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을 채택한 이유는 다수결이 반드시 옳아서가 아니다. 다수를 쫓는 것이 옳기 때문도 아니다. 그쪽이 더 싸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더 적은 비용으로 큰 혼란없이 책임까지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열없는 사회적 통합과 단합도 유도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자. 사실 다수결은 봉건시대에도 있었다. 봉건영주들이 모여서 왕위계승 등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는 제도가 있었다. 하긴 신라에서도 화백이라는 합의체 제도가 있기는 했었다. 그리고 역사가 진행되면서 차츰 부유한 상공인과 중소상공인, 도시임노동자와 농민, 마침내는 여성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되고 있었다. 원리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단지 주체가 더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어째서?


간단히 각 주체들이 실력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유한 상공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중소상공인은 근대유럽의 혁명사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름일 테고, 도시임노동자와 농민들 역시 파업과 쟁의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었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가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가는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실력으로 너희들을 성가시게 만들 것이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감시하고 체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하기보다 제도권 안에서 정치의 지분을 나눠주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


오히려 역사상 내전은 매우 일반적인 흔한 일이었다. 별 사소한 일로도 갈등하고 충돌한 끝에 끝내 피를 부르는 전쟁을 시작하고는 했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명분이 있고 누구를 돕는 것이 내게 더 이익일 것인가.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아군을 만들고 그들의 힘을 빌어 싸움을 승리로 끝맺을 것인가. 그러다가 아예 싸움을 시작하기 전 서로의 세력을 확인함으로써 굳이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을 막으려 한다. 이쪽이 더 많고 강하니까 어차피 싸우면 이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쯤에서 양보하라. 소수의 편에 섰다가 다수의 반발을 사서 아예 본전은 커녕 뿌리까지 뽑히고 마는 경우를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다수의 결정을 따른다면 소수는 다수의 결정을 뒤집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세력과 세력끼리, 그리고 그 세력이 세분화되고, 그 세력 안에서도 계층이 나뉘고, 중요한 것은 그들 각각의 주체들이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가지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현실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면 불편해지고 성가셔진다. 심지어 자칫 지금의 구조와 체계까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구조와 체제의 연장에서 그들을 통합하게 된다. 모두가 대화와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 복종한다는 약속을 한다. 민주주의의 마지막은 그래서 승복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설사 자신의 주장과 전혀 반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절차를 거친 것이라면 기꺼이 인정하고 따르며 복종한다. 


당장은 자신들의 주장이 충분한 논거와 설득력있는 논리를 제시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에 밀렸지만 다음에 더 확실한 논거와 논리를 개발해서 다시 겨룬다면 그때는 자신이 승리자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자신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 승자의 주장에도 기꺼이 인정하고 복종하듯 그때는 상대도 역시 자신의 주장에 대해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굳이 힘으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아도. 적잖은 상처와 피해를 입어가며 서로 부딪히지 않아도. 지금보다도 더 충실한 준비와 노력을 갖춘다면 다음에는 자신이 승리자가 되어 자신이 뜻한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이번 공론화 직전까지 탈원전은 물론 신고리5.6호기의 건설에 강력하게 반대하던 시민단체들마저 공론화의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겠다 나서고 있는 것은 그래서다. 차라리 공론화를 비판할지언정 공론화의 결과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이의제기를 하지 못한다. 건설재개를 주장하는 쪽의 논거와 논리가 더 타당하고 설득력있었다. 건설중단을 주장하는 쪽의 논거와 논리는 그만큼 대중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를 위한 충분한 논리와 논거를 개발하는데 게을렀거나 혹은 무능했던 자신들의 탓이다. 그러나 다음에는. 중요한 것은 역시 앞서 말한 전제다. 다음에 자신들이 공론화를 통해 승리를 거둔다면 그때는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차라리 길거리에 나가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할 시간에 보다 현실적으로 실질적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논거와 논리부터 더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를 위한 비용이다.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찬성의 논리에 정당성을 더해주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신고리원전 자체에 대해서는 이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최소한 이 문제로 더이상 사회가 분열하고 갈등하고 충동을 빚을 염려는 없다. 하물며 그 당사자들이 수백만이나 한꺼번에 모여서 대통령까지 탄핵시킨 국민들이고 보면. 그런 국민들의 동의를 구한다.


민주주의란 효율이라는 한 가지만 놓고 봤을 때 그다지 썩 훌륭한 제도라 보기 힘들이다. 너무 복잡하고 지루하다. 그냥 말 몇 마디면 되는 일 가지고 토론을 한다 투표를 한다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더구나 그 주체란 것도 전문가도 아닌 시민 개인이거나 그 가운데서 뽑힌 국회의원들이기 쉽다. 그런데도 어째서 민주주의만 살아남고 다른 체제는 거의 현대사회에서 도태되어 있는가. 민주주의라면 빠르지는 못하더라도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한 번 쯤 검토하고 넘어갔을 것을 빠르고 효과적인 독재는 그 과정 자체를 건너뛰기 때문이다. 부정의 결론은 현실에 닥쳐야 비로소 겪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리고 급박한 상황에서 그것은 너무 늦다. 느리지만 확실한 길로 가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3개월이라는 기간동안 공사가 중단되며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했었다. 하지만 그대로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면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어떤 충돌이 빚어졌을지 모른다. 이후 내내 그와 관련한 논란이 불거질 것이다. 사람이 상할수도 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지워야 할까? 그를 위한 비용으로써 공론화과정에서 지불된 비용이 과연 지나치게 비싼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이같은 갈등상황은 이 사회에 적잖이 있을 것이다.


돈만 이야기한다. 공사중단으로 낭비된 돈만을 이야기한다. 그 대가로 그토록 반대하던 공사에 대해 기꺼이 양보하고 동의해주는 시민사회단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과의 충돌로 빚어질 사회적 비용과 손실에 대해서도. 그래서 독재를 옹호한다. 까라면 깐다. 권력은 언제나 옳다. 벗어나지 않는다.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논거가 확실하고 논리가 훌륭하다고 그 주장이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편전쟁 역시 영국 의회에서 오랜 토론과 표결까지 거친 끝에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결정된 것이었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역시 선거에 의한 합법적인 것이었고 최소한 독일안에서 다수 독일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아니 독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에서까지 히틀러를 추종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경우 히틀러의 집권과 이어진 전쟁과 전쟁범죄는 인간의 이성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토론이라는 것은 누가 더 옳은가를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공론이라는 것은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틀렸는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승자가 더 옳은 것도 아니고 패자가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 정해진 룰 안에서 그 결과에 따라 승자가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기로 약속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서로 토론하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논거와 논리들 가운데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들은 취합하여 드러난 문제나 아직 알지 못하는 단점들을 보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완벽한 것도 없다. 그런 만큼 더 주의를 기울이고 항상 의심하며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처칠도 히틀러에 뒤지지 않는 문제 많은 정치인이었지만 최소한 처칠은 그런 것들이 되었고 히틀러는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영국과 독일 양국의 운명이 갈렸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 말했는가?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사과하라. 이런 논쟁을 하게 된 자체에 책임을 지고 반성하라. 그래서 객관식 시험이 위험하다 말하는 것이다. 정답 외에는 틀린 것이다. 하나의 정답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틀린 것이다.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승자와 패자를 통해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 승자는 옳고 패자는 틀렸다. 승자는 옳고 패자는 틀렸으므로 패자가 처음부터 그같은 주장을 한 자체도 잘못된 것이다. 처음부터 사람들은 옳은 한 가지 주장만을 했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절대 틀리지 않는 한 가지 주장만을 모두는 해야만 한다. 그것이 파시즘이다. 최소한 결과가 아닌 미래에 대한 예측에 있어 완전히 옳은 주장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때로 갈등하며 투쟁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이 끊임없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하며 더 나은 결정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며 단점이다.


사실 체제의 효율만 놓고 본다면 민주주의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은 제도다.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데도 어쩌면 불필요해 보이는 많은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저 결정권자가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직접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 참여시켜 수도 없이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고 표결까지 해야만 한다. 그러고서도 다시 정해진 절차를 밟으며 유예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혹시나 모를 독단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사회 전체가 나눌 수 있다. 아마 이번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과 관련한 공론에 참여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원전과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너무 등한히 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태한 이들의 민주주의는 중우정치가 되지만 적극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뒷받침된다면 집단지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그다지 설득력 없고 그래서 틀린 것으로 여겨지는 주장이라도 언젠가 다시 재발견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지금은 단지 막연한 우려이고 불확실한 예측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미 일어나고 난 뒤에는 늦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대립하는 의견과 주장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것까지 충분히 고려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공론이 가지는 의미다. 수많은 반론과 재반론을 통해 오류를 최소화하고 만에 하나 있을 문제들에 대한 보다 확실한 대안들을 찾는다. 그러고서도 혹시 모를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대비해서도 수많은 대비들을 세워 놓는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틀린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틀린 것처럼 보이는 의견이라도 상황이 바뀌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의견은 옳다. 다만 지금 현재 기준에서 더 나은 주장이 있고 더 괜찮은 의견이 있을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경우 어떤 변수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결론을 합의 아래 도출할 수 있다. 절차에 따라 합의된 결론은 권위를 가지고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이런 주장도 있었다. 이런 우려도 있었다. 그러니까 설득해 보라. 설득하지 못하면 설득당해야 한다.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 그냥 원전이 좋다니까 건설하자면 건설하던 시대는 끝났다. 시민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시민 자신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를 위한 보다 철저한 준비와 논의가 필요하다. 고려와 대비들이 필요하다. 벌써 언론을 통해 몇 번이나 보도되었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원전사고가 일어났음에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었다. 더이상 그런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그것을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들과 다른, 그들과 배치될 수 있는 주장들이 아무때고 그로인해 힘을 얻을 수 있다. 더이상 자신들은 단 하나의 정의이고 선택이 될 수 없다. 위기감이다. 그토록 보수정치인과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경쟁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승자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승자일 수는 없다. 그 다양한 가능성에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여튼 객관식으로 세상을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옳은 정답만을 강요하며 나머지를 배제하던 문화에서 자란 탓일 것이다. 하나가 옳다면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 하나의 옳은 주장이 있다면 모두는 그 옳은 주장을 따라야 한다. 옳은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마저 틀린 것이 된다. 하기는 인터넷에서 논쟁이라는 것이 게임과 같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진다. 누가 더 대세고 누가 더 소수다. 거기서 만족감을 얻는다. 심지어 자존감마저 얻는다. 그러니까 자신은 그만큼 옳고 대단한 존재다. 그러니 너희들을 찌그러지라. 무릎꿇고 하자는대로 따르라. 다만 네티즌만 그러고 있으면. 심지어 한 나라의 국회의원들마저 자기들이 이겼다고 기세등등 사과까지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그 사고와 논리의 수준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이미 늦은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원전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는 필요했었다. 후쿠시마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고, 더구나 한국도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 시점에서 한 번 쯤 원전건설을 멈추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가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원전건설을 거부당할까봐 지금껏 회피해 온 결과가 이번의 공론회였던 것이다. 결과는 그들의 우려와 달리 탈원전은 추진하되 당장은 원전을 건설하자는 절충적인 것이었다. 급하지 않게 완만하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무엇을 걱정했던 것일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한심하다.

최초의 권력은 권력자 개인의 것이었다. 지배아래 있는 모든 토지와 인민은 지배자 개인의 소유였다. 아무나 잡아다가 고문해서 죽이고 노예로 팔아넘기더라도 그것은 지배자 개인의 권리에 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못살겠다. 피지배자들이 들고 일어나 지배자에게 항의하고 때로 지배자를 죽이거나 내쫓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지배자 개인만이 아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의 영역이 생겨난 것이었다.


세금도 처음에는 지배자가 자기 임의대로 매겼었다. 정확히는 모든 생산을 지배자가 모두 거두고 일정량을 피지배자에게 나누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예 모두 거둬가고 나눠주는 대신 생산자의 소유를 인정하고 그 가운데서 세금을 걷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진보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언제 얼마의 세금을 거두는가는 오로지 지배자의 권리에 속했다. 국왕이든, 아니면 지방영주이든 법이 정한대로 피지배자들은 고분히 세금을 내거나 아니면 반항하다가 죽거나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지고 있었다. 그리 오래지도 않다. 그마저도 못하겠다고 들고 일어난 것이 마그나카르타이고 프랑스의 삼부회였던 것이다. 세금을 거두려면 우리의 동의를 받으라.


군대도 지배자의 사병들이었다. 병사들은 오로지 자신을 고융한 지배자에 대해서만 사적인 충성을 바쳐야 했다. 물론 그에 따른 보상도 충분히 주어졌다. 많은 유럽의 군대들이 그래서 당시까지만 해도 용벙으로 이루어졌고 그 용병을 유지하는 재원이 국왕의 개인금고였다. 병사들로 하여금 국민을 살해하고 약탈토록 하는 것도 그래서 얼마든지 가능했다. 아니 아예 전쟁이 일어나면 고용주의 영토 안에서도 얼마든지 권리로써 마을을 약탈하여 모자른 급여와 보급을 벌충할 수 있었다. 30년 전쟁 당시 독일을 약탈한 것은 스웨덴과 프랑스의 군대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더 많은, 더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군대를 요구하는 지배자들에 의해 국민개병제가 시작되면서 바뀌게 되었다. 국민의 군대는 국민의 소유이기도 하다. 계몽군주란 그같은 군대와 국민을 지배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던 것이다. 국민의 국왕은 오로지 국민의 편이다.


왜 이런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가. 지금도 사실 마찬가지다. 권력자의 권력은 개인의 사유물인가. 아니면 공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으로서 누리는 권위와 권한은 대통령 개인의 것인가, 아니면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한 국민의 것인가. 여전히 권력의 사유를 인정하면서도 그에 따른 권력자 개인의 공적 책임을 강조했던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일찌감치 그 부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국왕의 사생활조차 국왕 개인의 소유가 아니어야 한다. 아예 국가재정을 국왕 개인의 금고를 특별히 분리해 사고하지 않았던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와 달리 조선왕조 내내 끊임없이 사대부들에 의해 왕실재정인 내탕금의 국고화가 추진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국왕이 개인이 아닌데 국왕의 재산 또한 원래 나라의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국왕을 나라의 재산으로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자식들까지 가르치고 출가시키는데 쓰고 있지 않은가. 땅위에서 난 모든 것이 백성들의 것인데 그로써 영화를 누리는 국왕이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국정원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군의 기무사나 사이버사령부에서 그런 것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국가권력을 정권과 정권을 둘러싼 이해집단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것을 밝히고 처벌하는 것은 정치보복이다. 사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어지간한 정치선진국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권력은 단지 권력자 개인의 사유물인가. 권력자 개인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권력의 사유화를 허용한다. 심지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권력을 가졌으니 자기 마음대로 한다. 그래서 지난 정부 아래에서 정권이 언론을 부정하게 장악하고 사유화한 것에 대해서도 승자이니 당연하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현정부에서 언론을 마찬가지로 사유화하려 해도 절차를 밟으라. 이전에 사유화한 것은 당시 승자들의 권리였으니 이제와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적폐청산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의 실체인 것이고, 어쩌면 바로 이런 것들이 청산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적폐 그 자체인 것이다. 간단한 예다. 청탁을 왜 하겠는가? 국회의원이 굳이 자신이 국회의원임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에게 청탁같은 것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기자가 자기가 기자라는 이유로 취재대상으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받는 것은 기자라는 자신의 직업을 사유화하려는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와 역할, 가치 등을 개인의 사적 이익과 교환하려는 것이다. 국가에서 임명한 공무원이니까. 국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지금의 자리에 임명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를 이용해서 기업이나 개인을 협박하고 그로부터 대가를 받아내려 한다. 그러니까 박근혜도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이명박도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원래 권력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적폐청산에 대한 두 가지 첨예한 입장은 이같은 현실을 보는 서로 다른 시각에서 비롯된다. 적폐라는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것들이 적폐라는 인식조차 없다. 오히려 공무원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뇌물을 받지 않으면 분노하는 경우마저 있다. 기자가 자기가 주는 금품과 향응을 거부하고 의도한대로 기사를 써주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며 증오를 드러내는 경우마저 적지 않다. 국회의원 쯤 되면 자신의 권력을 얼마쯤은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자신을 위해 나누어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가. 그런 것들을 들추고 문제삼아야 하는가. 심지어 처벌해야만 하는 것인가. 다행이라면 첨예하지만 매우 일방적인 비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일 게다. 그럼에도 국가권력은 개인에게 사유되고 전유되어서는 안된다.


아마 그래서 적폐청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면 개인의 권력에 대한 인식이나 입장도 어느 정도 근사치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권력에 가깝다면 더 그렇다. 정치인으로서 권력자가 권력을 사유하여 문제가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하려 하는가. 처음부터 바른정당을 믿지 않았고 국민의당을 혐오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승민과 안철수가 하는 말들을 가만 들어보라. 사실 지지율이 나오지 않는다고 이념이나 성향의 차이도 아랑곳않고 공학적인 야합부터 고민하는 자체가 정당을 자신들의 사유물이라 여기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선택하면 지지자는 따라온다. 자기들이 결정하면 지지자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목적을 위해 만든 자신들의 정당이다. 그 짧은 시간에도 알량한 지위와 신분, 권력을 이용해서 국민의당 안에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가.


어차피 인간의 역사에 완결이란 없다. 항상 과정이다. 사유화된 권력으로부터 공공의 수단으로서 권력의 개념을 바꾸기까지 수많은 희생과 노력이 있었고 아직까지도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권력이 임의로 여성들을 자신의 욕망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 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적폐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폐단들이다. 아마도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 중대한 고비다. 지워진 짐이다.

문득 떠올랐다. 2차세계대전의 A급전범들을 야스쿠니신사에 쳐넣으면서 일본인들이 내세운 명분이 있었다.


"도쿄 전범재판은 단지 승자의 보복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도쿄 전범재판은 승자인 연합국이 패자인 일본을 벌하기 위한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들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고, 더구나 연합국 역시 전쟁동안 비슷한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처벌받은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 증거일 터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친일파 후손들 아니라고 하는 소리가 어째 많이 비슷하지 않은가.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보다 연합국과 일본 사이의 승전국과 패전국이라는 관계에만 집중해서 이해하려 한다. 물론 연합국 군인이나 정치인 가운데도 처벌받아 마땅한 인물들이 없지 않지만 어찌되었거나 일본이 먼저 전쟁을 일으킨 이상 전쟁을 조기에 승리로써 끝내기 위한 행위로써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마저도 모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의 책임이다. 하물며 증거까지 명백한 전쟁범죄마저 그 관계로써 묻어버리려는 수작이라니.


선거에서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정확히 문재인이 자유한국당이나 국민의당에게 이긴 것이 아닌 문재인을 지지한 국민이 문재인을 반대하는 국민들과의 선거라고 하는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승자는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을 당선시킨 유권자들이고, 그 문재인의 행보에 환호를 보내는 국민 다수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한 지지가 야당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과반을 훨씬 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문재인은 단지 그같은 국민의 여론을 대신해서 집행하고 있을 뿐이다. 시비를 걸려면 그런 국민들에게 시비를 걸던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결국 적폐청산과 관련해서 안철수가 자기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이고, 그런 안철수를 지지함으로써 한경오로 대표되는 다수 언론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적폐청산과 관련해서 야당이 주장하는 정치보복을 그대로 옮겨 쓴 한겨레와 경향의 사설 등은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까지 가지게 한다. 하긴 80년대 치열하게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이들 가운데 아직까지 현장에 남아 뛰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안에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겉에서 보면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기는 억울하다 주장하는 것이야 모든 피의자들이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흔히 하는 말들일 것이다. 옮겨쓰기 전에 진짜 무고한지. 과연 얼마나 억울한지. 아예 자료에 접근조차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진짜 언론이 적폐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내뱉을 수 있어도 그 쓰레기를 고스란히 사람들 귀에 옮겨놓는 것은 언론의 책임일 테니까. 한심한 것이다. 이래도 대한민국은 굴러간다.

그러니까 최소한 작년 12월부터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나머지 여야정당들을 향한 국민의 바람은 변화였다. 바른정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수성향이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박근혜나 새누리당 정권이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보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보수의 가치를 내걸고 주도적으로 이 나라를 올바르게 바꾸어 주기를 바란다. 차마 그렇다고 이념상 민주당을 지지할 수는 없다.


국민의당 지지층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새누리당은 싫은데 그렇다고 민주당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새누리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바라게 된다. 새누리당도 아니고 민주당도 아닌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를. 새 바람을. 새 가치를. 그러므로 누구보다 국민의당이 앞장서서 나라의 바른 변화를 이끌어야만 한다. 호남은 전통적인 야권의 구심이었고 안철수는 이 사회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런데 어떤가? 과연 지금 국민의당은 자신들이 말한대로 민주당과 경쟁하며 과거의 적폐들과 싸우고 있는가. 더 선명하게 더 적극적으로 민주당이나 청와대보다 앞서서 적폐청산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그동안의 잘못들을 - 심지어 법을 어긴 범죄들을 밝히는 과정에서 정치보복이라는 그 대상들의 언어로써 민주당과 청와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저들과 똑같은 언어로써 민주당과 청와대가 적폐청산에 더 힘을 쏟아붓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야당으로써 적폐청산에 나서는 정부와 여당에 반대한다. 바로 이제는 폐기했지만 새정치와 새희망을 앞세워 지난 총선에서 정당투표 2위의 지지를 받았던 바로 그 정당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다.


오히려 대선이 끝나고 국민의당의 지지율이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도 한때는 유력대선후보였는데, 아니 바로 직전 대선에서 20%가 넘는 득표를 한 유력정치인이 당대표로 나섰는데도 지지율이 오르기는 커녕 소수진보정당인 정의당과 비교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과거 국민의당 지지층이 진정 국민의당과 안철수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어째서 당시 국민의당과 안철수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제 민주당과 문재인에 대한 지지로 돌아서고 있는 것인가. 전혀 고민따위 없이 그저 관성으로, 그보다는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감정만으로 오로지 그 앞을 막아서기에만 급급하다. 정치인이 자기 지지층이 진정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전혀 새롭지 않다. 그래서 반새누리비민주였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국민의당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새누리당은 싫은데 그렇다고 민주당을 지지하고 싶지는 않다. 새누리당은 사악한데 민주당은 그보다 더 멍청해서 기대하는 자체가 의미없다. 어째서 그랬을까? 이명박이 그리 나쁘고 박근혜가 그리 문제였는데도 어째서 민주당이 그 대안이 되지 못했던 것일까? 열린우리당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새천년민주당은 김대중 눈치라도 봤지 노무현 눈치도 안보게 된 그들은 정작 자신들에게 표를 준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고 있는가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니 지지층 떨어져나갈 때 대통령 탓이나 하고 당을 깨고 이름만 바꿔 새 당을 만드는 삽질을 반복한 것이다. 아직 김대중의 카리스마가 남아있을 때는 그래도 지지자들은 따라왔으니까. 그래서 어찌되었는가.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지금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지지자들이 좋아할지. 지지자들이 자신들에게 다시 표를 주게 될 지. 그렇다고 대중의 지지를 받을 자신이 없으니 정당을 운영하면서도 당원의 참여를 어떻게든 막으려 애쓰게 된다. 민주주의 정당이 진성당원들의 지분과 역할을 철저히 제한하려 나선다. 원래 국민의당이 떨어져나간 가장 큰 이유였다. 공천과정에서 당원과 국민의 의사를 더 많이 반영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대중들로부터 선택받을 자신이 없는 인간들이 어째서 선거에는 나가는 것일까? 그저 필요한 것은 민주당이라는 간판 뿐이다.


그렇게 정치해온 인간들이다. 그런 인간들에 둘러싸여 정치를 하고 있는 당사자다. 어차피 정치에 대한 대단한 고민같은 것은 없었을 게다. 새정치를 말하지만 새정치가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신념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다. 뚜렷한 목적과 지향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고단한 현실을 참고 견딜 수 있다. 고작 5년이다. 총선까지 고작 3년이다. 그마저도 하지 못한다. 조급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자리와 그가 가진 대단한 명예와 권력 뿐이다. 그런 인간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


바른정당도 내일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새로운 보수를 표방하지만 무엇이 새로운 보수인가 유승민 자신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유한국당 2중대다. 그나마 국민의당은 민주당 2중대도 못되고 있다. 그렇다고 대안도 되지 못한다. 민주당은 아니면서 국민의당이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있게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남은 것은 민주당과 문재인에 대한 반대 뿐. 안타깝게도 민주당과 문재인에 대한 지지와 기대는 여전히 높다.


농부가 땅을 볼 줄 모른다. 아니 아예 보려 하지 않는다. 물을 채워 벼를 심을 논인지, 아니면 채소를 심어 가꿀 밭인지조차 전혀 구분하지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무작정 씨부터 뿌리고 본다. 싹부터 틔우고 본다. 자신들을 지지했던 국민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자신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며 지지를 보냈었는지.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려면 당장 무엇부터 하면 되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지. 답은 없다. 고민도 없다. 의미가 없다.

하긴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만 내벌려두면 어차피 해온 일이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니 습관처럼 알아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윗사람이 나타나서 이러쿵저러쿵 캐묻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게 윗사람의 판단과 결정에 의지하게 된다. 무언가 지시를 내려주지 않을까.


관료화된 조직일수록 더 그렇다. 책임소재가 걸린다. 그리고 책임소재는 인사와도 직결된다. 자칫 윗사람에게 잘못보였을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더 나은 의미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다. 자기보다 더 많이 알고 더 크고 많은 권한도 가지고 있다. 윗사람의 지시를 따르면 자기가 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청와대에서 전화가 걸려온 시점에서 청와대의 지시와 명령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이 일방적으로 바뀌기 전까지 청와대 안보실장이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상황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 청와대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다 올바르고 정확한 지시를 내릴 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청와대에서 곧 지시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기다려보자. 그렇다면 평소 교육받고 훈련받은 것들이 있을 것임에도 해경이 구조에 소극적이었던 이유가 비로소 납득이 간다.


당장 눈앞에 구조해야 할 사람이 있지만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 하던대로 사람을 구출해야 하지만 보다 올바르고 정확한 지시를 내려야 할 당사자가 상황을 파악하려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최소한 내가 즉석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그 지시를 따르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그래야 책임도 덜고 공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도 있다. 그런데 청와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억울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해경도 잘한 것은 아니다. 일단 배가 침몰하고 있다면 사람부터 살리는 것이 무조건 옳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가 그렇지 않다. 특히 권위에 의존하는 인간의 본성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이성으로 쉽게 제어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때 청와대가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설사 알더라도 굳이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면 그때는 어땠을까?


아무 책임도 의지도 없는 인간들이 그저 윗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의미없이 상황을 묻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윗사람은 아다시피 아무것도 않고 있었다. 기다림은 무한하지 않았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가고 모두가 아는 그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직도 세월호가 지겹다는 사람들이 있다. 유력언론까지 나서서 대통령이 뭘 할 수 있었겠는가 따져묻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때 상황을 묻던 전화로 단 한 마디만 했었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승객들을 모두 구할 수 있도록 하라."


어쩌면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해경들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던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 한 마디를 듣고자 그 다급한 상황에 더 다급하게 상황을 묻는 전화를 붙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할 수 있지만. 끔찍하다.

예를들어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고 싶다. 그래서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읽어주려 한다. 최신 이론에 학설이니 아이들은 그만큼 역사에 대해 더 많이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사업을 하는데 아랍쪽 바이어와 계약을 맺을 일이 있다. 그런데 아랍 바이어가 한국말도 영어도 하지 못한다. 그러면 한국말도 영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랍 바이어를 탓해야 할까? 그보다는 바이어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도록 유능한 통역부터 구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언론에도 이념과 같은 자기정체성이 중요하다 말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읽히려는 것일까? 누구더러 보고 듣고 이해하라 기사를 쓰고 내보내는 것일까?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당연히 그 언어는 노동자의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자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들과 같은 입으로 사실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원래 선동이라는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어휘를 찾아내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반드시 진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그것을 진실롤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그것을 진실로 믿고 자신이 의도한대로 움직일 것인가?


레닌 사후 후계자로 유력했던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패해 도망치듯 소련을 떠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스탈린은 당시 소련의 지배층과 대중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보다 직접적인 이야기를 쉽게 단순화시켜 들려주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소비에트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면 소련의 인민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만을 간결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트로츠키는 너무 똑똑했다. 지나치게 영리했고 많은 것을 알았다. '개구장이 스머프'에서 똘똘이가 매번 스머프들에게 배척받는 이유도 그가 틀린 말을 해서라기보다 장작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다른 스머프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언어만을 고집했다.


원래 대중의 속성이란 그렇다는 것이다. 굳이 일부러 연설하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그의 언어까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기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에 직관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자기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 굳이 애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자신이 대상으로 여기는 대중의 언어에도 역시 능통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의도한대로 설득될 것인가. 그러니까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정신연령이 남들보다 낮아서 초등학교 학생들의 언어를 따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문이란, 언론이란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위해 쓰여지고 만들어지고 보여지는 것인가.


대중의 자신들의 언어를 굳이 이해하려고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다.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자신들의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선택한 언어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나는 옳다 여기는데 대중은 아예 관심도 없다. 나는 중요하다 여기는데 오히려 대중은 내가 틀렸다 말한다. 물론 나는 옳고 내가 판단한대로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대중에 알리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반지성주의라는 말 자체가 언론의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만을 위해 기사를 쓰는가. 고등학교는 그래도 마친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사를 쓰려 하는가. 겨우 한글이나 배우고 학창시절 내내 놀기만 하느라 기초적인 지식도 부족한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 이들이 읽을 것은 고려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부적절하고 잘못된 듯 보여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어떻게 올바로 설득하고 이끌 것인가. 확실히 자신들이 주장하는 그대로 문빠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어떻게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이 블로그서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썼던 경구일 것이다.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미치지는 말라. 바보가 되어 남들 바보짓을 따르더라도 바보짓을 지적하여 미친놈으로 내몰리지 말라.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가 하는 행동들이 좋아 트럼프가 하자는대로 대북제재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지지가 있고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을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대북관계를 만들어갈 힘을 가질 수 있다. 대화를 하든 무엇을 하든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갈 빌미를 가질 수 있다. 약해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고 두려워서 눈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더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자세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따라줄 것이기에 그렇게 자신을 낮추려는 것이다.


하긴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다. 남들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안다. 그런 자부심이 있다. 한낱 인터넷 논객들마저 자기가 어떤 대학을 나오고 어떤 책들을 읽었는가를 어떻게든 과시하고 싶어 티를 내며 글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을 들으라. 내가 하는 말들을 바로 알아들으라. 아니면 너는 멍청이다. 구제불능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기사를 통해 이루고픈 것이 무엇인가.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껏 이른바 한경오라 일컬어지는 진보언론들이 써온 기사들의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들 언론이 기사를 쓰고 읽히고픈 대상은 문재인 지지자들이 아니다. 설사 문재인 지지자들을 설득해서 잘못된 광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도 그 언어는 문재인 지지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언어여야 했다. 그런데 한경오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고 꾸짖는다. 그렇지 않아도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데 그것도 모른다고 오히려 핀잔주고 모욕까지 준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대로 한경오의 언어까지 억지로 배워가며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면 그들은 독자인가? 아니면 한경오의 하수인들인가?


조선일보가 괜히 신문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의 기사들은 쉽다. 간결하다. 그래서 더 속기도 쉽고 선동당하기도 쉽다. 그럴 주제도 능력도 되지 않는다. 신문이란 단지 자신의 지식자랑이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가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니 내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네가 잘못이다. 더구나 신문이란 자본주의 시장에서 재화이기도 하다. 신문을 사서 읽는 대중은 소비자이기도 하다. 욕쟁이 할머니다. 내 기사를 알아먹지 못할 거면 신문을 보지 말라. 차라리 그런 가오라도 있어야 할 텐데.


언론에 광고해서 얻는 수익보다 손해가 더 크다 여기면 광고도 중단하는 것이다. 어차피 언론이 자신이 알아먹을 수 있게 기사를 쓰지 않으면 굳이 사서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냉정한 자연의 법칙이다. 이익을 쫓고 손실을 피한다. 당연하게 진보언론인 한경오를 일부러 돈까지 지불해가며 봐주어야 할 의무는 대중들에게 없는 것이다. 읽어봐야 내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 굳이 보지 않으려 한다. 내 돈과 내 시간을 들여 봐야만 하는 신문이고 언론의 기사인 것이다. 마치 광고를 싣지 않고 구독을 끊는 것이 큰 잘못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지금 한경오가 특히 야권유권자들의 외면속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인 것이다. 과거 한경우는 야권 지지자와 같은 것을 보며 그들의 언어로써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한경우는 조중동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조중동이야 말로 이제 JTBC까지 포함한 진보언론의 대안이 되고 있다. 과연 자신들의 기사를 읽는 대중들은 어떤 모습의 어떤 언어를 쓰는 자신들을 바라고 그런 자신들의 기사를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소비할 것인가. 허투루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한국 신문시장의 절대적 지분을 이들 세 언론사가 나눠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한경오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떤 식으로 기사를 쓰고 읽히고 이해시킬 것인가.


한심한 것이다.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사꾼이 오지 않는 손님을 탓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장사꾼도 생산자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언론이니 가능하다. 자부심이 있다. 내가 옳다. 내가 정의다. 그러므로 나의 기사를 모두가 읽어야 한다.


어째서 한때 한경오의 강력한 우군이며 후원자였던 독자들이 이토록 매몰차게 그들을 외면하며 오히려 날선 비판까지 쏟아내는가. 같은 언어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라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한경오의 언어는 자신들의 언어가 아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들의 언어로 기사를 쓰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들더러 그들의 언어를 배우라 윽박지르고 있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전선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야권지지자 전체인가. 아니면 자신들과 언어를 공유하는 일부인가. 문재인 지지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대상으로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사를 쓸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니 욕을 먹는다. 먼저 저버린 것은 문재인 지지자가 아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한경오였다. 이제와서 그것을 반지성주의네 하며 매도하고 있다. 독자는 소비자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인간세상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이라고 예외는 없다. 어차피 조선일보는 진보적인 성향의 독자들이 잘 찾아읽지 않는다. 아니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조선일보를 필요로 하는 독자는 조선일보의 논조에 맞고 또 그것을 필요로 하는 보수성향의 독자들이다. 그를 위해서 때로 소수의 편에서 다수와 싸우려는 언론도 있을 수 있다. 다수로부터 욕먹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신념과 정의, 추구, 지향을 위한 것이므로 기꺼이 치를만한 - 혹은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그것까지 회피해서는 안된다.


자신들은 굳이 문재인지지자들을 위해 기사를 쓰려 하지 않는다. 문재인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불쾌할만한 기사를 때로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과장해서, 혹은 조작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인용해서 쓴다. 보수정권의 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리버럴정권의 편도 아니다. 그 지지자들과 명확히 가는 길이 다르다. 그런데도 문재인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그들 언론을 소비해주어야 하는가. 삼성에 적대적인 기사를 쓰는데도 삼성은 그런 언론에 광고를 주어야 하는 것인가. 언론전제주의다. 언론이 정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당연히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다.


발악이다. 자기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자기들은 옳게 비판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너희가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나쁜 놈들에게 신문이든 광고든 굳이 팔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바라보는 곳은 지금 비판하는 독자가 선 그곳이 아니다. 그마저 비판하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스스로 먼저 선택했고 그에 따라 주위에서도 자신을 위해 선택하는 것 뿐이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나를 위한 언론이 아니다. 내가 볼 만한 언론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진짜 성찰은 없다. 남탓이고 괜한 원망과 떼쓰기만 있을 뿐. 우스운 이유다. 

결국 야당들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유한국당은 정면으로 박근혜 구하기와 이명박 감싸기에 나서고 있었다. 바른정당은 처음 새누리당을 뛰쳐나오며 기세등등하게 외쳤던 명분을 뒤로 하고 현실적인 이유로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국민의당은 그냥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반대가 자신들의 정체성임을 입증했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발사도 띄엄하고 국내이슈로 넘어왔을 때 불과 몇 달 전 박근혜를 탄핵하라던 압도적인 여론을 떠올려보면 된다. 문재인 정부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닌데 이러다 적폐청산도 제대로 못하고 끝나겠다.


정작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야당 자신들이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닌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발목잡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야당들 자신인 것이다. 그래도 적폐청산에는 과거의 잘못들을 모두 치우고 난 다음의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있다. 적폐청산을 반대하면서 미래를 말하는 그들의 어디에 그들이 주장하는 미래가 있었는가. 그냥 과거감싸기다. 부정한 과거를 어떻게든 감싸고 끌어안으려는 것이다. 그야말로 과거지향이다. 80%가 넘는 국민들이 새로운 나라다운 나라를 바라며 거리로 나섰을 때 그들이 바란 대한민국의 미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 터다.


다행히 중요한 안보이슈도 북한과 미국의 극한의 막말리그 끝에 대화에 대한 시도가 언론을 통해 전해지며 그 강도가 상당히 낮아진 상태다. 인사를 비롯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이슈들 역시 시간이 흡수해 준 상황이다. 설사 그같은 이슈들로 인해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섰더라도 마음놓고 지지를 돌리기에는 그 대안이 전무하다. 그러면 문재인이 아니면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하다못해 그냥 방관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놈도 저 놈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냥 지켜만 보겠다. 그러기에는 오히려 야당들이 지난 몇 달 간 자신들이 열망해 온 그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 해도해도 저놈들이 너무한다.


한 마디로 야당이 뭣같아서 대안없는 지지가 문재인에게로 모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문재인이 잘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재인으로부터 이탈한 지지를 최소한 방관이라도 할 수 있도록 받아주지 못하는 야당의 현주소가 결국 다시 문재인에게 돌아가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면 된다. 어차피 그동안도 문재인에게서 이탈한 지지층이 야당의 지지층으로 흡수되지는 않고 있었다. 지지율은 거의 그대로였고 단지 문재인의 지지율만 조금씩 올랐다 떨어지고 있었다. 야당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처참한 현실인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자체가 그들의 현주소다. 

문재인은 자기 뿐만 아니라 주위까지 함께 바꾸고 있었다. 스스로도 정치인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주위의 기성정치인들 역시 자신과 같게 바꾸려 노력하고 있었고 그 결과 민주당까지 환골탈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냉소로 지켜보던 유권자들마저 일신한 모습에 지지로 돌아설 수 있게끔 전혀 새로운 민주당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반면 안철수는 정작 새정치를 하겠다면서 자기가 먼저 기성정치에 물드는 모습부터 보이고 있었다. 굳이 폭탄주까지 마셔가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는 없을 것이라더니 자기당 존재감 보이겠다고 헌법재판소장 후보를 낙마시킨 것을 자랑삼고 있었다. 기성정치인들과의 친목질에, 말바꾸기에, 보여주기식 연출정치까지. 오히려 안철수가 기성정치인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을 아마 강철수라 부르며 지지자나 언론은 칭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철수가 잘하고 있다.


이제는 잊혀진 안철수의 정치구호 '새정치'에 대해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다. 한 사람은 주위를 바꾸고 한 사람을 자신을 바꾼다. 한 사람은 굳이 새정치를 말하지 않아도 주위가 자신을 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도록 지탱하며 이끌고, 다른 한 사람은 주위의 구태에 따라 자신을 맞춰 바꿔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역설일까? 뻔한 이야기일까? 우스운 이유다.

근대 사유재산제도란 모든 사물의 소유관계에 대해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이건 누구 것이다. 저건 누구 것이다. 그것은 누구와 누구의 공동소유이다. 오로지 나의 소유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모든 사물은 나의 권리 바깥에 존재한다. 타인의 소유를 침해하거나 교란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로 간주된다.


오래전 산이나 들, 강과 바다에는 소유주가 따로 없었다. 당연히 그런 것들은 모두의 공동소유라 여겨지고 있었다. 내 마을의 산이고 내 동네의 들이고 내가 사는 인근의 강이며 바다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어느 순간 소유주가 특정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인클로저란 전통적으로 농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공유지에 대해 지주가 일방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면서 농민들을 내몬 것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산에도 들에도 강에도 바다에도 어느새 하나나 혹은 그 이상의 소유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국가가 그 소유를 대신하기도 한다.


도토리와 밤은 대개 산에서 난다. 그리고 산은 또한 누군가의 소유인 사유지인 경우가 많다. 사유지가 아니라면 거의 국유지다. 다시 말해서 산에서 흔히 나는 도토리와 밤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주인이 있다는 소리다. 자기 소유의 산이나 숲에서 난 도토리와 밤이라면 당연히 자기 소유가 된다. 그런데 남의 소유인 산과 숲에서 난 도토리와 밤이라면 당연히 그 산과 숲을 소유한 소유주의 것이어야 한다. 절취다. 그래서 대부분 산이나 숲에서 보면 함부로 밤과 도토리, 나물 등을 채취해가지 말라고 경고가 붙어 있다. 이 산과 숲을 소유한 권리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당연히 입산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어기는 사람들이 많으니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다람쥐나 청설모의 먹이가 부족한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의 산이다. 남의 숲이다. 당연히 남의 것이다. 그런데 깡그리 무시한다. 산이니까. 숲이니까. 모두의 것이니까. 정확히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채 익지도 않은 밤마저 남이 가져갈까봐 억지로 나무를 차고 두들겨가며 밤송이를 떨어뜨리고는 한다. 더구나 도토리는 여물지 않으면 떫은 맛이 강해 해먹기도 고약스러운데 그마저도 악착같이 마대까지 동원해 싸들고 간다. 만일 그것이 진짜 자신의 소유이고 자신의 권리 아래 있었다면 그런 가치도 없는 상태로 억지로 거둬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모두의 것은 아무의 것도 아니며 따라서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의식이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저 산에서 숲에서 들에서 바다에서 나는 것이니 모두에게 권리가 있고 나에게도 권리가 있다. 현실이 이미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강이나 바다에서도 물고기를 잡으려면 면허가 있어야 한다. 면허 없이 함부로 바다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채취했다가는 법적인 처벌도 받을 수 있다. 사실 산과 숲에서 열매를 함부로 따가는 것도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신고만 하면 아마 2000만원 이하 벌금이나 7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 될 것이다. 이미 법으로 처벌해야 하는 중대한 범죄로 국가가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단지 다람쥐나 청설모 때문이 아니다. 토끼나 멧돼지같은 야생짐승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배타적인 권리 아래 있는 그의 소유이며 그 권리를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그러므로 법적인 강제를 통해서라도 그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근대국가의 원칙과 상식을 위한 것이다.


떨어진 것 한두알 가져가는 것이야 누가 뭐라겠는가. 어차피 등산로에 떨어진 것은 다람쥐가 주워가기도 상당히 곤란한 것들이다. 하지만 굳이 등산로까지 벗어나서 아예 산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금전적인 이익까지 기대하며 채취해가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엄밀히 그것은 절도행위에 해당한다. 신고만 하면 바로 처벌도 될 수 있다. 산과 숲에서 나는 것들이 진정 필요하고 그래서 반드시 얻어야 한다면 소유주와 직접 협상하면 된다. 허락이 있다면 그것은 절도가 되지 않는다.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그러고 있는가.


요즘 등산에 취미를 붙였다. 가까운 산을 오르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역시나 등산로를 벗어나서 밤과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보인다. 떨어져 있는 밤송이를 보면 진짜 밤톨 하나 크기도 안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아직 한국사람들은 가난하다. 남의 물건과 내 물건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비루하고 비천하다. 아무의 것도 아니기에 내가 먼저 가져간다. 그깟 먹지도 못할 덜 여문 밤이며 도토리까지. 반드시 필요해서가 아니다. 먼저 가져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갈 테니까. 그것은 자신의 손해가 되니까. 뒤쳐지는 것은 지는 것일 테니까. 


굳이 집어가는 사람들더러는 뭐라 말하지 않는다. 설득이 되지 않는다. 그마저 자신의 권리다. 자신의 땅도, 자신의 산도 숲도 아닌데 당연한 자신의 권리로 여긴다. 조용히 산에 들어가기 전에 연락처 확인해서 신고하는 것을 추천한다. 다람쥐와 청설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산과 숲을 소유한 진짜 주인의 권리를 위한 것이다. 국유지라면 나 역시 주인이다. 내 것을 훔쳐간다. 화내도 된다.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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