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장관씩이나 되는 사람을 굳이 애써 변호해 줄 필요가 없다 말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말로써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하지만 일정 이상의 위치에 오르면 그때는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말했지 않은가. 솔직하게 사실을 밝히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대책들을 내놓으라. 그래서 그렇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권인숙이다. 지나가듯 기사를 읽으며 설마 했었다. 그 권인숙 맞다. 와아! 박상기 이 아저씨 진짜 할 때는 하는구나.


바로 이런 대책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실질적인 효과 만큼이나 정부의 의지를 알리는 상징성 역시 탁월하다. 그야말로 상징적인 인물이다. 여성성폭력 문제에 있어 이보다 더 적절한 인선은 없다. 그런데 굳이 김재련이 어떻네 서지현 검사의 본심이 어떻네 엉뚱한 곳에서 변죽을 울릴 필요가 없다. 실수를 했어도 얼마든지 행동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장관이고, 그리고 대통령인 때문이다.


새삼 소름이 돋는다. 어째서 문재인이 박상기를 법무부장관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앉혔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박상기라는 인물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조치만으로도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게 된다. 할 때는 한다. 그것도 아주 잘한다.


권인숙이라면 믿을 수 있다. 아니 믿어야 한다. 그 시대를 살았던 모두의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기우였던 것이다. 정부도 박상기 장관도 그렇게 약하지도 무능하지도 않다. 헛짓이었다. 박상기 장관에 대한 비판조차. 우스워진다. 좋은 의미다.

전부터 건강 챙긴다며 이것저것 챙겨먹는 사람들을 보며 습관처럼 하던 말이 있다.


"그러느니 운동을 하라!"


물론 나도 못했다. 천성이 게을러서 안 한 것도 있다. 하지만 지난 11년 동안 매일 12시간 넘게 일해야 했었다. 때로 휴일도 없이 퇴근시간 지나서도 계속해서 일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집에 와서 밥먹고 씼고 어쩌고 그냥 바로 자야 할 시간이다. 무엇보다 운동할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그동안도 꾸준히 운동을 해보겠다 시도를 해보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들로 인해 좌절되기를 몇 번, 겨우 작년 여름 쯤에야 다니던 직장이 망하면서 겨우 운동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새로운 직장을 구하면서 하루 8시간씩 근무할 수 있게 되니 비로소 꾸준히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매일 두 시간, 많을 때는 세 시간 씩, 그리고 겨울부터는 조금 몸에 근육도 붙고 하면서 압축해서 한 시간 반 정도로 운동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당장 감기가 사라졌다.


매 해 겨울이면 감기는 그냥 당연히 거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길면 최대 몇 주 이상 콧물과 기침을 달고 살아야 했었다. 하지만 고작 몇 달 운동한 것 만으로 감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작년 정기검진을 받을 당시 당뇨 직전까지 갔던 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허리사이즈도 1인치 이상 줄고, 몸무게도 7킬로 가까이 빠지고, 일하면서도 쉽게 지치지 않아 효율도 높아진다. 이렇게 좋은 걸 어째서 난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말했다. 11년 동안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며 살았다고.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어째서 한국사람들이 건강을 위한다면서 운동이라는 확실한 왕도가 아닌 건강식품이라는 편리한 사도를 선택하는가. 그다지 효과가 검증도 되지 않은 건강식품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시간이 없으니까. 허구헌날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 혹은 자기 가게에 붙들려 있어야 하니 운동할 시간을 내는 자체가 너무 힘들다. 기껏해야 휴일에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등산이니 낚시니 분주히 움직일 뿐이다. 그조차도 이미 몸과 마음이 지쳐 있으면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내가 그랬다. 쉬는 날이면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고 잠깐 깨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자른 잠을 벌충하며 최대한 휴식을 취하며 보내야 했었다. 하다못해 그토록 즐기던 게임조차 즐겁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이 또한 사회적 비용이라는 것이다. 여유가 없으니 운동을 못하고, 더구나 여유가 없는 만큼 사람을 만나도 달리 할 일이 없으니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이다시피 하고, 그 결과는 중년의 나이에 찾아오는 성인병인 것이다. 그렇게 갑자기 한창 일할 나이에 돌연사를 하는 경우가 있고, 벌써부터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약을 달고 살아야 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고, 그렇다고 건강을 챙기겠다고 허튼데 들어가는 비용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몸만이 아닌 정신과 마음까지 잠시도 쉬지 못하고 피폐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생산성을 이유로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 붙들려 일해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니. 더 많은 시간을 회사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을 정의라 여기는 여론까지 적지 않다. 그 비용을 그러면 누가 모두 치르는가.


운동과 노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국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고 무엇보다 반복회수다. 고작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반복하면 관절과 근육에 무리가 생긴다. 운동이란 딱 그런 무리가 생기기 직전에 적당히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상태에서 멈출 수 있는 것이다. 그 단계를 넘어가면 당연히 다치는 경우가 많아진다. 얼마나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자신을 재충전할 수 있는가. 하루 12시간씩 일해보면 안다. 피로가 얼마나 몸과 마음을 피폐케 하고 일의 효율을 떨어뜨리는가를. 그래서 그나마 정상적인 기업들에서는 아예 잔업이나 야근 자체를 못하도록 강제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영세한 자영업이나 혹은 중소기업에서도 그럴 수 있겠는가. 대기업 가운데서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 공사현장인데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그러고보면 나 역시 한창 일용직으로 용돈벌이 할 때 새벽같이 일어나 나갔다가 자정 넘어 들어온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괜히 공사현장에서 사고가 빈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비싸게 써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잔업이나 야근보다 최소한의 법정근로시간동안 사람을 더 고용해 쓰는 것이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그럼에도 줄어든 근무시간에도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대부분 가장인 노동자들이 겪게 될 불운은 곧 가족의 불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나라들이 추구해야 할 것도 더 적은 시간만을 일하며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기껏 이룬 기술적 발전으로 더 많은 효율적인 생산이 가능해진 만큼 더 적은 시간만을 일해도 상관없는 세상이 온다.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참 멀리도 온다. 시작은 그냥 최근 몇 달 동안 꾸준히 운동하며 얻은 성과에 대한 자신감과 자랑이었는데 결국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온다. 인간의 기술은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보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궁극적 목표여야 한다. 인간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문명의 진보가 그것을 이루어준다. 더 적은 임금으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 그러나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생산성의 향상은 노동현장으로부터도 인간을 소외시킨다. 그것은 과연 인간이라는 집단에 있어 진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몸이 많이 건강해졌다. 진작 이랬으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를 안다. 잠시 몇 달 운동에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지만 끝내 계속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를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개인의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다. 그리고 비용이다. 국가의 역할이란 거기서 무엇이고 어디에 있겠는가.


역시 먹는 것보다는 운동이 좋다.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생활이 좋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대통령의 구호가 떠오른다. 사람이 먼저다. 무엇을 과연 어떻게? 내가 지금 정부를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이 무엇보다 먼저여야 한다. 첫째 명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괜히 밀양까지 찾아가서 상관도 없는 세종병원 화재에 대해 사과했던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정의 최종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입법권이 누구에게 있고 사법권이 누구에게 있든 지방행정을 누가 하든 결국에 그 모든 책임이 귀결되는 곳이 바로 대통령이라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바람이 불어 낙엽이 흩날리는 것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면 져야만 하는 자리가 바로 대통령인 것이다.


한 집단의 리더란 그런 것이다. 직장생활이란 자체가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에서 내려오는 스트레스보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하긴 결국 같다. 자기가 맡은 부서의 모든 일들이 부서장인 자신의 책임이 된다. 자기 밑에 있는 개인이 저지른 사소한 잘못조차 제대로 가르치고 이끌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 되어야 한다. 그러라고 남들보다 더 큰 권한과 더 많은 급여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내에서, 그리고 법무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최종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물론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법무부장관씩이나 되어서 해야 할 일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많은데 일개 검사 하나를 위해 매번 시간을 내고 사소한 일들까지 하나하나 꼼꼼이 챙기는 자체가 무리다. 그러라고 법무부 직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때 사실상 법무부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 지휘 아래 있는 직원들을 시켜서 사실을 알아보고 조치하도록 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미사일을 쏘라고 시킨 것이 아님에도 북한이 미사일 발사실험을 할 때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는 것은 문재인 정부에게 그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어서가 아닌 것이다. 그런 책임을 지라고 있는 정부이고 그런 책임까지 다하라고 법무부장관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서도 조사과정에서의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피해자인 서지현 검사에게 또다른 더 큰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그 부분은 법무부장관의 불찰이다.


비슷한 예로 세월호에서 사람의 뼈가 발견된 사실을 해수부 관계자가 장관의 지시까지 어기고 은폐한 사실을 끝내 직접 사과해야 했던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김영춘 장관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실을 은폐하라 전혀 지시한 적 없었음에도 해수부의 장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을 져야만 했던 것이었다. 잘못은 해수부 임원들이 저질렀지만 그 과정에서 장관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충분히 다하지 못했다. 자신의 판단과 조처에 미흡함이 있었다. 그로 인해 크게 상처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김영춘 장관을 경질해야 했느냐면 그것은 불찰이고 실수인 것이지 장관자리까지 내놓을 결정적인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단계에서 자신이 제대로 사실을 살피지 못하고 그 결과 어찌되었든 피해자인 서지현 검사가 더 큰 상처를 입었다면 그 모든 것은 최종책임자인 자신의 잘못이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검찰청과 협력하여 법무부 내부의 기강과 구조를 바로잡겠다.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안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었다. 설마 그런 정도 일로 장관더러 물러나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무시하고 자신의 책임을 외면한다면 그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경우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내가 노빠들에게 학을 뗀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뉴스공장을 보니 굳이 여자 아이스하키팀과 선수들을 흠집내지 않고서도 문재인 대통령의 판단을 긍정하고 옹호할 수 있는 여지들이 아예 넘쳐나고 있었다. 미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만으로도 얼마든지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올림픽 출전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면서도 문재인 정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성추행당한 피해자가 있는데 법무부 장관이 타겟이 되고 있다는 이유로 피해자와 피해자의 변호사의 신상을 털어 흠집내고 문제삼으려는 것이 도저히 상식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니 설사 실제 그런 큰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은 다음 조용하게 슬쩍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가 전략적으로도 현명한 것이다. 왜 역풍이 보는데 온몸으로 맞으려 드는 것일까? 바람이 불면 때로 납죽 엎드리는 것도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가 서지현 검사와 관련해서, 아니 성폭력 문제와 관련해서 따로 특별히 잘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메갈정권이라며 젊은 층 가운데 무리한 비난을 퍼부을 정도로 여성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은 것이 바로 문재인 정부다. 문무일 검찰청장 역시 적극적으로 진상조사와 근원적 해결을 지시하고 있으며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에 따른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무리해가며 박상기 장관을 감싸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오히려 법무부의 개혁을 위해서도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법무부의 인적구조를 철저히 쇄신할 수 있도록 다그쳐야 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박상기 장관이 자신의 자리를 걸고 이번 일의 원인이 된 법무부 내부의 문제를 철저히 바로잡으려 한다. 바로잡아야만 한다.


어떤 사건이든 피해자가 반드시 선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의 편에 선 사람들 역시 반드시 완전히 선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피해자에게 이익이 되도록 피해가 가지 않도록 피해자의 입장을 잘 반영해서 관철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변호사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고 가해자와 그를 비호한 검찰의 조직과 문화, 심지어 법무부의 인적구조가 문제여야 한다. 이건 이것 그건 그것 분리하는 사고가 필요하다.


하여튼 누가 문빠들 아니랄까봐 아주 신났다. 혹시라도 검찰 내부의 성추행 이슈가 문재인 정부에 흠을 내지는 않을까 안달하더니 피해자와 그 주변의 약점을 잡은 모양이다. 문제있는 변호인으로 인해 피해자가 다른 더 큰 상처를 입을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문재인 정부에 작은 상처라도 입힐까 안달하는 모습이다. 정말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 하는데. 새삼 깨닫는다. 문재인 정부는 넘치도록 잘하고 있다. 그들만 그 사실을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러니까 자영업자들의 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진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무엇이 자영업자들을 매출부진으로, 심지어 폐업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당장 지난 정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경제화두가 무엇이었는가를 떠올려보자. 무엇이었을까?


작년까지 가계부채가 무려 1400조다. 그런데 대부분 임금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급여를 받아 생활하는 중이다. 간단한 계산이다. 가계에 빚이 많다. 소득은 적다. 그런데 소비를 충분히 할 수 있겠는가. 당장 나만 해도 이번에 최저임금 오르면서 월급 오르자마자 그동안 벼르던 공기청정기를 주문한 상태다. 고작 몇 십만 원인데 그만한 여유를 내기도 대부분 임금노동자들은 어렵다. 외식은 당연히 될 수 있으면 사양일 수밖에 없다.


소비를 늘려보겠다고 별 쓸데도 없는 임시휴일까지 지정해서 집행하던 것이 전정부였다. 그렇게 소비의 위축은 자영업자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에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면 소비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겠는가. 바로 문재인이 '소득주도성장'이라는 화두를 들고나온 배경이 되었다. 이제는 생산만 늘려서는 안된다. 소비도 함께 늘려야 한다. 소비를 늘리려면 당장 국민들의 소득부터 늘려야만 한다.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던 아이디어였다. 다만 자본이 가진 위력이 그것을 실제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을 뿐이었다.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 것은 자영업자들 자신들만이 아니다. 최저임금을 올려받는 것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만이 아닌 잠재적 고객 가운데 상당수도 포함될 것이다. 물론 그 모두가 나의 고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일부만 자신의 가게를 찾아도 수입은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된다. 그 밖에 영세중소기업이나 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대책에 있어왔다. 최대한 그들의 권리를 지키고자 정부차원에서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단지 자영업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피고용인의 임금만을 강조하며 이야기하려 한다.


사실상 최저임금인상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작 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론하거나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언론도 사실상 없는 형편이다. 최저임금인상을 지지하는 언론들도 그 와중에 정부를 비판하기 바쁘지 어째서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가 정교한 논리를 전개하며 정부의 편에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저임금인상이 실패하면 그 책임은 온전히 정부에게 돌아간다.


어찌보면 참 대단한 나라라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무언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기사를 쓰기보다 어떻게든 정부에 흠집을 내는 것을 기사를 쓰는 목적으로 삼는다.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다. 정부가 어떤 의도로 정책을 추진하고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가. 어떤 점에서 장점이 있고 그것을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기레기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욕하기는 쉽다. 함께 책임지기는 어렵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장사가 잘되려면 손님이 들어야 한다. 손님의 주머니가 든든해야 지출도 쉽게 할 수 있다. 대부분 손님들은 임금노동자다. 언론만 제 역할을 했어도 이런 큰 혼란은 없었을 테지만. 몰라서가 아니라는 것이 더 괘씸하다.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이다.

우병우 때도 말했지만 대한민국에서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출세하기 위해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다. 그래서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그렇게 가르친다. 공부해서 출세하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다. 다른 말로 입신양명이라 부른다.


그렇게 공부만 해 온 인간들이다. 사회적 책임따위 배운 적도 없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가족조차 자신이 출세하면 그 덕이나 보겠다는 경우가 태반이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존경의 눈으로 봐준다. 부정도 불법도 비리도 패륜도 일단 출세했으니 실력으로 능력으로 인정해준다. 자신을 향한 비판은 실패한 자의 질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이 권력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이다. 검사내부의 수컷지향적인 문화는. 수컷지향이란 권력지향이다. 실력이란 폭력이고 위력이다. 그것을 스스로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한 마디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같은 검사를 성추행할 수 있는 당당함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자신을 향해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피해자의 편에서 말리는 시늉도 못한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듯하자 피해자를 좌천시켜 본보기로 삼는다. 성추행을 저지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살아온 대부분의 검사 수컷들의 의식이고 무의식인 것이다. 누구도 자신들이 얻은 출세를 욕보여서는 안된다. 흠집내려 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성폭행을 당해도 그것을 문제삼으면 실력있는 검사의 발목이나 잡으려는 꽃뱀이 된다.


검사들만의 문제냐면 사실 현실에서 일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같은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가해자의 부모부터 피해자를 달려가 악다구니를 놓는다. 앞길이 창창한 아이를 망치려 그러느냐. 선생님들과 다른 학생들까지 가세한다. 성적이 좋을수록. 주위로부터 인정받을수록. 그러므로 피해자가 가해자의 앞길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 폭력이 위력이 지배하는 야만사회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것만을 목표로 살아가는 야만사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검사라는 조직 안에서도 다르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을 뿐이다.


이래서 내가 페미니즘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수많은 약자인 피해자들의 편에서 함께 싸워주는 것이 그들 페미니스트들인 때문이다. 지금도 기사에 달린 댓글 가운데 별 되지도 않는 추측까지 늘어놓으며 피해자인 여검사의 의도를 의심하고 흠집내려는 이들이 있다. 대개는 남성들이다. 남성화된 여성들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문제로 다른 이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앞길을 막아서는 안된다. 성범죄와 관련한 이슈에서 피해자인 여성들에 대해 꽃뱀이라 주장하며 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잘나가는 남성을 여성이 망쳐서는 안된다.


그냥 한국 사회의 현주소인 것이다. 대부분 성범죄는 일반적인 의식과 달리 성욕을 동기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권력욕이다. 지배욕이고 과시욕이다. 단지 폭력일 뿐이다. 폭력을 통해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굳이 동성애자가 아니어도 동성을 향해서도 성폭력이 심심찮게 일어나고는 한다.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다. 위계가 지배하는 사회다. 그것이 전부인 사회다.


검찰조직 자체를 근본부터 바꾸지 않는 이상은 바뀌지 않을 문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실을 고발했으니 더이상 검사로 남아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검찰을 떠나야 할 지도 모른다. 무심결에 드는 이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야 말로 그런 현실을 말해준다. 그러면 검찰이 아닌 다른 조직 다른 사회는 다를까?


그러니까 부모새끼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가정 교육은 부모가 시키는 것이다. 도대체 부모새끼들이 애새끼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그래도 자식이 검사라고 뭔 짓을 하든 잘한다 우쭈쭈했겠지. 그냥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본능이지만 정의는 아니다. 한심한 꼬라지다.

그러니까 다시 강조해 말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것은 보유했다는 사실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납할 수 있는가? 당장 머리 위에 휴전선을 경계로 대치중인 북한이 핵무기라는 강력한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서 보유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설사 미국이 용납해도 우리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북한의 핵무장을 저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인 것이고.


다시 말해서 북한의 핵개발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저지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정부의 선택지는 한 가지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냥 협박이 아니다. 이것이 협박이 되려면 평화적인 수단으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저지하지 못했더라도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한 가운데 현상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당연히 앞서 말했듯 그것은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아니 대한민국 정부가 받아들이더라도 당장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의 강대국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 남은 선택은 무엇인가?


결국 셋 중 하나인 것이다. 평화적인 수단으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저지하거나, 아니면 무력을 사용해서 강제로 포기케 하거나, 아니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자체를 인정하거나. 평화적인 수단도 싫고 전쟁도 싫다면 따라서 결론은 하나인 것이다. 평화적인 수단도 싫고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도 싫다면 역시 선택은 하나인 것이다. 나머지야 당연히 전쟁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소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의미는 알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인가. 평화인가, 전쟁인가, 아니면 인정인가.


북한의 뗑깡은 그에 비하면 차라리 사소하다 할 수 있다. 응석 정도는 귀엽게 봐줘도 된다. 어찌되었거나 북한이 핵무기를 스스로 포기할 수 있게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본다. 평화적으로 대화로 해결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을 해보다 안되면 그때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절박한 인식 위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지금 치르는 대가들이 과연 너무 지나치다 여기는가. 당장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사소한 문제 정도는 얼마든지 인내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북한이 싫다거나 마음에 안든다는 감정은 그에 비하면 사소하다.


열병식도 크게 문제가 안되는 이유다. 오히려 열병식을 하는 동안에는 군사적인 도발을 할 가능성이 더 낮아진다. 이제와서 새삼 북한의 열병식이 우리 군에 위협이 될 가능성도 매우 낮다. 그럼 모든 점들을 포함해서 북한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차라리 깨질 평화면 일찍 깨지는 편이 낫다. 어차피 안될 거라면 일찌감치 파토나는 것이 낫다. 세상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진짜 안보불감증은 누구인가. 안이하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참여정부 내내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언론들과 차라리 전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첨예한 긴장관계 속에 있었다. 없는 사실마저 지어내며 보수언론들음 참여정부를 흠집내려 하고 있었고 정부 역시 적극적으로 그에 대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두 번 보수언론들이 하나가 되어 정부의 편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임기 초기 이라크파병이었고 또 한 번은 임기 말기 한미FTA였다. 특히 한미FTA때는 왜 사람들이 조중동이라 하는지 확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무려 임기말인데 심지어 노무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었으니.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이 과연 무엇이 다른가 새삼 깨닫게 된 계기였다. 보수언론은 그 대상이 누구인가를 따지지 않는다. 노무현이라도 상관없다. 이명박이든 박근혜든 가리지 않는다.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면 된다. 자기들이 추구하는 정책을 실제 현실로 이루어낼 수 있으면 된다. 노무현이러라도 자신들이 바라는 정책을 펼치면 적극 지지하고 그를 대신해서 반대하는 진보언론과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차라리 탐욕이라고 해야 좋을 것이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보수적인 가치를 실현할 수 있으면 그 주체가 노무현이든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지지하며 그를 위해 최대한 힘을 실어준다. 그런데 정작 자칭 진보언론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동안에도 혹시라도 정부를 향한 비판이 자신들에게도 향하지 않을까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야당을 비판하고 정부를 흠집내고 그러면서 정작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책을 온전히 추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무능이라는 낙인까지 찍는다. 참여정부가 좌측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했다 하는데 과연 좌회전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데 자칭 진보언론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대화를 통한 북한문제 해결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그를 위한 논거와 논리를 개발하며 적극적으로 반대여론과 맞서싸우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혹시라도 정부와 같은 편으로 여겨질까 두렵기라도 한 듯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한 편으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습관적으로 끼워넣고는 한다. 혹시라도 보수언론이 비판하는데 자기들이 비판하지 않으면 정부와 한 묶음으로 여겨질까 적극적으로 보수언론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역시 반복이다. 정부는 진보적인 정책을 펼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면 누가 자칭 진보언론이 추구하는 진보적인 가치를 현실에서 이루어 줄 수 있을까.


절박하지 않다는 것이다. 간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과 이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상을 고르지 않는 보수언론에 비해 그들의 고고함은 따지고 가리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안되도 그만이다. 안되면 안되는대로 욕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자칭 진보언론들이 차라리 진보정당인 정의당이 아닌 진보적인 이념이나 가치와 전혀 거리가 먼 안철수와 국민의당을 지지하며 나선 이유였다. 사실상 현실에서 정책을 통해 진보적인 가치를 이루려는 어떤 의지도 욕심도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노무현은 안된다는, 친노는 절대 안된다는 감정적인 반발만이 전부였다. 문재인만 아니면 된다. 심지어 문재인만 아니면 홍준표라도 상관없다. 진보적인 가치는 가치대로 어차피 지면을 통해 비판하면 되는 것이니까. 


딱 나같은 블로거의 마인드다. 인터넷에 널린 자칭 논객들의 사고방식이다. 실제 현실에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의지란 전혀 없이 그냥 말로만 끝낸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으로 내가 추구하는 선명함은 다 드러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룸펜이랄까. 차라리 골방에서 혼자 블로그에 글쓰며 낄낄거리는 수준이라면 그렇게 문제도 되지 않을 텐데도. 그러니까 일개 블로거처럼 독자들과 싸우려 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언론이 독자와 싸울 일이 어디 있는가. 어차피 자신들이 추구하는 독자층이 아니라면 무시하면 될 테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독자층으로부터 비판받는다면 반성하면 되는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들을 비판하는 독자들을 설득해서 돌려세우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언론이기는 한가.


확실히 다른 것이다. 거짓마저 지어내가며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에 반대하는 정부를 꺾으려 드는 보수언론과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책을 실제 실천에 옮기고 있는데도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거리를 두며 비판부터 해대는 자칭 진보언론들과. 그래서 진보언론이라 부르는 것도 너무 과분하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이념과 가치를 실제 추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을 진보언론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래도 진보적인 정부이니 항상 지지해야 한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할 때 자신들이 바라는 바와 일치한다면 과거 보수언론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의 편에서 힘도 실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적인 이념과 가치가 진짜라면. 진실하고 간절하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보수언론들이 내세우는 논리와 정면으로 싸우며 여론을 움직이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손놓고 그저 비판에만 숟가락을 올리려 할 것이 아니라.


마치 과거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듯 하다. 새누리당과 당시 민주당을 비교할 때도 비슷했었다. 정작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정당의 운영 자체는 차라리 한나라당보다도 민주적이지 못했었다. 조직이나 체계가 새누리당보다도 구태적인 상태였었다. 과연 언론이 아닌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만으로 보았을 때 누가 진보이고 누가 보수인가. 하기는 항상 사실과 진실만을 보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언론으로서도 그 차이는 미미하다 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자신들이 추구하는 보수적인, 혹은 진보적인 가치에 충실하며 헌신적인가. 그래서 그들은 보수고, 저들은 자칭 진보다.


어쩔 수 없이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항상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면 어째서 정부를 대신해서 반대편에 선 언론들과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는가. 일개 블로거나 일개 네티즌들조차 할 수 있는 일을 어째서 그들은 전혀 하려고도 않고 있는 것인가. 조중동조차도 노무현의 편에서 진보언론들과 싸우고 있었다. 대중을 움직여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정부가 추진하는 진보적인 정책들은 전혀 그만한 가치도 없는 것인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로지 하나다. 그들에게 정작 진보적인 정책이란 그만한 의미가 없다. 어떤 절실함도 없다. 현실이다.

그러고보니 오늘 문재인 대통령의 딸 문다혜씨가 정의당 당원이라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하긴 유시민 작가도 딸 유수진씨도 정치성향이 상당히 다르다. 사실 이게 정상이다. 가족이라고, 혈연이라고, 친구라고, 동문이라고, 동향이라고 정치성향까지 같을 필요는 없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서로 다름을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공존하는 것이다.


물론 이미 정당에 가입한 상태에서 다른 정당에 가입하거나 새롭게 정당을 창당하는 행위는 명백히 해당행위라 할 수 있다. 일단 당적을 내놓고 난 뒤에 당을 옮기고 창당도 해야 도의적으로 옳은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이미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심지어 공동대표까지 지냈던 사람으로써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대표를 비난하다가 뛰쳐나가 당을 차리고 정치인까지 빼갔던 안철수가 그리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다수 당원들이 반대하는 통합이었다. 대표 자신도 통합은 없을 것이라 약속한 바 있었다. 충분히 반대의견을 수렴한 정당한 절차를 거친 통합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반대의견을 배제하고 찍어누르고 찬성의견만을 모아서 밀어붙인 통합이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도저히 이같은 통합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반발해서 차라리 당을 쪼개서 나가겠다 선언한 것이었다. 안철수가 끝내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을 뛰쳐나가 새로운 당을 만든 명분과 아주 유사하다. 결국 안철수 자신도 문재인 대표를 받아들이지 못해 당을 쪼개서 나간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최소한 당이 쪼개지는 것이 싫었다면 당시 문재인 대표가 그랬듯 반대파를 설득하려는 노력 정도는 보여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없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한 안철수의 대답은 다수 당원에 대한 일방적인 징계였다. 무작정 나를 따라오라. 따라오지 않으면 징계하겠다. 차라리 어차피 생각이 다르고 길이 다르면 그만 놓아주라는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의 태도가 더 민주적으로 여겨진다. 이해가 가는가. 과거 새누리당에 몸담았던 인사가 최소한 정당정치에 있어서는 더 민주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어이가 없는 것이다.


하기는 당연하다. 2007년 차라리 당시 대통합민주신당보다 한나라당이 더 낫겠다는 생각마저 가지게 한 것은 그나마 대통합민주신당보다는 더 선진적이고 민주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여겨졌던 한나라당의 모습 때문이었다. 김영삼 이후 제왕적 총재가 사라지고 여러 계파가 공존하면서 이회창과 박근혜 등에 의해 여러차례 혁신을 시도하면서 한나라당은 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정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에 비해 새롭게 제대로 된 정치를 해보자며 시작한 열린우리당마저 당권을 쥔 몇몇 인사들에 의해 오히려 더 퇴보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도 잊지 않는다. 정동영과 김한길 등 당권파가 당시 당권을 장악하며 저지른 패악을. 그래서 더 용서하지 못할 사람들이 지금 민주당에도 적지 않다. 안철수가 누구로부터 정치를 배웠고 누구와 정치를 함께 해오고 있었는가. 아, 그러고 보니 뛰쳐나간 민평당도 그다지 선량한 피해자라 말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리 그래도다. 아무리 그래도 차라리 출당시켜달라는, 그것도 한두명도 아니고 백수십에 이르는 당원들에게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중징계라니. 그런 짓은 이명박도 박근혜도 감히 저지르지 못했었다. 차라리 선거를 앞두고 공천권으로 불이익을 줘도 자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아예 무더기로 징계를 내리고 무력화시키지는 않았었다. 국민의당 당원이 도대체 몇 명이라고. 그 가운데 징계를 받을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최소한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정치인 가운데 이렇게 무도한 일을 저지른 경우란 아예 없다시피 했다. 도대체 정당을, 당원을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자기 돈으로 차린 정당이라 주장했던 것도 웃기다. 정당을 만드는데 자기 돈이 쓰였어도 공당이란 대표 개인이 아닌 당원 모두의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국민의당이 자기 소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과연 이런 인간이 혹시라도 대통령에 당선되기라도 했다면 정말 끔찍했을 듯하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도 그렇지만 어차피 국정이라는 게 반대 절반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 것일 터다. 국정이 아니더라도 한 집단의 리더라면 최소 절반은 반대자와 비판자를 함께 아우르며 같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사사건건 반대하고 발목을 잡고 비난을 듣는 가운데도 그것을 모두 아우르며 함께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하는 것도 억누르고 무시하고 그리고는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중징계를 내려 응징한다. 대통령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그보다 더 크다. 그러니까 이명박이나 박근혜도 한 번도 이렇게까지 했던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의원수도 적지 않은 원내 제 3당의 대표라는 인간이. 그런데 대통령까지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무릅팍 도사'에 출연한 것을 보고 이상한 놈이라 여겨 처음부터 끝까지 싫어하게 되었던 나 자신이 대견하게 여겨질 정도다.


원래는 그다지 비판할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은 아니라 여겼었다. 더욱 대선이 끝나고 알아서 몰락해 주면서 더이상 위협이 안되는 그냥 정치개그맨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뭘 해도 문재인 정부다 더불어민주당에 위해가 안되는 인간이다. 언론이 애써 편을 들어주어도 언론의 신뢰성만 해치고 말 뿐이다. 그 정도로 대선 이후 안철수가 보여준 행보는 정말 역대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다하다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이런 와중에도 안철수가 새정치민주연합을 뛰쳐나갈 무렵 친문패권을 부르짖던 언론이 조용하다는 것도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안철수는 무섭고 언론은 우습고. 이런 인간이 알아서 새정치민주연합을 뛰쳐나가 자멸해 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울 뿐. 이런 인간이 그동안 유력 대선후보로 대중의 지지까지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민주평화당을 따로 차려 나가려는 통합반대파를 동정하느냐면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니다. 딱 2014년 말부터 자신들이 해온 짓거리를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철수가 그런 인간인 것을 몰랐는가? 몰랐다면 멍청한 것이고 알았다면 더 멍청한 것이다.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어야 하는가를 전혀 몰랐다. 당장 국회의원 배지 한 번 더 달면 그것으로 끝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래도 그 가운데는 어차피 불가능했을 국회의원 배지도 한 번 달았으니 다행이라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다행이라 여길지 모르겠다. 


아마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유승민은 대표지만 안철수는 아니다. 사람을 가린다. 대표라 불러주기에도 인간의 격이 한참 떨어진다. 그런데도 유력 대선후보라고 대중으로부터, 아니 정확히  다수 언론의 지원을 받아왔었다. 그것도 대표적인 진보언론들이 안철수 대통령만들기에 앞장섰다. 지금도 들리지 않는 친안패권주의. 2014년 이후 문재인과 지금 민주당에 쏟아지던 저주를 기억한다. 새록새록하다. 그냥 웃긴다.

북한의 핵무장이 미국이나 특히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그러니까 북한의 핵무장이 특히 대한민국에게 어느 정도의 위협으로 인식되고 따라서 그를 저지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각오하고 감수해야 하는가. 


북한의 핵개발에 따른 미국의 군사행동의 가능성을 해외의 여러 언론들이 중요하게 경고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차피 미국 입장에서 북한이란 바다 건너 남의 나라다. 만에 하나 북한의 핵무장이 미국의 이해를 해칠 경우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 아예 먼 바다 건너에서 무력으로 응징하여 좌절시키는 쪽이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북한의 핵무장을 허용하면 이후 다른 나라들도 북한과 같은 모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국제사회에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최악의 가능성이다. 실제 전쟁까지 치렀고 지금도 군사적으로 대치중인 적국이 핵무기로 무장하고 그 사실을 공인받는다는 것은 대한민국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최악의 위협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미국과 함께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쪽이 장기적으로 더 대한민국 안보에 이익이 될 수 있다. 


그런 정도의 사안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도 최다한 미국의 군사행동을 막으면서 만에 하나 대한민국 정부가 군사행동에 나서야 할 상황을 차단하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손놓고 있다가는 결국 최악의 옵션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릴 수 있다. 아예 처음부터 군사적인 옵션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선택은 제한되어 있다. 되든 안되든, 나중이야 어찌되든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왔을 때 최대한 붙들고 무엇이라도 시도해봐야 한다.


북한 그까짓 것. 못살고 궁상맞은 거지무리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제멋대로의 양아치 깡패따위들에 어째서 우리 정부가 저처럼 저자세를 보여야 하는가. 하자는대로 다 들어주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당장 칼을 빼들면 피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 최대한 피를 보지 않기 위해 인내해야 하는 칼잡이의 처지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죽일 수 없어서가 아니다. 죽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피를 보면 결국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보게 된다. 하지만 결국 더이상 인내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다. 


나는 아주 전부터 문재인 정부가 북한을 무력으로 타격할 가능성을 주장해 왔었다. 그렇게 유약한 사람이 아니다. 만일 필요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면 문재인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자리도 아닌 대한민국을 책임지는 대통령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누구보다 가장 잘 확실히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문재인이다. 문재인의 다급함은 자신의 살기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다. 트럼프가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은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북한을 무력으로 응징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렇게까지 설명했어도 이해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간단히 설명하자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응징이 시작되는 순간 북한의 군사적 대응도 당연히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의 군사적 대응은 특히 휴전선 일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들은 후방의 주요 요충지에도 실제 피해를 주게 될 가능성이 높다. 보다 확실하게 단기간에 응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징집이나 징발이 이루어지게 될 가능성도 높다. 전투에 실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조기에 압도적으로 북한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결정짓는다. 그것이 최선이다. 어영부영 최소한의 자원만을 동원했다가 전쟁이라도 길어지면 피해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해 좋은 일일까?


어쩌면 진정으로 북한 핵무장으로 인한 위기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북한에 대한 적개심만을 앞세우려는 다수 국민들이 아닐까. 북한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정책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그 무책임함이야 발로 북한의 핵무장으로 인한 현실의 위협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세계는 모두 북한의 핵무장으로 인한 전쟁의 위협을 현실로 느끼고 있는데 정작 자신들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그동안 정부들이 무책임했다는 뜻이다. 차라리 강경하려면 군사적인 대응까지도 선택지에 올리고 행동했어야 했다. 군사적인 선택 없는 강경함이란 밀가루 없는 풀빵이다.


그러니까 두려운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멍청해서 정작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전쟁을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문재인을 인정한다. 대통령으로서 문재인을 신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을 싫어도 예상할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오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말리지도 못한다. 대한민국과 국민의 안위가 걸린 선택이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서가 아니다. 우리가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장이란 대한민국에게 그런 정도의 위협이다. 다행히 미국이 북한을 무력으로 응징하려 해서 승리의 가능성은 절대적으로 높다. 좋아할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그러니까 몇 년 전까지 나같은 경우 택배를 시키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골라서 사는 것을 더 선호했었다. 간단한 계산으로 차비가 택배비보다 더 쌌거든. 택배비조차 아껴보겠다고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굳이 내가 직접 나가서 사는 것보다 택배로 주문하는 쪽이 더 싸서 그쪽을 선택한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부려서 시키는 것이 더 싼 것이 과연 정상인가.


몇 번이나 말했던 사람의 가치다. 사람의 노동력이 가지는 가치다. 내가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부려서 쓰는 비용이다. 한국 사회에서 최저임금이란 그래서 인간의 가치라 할 수 있다. 과연 노동자들에게 그만한 임금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가.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에 그만한 비용을 들일 가치가 있는가. 그래서 반대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란 그렇게까지는 아니다. 설사 산업현장에서 재해로 인해 사람이 죽어나가도, 심지어 사고로 수백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들어갈 비용만을 말하며 눈썹 하나 깜짝 않는 사람들이 현실에 적지 않다. 그런데 고작 그런 노동자들을 위해 그만한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그를 위해 내가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가.


솔직히 이런 글 쓰면서도 만일 택배비가 더 오르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고는 한다. 그러면 내가 직접 나가서 장도 보고 물건도 다르고 해야 한다. 보통 수고가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날까지 추우면 차라리 배달시키지 말고 그냥 굶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니까 그런 수고를 대신해 주는데 지금 내가 치르는 비용이 정당한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청소지만 누구나 하기 싫은 청소이기도 하다. 이런 추운 날 주차관리를 하고 건물 경비를 하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뙤약볕에 나가서 일하려 하면 하루만에 온몸의 살이 벗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대신해서 맡기는 것이다. 누구나 하기 싫은, 혹은 번거롭고, 혹은 귀찮고, 혹은 수고가 드는 일을 대신 시키면서 그만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물가가 오른다고 뭐라 하지만 물가야 언제나 다른 이유로도 언제나 오르고 있었다. 택배비만 해도 벌써 몇 년 째 제자리다. 물류센터에서 뼈빠지게 물건 날라도 최저임금 이상은 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최저임금 올랐다고 당장 물가가 올라야 할 정도로 대부분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최저임금만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장 다른 이유로 물가가 오르는 것은 욕하면서 최저임금을 이유로 물가를 올리는 것은 오히려 이해하며 최저임금만을 탓한다. 최저임금만 아니었으면 오르지 않아도 되었을 물가니 물가를 올린 자체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노동력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단적으로 알게 해주는 주장이라 하겠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작년 임금보다 더 높아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이 아니다. 노동자들이다. 자신들도 돈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그런 노동자를 가족으로 두고 있을 사람들이다.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희생을 그토록 안타까워하면서 노동자의 임금에 대해서만큼은 올려서 안된다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임금보다 자신이 지불해야 할 비용에 더 관심을 가진다. 양보하는 것도 희생하는 것도 결국 노동자다. 입맛이 쓴 요즘이다. 택배비는 그래서 안 오를 것 같지만.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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