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 장면이다. 고등학생이거나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인물이 부동산을 알아보러 돌아다닌다. 그러면 주위에서 당연하게 묻는다.

 

"독립하려고?"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도 30대까지 젊은 직원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이 방을 따로 얻어 자기가 월세를 내며 살고 있었다. 심지어 한 시간 넘게 걸려 출퇴근하는데도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월세를 얻고 싶어도 보증금 낼 돈이 부족하다.

 

재개발이 예정된 동네에 아주 오래되고 낡은 반지하 단칸방조차도 월세의 몇 배나 되는 보증금을 내고서야 겨우 들어가 살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좁고 볕도 들지 않아 어둡고 습기까지 차는 반지하방에 살고 싶은 사람은 기성세대 가운데도 거의 없다 봐야 할 것이다. 그나마 살 만한 집이면 기본이 몇 백에, 조금 괜찮다 싶으면 천 단위를 넘어간다. 월세가 그런데 전세는 어떨까? 아예 전세대출까지 고려해서 어지간하면 요즘은 그냥 억은 넘어간다 보는 것이 옳다. 과연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젊은이가 자기 힘으로 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자기가 돈 벌어 전세금 마련한다는 것도 제법 대단한 중견기업 이상에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는 소수에게나 해당되는 도시전설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나마 월급 모아서 얻을 수 있는 전세라는 것도 변두리 주택가에 방 하나나 두 개 짜리가 고작일 것이다. 아니 요즘 이쪽은 거의 전세물량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파트처럼 집값이 올라 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요즘같은 저금리 시대에 일반주택 전세는 임대인 입장에서 전혀 남는 것이 없다. 집값이라도 올라서 나중에 차익을 실현할 수 있지 않는 한 전세는 더이상 임대인 입장에서 매력적인 제도가 아니란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되면 따라서 당연히 전세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렇다면 막 사회에 첫 발을 딛은 젊은이들이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살 수 있는 전세란 과연 어디까지일 것인가.

 

전세가 쓸데없다 여기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아니 당장 월세조차도 만만치 않은 보증금 때문에라도 겨우 갓 취업한 젊은 초년생들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90년대 막 사회에 첫발을 딛고 한동한 고시원 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렇게 겨우 모아 반지하 단칸방 하나 월세를 얻었는데 그마저 IMF로 홀랑 날려먹었으니 내가 지금도 김영삼이라면 이를 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일 것이다. 이명박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아무튼 현실이 그런데 몇 억 씩이나 하는 전세란 제도가 얼마나 현실을 위한 것일 수 있는가. 내가 전부터 전세라는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온 첫째 이유일 것이다. 어지간해서 서민들이 자기 능력만으로 몇 억이나 하는 전세금은 커녕 몇 천 짜리 월세 보증금조차 모으기란 너무 버겁기만 하다는 것이다. 아니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기는 한가?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도 그래서 젊은 직원들이 월세 보증금이라도 마련해 보겠다고 몇 년이나 부모의 집에 얹혀 살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었더란 것이다. 올해만 다니고. 아니 내년만. 한 해만 더. 그래도 사실 현실적으로 몇 천이나 되는 돈을 모으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그러고보면 전세는 커녕 월세의 몇 배, 심지어 몇 십 배나 되는 보증금이란 것도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제도라는 것이다. 대부분 나라에서는 월세를 얻을 때 따로 보증금 같은 것 없이 몇 달 치를 선불로 내거나 사례금을 따로 지불하거나 하는 식으로 장벽도 매우 낮다. 그냥 길거리를 떠돌던 홈리스라도 그나마 아무거라도 직장을 가지고 나면 바로 받은 월급으로 적당한 월세를 찾아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젊은이들도 일찌감치 집을 나와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자립심이 부족해서 늦게까지 부모에게 얹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독립해서 나와 살기에는 현실의 장벽이 너무 높기에 그런 것이다.

 

하긴 그러고보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며 임대료까지 올라가자 해외에서도 늦게까지 부모에게 의지해 사는 캥거루 세대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해외에서는 월세를 얻으려 해도 월세 자체가 비싸서 부모의 집에 기대 함께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월세는 고만한데 월세의 최대 몇 십 배나 되는 보증금을 마련하기가 너무 버거워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 혼자서 나가 살려고 해도 방 하나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데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니까 결혼도 않으려는 것이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월세라도 그럴싸하게 얻어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둘이서는 어떻게 살더라도 아이라도 낳으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뭐다? 몇 억 씩이나 하는 전세금보다는 당장 젊은 사회초년생들이 바로 들어가 살 수 있게 보증금조차 필요없는 값싼 월세가 더 시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자기집은 커녕 전세조차 자기 힘으로 벌어서는 모으기가 거의 불가능한 현실에서 차라리 보증금조차 없이 더 값싸게 얻어서 전세금 모을 돈으로 소비라도 마음대로 하며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이 개새끼라는 것이다. 그렇게 서민 걱정하고 청년 걱정하고 낮은 결혼율과 출산율을 걱정하는 새끼들이 정작 그들을 위한 임대주택은 주민들더러 반대하라고 부추기는 기사나 써제끼고 있는 중이다. 주민들이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하는 이유는 그렇게 거짓정보를 흘리며 부추기는 놈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누구이겠는가. 그러면서 서민을 걱정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가?

 

전부터 일관되게 해 온 이야기일 것이다. 평생 악착같이 모아서 10억짜리 아파트를 사나, 평생 쓰고 싶은 것 다 쓰면서 10억짜리 아파트에서 3억 월세를 주고 사나 결국 아파트를 남기거나 7억 만큼의 소비를 남기는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서 7억 만큼 아끼며 살 것인가. 그냥 아파트를 포기하고 7억 만큼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 것인가. 어차피 안되는 거라면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개천을 만들어야 한다. 붕어, 개구리, 미꾸라지가 모여서 마음놓고 살 수 있는 개천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지금보다 월세 얼마간 더 내더라도 보증금을 다시 은행 잔고로 돌려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월세 보증금조차 부담이 되는 진짜 서민의 삶을 지금도 살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면서 내일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는 무기력한 젊은 세대를 가까이서 몇 년이나 보아 왔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인 것이다. 그나마 최저임금이라도 올라서 일자리가 있는 젊은 세대들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상황인가. 그럼에도 그 돈 모아서는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래도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젊은 세대의 원망과 분노가 세상을 혼란케 하는 것만 걱정하는 것인가.

 

결국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때로 주민의 반대마저도 무릅써가며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단호하게 결정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임대주택에 반대한다. 왜? 어째서? 그리고 언론은 그런 무리한 주장들을 어째서 한 마디 비판조차 않는 것인가? 답은 너무 명확하다. 그래서 일부러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로 올 1월의 일이었다. 반 년 겨우 지난 일인 것이다. 검찰이 요건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막무가내로 청와대를 압수수색하겠다고 나섰을 때 언론은 검찰이 원하는대로 자료를 내주지 않았다며 청와대를 비난하고 있었다. 검찰이 수사하고자 한다면 청와대든 뭐든 원하는 모든 자료를 내주며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아니면 의도를 의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과연 검찰의 수사 자체를 거부하는 한동훈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들일까?

 

대한민국이 검찰공화국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심재철이며 심상정이며 심지어 권경애 나부랭이조차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던 것이 바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었다는 것이다. 보수집회나 유튜브에서도 아무나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바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다. 그런데 감히 검찰총장에 대해서는, 아니 검찰총장도 아닌 일개 검사장에 대해서 내쫓아야 한다 말했다는 이유로 고발까지 당한다. 이 무슨 미친 상황인가. 일개 검사장 나부랭이는 검찰수사도 거부하고 압수수색까지 방해하고 있음에도 그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대변해 주는데 대통령이 머무는 청와대는 검찰이 요건을 갖추지 못했어도 무조건 협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몇 달이나 청와대를 들쑤셔서 검찰이 얻어낸 것이 무엇인가. 작년 11월부터 몇 번이나 청와대를 압수수색하고 청와대 관계자들을 불러서 밝혀낸 사실이 무엇이 있었는가. 인사에 쫓겨 급하게 기소하며 내놓은 공소장의 내용이라는 것도 거의 진술에 기댄 추측이 대부분이고 증거라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그에 비하면 한동훈은 아예 수사 자체를 거부하는 상황인데 얼마나 수사했다고 벌써 결과가 없다며 무죄를 주장하는 것인가. 증거 없이도 기소했으면 유죄이고 기소 못했으면 무죄라는 것인가.

 

그러니까 검언유착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검찰의 기소를 유죄로 만들어주는 것이 어디의 누구일 것인가. 검찰이 기소하지 않으면 무죄로 확정해주는 것이 또한 어디의 누구일 것인가. 수사심의위가 권고했으니 수사할 필요도 없이 무죄다. 그러니까 한동훈에 대해서는 수사를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사를 시작조차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동재를 비롯 관계자들이 증거를 인멸해서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란 것이다. 그렇게 증거인멸과 수사방해에도 몇 달이나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혐의 자체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언론과 검찰이 밀착해 있어야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편드는 보도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쏟아내고 있다는 것인가.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마치 그러기 위해 오보를 낸 양 오보인정 이후 KBS의 태도는 그야말로 일관되다. 수사심의위가 권고했으니 수사 자체를 해서는 안된다. MBC가 유일하다. MBC도 여전히 의심스러운데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 언론은 MBC 하나 뿐이다.

 

하여튼 검언유착을 권언유착으로 바꿔 보겠다고 사실까지 왜곡해서 주장을 펴는 권경애나, 치명적인 오류에도 권경애의 주장을 받아 의혹을 부풀리려는 언론들이나, 그래서 당시 한동훈의 이름을 아무도 몰랐었다고? 검사장A가 한동훈인 것을 언론 가운데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고? 그래야 하니까. 기자것들은 그냥 사람취급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권경애의 주장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자칭 진보들 역시. 민낯을 드러낸다. 벌레라는 말도 아깝다. 흉악한 것들이다.

그러고보니 총선 앞두고 나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니 대부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공통된 인식이었을 것이다. 총선의 결과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성공 여부가 아닌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는가가 결정될 것이다. 심상정이 아무것도 없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언론 받아쓰기 좋으라고 탄핵이란 말을 입에 올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미래통합당의 원내대표였던 심재철 역시 여론의 눈치따위 보지 않고 당당히 탄핵을 언급하며 총선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 뒤에 누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임미리도 벌써부터 '민주당만 빼고' 같은 칼럼을 썼던 것이었고, 경향일보 역시 문제가 될 것이 분명한 칼럼을 당당히 지면에 싣고 있었던 것이었다. 명백히 현행 선거법을 어긴 칼럼의 내용에 반발하는 민주당을 보수언론과 손잡고 압박하던 자칭 진보언론들을 떠올려 보라. 홍세화가 지금 와서 한겨레가 감히 한동훈을 곤란하게 만들 칼럼을 지면에 실었다고 발광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진중권이 벌써부터 유시민이 신라젠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떠들던 근거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총선에서 민주당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결과가 나오면 자신들이 보수진영과 손잡고 민주당을 포위하여 내부의 반란자들로 하여금 대통령 탄핵에 동참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시민도 180석을 굳이 언급했던 것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지금 문재인 정부의 위기를 극복할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벌써부터 그런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작년 패스트트랙 정국부터 자칭진보는 검찰과 손잡고 그같은 계획을 추진해 왔던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연동형비례대표제가 중요했다면 정의당 역시 민주당이 주도한 비례연합정당에 동참했어야 했다. 아니 오히려 정의당이 주도하여 소수진보정당들이 민주당의 높은 대중적 지지에 힘입어 보다 수월하게 원내에 진출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도왔어야 했었다. 하지만 정의당은 소수정당의 원내진출을 가로막는 장벽을 낮추겠다는 애초의 의도보다 형식에 집착하여 민주당을 공격함으로써 오히려 미래통합당의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의 명분만 강화시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만일 연동형비례대표제에 대한 정의당의 집착이 단지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검찰개혁법안의 처리를 늦추기 위한 계획된 사보타주였다면? 정의당이 검찰개혁법안의 통과를 어떻게든 최대한 늦추기만 하면 검찰이 청와대에 대한 수사를 마치고 기소까지 함으로써 완전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실제 당시 정의당이 너무 무리한 요구를 많이 해서 패스트트랙 법안 통과가 많이 늦어졌다는 말까지 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지방선거에서 불법적인 선거개입을 했다면 탄핵요건이 되고 민주당 내부 반란표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탄핵도 가능하다. 

 

추미애 장관에 의해 검찰인사가 이루어지고 부랴부랴 허술한 공소장으로 청와대의 선거개입에 대해 기소부터 하고 본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이다. 아직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밑밥부터 깔아두고 총선의 결과에 따라 이를 활용해서 대통령을 탄핵해 보겠다. 총선결과 민주당이 패배하거나 최소한 비등한 결과만 나와도 미래통합당과 정의당, 그리고 민주당 내부의 반란표를 더하면 얼마든지 대통령 탄핵도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청와대를 상대로 수사를 했던 것이었고, 수사하는 것도 아니면서 언론플레이를 하며 청와대를 망신주었던 것이었고, 여기에 청와대 관계자를 엮을 또 하나의 올가미로써 신라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진중권의 귀에까지 그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내용들을 진중권 혼자서만 들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김경률과 권경애와 홍세화 나부랭이들은 어째서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검찰을 위해 자기 한 몸 바치려 드는 것일까.

 

박원순 시장이 돌아갔을 때 그 죽음을 모욕하기 위해 누가 누구와 손잡고 있었는가 보면 답은 나오는 것이다. 원래 유시민을 잡고 대통령까지 탄핵하기 위해 뒤에서 연대하던 이들이 꿩대신 닭이라고 박원순이라도 잡아서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줘야겠다 나선 것이 이른바 박원순 성추행의혹이란 것이다. 지금껏 수많은 미투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단지 고소했다는 이유만으로 기정사실로 만들고 단순히 의문을 제기한 자체만으로도 2차가해라며 낙인을 찍어대는 경우는 보지 못했었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며 조금이라도 다른 목소리가 나오면 2차 가해라는 말로 난도질을 해 버린다. 덕분에 계약직이던 한 방송인이 방송을 접어야만 했었다. 여성 방송인들의 열악한 처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이런 부분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무슨 이유에서겠는가.

 

우연은 없다는 것이다. 검언유착을 권언유착의 프레임으로 바꾸기 위해 KBS는 의도적으로 오보를 내고 있었다. 하어영이 오보 같지 않은 오보를 냈을 때도 윤석열은 그를 고발함으로써 자신과 한겨레가 한 몸이 아님을 보여준 바 있었다. 별 사소한 일로도 개소리를 지껄이던 언론노조가 그때만은 조용했었다. 이번에 한동훈이 KBS 기자를 고소했을 때도 언론노조는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 무려 검찰총장이 직접 고소했는데 하어영이 한 번이라도 검찰조사를 받았었는가. 정연욱을 비롯한 KBS의 기자들은 한동훈이 요구한 5억의 배상금을 지급하게 될 것인가. 오히려 한동훈을 위해 절호의 반전의 기회를 제공한 당사자들인 것이다. 바로 김경록PB의 인터뷰를 왜곡해서 검찰의 입맛에 맞게 프레임을 짜서 내보낸 당사자들이 바로 KBS였다는 것이다. 그냥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모든 것이 딱딱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어째서 언론은 그토록 금태섭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는가. 총선의 결과에 따라 문재인을 탄핵하는데 필요했을 소중한 한 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벌써부터 검찰을 중심으로 자칭 진보와 보수가, 정치권과 언론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위기상황에서도 의도된 오보로 정부의 방역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모든 언론이 하나가 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래서 자신감이 붙었던 것이었다. 지금처럼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실망이 깊으면 총선의 결과는 보나마나다. 어차피 문재인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심상정이 심재철의 주장을 받아 탄핵을 이야기한 이유였었다. 그리고 그 전말을 지금 조국 전장관이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수사야 말로 그를 위한 검찰의 밑밥이었다. 검찰이 그림까지 완성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어떻게든 불씨를 살리려 선거에 개입하려 한 것이 검언유착의 빌미였었다.

 

설마 아직도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정의당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남아 있을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정의당에 희망을 가지는 사람이 남아 있을 것인가. 같은 수사심의위의 결정인데 이재용과 한동훈은 전혀 다르다. 이재용은 잘못된 결정이지만 한동훈은 정당한 결정이었다. 그를 비판하는 한겨레야 말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필사적이다. 홍세화가 갑자기 판단이 흐려져서 저러는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얼마나 원통했을까.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진중권은 지금 전광훈과 같이 놀려 하는 모양이더만.

 

조국 전장관 덕분에 몇 달 전 총선을 앞두고 필사적이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그래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더 버텨보겠다. 앞으로도 기회를 더 노려보겠다. 버리지 말라는 소리다. 이제 보니 윤석열의 진짜 민주주의 연설이 참 구차한 내용이었었다. 자기만 믿고 모두가 판을 벌려 놨는데 정작 아무런 결과도 내놓지 못해 모두가 곤란해지고 말았다. 윤미향과 박원순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보수만 보지 말라는 것이다. 미래통합당만 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조국 전장관의 딸은 여성이 아니다. 자칭 진보와 여성주의자들의 판단이다. 

옛사람 말 가운데 틀린 게 없다지만 진짜 개소리라 생각한다. 가는 말에 채찍질한다? 예쁜 놈 매 한 대 더 때린다? 물론 의미는 이해한다. 결국 채찍질해야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고, 한 대라도 더 맞고 더 열심히 공부하면 더 높고 귀한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중을 위해 지금을 희생해야 한다. 그런데 싫거든? 그냥 오늘 떡 하나 더 먹고 미운 놈 하는 게 더 낫거든? 아마 내가 이상한 모양이다. 오래전부터 저런 문화가 정말 싫었다.

 

보상은 아주 나중에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고서 알아서 누리면 된다. 그 전까지는 그저 못하고 아쉬운 것들만 야단치고 매를 들어가며 고치고 바로잡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놈들이 저 모양인 것이다. 성장과정에서 누리지 못한 보상을 한꺼번에 다 누리려 하니 온통 저 난리들인 것이다. 법을 집행해야 하는 놈들이 법을 어기고, 더욱 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놈들이 저 편할대로 법을 만들고 이용하려고나 들고, 정작 그런데도 오히려 사회분위기는 그런 그들에게 관대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어렵게 노력해서 그 위치에까지 올랐는데 그런 정도는 봐 주어도 좋지 않겠는가. 그러라고 부모는 자식을 기르고 선생은 학생을 가르친다.

 

문제는 그렇게 먼 미래만 바라보다 보니 당장은 보상은 커녕 온통 아프고 싫고 짜증나는 체벌과 야단과 비난 뿐이란 것이다. 그러면서 또 말한다. 보아라. 역심히 노력하지 않은 결과 저처럼 벌받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가난하고 누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것이 노력하지 않은 대가며 벌이다. 그러므로 저렇게 살기 싫으면 지금을 인내하며 그저 열심히 노력해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학습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벌받아야 하고, 노력했으면 마땅히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그래야 지금 매맞고 야단맞는 그들도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한 삶을 누리려 할 것이다. 아니더라도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그래서 잘하지 못한 대가이니 당사자들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정의다.

 

인터넷이 쓸데없이 정의로워진 이유인 것이다. 정확히 악플러란 없다. 악플을 다는 놈들 치고 악플이라 생각하고 악플을 다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자기딴에는 정의라 생각한다. 악을 응징하고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행위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판단하기에 악이라 여기는 대상을 향해 단호히 매를 드는 것이고, 불의라 생각하는 대상을 향해 기꺼이 거친 말로 야단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반성하며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대로 좋은 것이고, 아예 세상에서 사라지면 정의를 실현한 것이 된다. 벌써 10년이 넘어가는 타진요 사태가 그랬었고, 바로 어제 먹방유튜버 쯔양이 은퇴를 선언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러고보면 기자 것들이 갈수록 질이 떨어져가는 것도 인터넷 댓글 쓰듯 기사를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조국 전장관의 딸 조민씨가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밤늦게 건장한 남자기자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리며 위협을 하더라는 이야기는 이미 작년 기자간담회 때 나온 바 있었다. 당시 그 이야기를 들은 여자기자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기자가 취재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취재를 위해 필요하면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행동이다. 자신들은 정의의 투사다. 진실을 탐구하여 전하는 메신저다. 세상의 악과 불의를 찾아내고 응징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든 따라서 용인될 수 있어야 한다. 협박도, 사칭도, 사기도, 위협도, 조작도, 왜곡도, 그래서 악을 응징하고 진실만 전할 수 있으면 그 수단이 무엇이든 당연히 인정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어느새 전가의 보도처럼 되어 버린 성인지감수성마저 기자의 취재과정에는 적용이 되지 않을 정도다. 여자 기자가 스스로 밤늦게 남자들이 떼로 몰려가 여자 혼자 사는 집 문을 두드려도 취재를 위해서라면 괜찮다 말하는 수준이란 것이다. 

 

오보를 내도 괜찮다. 사실확인까지 하고 깡그리 무시한 채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보도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재를 통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그렇게 기사를 내는 쪽이 악을 응징하는데 더 유리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한국경제만 취재하고 오보를 냈던 것이 아니었다. 한겨레도 정작 안성 쉼터를 판 당사자와 인터뷰까지 하고서도 의혹이라고 기사를 내고 있었다. 명분은 단순했다. 그렇게 의혹으로 보도를 해야 당사자들이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진짜 잘못이 있으면 검찰수사를 통해서 법적인 책임까지 물을 수 있다.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잘못은 없다. 언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다.

 

딱 자칭 정의로운 네티즌이라 일컫는 이들과 너무나 닮은 행동이며 태도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쯔양이 이미 오래전에 모든 사실을 밝히고 양해와 용서까지 구한 사안에 대해서도 어쨌든 잘못을 했으니 대가를 치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 실수로 저지른 잘못이고 그 크기가 그리 크지 않더라도 아무튼 작은 잘못이라도 저질렀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참피디가 영웅이 된다. 쯔양이라는 불의의 희생자도 만들었지만 그보다 제대로 단죄한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뒷광고를 실제로 했다고 밝혀지고 그로 인해 해명과 사과 동영상까지 올렸던 이들의 경우가 부당한 공격에 결국 방송까지 접여야 했던 한 사람의 존재를 지우고 만다. 어찌되었거나 자신들이 옳았던 것도 있지 않은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 가운데도 살인자나 강간범, 악독한 고리대금업자가 있었을지 모른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난징에서 일본군이 학살한 중국인 가운데 조선인을 상대로 사기를 친 사기꾼이 있었을지도. 그래서 그들이 저지른 학살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고보면 확실히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방송을 그만두려는 쯔양의 등뒤에 뒷광고나 일삼던 사기꾼이라는 낙인을 큼지막하게 찍어준 것도 SBS와 JTBC라는 방송사들이었다는 것이다. 기자들이었다. 아마 그들 역시 나름대로 네티즌들과 똑같이 정의를 구현하는 차원에서 그리했을 것이다. 아주 작은 잘못도 잘못이다. 잘못은 밝혀서 응징해야 한다.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 기자인 자신들이 그들에게 벌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먹방 같은 건 아예 보지도 않고 쯔양은 그저 워낙 유명해서 이름만 아는 정도인데도 그래서 돌아가는 상황이 정말 엿같다는 것이다. 매번 반복이었다. 이번은 단지 대상이 쯔양이라는 유튜버였을 뿐 이전에도 연예인을 대상으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타진요의 이름을 첫머리에 언급했던 것이 아니던가.

 

조국을 잡아야 한다. 조국을 죽여야 한다. 그 전에는 노무현을 잡아야 한다. 노무현을 죽여야 한다. 정의연을 잡아야 한다. 정의연을 죽여야 한다.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그래서 검언유착이 아닌 것이다. 언론이 보기에 이동재와 한동훈이 했던 작업들은 유착이라기보다는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이고 책임이까지 했던 것이다. 기자가 취재하면서 검사와 상의해야지 누구와 상의하는가? 기자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검사에게 의견을 구해야지 누구에게 의견을 구하겠는가? 협박을 해서라도 진실만 밝혀내면 되는 것이다. 부정한 거래를 통해서라도 정의만 실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유시민도 잡아 죽여야만 한다. KBS가 어째서 한동훈을 구하겠다고 그런 오보까지 내고 바로 사과까지 했던 것일까? 자기들이 보기에 너무 당연한 언론의 사명이기까지 한데 범죄로 모는 것을 차마 보고 있지 못하겠어서인 것이다. 유시민을 잡아 죽여야 할 이유가 너무 분명했던 한 곳이 바로 KBS였었다.

 

처음에는 그저 쯔양의 처지가 너무 안되었고 쯔양을 몰아세우는 네티즌들이 뭣같아서 그들을 비판하려 쓰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어느새 네티즌이 아닌 언론과 기자를 향하고 말았다. 그만큼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자가 네티즌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터넷에 리플 달 듯 무책임하게 기사를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를 경계하고 말리려는 선배기자들을 아예 자기들이 앞장서서 징계하고 입까지 틀어막으려 하고 있다. 이같은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당사자들이야 어떤 고통을 받든. 취재의 대상이 된 그들이 어떤 괴로움을 호소하든. 자신들이 낸 잘못된 기사로 인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어도 자신들은 그저 진실과 정의만을 위해 그런 것이므로 감히 책임을 물으려 해서도 안된다. 진짜 딱 악플러들이란 것이다. 단지 남들은 악플이라고 다는 것을 자기 이름까지 내걸고 기사랍시고 쓰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자기 기사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물으려고 하면 그건 또 싫고. 부모들이 잘못 키운 것이다. 아니 이 사회가 저들을 잘못 키운 것이다. 어린애들도 아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책임지기 싫은 어린애들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에 대한 정규직전환에 대한 언론의 보도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노력하지 않은 대가로 남들보다 열악한 조건에서 벌을 받으며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정규직이 되어 안정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인가. 설사 자신들이 인용한 단톡방의 내용이 허위라 할지라도 자신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문제를 제기한 것 뿐이다. 오히려 당당하다. 벌주는 사회, 벌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 벌을 주기 위해 기사를 쓰는 기자들.

 

확실히 그런 점에서 베테랑 기자들이 말하는 그래도 전과는 너무 다른 법조팀의 분위기란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원래 검사가 벌주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냥 수사하고 기소하고 원고가 되어 재판을 진행하는 역할일 뿐이다. 하지만 언론과 검사가 만나면서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이미 판결까지 마치고 있었다. 일베와 검찰이 결합한 그 무엇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러고보니 그들도 검언과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다? 그들의 부모가 잘못 키운 탓이란 것이다. 조국 전장관도 잘못했다. 아무리 서울대 법학과에 학생이 많아도 교수로서 그들을 바로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도대체 교수로서 자기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친 것인가.

 

조국 전장관의 딸 조민씨나, 악플러들 앞에서 손까지 떨며 창백한 얼굴로 죄인처럼 사죄해야 했던 쯔양이나, 취재를 이유로 여자 혼자 사는 집까지 떼로 찾아가 두드리던 기자놈들이나, 오래전 일까지 끄집어내어 정의로운 비난과 욕설과 모욕을 퍼부어대던 악플러들이나, 그리고 벌을 받아야 하기에 그나마 안정적인 정규직조차 될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검찰은 정의롭고, 언론은 진실되고, 대중은 곧 진실이며 정의여야 한다. 어디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빌어먹을 것이다.

마이클 잭슨이 죽기 얼마전 LA에서 월세 아파트에 산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바 있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마이클 잭슨이 고작 월세 아파트에 사는 처지가 되었단 것인가. 물론 터무니없는 오해였었다. 마이클 잭슨이 산다는 월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월세가 아니었다. 해외에서는 의외로 흔한 사례다. 굳이 필요치 않은 경우 굳이 집을 사서 소유하기보다 일정 기간 세를 주고 거주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LA같은 대도시에서 자기 집을 굳이 사서 소유하기보다 일정기간 월세를 내며 사는 쪽이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전에도 전세와 관련해서 쓴 적 있지만 한 달 월세 100만 원 해봐야 10년이면 1억 2천만 원밖에 하지 않는다. 월세 천만 원 해도 10년이면 12억이다. 그런데 대도시 한복판에 집을 가지려면 얼마를 지불해야 할까? 나중에 다시 되팔면 되지 않느냐 말할 수 있겠지만 부동산을 거래하는데는 당연히 세금이 따라붙는다. 고가의 부동산이라면 그만큼 고율의 세금이 매겨지게 된다. 더구나 땅이라면 몰라도 건물의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후화되며 감가상각이 생기게 된다. 당장 아파트는 당연히 오른다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사할 때 가장 먼저 신경쓰는 것이 신축인가 구축인가의 여부인 것이다. 오랜 아파트는 인기가 없다. 값만 오를 뿐 정작 세를 살려 해도 될 수 있으면 신축으로 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다. 다행히 부동산 가격이 올라서 비싸게 팔 수 있으면 남는 장사일 테지만 적지 않은 세금까지 내가며 부동산을 다시 팔아도 남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속편하게 임대해서 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어차피 자기 집을 가질 수 없는 계층 뿐만이 아닌 고가의 건물을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는 고소득자를 위한 고급형 임대주택 시장이 크게 발달해 있는 것이다. 굳이 오래 살 것도 아니고, 더구나 건물을 소유하는 번거로움까지 고려할 경우 차라리 비싼 돈 내고 자기 집을 가지기보다 아무리 비싸더라도 월세로 사는 편이 훨씬 나은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일본 드라마를 보면 흔히 보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그만큼 많은 돈을 벌었으면서 정작 사는 곳은 비싼 월세를 내야 하는 임대아파트인 경우가 많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그만한 수입이 있고, 차라리 그 돈을 모아 집을 사기보다 월세가 더 싸게 먹힌다는 현실적인 계산 때문인 것이다. 대신 그런 모든 부담을 대신 감당하는 대신 임대업자들은 그로부터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월세를 받는다고 모두 업자들의 이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감가상각이란 말 그대로 건물을 유지 보수 관리하면서 이후 노후화되었을 경우 다시 짓는 등의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 박근혜 정부 이래 현정부에서 추진했던 임대업자 사업자등록이 이를 목표로 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아파트 가격이 지금처럼 비정상적으로 오르지 않았다면 임대업자 사업자등록이라는 제도 자체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이 모든 비정상적 상황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전세란 제도인 것이다. 월세 아래서는 다달이 받는 월세 가지고 급격히 사업자가 임대주택의 보유를 늘리기가 매우 어렵다. 한 달에 천만 원, 이천 만 원 받아서 언제 몇 십억 이나 하는 임대주택을 새로 또 하나 짓고 구입하겠는가. 하지만 거의 집값에 근접한 전세가로 인해 터무니없이 적은 비용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임대주택을 늘려갈 수 있는 것이다. 임대업자 사업자등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전세라는 이상한 제도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악용되는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 그로 인해 집값까지 크게 오르면서 임대소득 말고도 집값만으로도 임대업자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러니까 답은 뭐다? 전세의 월세로의 전환이다. 주택담보대출을 제한해서 전세금에 약간의 자기 돈 더해서 집을 늘리는 이른바 갭투기를 차단하고, 나아가 임대업자들이 임대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경로를 막는다.

 

임대업자들의 잘못이 아니란 것이다. 그저 있는 집 빌려주고 세 받아 살겠다는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단지 임대업자에 대한 혜택을 이용해서 부당하게 부동산투기로 이익을 보려는 인간들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전세라는 제도는 따라서 부동산투기를 근절하기 위해서라도 이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되면 임대업자들도 말 그대로 임대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업자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과연 부동산 가격이 지금처럼 오르지 않을 경우 전세라는 제도가, 임대업자에 대한 혜택들이 그렇게 문제가 될 정도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면 전세도 의미없고, 임대업자들에 대한 혜택은 임차인에 대한 혜택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답은 뭐다?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고 그 원인이 되는 전세 또한 줄여나가야 한다.

 

정상이 아닌 것이다. 지인이 새로 이사하는 집 전세금이 무려 6억이란다. 어지간한 집 한 채 가격을 훌쩍 넘어간다. 과연 나같은 서민조차 되지 못하는 밑바닥 인생이 6억이라는 전세금을 만들려면 몇 년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것인가. 그나마 만만한 일반주택 전세가 못해도 1억은 기본으로 넘는 것이 현실이란 것이다. 십 몇 년을 쓰지 않고 모아서 전세금을 겨우 마련했더니만 계약기간 끝나니 전세가 또 올라서 다른 곳으로 이사가야 한다. 차라리 그렇게 모을 돈으로 만만하게 월세라도 안정되게 내면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1억 모으려면 한 달에 100만원 가까이 아껴서 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참고로 저 지인도 땅부자인 부모로부터 받은 돈이 저 만큼인 것이다. 진정으로 서민을 위한 정책이 무엇을 것인가.

 

굳이 한 달에 100만원 씩 모아서 1억 전세 사느니 한 달에 40만원 월세 내면서 60만원을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삶을 살고 싶다. 실제 그러고 있다. 그래서 굳이 전세를 구하기보다 방 두 개에 월세 25만원 짜리 싼 집을 찾아서 이렇게 대충 살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통장에 목돈도 굳었고 괜히 돈모은다고 안달할 필요 없이 나 자신을 위한 소비도 충실히 할 수 있다. 사람이 돈을 모으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집을 사기 위해서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보니 요즘 젊은 세대들 가운데는 아예 집 사는 걸 포기하고 현재를 즐기려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 같더만.

 

월세가 과연 그렇게 나쁜 제도인가. 그냥 단순히 비교해 보면 된다. 지금 집값과 지금 전세값과 비교하면 과연 월세가 그렇게까지 서민들에 부담이 되는 제도일 것인가. 결국 보면 떠드는 대부분이 서민의 삶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경우들이란 것이다. 전세도 오른다. 그것도 대부분 서민들의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오른다. 그 돈을 모으느라 역시 그동안 소비도 못하고 돈을 모아야 한다. 언론이 서민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전세금 올릴 것을 대비해서 모으는 그 돈도 결국은 비용인 것이다. 결국 다시 전세를 살기 위해서 그 돈을 다시 전세금으로 묻어 두어야 한다.

 

그러고보니 국채와도 비슷한 구조라 할 수 있다. 국채는 빚이면서도 빚이 아니다. 다음 세대에 갚아야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이자만 충실히 낼 수 있으면 그 다음 세대에서도 굳이 갚지 않고 다음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이 바로 국가의 채무라는 것이다. 채권을 발행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기존의 채권을 사들이며 이자를 갚으면 거의 무한히 채권은 연장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모아 전세금을 늘려도 그 돈은 세입자의 돈이 아니다. 다음 임대인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많이들 착각하고 있다. 전세를 월세로 바꿔 살아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정의당 심상정은 공개석상에서 아예 대놓고 대통령 탄핵을 떠들고 있었다. 진중권 나부랭이 역시 대통령도 검찰수사를 받아야 한다며 주접을 떨었었다. 대놓고 대통령 하야와 장관 퇴진을 떠들던 것이 바로 보수정당이고 보수언론이란 것이다. 그런데 일개 검사장 하나 내쫓아야 한다고 개인적인 자리에서 말도 못하는가.

 

이제야 알았다. 검사장이 얼마나 높고 존귀한 자리인지. 검찰총장이 얼마나 지고지상의 위치인지. 하긴 그러니까 윤석열의 인간선언에 그리 언론이며 정치권이며 감격의 눈물까지 흘려대고 있는 것일 게다. 청와대와 검찰청이 평등하다고 처음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검찰총장이 대통령과 대등하다며 처음으로 자신을 낮추어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차라리 대통령더러 물러나라 할 수는 있어도 검사장을 내쫓아야 한다고는 말해서 안된다. 언론에 대한 기대는 버린 지 오래다.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제대로 된 언론은 이미 현실에 남아 있지 않다.

 

MBC가 보도하던 그 순간 나 역시 그 검사장이 한동훈임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동재의 이름까지는 몰라도 한동훈의 이름 정도는 대충 기사만 봐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유시민이 라디오에서 출연해서 볼드모트냐며 비아냥거렸겠는가. 그냥 언론이 알아서 이름을 가려준 것이었다. 한동훈이고 이동재인 것을 알면서도 공범이기에 일부러 이름을 감춰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뉴스를 보고 이름도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느냐 떠들어댄다. 이 새끼들이 진짜 사람새끼들은 맞는 것인가.

 

하여튼 기자새끼들에게 새끼라 붙이는 것부터 어쩐지 존칭을 써주는 것 같아 엿같아지는 요즘일 것이다. 어딜 감히 검사장을 내쫓겠다 말할 수 있는가. 어디 감히 검찰총장에게서 인사권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인가. 어디 감히 검사장을 수사할 수 있는 것인가. 연구원이다. 하지만 전직 검사장도 검사장이니 예우해야 한다. 아니면 도대체 지금 언론이 떠드는 소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바로 이해하는 것일까.

 

당시 뉴스를 봤으면 누구나 바로 한동훈의 이름을 떠올렸을 테고, 한동훈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저 새끼 그냥 둬서는 안되겠다 생각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도 물러나라 하는 판인데 일개 검사장따위. 개인의 통화를 까발리며 의혹으로 만드는 권경애 수준이 참 안타까울 지경이다. 저런 것도 못 거르는 것이 민변이란 조직이었는가. 지랄이다.

조조가 어떤 패악을 저질러도 여전히 그를 지지하며 충성을 다하던 순욱이었지만 결국 조조가 위왕에 즉위하며 찬탈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자 그와 결별하게 된다. 이성계를 도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핏줄로 몰아 폐위시키는데 일조했던 정몽주였음에도 결국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를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려는 것을 알고 그를 막기 위해 오랜 친구의 목숨마저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왕조의 명운이 다했어도, 왕이 무능하고 포악하여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어도, 왕을 바로잡으려 애써야지 왕을 바꾸려 해서는 안된다. 혼군보다 암군보다 폭군보다 더 큰 죄악이 그래서 찬탈자인 것이다.

 

권경애가 결국 검언유착을 권언유착으로 바꾸기 위해 없는 사실마저 조작해 퍼뜨리려 시도했다. 조선일보가 그것을 받고 진중권은 그 주장을 고스란히 인용한다. 홍세화나 서민 나부랭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명확하다. 윤석열 검찰이 아니면 누가 문재인의 목을 딸 수 있겠는가. 윤석열 검찰을 돕지 않으면 어떻게 문재인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누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있는 지배자일 것인가. 물론 국민 가운데 문재인을 지지한 40%는 취급할 필요도 없는 불가촉대상인 것이다. 국민이란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들만을 가리킨다. 문재인을 지지한 순간 국민의 자격조차 잃는다. 어째서 언론들이 정상화를 위해 시민들의 도움을 구하고서는 정작 문재인을 지지하던 시민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자 바로 외면하고 정파적이라고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는가.

 

원래 일본에서는 아무리 끝자락에 살짝 걸친 정도라 할지라도 겐지의 후손이어야지만 쇼군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힘으로 전국의 다이묘들을 누르고 그들의 위에 군림하고 난 뒤에도 끝내 쇼군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던 이유였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올랐던 관직이 우장군, 우대신이었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호소카와에게까지 한 번 까이고 그나마 쿠게의 명문이던 토요토미가의 양자로 들어가 쇼군 대신 간바쿠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바로 다이묘들이 도쿠가와를 중심으로 뭉쳐서 토요토미가를 멸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진위는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겐지의 후손이라 주장할 수 있는 도쿠가와에 비해 역시 오다나 토요토미는 다이묘의 지배자로서 정통성이 턱없이 미치지 못했던 탓이었었다.

 

위진시대 이래 대대로 황제가 바뀌는 동안에도 호족에서 귀족으로 거듭난 특권층들이 모든 기득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왕조가 뒤집히고 황제가 바뀌는 동안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새로운 황제를 맞아 그를 지지하며 오로지 영화와 권세를 누릴 뿐이었다. 황제마저도 우스웠다. 진정한 천하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런데 혹시라도 황제가 정신이 나가서 그런 귀족들의 특권을 빼앗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전충 같은 제대로 미친 놈이 아니고서는 그들을 어떻게 할 마음조차 먹을 수 없게 된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기록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결국 비대해진 훈구파들의 특권을 왕권으로 억압하고 박탈하려 한 것이지 않던가. 

 

민주화진영에도 엄연히 등급이 있었다. 성골과 진골이 있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육두품과 불가촉천민이 있었다. 성골은 군사독재정권도 인정한 이들이었다. 서울대 나와서 서울에서 활동한 말 그대로 엘리트들일 터였다. 그나마 서울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사람들이 알 만한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활동했다면 진골 쯤 된다. 역시 이 또한 서로 멱살잡이 하면서도 군사독재정권 역시 인정하던 선 안에 있었을 것이다. 저 멀리 부산에서 한 사람은 고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경희대 출신이다. 과연 기득권이든 민주화진영이든 그들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겠는가. 노회찬이 아주 오래전 잠시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진보진영에서 끝끝내 비주류로 떠돌다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서로 욕하고 멸삽잡이 하더라도 그래도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도 박근혜도 그렇게 욕하면서 결국은 대통령으로 인정하기는 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당시 자칭 진보 가운데서도 검찰로 하여금 정권을 수사해서 몰락시켜야 한다 주장한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아니 그렇게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와중에도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경우란 거의 드물었었다. 그런데 어떤가? 노무현 정부 당시는 걸핏하면 거리로 나와 떠들던 말이 대통령 하야와 정권 퇴진이었었다. 감히 이명박과 박근혜에게는 하지 못하던 말들을 당시는 너무도 당당히 외치고 했었던 것이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윤석열 검찰을 지켜야지만 문재인 정부를 몰락시키고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누구로의 정권교체이겠는가?

 

KBS가 파업을 마치고 가장 먼저 한 선언이 문재인 정부를 거꾸러뜨려 파업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이겠다는 것이었었다. 그래서 김경록PB의 인터뷰를 왜곡하고, 검언유착을 권언유착으로 바꾸기 위한 오보를 자발적으로 내보냈다. 바로 그 오보를 이유로 수사심의위에서 한동훈에 대한 수사중단권고가 나온 것이었는데 권고를 무시하고 수사했다며 비판하는 보도까지 전면에 내보내고 있었다. 이유가 뭐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거꾸러뜨려야 한다는 당위에 비하면 언론으로서 오보를 내야 한다는 치욕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겨레도 기꺼이 KBS의 검언유착을 가리기 위해 오보 아닌 오보를 냈고 윤석열 총장의 권위가 떨어지는 듯 보이자 오체투지하며 온몸을 던져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런 연장에서 본다면 바로 반박이 나오는 왜곡된 사실로 국면을 전환하고자 시도한 권경애 변호사의 시도는 얼마나 깜찍한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조선일보가 받으니 진중권이 따라서 외치기 시작한다.

 

어째서 언론들은 저토록 정의당을 띄워주는 것일까. 어째서 미래통합당은 정의당에 저토록 추파를 보내는 것일까. 과거 참여정부 시절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이 정책연대를 하던 상황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당시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을 이어주던 고리도 바로 그것이었었다. 서울대 출신들이 모여서 모임까지 가지더라. 너도 서울대, 나도 서울대, 이성윤 지검장이 아미 경희대 출신이었던가? 같은 검사고 무려 중앙지검장인데 언론은 이성윤 지검장에 대해서만 어쩌면 이토록 가혹하기만 한 것인가.

 

아마 지금쯤 내가 왜 진보를 자칭 진보라 부르는가 이해하게 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저들의 진보는 차라리 패션에 가깝다. 페미니즘과 비슷하다. 좋은 대학 나왔고 사회적으로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적어도 이런 그럴싸한 소리 정도는 읊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원래 프랑스혁명 당시에도 많은 귀족들이 당시의 유행이라 귀족들의 특권을 비판하는 글이나 연극 등을 직접 후원하며 즐기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질은 단지 특권의식에 찌든 병신들이란 것이다. 토론하던 도중 서울대라는 학벌을 앞세워 상대가 지방대 출신임을 까발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오히려 그런 모습을 지지하며 응원하던 자칭 진보들의 모습에서 더이상 그들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던 기억이 있었다. 소비에트가 어떻게 노동자 농민을 위해 일어났음에도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는가.

 

참 어이없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정의가 무언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통이다. 정통이란 정체성이다. 누가 이 나라 이 사회의 정당한 지배자로서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최소한 서울대도 나오지 못한 부산 출신들은 아닐 것이다. 그들에 부역하려는 놈들 역시 마찬가지다. 순혈의 자격을 찾으려 한다. 한겨레와 경향이 벌써부터 윤석열 선거운동에 목숨을 거는 이유인 것이다. 안철수도 서울대였다. 무려 서울대 의대다.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진다.

 

원래는 다른 글을 쓰려 했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어이없어서. 그런데 또 그런 모습들이 너무 납득이 된다. 조선일보와 손잡고 미래통합당과 손잡는다. 조선일보를 금과옥조로 조선일보를 위해 먹잇감마저 기꺼이 만들어 던져준다. 양심도 염치도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리 오랜 친구라도 대의와 명분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노무현을 몰아내기 위해 한나라당과 손잡았던 당시의 민주노동당과 자칭 진보들처럼. 당시도 비슷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다. 인터넷에는 정말 잘나고 똑똑한 놈들이 너무 많다. 현실이란 것이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이다. 개같게도.

권력이란 정의와 폭력의 합성어다. 정의는 강력해야 하고, 폭력은 정의로워야 한다. 폭력은 정의가 아닌 것조차 정의로 만들 수 있고, 정의는 폭력에 대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명분과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권력인 것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틀어지면 그 순간 권력은 붕괴하게 된다. 폭력이 정의를 뒷받침하지 못하거나, 정의가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할 때 권력은 안팎으로 균열을 일으키며 끝내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언론과 검찰이 공생해 온 관계가 그랬었다. 물론 전부터도 언론은 그런 식으로 권력에 빌붙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오고 있었다. 언론이 떠들면 진실이 된다. 모든 언론이 하나가 되어 떠들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정의가 되어 버린다. 권력이 이미 저질러 놓은 행동들이 그렇게 언론에 의해 정당화되고, 다시 언론이 떠드는 소리들을 권력이 받아 행동으로 옮기면 정의는 구현되는 것이다. 권력이 언론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며 언론이 권력에 기생해야 하는 이유다. 그럼으로써 언론은 자신들의 정의를 현실로 만들 힘을 가지고, 권력은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정의로 만들 수단을 갖는다. 그래서 특히 언론과 검찰 모두에 대한 통제를 놓아 버린 민주정부에서 언론과 검찰의 유착은 폭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언론이 떠들면 검찰이 수사한다. 언론이 한 목소리로 떠들면 검찰이 기소해서 재판에 넘긴다. 재판결과는 상관없다. 재판에 넘긴 그 순간까지만 언론은 관심이 있을 뿐이다. 재판에 넘겨진다는 자체가 유죄심증이라는 논리를 언론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검찰이 수사하면 언론은 그 수사를 정의로 만들기 위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검찰의 수사는 항상 옳고, 언론의 보도는 검찰의 수사를 통해 입증된다. 그런 언론과 검찰의 협업을 통해 현직 대통령을 탄핵으로 끌어내리고 정권교체까지 이루었을 때 그들의 자신감과 자부심은 그 끝을 모를 지경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처럼 손잡고 함께 한다면 대통령이고 정권이고 그저 우스울 뿐이다. 그리고 하필 그 순간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윤석열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상황까지 만들고 만 것이었다.

 

바로 그 윤석열과 손잡고 언론은 박근혜를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다만 문재인의 집권을 막는데는 실패했었다. 윤석열이 검찰총장이 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그 문재인을 치는 것이었다. 한겨레와 경향이 정신줄 놓고 쫓아 달려갔던 이유였다. KBS가 인터뷰까지 왜곡해가며 검찰을 지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문재인의 집권은 막지 못했지만 다시 한 번 윤석열과 함께 문재인을 끌어내릴 수 있으면, 나아가 노무현처럼 만들 수만 있다면 자신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정의를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그럴 힘이 검찰총장이 된 윤석열에게 있었고, 그 힘의 사용을 정당하게 만들어 줄 힘 또한 언론인 자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대통령마저도, 정권마저도 우습게 여기는 정말 특별한 존재들이다.

 

감히 언론 나부랭이가 소비자인 시민들을 서슴지 않고 비웃고 모욕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심지어 언론사를 정상화겠다고 파업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던 그들마저 정작 자신들이 원한 결과를 얻어내고 가장 먼저 한 짓거리가 자신들을 지지했던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편향된 대상으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필요할 때는 지지를 호소하지만 일단 얻을 것을 얻고 나면 오히려 더 비천하고 누추한 존재로 경멸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이제 자신들이 검찰과 손잡고 실제 이 사회를 좌지우지할 힘을 가지게 되었다. 더이상 시민들따위의 도움 없이 검찰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사를 통해 오보를 내고 그를 가지고 검찰에 수사받고 재판까지 받게 하면 되는 것이다. 재판결과가 나오는 동안 자신들이 만든 이미지가 그들을 정의하게 된다. 그런데 그깟 시민들따위.

 

한동훈이 저토록 오만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수사에 협조한 적이 없었다. 같은 검찰이면서 검찰의 수사를 불신하며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언론이 자기가 말한 대로 써 줄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언론에 의해 자기의 말만이 진실로 전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동훈의 의도 그대로 MBC를 제외한 모든 언론들이 한동훈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 수사 자체마저 부정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다만 여기서 고리 하나가 빠진다. 그런데 언론이 떠든다고 한동훈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추미애가 지금 검찰인사를 미루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성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허튼 짓 말고 제대로 수사하라. 인사권은 법무부장관에게 있다. 윤석열이 뭘 어쩌든 검찰의 모든 인사는 추미애 법무부장관에 의해 결정된다. 무엇보다 더이상 국민들이 전처럼 언론의 보도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정치권마저도 이제는 언론의 보도를 그냥 반만 흘려듣는 정도다. 언론이 떠든다고 정의가 아니다. 더구나 언론이 아무리 정의를 주장해도 검찰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인사를 앞두고 과연 자기를 따르는 일선검사들도 적지 않을 이성윤이 법무부장관과 척질 결정을 할 수 있을까. 한동훈이나 언론이나 여전히 오만하지만 현실은 그를 따라주지 않는다.

 

윤석열이 뜬금없이 진짜 민주주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이유이기도 하다. 검찰총장과 대통령은 같다. 검찰청과 청와대는 같다. 언론과 정부는 같다. 시민과 기자도 같다. 사실 나름대로 절박하게 현실을 인정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원래는 검찰총장이 대통령 위에 있었다. 언론이 시민보다 위에 있었다. 그러니까 건들지 말라. 괴롭히지 말라. 그를 위해서 자기가 권력을 가져야겠다. 자기가 저 위에 올라가야겠다. 언론이 도와달라. 아니나 다를까. MBC가 검찰에 맺힌 것이 진짜 많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MBC만 그런 윤석열에게 한결같이 비판적이다. 우리가 이 나라를 가지자. 이 나라 대한민국을 가지자. 보수 정치권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다. 언론을 향한 메시지다. 다만 언론의 주류가 보수언론이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보이는 것 뿐이다. 윤석열이 진짜 이재용 잡고 싶어서 그를 기소하려 했었겠는가.

 

그런 점에서 지금 조국 전장관이 하고 있는 일들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언론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인사권을 법무부장관이 돌려받으며 검찰총장의 장악력이 전과 같지 않은 상황에 결정적으로 검찰을 통해 언론을 처벌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워낙 작년 이른바 조국사태를 국가적인 규모로 키워 놓은 탓에 조국 전장관의 그런 행보를 아무리 언론이라고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현행법 안에서 검찰을 통해 형사처벌을 받게 하고 민사를 통해 손해배상까지 하도록 한다. 검찰이 언론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다시 언론의 비판에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검언유착으로 인해 한껏 무리수를 두고 있는 상황에 기자들을 기소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검찰의 수사와 기소를 그대로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

 

검언유착 수사에도 변수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동재 혼자 모든 것을 뒤집어쓰려 해도 과연 검찰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윤석열 검찰과 채널A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신뢰의 고리를 깬다. 검찰과 언론의 오랜 유착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검찰의 행사를 언론이 훼방놓고, 언론의 보도를 검찰이 부정한다. 벌써부터 정의연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언론의 잇딴 기사삭제와 정정보도로 난관에 처해 있다. 더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 언론이 책임지거나 아니면 검찰이 책임지거나. 물론 검찰은 언론을 위해 자기가 희생할 조직이 아닌 것이다.

 

사실 어느 한 쪽만 허물어도 되는 문제이기는 했었다. 검찰이 언론의 칼이 되어 주거나, 언론이 검찰의 거울이 되어 주는 경우만 막아도 검찰 혼자, 혹은 언론 혼자 지금처럼 미쳐 날뛰는 상황은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죽이고 현직 대통령까지 탄핵하고 나니 무서울 것 없이 날뛰던 검찰과 언론이 마침내 천적을 만났다. 문재인이 아니다. 문재인을 중심으로 언론도 검찰도 믿지 않고 굳게 뭉친 과반에 가까운 시민들이다. 그들이 언론과 검찰의 훼방에도 민주당의 176석을 만들었고, 조국 전장관과 정의연이 반격에 나설 환경까지 만들어 주었다. 결국은 언론과 검찰의 힘이라는 것도 민주주의 국가이기에 시민들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을 텐데도.

 

정신을 차리면 살아남고 아니면 죽는다.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까. 이성윤이 야망이 있다면 아마 여기서 윤석열과 다른 행보를 걸으려 할 것이다. 검찰총장도 좋지만 대법관도 바라는 것이 바로 국회의원 배지라는 것이다. 검찰총장을 거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언론 가운데서는 어디가 살아남을까. 한겨레와 경향이 망할 것은 알겠다. 조중동이야 원래 독자들이 그런 성향들이었다. 시대의 종말을 본다. 흥미로운 요즘이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빌붙어 부역하던 이른바 친일파들이 해방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해방군으로 들어온 미국에 빌붙어서 반공투사가 되는 것이었다. 일제보다 더 나쁜 것이 공산주의자고, 친일에 대한 단죄보다 더 시급한 것이 그런 공산주의자들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는 친일파는 정의가 되고 혹시라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닿았다면 그는 단죄되어야 할 악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반공투사들을 필요로 했던 미군정과 이승만이 뒤에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한 변신이었었다.

 

그러고보면 이명박근혜 당시 언론이라고는 손석희의 JTBC 정도가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아, 청와대에서 나눠준 질문지대로 질문하지 않았다가 청와대 출입처가 끊겼던 미디어오늘도 있기는 했었다. 그래도 진보를 자처했으니 한겨레나 경향이나 당시 보수정부와 여당을 어느 정도 비판도 하고는 했지만 대부분 딱 당시 정부와 여당이 용인할 수 있는 선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세월호에 대해서도 차라리 민주당과 문재인을 더 욕하면 욕했지, 아니 차라리 민주당과 문재인을 더 비난했기에 청와대와 보수여당을 조금 더 비판해도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과연 2016년 말 JTBC를 시작으로 국정농단 보도가 쏟아졌을 때 조선일보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한겨레와 경향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끝까지 내달릴 수 있었을 것인가. 박근혜 탄핵에 오히려 가장 공이 컸던 것은 손석희의 JTBC가 아니라 조선일보와 TV조선일 수 있는 것이다.

 

탄핵을 앞두고 박근혜가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늘어놓을 때도 두 손 곱게 모으고 경청하던 기자들 가운데 이들 자칭 진보언론의 기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명박이 노무현 죽이겠다고 검찰을 동원해서 망신주고 압박할 때도 자칭 진보언론은 그 맨 앞에 있었다. 한명숙 전총리를 뇌물죄로 걸어넣으려 검찰을 동원해 공작을 꾸밀 때 역시 자칭 진보언론들은 충실히 보수정권의 손과 발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JTBC가 포문을 열고 조선일보가 호응하는 듯 보이자 마치 그런 적 없었다는 듯 태도를 바꾸더니 박근혜를 탄핵하고 정권까지 교체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다. 자신들이 원한 적도 기여한 것도 없는 자기들과 상관없는 정권교체였다는 사실을. 마치 일본의 지배가 영원할 것이라 여기며 부역하던 이들이 어느날 느닷없이 광복을 맞은 상황과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과거 정권에서 자신들이 했던 일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래서 2017년 총선 당시 ㅅ자칭 진보언론들은 하나같이 민주당과 문재인이 아닌 국민의당의 안철수를 지지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진보언론이니 정의당의 심상정을 지지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이념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문재인을 꺾을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거의 안철수에 올인하다시피 했었다. 한겨레 기자가 자기 SNS를 통해 문재인을 문재앙이라 부르고, 선거가 끝나고는 아예 문재인 지지자들을 상대로 '덤벼라 문빠들아!'를 외친 배경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문재인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다.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 물으려 할 것이다. 물론 보수언론들 역시 처지는 비슷했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만큼 그 실정과 부정에 대한 책임 역시 함께 직접적으로 나눠 져야만 한다. 다른 대안이 없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여성계 역시 그런 언론들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2012년 이후 여성계는 항상 박근혜 정권을 지지해 왔었다.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근혜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왔을 것었다. 탄핵정국에서마저 여성대통령에 대한 부당한 탄압이라며 박근혜를 적극 옹호했던 것이 바로 그들 여성계였었다. 그래서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성향을 이용해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려 했던 것이었다. 친일파들이 반공을 앞세워 오히려 기득권을 강화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친여성주의 성향을 이용해서 여성주의의 기득권을 강화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주의자들의 움직임은 자칭 진보와 자칭 보수들에게 여성주의와 반여성주의라는 선택지를 만들어 주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보다 더 철저한 여성주의자로서 엄하게 비판하거나, 혹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여성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거나. 결국은 어떻게든 정당성과 명분을 잃은 자신들에게 정부를 비판할 빌미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더 여성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반여성주의를 주장하거나.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계기로 여성주의를 앞세우던 자칭 진보와 반여성주의를 이용하던 자칭 보수가 마치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인 것이다. 원래부터 명분을 잃은 자신들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그리고 그 지지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이용해 왔던 것이 여성주의이고 반여성주의였다는 것이다. 미투는 그런 그들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되어 주고 있었다. 여성주의를 선택한 자칭 진보들은 미투에 편승해서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고, 반여성주의를 이용하려는 자칭 보수들은 그에 대한 남성들의 불안과 반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결국 목적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공격이었기에 박원순이라는 거물의 죽음은 그들에게 다시 하나가 될 계기가 되어 준다. 평소 반여성주의를 그토록 처절하게 부르짖던 인간들이 이제와서 정의당의 여성주의자들을 적극 지지하며 나서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처음부터 여성주의고 반여성주의고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박근혜로 인해 차마 현정부를 욕할 거리가 부족했던 이들에게 여성주의든 반여성주의든 단지 빌미가 되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칭 진보들에게 여성주의란 절대적인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절대 의심해서는 안된다. 감히 진실을 요구해서도 안된다. 심지어 변호사에 대한 비판조차도 2차 가해이니 절대 금지해야만 한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가해이고, 죽음을 추모하는 것도 가해이며,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마저 가해다. 그래서 더욱 모든 구성원들은 그런 2차 가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해야 했던 해방공간의 상황과 비슷하다. 여성주의에 대한 입장을 묻고 그를 단죄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들은 권력을 가지게 된다. 여성주의에 대한 조금이라도 다른 대답을 하게 되는 순간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웃기는 건 자칭 진보들에게 그 권력의 배경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민주정부라는 것. 그러나 그 권력을 민주정부를 공격해서 뒤집는 데에 쓰려고 하고 있다.

 

결국 자칭 진보들이 여성주의를 앞세워가며 현정부와 여당을 공격하려는 이유는 한 가지라 할 수 있다. 진중권이며 홍세화 등 자칭 진보 나부랭이들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윤석열이 얼마전 공개석상에서 한 발언과도 같은 맥락이다. 문재인은 박근혜와 같다. 문재인은 이명박과 다르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근혜 정권과 차이가 없다. 그렇게 문재인 정부를 이명박근혜 정권과 같은 선상에 놓아야 지난 정권에서 자신들이 침묵하며 심지어 부역하던 과거가 지워질 수 있다. 어차피 이명박근혜를 비판했어도 결국 들어서게 되는 것은 문재인의 민주당 정부라는 것이다. 그래도 문재인의 민주당 정부를 끌어내릴 수 있으면 자신들이 지난 정부에서 보였던 비겁함을 조금이라도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박근혜를 끌어내린 것은 촛불시민이지만 박근혜와 똑같은 문재인을 끌어내리는 것은 언론들 자신이다. 그래서 더욱 검찰과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를 재판정에 세웠듯 윤석열이 문재인도 재판정에 세우고 말 것이다.

 

말하자면 보상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시절 비겁했던 자신들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문재인 정부를 이명박근혜 정부와 같이 만들고, 그를 끌어내림으로써 그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을수록, 하긴 그러고보면 박근혜 정부 말기에 대부분 정부와의 싸움은 자칭 진보가 아닌 민주당이 거의 전담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 꼴보기 싫은 것이다. 세월호 정국에서 자칭 진보가 아닌 민주당이 중심에서 국민의 마음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검찰이라면 문재인도 끌어내릴 수 있지 않을까.

 

윤석열의 현정부에 대한 날선 발언들은 그런 언론을 향한 메시지인 것이다. 어쩌면 진중권이나 홍세화 등은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리고 있을 지 모르겠다. 한겨레 경향 오마이의 기자들은 다시 노무현의 상황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며 흥분하고 있을 것이다. 검찰이 문재인 정부를 치겠다. 그러면 문재인 정부가 무너지면 자칭 진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달라지는 것 있을까? 그저 입으로만 떠드는 족속들이. 차라리 지금처럼 뭐라도 현실로 이루어야 하는 상황이 더 부담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니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문재인 정부는 실패하고 몰락해야 한다.

 

자칭 진보언론이나 자칭 진보지식인이나 자칭 진보정당이나 그리고 자칭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주의에 그리 철두철미해서 여성주의에 대한 종교적 광신까지 보이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나름의 절박함이다. 특히 자칭 진보들 입장에서 현정부와 여당을 공격할 명분이 여성주의 말고는 거의 없는 빈곤한 현실이 더욱 곤란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성주의라도 있으니 그것을 앞세워 진보입네 목소리라도 크게 낼 수 있지 않은가. 지금 와서 과연 조선일보와 자칭 진보들 사이에 과연 차이랄만한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당연한 것이다. 여성주의의 의미다. 저들에게.

지금 당장 부동산앱을 켜고 전세를 검색해 보면 반지하 아니면 거의 1억은 기본으로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에도 쓴 것처럼 연봉 3천 받는 사람이 한 푼도 안 쓰고 모으면 3년이고, 절반을 쓰고 절반을 모으면 6년, 그래도 현실적으로 10분의 1씩 모은다면 30년은 걸려야 모을 수 있는 돈이다. 그나마도 구할 수 있는 가장 싼 전세가 이렇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연 이제 갓 결혼한 젊은 부부들이 바로 자기가 벌어서 전세금씩이나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의문인 것이다. 주위에 무려 6억이나 하는 전세를 살다가 집주인이 올려달라는 만큼 돈을 모으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만 못한 곳으로 이사가야 하는 처지인 사람이 있다. 사실 6억이면 지역에 따라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 가격은 훌쩍 넘고도 남을 금액이지만 아이가 자라고 하면 그만큼 고려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벌이가 적은 편도 아닌데 전세값 오르는 속도를 따라가기가 그리 버거운 것이다. 과연 전세를 살면 전세금이 고스란히 남는다고 하는데 어째서 전세금은 그대로인데 사는 집은 계속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더 낡고 허름한 더 아쉬운 것이 많은 동네로 밀려나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6억이란 전세금은 처음 계약한 2년 전의 6억 그대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인가?

 

전세에 대한 터무니없는 착각인 것이다. 나 역시 작년 이사하면서 전세자금대출까지 고려하느라 더욱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전세는 최저임금의 영향 아래 있는 가계에서 돈을 모아 마련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전세를 살려면 주위의 도움을 받거나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곧 누군가의 비용이고 빚이 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는다면 부모는 노후의 여유를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이고, 대출을 받았다면 그만큼 이자를 계속해서 갚아야 한다. 만일 당시 내가 대출을 받아서 여윳돈없이 전세를 살았다면 지금처럼 일을 그만두고 한가롭게 집에서 뒹굴거릴 수 있었을까? 아직 남아있는 은행잔고야 말로 내가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가장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런 돈을 전세금이라는 이름으로 집주인에게 계약기간 동안 맡겨 두어야 한다.

 

사실 보증금이라는 것도 대부분 서민 입장에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막 첫직장을 얻고 사회을 시작한 초년생이 어떻게 천만 단위를 넘어가는 월세보증금을 장만할 수 있을 것인가. 어차피 월세 밀린다고 보증금 빼가며 버틸 수 있는 시절도 아니다. 보증금은 보증금이다. 월세도 아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월세를 일정 이상 밀리면 바로 강제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보증금 없이 단지 월세로만 살 수 있게 하도 어차피 큰 무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라도 바로 방을 얻으려 하면 두 어 달 월세만으로 바로 방을 얻어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만큼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내딛는 사람들에게 장벽을 낮춰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내가 벌 수 있는 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런 범위 안에서 정해지는 주거비용이야 말로 온전한 서민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부모로부터 전세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딱히 월세 보증금을 기대할 처지도 아니다. 그렇다고 계속 함께 살 수도 없다. 부모 자신조차 겨우 알량한 전세나 혹은 여전히 월세에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진짜 서민들 이야기다. 남의 돈조차 없어서 보증금 5백, 1천만원 짜리 손바닥만한 방 한 칸 찾아서 헤매 다니는 이들의 이야기다. 월세는 어떻게 감당하겠는데 보증금이 너무 어렵고 부담스럽다. 최저임금이 오른 탓에 알바만 해도 어떻게 월세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보증금에서부터 막히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진짜 젊은 서민들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란 무엇일 것인가. 서울이 천박한 도시라는 이해찬 대표의 말에 동의한다. 청년임대주택 만들겠다 하니 집값 떨어진다며 온 동네사람들이 나서서 반대한다. 보증금 없이 그저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월세만 내면서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이 있다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다른 임대인들로 하여금 더이상 월세와 보증금을 올리지 못하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도대체가 월세로는 못살겠다며 전세부터 이야기하려는 서민이란 어디에 사는 어떤 서민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전세금 빌릴 곳도, 대출받을 신용도 없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평생 모은 돈에 대출금까지 갚아가며 전세 살고 내 집 살기보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수입이라도 오늘을 즐기며 살 수 있다면 그게 그리 나쁜 일인 것인지. 서민의 기준이 다르다. 월세 사는 사람이 보는 서민의 기준은 집도 몇 채 씩이나 있는 사람들이 보는 서민과는 서로 한참 다를 수밖에 없다.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내가 자칭 진보들 싫어한다고. 그리 돈이 많더라. 그리 집안도 좋아서 정작 없이 사는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너무 천박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임금수준에서 전세조차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의 돈을 끌어올 수 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다른 세상의 이야기란 것이다. 도대체 몇 억 씩이나 하는 전세란 어디 사는 어떤 서민들의 이야기란 것인지. 차라리 아파트조차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월세가 가능하다면 사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달에 100만원 씩 모아 아파트 사나 월 200 버는 것 가운데 80만원 씩 주고 월세로 사나. 그래도 20만원 남는다. 굳이 집을 사서 물려줄 필요 없이 역시 자식들 일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다. 나처럼 혼자 사는 사람은 더욱.

 

확실히 명언이라 할 것이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 부모에 손벌리지 않고서도 주거걱정 없이 젊은이들이 자신있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결혼하면서도 부담없이 자신들만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월세가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서민의 기준이 서로 다른 때문일 것이다. 전세조차도 이미 이런 수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말많은 놈들이 절실하게 느낄 수 없는 부분일 테지만. 우습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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