놓고 이명박근혜를 칭찬하는 기사를 쓴다는 건 자기들 정체성과 관계된 것이 아닌가.

 

MBC와 KBS도 마찬가지다. JTBC는 최근 보지 않아 뭐라 지껄이는지 알기 어렵다. 아무튼 아무리 문재인 정부가 싫고 민주당이 싫어도, 그래서 미래통합당과 윤석열 검찰의 편에서 기사를 쓰더라도 절대 넘어서는 안되는 선같은 것이 이들 언론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염치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아쉽고 어렵고 그래서 체면불구한다고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는 경계란 것이다. 4대강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아무리 이들 언론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이제와서 4대강을 잘한 일이라 주장하는 것까지 받아서 함께 떠들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거의 처음일 것이다. 특히 총선이 끝나고 나서는 거의 유일하다 봐야 할 것이다. 언론 가운데 일부가 감히 미래통합당의 주장에 반발하며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전면에 싣고 있었다. 기껏해야 양비론이고 대부분 미래통합당의 주장을 받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욕하는데 급급하던 언론들이 4대강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민주당 주장을 받아서는 미래통합당의 주장을 비판하는 기사를 크게 내보내고 있는 중이다. 왜이겠는가.

 

그동안은 그냥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 뿐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못하기에, 민주당이 잘못하고 있기에 그에 대해 반대하며 비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수정당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다. 검찰의 편에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그랬었다. 진보언론으로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보이는 정책과 행보들이 자신들과 맞지 않기에 반대하고 비판한다. 그런데 4대강마저 보수정당의 편에서 민주당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보라. 어떻게 되겠는가. 자칭 진보언론으로서, 자친 중도언론으로서 자신들이 그동안 정부와 여당을 공격해 온 정당성이 훼손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마 지금쯤 한겨레나 경향이나 기자들 손가락이 근질근질할 것이다. KBS 기자 가운데 상당수도 입이 근질거리고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공격해야 하는데. 민주당을 비난해야 하는데. 그런데 미래통합당이 던져 준 떡밥이 하필 자기들이 물어서는 안되는 4대강이었다.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난다. 정부를 공격하는데 있어서는 한결같았던 언론들이 처음으로 분열하며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최저임금이나 근로시간단축이나 코로나방역등에 있어 하는 말은 달라도 방향은 같았던 그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떠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런다고 속을 국민은 이제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저 놈들에게 챙겨야 할 책임은 있구나.

 

진심으로 미래통합당을 욕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그동안 잘 해 왔던 것처럼 미래통합당에서 주장하는 것을 받아서 청와대와 민주당에 똥물을 트럭으로 끼얹었을 텐데 하필 이건 도저히 자기들이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의 패착이란 것이다. 그냥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반대하며 야당으로서 그와 대립하는 모습만 보였어도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정당이라고 미래권력을 위해 과거권력을 정당화시켜야 했다. 이승만부터 김영삼까지, 그리고 그 사이 단절된 이명박과 박근혜를 복권시켜 미래의 권력까지 보수의 정통성을 이어 놓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이명박을 다시 살리고 박근혜를 돌려놔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필 그동안 손잡아 온 일부 언론들이 이탈하는 빌미가 되고 있었다.

 

물론 그래봐야 다시 돌아갈 것이다. 파리가 똥을 피하지 언론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할 수 있는데 아무거라도 받아서 쓰면 되는 것이다. 그냥 이번은 미래통합당이 실수한 것이다. 동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동업자라기보다는 그저 똥닦개에 지나지 않지만. 정의당도 그래서 뭐라 받아서 동조하지는 못하지 않는가 말이다. 박원순 이후 미래통합당과 한 몸이 되어 있던 정의당이었건만. 미래통합당이 멍청한 것이다. 그런데도 차기 정권을 이야기한다. 웃어야 하는지.

경향과 한겨레가 왜 그리 윤석열 검찰의 뒤를 빨아제꼈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세상에 남자끼리 한 달 남짓 동안 300건 넘는 문자라니. 아무리 중요한 거래처라고 이렇게 자주 많은 문자를 주고받지는 않는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루에도 열 개도 넘게 문자를 주고받아야 하는 이유가.

 

어쩐지 진보를 자처하는 경향과 한겨레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소수자의 인권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단지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이 고소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로 단정짓고 죽음마저 짓밟은 대부분 언론과 정치권, 지식인들이 한동훈의 무죄를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 그와 아주 무관치는 않겠다는 어설픈 추측이다. 그렇게 간절한 사이인데 두 사람 사이를 섣부르게 오해해서 자칫 차별과 탄압으로 비칠 지 모르는 상황이란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니면 말고. 아무튼 도대체 뭘 어쩌면 안부문자만 두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300건 넘게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사귀는 사이라도 무리다. 아, 그래서 내가 지금 솔로인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300건은 도저히 안 나오던데. 끝말잇기라도 한 모양이다. 너무 다정하다. 눈물이 나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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