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종이신문을 읽어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아무 신문이나 볼 수 없으니 그래도 가깝다고 한겨레나 경향을 찾아읽게 된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


"이 새끼들 진짜 악랄하구나!"


이를테면 보수언론의 경우 자신들이 기대하는 정책이 있으면 그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그것을 추진하는 정부나 정당에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취한다. 당연하다. 힘이 있어야 무어라도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다.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라도 힘이 없으면 결국 저항을 못이기고 중간에 좌초되고 만다. 세상에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이란 없는 이상 반대를 딛고 설득하며 나갈 수 있는 힘이 필수적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언론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언론들이 공공연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지면을 통해 타매체와 논쟁하는 것을 결코 꺼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같은 논쟁을 통해 시민들은 더 다양한 견해를 접하고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 결국은 누가 더 설득력있는 타당한 논거와 주장을 전개하는가에 따라 여론이 움직이고 실제 정책들도 힘을 얻고 탄력을 받는다.


그런데 자칭 진보언론들은 아니다. 그러고보면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랬다. 바라는 정책이 있다. 그런데 정부에서 그것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일단 의심부터 한다. 비판부터 한다. 그러면서 더 선명하게 타협이나 양보 없이 밀어붙일 것을 주문한다. 당장 지지하는 정책에 대해서조차 정부를 의심하고 사소한 문제들을 비판하며 힘을 빼놓고서는 자신들이 바라는데로 선명한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능과 변절의 낙인을 찍어 버린다. 그러니까 같은 목표와 지향을 가지고 함께 책임을 공유하며 싸워나가는 것이 아닌 뒤에서 잔소리하며 야단만 치다가 정작 책임은 정부에게 모두 떠넘기는 방식이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 당시 노무현 정부의 그나마 개혁정책들이 좌초하고 무능과 부패의 프레임을 씌우는데 앞장섰던 것이 누구인가 떠올려보면 명확해진다.


최저임금을 올리라.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라. 남북단일팀을 꾸리라. 남북대화에 나서라. 그러면 그를 위해 정부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기사를 실어야 하는데 정작 정부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부터 꼬집는다. 정부의 작은 흠까지 찾아내서 정부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키우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고서도 권력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 자위한다. 그럴 거면 긴장관계에 있는 정부에게 특정한 정책을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떨어뜨리는데 앞장서고는 정부가 힘을 가지고 자신들이 바라는 정책을 끝까지 일관성있게 추진하기를 바란다. 아예 정체성이나 지향이 달라서 정책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조중동은 어차피 그런 놈들이라 아예 제껴두고 언급도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부의 정책은 동의하면서도 그 흠을 들추지 못해 안달인 언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엄밀히 나는 자칭 진보언론들이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 문제, 남북문제 등에 대한 주장이나 입장에 그다지 지정성이 있다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수단이다. 자신들의 정의를 드러내기 위한.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한. 그를 위해 정부를 비판하고 흠집내기 위한. 그래서 결국 문재인 정부마저 실패하고 다시 자유한국당이 정권을 잡으면 그러겠지.


"봐라, 결국 우리가 말한대로 되지 않았는가."


그들의 주장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자신들이 바랐던 정책들이 좌절한 데 대한 아쉬움부터 드러냈어야 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바란대로 정책이 추진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부터 느껴졌어야 했을 것이다.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그저 그를 빌미로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도 실패한 정부를 비난하는데 앞장섰을 뿐이었다. 그들이 바란 것은 그들이 주장하던 진보적인 정책인가. 아니면 그런 정책들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당위성인가. 괜히 사람들이 그들을 한경오라 하나로 묶어 조중동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흥미롭다. 같은 지면 안에 마치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듯한 기사와 함께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한 데 싣고 있다. 오히려 대비된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의 정당성과 함께 그럼에도 전혀 기대에 못미치는 정부의 미흡함이 강조된다. 이런 정부를 믿고 지지할 수 있을까. 그런 정부가 과연 그런 옳은, 반드시 필요한 정책들을 일관되게 끝까지 추진하며 지켜낼 수 있을까. 너무 뻔해서 때로 그냥 웃음부터 난다.


진보언론이라는 말도 사치라는 것이다. 진보언론이라면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진보적인 가치가 이 사회에서 현실로 구현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비판 이외에 그 진보적 가치의 구현을 위해 스스로 희생해가며 노력한 적이 있었는가. 그 책임을 함께 나누려 한 적이 있었는가. 지난 대선에서 그들이 취한 스탠스는 곧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 자체였었다. 안철수와 국민의당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도 굳이 그들을 진보언론이라 불러주어야 할까.


물론 노무현 정부도 잘한 것 없다. 그보다 열린우리당 그 쓰레기새끼들이 보인 막장짓거리를 떠올리면 자다가도 토하고 싶어진다. 그놈들은 지금 다 어디에 가 있을까? 그럼에도 그들이 어떤 식으로 노무현 정부의 몰락을 부추기고 열린우리당의 막장화에 힘을 실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결국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가. 그런데도 여전히 자기들은 잘났다. 잘했다. 너무 뻔해서 욕하기도 민망해진다. 요즘 한경오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뭐라 하는 것조차도 마치 나 자신에 대한 모욕처럼 여겨진다. 그나마 조중동은 자신들의 당파성에라도 충실하지.


새삼 느끼는 깨달음이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 정작 이 사회에서 진보적인 가치를 허물고 진보적 정책들을 훼방놓아 왔는지. 어떻게 이 사회의 정치적 진보를 퇴보시키고 있었는지. 그런데도 진보언론이란 얼마나 지독한 조롱이고 모욕인가. 언어와 인식에 대한 모독이다. 웃긴다.

악은 아무리 작아도 악이고 선은 아무리 작아도 선이다. 아무리 작아도 악이라면 행하지 말며 아무리 작은 선이라도 반드시 행해야 한다. 백 가운데 하나가 선해도 그만큼 더 선한 것이고, 백 가운데 하나가 악이라도 그만큼 더 악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연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반대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명박 정부나 문재인 정부나 같다. 노무현 정부나 박근혜 정부나 같다. 차라리 자신의 이익을 기준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를 대신해서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문재인 마음에 안 든다고 박근혜를 선택한 결과가 어떠했는가. 지금 문재인을 반대하는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의 모습은 어떠한가. 기자와 언론들은 또 어떠한가.


그냥 지지하지 않는 것이면 그럴 수 있다 여긴다. 모든 정책에 동의할 수는 없다. 모든 말과 행동을 지지할 수는 없다. 그럴 때는 나도 입을 다문다. 경향성을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정부가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정의롭게 이롭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이 사회를 더 악하게 더 해롭게 만들 것인가. 그러니까 그 행동에 최소한의 경향적인 타당성을 읽을 수 있는가. 최소한의 납득할 수 있는 선의를 읽을 수 있고 단지 방향과 방법의 문제라면 그 부분에서 어차피 서로 맞지 않겠거니 한다. 그래서 내가 비판적 지지자다.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지만 그래도 경향적으로 지지하려 한다. 방점은 '지지자'에 찍혀 있어야지 '비판'에 찍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결국 선택한 것이 자유한국당이다. 바른정당이다. 국민의당이다. 그러면 최소한 주장의 근거에서 '정의'라는 말은 빼야 옳다. 그들 어디에 보편적으로 인정할만한 정의가 있었는가. 그들이 과거 한 말과 행동,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말과 행동들을 보라. 국정에 대한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문재인 정부더러 불통이라는데 그래서 그 비교대상이 저들이라면 참 슬픈 것이다. 하긴 난 원래 인간의 이성을 그다지 믿지 않는 편이다.


사실 젊은층에서는 정치를 상대적으로 감성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더 강하기는 하다. 그래서 1987도 가능했다. 과연 당시 거리로 쏟아졌던 대학생들 가운데 얼마나 자신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을까? 막연한 정의다.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틀리기 쉽다. 괜히 복잡하면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가 딱 그런 상태였었다. 그래서 변절도 쉬웠다. 그 순수한 선의를 간직한 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선하고 정의롭다. 그러니까 직관적으로 지금 정부가 하는 정책이나 행동들이 마음에 안 든다. 다연하다. 그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더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젊은 층의 요구에만 구애되어야 하겠는가.


언론의 역할이 크다. 그래서 보수언론이 아직도 큰소리를 치며 행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간극을 메워주어야 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일 텐데 노무현 정부나 지금 정부나 언론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 너무나 순수하고 고결한 한겨레와 경향 등 진보언론은 어차피 이명박근혜나 문재인이나라는 순백의 논리로 무장한 상태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직관적인 정의와 정부의 현실적 판단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깝게도 지금 정치지형에서 젊은 층의 이탈은 필연이기도 하다. 그들의 문제인식이 이명박 박근혜나 문재인이나 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더구나 불과 2년 전도 당장 한 달 전에 비하면 너무 멀고 기억도 희미하다.


그래서 과연 대안이 무엇인가. 누구를 대안으로 선택할 것인가. 그러니까 그 기준이 무엇인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정의인가. 오히려 너무 선명해서 명확하다. 반대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과연 누구인가. 엄중한 시절이다. 이제 겨우 저들의 잘못을 묻고 있다. 진지해진다.

삼권분립이란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가 서로 소 닭보듯 상관않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당장 입법부인 의회는 사사건건 행정부를 감시하며 비판한다. 허구헌날 열리는 것이 국정감사고 대정부질의고 정부를 비판하는 논평이다. 사법부 역시 입법부가 통과시킨 법이 헌법에 합치하는가를 판단하고, 행정부에서 수사한 사건들에 대해 별개로 독립적인 판결을 내림으로써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일단 입법부야 때되면 선거로 심판받는다 하지만 그러면 사법부는 어떠한가? 무엇으로 사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고 잘못을 바로잡을 것인가?


3권분립이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시켰다. 사법재판에 있어 행정부인 청와대의 의견을 교환하고 그에 맞추어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 엄연히 독립된 헌법기관인 재판관들을 사찰하고 그 내용을 문서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감히 조사조차 거부하고 정작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검찰수사를 요청하지도 않고 있다. 사법부는 그러면 무소불위의 기관인가. 법을 어겨도 헌법에 위배되어도 감히 누구도 수사도 조사도 할 수 없는 절대의 권력이기라도 한 것인가. 그것이 바로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나마 입법부나 행정부는 선거로 심판이라도 받는다. 때되면 선거로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갈아치워진다. 대통령이 바뀌면 행정부의 주요인사 역시 그에 따라 바뀌게 된다. 잘못하면 수사도 받는다. 국회의원이고 정부 관료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수사대상에 올려질 수 있다. 그런데 사법부만은 아니다. 판사놈들만은 아니다. 판사 개새끼들만은 아니다. 판사 개쓰레기 새끼들만은 아니다. 욕하는 게 싫으면 지들이 잘하던가. 그같은 반헌법적인 행위에 동참하지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묵인한다면 결국 같은 놈들인 것이다. 정작 법을 지킨다는 사법부가 법을 어겼는데 수사도 처벌도 않고 누구에게도 책임도 묻지 않는다. 진실마저 대충 덮고 묻고 넘어간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짓거리인가.


많은 이들이 예상한 바였다. 지난 정권동안 사법부의 판결을 보면서 모두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물론 양심적인 판사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사법부야 말로 이 사회 양심과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모두가 공범이 되려 한다. 명백한 범법사실에도 수사요청조차 하지 않는다. 믿었던 마지막 양심으로부터도 배신당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저 개새끼들은 사법고시를 보는구나. 판사가 되려 하는구나. 우병우가 되지 못했을 뿐 우병우가 되고 싶은 법조찌그레기들이구나. 아니기를 바라면서.


이전 정부나 이번 정부나 같다. 별 차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정부의 잘못을 심판하기 위해 이전 정부에 대한 책임이 있는 정당을 지지하고 표를 주려 한다. 개인의 선택은 물론 존중한다. 존중하는데 그래서 내가 대한민국 자칭 보수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명백한 헌법위반이다. 헌정질서의 문란이다. 정치인이든 언론이든 심지어 그 지지자들이든 그에 대한 조금의 문제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면 애써 무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입헌국가다. 그런데도 이전 정부와 이번 정부가 같은가. 그냥 웃을 뿐이다. 쓰레기는 답이 없다.


아마 많이들 아는 이야기일 테지만 연극의 연기와 드라마의 연기는 전혀 다르다. 카메라로 클로즈업해주는 드라마에 비해 연극은 객석과 거리를 좁힐 방법이 없다. 드라마에서처럼 눈빛연기라도 하려 하면 객석 뒤에서는 아예 뭐하는지 보이지 않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연극의 연기는 드라마의 그것에 비해 발성이며 표정 몸짓들이 상당히 과장되다. 객석 뒤편에서도 연기자의 감정을 충실히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벌써 몇 년 째다. 특히 작년은 거의 트럼프의 미국과 김정은의 북한이 핵개발을 둘러싸고 거의 극한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도때도 없이 미사일이 날아오르고, 핵실험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럴 때마다 미국은 무력사용까지 고려하며 강경한 대응을 이어갔다. 물론 모든 잘못은 북한에게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그런 식의 극한 대립은 한반도 정세의 불안으로 이어지고 당연히 평창 동계올림픽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당장 한반도의 긴장상황을 이유로 아예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하려는 움직임마저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여전히 불안해하는 세계의 나라들과 시민들로 하여금 마음놓고 한국을, 평창을 찾도록 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 이번 남북교류의 첫째 목적은 다름아닌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하나라는 것이다. 더불어 남북한 사이에 대화와 교류가 이어지면서 평화적인 분위기가 정착되고 북한의 핵문제까지 해결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고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기왕에 유치한 평창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가장 큰 불안요인인 북한의 핵개발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상황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문제는 설사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그것을 이루어낸다 할지라도 어떻게 세계에 그 사실을 알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단 대화를 했다. 북한이 올림픽 참가를 통보했다. 남북한이 하나의 깃발을 들고 함께 개회식에 입장하기로 했다. 북한의 응원단과 공연단이 대한민국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할까? 그보다 더 나은 더 확실하게 어필할만한 다른 것은 없을까? 그러고보면 평창올림픽 특별법에서 이미 단일팀 구성을 명문화하고 있었다. 일단 단일팀을 제안하고 그것이 이슈가 되어 세계의 언론에 보도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최소한 평창동계올림픽 기간동안은 남북한이 서로 평화를 위해 노력하려 한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올림픽 역사상 유례없는 단일팀을 구성할 정도로 남북한 모두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니까 잉여다. 굳이 않더라도 상관없지만 어찌되었거나 하면 좋은.


그러면 어째서 그 좋다는 단일팀 구성이 이토록 논란이 일 정도로 절차와 과정을 무시한 채 졸속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가. 시간이 없었으니까.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할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단일팀을 논의하는 것은 너무 앞서가는 것이다. 일단 북한이 먼저 참가의사를 밝히고 나서 그와 관련한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과 이달 초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과연 어떤 종목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단일팀을 꾸릴 것인가. 대한민국과 북한 두 당사자들만 합의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당장 IOC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해당 국제연망의 지지도 받아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다른 나라들의 반발 역시 설득해야 한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가 임의로 선정했다기보다는 IOC와의 협의를 통해 여자 아이스하키로 단일화 종목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IOC의 동의가 있어야지만 대한민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단일팀을 추진할 수 있다. 다만 그런 과정들이 너무 급하게 진행된 나머지 충분히 사회적으로 동의와 공감을 이끌어낼만한 시간이 부족해지게 되었다.


아마 군대 갔다온 사람이라면 거의 아는 말일 것이다. 선조치후보고. 아니 군대가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시도때도 없이 듣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매우 성가시다. 말은 일단 상황이 급하면 먼저 조치부터 하고 보고는 나중에 하라고 하면서 결국 나중에 그것을 이유로 문제삼고 책임을 물으려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작 나중을 생각해서 의견을 묻거나 하면 줏대없고 능력없는 놈으로 찍히기 쉬우니 이보다 곤란한 것이 없다. 아무튼 시간은 촉박하고 당장 무어라도 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때로 중간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일단 먼저 결과부터 내고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룰 수도 있다. 하물며 대통령이야. 북한이 먼저 올림픽 참가의사를 밝히고 대화를 제의해 왔는데 이것저것 따지다가 겨우 찾아온 기회를 놓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다.


어째서 불통인가. 그럼에도 필요하다 여겼으니까. 어째서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지 않았는가.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으니까. 어째서 그처럼 졸속으로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는가. 당장 제한된 시간 안에 어떻게든 결과를 내야만 했으니까. 그러라고 대통령과 행정부에 그만한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일일이 묻고 동의를 구하지 않더라도 대통령과 행정부의 재량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라. 그것이 사익을 위한 것이라면 모를까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당면한 첫째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고작 동계올림픽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묻는다면 솔직히 대답할 말이 없다. 당장 나부터 동계올림픽따위 그다지 볼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만 국가단위에서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정이 시키는대로 그저 따르면 무척 편하다. 좋은 놈은 좋은대로 싫은 놈은 싫은대로 화나는 놈은 화나는대로. 개인은 그래도 된다. 그래도 한 집단을 이끄는 리더라면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 여자 아이스하키 티켓이 벌써 동이 났다고 한다. 불과 얼마전까지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한 세계의 관심도 부쩍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주목도가 높아진 만큼 세계의 정상과 언론들 역시 평창올림픽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사실 IOC가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올림픽의 실패는 IOC에게도 큰 문제가 된다. 겨우 평창동계올림픽 개회를 앞두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 반드시 단일팀 때문만은 아닐지라도 조금이라도 역할을 했다면 하지 못할 선택은 아니었던 셈이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하는가. 그 전에 모든 개인을 만족시키는 정책이란 존재하는가. 부동산 가격을 잡으려면 부동산 가격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또다른 개인들의 욕망을 희생시켜야 한다. 보편적 복지에 반대하는 다수의 국민들이 존재함에도 그들을 설득하지 못한 상태로도 필요하다면 보편적 복지를 해야만 한다. 여성주의가 필요하다면 반대하는 주장이 있어도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국정을 책임진다는 것은 무척 무겁고 어렵고 무엇보다 고독한 것이다. 어떻게 해도 누군가로부터는 반드시 욕을 먹는다. 그럼에도 무릅쓰고 필요하다면 해야 하는 것이다.


비판하는 주장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예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덕분에 북한도 괜히 대한민국 정부를 떠보려다가 실속없이 모양만 구긴 채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곧 정부와 협상해야 하는 상대에게도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북한 역시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다만 부당한 비판들에 대해서는 나름의 해명을 하고 싶은 것이다. 쉬운 결정들은 아니었다. 이유가 있는 결정들이었다. 쉬운 일은 없다.

예를 들어 회사가 망해가는 상황이면 일단 사장부터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된 회사라면 임원들은 모두 자리에 없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거래를 따고 자금을 만들려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될 것이라면 이런 상황에까지 오지도 않았다. 그런 건 별 책임없는 말단직원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다. 자기 회사이고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직원들인데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손놓고 있는게 말이 되는가.


바로 리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필요가 없다면 아무것도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최대한 무리하지 않고 안정되게 현상을 유지하는 것도 절실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 상황을 변화시켜야 하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설사 아무 효과가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실행에 옮겨야 하는 때가 있다. 발버둥이라고도 하고 발악이라고도 한다. 풀을 건드리면 놀란 뱀이 뛰쳐 나온다. 풀숲에 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뱀이 뛰쳐나오게 하려면 일단 풀숲을 건드려야만 한다.


미숙함이 있었다. 혼란도 있었다. 그만큼 급하게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올림픽 개막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해가 바뀌고 대화를 제의해 왔다. 일단 대화의 물꼬가 열렸으면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어내야 한다. 어차피 북한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모르지 않는다. 그래봐야 어차피 전과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알면서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평창 동계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고 아주 작더라도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아무것도 않는다면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남북 단일팀,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 한다고 더 좋을 것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더 나쁠 것도 없다. 그런데도 해야 한다.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합의하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냄으로써 국내와 국제사회에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북한에 대한 불신이 북한 자신이 자초한 결과로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올림픽을 앞두고 남북이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모습은 모두에게 긍정적인 신호다. 더이상 북한을 믿을 수 없을 뿐 이로 인해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비판하는 쪽에서도 결국 반기게 될 것이다. 결과는 나중에 생각한다.


할 수 있는 바를 다 하고 그 다음은 하늘에 맡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바를 다 하고서 결과는 그 이후에 맡긴다.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결국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지금 자신의 노력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진짜 나쁜 것은 아무것도 않는 것이다. 차라리 결과가 나쁘다면 반성도 할 수 있고 다시 바로잡을수도 있다. 아무것도 않으면 결국 다시 바로잡지도 못한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마저 지지하는 이유다. 설사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그랬어도 나는 한결같이 지지했을 것이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절박함이야 말로 남북문제의 본질이다. 그만큼 북한 핵문제는 당면한 가장 급하게 해결해야 할 중대사안이다. 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 무어라도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것이 리더의 책임이고 역할이다. 너무 급하지 않게 끌려가지 않으면서 중심을 지키고 있다. 역시 잘하고 있다. 내 평가다.

아마 바로 어제 고작 하루만에 다시 방남하겠다 통보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상당히 헷갈려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또 뭐가 문제라서 기껏 협상까지 다 해놓고 남쪽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겠다 어깃장을 놓는 것일까? 확실히 지금 가장 아쉬운 쪽이 누구인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단 하루도 아쉬울 만큼 마음이 급한 쪽은 다름아닌 북한이었다.


그러니까 지난 수 년 간 교류가 단절되면서 마지막 교류가 있던 시점의 기억에 갇혀 있던 것은 북한 당국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에도 겉으로는 강경한 입장을 내세우면서도 뒤로 대화재개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전임자들의 태도가 그같은 오판을 키웠을 것이다. 자기들이 이제라도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화에 응하고 평창올림픽에까지 참가한다면 이전 정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 보두가 자신들을 환대할 것이다. 당장 자신들이 개발한 핵무기 때문에라도 더 낮은 자세로 많은 것들을 양보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 정부를 이용해서 국제적인 고립에서도 벗어나고 당장 아쉬운 것들부터 최대한 받아내 보자.


평창올림픽 참가를 두고 협상하는 동안에도 괜한 트집까지 잡아가며 마치 수위를 조절하듯 한국 협상단에 시비를 걸어댄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상당히 엇박자였다. 한국 대표단에게 항의하는 시점과 문제가 발생한 시점이 맞지 않았다. 대응 수위나 방식도 마치 우리가 이런 것도 한다는 식으로 매우 요식적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판을 엎고 다시 돌아가는 수가 있다. 돌아가서 아예 평창올림픽 망하라고 어깃장을 놓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라. 여기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그럼에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와의 공조는 차질없이 진행된다. 올림픽은 올림픽이고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순간까지 계속 유지된다. 그 와중에도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북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분명히 전하고 있었다. 지금의 한국정부는 이전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 다른 수단을 사용하기로 한다. 남북한간의 대화가 한국 정부에게 상당한 치적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대화를 제의하면서 마치 무슨 대단한 은혜라도 베푸는 양 거들먹거린 것도 결국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것이 어떤 정치적 이익을 주었는가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북한이 대한민국과의 대화국면을 흔들고 파탄내려 하면 그 정치적 부담 역시 대한민국 정부에게로 고스란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당장의 평창올림픽과 국민의 기대 때문에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더 아쉬운 처지가 되어 낮은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아주 버릇을 잘못 들여놓았다. 오냐오냐 해줬더니 아주 자기들이 대단한 상전이나 되는 줄 안다. 그런 점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을 두고 일어나는 논란들은 정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더이상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처럼 북한과의 관계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북한과의 단일팀 때문에 대통령의 지지율까지 하락했다.


누군가에게 협상을 위임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재량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밖에 양보할 수 없다. 이렇게밖에는 허용할 수 없다. 그 이상은 내게 주어진 재량 밖이다. 그것을 상대가 알게 하는 것도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협상을 아예 깰 생각이 아니라면 주어진 재량 안에서 양보도 요구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정부에게 주어진 재량이 어디까지인가? 미국과의 관계를 거스르는 것은 북한도 바라지 않는다. 강경일변도인 미국과 대화하려면 대한민국 정부가 그 다리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미국이 뒤에서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한국 국민들마저 전과 달리 단일팀도 공동입장도 다 필요없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행동에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민주정부로서 주권자인 국민의 반발마저 무릅쓴 결단의 결과라는 것이다. 국민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무엇보다 우선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보이는 성의가 대한민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여기서 선택지가 남는다. 하나는 어차피 더이상 대한민국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대화를 이쯤에서 아예 끝내자. 아니면 그럼에도 진짜 중요한 목적이 있으므로 이쯤에서 자기들이 먼저 양보한다. 그러니까 어제 저녁 북한에서 다시 사전점검단을 보내겠다 통보해 왔을 때 저도 모르게 웃음부터 지어졌던 것이었다. 정작 지금 남북한간의 대화에서 더 급하고 더 아쉬운 것은 어느 쪽인가? 누가 더 약점을 잡힌 상태인가? 트럼프의 말이 맞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가도 옳다. 힘들지 않은 게 아니다. 고통스럽지 않은 게 아니다. 당장이라도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고 미국과의 대화를 통해 얻을 것을 얻고 끝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니 아무 방법이라도 써봐야 한다. 그래서 그나마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며 온건한 방법을 주장해 온 문재인 대통령의 선의에 기대서 과거 해오던 것처럼 한 번 시도해 보았던 것이다. 결국 성과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북한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지금의 기회마저 놓치면 자칫 진짜 트럼프의 미친 짓을 제대로 맞게 될 지도 모른다. 국내지지도 개판인데 지지율을 위해 트럼프도 못할 짓이 없다.


잘하고 있는 것이다. UAE와의 협상과정에서도 국내의 시끄러운 여론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던 것처럼 정부의 나름 성의를 다한 대응에 대해 호의적이지 안았던 여론 역시 북한에 대한 경고가 되어 주었다. 전처럼 그딴 못된 장난질을 계속하다가는 대한민국 정부도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당장 북한과의 대화와 관계개선에 대한 여론마저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 북한이 무리한 요구라도 한다면 부담 때문에라도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는 손놓고 물러나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북한 입장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면 몰라도 당장 급한 목적이 있다면 알아서 조심해야만 한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파병하면서 미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차지철을 사주해서 국회에서 반대여론을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항상 정치에는 지지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반대자가 오히려 지지자보다 더 유용할 수 있다.


결국 그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속내라기보다는 바닥이었다. 그들이 놓인 상황이다. 여유롭지 않다. 아마 전같았으면 한 며칠 시간을 끄며 몽니도 부리고 했을 테지만 그런 여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놓인 현실의 상황이다. 그럼에도 급하게 서둘지 않고 원칙을 지키며 버틴 대한민국 정부의 영리함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단일팀 등 최대한의 성의는 보였다. 북한이 지금 믿을 것은 미국도 한국 국민도 아닌 오로지 대한민국 정부, 문재인 대통령의 선의 뿐이다. 누가 열세에 있는지는 이것으로 분명해졌다.


민주주의의 승리다.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와 경쟁이 가져온 성과다. 김정은이 하잔다고 그것이 북한의 의지가 되는 체제와 다르다. 서로 논쟁하고 토론하고 갈등을 빚으면서 최선의 답을 찾아나간다. 그것들이 오히려 정부에 더 큰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반대자들에 고마워해야 한다. 북한도 알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전의 대한민국과 다르다. 이전의 대통령과 정부와도 다르다. 정부의 승리다.

당장 대학 등에서 해고한 청소노동자들만 봐도 한두해 일한 것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다. 한 곳에서 꽤 여러 해 일하고 있었는데 정작 최저임금이 오르자 조금의 여유도 없이 바로 해고에 이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몇 년을 일하든 청소노동자들은 최저임금만 받고 있었다.


최저임금이 그냥 최저임금이 아니라는 뜻이다. 최저임금이 사실상 표준임금이고 일상임금이다. 심지어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현실에는 너무 많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죄다 최저임금이나 그 이하만 주고 써왔는데 갑자기 최저임금을 올리고 그 이하로 주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려 한다. 그러면 묻게 된다. 과연 이전 최저임금 수준으로 한 가계가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최저시급으로 법정근로시간을 다 채워서 각종 수당까지 모두 계산한 임금에서 4대 보험 등 원천공제되는 내용을 제외한 실수령액을 가정해보자. 아니 가정할 필요도 없다. 이미 현실에서 실제 그렇게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혼자라면 상관없다. 그저 혼자 먹고 입고 자는 것이야 그 정도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조차도 만에 하나 집주인이 보증금이나 방세를 올려달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이사를 하게 되거나, 갑작스럽게 병원비가 크게 들면 난감한 경우가 생기게 된다. 하물며 부양할 가족이 있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한 곳에서 여러 해 일해 온 청소노동자나 경비노동자의 경우 부양할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경우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들 사업장, 혹은 학교, 혹은 아파트에서 이만큼 일했으니 돈도 더 주겠다. 그동안 성실하게 일했고 숙련도도 올랐으니 이만큼 월급도 더 올려주겠다. 그래서 처음 최저임금을 받으며 시작했어도 시간이 흐르고 그보다는 조금 더 많이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일 뿐이라며 올리지 말자 하면 이해가 된다. 처음 일을 시작하는 비숙련 노동자의 경우 적은 임금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니 그것은 그것대로 내버려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실제 그래서 유럽에서도 아직 최저임금이라는 제도 자체가 없거나 뒤늦게 최근에서야 생겨난 경우가 적지 않다.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이고 최소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보다는 많은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한 임금을 당연하게 지급받는다. 그것도 아니고 몇 년을 일해도 상관없이 최저임금이 표준임금이자 생계임금인 상황에서 과연 그 최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은 생활할 수 있는가.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최저임금인상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처럼 한국사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혹은 그 이하의 임금만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그 가운데는 결혼적령기의 청장년층들도 있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 길러야 하는데 정작 받는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이다. 그러니까 그 돈으로 과연 결혼도 하고 아이도 기르며 미래를 꿈꿀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미국 전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말을 돌려준다.


"그럼 니가 해보던가."


어느 국회의원처럼 그저 좁은 단칸방에서 즉석식품 사다놓고 먹으며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신선 등선하는 소리나 하자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실제 생활하는 당사자로서다. 도대체 가계부채가 왜 이렇게 높은 것인가. 단순히 아파트 때문인가? 주택담보대출만이 원인인가? 불량채권 문제가 크게 불거지는 이유도 갚을 능력도 안되면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누구인가? 무엇 때문인가?


어차피 아무리 오래 일해도 월급따위 올려주지 않다가 조금 올려줘야 하니 바로 잘라버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최저임금이든 실제 수령하는 임금이든 그 수준 이상은 절대 올려줄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올려줄 생각이 없으니 그 정도만 받고서 계속 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란 최소한의 생활조차 버거운 수준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정상이다.


그러니까 최저임금 이상이 일상임금인 상황이라면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논란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최저임금은 어디까지나 최저임금이다. 하지만 당장 최저임금 얼마 올렸다고 오랫동안 일한 숙련노동자마저 해고하는 상황은 최저임금이 단순히 최저임금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어째서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가. 수 년 간 같은 일에 종사한 노동자가 과연 최저임금으로 생활을 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가. 그런 임금수준을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아무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한 마디로 최저임금 논란이 크게 불거지는 이유인 것이다. 최저임금은 최저한의 임금이 아니다. 때로 노동자에게 최대한의 임금이다. 그래서 사용자로서도 그 이상은 지급할 의사가 없다. 그를 전제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저임금으로 가계의 유지가 가능한가. 당연한 결론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보면서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바로 '한반도대운하' 공약과 관련한 논란이 불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같은 보도를 보고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어, 이명박 공약 가운데 그런 것도 있었어?"


한 마디로 뭔 공약을 내놨는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지지하고 표를 주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그래도 국민이 반대하는데 안하겠지?"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팍'하고 부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유권자의 수준이었구나. 유권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와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아니 아예 알려고도 않는 그저 어린아이들이랄까? 


그래서 그때 내가 물었다.


"국민이 반대하는데도 이명박이 밀어붙이면 어쩌겠는가?"

"그래도 국민이 반대하는데 별 수 있겠어?"


그리고 포기해 버렸다. 2012년 대선에서도 그래서 이제껏 정치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문외한들을 새로운 얼굴이라며 추앙하고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이 인간들은 도무지 방법이 없구나. 고작해야 노무현의 친구이고,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이고. 그냥 백신프로그램을 개발한 성공한 벤처의 CEO다. 그것 말고 그들이 당시 정치인으로서 보여준 것이 있기나 했었는가.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들고, 최소한의 후보자의 공약을 살피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마치 선지자처럼 누군가 뛰어난 인물이 자신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국민의 대통령이니까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 국민의 뜻에 의해 선출되었으니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당장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하겠다던 공약들은 어떻고?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대선 전부터 그 말이나 행동을 보면 도대체 이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한 눈에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한나라당 경선을 통해 드러난 사실들만으로도 결격사유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아무 관심도 없었고 그저 이명박이라는 성공한 기업인의 이미지만 보려 했었다. 월급쟁이에서 최고경영자까지 올라간 그 입지전이 자신을 위해서도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먼저 자신들부터 반성해야 할 것이다. 몰랐다면 게을렀던 것이고, 알았다면 멍청한 것이다. 차라리 아직도 자기들은 틀리지 않았다 고집부리는 쪽이 솔직해서 귀엽기라도 하다. 누가 대한민국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정에 대한 모든 책임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국민은 반성하지 않는다. 뭐 그것이 주권자로서의 특권이기도 할 터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바꾸었음에도 나는 그래서 여전히 한국의 대중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바로 한국 국민들이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이명박 대신 정동영은 너무 심하기는 했었다. 똥이냐 설사냐 하는 선택의 상황이었으니.


별로 새로울 건 없다. 충분히 예상한 것이고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것이고 그런데도 그보다 정도가 더 심한 것 뿐이다. 이렇게까지일지는 솔직히 나도 상상치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참 먼 이야기다. 까마득하다.

멀리 가려 했더니 벌써 몇 년 전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개봉된 적 있었다. 원래는 '북두의 권'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아니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무협소설은 어떨까? 중앙정부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며 정파니 사파니 무림문파들이 제각각 무력을 소유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최선의 전쟁보다 최악의 평화가 차라리 낫다. 아무리 숭고한 이상을 위한 전쟁이라도 결국 전쟁이란 자체가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다. 내가 죽을 수도 있고, 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 그런 공포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최소한 김정은의 치세라도 김정은 한 놈만 조심하면 되는 것과 달리 오늘은 이편이 이겼다가 내일 저편이 이기면 그때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국가가 폭력을 독점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국가 말고 어느 누구도 개인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 개인의 인신과 재산에 대해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그를 위해서 국가는 더 강력한 폭력을 독점하지 않으면 안된다. 군대를 보유하고 경찰력을 동원하고 그럼으로써 국가 이외의 폭력이 국가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제약한다. 물론 그 국가가 더 나쁜놈일수도 있지만 말했듯 이놈저놈 칼들고 총든 놈들을 걱정하기보다 국가 하나만 조심하면 그래도 안전하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 당장 사악한 독재자를 몰아냈더니 군벌들이 서로 내전을 벌이고 있는 실제의 현실들을 돌아보라. 그래서 내전을 치르고 있는 지금이 독재자의 치하보다 더 나은가.


경제에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은 다름아닌 결제수단이자 가치의 수단인 화폐일 것이다. 누가 화폐를 독점하고 발행할 것인가에 따라 경제 전반이 크게 좌우되게 된다. 어느 나라의 경우처럼 아무 생각없이 화폐만 찍어냈다가는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국민들의 일상마저 위협하게 된다. 그렇다고 조선처럼 아예 화폐를 발행하지 않으면 화폐를 구하기 힘들어지며 역시 경제에 압박이 가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화폐를 독점하고 차익을 노리려는 놈들마저 있다.당장 흥선대원군부터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라며 당백전을 발행하고는 전작 세금은 상평통보만으로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그나마 권력자들은 그런 실정이 계속되면 반발이 일고 마침내 권력을 잃고 쫓겨나기라도 한다. 그런데 단지 돈만이 목적인 개인이라면 어떨까?


개인이 발행권을 갖는다. 개인이 임의로 화폐를 만들고 찍어내어 시장에 유통시킬 수 있다. 어떤 화폐를 어느 정도의 가치로 유통시킬 것인가도 개인이 정할 수 있다. 당연히 누가 얼만큼 어떻게 가질 것인가도 개인이 정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얼만큼 화폐를 발행할 것인가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다. 단지 화폐발행의 국가독점을 몇몇 개인의 독점으로 바꿀 뿐이다. 그나마 국가는 국민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가지지만 개인이 다른 개인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니 블록체인의 전제가 타인의 선의에 기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를 발행하는 주체들의 선의는 어떻게 믿어야 할까? 100명이 합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10명이서 서로 이해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적 시간에 비례해서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책임과 권한 역시 강화되어 온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세계제국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언젠가 세계 역시 하나의 정치체로 묶이게 될 것이다. 단일한 통화와 단일한 규범과 단일한 권력구조를 가지고 보편적인 원리와 가치 아래 지배되게 될 것이다. 중동의 인권과 미국의 인권이 다르다. 유럽의 정의와 아프리카의 정의가 다르다. 그 혼란으로 인한 비용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 아래 하나가 되어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를 뻘로 배운 것인지. 화폐의 역사도 알지 못하면서 화폐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최초의 화폐는 국가가 발행한 것이 아니다. 최초의 화폐는 개인과 개인이 약속한 가치있는 재화였었다. 화폐를 국가로부터 독립시킨다. 화폐를 중앙으로부터 분리한다.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인지. 어이없다.

그러니까 암호화폐 시장의 과열과 왜곡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의 건강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정부의 보호와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무슨 탈중앙화인가?


원래 화폐는 개인이 발행했다. 각자 자기가 가진 가치가 있는 수단을 가공해서 거래에 사용한 것이 화폐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치도 제각각이고 그렇다 보니 항상 안정되고 일관된 거래도 불가능하고. 괜히 중세 봉건사회를 끝내는데 부르주아들이 전제군주들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 아니다. 제각각 화폐를 발행하고, 저마다 세금을 걷고. 그래서 그것을 단 하나의 주체가 중앙에서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가상화폐의 난립으로 당장 피해를 보는 것은 누구인가. 장차 가상화폐가 더 중요하게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더 가치있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과잉되고 왜곡된 가상화폐로 피해입는 개인들은 누가 어떻게 보호하고 책임져 줄 것인가. 그마저도 비용이라 생각한다면 개인이란 단지 그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마치 기술의 가치를 위해 보편적 가치마저 짓밟는 매드사이언티스트를 보는 느낌이랄까.


당장 당면한 문제다. 중고등학생들까지 가상화폐에 돈을 넣고 있다. 연금생활하는 은퇴자나 가정주부까지 빚을 내가며 암호화폐에 투자하고 있다. 가치는 널뛰기하고 자신들도 인정하는 것처럼 기술은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다. 무책임하다. 그런 주제에 정부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늬들이 다 해달라.


유시민의 답답함을 이해하겠다. 컴퓨터공학과 교수도 그 점을 지적하더라. 정부의 규제를 바라면서 탈중앙화를 외치는 모순에 대해서. 그런데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겠지. 똑똑한 놈들이 항상 더 큰 해악이다.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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