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KOKO라는 파생상품으로 인해 한창 사회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물론 상품 자체도 비대칭적 손익구조로 문제가 적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환율이 모두가 예상한대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면 그렇게까지 크게 문제가 커질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만수의 몇 마디 말이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 버린다. 고환률이 수출에 유리하다며 환률에 개입할 것처럼 섣부르게 말을 꺼낸 탓에 환률이 급등하면서 옵션으로 인한 손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환률이 오르면 같은 값에 수출해도 더 많은 이익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이익을 넘어선 손실로 많은 중소기업들이 흑자도산하는 상황마저 벌어지고 말았다. 갑작스런 환률의 변화가 가져오는 폐해 중의 하나다.


전근대 조선에서도 전황이라는 폐단이 적잖이 일어나고 있었다. 열심히 돈을 찍어 시장에 푸는데 정작 몇몇 세도가들이 그 돈을 독점하느라 시장에 돈이 돌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은 원래 구리가 귀했다. 조선에서 몇 차례 화폐의 유통을 정착시키고자 돈을 찍어 시장에 풀어도 심지어 그 구리를 녹여서 생활도구를 만들어쓰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 화폐로 쓰기에는 구리가 나지 않는 조선에서 화폐의 소재인 구리의 가치가 너무 높았다. 중세말에도 그래서 유럽에서 금의 수요가 너무 높아진 탓에 금을 구하기 어려워져서 자칫 화폐경제가 무너질 뻔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것을 해결해 준 것이 바로 지리상발견이었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막대한 금이 비로소 늘어는 금의 수요를 충당하며 유럽의 경제를 지탱했던 것이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더 가치있는 돈을 확보하고 가치가 떨어지는 돈을 시장에 유통시킨다. 비슷한 개념이다.


지금 세계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달러다. 정확히 지금 미국이 기록하고 있는 막대한 재정과 무역의 적자인 것이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되기 전 세계는 주기적인 공황을 겪었었다. 금본위제 아래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필연과도 같은 것이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화폐에 대한 수요는 늘고 그에 비해 화폐의 단위가 되는 금의 양은 그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그때마다 화폐가치는 불안해지고 시장은 동요하고 마는 것이었다. 한때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뒤에도 같은 위기를 겪을 뻔한 적이 있었지만 아예 태환을 정지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력과 신용만을 담보함으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즉 미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이상, 아니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하는 이상 자신들이 발행한 달러의 신용과 가치를 미국 그 자체로써 담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그 신용과 가치가 유지되는 달러라고 하는 자본주의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현물가치와 상관없이 무한정 찍어내면서도 그 가치가 보장되는 달러라고 하는 기준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며 지금과 같은 지속적인 번영과 발전이 가능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같은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원래 화폐의 가치라는 것이 그렇게 안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화폐의 가치가 너무 높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낮기도 한다. 그래서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도 그래서 화폐의 폐단에 대해 지적하는 상소가 적지 않았었다. 화폐의 가치가 변동하는 것을 이용해서 돈 많은 놈들만 이익을 본다. 화폐를 가지지 못한 다수 농민이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당시에도 일정하게 가치가 보장되는 안정적인 화폐에 대한 수요가 적지 않았었다. 중세 유럽에서 자국의 화폐가 아닌 아랍에서 발행한 디나르화를 결제수단으로 더 선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지금은 달러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엔화가 떨어지고 원화가 오르는 것이지 달러 자체의 가치가 변동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부터가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본이 일정한 가치를 가지면서 생산수단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화폐가 일정한 가치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화폐를 교환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과 같다. 화폐의 가치라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화폐보다 현물을 더 선호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절대화폐라는 금이다.


지금 사람들이 가상화폐라 불리우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에 몰려들어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이유도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일단 시장에 돈이 너무 많다. 돈이 너무 많아서 돈으로 돈을 불리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적당한 투자처가 없다. 그래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와 같은 것도 일어나고 있었다. 투자할 곳이 없으니 투자할만한 곳이 있으면 갈리지 않고 뛰어든다. 그만큼 현재의 화폐체계가 불안하다는 뜻도 된다. 현재의 화폐를 대신할 대안으로서 가상화폐에 주목하게 된다. 언젠가 가상화폐가 진짜 화폐처럼 현실에서 쓰이는 날이 올 것이다. 문제는 만일 글렇게 가상화폐들이 현실에서 교환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게 될려면 가치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하루에도 몇 번 씩 널뛰듯 가치가 바뀌어서는 위에 언급한 문제들이 불거질 뿐이다. 당장 지속적으로 비트코인의 가치가 오르는데 그것을 교환의 수단으로 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오늘 비트코인으로 피자를 사먹으면 내일 비트코인이 오른 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런데 한 편으로 그렇게 가치가 크게 오르지 않는다면 비트코인에 투자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미술시장과도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미술작품의 가치란 작품 자체의 가치 뿐만 아니라 미래의 투자가치를 포함해서 결정된다. 일단 사서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떻게든 값이 오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미술시장에도 거품이 낀 적이 있었다. 아직도 그 거품이 모두 걷힌 것이 아니다. 다행히 미술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다. 금처럼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냥 자기들끼리 얼마다 결정하면 그것이 미술작품의 가치가 된다. 그렇게 서로 돈을 주고받으며 미술작품의 가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곤 했었다. 하지만 더이상 투자대상으로서 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졌을 때 미술작품들은 도리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나마 미술작품에는 그럼에도 투자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졌어도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은 남게 된다. 가상화폐에는 그럴 경우 무엇이 남게 될까?


가상화폐가 가진 불안요인은 둘이다. 사실은 둘이지만 하나다. 지금처럼 가치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로는 실제 화폐로써 교환수단으로 사용하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시장에서 실질가치를 가지기 어렵다. 반대로 시장에서 실질가치를 가지는 교환수단으로서 쓰이게 되면 지금처럼 가치가 요동치지 못하게 된다. 투자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가치가 올라야 하는데 그러면 정작 시장에서 화폐로써 실제 가치를 갖는 교환수단으로 쓰이지 못하고 만다. 투자가치가 아니게 되거나, 시장에서 실제 가치를 가진 교환수단으로 쓰이지 못하게 되거나. 무엇보다 금과 마찬가지롤 가상화폐는 총량이 제한되어 있다. 어째서 달러가 불태환화폐가 되었는가 저 한참 위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도 가상화폐는 시장에서 실제 가치를 가진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돈이 너무 많다. 시장에 돈이 너무 넘쳐나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상당한 돈이 꺼져버린 상황에서 다시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너무 많은 돈이 시장에 풀리고 말았다.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 자본주의인데 돈은 많고 투자할 곳은 없다. 마르크스가 말한 이윤율의 하락일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넘쳐나는 돈을 투자할 곳을 찾아 아무데든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도 여전하다. 즉 돈이 넘쳐나고 돈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과거 미술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한동안 가상화폐의 가치는 지금처럼 상승하며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꽤 지금의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는 편이다. 그만큼 현재 자본주의 시장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 우려는 너무 먼 이야기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고작 몇 년 전이었다. 북한에서 핵실험을 해도 정작 정보기관인 국정원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확인받고서야 비로소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정부기관조차 해외언론에서 먼저 보도가 나오면 그제서야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사실을 인지하고 거의 수선이나 피우는 정도가 전부였었다. 그래도 북한과의 관계가 경색되며 정보를 얻던 북한내 인적라인이 차단된 때문이라 핑계삼을 수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국정원으로서도 그 사실을 사후에라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북한에서 몇 차례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까지 하는 동안 국정원은 사전에 첩보를 입수하여 정부가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전에 한국 정부는 미군과 협의 아래 마주 미사일을 발사할 준비까지 모두 마치고 있었다. 전투기 한 대 띄우려 해도 만전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미사일을 한 발 발사하려 해도 정해진 절차를 충실히 밟아야 한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만에 전투기가 떠서 폭격훈련을 하고, 미사일은 해상을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딴 짓 않고 오로지 북한의 상황에만 집중하여 작은 조짐까지 놓치지 않고 미리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던 탓이다. 그러면 그동안 국정원이 뒷북만 치며 한심한 꼴을 보여 온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자신이 곧 국가였다. 국가란 곧 자신의 소유였다. 권력일란 자신의 사유물이었다. 마음대로 해도 좋았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권력을 사용했고 국가기관까지 이용했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를 심지어 상납받아서 사적으로 유용한 사실은 그래서 전혀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이미 국정원은 사유화된 권력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정권의 목적과 권력자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정보기관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 결과 정작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한의 정보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한 심리전 활동이라 할지라도 당면한 북한의 핵문제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었다. 당장 북한에서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는데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면 정보기관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그 미사일이 대한민국 영토로 날아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도 댓글로 그것을 막을 것인가? 자기가 진짜 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정확히 국정원 직원들은 알았겠지만 국정원을 사유화한 권력은 그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자유한국당이 주장하는 안보의 실체인 것이다. 지금도 주장한다. 아무 잘못도 없었다.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충 가볍게 덮고 넘어가자. 북한은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데 국내정치에 개입해서 댓글이나 달아댔던 사안에 대한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하고 미사일을 쏘는 중대한 정보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고 주권자인 시민을 사찰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한 행위에 대한 것이다. 심지어 사법과 행정, 언론 등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국가기강의 문제다. 이런 식이라면 더이상 정보기관으로서 국정원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국정원의 존재이유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다시 국정원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대로,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있는대로, 그러므로 국정원의 원래 이유와 역할에 대해서는 또 그대로. 그러니까 국정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국정원이 해야 할 진짜 역할이 무엇인가.


그래서 책임을 묻는 것이다. 국정원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지 못했다. 엉뚱한 짓을 하느라 정작 원래의 임무를 저버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국가에 큰 해악을 끼칠 뻔했었다. 북한이 미사일을 한국 영토로 발사하지 않은 것을 국정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한 번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고, 따라서 정부 역시 사전에 대비하지 못했다. 해외 언론이 호들갑떨고서야 뒤늦게 수선피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안보 운운하며 국내정치를 위한 색깔론으로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했었다. 그것이 그동안 국정원이 말하는 안보였다. 이대로 좋은 것인가?


자유한국당이 주장하는 안보인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핵실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북한 정권 내부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굳이 사전에 알 필요도 없다. 주적일 터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북한 정권 내부의 정보는 곧 대한민국의 안위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뒤로 미뤘다.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런 때 쓰라고 준 예산마저 마음대로 전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안보를 말하며 그런 행위들을 봐주자 말한다. 무엇이 과연 진짜 안보인가? 이런 뻔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모른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정권이 교체되어 정말 너무 다행인 것이다. 끔찍하다.

아주 오랫동안 여성이란 단지 자궁에 지나지 않았었다. 오로지 번식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였다. 여성의 가치란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한 가지에 있다고 봐도 좋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당하고, 심지어 아이를 여럿 낳았는데도 그 성별만을 이유로 내쫓기는 경우마저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아내의 자격도 며느리의 자격도 어머니의 자격도 없다. 그들은 단지 자궁으로써 여성을 맞아들였고 가족으로 함께 살았던 것에 불과했다.


분명 모성본능이라는 것은 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태어난 순간 그토록 작고 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들이 자연의 엄혹함 속에서 무사히 자라 성체가 되고 지금까지 번성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고 장차 그 유전자를 후손에 물려주어야 할 존재이기에 어미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새끼들을 지켰고 보살폈다. 그 과정에서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고 희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한 편으로 새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어미들의 선택이기도 했던 것이다. 때로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면 어미들은 새끼를 죽이고 심지어 잡아먹기도 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상 보더라도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모성을 포기해야만 했던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었다. 펄 벅의 소설 '대지'에서도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갓태어난 아이를 살해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온다. 산업혁명 당시 유럽에서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들이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보살필 수 없는 아이들을 대신 살해해 줄 업자를 찾아나서기도 했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그래서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전쟁통에 부모가 죽어서 고아가 된 경우도 당연히 많았지만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부모들이 그냥 버리고 떠난 탓에 고아가 된 경우도 결코 적지 않았었다.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이야기도 가난하던 시절 팔아서 돈으로 바꿀 수 있었던 딸의 존재에 대한 자조적인 위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모정이란 여성에게 반드시 무엇보다 우선해서 지켜야 할 절대적인 가치일 것인가.


자궁이 아닌 인간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 자궁 안의 태아는 당연히 자신과 별개의 존재다. 자궁 안에 있는 동안은 자신의 일부지만 자궁에서 벗어난 순간 자신과 분리되어 존재하게 된다. 당장 자신의 삶이 있다. 자신의 목적과 지향과 가치가 있다. 자신이 살아야 하고 자신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 자신이 오로지 존엄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와 함께 그것을 이룰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이유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 더이상 자신의 삶도 존엄도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로지 모성이라는 한 가지만을 위해 끝까지 아이를 지키며 자신을 희생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이를 지키는 순간 자신의 삶에서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오로지 여성들에게만 지워진 의무고 책임이다. 낙태로 처벌받는 것도 오로지 아이를 임신했던 여성과 그 아이를 지워준 의사 뿐이다. 만일 모성본능이란 것이 진짜 있다면 어째서 여성은 낙태라는 선택을 했어야만 했던 것일까? 그나마 낙태라도 할 수 있는 시한을 놓치고 아무 대책없이 낳은 다음 직접 살해하거나 아니면 유기하여 죽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만일 그들에게 모성본능이란 것이 없어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라면 모성본능이란 사기일지 모른다. 여성을 아이에게 묶어두기 위한 가장 오랜 거짓말인 것이다. 모성본능이라는 것이 있는데도 그런 선택을 해야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낙태죄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이 그것일 것이다. 여성에게 자연이 부여한 모성본능이란 것이 있다면 어째서 많은 여성들이 그를 거스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러니까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경우 어미들도 새끼들을 죽이고 잡아먹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상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게 자신의 자식을 버리고 죽이며 생존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러면 그 진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어쩔 수 없이 임신한 아이를 지우고 그 충격으로 동거하던 남자와도 헤어진 경우를 알고 있다. 여성에게 있어서도 낙태란 상당히 큰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도 낙태를 해야 한다. 낳을 수 없으니까. 낳아도 기를 수 없으니까. 낳을 수도 있고 기를 수도 있지만 그를 위해 자신의 삶을, 심지어 존재를 포기해야만 하니까.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어야 할 테고, 하던 일도 그만두어야 할 지도 모르고, 지금까지의 인간관계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을 오로지 여성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혼자서 임신한 것도 아닌데 남성에게는 사실상 아무 책임도 부담도 지워지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에 대해 사회적인 도덕적 책임을 지우면서도 그에 대해서 사회도 국가도 크게 도움이 될만한 지원이나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갓태어난 아이에게 태어난 환경과 조건을 이유로 왜 태어났느냐는 소리를 걱정을 담아 내뱉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사회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을 아이와 산모를 위해서 정성스레 해 줄 수 있는 사회에서 그냥 무작정 어머니이니 아이를 낳으라 말하고 있다. 어째서? 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지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만이 그 모든 무게를 감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낙태죄를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존엄과 인권과 관련한 이슈로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 혼자서 임신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여성 혼자서 낳아서 길러야 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판단과 선택 역시 온전히 여성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낳을 것인가? 어머니로서 낳아서 끝까지 책임지고 기를 것인가? 아니면 일찌감치 포기할 것인가? 이미 아이를 낳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릴 많은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인가? 자궁마저도 온전히 여성의 소유라면. 태어날 아이도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이를 임신한 여성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배타적인 자신의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아니라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사회가 나눠지라.


간단하다.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데 있어 여성에게 아무 피해도 손해도 가지 않도록 사회가 나서서 책임을 나눠 지면 된다. 임신이 여성의 커리어를 단절시키지 않도록. 임신으로 인해 여성의 삶과 사회적 관계가 바뀌지 않도록.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존재에 조금의 위해도 가해지지 않도록. 임신하기 전과 뒤의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게 되었을 때 여성들도 자신의 뱃속의 아이와 끝까지 삶을 함께 할 각오를 다질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어머니로써 책임을 다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여성이 모성을 포기해야만 했던 많은 경우들이 사회적 맥락과 이유를 함께 동반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사회가 강요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임신하기 전과 뒤가 다르고, 더구나 아이를 낳기 전과 이후의 자신의 삶과 존재가 전혀 달라진다면 인간으로서 여성을 자신을 위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러니까 지금의 낙태죄란 여성을 단지 자궁으로써 태어날 아이를 위해 종속시킨 전근대사회의 야만적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이다. 자궁이 아닌 인간이다. 아이에 종속된 어머니가 아닌 독립된 인격이며 존엄으로서의 여성이며 인간이다. 몇 주부터 생명이고 인간인가는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미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여성 자신의 삶이고 존엄일 것이다. 어째서 여성만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삶과 존엄까지 포기해야만 하는가. 자신의 현재와 미래, 심지어 과거의 기억과 관계마저 모두 희생해야만 하는 것인가. 더구나 많은 경우 낙태는 여성만이 아닌 상대남성의 무책임에서 비롯되고 있기도 하다. 사회도 남성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데 여성만 책임지라 하고 있다.


여성은 단지 어머니이기만 한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여성은 단지 자신의 아이를 위해, 자궁의 태아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피임과 낙태가 여성이 인권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존적인 선택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낳기를 포기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자궁이란 단지 여성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는 이유다. 너무 당연하다.

썰전 보니 또 박형준이 헛소리한다. 하긴 박형준만이 아니다. 조중동, 한경오,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그리고 국민의당까지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이 되어서는 안된다. 법과 제도의 개혁이어야지 개인에 대한 처벌로 끝나서는 안된다. 그런데 법과 제도를 바로 고치려 해도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그에 대한 대안도 고민할 수 있는 것 아니던가.


더구나 문제가 그렇게 과거 정부에서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가를 알았을 때 이미 있는 현행법을 어긴 행위에 대해서까지 없었던 일로 덮고 넘어가야 할 것인가? 차라리 과거 어떤 문제가 있었고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고쳐야 하는가 먼저 자수해서 알린 경우라면 참작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고발자로써 그가 고백한 내용들을 다시는 그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바로잡는데 참고함으로써 그 기여를 인정한다. 원래 형사범들도 먼저 자수할 경우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정상을 참작해주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사실을 감추고 왜곡하려다가 수사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들통난 경우에도 선처해야만 하는 것인가.


'썰전'에서도 유시민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박근혜는 물론 이명박에 대해서도 먼저 사실을 인정하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라.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법과 제도를 개혁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라. 그러면 국민이 그래도 전직대통령이기에 선처를 요구할 수 있다.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로써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부정하지 않았는가. 끝까지 부정하며 버티다가 끝내 특검의 수사 결과 사실들이 밝혀지고 탄핵까지 당하지 않았는가. 이명박도 박근혜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자수하고 광복을 찾으라. 끝까지 버티다가 병사들에 잡혀 끌려나온 적의 군주는 동정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백성과 병사들의 목숨을 아끼려 스스로 죄인이 되어 항복했을 때 최소한의 명예와 지위나마 지켜질 수 있었다.


아무튼 웃긴 것이다. 그렇게 법과 제도를 바로 고치려면 먼저 자기들이 사실을 털어놓고 이런 식으로 법과 제도를 고치자며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던가. 실제 과거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것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법과 제도를 바로 고쳐야 한다고 당사자로써 자신들이 경험했고 또 알고 있는 바를 적극적으로 법과 제도의 개혁을 위한 수단으로써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런 말들을 해도 해야 한다. 그냥 있는 사실도 묻고, 밝혀진 진실마저 감춘 채 법과 제도막 막연히 고치면 과거의 잘못들이 바로잡혀 지는가. 최소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자체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책임을 묻는 정도는 필요하다. 선하게 바뀌는 것에 앞서는 것이 과거를 바꾸는 것임(改過遷善)을 알아야 한다.


하여튼 누가 MB의 측근 아니랄까봐 얼굴에 철판 정도가 아니라 열화우라늄을 겹겹이 깔아 놨다. 그래서 얼굴 무거워 들고나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부가 문제다. 전체 가운데 아주 일부가 문제일 뿐이다. 그 일부조차 군이, 그리고 정보기관이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위들이었다. 유시민이 잘 지적했다. 그렇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정당한 행위였다면 어째서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감추고 익명으로 댓글을 달고 있었던 것인가. 국가기관의 모든 행위는 공식적인 절차와 경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에 의거해서 철저히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유는 당연히 국가란 특정한 개인의 소유가 아닌 모두의 공동체인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원칙과 절차를 무시한 채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정체와 신분마저 감추고 국가의 권력을 사용하려 한다. 그냥 댓글 몇 개 단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들어간 모든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국민이 낸 세금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런데도 의도가 선하니 그런 부분들마저 봐주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니 MB정부에서 정무수석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은 아예 박형준 저 인간이 나와서 어떤 궤변으로 이런 명백한 사안들에 대해서마저 물타기를 하려 할 지 그것 하나 기대하며 보는 중이다. 굳이 다른 언론의 보도나 정치인의 발언을 찾아 볼 필요조차 없다. 거르고 거른 쥐어짜고 쥐어짠 논리가 많이 배운 지식인의 언어로 흘러나온다. 똥을 거름으로 쓰면 기생충이 들끓게 마련이다. 똑똑한 놈들이 원래 더 문제다. 혐오스럴 뿐이다.

전병헌 정무수석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다는 뉴스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물론 한 편에서는 소환일정조차 잡힌 것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었다. 무엇인가? 결국 아직까지 전병헌 정무수석의 혐의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이 입증되지 않은 상황이라 공식적으로 그 혐의사실에 대해 공표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측근들의 비리이지 아직 정무수석의 부정까지는 아니다. 그래서 언론을 통해 여론몰이를 시도한다.


전병헌 수석의 말이 옳다. 과거 노무현 때도 그랬었다. 명확한 혐의사실 입증 없이 언론플레이를 통해 여론부터 만들었었다. 언론을 이용해서 기정사실로 만듦으로써 여론재판을 시도하고 있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인에게 이보다 치명적인 것은 없다. 문제는 그런 검찰이 불과 며칠전 같은 검찰인 변창훈의 죽음을 두고 명예네 인권이네 떠들며 강압수사를 주장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변창훈은 여론몰이는 커녕 변변한 보도조차 없이 막 수사가 시작되려는 시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검레기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험만 잘 보는 쓰레기들이라 욕하는 것이다. 열심히 골방에 틀어박혀 출세하자고 공부만 하던 놈들이 권력과 지위를 손에 넣으니 눈에 뵈는게 없다. 전병헌 수석에게 하던 식대로라면 변창훈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으로 인한 것일 뿐이다. 변창훈에게 했던 것도 무리한 수사였다면 지금 전병헌 수석에게 하는 것처럼 명확한 혐의사실 없이 언론을 이용한 몰아가기는 잘못된 것이다. 그런 보편의 상식조차 없는 것은 자기들이 아주 대단한 선택된 존재라는 의식 때문일 것이다. 검사인 자신들은 저들과는 다르다.


확실히 때려부숴야 한다. 전병헌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아예 검찰을 뿌리부터 뒤집어 버려야 한다. 검사놈들이 다시는 저런 식으로 어깨에 힘주고 거들먹거리지 못하도록. 아예 검찰조직을 조각조각내서 저놈들이 다시 저런 식으로 특권의식으로 뭉쳐 행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검레기는 검레기였다. 검새는 검새였다.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확실히 검사는 검사다. 웃고 만다.

몇 년 전 화폐가치의 과잉에 대해 우려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실물가치보다 유통되는 화폐가치의 총량이 3배나 많다는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있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터지며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자본주의란 화폐 그 자체를 수단으로 삼아 생산을 하는 체제인데 정작 투자대상이 되어야 할 현물가치가 따라오지 못하니 결국 그런 무리수가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넘쳐나는 화폐가치를 소비해야 하고, 그 소비를 통해 또다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야만 한다.


최근 비트코인을 필두로 끝을 모르고 오르는 가상화폐시장을 보며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과연 비트코인이니 이더리움이니 하는 가상화폐들이 실제로 얼마의 가치를 가지는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 가상화폐가 얼마나 화폐로서 쓰일 수 있을 것인가 확실한 전망이나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그다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가상화폐로 몰려드는 이유는 돈을 불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침 돈은 있는데 그 돈을 불릴만한 마땅한 대상이 없다 보니 투자처로서 가상화폐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투자하면 오른다. 일단 사놓으면 가치가 뛴다. 그런 대중의 믿음이 가상화폐의 가치를 담보한다. 부동산 거품과 같다. 부동산을 사면 오른다는 믿음이 실제 가치와 상관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부동산에 투자하게 만들고 실제로도 부동산의 가치가 오르도록 만든다. 다만 그같은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나 일본의 버블붕괴처럼 대규모 공황이 찾아올 수도 있다. 실제와 믿음의 괴리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결국은 시간싸움이다. 거품이 꺼지기 전에 완벽하게 가상화폐를 현실화폐로 통합시키느냐. 가상화폐를 현실에서 실제 유통함으로써 실질가치를 가지도록 만들 수 있는가. 그렇게 되면 가상화폐는 더이상 투자가치가 아니게 된다. 지금 투자대상으로서 가상화폐가 주목받고 끝도 없이 가격이 오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불확실성에 있으니까. 어떻게 될 지도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의 가치를 가지게 될 지도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확실한 미래와 가능성을 보고 돈을 투자하게 된다. 잘되면 대박이고 안되면 쪽박이다. 물론 쪽박을 보고 투자하는 사람은 현실에 거의 없다.


가상화폐의 가치가 오를 것을 알면서도 감히 투자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이유다. 설사 가상화폐로 돈을 버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부러워하지만은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용기다. 나는 그런 불확실성에 무리하게 돈을 쏟아부을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차라리 그럴 돈이 있으면 국민연금에 더 넣어둔다. 그동안 납부하지 않은 국민연금을 추가로 더 납부해 둔다. 그에 비하면 그들은 그런 불확실성에도 위험부담을 기꺼이 감수한 탓에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다. 공짜가 아니라. 리스크가 크기에 이익도 큰 것이다. 그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으면 돈을 벌고 아니면 벌지 못한다. 나는 당연히 후자다.


과연 가상화폐의 상승세가 어디까지 이어질까? 원래 부동산의 가치라는 것도 떨어지는 그 순간에서야 비로소 거품으로 평가받는 법이다. 떨어지지 않는 이상 아무리 높아도 그것이 실제의 가치다. 부동산의 가치가 세계적으로 지속적으로 오르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결국 시장에 돈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남아돈을 투자하기에 가장 안정적인 대상이 부동산이기에 생산이 증가하는 만큼 부동산 역시 지속적으로 상승해 왔다. 시장에 돈이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투자해서 돈 벌 곳이 없다. 그러나 과연... 아직까지도 불안하다. 역시 믿을 건 연금이다. 소심하다.

사실 이른바 야동을 보는 사람 가운데 포르노업계의 어두운 그늘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모르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모를 수가 없다. 당장 포르노에 출연하는 배우들에 대해 인간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는다면 답은 금방 나온다. 물론 스스로 직업으로써 포르노배우를 선택한 경우도 적지 않을 테지만 다른 이유로 처음 업계에 발을 딛게 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야동을 많이 더 열심히 볼수록 자연스럽게 자신의 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럴 때 대부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바로 옆나라 일본의 이야기다. 스카우터에게, 혹은 소속사에게 속아서 잘못 계약을 맺은 탓에 포르노에 출연해야만 했던 여배우들의 이야기가 간간이 미디어를 통해 들려온다. 때로 사기로, 때로 유인과 약취로, 때로 협박으로,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르노에 출연하고 그로 인해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고 고통속에 살아가야 하는, 심지어 아예 삶을 포기하고 마는 불행한 경우마저 적잖이 듣게 된다. 그런 때 가장 먼저 들려오는 대답은 다름아닌,


"품번은?"


당사자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고 어떤 고통속에 살아가든 상관없이 자신은 그런 이슈마저 자신을 위한 더 큰 자극으로 여기려 한다. 그나마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경우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염치나 연민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조차도 결국에 그런 사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포르노산업을 위축시킬까 걱정되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 피해자에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업계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배우들이 그런 피해자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일부의 사례이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포르노합법화에 반대하는 이유다. 인간이 아니다. 그냥 대상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한 도구이고 수단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실제 인간인 포르노배우들이 어떤 일들을 겪고 그로 인해 어떤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는가는 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설사 어떻게든 들어 알게 되었어도 인간으로서의 존중이나 연민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욕망을 지키고 더 극단적으로 누릴 것인가 하는 고민만을 보일 뿐. 그리고 그것이 여전히 포르노산업에서 알게모르게 범죄와 불법들이 저질러지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포르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성매매에서 매매자가 아닌 매수자만을 처벌할까? 물론 성매매 역시 매매자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 성매매가 범죄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매매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나 억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 또한 현실에서 결코 적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까지 범죄집단으로 하여금 성매매에 집착하도록 만드는가? 그래도 상관없다 여기는 매수자들의 존재인 것이다. 전에도 썼던 고래고기나 개고기 문제와 유사하다. 아예 처음부터 금지했다면 고래의 밀렵도, 개도둑도, 마찬가지로 성매매를 위한 인신매매나 사기, 협박, 감금 등의 범죄도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란 것이다. 당연히 그래서 매매여성은 처벌하지 않아도 알선하고 대가를 챙긴 포주들은 엄격하게 처벌한다. 반면 성매매여성들은 그 자발성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판단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처벌에서 예외시킨다. 성매매의 비범죄화다.


비슷한 사례로 아동포르노가 있다. 아동포르노가 불법인 나라에서는 단순히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격하게 처벌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소유가 있으므로 생산과 유통이 있다. 아동포르노 제작자를 엄격하게 단속하는 것과 함께 아동포르노의 수요자들 역시 철저하게 처벌하여 시장 자체를 없애 버린다. 그렇다고 포르노 소비자들을 모두 법으로 처벌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아예 포르노 자체가 불법이라면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은 불법이라는 족쇄 정도는 채울 수 있다. 그만한 부담을 지면서까지 제작할만한 이익이 있는가 스스로 따져 묻게 된다. 역시 그렇더라도 포르노를 보는 수요자가 없다면 그같은 범죄들은 그나마 줄어들게 된다.


사실 한국이라고 아예 포르노의 불모지는 아니었다. 80년대 한국산 포르노가 세계에서 꽤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제작방식은 모두가 예상하는 그대로였다. 납치와 인신매매, 그리고 폭력, 강간, 바로 청계천 상가에서 비디오테이프로 만들어져 팔리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성인방송이 유행했을 때도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꽤 있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은 그런 기억이 없는 젊은 세대들인지 모른다. 포르노가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가를. 그래서 묻는 것이다. 그토록 포르노를 예찬하는 자신은 포르노배우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매매합법화를 주장하는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성매매가 당당하고 옳은 것이라면 성매매 여성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차피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하지도 못하고 멸시하고 차별할 것이라면 그런 대상을 만들어내는 일을 처음부터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믿고 인간이기에 존중해야 함을 안다면 그에 반하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매매여성을 멸시하면서 정작 그런 성매매여성을 만드는 성매매는 합법화시키려 한다. 포르노배우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지 못할 것이면서 그런 배우들을 만들어내는 포르노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합법화하려 한다. 모순이다. 원래 인간이 모순된 존재이기는 하다. 아무튼.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하긴 너무 당연하다. 아니면 신문사가 아직 유지될 수 없었을 테니.


은행으로 들어가는 한겨레, 경향의 양이 상당하다. 그것도 은행 지점 하나다. 뜻밖에 몇몇 경제신문과 조중동을 제외하면 한경이 거의 유일하다.


저들이 저리 날뛰는 이유다. 개인독자들은 상당부분 떨어져나갔다. 과거 동지라 믿었던 민주진영 독자 상당수가 아예 한경에 등돌리고 말았다. 하지만 기럼에도 기관수요가 남아 있다. 그러면 그들을 위해서는 어떤 기사를 써야 하는가?


이제는 경제의 논리다. 이념도 성향도 다 지난 이야기다. 어떤 기사를 써야 돈이 되는가. 아마 민주진영에서는 그런 한경의 스탠스가 상당히 의아했을 것이다. 정작 그들이 타겟으로 삼아야 할 독자는 자신들인데 어째서 항상 자신들을 거스르는 기사만을 고집스레 쓰는 것일까? 진짜 돈되는 독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그 답은 너무나 쉽게 나온다. 한경이 유독 이명박을 조준하기 시작한 적폐청산에도 적대적인 의견을 은연중 내비치는 이유다. 최소한 이명박이 문재인보다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었다.


가끔 한경을 얻어서 볼 일이 있는데 때로 원래 한경의 스탠스대로 쓴 기사들도 보이지만 그보다는 왜 이런 기사를 썼을까 역겨운 것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해했다. 그냥 이제 한경도 돈을 위해 기사를 쓰는구나. 어차피 보수는 조중동이 잡고 있으니 진보를 이념으로 잡고, 그러나 자신들을 소비해주는 기관독자들을 위해서 철저히 그들의 입장에서 기사를 써준다. 이제야 그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전병헌과 관련해서 여명숙이 사과한 기사도 한경은 아직 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뭐 굳이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써주는 자체가 한경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다. 무시만이 답.


한동안 망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개인독자들은 떠나도 기관이 아직 남아 있다. 진짜 돈되는 건 이쪽이다.


차라리 솔직해지면 욕은 덜 먹을 것 같다. 목구멍이 경찰이고 법원이고 양심이고 정의다. 세상의 진실이다.

확실히 노무현 때는 대통령의 측근을 타겟으로 삼아 교묘하게 잘 빠져나갔었다. 권력의 핵심까지도 단호하고 엄격하게 수사해서 처벌하는 정의로운 검사라는 이미지까지 얻었다. 당시 달라진 검찰의 모습에 환호하고 열광하며 지지를 보냈던 국민들을 기억한다. 그런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검찰을 개혁하려는 노무현 정부의 의도를 절묘하게 역공까지 하며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변창훈 하나 죽었다고 아예 다수 검사들이 들고 일어나서 야당과 언론과 손잡고 심지어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하극상을 벌이는 중이다. 정부의 적폐청산으로 인해 무고한 검사가 희생되고 말았다. 망신주기식 강압수사가 아까운 목숨을 스스로 끊게 만들고야 말았다. 이같은 억울한 죽음을 불러온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 나아가 적폐청산을 밀어붙이고 있는 정부를 응징하고 단죄해야만 한다. 더불어 청와대 비서관 전병헌과 행정관 탁현민을 타겟으로 언론플레이를 시작한 것이었다. 봐라, 현정부도 그렇게 깨끗하지만은 않지 않은가. 그런데도 감히 적폐청산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검사들이 전혀 오판하고 있는 것은 지금 문재인 정부가 추진중인 적폐청산이란 노무현 정부 당시의 막연하기만 했던 검찰개혁과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탄핵당했다. 그것도 다수의 국민이 들고일어나 국회를 압박한 결과 그리된 것이었다. 거의 80%에 이르는 국민들이 초유의 대통령 탄핵에 동의했고, 심지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의지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기까지 했었다. 이게 나라냐 싶을 정도로 참담한 상황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지금의 대통령에게 표를 주어 당선시켰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현대통령이 첫째 공약으로 앞세웠던 것이 바로 적폐청산이었다. 당장 드러난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국정의 난맥과 폐단을, 특히 불법과 범죄를 엄정히 수사해서 처벌하고 장차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겠다. 검찰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검찰조차 과거 정부에서 저질러진 수많은 비리와 범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수 국민들이 이미 알고 있다.


전병헌이 죄가 있다면 처벌하면 된다. 탁현민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물으면 된다. 그와 함께 드러난 범죄들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법에 따라 처벌해야만 한다. 검찰도 죄가 있다면 처벌받아야 한다. 하나의 목숨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과거 저질러진 수많은 잘못들을 이대로 모른 척 대충 덮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러라고 문재인에게 표를 주었던 것이고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70%를 넘나드는 국민이 현정부의 적폐청산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검찰들 자신이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적폐청산일라는 거대한 시대의 과제 앞에서 한 사람의 죽음 정도는 사소한 것이다. 대통령 측근 몇몇의 잘못 정도는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 오히려 검사 하나의 죽음을 빌미로 적폐청산 자체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검찰의 모습에서 검찰 또한 청산되어야 할 적폐의 일부임을 확인하게 된다. 자기도 변창훈 검사와 같은 처지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법과 정의를 지켜야 할 검사들이 자기 입으로 떠들어대는 소리다. 증거를 조작해서 검찰의 수사를 방해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에게 검찰이라는 조직의 대표성을 부여한다. 과연 이번에도 국민들은 그런 검사들의 의도에 넘어가 줄 것인가?


별로 안타까운 죽음도 아니었지만 그것을 빌미로 적폐청산 자체에 대해 강한 적의를 드러내는 유가족과 검찰의 모습에, 그리고 그에 보조를 맞추며 적폐청산을 저지하고자 나서는 야당과 언론들을 보면서 알량하게나마 가졌던 연민과 동정심을 모두 지우고 만다. 전에도 쓴 것처럼 변창훈 검사가 혼자서 잘먹고 잘살자고 그런 범죄들을 저질렀던 것은 아니었을 게다. 그렇게 얻은 지위와 권력과 돈이 누구에게 흘러갔을까? 그런 구조들을 본다. 변창훈이 아니었어도 다른 검사가 변창훈과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검찰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구제불능으로 타락해 있는가. 검사를 수사했다는 이유만으로 검사인 피의자의 모든 잘못은 지워지고 만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과거의 모든 잘못을 덮고 묻고 잊고 지나가는 것이다. 무엇때문일까?


그다지 효과는 없을 것이다. 언론도 야당도 열심히 떠들어대고, 검사들도 자신들의 바닥을 드러내가며 여론몰이를 하려 애쓰고 있지만 그 효과는 그리 신통치 않다. 말한 그대로다. 대상이 명확하다. 사실관계가 명확하다. 그러므로 드러난 잘못들을 수사하고 단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범죄들에 검사 스스로가 동일시하며 집단으로 행동에 나서고 있다. 청산되어야 할 적폐가 여기 하나 더 있다. 특권이 나름 수재들도 바보로 만들고 만다. 웃긴다.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주도해서 방해한 혐의로 수사받을 예정이었던 검사 하나가 뒈져버렸다. 본격적으로 수사가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실제 구속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수사도 시작하기 전에 지레 겁먹고 지가 지 목숨을 땅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하긴 원래 검사의 양심이나 명예는 그 놈 아니었어도 시궁창에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검사의 양심이니 기개니 하는 헛소리는 지난 정권에서 검사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놈 하나 죽었다고 다수 검사들이 들고 일어나 심지어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다.


검찰이 검찰을 수사해서는 안된다. 검사가 같은 검사의 죄를 물어서는 안된다. 그동안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자해하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사회저명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나름 상당한 위치에 있던 정치인이나 경제인들도 적지 않았었다. 불과 얼마전에 역시나 같은 수사대상이었던 국정원 소속 변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었다. 그때 검찰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같은 검사들이 그때 그들에 대해 어떤 연민과 동정을 보이고 있었는가. 그러니까 그런 식의 강압적인 수사는 안된다며 반성하는 목소리가 한 번이라도 나온 적 있었는가. 그럼에도 굳이 그런 검사들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던 것은 수사과정에서 어쩌면 필요할 수도 있었겠다는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범죄사실을 밝히고 처벌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억압적인 수단도 때로 필요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검사는 안되는데?


그래서 문제다. 검사도 범죄를 저지른다. 이번의 예에서 보았듯 현직이든 전직이든 검사이거나 검사출신들이 피의자가 되어 검찰의 수사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수사받으러 가서 팔짱끼고 거만한 눈으로 수사검사를 보던 전직 검사출신 우병우를 떠올리게 된다. 더구나 검사로써 검찰의 수사를 방해한 혐의를 받고 수사를 받아야 하는데 지레 죽어버린 어느 검사놈에 대한 검사놈들의 격앙된 반응을 보고 있으면 과연 검찰이 그같은 전현직 검찰들의 범죄를 바로 수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같은 검찰을 수사했다는 이유만으로 위아래도 모르고 비난을 퍼부어대는 저놈들을 보고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세상에 드러난 전현직 검찰출신들의 범죄수사를 믿고 맡길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검찰은 검찰을 수사할 수 없다. 검사가 검사를 수사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전현직 검찰들에 대한 수사를 이대로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아마 전부터도 수없이 많은 비리와 범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아예 특권이 몸에 배어서 아무일 없을 것이라고 조심성을 잊은 결과 최근 그것들이 크게 드러나게 되었을 뿐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된 수사와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무엇때문이었는가 검찰들 자신이 확인시켜준다. 검찰을 수사하기 위해서는 검찰 외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검찰 외에 또다른 수사의 주체가 필요하다. 검찰을 수사할 수 있는 공수처와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경찰의 존재다. 경찰 역시 믿음이 안가기는 마찬가지지만 서로 견제하게 해놓는다면 어떻게 되겠지. 검찰이 범죄를 저질른 검찰을 수사했다고 저 난리를 치는 놈들을 보고 있으면 더이상 검찰에만 수사권과 기소권을 맡겨놓을 수 없다는 사실만 분명해진다.


개새끼들이다. 욕 좀 해야겠다. 개똥같은 새끼들이다. 싹 갈아서 거름으로 만들면 그나마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같은 검사고 자신들의 동료다. 자신들의 동료이기에 더이상 수사를 받더라도 일정 이상의 예우를 받아야만 한다. 지가 못나서 죽은 것까지도 수사한 검사들의 잘못이다. 이런 놈들이 이 나라의 법과 정의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런 놈들을 믿고 이 나라의 법과 정의를 바로 세우라 말하고 있었다. 원래 그런 놈들인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쓰레기인줄은. 새삼 깨닫는다. 검찰을 사람취급해서는 안된다. 토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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