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과장과 계장이 동시에 일을 시키면 일순간 멍해진다. 물론 더 높은 사람이 시킨 일부터 하는 것이다. 아니면 더 급한 일이나 더 빨리 끝낼 수 있는 일부터 하거나. 하지만 알면서도 일순 당황하게 되는 것은 내 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정하기까지 잠시 행동은 멈추게 된다.


화재현장에 도착했다. 건물은 타고 있다. 사람들이 건물 안에 갇혀 있다. 커다란 가스탱크가 불타고 있는 건물 옆에 방치되어 있다. 건물 가까이에 불법주정차된 차들까지 많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해야 할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당장 우선순위부터 정해야 한다. 한정된 인력과 장비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 일단 건물에 접근해야 하고 구조과정에 혹시 모를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 당장 눈앞에 위험에 처한 사람도 구해야 한다. 


바로 그 시간이다.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다. 3시 53분에 신고를 접수했고 다른 곳에서 고드름제거 작업을 하다가 구조대원들이 합류한 것이 4시 9분이다. 그리고 구조를 요청하는 시민을 구하기 위해 매트리스를 설치하고 있었다. 진압대원들 역시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가스탱크 주변의 화재진압에 먼저 집중하고 있었다. 가스탱크 주위가 안전하고 어느 정도 1층의 화재가 진압되고 나서야 안전하게 생존자의 구조에 나설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을 한 번에 동시에 진행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을 테지만 아다시피 소방인력이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다.


어느 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소방관 역시 화재진압과 생존자구조에 있어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소방관 자신의 안전이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목숨을 걸고 불을 끄고 생존자를 구하는 것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실제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런 훌륭한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가질지언정 그러지 않은 것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더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을 막는 것에는 소방관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소방관의 안전이 확보되고, 더이상의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을 통제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진압과 구조도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는 자체가 매우 전문적인 업무다. 서로 사용하는 장비도 다르고 훈련받은 내용도 다르다. 그냥 소방관이니까 아무나 아무렇게나 그저 자기들이 바라는대로 모든 걸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 짜증나는 것이다. 유가족이야 그럴 수 있다. 그것은 유가족의 권리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큰 비극을 겪었기에 아무라도 붙잡고 원망하고 하소연할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라도 붙잡고 욕하고, 혹시라도 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못했다 소방관을 탓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언론이다. 그런 식의 중계만 하는 것이 원래 언론의 역할이었는가.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감정적일 수 있어도 언론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언론들이 어떤 태도로 임했었는가를. 


그렇게 소방인력 충원과 예산의 증액을 정부와 여당이 관철하려 노력했음에도 그에 부정적이던 야당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비판적 보도조차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오히려 그런 야당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오히려 앞장서서 주장을 더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이제와서 마치 모든 책임이 소방관들에게 있는 양 유가족의 입을 빌어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언론의 기사들만 보면 소방관들은 머리가 셋에 팔은 열 쯤 되는 슈퍼맨들인 것 같다. 그 인력, 그 장비, 그 예산으로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 한 번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초인들이었을 것이다. 아니니까 인력도 증원하고 예산도 증액하고 새로운 장비를 도입하고 개선하자 주장하는 것이다. 불구덩이에라도 던지지 않으면 안전하다는 말이 불구덩이에서도 안전하다는 말로 바뀌는 건 무슨 의도일까?


소방관들이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물론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혹은 착오나 오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살릴 수 있었던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그런 주어진 상황에서 소방관들은 최선을 다해서 불을 끄고 사람을 구했었다. 정작 불을 내고서도 뒤늦게 신고하고, 소방안전설비를 제대로 갖추거나 관리하지 않아 피해를 키운 건물주에 대한 비판은 어느 언론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비판은 불이 난 원인에 대해 돌려져야 하는데 소방관들에게 책임이 있는가 없는가만 유족들까지 따져묻고 있는 중이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가. 어째서 유가족들과 소방관이 서로 불신하며 적대해야만 하는 것인가. 누가 무슨 자격으로 그것을 부추기는가.


이러니 기레기소리를 듣는 것이다. 소방관청의 해명도 들어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한정된 인력과 장비, 예산 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바를 최선을 다해 해온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유가족 입장에서 당장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것을 돕는 것이 바로 기자들인 것이다. 더구나 그런 무책임한 중계식 보도에 다른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화재를 핑계로 문재인 정부와 그 지지자를 비난하는 글들이 부쩍 늘고 있다. 진보고 보수고 할 것 없이 이렇게 노골적이면 웃음만 나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고였고 있어서는 안되는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더 철두철미하게 사실을 밝히고 진실을 보도할 수 있는 언론이 필요하다. 혼란과 동요를 최소화하고 회복과 치유를 도울 수 있는 그런 기사들이 필요하다. 싸움을 붙이고 갈등을 키운다. 한국 언론의 처참한 현실이다.

정부를 손봐주고 싶다. 없는 이야기도 만든다. 있는 이야기는 부풀려 더 키운다.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중국방문까지도 철저히 독자의 눈과 귀를 가려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제 또 무슨 껀수가 없을까?


어딘가 불이 났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피해자와 유가족 가운데 소방당국의 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방당국의 책임은 곧 행정부의 책임, 행정부의 책임은 곧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책임. 아, 일단 이거 써먹고 보자. 유리창을 깨서라도 사람들을 구해야 했는데 소방관들이 그러지 않았다. 생존자들이 갇혀서 살기 위해 유리창을 깨려 필사적이었는데 밖에서 물만 뿌리고 있었다. 소방관들의 잘못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영화에도 제법 많이 나온다. 밀폐된 공간에서 불이 났을 때 섣부르게 창이나 문을 깨거나 열면 갑작스럽게 유입된 산소로 불길이 폭발적으로 역류한다. 이른바 백드리프트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폭발하다시피 순식간에 불길이 이는 것이라 그 과정에서 많은 사고가 일어나고는 한다. 불을 끄는 것도 과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최소한의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않고 유가족의 인터뷰를 그대로 기사로 내보낸다. 소방관을 욕먹이는 것은 정부를 욕먹이는 것이다.


소방인력도 부족하다. 시설이며 장비 역시 열악하기만 하다. 고층에서 사람을 구할 사다리차의 문제마저 소방관의 책임으로 돌리려 한다. 그동안 소방인력을 충원하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을 정면으로 막아서고 혹은 아예 외면하며 무시했던 것이 바로 누구였는가. 아예 한 푼도 늘리지 못하겠다며 막말까지 쏟아내던 야당에 대해 그나마 기계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소방관의 탓을 한다. 소방관은 머리가 세 개고 팔이 스무개고 목숨은 아홉개쯤 되는 것인가? 예산지원 없이 없는 장비로 불끄는 신기한 능력이라도 가진 것인가. 현실은 저스티스 리그가 아니다.


이런 데서도 확실히 언론의 속내가 드러난다. 저놈들은 하이에나다. 진실따위 상관없다. 무엇이 진실인가따위 전혀 관심조차 없다. 중요한 것은 현정부를 엿먹이는 것이다. 그를 위해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별 것 아닌 문외한들조차 아는 사실을 외면한 채 그럴 수 있으면 아무거라도 - 아니 아예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내보낼 수 있다. 의도가 있거나 아니면 도저히 구제가 안 될 정도로 멍청하거나. 나름대로 대학도 졸업한 인재들일 텐데도.


불행한 사고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의도를 위해 그것을 이용하려 드는 기레기들의 모습에 구역질이 날 정도다. 그러니 기레기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제는 보고 있기도 지치는 수준이다. 그냥 모두가 편하게 다 망해버렸으면. 토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친구집에 놀러간 경우다. 돌아와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그것도 친구에게 들리도록 티나게. 기껏 친구가 찾아갔는데 자기 볼 일 있다고 집에도 없었다. 집에 없어서 혼자 한 끼를 차려먹어야 했다. 겨우 인사한다면서 어깨를 툭툭 치더라. 홀대받았다. 기분이 어떻겠는가?


기자놈들이 열받게 하는 바람에 지금에서야 겨우 쓴다. 언론 한둘이 아니다. 찌라시 하나나 둘이 저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야당 대부분이 같은 소리를 읊어대고 있다. 홀대받았다. 무시했다. 그러므로 외교는 실패했다. 정작 중국 정부는 성공적이었다 하는데 한국에서 언론과 야당들이 한목소리로 홀대받은 실패한 외교였다며 비하한다. 그냥 문재인 정부만 비하한 게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맞았던 중국 정부를 비난하는 것이다.


원래 외교일정이란 일조일석에 즉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한 나라의 정상이 방문할 정도면 벌써 한 달 혹은 그 전부터 조율이 시작된다. 어떻게 만나고 어떤 행사를 가지고 어떤 일정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한국 정부가 그러고 싶다고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중국 정부가 그러겠다고 일방적으로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조율이 끝나지 않으면 방문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행사는 그 하나하나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기호가 될 수 있다. 어째서 이런 식으로 기획을 하고 동선을 짰는가. 당사자들이 어떤 의도로 그같은 일정에 동의를 했는가.


다 무시한 채 드러난 행동만을 보고 무시한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디테일을 가지고서 홀대한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공식 논평을 보라. 중국 정부의 통제를 받는 언론들의 보도를 보라. 무엇보다 방중의 결과를 봐야 한다. 문재인 정부를 폄하하기 위해 아예 중요한 외교파트너인 중국정부를 지우다시피 한다. 중국과 외교를 그만두었어야 했다. 중국에 전쟁을 선포해도 시원치 않았다. 저런 놈들이 정권을 잡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스러울 뿐.


다시 말하지만 한국 정부가 납득하고 동의했다면 어쨌거나 그것은 홀대가 될 수 없다. 일 때문에 늦으며 두 시간만 집 앞에서 기다리라. 그러겠다 했으면 그 또한 만남의 과정이다. 오히려 자기가 없는 사이 집안에서 직접 무엇이든 챙겨먹으라 했다면 크게 배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진핑이 없는데서 외국정상이 중국국민들과 격의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중국의 사정이 그것밖에 안된다. 중국정부의 입장이 지금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가 알았다 한 순간 사정에 맞는 최선의 예우가 되는 것이다. 그 안에서 맥락을 찾아야지 겉으로만 보고 홀대했다 실패했다 수치다. 그러니까 밖에 나가서 그딴 식으로 쳐맞고 다니는 것이다. 멱살잡이나 할 줄 알았지 그런 맥락을 읽을 줄이나 알까.


중국이 대인배다. 그보다는 문재인이 워낙 잘하고 돌아왔다. 아니었으면 한국 언론과 야당들이 쏟아내는 말들만으로 중국정부가 당장 보복에 나서도 할 말 없을 정도다. 문재인 정부에만 편파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 정부에도 무례한 것이다. 공식채널이었다면 중국정부에 대한 심각한 외교적 결례라 할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외교를 잘 풀고 나니 별 찌그레기들이 배설을 해대는 꼬락서니랄까.


한국 언론의 처참한 현주소다. 한국 정치의 한심한 현실이다. 저런 것들이 심지어 유력대선주자로 손꼽힌 적이 있었다. 하긴 그렇게 바람을 넣은 것도 언론인 자신들이다. 한국에서 언론이란 것이 의미가 있는가. 이제는 나가 죽어도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 같다. 쓰레기에 미안하다. 

물론 이성적인 것 좋다. 항상 냉정하게 객관적인 사실만을 합리적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그래서 남는 게 무언데?


당연히 어떤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현실에서 그것을 실제로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정치인들이다. 이를테면 언론인들이다. 검사나 판사 경찰들이다. 지식인들이다. 그만큼 사회와 대중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감정에 휩쓸리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에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개인은 다르다. 어차피 개인은 경찰이 아니다. 특정한 대상을 수사하거나 기소하거나 재판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와 관련해서 법을 만들거나 행정조치를 하는 것 역시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겠는가? 바로 욕하는 것이다. 예의도 격식도 품위도 내던진 채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배설하는 것이다.


"저 놈 개새끼다!"


그것이 여론이 된다. 그것이 평판이 된다. 그마저도 금지하려던 시절이 있었다. 막걸리 먹다가 대통령 험담 좀 했다고 잡아다 고문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백성이 억울해서 나랏님 욕 좀 안 들리는데서 한다는데 뭘 어쩌라는 것인가? 차라리 조선시대에는 그같은 백성들의 원성을 귀기울여 듣는 것이 임금이 가져야 할 자세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었다. 배운 것도 없고 그래서 아는 것도 구애되는 것도 없는 백성들의 솔직한 한 마디 한 마디를 정성으로 듣고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실제 그런 임금은 역사상 아주 드물다.


몇 년 전 종영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악역으로 등장한 정기준의 말 가운데 크게 동의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배우게 됨으로써 오히려 백성은 어리석어질 것이다. 솔직한 감정이 가리키는 바가 있었다. 당장의 현실에서 직접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배우지 않아도 안다.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낀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런데 그것을 굳이 익숙지도 않은 다른 누군가의 지식과 논리로 풀어내려 한다. 엄격하고 엄숙하게 격식을 갖추어 사고하고 행동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경 무지렁이 백성들과는 상관없는 누군가가 만든 것일 터다.


개새끼는 그냥 개새끼다. 쓰레기는 그냥 쓰레기다. 그것으로 족하다.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검사고 판삭고 그같은 솔직한 대중의 직관적인 판단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기준이 아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대중 자신이 가진 솔직한 표현에 의한 것이다. 물론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들을 필요도 인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자신들의 이익이 대중에 있다면 귀기울일 필요는 있다. 얼마나 대중을 우습게 여기는가. 대중이 욕해도 그 형식과 절차를 트집잡는다. 그러므로 대중의 비판은 자신들에게 아무 가치도 없다.


최근 중국에서 기자가 폭행당한 것을 두고 언론과 대중이 부딪히는 지점일 것이다. 대중들에게 기자란 쓰레기다. 그래서 기레기다. 그러니까 나가서 맞았어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에서 하던 것들이 있느니 결국 그것이 나가서 맞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잘 맞았다. 맞아도 싸다. 그나마 온건한 것이 그래서 맞아서 뭐 어쨌는데?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기자들에 대한 대중의 솔직한 속내다.


신문을 보지 않은지가 꽤 되었다. 포털 기사도 어지간하면 잘 보지 않는다. 같지도 않은 기사들이 너무 많다. 도저히 믿어야 하는가 판단이 서지 않는 기사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무작정 믿기에는 기자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런 기자들이 나가서 맞았다. 맞았거나 말거나. 결국 한국에서 하던대로 하다가 맞지 않았을까.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관심조차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원래 그런 놈들이다. 그것이 여론이 되는 것이다. 중국 사설경호원들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더 잘못한 것은 기자들이다. 그 무논리와 불합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평생 그러고 살 수밖에 없다.


하여튼 너무 귀찮고 복잡한 것이다. 이러이러해서 나쁘다. 이런 점들이 이런 이유로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이런 식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하지만 더 쉽고 간단한 한 마디가 있다.


"쓰레기네!"


딱 이 한 마디로 요약되는 것이다. 기자들이 중국에서 경호원들에 폭행당한 사실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한가롭지가 않은 것이다. 그냥 늬들이 쓰레기다. 수많은 말들을 압축해서 이 한 마디로 표현한다. 그러니까 늬들이 맞든 말든 전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시끄럽게만 말라. 그게 바로 이 사회에서 기레기들이 가지는 의미인 것이다.


참 어려운 말들 많이 쓴다. 복잡하게도 잘도 꾸며 말한다. 진실은 그게 아닌데도. 너무 많이 배운 탓이다. 쓸데없이 아는 것만 많아 생각만 어렵게 한다. 진실은 쉽다. 그래서 때로 우습게 여겨진다. 하찮다.



외교의 목적은 오로지 국가적 이익의 추구에 있다. 국가적은 이익을 늘리고 혹은 지키기 위해 정부는 국경밖 외국의 정부와 협상이라는 걸 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설득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고 혹은 손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외교의 결과에 대해서도 오로지 그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자국의 이익을 늘렸고 손해를 줄였는가?


사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다. 그토록 강조하던 3불원칙에 대한 압박 또한 없었다. 중국 역시 아쉬운 것이 많고 바라는 것이 많다. 불만인 것도 많고 그래서 요구하고 싶은 것도 많다. 하지만 그것이 외교라는 것이다. 어차피 들어줄 수 없는 것으로 압박해봐야 사이만 불편해질 뿐이다.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자세로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는 이상 한국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나라와의 관계개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국의 필요이기도 하지만 한국정부가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결과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던 사드보복의 완전한 철회까지 이끌어냈다. 일단 가장 중요한 중국과 한국 정부 사이에 경제채널이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중국정부가 한국정부에 많은 것을 배려하고 양보했다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결과다. 


한 마디로 박근혜 정부의 사드 뒤통수 이후 최악으로 치닫던 한중관계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좋아지는 것은 앞으로 남은 과제지만 최소한 더 나빠지기 전으로는 되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과연 어느 언론이 그런 방중외교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결과 어떤 성과를 내었는가 제대로 사실이나마 보도한 언론이 몇이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오로지 대통령이 밥을 혼자서 몇 끼를 먹었고, 그나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기자가 그것도 중국의 사설경호원에게 맞은 기사 뿐이다. 비로소 모든 언론이 하나가 되어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기자가 맞았으니 외교도 그만두고 돌아왔어야 했다. 대통령 경호원들이 대통령보다 기자들을 경호했어야 했다. 기자가 국가다. 기자의 안위가 곧 국익이고 외교여야 한다. 


정작 중요한 외교성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쉴 새 없이 자기들 얻어맞은 것만 기사화하고 있다. 얻어맞은 것에 대해 중국정부를 탓하고, 심지어 한국 정부를 탓하고, 대통령과 정부에게 무능의 낙인을 찍으려 발버둥이다. 괜히 사람들이 그래도 같은 국민들인데 외국인 사설경호원에게 폭행당해 중상을 입은 것을 두고도 속시원하다고까지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기껏 기자랍식고 따라가서는 제대로 된 기사 한 줄 내보내지 않았었다. 대통령과 정부가 중국에서 보이는 말과 행동들에 숨은 의미를 제대로 분석해 보도하지 않았었다. 자기들 맞은 것만 큰 일이다. 자기들 맞은 것만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큰 일이다. 오냐오냐 했더니 아주 거만이 하늘을 찌른다. 기자를 위해 국정도 외교도 해야 한다. 대통령의 경호를 포기하더라도 기자의 경호까지 경호처에서 알아서 신경써주여야 한다. 바로 국민의 세금이다.


새삼 노무현 전대통령이 어째서 청와대 기자실을 폐쇄하라 지시했는가 납득하게 된다. 진보도 보수도 없다. 기자란 하나의 계급이다. 커넥션이다. 그리고 권력이다. 정부마저 언론의 자유를 명분으로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려 한다. 그렇다고 국민을 위해 진실을 보도하려는 의지나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면 이명박과 박근혜가 저리 패악을 저지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이 언론이기는 한가.


중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다지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인 것이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중국은 한국에게 중요한 파트너다. 한때 최악까지 치달았던 관계를 다시 정상화시키려는 중요한 방문인 것이다. 실패하라고 비는 것인지. 아니면 실패해야 한다고 단정지은 것인지. 심지어 아직 방문하기도 전인에 한국정부를 압박하겠다고 중국정부를 자극할 수 있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직 공식일정을 시작도 안했는데 홀대론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중국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가려 했었다. 그리고 이제 방중외교의 성과에 기자가 폭행당한 사실만 남긴다. 국가도 국민도 없고 기자만 있다. 그러니까 기자인 자신들만 괜찮으면 박근혜도 괜찮은 것이다. 그런데 왜 내가 단지 같은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며 그들과 함께 분노해야 하는 것일까? 저들에게도 기자인 자신들밖에 없는데.


아주 기사로 발악중이다. 뭐라 떠들기는 하는데 귀찮아 읽지도 않는다. 대충 하는 말은 알겠다. 동네에서 사고치던 양아치가 밖에서 두들겨 맞고 왔다. 속시원할 뿐 굳이 왜 맞았는가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와중에도 동네에서 패악질 부리는데 이유따위 알아서 무엇하는가. 아직도 신문과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문제다. 기자도 언론도 아닌 것들이 기자입네 언론입네 떠든다. 한심한 것이다.

경호원의 임무는 말 그대로 경호대상을 경호하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혹은 시설이든 외부의 의도하지 않은 변화로부터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경호원은 존재한다. 정확히 고용된다. 고용주가 허용한 이외에는 경호선 안으로 진입시키지 않는다. 안그러면 잘린다. 너무 당연하다.


대충 어떻게 된 사정인가를 들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과 기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편집한 기사들을 여럿 읽었다. 그냥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아마 경호나 경비 업무에 종사하는 이들은 다들 알 것이다. 자기가 뭐 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경호나 경비에 대해 얼마나 하찮게 우습게 여기는가를. 임무가 그것이기에 제지하고 통과시키지 않는 것인데 그런 경호원 경비원에 대해 오만 진상을 다 떨어댄다.


"내가 누구인 줄 알아?"


그러니까 외국 나가서도 그러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중국 사설경호원들에게도 우리나라에서 하던대로 하면 된다 여겼던 모양이다. 자기들이 청와대 출입기자이니 청와대 요인들과 동급이라고. 오죽하면 청와대 경호원들이 자기들 지켜주지 않았다고 기사로 지랄할까? 청와대 경호원들이 기자들 경호해주는 사람들인가? 그럴 자격이나 있는가? 중국 경호원들도 대응이 지나쳤다는 점에서 잘한 것은 없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안에서 새던 바가지 밖에서도 샌 정황이 아주 강하다. 경호원이 안된다 하면 정식 계통을 거쳐서 항의해야지 경호원에게 싸움 걸어봐야 뭐 어쩌겠는가?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다. 외부인의 출입은 더욱 엄격하게 통제할 수밖에 없다.


기자라는 게 벼슬이 아니다. 특권도 아니다.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경호원들이 봐줘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방법은 거칠었다. 사실 경호수칙에도 물리적 충돌은 최소화할 것을 규정했다. 명백한 경호원들의 잘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기자들의 행동이 정당했는가. 무작정 경호원들의 탓만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막으려는 사람이 생긴다. 거칠게 들어가려 하면 자연스럽게 더 거칠게 막아서게 된다. 어째서 하필 기자였을까? 달른 사람은 큰 문제 없는데 기자들만 맞은 것일까? 참석한 다른 한국기업가나 교민들은 별 탈 없이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있었다.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기자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래서다. 원래 기자란 그런 무리들임을 아는 것이다. 아무도 청와대 출입기자를 국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청와대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 모욕당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나 자신부터 전혀 모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살인강간범도 한국인이니 외국에서 대우받고 다녀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쓰레기는 쓰레기. 기레기도 기레기. 자기들끼리만 난리다. 심지어 중국과의 외교마저 중단하라? 누구를 위한 외교인데? 그마저도 기자가 기자했다. 기레기가 기레기했다. 너무 어울려서 그냥 웃음만 난다.


이스라엘에서 미국인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자국민의 안위를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여기는 미국이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그것이 외교다. 그래서 외교란 때로 잔인할 정도로 비정하고 치사할 정도로 냉혹한 것이다. 하물며 기자들이 고작 사설경호원들에게 맞았다고 외교를 중단하라느니 외교부가 책임지라느니 심지어 청와대의 사과를 요구한다. 중국정부의 공식사과를 요구한다. 하긴 그래서 굴욕외교였던가? 홀대였던가? 청와대 출입기자씩이나 되어 외교를 뭐라 생각하는 것일까?


아침부터 진보보수 할 것 없이 기자라는 것들이 하나가 되어 짹짹거리고 있다. 진짜 기자란 직업이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다. 기자 하나를 위해서 중국과 같은 중요한 나라와의 외교마저 결정하라 한다. 원래 그런 놈들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저 감탄할 뿐이다. 괜히 중국 경호원들보다 기자들이 더 욕먹는 것이 아니다. 후속기사가 어지간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여론이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 가기 전부터 그랬었다. 중국에 가고 난 뒤에도 나오는 기사들이라는 것이 뻔하다. 그런 기사나 쓰라고 청와대 기자단을 운영하는 이유를 이제는 모르겠다. 자기들 맞은 일만은 열심히 기사로 쓴다. 그래서 기레기다. 훌륭하다.

원래 우리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다 같은 인간이다. 국적을 보면 한국인이고, 민족으로 보면 한민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우리라 여기기에는 거리껴지는 부분이 너무 많다. 당장 친일파가 왜 있었겠는가? 같은 민족인데 한국전쟁에서는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었던 것일까? 차라리 북한보다는 미국이 더 가깝다. 차라리 공산주의자보다 일본인이 더 가깝다.


어째서 같은 국민인 기자가 취재 도중 중국경호원에게 폭행당했는데도 오히려 시원하다는 반응이 더 많은가? 당장 폭행을 당하고 쏟아진 한국 언론의 기사들만 보더라도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대통령을 경호하라는 경호원이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기에 굳이 세금을 들여 가려뽑은 인재들로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가 무슨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과 책임을 맡고 있는가. 국민의 세금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어떤 당위를 가지고 있는가. 해외방문이라 경호인력도 제한되어 있는데 그 인력으로 대통령이 아닌 자신들을 경호하라 한다. 기자가 곧 국가고 국민이다.


하긴 어느 기자가 그리 고백하더라. 기자가 되어서 대단한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어느새 자기도 대단한 사람이 된 양 착각하게 된다. 자기가 쓰는 기사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높으신 분들을 보면서 자기가 그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양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도 그들처럼 대우해 달라. 그러니까 그렇게만 대우한다면 그에 맞게 자신도 기사를 써주겠다. 문재인 정부와 이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기사를 한 번 보라. 국민이 적폐라 말하는 그들 정부에 대해 심지어 진보언론들이 썼던 기사들을 한 번 살펴보라.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어째서 이전 정부에는 순종적이던 기자들이 이번 정부에서는 목숨을 건 투사가 되었는가? 당연히 목숨 걸 일 없으니까. 문재인은 자신들을 어떻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니까.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특권의식만 남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바뀌는가?


이미 모두가 아는 것이다.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기자가 중국에서 중국인 경호원에게 폭행당했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기자놈들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겠구나 싶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늘 그랬었으니까. 심지어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도중에도 사고를 치던 기자놈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경호원들에겍 두들겨 맞고는 무려 대통령을 지켜야 할 경호원들을 찾고,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았다며 청와대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 주제들이니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안 샜을까?


같은 국민이고 민족인데 외국에서 외국인에게 구타당했다는데 속시원해 할 일인가? 그러면 조두순이 일본에서 맞고 왔다고 원통해 할까? 유영철이 북한에서 살인마라고 욕들었다고 분노하고 편들어줄까? 미국에서도 박근혜는 박근혜다. 차마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중국도 그다지 가깝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자가 그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적과 적은 동지다. 원수의 원수는 친구다. 원래 나쁜 놈인데 어디 가서 맞고 돌아다니면 때려준 놈이 오히려 고마운 것이다. 그 경호원들이 중국정부에 속한 경호원들이었다면 상황은 또 달랐을 테지만 사설경호원이라서 크게 상관할 바도 아니다. 나가서 사고치는 놈들 안에서 못한 응징을 중국에서 대신 받는구나.


모르겠다. 아무 이유없이 두들겨 맞았는지. 그냥 생긴 게 재수없어서 모여서 뭇매를 놓은 것인지. 하지만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전혀 아무런 동정도 생기지 않는다. 괜히 공감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지 않은가. 기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상처주는 기레기놈들이 조금 두들겨 맞았다고 새삼 불쌍하고 안타까운 감정 따위 들지 않는다.


누구 말마따나 자업자득이다. 그러니까 평소 잘했어야 했다. 기자가 기자다웠으면 되었다. 기자가 전혀 기자답지 않다. 기자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되는 행동들을 너무 일상적으로 저지른다. 기자회견장에서 제대로 된 질문 하나 할 줄 모르는 기자들이 기자증이 벼슬인 양 국내에서만 어깨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림며 다닌다. 두들겨 맞고는 아예 더 노골화되었다. 꼴같잖은 것들이다. 과연 누구의, 무엇 때문일가? 그냥 웃는다.

가톨릭 신부가 불교의 행사에 참석한다. 개신교 목사가 불교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불교 승려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참 보기 좋다. 배타적이어야 할 정교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다. 하지만 묻고 싶다. 그래서 과연 상대의 종교가 진정 옳다 여겨 인정해주는 것인가.


종교는 하나다. 오로지 진실하고 위대한 진리는 단 하나다. 나머지는 오류이고 거짓이다. 모든 종교의 전제다. 신앙이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그런 어중간한 것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옳아야 한다.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감히 어쩔 수 없는 절대의 무엇이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종교도 옳을 수 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


그냥 불교의 교리에도 찾아보면 신의 말씀에 가까운 것이 한둘은 있더라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것이 틀리고 잘못되었지만 그래도 찾아보니 아주 틀린 말들은 아니더라. 그 말들만 잘 지켜도 굳이 신에게서 크게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안의 수준이지 대등한 무엇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그런 서로의 종교를 새삼 인정할 수 있고 존경도 할 수 있게 만드는가. 간단하다.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나는 옳다. 왜냐면 것이 진리이고 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운좋게 진리를 접할 수 있었다. 진실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운이 좋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죽일까? 틀린 선택을 했다고 밀어낼까? 결정적으로 사회와 사람에 해악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좋다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다양성의 전제다. 다원주의의 중심이다. 서로 옳은 여럿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옳아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옳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틀린 가운데서도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인정할만한 부분이 있다. 존중해 줄 만한 부분이 있다. 전부가 아닌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결정적으로 자신에, 그리고 주위에, 세상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니까. 틀렸지만 옳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대로 지켜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틀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다. 내가 페미니스트들을 싫어하는 이유다. 진보주의자들을 아주 끔찍이도 싫어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게 바로 여기서 나오는 말이다. 오히려 보수는 가치중심이 아니다. 현실중심이다. 현실의 이해가 중심이 되기에 타협도 쉽다. 하지만 진보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가치를 앞세우기 쉽다. 특히 제도권에 들어오지 못한 경우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날을 세운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다. 명확히 논리와 이성의 칼로 경계를 지어 구분하고자 한다. 너는 틀렸으니 비켜 있어. 이것이 옳으니 일방적으로 따라야 한다. 자신들과 다른 페미니즘이, 진보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정확히 자신과 다른 이념과 주장을 배척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전체주의이고 권위주의다. 보수가 솔선해서 진보와 공존하는 예도 세계정치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어떻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하나의 공동체로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가. 인간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굳이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옳다고 굳게 믿고 고집을 굽히지 않아도 된다. 한 가지만 인정하면 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이 설사 문제있고 그래서 틀렸다 할지라도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할 인간의 불완전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만 하나라도 옳은 주장이 있고 다만 하나라도 인정할만한 부분이 있다면, 그래서 그로 인해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도 상관없다.


그래서 관용일지 모르겠다. 옳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관용이 아니다. 좋고 크고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만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관용이라 할 수 없다. 더럽고 추하고 조잡하고 형편없는 것들마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관용이라 부른다.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 관용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옳기에 인정해주고 존중해준다. 오만이다.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면 가차없이 배척하고 그것을 정의라 여긴다. 세상에 모든 불관용은 바로 그런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된다.


확실히 학교교육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아흔아홉가지를 잘해도 한 가지만 못하면 못하는 것이다. 아흔아홉가지가 옳아도 한 가지만 틀리면 틀린 것이다. 시험에서도 맞은 개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틀린 개수를 따진다. 얼마나 잘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못했는가. 얼마나 다양한 개성과 강점들을 가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단점과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가. 학교만이 아니다 부모들도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니까 얼마나 틀렸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부터 먼저 판별한다. 그러므로 이건 되고, 이건 안되고. 대개는 안되고.


인터넷에서도 흔히 획일화된 전체주의를 경험하게 된다. 너무 선하고 너무 정의롭다. 그래서 아주 작은 실수나 잘못조차 용납되지 못할 때가 많다.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고 담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다.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틀렸다. 위험하다 여기는 이유다.

당연히 의료수가 지금보다 더 올라야 한다. 의료서비스는 공짜가 아니다. 진찰과 치료 모두 상당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노력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자면 당장 건강보험료부터 올려야 한다. 문재인케어가 의도한대로 건강보험의 보장률을 높이려면 더욱 건강보험료를 올려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내가 더 많은 돈을 낸다고 정부가 그만큼 나에게 돌려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먼저 건강보험료부터 올리겠다 한다면 바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내년 지방선거에 이어 3년 뒤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은 정치인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정권에 부담을 줄이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을까?


그래서 문재인케어인 것이다. 지금 발표된 내용대로라면 문재인케어 하나만으로 상당부분 민간보험의 역할까지 대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보장이 강해진다. 하지만 그대로라면 건강보험 재정이 버틸 수 없다. 의사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수가를 조정한다면 더 재정에 압박이 가해진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미 더 나아진 의료서비스를 경험하고 있다.


물론 그래서 더 언론이 중요하다. 언론이 오로지 사실로써 국민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언론만 정상으로 돌아간다면 문재인 정부로서도 한 번 승부를 걸어볼만하다. 건강보험을 보다 강화하고, 한 편으로 의료수가를 현실화하면서, 그를 위해 건강보험료를 지금보다 올린다. 나 역시 직장가입자로 적잖은 보험료를 내고는 있지만 여타 민간보험까지 감안했을 때 지금 보험료는 너무 싼 편이다.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 더 큰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공감대만 만들어지면 건강보험은 큰 도약을 할 수 있다.


더이상 의사들의 선의에만 맡길 수는 없다. 의사라고 하는 사명감에만 기댈 수도 없다. 그들도 인간이다. 무엇하러 그 많은 돈을 들여 그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의사까지 되었겠는가. 사회적 존경과 더불어 금전적 이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자본에 재능도 성의도 노력도 따라온다. 진심도 따라온다. 나는 기꺼이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면 의사들의 반발까지도 계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막연히 추측해 보는 이유다.


의사가 있기에 의료도 있는 것이다. 의사가 없으면 아무리 보험이 좋아봐야 정작 환자들이 필요로 하는 진찰도 치료도 못받게 된다. 당장 아프지 않아도 미래를 위한 투자다. 원래 그런 것이 보험이지 않은가. 과연 문재인 케어가 얼마나 국민 입장에서 크게 실생활에서 다가올 수 있을 것인가. 역시나 언론이 문제인데... 정상화된 MBC를 믿어본다. 사실이면 족하다.

요즘은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물렵 국사교과서에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이점으로 중국과의 교통을 꼽았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해상으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혹은 한강 하구의 소금생산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이야 말로 전국 최고의 곡창이었다는 사실을.


아닐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이 바로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의 동서를 크게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강이 만나 하나가 된 강이었다. 당장 지금도 완만한 산자락 가운데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 일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큰 도시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강남은 아예 산도 거의 없이 허허벌판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겠는가.


호남평야의 개간이 완료된 것이 조선 전기부터다. 조선전기까지도 무성한 숲과 늪지를 개간하고 위협이 되는 맹수를 사냥하는 일에 군사가 동원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곡창인 황해평야의 개간 역시 조선 중기에 완료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한반도의 곡창은 어디였을까? 괜히 조선에서 경기도를 관료들에게 지급할 과전의 대상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다. 호남평야의 개간이 끝나기 전까지 한강유역이야 말로 가장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도 그래서 한강유역을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었고. 전근대사회에서 인구는 곧 국력이고, 그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것은 풍부한 식량생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서울에서 농사를? 그런데 그게 불과 몇 십 년 전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한강 근처에 제법 늪지도 있었고 농사짓는 곳도 있었다. 곳곳에 비닐하우스며 논도 제법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도시가 되어 있는 백마, 일산, 광명, 안양 등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은 그 무렵 가보지 못해 모르겠다. 하여튼 부곡역만 해도 흔한 가게 하나 없이 덩그러니 역만 있던 곳이었으니. 


말하자면 지금 한반도의 식량생산은 호남평야에 비견할만한 중요한 곡창지대인 경기도를 싹 갈아엎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거다. 특히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너무 개발이 되어 농경지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생산된 식량을로 북쪽까지 먹여살리고 했었던 것인데. 조선시대에도 황해도 북쪽은 농사가 힘들어 항상 식량난을 겪곤 하던 지역이었다. 그나마 황해도와 평양 주변에서 제법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뿐.


그냥 서울의 옛날 사진을 보다가 떠올라 끄적여 봤다. 백제며 고려며 조선이 괜히 경기도에 도읍을 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고려말 남쪽지방이 온통 왜구의 약탈로 조세조차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개경의 조정이 버틸 수 있었던 근거였다. 최소한 바로 가까운 경기도 일대는 그래도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테니. 농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산업혁명의 못된 유산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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