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병우와 관련해서도 몇 번 이야기한 바 있었다. 과연 우병우의 부모나 형제, 아내, 자식들은 그런 우병우를 부끄러워할까? 자랑스러워할까? 


진짜 아주 막장이 아니고서는 기껏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서 혼자서만 그것을 누리려 하지 않는다. 가족에게도 돌아간다. 돈이든, 신분이든, 권력이든. 오히려 먼저 가족들이 그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출세해라.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라. 네 부모, 네 형제, 네 가족들을 책임지라. 그런데 언제부터 검사 월급이 일가족을 모두 먹여살릴 정도가 되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검사가 검찰의 수사를 앞장서서 방해하고 있었다. 증거를 조작하고 인멸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다. 권력이 시켰으니까. 출세하려면 그 권력에 잘보여야만 했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껏 누려온 것이 있었을 터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자신이 저지른 죄가 드러나려 하자 관련자를 회유하려 시도하더니 수사를 피해 자살까지 하고 있었다. 동정의 여지가 있을까? 그러니까 같은 검찰이니까 그 죽음마저 동정해야 한다는 검사놈들이 있으니 검찰이 그모양인 것이다. 언제부터 검사가 피의자에 대해 그렇게 관대했던 것일까?


이번 자살과 관련한 검찰 내부의 반응이야 말로 오랫동안 썩고 비틀어진 검찰 자신의 추악한 특권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혐의가 있으니 수사한다. 이미 한 번 수사를 방해해서 혼선을 주었고 여전히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기에 구속하여 수사해야 한다. 어째서 검찰은 그러면 안되는가? 그 과정에서 억울한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어째서 검찰의 죽음에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검찰총장에게까지 너희가 죽였다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검찰이 검찰을 수사하는 것이 하극상을 저지를 만큼 큰 죄였다. 이쯤되면 검찰을 아예 해체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쪽이 더 깔끔할 듯하다. 검찰의 죄를 물어서도 감시 수사해서도 안된다.


그 유가족의 울부짖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디 감히 검사를. 어디 감히 우리 영감님을. 돈줄인데. 사회적 신분이고 지위인데. 권력인데. 그래서 앞으로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부귀영화가 한 순간에 날아갔는데. 그 상실감이 오죽할까?


원래 자살이란 용기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자살에 죽을 용기란 말은 없다. 살 용기가 없으니 차라리 죽음으로 도피하려는 것이다. 그동안 검사로서 수많은 피의자 용의자들을 심문하고 조사했을 것이면서 검찰이 자신을 수사하려 하니 그것 하나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주제니까 권력이 시킨다고 고분고분 검사로서의 양심을 팔아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동정의 여지도 없고, 그를 동정하는 검찰 동료나, 유가족이나, 혹은 보수적인 정치인이나 국민들 역시 조금도 이해할만한 부분이 없다 할 것이다. 그렇게 진실은 묻혔고 최소한의 결백을 주장할 기회마저 스스로 날려 버렸다. 수사도 시작되기 전에 수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지레 겁을 먹고 죽음으로 도망쳐 버렸다. 무슨 평가할 가치가 있겠는가.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가족 또한 공범이다. 그 동료들 또한 공범이다. 원래 검사란 그런 자리였을 것이다. 사회가, 가족이, 동료들이 기대하는 검사란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냥 남들이 검사에게 기대하는 만큼만 행동했을 뿐인데 죄인이 되었다. 누가 그를 죽였을까? 무려 검사가 혐의가 명백한 죄인의 수사를 잘못이라 말한다. 증거를 인멸할 수 없도록 빠르게 수사를 진행하며 압박한 것이 오히려 죄라 말한다. 검사가 생각하는 죄와 보편의 상식이 생각하는 죄가 이렇게 다르다. 그리고 검사는 사회의 정의와 죄를 책임진다.


죽었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죄를 저지른 사실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죄는 죄다. 참 많이 참는다. 원래는 뒈졌다 말해야 하는데. 그 유가족과 검찰 동료들 때문에라도 그는 뒈진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주제들이 이 사회의 정의를 묻고 죄를 단죄하고 있었다. 진짜 정의를 지키며 진실을 쫓는 검사였다면 너무나 무책임한 선택이었다. 그런 주제라는 것이다.


한심하다. 뒈질 놈이 뒈졌다. 가치도 없는 놈 하나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별별 의미를 부여한다. 같잖은 것들이다. 침을 뱉고 본다.

예상 못한 사람이 있을까? 처음 바른정당이 분당해 나왔을 때도 흔히 하던 말이었다. 그동안 당에 대한 지지에 힘입어 손쉽게 정치하던 사람들이다. 북한과 지역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거물정치인들의 등뒤에 숨어서 기생하며 정치해 오던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자기 손으로 직접 먹을 것을 구하고 머물 곳을 찾는 풍찬노숙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확고한 이념이나 정치적 신념이 있어서 그런 어려움을 기꺼이 견딜만한 동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의 행보에서 보았듯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전혀 없는 정당이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바른정당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처음 바른정당이 만들어진 것부터 정치적 명분과는 상관없는 이해타산의 결과였다. 대통령 박근혜가 국정농단을 저질렀다면 여당인 당시 새누리당 역시 그 책임을 함께 져야만 했던 터였다. 바른정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니 다시 당을 뛰쳐나가 조직과 돈과 지지자가 있는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당장 자신들을 향한 국민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당시 새누리당을 뛰처나와 따로 당을 차렸던 터였다. 그마저도 반기문이라는 유력한 대선후보가 있었기에 새누리당이 아닌 새로운 보수정당의 이름이라면 다음 대선에서 다시 여당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섰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박근혜라는 그림자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중도적인 보수정당의 이미지로써 반기문에 대한 대중의 인기와 지지에 영합해서 다음 대선을 노려보겠다. 하지만 반기문이 불출마를 선언하고 유승민이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지 못하자 결국 다시 절반이 떨어져나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나왔던 것이 보수대통합이라는 지금의 탈당명분이었던 것이고.


국민의당과 다른 부분이라면 그런 점에서 민주당의 경우 철저히 국민의당과의 합당이나 탈당파들의 복귀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에서 홍준표는 비주류다. 주류는 박근혜라는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친박들이다. 그나마 바른정당에서 복당해야 친박들과 세싸움을 할 수 있는 우군이 만들어진다. 물론 그렇다고 이미 바른정당을 나가서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간 정치인들이 얼마나 특히 박근혜와 관련해서 친박들과 차별화를 이루고 있는가 살펴볼 문제다. 어쨌거나 자유한국당은 바른정당의 옛동지들을 필요로 하고 있고, 바른정당은 내년의 지방선거와 3년 뒤의 총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유한국당이라는 따뜻한 그늘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명분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박근혜의 출당은 그들을 위한 명분이 되어 주고 있었다. 물론 국민 거의 대부분이 그 명분 뒤에 숨은 내막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내 국회의원 자리, 나를 따르는 조직의 유지를 위해 밥그릇 지키려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간다. 과연 얼마나 많은 보수유권자들이 그들이 앞세운 보수대통합이라는 명분에 동의해 줄 것인지.


결국은 새로운 보수를 표방했던 유승민의 리더십이 한계를 드러낸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바른정당을 중심으로 새누리당이나 이제는 갈라선 자유한국당과는 다른 새로운 보수를 보여주겠다. 그래서 뭘 보여주었는가. 그동안 얼마나 자신들을 그들과 차별화시키고 있었는가. 대선 당시 듣기 좋으라고 떠들어대는 공약 말고 실제 바른정당의 이름을 앞세우고 그들이 보인 행보들을 떠올려보라. 얼마나 많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유한국당과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는가. 그것을 유권자들에 인정받고 있었는가. 하태경은 이른바 통합파들의 방해와 반대를 이유로 들고 있지만 그마저도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 바로 정치인으로서의 리더십인 것이다. 그런 방해와 반대들을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힘으로 찍어 누르며 바른정당이라는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그래도 대통령이 되겠다 나왔던 거물 정치인다운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냥 자유한국당이나 바른정당이나다. 그 결과가 바른정당의 지지율인 것이고. 그래서 이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겠다. 처음 동기야 어찌되었든 유승민과 바른정당 자강파가 주장한 새로운 보수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무하고 의미없는 것이었는가 새삼 확인하게 된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뛰처나온 자체가 아무 명분이 없었듯 돌아가는 것도 아무런 명분이 없다. 그런 명분 자체가 필요가 없다. 이익이 있어 뛰쳐나왔고 이익이 있기에 다시 돌아가려 한다. 이념이 아니었고 신념은 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국민들이 뻔히 알고 있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리 비루한 것이다. 그렇다고 과연 남은 자강파들이 오로지 신념을 위해 끝까지 당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렇게 교섭단체마저 무너진 상황에서 당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나마 유승민의 리더십을 다시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면 하태경의 말처럼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물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그냥 한심하다. 웃긴다.

원래 국가란 군주의 사유물이었다. 군주에게 국가와 백성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것도 바로 그것들이 군주의 소유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너의 소유이니 그에 대한 책임 또한 네가 져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군주가 거부하면 뜯어말릴 방법이라고는 반역 말고는 없었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란이다. 역사상 수많은 암군과 폭군과 혼군이 존재했던 이유였다. 그들조차도 마지막까지 충성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시대에 국가의 재정은 곧 군주의 개인금고이기도 했었다. 왕실의 개인재산이 따로 있어서 국가재정과 별개로 운용되었던 조선의 경우가 오히려 특이하게 여겨질 정도다. 당장 명나라만 해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강한 나라였음에도 정작 그 재정의 대부분을 황제의 혈족인 종친을 예우하는데 쓰느라 항상 압박을 받고 있었을 정도였다. 근세 유럽에서 부국강병책의 상징처럼 이야기되는 중상주의 또한 그렇게 거둔 세금의 상당부분을 국왕의 애인이나, 전애인, 사생아, 혹은 친척, 우호적인 귀족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느라 파탄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심지어 유럽의 어느 군주는 자신의 국민과 자식들까지 다른 나라에 용병으로 팔아넘긴 돈으로 수많은 손님을 초대해서 연회를 열고 값비싼 보석을 선물로 뿌리는 사치를 부리고 있기도 했었다. 그래도 허용되었던 이유는 그 모든 것이 군주 개인의 소유였으니까.


그래서 민주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를 보고 있으면 어째서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처음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해하게 된다. 군주가 거두어가는 세금도 나의 재산이고 군주가 동원한 노동력도 나의 육신이다. 그런데 어째서 군주가 마음대로 나의 재산과 육신을 가져다 쓰면서 자기에게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가. 너무나 당연한 의심이고 분노였을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도 일찌기 공자가 군주에게 자신의 소유일 국가와 백성들에 대한 소유주로서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었고, 심지어 맹자는 국가도 백성도 군주의 소유는 아니라며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사상을 설파하기도 했었다. 걷분에 맹자는 북송 말까지도 중국사회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감히 신하로써 왕을 끌어내릴 수 있는가. 그러나 군주가 군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군주로써 자격이 없는 것이고 자격을 잃은 군주는 그 자리에 더이상 있을 수 없다는 일종의 사회계약론이었던 셈이다. 근세 유럽에서도 귀족과 군주들의 전횡과 폭압에 일방적으로 권리를 침해당해야 했던 주로 시민계급에 의해 혁명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리는 같다. 네가 거둬가는 세금이 내 재산이고, 네가 동원하는 노동력과 군사력이 나의 몸이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 권리를 인정하라.


국가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하니다. 국민은 어느 개인의 소유도 될 수 없다. 근대 이후 그것은 마치 상식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많이들 잊는다. 불과 얼마전까지 국가를 사유화한 권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런 권력이 어떻게 국가를 개인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사용해 왔었는가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피해받아왔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사회에서도 불과 얼마전까지의 일이었었다. 권력이 무고한 개인을 임의로 잡아들여 고문하고 재산을 빼앗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잡아다가 고문으로 죄를 만들고 개인을 처벌하고 그 가족마저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았었다. 정당한 자신의 사유재산과,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과 권리마저 권력에 의해 임의로 짓밟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었다. 수많은 재야인사들이 목숨걸고 독재와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것이었다. 더이상 국가가 몇몇 권력자의 소유로 있어서는 안된다. 아니 권력 자체가 몇몇 개인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공의와 공론에 의해 사회적 합의에 의해 엄격한 규범과 제도와 절차에 따라서만 권력은 존재하고 집행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란 국가를 이루는 모두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박근혜가 집권하는 과정이 그랬었다. 박근혜에게 대통령은 아버지를 잇는 자신의 가업이었었다. 그 지지자들에게도 박근혜는 자신들에게 군주였던 대통령의 딸이자 상속인일 뿐이었다. 오죽하면 박근혜를 비판하는 이들마저 상당수 한 번은 대통령이 되어야 했을 것이라 인정하고 있었다. 그만큼 대통령을 군주로 여기고 국가를 대통령의 사유물로 여기는 전근대적인 사고를 가진 국민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딸이니까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의 자식이니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국가의 권력이나 재정은 여전히 공적인 대상으로 여기며 남겨둘 수 있을까? 국가는 곧 나의 것이고, 권력도 또한 나의 것이고, 재정도 또한 나의 재산이다. 국가의 안보 또한 나의 일이다. 얼핏 들으면 대단한 책임감으로도 들릴 수 있을 테지만 결국 그를 통해 보여준 것은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국정원의 예산을 개인의 비자금으로 빼돌리는 것이었다.


하긴 이명박이라고 다를까?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몇몇 대주주의 사유물인 사기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기업경영을 잘했으니까 나라경영도 잘할 것이다. 딱 기업경영하듯 나라도 경영했다. 사기업에서는 기업을 소유한 사주의 의지가 절대적이다. 사주로부터 위임받은 경영자가 나가라 하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주의 이해와 목적에 맞게 기업은 구성되고, 그 아래서 철저히 모든 구조와 구성원들은 그 이해와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단위로써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국가도 기업처럼 만들었다. 자기 사람을 심고, 자기 이익과 목적에 맞게 바꾸고 운영하고.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이명박과 박근혜를 지지해서 대통령으로 만들고서도 아무 책임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자칭 시민들에게 환멸만을 느낄 뿐.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다행일까? 그나마 문재인은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개인을 엄격히 구분하는 행보를 보임으로써 국민들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모양이다. 국가권력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국가권력이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국가는 어느 개인의 사유물이 될 수도 없고, 권력이 어느 개인의 소유가 되어서도 안된다. 보수며 진보언론들이 문재인을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무현 때도 진보언론이 노무현에 반감을 가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국가도 권력도 사유물이 아니니 정작 같은 편이라 여겼던 진보언론들에게도 따로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보수정권에서 보수언론들은 그들에 협력한 대가로 많은 것을 받고 있었다. 차라리 보수정권의 이명박이 진보언론을 더 많이 챙겨주었다. 이명박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은연중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제동을 걸려는 듯한 기사와 사설을 흘리고 있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에게도 뭔가 몫을 챙겨달라.


최근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과 관련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참담함을 넘어 아예 허탈함까지 느끼게 된다. 87년 6월 흘렸던 그 뜨거운 피가 이런 역사의 퇴행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 그나마 아주 높게 쳐서 노태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역사의 발전이 국민의 선택에 의해 이런 어이없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누구의 책임인가? 세상에 미친 놈도 개새끼도 쌍놈도 너무 많다. 모두가 대통령이 되지는 못한다. 역겹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일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홍종학 전의원에게 장관이 될 자격이 없다 야당이며 언론들까지 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것일까? 그리 큰 이슈는 아니라 여기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더니만 아직까지도 여기저기서 시끌럽다. 그러니까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첫째 법적인 문제야 비판하는 야당이나 언론 모두 감히 언급조차 않는 부분일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국가가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현행법상 저촉되거나 위배되는 것 하나 없이 그러나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적용해서 증여받고 세금을 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최소한 딸이 건물의 지분을 상속받고 증여세를 내는 과정에서 중대한 법적 문제는 없다 보아도 좋다.


그러면 둘째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가? 예전 강호동 때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 납세의 의무가 반드시 정부가 부과한대로 세금을 최대한 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시민으로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일정한 세금을 내는 것이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약속일 것이다. 공공의 부조와 같은 것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모두가 조금씩 자기가 가진 것을 공동체에 내놓는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공동체가 걷어가는 세금의 목적이나 액수 자체는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과연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혹은 지자체의 주민 가운데 예산심의나 집행, 세금의 신설이나 세율의 조정 등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리 시민 자신이 뽑은 대표들에 의해 결정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그런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까지 시민들이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닐 터다. 그러면 부당하다 생각되는 세금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예 불복종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시민불복종이다. 당당히 시민의 권리로써 납세를 거부하고 대신 공동체가 정한 규범대로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 탈세와 다른 점일라면 굳이 자신의 납세거부를 감추거나 속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그런 목적의, 그만한 액수의 세금을 내야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지 납세의 의무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주체로써 명확히 하고 기꺼이 법적인 처벌을 받음으로써 공동체의 규범을 따른다. 물론 현실에 이렇게까지 나서는 살람은 거의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 시민들은 두 번 째 방법을 쓰게 된다. 법이 강제하는 세금 안에서 가능한 최대한 자신이 납부해야 하는 세금의 액수를 줄이는 것이다. 일종의 저항권이다. 국가는 일방적으로 시민들에게 세금을 매기고 걷지만 그에 대한 저항으로써 국가가 정한 법과 제도 안에서 최대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을 또한 국가는 보장해준다. 이른바 최소한의 법칙이다. 당장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에 관여하고 권리를 침해하려 할 때 그것은 필요한 최소한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에게 지워지는 의무 역시 따라서 개인이 지불할 수 있는 최소한이어야 한다. 그래서 절세라 말하는 것이다. 탈세와 절세가 다른 점은 그것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있다. 납세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정부의 명령에 성실하게 복종하면서도, 그러나 법이 허락한 최대한의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지킨다. 그런 긴장관계가 민주주의 사회를 더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을 뿐더러 민주국가의 시민으로써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이고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뭐가 또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 홍종학 전의원이 국회의원 시절 주장했던 것이나 발의에 참여한 법안 등과 비교해서 일관성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한 연장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100명 가운데 10명에게만 빵을 주었다. 그런데 빵을 받은 10명 가운데 몇 사람이 일부만 빵을 먹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그 소수의 불공평하다 여기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빵부터 반납하고 불공평하다는 주장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빵을 일부만 먹는 것이 불공평한 이유는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것이 좋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좋은 것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여기에서 더 많은 사람이란 자신을 포함하는 것이다. 내가 그만큼 누리는 것이 있기에,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주장한다. 아예 그것마저 포기하고 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편에 설 수 있다면 그보다 훌륭할 수 없지만 인간으로서 그렇지 못한 것을 탓하고 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차피 빵을 더 잘게 쪼개서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눈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받게 될 몫도 그에 비례해서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이른바 말하는 국민정서법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주체가 정치인이고 언론인들이라는 것이다. 리더란 다른 사람보다 반 걸음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유혹에 흔들리고 고난에 좌절할 때 그들을 북돋고 일깨워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언론은 혹시라도 사회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까 감시하는 자기 안의 눈이며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가? 그것이 과연 바른 것인가? 가치판단없이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렇다 옮겨쓰는 수준이라면 - 하기는 정치권에서 아무리 막말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여도 전혀 아무런 판단도 평가도 없이 옮겨쓰는 것을 언론인의 직무라 여기는 이들이 어쩌면 더 많은 것이다. 자칭진보언론이 그래서 자신들의 이념이나 지향에 반하는 보수정치인들의 주장조차 아무런 비판없이 옮겨쓰고 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국민이 감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해서 잘못된 것인가?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면 개인의 재산을 원하는 사람에게 상속하거나 증여하는 것 또한 권리로써 인정해야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정한 일정한 책임과 의무만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홍종학 전의원이 국회의원 시절 발의에 참여했던 법안들도 그런 취지였었다. 사유재산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상속과 증여라는 현실 자체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적법하게 적절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바로 다듬는다. 결국 이번 이슈가 크게 불거진 이유도 안철수나 유승민등과는 달리 최대한 절세하되 정해진 세금을 충실히 납부하려 했던 노력 때문이었다. 맹목적 복종이 아니다. 자신의 몫을, 시민으로서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최대한 지키면서 국가가 요구한 납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그리 문제라는 것일까?


정치인들이 그러는 것이야 당장 자기들 밥그릇 걸린 일이니 그럴 수 있다 하겠다. 그래서 더 언론이 문제라는 것이다. 언론이 정치를 하려 한다. 아니면 언론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저버리려 한다. 대한민국에서 기자란 기레기를 가리킨 지 오래 되었다. 논란이 될 일이 아니다. 한심하다.

적은 친구보다 더 가까이 두라. 권력자의 그릇은 자신을 적대하는 경쟁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으로 간단히 계량된다. 역사상 위대한 군주들은 자신을 비판하거나 적대하는 상대마저도 끌어안고 자신을 경계하는 거울로 삼았었다. 저들의 존재가 있기에 자신은 항상 긴장하며 조심할 수밖에 없다. 항상 자신을 노리고 감시하는 존재들이 있기에 감히 함불로 나태와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저들이야 말로 자신과 동등한 정치의 한 주체들이라는 것이다. 똑같이 유권자를 대상으로 그들의 지지를 받으며 그 의지를 대신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치인의 뒤에는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있다. 그 유권자들 또한 정치인으로써 자신이 섬기며 책임져야 하는 국민일 터였다. 단지 다른 주장 다른 요구가 복잡하고 거대한 만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가운데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단순히 국회의원의 신분이고 거대야당에 소속되어 있기에 예우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만든 유권자들의 의지를 예우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을 반대하더라도 그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마 존중받아야 할 정치의 주체며 주인들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동안 자격도 안되는 대통령들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 뿐 그렇게 하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아무리 모순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 또한 자신과 동등한 정치의 주체이며 민의의 대변자들이다. 그마저 용납하지 못할 정도라면 대통령같은 건 되지 말아야 한다. 정치같은 건 해서는 안된다. 이념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고 정책이 달라도 그럼에도 같은 자리에서 대등하게 서로를 존중하며 논의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이루어진다. 


나조차 그만큼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제였을까? 도대체 언제쯤 이런 모습이 국회에서 보이고 있었을까? 다만 이번에도 일방이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데 대통령만 야당 정치인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부정하는 야당정치인들을 존중하며 예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마저도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으로써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신기하다. 참 많이 돌아온 모양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자식이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돈이 없다.


"엄마 내줘!"


정상인가?


물론 간단하고 쉽고 빠르다. 그냥 부모가 자식에게 증여해서 세금을 대신 내준다. 그런데 자기 세금 아닌가. 더구나 자기가 증여받은 재산에 대해 매겨진 세금이다. 원칙적으로 자기가 해결하는 것이 옳다. 그러면 어떻게?


여기서 핵심은 과연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빌려주고 얼마나 성실하게 변제받았는가 하는 것일 게다. 어차피 나중에 부모 죽고 자식에게 상속되면 따로 상속세 내게 되어 있다. 사실상 자식에게 돌아간 돈이 없는데 편법증여를 말하는 것도 부당하다. 부모가 빌려준 만큼 이자까지 포함해서 꼬박꼬박 받아서 챙겼다. 그러면 그냥 부모자식간에 금전거래다. 그것을 문제삼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조부모가 자식이 아닌 손주에게 재산을 증여하는 것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법적으로 세대를 건너뛰어 증여한 탓에 세금이 더 나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야 할 세금을 부모가 대신 내주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는 것으로 처리했다. 자식교육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것은 너의 재산이고 네가 독립적으로 주체가 되어 관리해야 할 너의 소유다. 부모는 그 증여에 대해 아무것도 돕거나 관여할 수 없다. 은행보다 더 많은 이자를 받았다 한다. 어차피 은행과는 대출 자체가 되지 않을 테니까.


처음에는 홍종학 전의원에게 뭔 문제가 있는가 싶었다가 사실을 알고 과거 강호동의 세금 과다계상 파문이나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정작 부모가 딸에게 이자와 원금을 제대로 받았는가 여부를 밝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을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비판이라면 동의한다. 그것도 아니고 그저 딸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저들의 상식과 나의 상식이 다른 것인지.


이미 있는 재산을 그냥 내다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그 재산을 증여하는 과정에서 있는 법대로 처리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자식은 부모의 부속물이 아니다. 재산권행사에서 독립된 주체다. 언론들도 병신이다. 세상엔 병신이 참 많다.

1. 그리스 왕정이 무너진 이유가 있었다. 원래 신들이 하는 짓거리란 당시 권력자가 하던 짓거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신이란 지고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존재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인 그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가 상상할 때 결국 참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에서 역시 막강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권력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도 최고신이라 할 수 있는 하늘의 신 옥황상제의 모습을 보면 가장 이상적인 당시 중국 황제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옥황상제가 머무는 천상의 모습부터가 당시 중국 황궁 자체였었다.


하여튼 이런 막장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혈족살인에, 근친상간에, 자기들끼리만 그러는 것도 아니라 인간세계에서까지 온갖 해악을 미치고 있다. 당장 제우스만도 그나마 유혹에 성공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유인에 납치에 결국은 강간이었다. 제우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포세이돈도 만만치 않았고, 헤르메스를 비롯 그리스의 신들이 세상에 남긴 수많은 사생아들이 그렇게 신들의 강제와 억압에 의해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신화 후반 신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인 영웅들의 이야기로 넘어왔을 때 더 확실해진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오이칼리아를 멸망시키고 이올레를 납치해 오는 장면이나,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아마존의 여왕을 납치하고 아직 어린 나이였던 헬레네를 납치했다가 도리어 아테네가 함락당한 이야기등은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파렴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하긴 도덕이란 자체가 고도의 사유체계이고 보면 고대의 군주들이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기는 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여신 아테네보다 수를 잘 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거미가 되었고, 미다스는 아폴론이 아닌 판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귀가 당나귀귀로 변했었다. 이같은 신들의 막장성이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한 이유가 되고 있기도 했었다.


2. 고대 그리스의 왕가는 세습보다는 추대가 더 흔했고, 그럼에도 대부분 왕가가 서로 인척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당장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가멤논만 하더라도 자신이 미케네의 왕이면서 동생인 메넬라오스가 스파르타의 왕이기도 했었다. 오이디푸스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만 보더라도 반드시 혈연을 매개로 왕위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전설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인 반면, 이들 영웅들 역시 씨줄과 날줄로 서로 혈연으로 엮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모습을 어렴풋 유추해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미니멀한 중세 유럽의 귀족사회나 일본의 무사계급과 닮지 않았을까. 그런 체계없는 계승 또한 고대 그리스의 권력이 보여주는 파렴치함의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왕위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인류역사에서 그것은 상식이었다.


3. 고대 그리스에서 양치기와 어부는 지배층에 속한 관직에 더 가까웠다. 하긴 고대사회에서 모든 생산수단은 전제군주의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관리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특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오이디푸스의 전설만 하더라도 아버지인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내다버릴 때 그 명령을 따른 것도 양치기였었고, 그 양치기가 버린 오이디푸스를 주워서 코린토스의 왕 폴뤼보스에게 데려간 것도 바로 양치기였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 역시 양치기로 있다가 여신들의 다툼의 심판을 맡고 헬레나를 아내로 얻고 있었다. 한 편 바다에 버려진 페르세우스 모자를 구한 것이 세리포스의 어부 딕티스였는데, 바로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티스의 동생이었었다. 페르세우스에 의해 폴리덱티스가 돌이 되자 뒤를 이어 왕이 되기도 한다. 


결국 양과 소는 당시 군주들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배 또한 값비싼 수단이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당시 사회규모에서 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후대의 고대화된 사회의 군주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고대사회에서는 토지 역시 군주의 소유로써 농민들은 단지 군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그로부터 필요한 식량을 얻을 뿐인 존재였었다. 농사를 짓는 씨앗까지도 그래서 모두 군주가 제공하고 있었다. 보이오티아의 왕비 이노가 전왕비인 네펠레의 자식들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밀 때 썼던 계략 가운데 하나가 농민들에게 줄 씨앗을 익혀서 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익힌 씨앗에서 싹이 틀리 없으므로 큰 흉년이 들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왕은 자신의 자식들을 신의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아직 생산력이 부족하던 시대의 토지란 사유재산으로서는 너무 가치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4. 싸움에서 진 적의 성기를 자르는 것은 의외로 흔한 일이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전쟁에서도 수많은 포로들이 거세된 바 있었고, 가깝게는 원명교체기에 명군에 의해 원과 그에 협력하던 이민족포로들에 대한 광범위한 거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화가 그렇게 운남에서 포로가 되어 거세당한 뒤 환관이 되었다 영락제의 측근이 된 경우였다. 처음에는 우라노스나 크로노스가 각각 아들들에게 찬탈당하고 거세까지 당한 것이 어떤 신화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궁리도 했었었다. 하지만 세계사를 보거나 지중해세계의 역사를 보았을 때 그냥 거세는 패자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에 지나지 않았다. 성기를 제거했으므로 더이상 후손을 낳을 수도 없고 남성으로써 권위를 세울수도 없다. 개인에게나 혹은 집단에게나 심각한 위협이자 모욕이다. 한 마디로 씨를 말리겠다는 말의 적극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5. 문득 석탈해 신화를 떠올릴게 되었다. 석탈해도 태어났을 때 알이었던 탓에 상자에 담겨져 바다에 버려진 바 있었다. 페르세우스 역시 어머니 다나에와 더불어 상자에 담겨 바다에 던져지고 있었다. 사생아로 태어났던 때문이었다. 비슷한 예가 신화에서는 몇 더 있는데 하나같이 결혼하지 않은 채 임신했거나 출산까지 한 경우였었다. 부정한 출생이기에 차마 산모와 아이를 죽이지는 못하고 신의 뜻에 맡겨 바다에 띄워 보낸 것은 아닐까. 생부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 신을 개입시키는 것은 그가 신에 의해서만 살 수 있는 운명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죽었어야 할 운명에서 끝내 살아났으므로 그것은 신의 뜻이고 그들은 신의 자식들이다. 그냥 망상.


6. 포세이돈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괴물에 범죄자들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바다가 주는 이미지였을 것이다. 당시 미케네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리스는 또한 뛰어난 해양문명이었음에도 여전히 바다는 정복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이 밀어닥치는 폭풍과 비바람, 높은 파도, 무엇보다 바다를 무대로 누비는 해적들까지. 테세우스가 살해한 스키론 역시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한 편으로 살라미스의 임금 키클레우스의 딸과 결혼한 사이이기도 했는데, 심지어 전승에 따라서는 테세우스와 사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맨 위와 이어진다. 하긴 불과 얼마전까지도 지역유지에 의해 주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여행자에 대한 범죄가 저질러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도 있었다. 가족의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러 가는 차를 막아서고 돈을 갈취한 것이 그 마을 이장이었었다. 바다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한다.


7. 얼마전 다시 그리스신화를 읽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읽으니 확실히 그 맛이 전과는 전혀 다르다. 그냥 신들이 신들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신화에 녹아든 역사 이전 그리스 사회의 모습에도 눈길이 가게 된다. 무엇보다 어째서 고대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했는가 그 이유를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가짜 세계이고 가짜 신이다. 플라톤의 그 외침은 진리는 현실의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감춰진 진짜에 있다. 영지주의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좀 먼 이야기다.

어쩌면 처음부터 노동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리고 그 누군가에 일방적으로 기대어 이루어져 온 한국 노동운동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일이라는 자각이 없다. 자신들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부터가 부족하다. 누군가 대신 다 해결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노동자가 아니었던 이들이 자신들을 노동자와 다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노동자들을 구원한다.


어른의 방식이란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때로 포기할 줄도 아는 협상과 거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00을 가지고 싶다면 어떻게 상대가 100을 내놓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를 위해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대가는 무엇인가. 지불해야 할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래도 도저히 안된다면 과연 어디까지 상대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반드시 가능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만에 하나 다른 가능성을 찾고자 일단 먼저 흥정부터 하고 본다. 거기서부터도 자신을 얼마나 더 양보하고 포기하며 어떤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아이는 그런 것 없다. 떼쓰면 된다. 어차피 자기 주머니에서 돈나가는 것 아니다. 자기의 실력으로 오로지 자기가 노력해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지갑에서 나온다. 부모의 수고로부터 주어진다. 아이는 그냥 떼쓰기만 하면 된다. 협상도 필요없다. 타협도 필요없다. 사주지 않으면 부모만 나쁜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울고 떼쓰는데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더 서럽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아무리 자식이 떼를 써도 도저히 사 줄 수 없는 부모의 사정 따위 전혀 아랑곳않는다.


시작은 전태일이었지만 그 전태일의 뜻을 이어받은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더구나 안간힘을 쓰며 그것에 매달려 있는 노동자와는 출발선부터 다르다. 책에서 읽은 이상을 위한 것이었다. 선배나 교수들로부터 귀로 듣고 몸으로 겪으며 배운 추상의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 노동자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자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정작 노동자의 사정은 아랑곳않는 무리한 투쟁이 그들을 더 곤란케 만드는 경우마저 그래서 적지 않았었다. 자신들이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한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그같은 자신들의 신념과 이상에 도취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앞장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이상이라는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이다. 양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노동자에게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삶이며 현실이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현실이 허락할 수 있는, 실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는 타협할 수 있지만 이상주의자들은 타협할 수 없다. 정작 노동자를 위해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면서도 기계기름으로 손발이 갈라터진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내 노동자일 수 없었다. 그로부터 노동운동의 리더십은 노동의 현실과 유리된 박제화된 신념으로 흐르고 말았다. 차라리 전부를 얻어낼 수 없다면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실패와 좌절이 더욱 노동계급을 분노케하여 진짜 그날을 더욱 빨리 앞당길 수 있을지 모른다. 실패해도 어차피 자기들 일은 아니다.


문재인이라고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대통령의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닐 것이다. 문재인을 지지한 유권자들 역시 문재인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리라 기대하고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문재인이 추구하는 바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필요했으니까. 그럼에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양보한다. 그래서 희생한다. 여기까지는 내가 허용할 수 있다. 그게 정치다. 그런 유권자의 마음을 알기에 문재인도 대통령이 되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다. 그것이 현실이다. 대화와 타협일라는 것이다. 공존이라는 것이다. 서로가 양보하며 빈 자리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문재인더러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 내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수많은 현실의 이유라는 것이 없다.


스스로 노동자로써 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투쟁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변절하고 쉽게 자신의 신념과 등을 돌린다. 현실은 수십년간 자신이 몸담아 온 그쪽이 아닌 지금부터 살아갈 이쪽에 있다. 현장의 노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실제 노동현실을 몸으로 겪으며 자신의 삶으로써 느껴야 하는 현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각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민주노총이 갈수록 약해지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런 노동자의 삶을 정작 노조들이 전혀 현실로써 삶으로써 느끼며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감하며 함께 고민해주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괴리된다. 노동운동에 삶과 현실은 사라지고 고집스런 이상과 신념만이 남는다.


심지어 정의당마저 문재인 정부를 한 편으로 탓하면서도 민주노총을 타이르는 논평을 내놓고 있었다. 내내 문재인 정부에 적대적이었던 경향신문마저도 이번만큼은 민주노총의 잘못이라며 크게 꾸짖고 있었다. 그래도 민주노총을 우호적으로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민주노총의 미래는 없다. 한국노총은 현실을 받아들여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 하는데 민주노총은 먼 과거에 두고온 환상에만 사로잡혀 있다. 100 가운데 다만 하나라도 내 손에 쥐이면 그것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실망은 없다. 원래 그런 집단이라는 것을 안다. 노무현 정부때도 이명박 정부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명박 정부하고라도 공존을 꾀했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안됐다면 박근혜 정부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어야 했다. 이길 수 있다면 충분히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먼저 구성원들을 지켜야 한다. 그것을 못했기에 민주노총은 약해지고 있다. 그 민낯을 드러낸다. 조금 슬프다.

우리나라는 법으로 포경을 금지하는 포경금지국이다. 그런데 정작 우연히 사고로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의 경우는 그 고기의 유통을 허락하고 있다. 그래서 허점이 발생한다. 과연 지금 들여와 팔고 있는 고래가 포경으로 잡은 고래인지 아니면 그물에 우연히 걸린 고래인지 알 게 무언가. 그래서 정작 단속을 하고서도 근거가 없어 처벌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상 한국을 포경허용국으로 규정하는 이유다.


고양이와 같이 살아보니 알겠다. 반려동물은 말 그대로 종을 뛰어넘은 가족이다. 다만 한 달이라도 함께 같은 공간에서 거주하며 체온과 마음을 나눠온 시간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반려동물을 고작 고기 몇 근 먹겠다고 동네사람이 잡아먹고 심지어는 잡아다가 보신탕집에 팔기까지 한다. 결국 개고기를 팔거나 먹도록 허용하는 현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남의 개까지도 그저 고기쯤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보신탕집에서도 막말로 지금 팔겠다고 가져온 개가 누구의 어떤 개인지 알 게 무언가.


보다 엄격하게 남의 개를 절취하는 행위를 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던가. 더구나 남의 개를 절취해서 죽이거나 판매하는 행위에 대해 더 가혹한 처벌로써 경계토록 하던가. 그도 아니고 개는 그저 사유재산이고, 개고기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개를 고기로써 사고파는 것도 자유로우니 여전히 이런 일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잃어버린 고양이 찾겠다고 며칠동안 전단지 붙이고 했던 기억이 있기에 길거리에 개를 찾는다는 전단지 보이면 마음이 안쓰럽다. 고양이는 어디서 잘 살고 있겠거니 위안이라도 받는다지만 개는 그마저도 아니다. 그렇게 만드는 현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타인의 개까지도 그저 고기로 볼 것이라면 개고기는 따라서 금지하는 것이 옳다.


처음에는 개고기 먹거나 말거나 개인의 선택이라 생각했었다. 외국에서 개고기 가지고 시비거는 것도 그 나라의 차별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내정간섭이라 여겨왔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남의 개를 잡아먹고 팔아넘기고 벌써 죽어 고기가 되어 되찾은 소중한 반려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한국놈들의 저열한 양심 때문이다. 비루한 이성 때문이다. 그놈들때문에라도 개고기는 금지되어야 한다.


당연히 고래고기도 우연히 그물에 걸린 고래마저도 유통하지 못하도록 금지해야 한다. 어차피 고래고기 먹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다. 아예 평생 고래고기는 구경도 못해보는 사람들이 한국사회에는 더 많다. 굳이 값도 비싼 고래고기를 유통하고 먹어야 할 필연적 이유란 거의 없다. 빈틈이 있기에 불법도 저지를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인하는 결과도 낳을 수 있다. 한심한 것이다. 여직껏 모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역사적인 발명이나 발견을 한 경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한다.


"이것이 과연 내가 이룬 일입니까?"


그만큼 자신이 이룬 업적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너무 대단해서 자신이라는 그릇 안에 담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그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이고 의지이기를 바란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상가나 혁명가, 정치지도자들이 뜻밖에 쉽게 독재의 유혹에 빠져들고 마는 이유인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이다. 나의 실력이고 나의 노력이고 나의 업적이다. 만일 운에 의한 것이라면 그 운마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내 것이다. 사상도, 이념도, 혁명도, 권력도, 국민도, 국가도,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내가 모두 짊어지고 책임져야만 한다.


한국진보의 가장 큰 문제라면 아직까지도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못배운 가난한 노동자들을 일깨우겠다고 야학에 나서던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난한 농민들을 일깨워 그들의 고단한 삶을 바꾸겠다고 농활에 나서던 시절에서 전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옳았고 내가 이끈 것이었다. 자발적 주체로써 대중을 보는 것이 아닌 타율적 객체로써 대중을 인식하려 한다. 그러므로 작년 그 추운 겨울 수많은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촛불을 들었던 것은 자신들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진보진영의 촛불시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촛불시위란 자신이 잠시 그 일부가 되었던 시민의 거대한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마 두려워하고 차마 삼가며 그 뜻을 받들고 쫓기 위해 신중을 기한다. 그에 비해 진보진영은 촛불시위란 자신들의 것이다. 거리로 모인 시민의 의지란 자신들이 만든 자신들의 소유다. 실제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자신들이 시민을 이끈다. 대중을 가르치고 일깨운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들만이 대중의 앞에 있어야 한다.


아니나다를까 진보진영에서 촛불을 무기삼아 문재인 대통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이 촛불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양, 아니 촛불시위가 주머니속의 알사탕마냥 아무때나 꺼내먹을 수 있는 자신들의 소유라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니 자신들을 거스르는 것은 촛불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신들을 따르는 것은 촛불민심을 따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가 한 마디 하려 해도 원래 한국진보는 그랬었다.


책으로 배운 진보인 까닭이다. 현실과 밀착해서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며 깨달은 진보가 아닌 어디서 남이 써놓은 책에서 읽고 자기 것처럼 여기며 쫓아온 이상이고 신념인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들의 자원약탈에 대해서는 분개하면서 식민지조선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약탈에 대해서는 정당한 거래행위로 인식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란 자체가 원래 없는데 일본과 조선이라는 민족의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쌀을 팔아넘긴 조선인과 쌀을 산 일본인만 존재한다. 조선의 처녀들을 유인하고 납치해 팔아넘긴 조선인과 그로부터 사들여 이용한 일본인만이 존재한다. 일본의 전쟁범죄는 없다. 최소한 일제강점기에 대한 역사인식에서 다수 진보와 뉴라이트 사이에 차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는가 모르겠다. 탈민족주의도 유행이 지나가고 있는 듯하니.


유시민 말마따나 소매상처럼 외부로부터 유입된 지식을 대중들에 전파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어떤 사명으로 여기는 숭고함이 문제인 것이다. 그만큼 자신들이 하는 일은 대단한 것이고 그런 일을 하는 자신들은 대단하다. 그것을 대중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것을 대중이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대중은 자신들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한다. 오만이라기보다는 순진한 것이다. 세상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한바탕 게임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꿈에서 깨고 나면 너무나 쉽게 전향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전교조 합법화는 나 역시 전부터 항상 지지하는 입장에 있던 터였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역시 부당하게 체포되고 투옥되었으므로 사면복권되어야 한다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주장하기 위해 촛불을 앞세우는 것은 겉넘는 짓이었다. 자신들 역시 촛불시위에 동참하기야 했을 테지만 촛불은 전적으로 그들의 소유만은 아니었다. 소유이기는 커녕 문재인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촛불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촛불의 지분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촛불이 자기 것인 양 마음대로 들먹이며 수단으로 이용한다.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시민들을 자신의 들러리로 여기는, 주체로써 시민들의 자발적 역량과 권리를 철저히 무시하는 오만이며 결례인 것이다. 누구도 촛불을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었다.


수단이 잘못되었다. 정히 자신들이 옳다 여긴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정부와 여당에 건의하고 대화든 협상이든 공적인 통로를 통해 양해와 동의를 구하려 노력했어야 했을 것이다. 정부가 공약인 탈원전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공론으로 만들어 정부는 물론 야당까지 압박하여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대통령 하나만 바뀌면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가장 민주주의의 기본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옳더라도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것은 인정될 수 없다.


조금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가운데 더구나 소수다. 자신들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들이 대표일수도, 머리일수도, 스승이거나 리더일수도 없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주체로써 시민 자신들이다. 어째서 자신들은 여전히 이 사회에서 소수로써 변방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 스스로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


정작 지지하는 입장이기에 더 당혹스럽다. 굳이 저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들의 정당성까지 해쳐가며 정부에 상처입히려 시도할 필요는 없을 텐데. 역시나 책으로 배운 진보라 그렇다. 대한민국의 현실보다 머릿속의 이상이 더 중요하다. 배신당한 느낌이다. 그래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목적이 옳다고 수단까지 정당한 것은 아니다. 당연한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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