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래서 말했잖은가. 저 자칭진보놈들은 오히려 이명박근혜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그 시절이 더 좋았다 생각한다. 지금이 그때보다 못하다 여긴다. 이미 한겨레 강희철이 그렇게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 바 있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더 힘들어졌다. 그리고 서민이 다시 그 속내를 밝힌다. 박근혜만 못하다.

 

역시 무능하다는 것은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와 다른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이 또한 내가 말한 바 있는 부분이다. 내가 이리 잘났는데. 내가 이리 대단한 사람인데. 어째서 내가 이토록 열심히 떠드는데 들은 체를 안하는가. 최배근도 지금 대놓고 무시당하는 것 같더만. 아무튼 이렇게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투사가 되고 열사가 되어 탄압이라도 받는 게 낫겠다.

 

근데 박근혜 시절에도 별달리 탄압이랄만한 것을 당해 본 적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다. 그때도 별로 좋지 못했지만 정권 바뀌는데 나름대로 역할도 한 것 같은데 지금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본전생각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이명박근혜로 돌아가자. 한겨레와 경향, 그리고 정의당의 속내가 그러하다. 차라리 자기 이름 내걸고 강연하면 사람들이 몰려들곤 하던 시절이 낫지 정부의 정책만 바라보는 지금은 홍세와 같은 나부랭이에게도 불편할 뿐이다. 

 

그냥 서민 나부랭이에게는 박근혜 정도가 딱 맞는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자기 수준에 맞는 대통령이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깠던 것에 대한 후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칭 진보가 지금 후회하는 이유다. 그래서 더욱 문재인 정부를 거꾸러뜨리고 다시 보수정권을 세워야만 하겠다. 짐작만 하던 것이 사실이 된다. 재미있다.

중국문화권에서 과거가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서 천 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충분한 학식을 갖춘 이들만이 바르게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상을 잘 두었다는 이유로 권력을 독점하던 귀족들이 아닌, 당연히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 백성들도 아닌 충분한 학식과 교양을 쌓은 자신들 선비들만이 제대로 나라를 바르게 책임지고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되었던가.

 

물론 유교가 추구한 것은 보편의 가치와 규범이었을 것이다. 유교가 추구한 대동사회란 왕이든 관리든 선비든 일개 무지렁이 백성들이든 각자 자신의 역할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바에 최선을 다하며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회였을 것이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렇게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를 충실히 다한다면 반드시 사회는 좋아질 것이다. 그런 유교의 가르침을 실제 행동에 옮긴 이들이 바로 우리가 아는 역사상 뛰어난 군주들과 대신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몸에 익힌 선비들인데 정치를 제대로 못할 리 있겠는가.

 

그러나 아다시피 사대부란 대부분 지주들이었다. 처음에는 지주가 아니었어도 결국 관직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장원을 소유한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신분적으로도 관직에 나가 권력을 쥔 이상 일반 백성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경우는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노비를 소유해야 하는 노비주의 입장이었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아무리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 선비라고 맹자가 떠들어봐야 선비들 역시 대부분 그냥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장 내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싶은 것이 사람의 당연한 욕심인 것이다. 땅이 있으면 넓히고 싶고, 노비가 있으면 늘리고 싶고, 신분이 있으면 강화하고 싶다. 그리고 실제 그럴 수 있는 힘이 자신들 손에 쥐어진다.

 

세상의 범죄 가운데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것이 직접 법을 만들어 강제하는 것이다. 법을 자신들이 정할 수 있으니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철저히 이익에 충실하게 법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 강제한다. 그 결과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중국문화권의 전근대의 역사인 것이다. 중국문화권만이 아니다. 영국에서도 무역과 관련한 대부분 법률은 실제 무역에 종사하는 대자본가들의 영향력 아래 제정되고 있었다. 왕과 국회는 단지 국부를 늘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그들이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돕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었다. 귀족이 귀족을 위한 법을 만들고, 군인이 군인을 위한 제도를 만들고, 상인이 상인을 위한 정책들을 세운다. 얼핏 합리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군인들에 의해 세워진 고려의 무신정권은 그러나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정권을 지키기 위해 그 군사력을 아껴두고만 있었다.

 

민주주의와 문민통제는 그래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영국에서 시작된 초기의 민주주의는 문민통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었다. 투표권도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주어졌으며, 따라서 의원의 선출부터 입법과 정책수립까지 모든 것이 그들 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란 나라는 그들 소수의 특권층만이 사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소수가 모든 특권을 독점하는 사이 오히려 영국사회는 더욱 피폐해져갔고 수많은 사회문제까지 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영국이라는 나라를 위한 더 나은 최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상관없는 필부필부의 의견이 정치에 책임과 함께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많은 대수롭지 않은 다수의 참여와 그에 근거한 책임정치만이 사회를 보다 낫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의사는 오진을 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람을 죽여도, 환자를 상대로 강간을 저질러도 잠시 면허가 취소되기는 해도 일정 시간만 지나면 다시 발급받을 수 있다. 같은 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한 의대생들에 대해 교수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니 잘 대해주라 말한 것을 떠올려 보라. 그냥 자기들끼리 동의하고 합의하면 그것으로 그들의 기득권은 언제나 유지된다. 검찰 역시 마찬가지다. 검찰이 무고한 이를 죄인으로 몰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했어도 검찰이란 조직의 이익에만 충실하면 불이익을 보는 일따위 거의 없다 보면 된다. 검사 그만두고 나가도 변호사로 개업해서 전관예우까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그래서 판사와 검사는 한 몸이란 것이다. 그에 비하면 대통령은 어떤가.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이야 반발하든 어쩌든 아랑곳않고 진료거부를 계속할 수 있는 의사들에 비해 국민의 생명이 우선이라 정부는 계속해서 양보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판단과 결정의 권한을 주는 것이 옳을 것인가.

 

국민은 의사를 심판할 수 없다. 검사나 판사 역시 심판할 수 없다. 국민이 오로지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정부와 국회 뿐이다. 그런데 그 정부와 국회가 법이란 수단을 통해 의사와 검사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 비전문적인 집단이라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어도 최종적으로 그 책임 역시 정부와 국회가 질 것이며 그에 대한 판단은 결과를 보고 국민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문민통제다. 그렇다고 과연 정부와 국회가 이들 전문가집단들에 비해 비전문적인 아마추어들이기만 한가. 의료정책에 가장 전문가는 누구일까? 사법정책에 있어 가장 전문가는 누구일까? 검경수사권과 관련해서 가장 전문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집단은 또 어디의 누구일까?

 

그런데 그게 싫은 것이다. 말은 교묘히 꼬고 있지만 결국은 정부 위에 있는 국민을 비롯한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엘리트다. 나는 그만한 자격이 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런 현실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과연 정부의 압력을 제거하면 의사들이 오로지 국민만을 위한 공익적 판단을 내리려 할 것인가. 확실히 의협이든 언론이든 보수정당이든 앞으로 최소 10년은 정권교체가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보수야당 출신 도지사와 광역시장이 있는 경북과 대구에서 시민단체가 추천해서 선발한다면 현정부와 가까운 이들이겠는가. 아니면 오히려 현정부에 적대적인 이들이겠는가. 부산시장은 국민의 힘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가져갈 것이 뻔하니 그쪽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어째서 현정부와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제도라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래야 정부에 인격을 부여하고 개별화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 정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국민이란 사실을 철저히 배제한다.

 

지금 정부가 뭣같이 정치를 하면 바로 다른 정치세력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의회에서도 다수당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정부의 정책으로 인한 결과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에 대해 심판받고 정권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정부의 정책과 환자따위 아랑곳않으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반복하는 의사 가운데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현대민주주의는 전문가가 아닌 철저히 시민에 의해 모든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그리고 심판까지 하는 문민통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전문가의 의견을 듣게 만들기 위해서? 한 마디로 자기들이 전문가니까 자기들 떠드는대로 정부가 따르게 하기 위해서란 뜻이다. 서민이란 기생충이 저리 미쳐 날뛰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소 않던 권력비판의 사명감에 도취되어 한겨레와 경향을 비롯한 언론들이 지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한 바 있다. 왜 내 말을 안 듣는가. 내가 옳고 내가 바른데.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그것이 시민과 국민을 위한 정치인가. 넘어가는 놈들이 너무 많다는 게 안타깝다. 한심하다.

기호란 드러난 기표와 숨은 기의를 모두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항상 솔직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필요하다면 아무렇지 않게 자신마저 속이며 그대로 믿어 버리곤 한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말의 이면에 숨은 본심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공공의대 설립을 이유로 파업에 나선 의사들의 본심은 무엇인가?

 

하긴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의사들 사이에서 떠돈다는 '국평오'란 한 마디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 평균 수능 5등급. 자기들은 1등급. 여기서도 아마 어느 의사놈이 수능이라고는 본 적도 없는 내 점수를 멋대로 추측해서 리플을 달았을 것이다. 사실 흥미로운 부분이기는 하다. 대부분의 경우 시위든 파업이든 하려면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우군을 만들려 비굴할 정도로 낮은 자세로 설득에 나서고는 한다. 어떻게든 상대의 언어로 상대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해시키고 납득시키고 동의를 끌어내려 노력도 하고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은 다르다. 고압적으로 내가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네가 멍청하고 네가 못나고 네가 열등한 때문이다. 왜? 자기들은 수능 1등급이니까.

 

공공의대가 설립되면 어째서 전체 의료의 질이 낮아지는가? 입결이라 하지? 그러니까 3천 명 뽑을 때는 3천 등까지만 의사가 될 수 있었는데 3400명 뽑으면 무려 3400등까지도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등급으로 치면 한 등급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런 놈들과 내가 경쟁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개원의들은 조용한데 전공의며 의대생들, 그리고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교수들만 난리인 것이다. 그래도 최고의 엘리트로서 한 등급 차이 나는 놈들과 같이 의사질은 못하겠다. 하긴 그래서 의사들이 간호사며 심지어 환자까지 대놓고 무시하고 하는 것일 게다. 좋은 의사도 분명 많지만 사람 가리는 놈들도 분명 상당하다.

 

문제는 그런 잘난 놈들이니 자기들 무시하고 무언가를 진행하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자기들 말을 듣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자체가 무척이나 싫은 것이다. 의료정책을 그럼 보건복지부가 주관하지 의사들이 주관하나? 정부부처인 보건복지부가 대통령 명령에 따르지 의사들 명령을 따라야 하나? 자기들 말을 들으라. 자기들 하자는 대로 따르라. 그러니까 정부가 아무리 양보하고 국회가 나서서 타협을 시도해도 완전한 항복선언을 받기 전까지 자기들은 절때 어떤 협상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항복문서를 내놓지 않으니 정부도 국회도 믿지 못하겠다며 원점에서 재검토까지 선언했음에도 진료거부를 계속하겠다 하는 것이 아닌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지 의무가 아니다. 의사면허 역시 자신들의 소유이지 국가의 관리대상이 아니다. 자기들 일은 자기가 정한다. 환자도 정부도 오로지 자신들 요구하는대로만 따라야 한다. 요즘 의대 가는 놈들 대부분이 있는 집 자식이라며? 의사 그만둬도 먹고 살 길 만만하니 의사고시도 거부하고 하는 것 아니던가. 그리 잘난 놈들이 공부까지 잘해서 남들 부러워하는 의사까지 되었으니 오죽할까?

 

의사놈들과 이번 일 가지고 논쟁하면서 갈수록 드는 생각이다. 이 새끼들은 지금 나를 설득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굴복시키고 그 위에 군림하고 싶은 것이다. 일반 국민 뿐만 아니라 정부와 국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를 부추기는 게 바로 의대 교수들, 무엇보다 언론과 정치인들이다. 특히 기자새끼들. 생각하는게 완전 똑 닮았다. 한국 교육정책을 근본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 하는 이유다. 공부 잘한다는 새끼들이 왜 지랄들인 것인지.

 

그냥 자기들 잘났다는 것이다. 자기들 잘났으니 못난 국민들 찌그레기들은 자기들 하잔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하면 국민, 아니면 비국민. 아파서 뒈져도 자기 책임. 전공의들 진료거부로 머리깨져서 피 철철 흘리면서도 봉합조차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래도 네가 못난 탓이다. 인국공 논란이 떠오르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빌어먹을 것들이다.

나는 원래 조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보다는 관심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전에도 썼지만 난 똑똑하고 말 잘하는 놈들을 아주 싫어한다. 그것도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주장 뿐이라면 혐오에 경멸을 더한다. 그런 놈들이 예전에도 많았었다. 그래도 자기가 꽤 잘난 줄 알기에 잘난만큼 남들에게 주목받을만한 말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믿는 놈들이었다. 특히 데모하던 주위에 적지 않았는데, 평소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온갖 이론을 섭렵해가며 입바른 소리를 떠들다가 정작 모두가 최루탄에 눈물콧물 짜면서 머리 깨지고 있을 때는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나마 술이라도 자기 돈으로 사면 자본주의의 은혜로 고맙기라도 하지 이건 그야말로 얄미움 그 자체다.

 

조국 전장관이 대학을 다니던 것이 마침 그런 시절이기도 해서 섣불리 그리 판단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SNS 등을 통해 입으로만 열심히 떠들었지 실제 위험을 무릅써가며 행동에 나섰던 적이 과연 있기는 했던가. 그래서 조국사태 초기에도 그럴 줄 알았다며 정치인은 한 번 검증의 무대에 올라가 봐야 한다 말한 적도 있었다. 주위에서 조국 전장관을 차기 대선후보로 말할 때도 일단 선출직은 한 번 해 보고 이야기하자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보이기도 했었다. 차라리 요즘의 조국 전장관이 그래서 나로서는 더 마음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입바른 소리나 할 줄 아는 썩은 선비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만하면 오히려 전보다 더 정치인으로서 자격이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삼국지에서 관우가 그리 선비를 싫어했다고 한다. 정확히 이름만 앞세우는 썩은 선비들이다. 당시에 선비라 불릴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재산도 있고 주위에 인맥도 상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긴 아무것도 없이 스승과 비싼 책까지 구해서 마음놓고 공부만 한다는 것은 당시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었다. 지역의 유지들 사이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남다른 학식과 교양을 쌓기는 했지만 본질은 어디까지나 태어나면서부터 특권을 누려 온 기득권집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자부심도 강하고 고집도 셌으며 자신의 권리에 매우 민감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이 애써 닦은 학식이란 실천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기득권을 장식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그런 인물들이 적지 않다. 선비로서 명성은 높은데 정작 하는 일은 없다. 선비로서의 학식이란 단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시단에 지나지 않는다. 서민이며 진중권, 권경애 등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대학도 나왔고, 유학에, 박사학위에, 사법고시까지 남다른 자격까지 갖추었다. 대중적으로 인지도도 높아 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력까지 발휘할 수 있다. 그러면 그에 어울리는 대접을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남들 좋아할 만한 소리들을 떠들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자기들만한 인물들이 박근혜따위를 추종할 수 없으니 그에 비판적인 여론에 편승해서 그를 공격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명성을 쌓았다. 참고로 진중권은 한때 안티조선운동의 첨병으로 조선일보 독자게시판에서 난전을 치르며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진중권이 이제는 조선일보를 금과옥조처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며 그를 따라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왜이겠는가? 당시는 안티조선이 대세였고, 지금은 반문재인이 자신을 알리는데 도움이 된다.

 

지난 정부에서 불의한 권력과 맞서 싸우면서 나름대로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자신들에게도 뭐라도 대가가 돌아오지 않을까. 문제는 진중권이나 서민이나 권경애나 정작 그 활동에 알맹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촛불집회는 그들과 상관없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시작되었고, 그들이 무어라 떠들든 상관없이 시민의 힘에 의해 정권교체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불의한 권력이 탄핵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와중에 그들은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새로운 정부에서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심지어 지난 정부에서와 다르게 자신들이 무어라 입바른 소리를 더들든 이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이니 귀기울이는 사람마저 하나 없었다. 어째야겠는가. 정부와 시민들이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려면 그에 맞는 다른 주장들을 해야 하는 것이다.

 

유시민 이사장도 언론에 대해 그리 말한 바 있었다. 기자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논쟁하기보다 정부를 향해서 그저 가르치려고만 든다. 경향일보 기자놈이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해 평가할 때도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행보를 걸었던 것을 가장 큰 잘못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자다. 그래도 언론이다. 대한민국의 여론이 바로 자신들에 의해 좌우되는데 어째서 정부와 여당이 자신들이 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 여당 국회의원들도 자기들이 뭐라 하면 바로 눈치보며 따라오려 시늉이라도 하는데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감히 자신들과 정면으로 맞서싸우려 들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 세상을 떠나고 한겨레 편집국에서 환호성이 들렸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란 것이다. 언론이 특히 당시 친노, 지금은 친문그룹을 그토록 혐오하며 적대하는 이유인 것이다. 언론을 개좆밥으로 여긴다. 그래서 정권 바뀌자마자 한겨레 기자놈은 문빠들아 덤벼라를 외치고, 미디어오늘 기자놈까지 호응했던 것 아니던가. 서민도 그런 와중에 정부를 공격하는 위치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뭐나면 자신들은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마땅히 이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말 한 마디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대단한 권력이라도 자신들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따르려 노력하는 것이 옳다. 어찌되었거나 자신들이 주장한다면 그만큼 옳고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기꺼이 따르려 노력해야만 한다. 아니면 배신이다. 아니면 모욕이고 능욕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정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야 한다. 그런데 닮지 않았는가? 서민이 의사들의 진료거부를 지지하며 나선 이유인 것이다. 의사들만이 아니다. 임대인들과 갭투자자들과 검찰과 보수정치인들이 모두 포함된다. 자신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이들이므로 자신들이 주장한 바는 모두 이루어져야 하고, 모든 것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아니면 정권이라도 당연히 무너뜨릴 뿐이다.

 

그런 의사들의 속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국평오라는 한 마디일 것이다. 국민 평균 오등급. 아마 여기도 수능점수 어쩌고 잘난 소리 지껄인 인간이 하나 있을 것이다. 내가 너희보다 공부를 잘했다. 내가 너희보다 잘났고 많이 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내가 옳고 너희들은 틀렸다. 틀린 소리를 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너희들을 내가 가르치려 한다. 그리고 그런 의사들의 속내는 바로 서민과 진중권등과도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사명감이기도 하다. 지주의 착취가 너무 심해서 못살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소작농들의 무도함을 애써 꾸짖고 깨우치려 하던 당대 선비들의 노력처럼.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면 소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차라리 위진시대 이래 중국을 지배하던 귀족들과 닮아있기도 할 것이다. 그들 역시 지식인이었다. 당연히 그 시대에는 어느 정도 살아야 지식인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서로가 명사로 추켜주며 서로의 논리를 정당화하며 그렇게 그들은 거대한 카르텔로 황제마저 무시하며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누가 황제가 되든 자신들의 기득권은 영원할 것이며 도전하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내쫓고 바꾸면 되는 것이다. 평소 파벌을 이루어 서로 다투다가도 공동의 이익을 지키는데는 항상 함께 한다. 무지렁이 백성들이야 자신들이 정하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대중의 사고와 판단까지 오로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란 오만이 자신들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에 대한 멸시와 혐오로 나타난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대중을 이끌 수도 있다. 그래야 하는 것이 곧 정의다. 심지어 동의와 지지를 구해야 할 국민을 대상으로도 그들은 그래서 간단히 윽박지를 수 있다. 어리석은 국민들따위. 본질은 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사실 서민이란 인간이 어디서 뭐 하는 인간인지 그다지 관심도 없기에 뭔 소리를 떠들었는가도 얼마전에야 겨우 듣고 알았었다. 아마 머리가 깨지는 사고가 없었다면 벌써 그저께 이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서민과 의사들이 닮았다. 진중권과 미래통합당 국회의원들이 닮아 있다. 권경애와 김경율은 어째서 저토록 검찰과 유착하여 태연히 거짓까지 일삼는 것인가. 그동안 노무현 정부 이래 기득권과 싸워 온 과정들이기도 한 것이다. 늘 그랬었다. 자기들이 주장한 대로 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 망한다. 아, 기재부도 있었지. 자기들 하던 대로 안하면 나라 경제 망한다. 그러니 재난지원금도 주지 말자. 너무 잘나서. 너무 똑똑해서. 그런 자신들을 너무 잘 알기에. 그동안 그렇게 해 왔었기에. 그런데 더이상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으니 더 강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다. 솔직한 속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기득권의 총궐기라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광화문에서 일어났고, 의사들은 병원을 떠났다. 조선일보를 비판하며 진보를 자처하던 이들이 어느새 조선일보가 하나가 되어 그 소리를 하나하나 받아 대신해서 떠든다.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그보다는 진보라는 장식에 가려져 있던 본색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중권이든 서민이든, 권경애든 김경율이든, 정의당이든 한겨레든 경향일보든, 홍세화든 뭐든 결국 그 본질은 기득권이고 단지 그 기득권에게 주어진 한 역할로서 진보라는 타이틀이 붙었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가면을 벗어던진 그 본모습은 단지 기득권이며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너무 뻔해서 크게 의미도 없다. 

그래도 버스타고 나가면 진료거부에 참여하지 않은 병원이 있어서 CT 찍고 스태플러로 고정하고 왔다. 뭔 일이 있었는가는 어제글 참고. 다행히 뇌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더라. 당연하다. 그동안 운동으로 단련한 승모근이 있고 무엇보다 재빠르게 먼저 부딪히며 아직도 아픈 오른쪽 팔꿈치가 있다. 단지 하필 부딪힌 부위가 재수없게 날카로워서 보기에 심하게 찢긴 상처가 났던 것 뿐이다. 의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아마 여기서도 썼는가 모르겠는데 나 역시 몇 년 전부터 의료수가 현실화를 주장해 온 사람 가운데 하나였었다. 노력한 만큼 돈을 번다. 실력 만큼 대가를 받는다. 공공을 위해 기여한 만큼 대우를 누린다.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그만큼 의사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고, 또한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의사를 길러내기 위해 들어가는 돈과 시간과 노력들을 생각해 보라.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첫관문인 공항의 보안검색부터 뚫리면 어쩌려고?

 

아무튼 그래서 의사들이 실수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의료수가를 올려달라 주장했다면 당장 나부터 차라리 건강보험료를 올리더라도 그리해야 한다 동의해 주었을 것이다. 힘들고 어렵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기피하는 과목일수록 더 높은 수가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면 역시 그러는 것이 옳다며 적극 지지해 주었을 것이다. 지방으로 가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으니 그만큼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주장했다면 역시 타당하다 지지했을 것이다. 더불어 한의학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기에 그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면 역시 동조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환자를 볼모로 진료거부까지 하는 것은 바로 지금처럼 언제고 환자가 될 수 있는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차라리 의사를 위해서 내가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더라도 의사가 환자를 버리고 진료거부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문제는 얼마든지 명분을 가지고 대중의 지지까지 등에 업어가며 정부와 싸울 수 있었음에도 정작 전혀 엉뚱한 사안을 앞세워 심지어 환자를 볼모로 잡는 행동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러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대중이 아닌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고 있다. 어떻게 이해해 주어야 하는가. 그래서 멍청하다는 것이다. 저것들이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머리좋고 공부도 잘한다는 인간들이 맞기는 한가 싶을 정도다. 물론 이해한다. 정부가 바로 받을 수 있는 사안으로 진료거부의 명분을 삼으려 했다면 벌써 정부가 양보하여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을 것이다. 정부를 공산주의라며 공격하는 이미지를 본 적이 있는가? 바로 의사란 것들이 많들어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처음 양보의사를 밝혔을 때 의협의 발언을 기억한다. 정부를 믿을 수 없으니 정부의 유보안도 받을 수 없다.

 

처음부터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사실 의대정원 증원이나 공공의대 설립 자체는 정작 저들에게 그렇게 크게 절박한 이슈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실제 지금 파업을 지지하는 의사나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난 정부에서 공공의대의 설립과 의대정원의 증원을 주장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면서까지 그렇게 절박하게 반대하며 정부와 싸우려 하고 있는가. 그게 목적이다. 정부와 싸우는 것. 정부를 꺾는 것. 그래서 의사란 것들 입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독재니 전체주의니 하는 정치적 수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끝까지 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양보해서는 안되며, 설사 정부가 양보해도 자신들은 끝까지 버티며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유보도 아니고 협의도 아니고 무조건 철회다. 그러면 그동안 협의해 온 다른 주체들은? 의사만 국민인가?

 

그래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지지를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이야 MBC 정도를 빼고 주류언론은 모두가 정부의 반대편에 서 있다.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만들어서라도 공격하고 거꾸러뜨리려는 놈들이 바로 언론이란 것들이다. 그런 언론을 등에 업고, 정부와 여당에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는 야당의 지원을 받고, 무엇보다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40% 남짓한 국민들이 그들의 행동에 힘을 실어주려 한다. 처음부터 계산된 행동인 것이다. 이렇게 의사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절반이 힘을 모으면 정부를 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진료거부를 결정했고, 진료거부를 행동으로 옮길만한 명분을 찾았다. 아니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의료의 질도 떨어지고 의료비용도 늘어날 거라는데 그러면 의대정원 줄이면 의료의 질도 높아지고 비용도 줄어든다는 것인가.

 

그러니까 결국 가짜뉴스까지 퍼뜨려가며 정부를 의도적으로 흠집내려 발악하고 있는 것일 게다. 과연 의사것들이 정부를 공격하며 퍼뜨리는 내용 가운데 사실인 것이 몇이나 되던가. 하다하다 조국 전장관이며 그 딸에 대한 가짜뉴스까지 퍼뜨리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이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전쟁이고 그 첨병에 의사들이 있는 것이다. 어제 피투성이가 되어 찾아간 병원 응급실에서 봉합할 수 있는 의사가 없어 곤란하다는 말에 지금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의사들이 정당하면 굳이 의사가 직접 나설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결국에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손잡은 집단들을 보라. 그런데도 저들의 정치적 행위를 용납해야 하는 것일까?

 

언론도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 민주노총이며 철도노조가 파업했을 당시 언론은 무엇이라 떠들었던가. 정치적 파업은 안된다 단언하지 않았던가. 이런게 바로 정치적인 진료거부인 것이다. 하긴 그런 언론들부터가 하나같이 정치적인 것들이니. 한국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안이라 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의사들이 어째서 저리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이번 진료거부에 동참하고 있다. 바로 현정부에서, 아니 다음정부에서까지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 자체인 것이다.

 

오늘 나를 치료해 준 의사는 정말 고맙다. 항상 의사들에게는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간호사들에게도 그래서 혹시라도 결례를 범하지 않는가 말이며 행동을 조심하는 편이다. 그러고보면 이것도 문제다. 환자를 의사 혼자 치료하는가. 코로나19 방역에 가장 많이 가장 열심히 기여한 이들 가운데는 간호사도 적지 않다. 머릿가죽을 스태플러로 찍은 채로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한 마디 해 본다. 좋은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 상식이고 정의다.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자 어느 지식인이 그에 대해 반발한 바 있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얼마나 많고 다양한데 어째서 기독교라는 한 가지 가르침만을 강요하려 하는가. 그 말을 들은 로마의 관리는 그러나 이 한 마디 말로 가볍게 그 반발을 잠재웠었다. 이미 우리는 단 하나의 진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허튼 소리 따위 다 쓸데없을 뿐이다.

 

대충 아주 오래전 읽은 내용을 떠오르는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대략 이 비슷한 대화였을 것이다. 진리의 다양성을 강조하던 로마의 전통적 지식인이 기독교라는 하나의 진리를 따르기 시작한 새로운 로마의 관리에게 무시당하며 비웃음을 사던 장면이다. 당시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했었다.

 

로마가 지배하던 지중해세계는 다양하고 복잡하기만 했다. 정복지를 늘려갈 때마다 로마에 새로운 신전 또한 늘어나고 있었고, 거기에 스스로 신이라 칭하던 로마황제까지 더하면 뭐 하나 통일되는 것 없이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황제가 스스로 즉위하며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까지 황제였던 것 같은데 저녁이 되니 어느새 암살당했다며 새로운 얼굴이 황제랍시고 로마 시민들 앞에 나서고 있었다. 그나마 로마 시민들은 황제의 즉위를 실시간으로 듣기라도 하지 거리가 좀 떨어진 속주의 시민들은 새로운 황제의 이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황제의 이름을 전해들어야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정치적으로 황제가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니 사상적으로도 구심점 없이 로마사회 전체가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런 모두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진리란 당시 로마의 시민들에게 숙원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무엇으로 그 답을 삼을 것인가.

 

원래 최초로 하나의 신만을 섬기려 했던 시도는 바로 이집트에서 파라오 아크나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다. 바로 각각의 신을 섬기는 성직자와 그들과 결탁한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라오가 성속의 권력 모두를 아우르고자 하는 목적에서였었다. 하나의 신을 섬긴다면 그 신을 대리하는 파라오야 말로 모든 사제와 귀족의 위에 서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황제를 하늘의 아들인 천자라 일컬었던 것 아니던가. 하늘 자체를 신으로 섬기던 중국에서 하늘의 아들이란 곧 신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일본의 텐노도 현인신의 지위에 있었다. 단 하나의 신성인 유일신과 그를 대신하는 절대권력의 존재란 권력자에게 있어 얼마나 유혹적인 선택일 것인가.

 

그래서 기독교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 황제에 의해 공인되고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로마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체계로써 정립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마의 황제는 곧 교회의 보호자이자 신의 대리인 그 자체였었다. 로마 황제가 보는 앞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그래서 대부분 교리들도 정리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토론은 성직자들이 하되 결론은 로마 황제가 내린다. 그 로마 황제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바로 교황이며 교황이 지배하던 가톨릭의 조직이란 로마의 행정조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이야 말로 로마제국의 진정한 후신일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이 곧 로마다. 단 하나의 신과 단 하나의 교리와 그 절대의 권위를 대신하는 단 한 사람의 황제, 그리고 그 황제마저 사라진 뒤에도 로마는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여 천 년 넘는 세월을 이어진다.

 

어째서 기독교는 그토록 맹목적인가. 오로지 기독교에 대한 믿음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인가. 원래 출발부터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로마에 의해 포섭되어 국교가 되는 순간 그리 바뀌게 되었던 것이었다. 황제에게 충성하든 신에게 복종해야 하며, 황제에게 복종하든 신의 가르침을 철저히 믿고 따라야만 한다. 아니면 배신이다. 아니면 이단이다. 그러니까 아예 성경도 읽지 말라. 요즘 개신교회 가운데도 신자들에게 성경을 혼자서 읽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믿고 복종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성경의 가르침을 빈 성직자의 말인 것이다. 그 말을 정의한 교회인 것이다. 황제고 교황이다. 그래서 지금 개신교는 당시 가톨릭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코로나로 모두가 경계하고 조심하는 와중에도 오로지 믿음만을 외치며 제멋대로 구는 현재의 개신교 교회들을 바로 이해하게 된다. 원래 그런 종교였던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현실의 이유와 필요가 어느새 그렇게 종교를 바꾸어 버렸다. 세월이 흘러도 원래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저 믿으라. 그저 믿으라. 그저 믿고 따르라. 코로나고 뭐고 상관없이 그저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자식을 감염시키고, 어린 손주들까지 감염시키고, 이웃이며 가까운 이들을 모조리 감염시키면서도 어째서 저들은 미안하거나 부끄러운 일반의 자연스런 감정과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럼에도 일부러 감염시키려는 듯 자기가 간 곳을 숨기고, 자기가 한 행동을 속이고, 그러면서 더욱 주변과 가까이 접촉하려 애쓰는 듯한 모습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결국 무지와 맹목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더 나아지고 좋아질 수 있다.

 

종교가 왜 위험한가. 아편도 사실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편은 원래 한의학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약재 가운데 하나였었다. 현대의학에서도 마약류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 매우 요긴하게 쓰이는 약물일 것이다. 정도를 넘어서면 모든 것이 위험해진다. 주변에 개신교신자가 없음을 다행으로 여기게 된다. 위험하다.

목욕탕에서 자빠졌다. 하필이면 문턱을 뒤로 하고 넘어지며 모서리에 머리가 찍힌 바람에 크게 찢어지고 피까지 적잖이 흘렸다. 동네 의원 갔더니 너무 심하게 찢어져서 여기서는 봉합이 안된다더라. 그러니 큰 병원 응급실 가라. 아, 씨발.

 

욕부터 튀어나오는 이유는 아무래도 다급한 마음에 전공의 진료거부에 대해 전혀 생각지 않고 바로 근처 대학병원부터 달려갔던 때문이다. 기껏 인터넷 검색해서 위치 확인하고 버스타고 달려가 접수를 하렸더니 간호사가 그런다.

 

"지금 봉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병원 응급실에 찢어진 상처 꿰맬 수 있는 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소리다. 그나마 그냥 넘어지면서 찢어진 정도라 다행이지 상태가 더 심각했다면 어땠을까? 머리가 어지럽거나, 구토가 나온다거나, 눈이 돌아갔다거나, 하긴 그랬으면 혼자 병원도 못 갔겠지. 

 

결론은 전공의 새끼들 개새끼들이란 것이다. 명분이나 그럴싸하면 또 몰라. 의대 정원 늘리고 공공의대 세우는 것이 그렇게 파업까지 해가며 반대해야만 하는 중대한 일이었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머리에 난 상처이고, 하룻동안 꿰매지도 못하고 지혈만 한 채 내버려두어야 하는 불안이다. 내일 오전에 외래는 어떻게 받아주겠지.

 

응급실에서 머리 찢어져 찾아온 사람에게 기본적인 처치밖에 해 줄 수 없다는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응급실 비용이 자기부담만도 만만치 않을 텐데도. 아주 개같은 하루였다. 씨발 의사 좆같은 새끼들.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쌍용자동차 파업 당시 언론은 그리 한 목소리로 비난했지만 정작 노동자들은 어떻게든 생산라인과 자재, 원료들을 지키려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장 해고되면 갈 곳이 없고, 그런 동료를 내버려 둘 수 없으니 파업은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일이 잘 풀려서 다시 함께 공장을 돌리며 일할 수 있기를 바랐던 때문이었다.

 

쌍용자동차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대부분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일하던 사업장의 시설을 파괴하는 경우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대화로 잘 해결되어 파업을 풀게 되면 다시 자기들이 일하게 될 직장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노동자들이 파업하면서 요구를 관철시키겠다고 설비를 인질로 잡고 파괴하겠다 협박했다면 당시 여론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하긴 의사니까 요구도 주장도 다 받아서 기사도 내주는 것이지 다른 직업이었으면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어떤가? 의사가 기계도 원료도 아닌 사람의 목숨을 볼모로 잡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중이다.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국민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니 이대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할 것이고 그 부담은 정부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응급실도 중환자실도 마비되어 사람이 죽어나가면 정부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될 테니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쌍용자동차 파업 당시도 아예 공장 설비에 인화물질 뿌리고 난 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다 불싸질러 버리겠다 위협했으면 과연 사측이나 정부에서 그리 강경하게만 나설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을 비난만 하던 언론들이 이제는 의사라고 그 요구와 주장을 성심껏 전하며 국민이 인질로 잡혀 있음을 친절하게 정부에 전하기까지 하고 있다.

 

개새끼들이라는 이유인 것이다. 하긴 부모가 그리 가르쳤을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업 가지면 너 마음대로 해도 된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 들어가고 의사가 되면 돈도 많이 벌고 조건 좋은 배우자도 얻을 수 있고 높은 사회적 지위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되고자 의대에 들어갔다. 환자가 무슨 대수인가. 국민의 목숨이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지금이 자신들에게 절호의 기회이지 않은가. 최대집이 특별한 게 아니란 것이다. 최대집이 유별나서 의협회장에 당선된 것이 아니라 의사란 새끼들이 죄다 최대집과 같은 부류라 끼리끼리 투표해서 선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단 것이다.

 

진짜 한 번 보고 싶다. 현대중공업이든 현대자동차든 아무곳이든 노동자들이 파업 하면서 한 번 설비며 회사 자산을 인질로 삼아서 정부와 사측을 협박하면 언론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무엇보다 의사들은 그런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병원의 부당한 관행과 행사들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간호사들이 노조 만들고 파업했을 때 의사들이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하고 있었는가. 개에게 미안하다. 개 잘못이 아닌데.

 

아무튼 하다하다 파업도 태업도 아닌 인질극으로 자신의 주장과 요구를 관철하려 하고 그를 긍정적으로 전달하는 모습들을 현실로 보게 된다. 노동자가 아니라 그럴 것이다. 정확히 노조가 아니다. 직능단체다. 그러니까 대우도 노동자와 다를 수밖에 없다. 월급 3천만원도 적다니 그럴 만도 하기는 하다. 빌어먹을 것이다.

아마 이상하다 느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 큰 병원만 몇 개인데 어째서 병상이 부족하다 말하는 것인가. 더구나 병상이 부족한데 어째서 대형병원에 병상을 내달라 요청하는 것인가. 당연하지 않은가. 코로나19와 같은 국가적인 위급상황에 정부나 지자체가 가장 먼저 동원하는 것은 정부와 지자체의 통제 아래 있는 공공병원들인 것이다. 보건소나, 공공의료원이나, 혹은 군경병원 같은 것들이다. 먼저 정부와 지자체의 통제 아래 있는 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부족하면 민간병원에 협조를 요청한다.

 

민간병원이란 자체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다. 병상 하나가 곧 수입이고 진료시간 1분이 곧 이익이 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민간병원더러 전염병 방역을 위해 필요하니 병상 비우고 의사 내달라 하면 바로 그러라고 하겠는가. 듣더라도 결국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구에서 신천지로 인해 코로나19 급속히 확산하던 상황에도 의사며 병상을 강제로 징발하기보다 자발적인 협조를 먼저 요청했던 것이었다. 의료진들더러 대구로 내려가라 강제한 것이 아니라 여유가 있는 의료진이 내려가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코로나19의 방역에 가장 앞장서서 가장 많은 부분을 책임졌던 것은 어디의 누구겠는가.

 

당연히 공공의료시설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공공의료인력들이다. 노조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자니 무려 78%를 공공의료기관에서 담당하고 나머지만 민간병원에서 나누어 감당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공치사는 누가 하고 있는가. 그동안 코로나19 사태에서 그 잘난 의협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하나라도 도움이 된 것이 있었는가. 공공의료인력들은 가만히 있는데 자기들이 다 한 양 공치사하며 오히려 국민의 목숨까지 볼모잡으려 하고 있다. 그러니까 공공병원과 공공의료인력을 더 확충하겠다는 시도를 막아서며 진료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공이들은 물론 아직 졸업도 못한 의대생들은 더욱 공치사를 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의대생들이 뭘 했는데? 어디서 뭘 그리 대단한 일들을 했길래 정부에 배신감마저 느끼는 것일까? 공공병원을 늘리려 해도 오겠다는 의사가 없고, 기껏 오겠다는 의사가 있어도 몇 배의 연봉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도 지방에는 안 내려가겠다는 놈들이 지금 파업하는 놈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국민은 그들의 사정을 일일이 다 이해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최대집 같은 놈들이.

 

그러니까 언론이 뉴스를 잘못 내보낸 것이었다. 진짜 코로나19 방역의 최일선에서 노력한 이들이 누구인가 구체적으로 보도했어야 했다. 코로나19와 관련한 대부분 진료가 공공병원에서 이루어졌으며 공공의료시설과 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민간 자원까지 빌려서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뭐다? 공공병원을 늘려야 한다. 공공병원에서 일할 의사를 늘려야 한다.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지방에는 안 가겠다는 의사놈들이 한가득이다. 그런 놈들이 지금 진료거부중이다. 언론도 공범이다. 기자나 의사나.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역겨울 뿐이다.

원래 여성주의란 자체가 부르주아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당장 먹고 사는 일로 고민할 필요도 없고, 주위에 항상 보이는 것이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와 권력을 누리던 남자들이었고, 그러니까 아버지와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들만한 사회적인 지위와 영향력을 가져보자. 그래서 여성주의에는 노동자도 소수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백인 여성은 흑인 남성보다 우월하다. 여성 사용자는 남성 노동자보다 우월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인 것이다.

 

바로 얼마전에도 보았을 것이다. 단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와 다른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계약직인 여성 방송인이 실직하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단지 자신들과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남성권력인 검찰지도부를 움직여서 같은 여성인 일선검찰을 징계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도를 하던 여성주의자들 자신은 혹은 변호사거나 혹은 정치인이거나 혹은 대학교수들이었다. 혼자 살더라도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것 같은 직업에, 더구나 남편까지 제법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들 입장에서 계약직 여성 하나, 검사장도 못되는 검사 하나 직장을 잃는다고 신경쓸 일도 아닌 것이다.

 

확실히 정의당이 여성주의 정당이 된 것을 알겠다. 그러고보면 한겨레와 경향도 정작 비정규직 노동자와 관련한 이슈였던 이른바 인국공 논란에서 그다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박원순 시장의 경우와 다르다. 그때는 매일같이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정의연의 경우도 뻔히 오보인 것을 알면서도 조선일보를 따라쓰느라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굳이 정의연을 언급한 이유는 정의연 논란이야 말로 여성주의의 아픈 고리라 할 수 있는 박근혜에 부역했던 과거를 가리기 위한 의도된 공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를 지지하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철저히 박근혜와 입장을 같이 했던 과거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당시 대립했던 정의연의 도덕성과 정당성에 크게 흠집을 낼 필요가 있었다. 실제 정의연 논란 당시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이명박 정권 당시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들마저 모조리 끄집어내어 위안부문제 해결을 막은 당사자로 정의연을 공격하던 논리가 크게 기성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등장한 것이 화해치유재단 출신의 김재련이고 그가 여성주의의 중심에 선 상황이다. 이해가 되는가?

 

이번 코로나19의 재확산조짐에 대해 정의당이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의 실시를 주장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바로 오한부터 느끼고 있었다. 아다시피 나는 지금 실직 상태다. 한 달 정도 충전하고 일자리를 구하겠다 마음먹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가 실시되어 보라. 과연 그런 상황에 어느 사업주가 새로 사람을 구하겠으며, 사람을 구하더라도 어떻게 면접을 보러 갈 수 있을 것인가. 가장 만만한 공사장 일용직이야 당연히 공사가 중단되며 사라질 테고, 서비스업도 사람들의 왕래가 끊기면 더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영업이 중단되며 폐업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PC방이나 헬스장 등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런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굳이 해고도 필요없는 이같은 비정규 시간제 일자리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쉽게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이유는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어차피 노조도 못만드는 그런 시간제 일자리들이야 자기들 알 바가 아닌 것이고, 또 하나는 설사 그들이 신경쓰인다 하더라도 현정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이 사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다 할 수 있는 진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나 고민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되는 자신들이니까. 대부분 좋은 대학 나왔을 테고, 생계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진보정당운동도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내가 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도 워낙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 오프에서 행사 한 번 참석하지 못했었다. 당비도 그리 많이 걷혔다면서? 그러니 그런 말을 해도 된다.

 

코로나로 국민이야 죽든말든 상관없이 일단 정부부터 공격하겠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가짜뉴스로 정부를 공격하는데 보수언론만 앞장섰던 것이 아니었다. 일본이 다시 쳐들어와도, 중국이 다시 대한민국을 식민지로 삼으려 해도, 대기업이 아예 정규직을 모두 해고하고 계약직으로 바꾸려 해도, 그러나 정부만 공격할 수 있으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겠다. 그런 필사적인 의지에 여성주의는 명분이 되어 준다. 그래도 자신들은 진보이기에 여성주의를 위해 이렇게 열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부터 여성주의가 진보였을까? 김활란과 박마리아가 과연 진보였었는가? YWCA가 진보적인 여성주의 단체였었는가? 여성주의는 미래통합당도 한다. 오히려 이수정 교수가 선택한 정당이 미래통합당이었을 정도다. 하긴 이미 미래통합당과 손잡고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포위하려 하는 곳이 정의당이기도 하다.

 

아무튼 듣는 순간 바로 욕부터 튀어나왔다. 다음주부터는 어찌되었거나 면접 보러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한 달 놀았으면 됐지 두 달 노는 건 무리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오래 놀면 사람이 망가진다. 하다못해 공사장 잡부라도 찾아보려 했더니만 그마저도 하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이 똥덩어리 새끼들은 진짜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노동자들이 정작 정의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 노동자 정당 정의당은 죽었다. 사실을 확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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