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권위의 차이는 강제성과 자발성에 있을 것이다. 복종하고 싶지 않아도 강제로 복종하게 되는 것이 권력,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복종하게 되는 것이 권위, 사실 권위가 권력보다 더 높다. 다만 권위를 가지고 지키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과 헌신과 절제와 희생이 필요하다. 하긴 그래서 권위인 것이다. 기꺼이 복종하는 것만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올 것이란 굳은 신뢰다. 권력은 그냥 주어진 권력을 휘둘러 복종케만 만들면 된다.

 

그래서 원래 소인일수록 권력을 탐하고 군자일수록 권위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부처가 제자들더러 이래라저래라 강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공자가 강제로 자기를 따르라 해서 제자들이 모여든 것이 아니라 공자의 인품과 학식에 대해 전해들은 이들이 그를 배우기 위해 찾아간 것이었다. 초창기 교회 역시 굳이 군사를 보내 이교의 사원을 부수고 성직자들을 내쫓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서 그 교리를 쫓아 개종도 하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개종을 강제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권력이란 미끼를 던지기 시작한다. 종교가 권력이 된다. 사실상 종교의 권위가 떨어지고 그 권위를 지킬만한 깜냥이 되지 않으니 권력이란 폭력에 기대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얻어지는 권력에 도취하게 된다. 종교가 타락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믿지 못해도 법원의 판결은 믿는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었다. 그래도 판사라면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른 올바른 판결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는가. 사소한 실수가 있어도 인간이기에 저지르는 사소한 오류일 뿐 그 자체로 판사들을 불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역시나 불과 십 수 년 전까지 언론이 떠들면 사실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기자라면 정의의 상징으로, 오로지 이 사회에 진실과 정의를 전하는 지성으로 진심으로 믿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슬퍼런 깡패들 앞에서도 당당히 야단칠 수 있었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깡패들조차 그런 기자들을 존중하며 양보했었다. 그러나 피곤한 것이다. 항상 바른 판결을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작은 실수조차 세상의 비난을 받아야 한다. 항상 올바른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사소한 오류로 인해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한다. 그에 비하면 권력과 손잡고 그의 손발이 되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탐나고 부러운 일인가.

 

물론 판사 자신은 오로지 법리에 따라서만 전광훈을 풀어주고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가 비상인 상활에서 최소 수 천 이상의 다중이 모이게 될 집회 역시 허가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판사들의 그런 판단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동안 판사들이 보여 온 모습들 때문인 것이다. 바로 직전 손혜원 전의원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이미 온라인을 통해 공개된 자료가 비밀자료가 되고, 증여세까지 모두 내고 양도한 것을 차명소유라 정의한다. 증여라는 법적 정의를 무력화시키는 판결인 것이다. 내가 사거 법적인 모든 절차를 거쳐 공증까지 받아 소유를 넘겨주는 행위가 바로 증여인 것인데, 그 모든 과정과 절차를 부정하고 최초의 소유만을 인정하여 차명소유로 정의한다. 이게 과연 납득이 되는 판결인가. 조국 전장관은 물론 청와대에 대해서도 그렇게 무차별로, 심지어 압수수색할 대상조차 특정하지 않은 부실한 영장신청을 받아서 발부한 행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가.

 

전광훈이 저리 난리치는 이유야 분명하다. 전광훈만이 아니다. 이번 광화문 집회로 인해 대부분 개신교 교회들이 욕먹는 이유일 것이다. 전광훈이 대표하고 있을 뿐 그동안 대부분 대형교회들의 태도와 행동들은 한결같았었다. 원래 다른 대형교회들이 각자 따로 하던 일을 전광훈이 대표하며 전면에 나서서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개신교를 국교로 만들겠다. 국가의 모든 정책에 개신교의 영향이 미치도록 만들겠다. 그 결과 교회가 권력과 결탁한다. 교회라는 말만 들어도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언론이 더해진다. 언론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코로나19로 인한 반발여론이 커지기 전 광화문집회를 그대로 받아서 정부를 까대던 언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 

 

바로 보수정당이 여전히 기득권으로서 대한민국 여론의 중심에 있는 이유인 것이다. 역대 보수정당의 주장들을 보면 한결같았다. 욕망을 긍정한다. 욕망을 인정한다. 사회적 정의와 규범을 무시한 채 오로지 개인의 무한한 욕망의 추구를 긍정하며 보장하려 한다. 법원이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도, 언론과 종교가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 하는 것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부추기며 지원한다. 일단 기득권의 범위 안에 들어오면 그들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집을 가지고 임대를 주어 임차인에 대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권력이 될 수 있게 그를 도우려 한다.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기득권이면 마땅히 보수정당을 돕는 것이 옳다. 민주정부는 항상 법원으로부터, 언론으로부터, 종교로부터 기득권을 빼앗으려고만 해 왔을 테니까.

 

그런 구조가 집약되어 드러난 것이 바로 이번 광화문 집회였던 것이었다. 법원이 전광훈을 풀어주고, 뻔히 예상되는 전광훈의 집회를 허가하고, 그를 통해 코로나의 급속한 확산을 사실상 도왔다. 코로나가 급속히 확산되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어야 경제는 더 어려워지고 정부의 지지율도 떨어진다. 자신들의 기득권도 강화하고 지킬 수 있게 된다. 홍문표가 멍청했던 것이다. 다만 멀리서 마음만 보내려는데 직접 몸을 움직여 찾아간 정치인이 있었다. 아니었으면 미래통합당 입장에서도 확실하게 꼬리자르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한국 보수의 정체와 그들이 결탁하는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종교와 사법부와 언론이 어떤 동기에 의해 하나가 되어 함께 행동할 수 있는 것인가. 자칭 진보언론마저 보수정권이 차라리 나았다며 한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홍세화며 진중권 같은 자칭 진보지식인들이 보수정당을 위해 기꺼이 행동에 나서는 이유인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어째서 그토록 민주당에 적대적인 것인가. 보수는 권력을 나눠주고 민주정부는 그 권력을 낱낱이 해체하고 흩어놓아 누구도 독점하지 못하게 만든다. 구조와 제도속에 숨겨 누구도 전유하지 못하게 만든다.

 

문재인 대통령이 분노한 지점이 아닐까. 일부 교회에 대해서만 분노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결탁한 사법부와 언론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일 게다. 이제와서 아닌 척 교회를 공격하는 언론들의 태도야 말로 저들의 본색인 것이다. 저런 놈들이 지금 현정부의 개혁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여론은 때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고. 마지막까지 현정부와 여당을 지지하며 반드시 정권재창출을 이루어내야 하는 이유다. 역겨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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