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년 되었나?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베토벤바이러스'에서 강마에는 이런 말을 했었다.


"하루를 쉬면 내가 할고, 이틀을 쉬면 남이 알고, 사흘을 쉬면 지나가는 개가 안다."


해방되고 한반도가 온통 혼란에 빠졌던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무려 36년 동안, 아니 일본에 병탄되기 전에도 상당기간 한국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국가단위를 운영해보지 못한 상태였었다. 책임을 지고 국정을 운영해 본 사람이 거의 없었고 당연히 믿고 맡길만한 신뢰와 권위를 가진 사람도 없다시피 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지 국가단위를 운영해 본 경험자들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친일파들의 등용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사법부든 행정부든 말단 지방관청이든 뭐라도 해 본 사람이 있어야 맡기든 할 것 아니겠는가.


최소 5년이다. 2012년 파업이 실패하고 파업에 참여했던 노조원들이 좌천되며 MBC가 저들에게 완전히 장악되고 무려 5년 동안 MBC는 사실상 언론으로서 공백상태에 있었다. 언론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취재도 한 번 해 본 적 없었고 어떤 식으로 뉴스를 내보내야 하는가 고민한 적도 없었다. 그냥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받아쓰고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것이 전부였었다. 경험있는 기자와 아나운서들도 대부분 현장을 떠났고 대신해서 현장을 채운 것은 단순히 그 빈자리나 채우려 고용한 경력직과 이념적인 이유로 채용한 신입들이 전부였었다. 오죽하면 MBC내부에서도 그런 우려가 나오고 있었겠는가. 제대로 탐사보도를 할 수 있는 인력이 MBC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원래 있던 경험과 실력을 갖춘 인력들은 너무 오래 현장을 떠나 있었고, 그동안 현장에 남아 있던 인력들은 제대로 된 경험과 실력을 쌓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파업에 성공하고 사장이 바뀌고 사람들만 일부 제자리로 돌려놓은 상태다. 왜 일부라 하느냐면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아예 MBC를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과연 그러잔다고 이전의 MBC가 보여준 것과 같은 제대로 된 뉴스를 내보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사흘만 연습을 그만두면 지나가는 개가 안다는데 과연 방송이라는 것이 5년이라는 시간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터다.


사장 하나 바뀌었다고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사장이 바뀌었어도 결국 보도를 책임지는 것은 일선 기자와 아나운서들이다. 과연 지금 일선에 있는 기자와 아나운서들이 제대로 뉴스를 취재하고 보도할 능력과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점검하고 정비해야만 했었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교육하고 훈련시켰어야 했다. 명분은 충분하다. 그동안 MBC가 너무 망가져서 바로 뉴스를 내보내기에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다. 더 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다음 제대로 MBC다운 뉴스를 내보내겠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 급했던 것일까. 결국 빠른 뉴스보도는 이렇게 문제를 만들고 만다.


몇 차례 터무니없는 오보가 있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응마저 너무 서툴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중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 파업이 끝나고 겨우 생겨나려던 기대마저 허물고 마는 엉터리 뉴스에 대응이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심지어 인터뷰조작까지 하고 있었다. 뻔히 드러난 이름과 얼굴을 가지고 마치 아닌 것처럼 평범한 시민으로 위장해 자신들이 의도한 인터뷰를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언론으로서의 자격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원래 MBC가 하던 방식이라면 내가 MBC를 오해했던 것이고, 아니라면 여전히 MBC는 내부정비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책임은 MBC가 져야만 한다.


기다리고 있다. 과연 지금 MBC의 뉴스를 믿고 봐도 괜찮은 것일까? MBC의 뉴스를 전처럼 믿고 봐도 괜찮은 것일까? 한 한 달은 내부정비에 쏟았어야 했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럴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엉터리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은가. 이런 꼴 보자고 지난 몇 달 MBC정상화를 위한 파업을 지지했던 것이 아니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커진다. 믿었던 만큼 분노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분명 MBC는 약속했었다. 노조원들은 시민들과 약속한 바 있었다. 무엇을 위한 파업이고 투쟁이었던가? 그러나 5년의 시간 만큼 유예는 둔다. 아직 기다리는 중이다. 부디 더이상 실망케 하지 않기를. 화난다.

그러고보니 몇 년 전 어느 연예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기자가 지식인이던 시대가 있었다."


사실 그랬었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대학졸업은 커녕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대학까지 마치고 남들과 다른 높이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그들의 존재는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했었겠는가. 더구나 통신도 발달하지 못해서 개인의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던 시절 기자라는 이유로 세상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보통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소식까지 먼저 접할 수 있었다.


괜히 아이들 글쓰기와 논리력을 길러주겠다고 신문사설을 읽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그것들을 글로 써서 대중에 전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그들에 대한 신뢰와 동경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기자라면 다르겠지. 기자니까 자신들과는 다르겠지.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그리고 실제 많은 기자들이 기자로서의 양심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목숨까지 내던지고 있었다. 권력의 집요한 탄압 속에서도 일신의 안위나 경제적인 풍요마저 포기한 채 오로지 진실과 정의만을 위해 가장 앞장서서 싸우고 있었다. 최소한 내 또래에서 아직까지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는 것은 그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어지간하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거의 가는 곳이 대학이 되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가 문제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로 더이상 의미를 가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그냥 몇 번 클릭만 하면 멀기만 하던 해외의 유수언론들마저 바로 찾아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아예 개인이 직접 뉴스를 생산해서 SNS등을 통해 공유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굳이 기자의 눈과 귀와 손을 빌지 않고서도 개인이 직접 정보를 찾아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재생산하여 다른 개인들과 공유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기자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나마 기자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자존마저 저버린 그냥 월급쟁이들이 지금의 현실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조금만 사정이 불리해지면 하는 말이 회사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시키니 그렇게 한다. 데스크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까 대중이 기자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가장 첫째 이유는 그같은 개인의 사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직업윤리와 사명감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실을 위해 회사와 싸우고 데스크를 설득하는 의지와 용기다. 아니라면 기자들 자신이 말하는대로 그냥 월급쟁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싫은 일도 억지로 해야 하는 평범한 개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굳이 그런 기자들에게 특별한 신뢰와 존경을 보내야 할 이유가 과연 있겠는가. 나도 역시 그냥 월급쟁이인데.


그냥 시대가 달라진 만큼 기자의 역할과 의미 역시 달라진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아닌 곳도 많다. 여전히 기자로서의 양심과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고 진실과 정의를 쫓는 기자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런 기자들은 존경받아야 한다. 그런 기자들이 쓰는 기사에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부족함이나 비겁함을 가리는 방패로 써서는 안된다. 스스로가 알지 않은가. 자기는 그런 기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데도 여전히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대중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려 한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인하고 몰아가려 한다. 그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들에 대한 경멸과 적대감을 심지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스스로 기자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서 기자에 대한 대중의 존경과 신뢰만은 여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기자도 더이상 예전의 기자가 아니고 대중도 더이상 예전의 대중이 아닌데 여전히 예전과 같은 관계이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언론과 대중 사이에 보이는 심각한 균열과 괴리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봐도 좋다.


기자는 더이상 예전의 기자가 아니다. 대중도 더이상 예전의 대중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이상 전과 달라진 현실에서 기자와 대중은 각각 어떤 식으로 새롭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하겠는가. 그러니까 아무나 하는 것이 기자라는 것이다.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 기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고등교육까지 받은 다수의 대중 가운데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언론사에 입사도 할 수 있었기에 단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들처럼 월급 받으며 사주와 편집부가 시키는대로 쓰라는 기사만 충실하게 생산해낸다. 직장인이다. 직업인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 된다. 대중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대중을 이끄는 것도 아니다. 회사로부터 받는 급여명세서를 위해 취재도 하고 기사도 쓰는 단지 직장인에 불과한 것이다. 딱 거기까지면 된다. 어디 감히 기자에게. 그래도 기자인데. 하지만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 그런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이미 많은 언론사들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오로지 광고주를 위해서. 사주의 이익을 위해서. 정치권력과는 목숨걸고 싸울 수 있었던 언론이지만 자본권력 앞에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먹고 살아야 하는 소시민이 되고 말았다. 언론이라는 브랜드가치를 지켜야 하는 소수의 유력언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론들이 그같은 자본의 논리에 굴복해서 그를 위한 기사를 단지 생산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기에는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그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치 남들과 다른 세상을 노니는 양 대중을 가르치고 이끌겠다는 오만이란 얼마나 근거없고 허황된 것인지. 그럴 자격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언론이란 기자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인가.


사실 얼마전 중국에서 중국인 사설경호원에게 다른 사람도 아닌 대한민국 기자가 폭행당했을 때 같은 국민으로서 나 역시 분노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기자였으니까.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었으면 당연히 분노했다. 그냥 흔한 월급쟁이였다면 앞장서서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을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이 다른 월급쟁이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자들이 느끼는 억울함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특히 중국에서의 기자폭행 이후 대중과 언론 사이에 괴리가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 이유였던 것일 테고. 어느 언론에서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더이상 언론은 대중의 위에서가 아니라 대중의 아래에서 소비자인 그들을 섬기는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현실은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바뀌어 있는데 허튼 자존심으로 그 현실을 부정한 결과가 대중들에게 철저히 부정당하는 현실인 것이다.


단지 중국에서의 기자폭행은 계기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대중과 언론 사이의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그를 계기로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대중이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언론이 대중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웠다. 마치 귀족이 사라진 시대 더이상 귀족을 공경하지 않게 된 대중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몰락한 귀족의 후손을 보는 느낌이랄까? 원래 기자란 이런 것이어야 하는데. 기자란 대중들에게 이런 존재여야 했을 텐데. 이런 대우를 받아야 했을 텐데. 하지만 기자라고 다 같은 기자는 아닌 것이다. 심지어 한겨레라고 같은 한겨레가 아니기도 한 것이다. 80년대 그 엄혹했던 시절을 고통속에 견뎌온 참언론인의 양심과 자긍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지금의 한겨레를 있게 한 것이다. 단지 그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 이순신의 후손이라고 그를 이순신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은 전제왕조시대에서나 통했을 사고방식이다.


솔직해지면 된다. 정직해지면 된다. 원래 기자의 일이 그런 것 아니었던가. 괜한 허세와 허위로 속이려 들지 말고 솔직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받으면 된다. 딱 거기까지면 기자라고 특별히 다른 직업보다 더 싫어하고 미워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기레기라 불릴 일도 없을 것이다. 기레기라는 말도 결국 기자에 대한 남다른 기대와 신뢰가 전제된 말이다. 돈을 받으니 쓴다. 돈을 주니까 쓴다. 대중이 돈을 지불하니 그를 위해 쓴다. 목적과 동기를 알면 행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서로 싸울 일도 사라진다.


안타까운 것이다. 주제를 모르고 분수를 모른다. 정작 기자라는 인간들이 달라진 현실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기자가 다 같은 기자가 아니다. 언론이 다 같은 언론이 아니다. 대중이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기자와 언론이 알려줬다. 자신들만 모르고 있다. 한심하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일본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외교적 부담 역시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국민들에 대한 책임보다 더 무겁지는 않다. 위안부, 아니 일본군성노예문제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이며 국민의 자존에 대한 것이다. 정부는 그러므로 이에 대해 여기까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단지 그런 각오가 필요할 뿐이다.


의외로 위안부협상 파기로 인한 일본과의 관계경색으로 대한민국에 돌아올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다. 애당초 오바마가 한국정부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압박했던 이유도 한국 정부의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전승절에 직접 잠석하여 미국 정부의 의심을 자초한 것이 가장 컸었다. 그에 반해 지금 정부는 어느때보다 심지어 굴욕적이라 할 정도로 친미일변도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미국과 손잡고 무력사용을 제외한 모든 강경한 대책을 함께 행동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중국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사드배치에 대해서마저 침묵을 이끌어냈다. 일본과 사이가 나빠져도 결국 미국이 원하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미국을 중심으로 줄서기 해야 한다. 결국 위안부 협상은 한일 양국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지금 당장 일본이 한국정부에 보복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한국정부에 진짜 치명적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일본이 한국정부에 강경하게 나올수록 위안부협상에 대한 이슈는 세계로 더 확산되어 번져갈 가능성이 높다. 어째서 일본이 이토록 한국정부에 강경하게 나오는가.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기에 일본 정부가 이렇게까지 한국정부에 강경하게 반발하는가. 협상내용에 대해 알려지고 이면합의에 대해서까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 무엇보다 위안부문제 자체가 다시 한 번 세계의 이슈로 확대된다. 부담은 일본정부에 더 크다. 그렇다고 명색이 민주주의 국가인데 중국의 경우처럼 무역이나 관광까지 직접 통제한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신과 관계될 수 있다. 외교문제를 경제와 민간교류에까지 연관짓는 것은 국가적인 신뢰를 크게 떨어뜨리는 행위다. 누구에게 더 큰 손해인가.


차라리 재협상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라면 위안부협상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 있는 아베정부에 있어서 그것은 정권에 대한 지지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국익과 아베 개인이나 그 정파의 정치적 이해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야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일본은 십수년 전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전례가 있다. 국민의 존엄과 이익이라는 당위는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누구에게 더 유리한 조건인가.


그냥 문재인 정부가 싫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만 아니라면 일본에 나라도 팔아넘길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이기 때문에 잘못된 협상이라도 위안부협상을 지켜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하려는 것이기에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해서 위안부협상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나마 최소한의 염치라도 있는 언론과 야당이라면 그렇게까지는 않는다. 누구 잘못이다? 별로 어려울 것 없다. 어려운 건 얼마나 모양새를 갖추느냐 하는 정도 뿐이다. 간단하다.

위안부협상 TF의 발표가 있고 미국에 대한 책임론이 상당히 크게 불거지고 있다. 특히 그동안 한국인에게도 이미지가 좋았던 오바마 미국 전대통령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다.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면서 오바마 정부의 압력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협상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일까?


TF의 발표를 아무리 뜯어봐도 협상의 세부내용에 대해 미국정부가 개입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개연성도 희박하다. 협상의 상세내용이야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정할 일이지 주권국가들인데 미국이 이래라저래라 일일이 지시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단지 미국정부의 역할은 과거사 문제로 지나치게 소원해진 한일관계를 복원시켜 미국이 주도하는 태평양의 질서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에 있었다. 점차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당시처럼 너무 소원해 있어도 곤란하다.


문제는 지은 죄가 있다 보니 당시 박근혜 정부의 사정이 무척 다급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이나 두려움이라도 있었다면 더 신중했어야 했을 텐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협상결과를 보고서 오바마도 얼마나 당황했을까. 설마 아무리 박근혜라고 하다하다 이렇게까지 박근혜일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양국간에 맺은 협상을 미국에게도 이익이 되는데 무르라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찌되었든 한일관계가 복원되면 태평양에서 더욱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것을 누구를 욕할까?


그냥 박근혜가 박근혜였던 것이다. 뒤의 박근혜는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다. 차마 다른 표현을 써보려 했는데 어떻게 해도 상상을 뛰어넘는 멍청함과 무책임을 표현할 단어가 적절치 않아서. 기레기가 기레기한 것이나, 홍준표가 홍준표한 것이나, 박근혜가 박근혜한 것이나. 일본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로또를 하나 챙긴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박근혜(일반명사)를 민주주의국가라고 대통령으로 뽑아준 대한민국 국민들에 감사할 밖에.


다른 사람 탓할 것 없다. 한미동맹이 중요한 것 알면서 전승절에 중국을 방문해 언론에 사진까지 찍힌 그 무개념함을 욕할 뿐. 자신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와 결과에 대해 생각할 머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믿지 않는다. 사람이 보수적이 되어 가는 이유다. 진짜 끔찍한 4년이었다.

전국시대 진의 명장이었던 조사는 자신과 병법을 토론해서 이기기까지 한 아들 조괄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장차 지휘관이 되면 군병을 망칠 놈이다."


원래 책임이 무거우면 그만큼 생각도 행동도 신중해지는 법이다. 자기에게 지워진 책임에 비례해서 더 신중하게 무겁게 조심해서 판단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래서 매순간 고민하고 모든 것에 갈등한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의심하며 끊임없이 숙고한다. 반면 책임이 없다면 그만큼 더 자유롭고 가벼워진다. 이를테면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재주를 과신해서 산으로 올랐던 마속처럼. 정작 사마의의 대군에 패했을 때 군을 버리고 가장 먼저 가장 멀리 도망쳤던 것이 바로 마속이었다.


진정 자신이 대통령이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국민의 대표로써 국제사회에서 국민의 자존과 이익을 지키는 중대한 책무를 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더라면. 그래서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국민에 미칠 영향을 무겁게 깨닫고 있었더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국민이 분노하고 반발하는 것에 최소한 꺼리는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러니까 국민이 무서워서라도 이렇게는 해서 안된다. 국민이 반대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 없이 그저 언론과 공권력을 이용해 찍어누르고 밀어붙이면 된다. 모르게 숨기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단지 일본과 위안부협상을 타결하고 관계를 정상화한 결과만 남게 된다. 대통령은 없고 박근혜라는 자기만 있었다.


하긴 누구에게 정치를 배웠겠는가. 벌써 시대는 40년이나 훌쩍 지났는데 여전히 자기 아버지가 정치하던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말 안들으면 잡아가두고, 무고한 사람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여서 겁주고, 언론을 장악해서 나팔수로 삼고, 당연히 나라는 대통령인 자신의 것이므로 돈 좀 받아 챙기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다. 국정원 예산도 내 돈이고, 재벌의 돈도 내 돈이고, 국가기관 역시 자신의 손발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국민은 그런 자신을 일방적으로 따라야 한다. 자기가 결정한대로 무조건 쫓아야 한다. 얼마나 억울할까. 자기가 배운 그대로 충실히 해왔을 뿐인데 이제 이렇게 죄인의 신세가 되었으니. 그러라고 국민이 뽑아줬길래 열심히 그래놓았더니 죄인으로 만들어 가두고 있었으니.


그럴 것이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내가 예상한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그 와중에도 박근혜를 변호하는 보수언론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 나라의 보수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한 바 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는 사유화에 있다고. 개인의 자유를 넘어서 권력과 자본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사유의 허용이 그들의 목표일 것이라고. 유승민과 바른정당이 이번에는 포지션을 잘 잡았다. 그래야 산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조차 보수랍시고 허튼 짓거리 했다간 그나마 알량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다.


대통령이라는 것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국가와 국민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 그런 대통령같지 않은 대통령을 지금까지도 옹호하는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국민들에 대해서까지. 독재가 불과 수십년 전에, 아니 그 잔재가 불과 몇 달 전까지 부활해서 활개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렇게 가벼운 책임과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권력이 국민의 안일함속에 자격없는 이에게 맡겨진 것에 대해서도. 덕분에 그를 이어 들어선 정부만 피곤하다. 미국과 중국, 이제는 일본과의 외교문제까지 풀어야 한다. 멍청하면 그냥 청와대에서 TV나 보며 쳐놀던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파기하기도 국제사회에서의 신뢰라는 문제와 걸린다. 아무리 막장 정부라도 정부끼리 합의한 내용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바로 뒤집는다는 것은 부담이 크다. 그렇다고 이대로 유지하기에는 바로 보수야당과 언론이 태도를 바꾸어 몰아붙이려 할 것이다. 저놈들에게 염치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재협상은 일본이 안하겠다 선언했다. 물론 그럼에도 재협상이 없다면 파기밖에는 답이 없지만.


원래 저런 인간이란 걸 알았다. 모를 수 없었다. 언론보도의 행간만 보더라도 저런 인간이라는 것을 절대 모를 수 없었다. 책임이 없는 척 하지 말자. 경솔하고 무책임했던 것은 전직대통령만이 아니다. 화도 나지 않는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차라리 현실이 아닌 것 같다.

미디어오늘의 여론조사를 오늘에야 봤다. 워낙 듣보잡 아닌가. 자기들은 아니라 할 지 모르지만 일부러 찾아읽으려 하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그런 언론이다. 그래서 뒤늦게 보고서 그냥 웃어버렸다. 뭐 이런 덜떨어진 모지리새끼들이 다 있는가.


문항도 웃기다. 당장 문항부터가 '비판적인 보도에 대한 집중적인 비난'을 전제하고 있다. 정당한 비판인데도 몰려들어 감정적인 비난을 퍼붓는다는 식으로 아예 단정짓고 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잖아 - 아니 상당할 테지만, 그렇다고 항상 모든 문재인지지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비난을 듣는 언론기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인지. 하긴 지금 자기가 쓰고 있는 기사의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있을 테니.


알고 있다. 문빠들 극성스러운 거. 노빠들 난리치던 때부터 아주 질리도록 겪어왔었다. 그런게 빠들의 속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그런 게 바로 카리스마라고. 대중이 가진 분노와 불안, 원망, 불만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지지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문빠들은 어째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다른 문재인 지지자들은 그런 모습에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굳이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하지 않는가. 바로 자신들이 하는 행동부터 돌아보라는 것이다.


문빠들을 욕하기에는 당장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국민의당이 걸린다. 노빠들 욕할 때는 그래도 민주노동당이 대안이기라도 했었다. 아직 진보정당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었다. 더구나 엄혹한 세월을 함께 싸워왔던 언론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노무현이 아니더라도 다른 진보정당, 진보정치인이 있고, 민주화된 사회에 언론이 살아있다. 사실 그게 정상이다. 민주화된 사회라면 아무리 정부가 막장으로 치닫더라도 그에 대한 대안이 사회 어느 한 구석에는 준비되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것 없었다. 진보정당은 집안싸움하다 아예 지리멸렬해 버렸고, 언론은 삽시간에 꼬리를 내리고 순한 양이 되어 버렸다.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봐 버렸다. 언론은 민주정부에만 가혹하다.


문빠들은 마음에 안드는데 그렇다고 문빠들이 비난하는 언론과 야당이 마음에 드는가. 아니 최소한의 동정의 여지라도 느껴지는가. 중국 경호원에게 두들겨맞았다는 기자들한테도 그다지 연민이나 동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 많은 이들의 솔직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마음에 안들지만 문재인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에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잘못되었다 욕하고 거리를 두고 싶어질까?


문재인지지자 갈라치기가 의미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야당이 쓰레기다. 언론이 개새끼다. 워킹데드를 떠올려보면 된다. 사방이 좀비 투성이인데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들끼리 먼저 치고받고 할까. 그러다가 어떤 꼬라지 나오는지 이미 노무현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미친 놈은 알아서 좀비가 처리해준다. 저들이 대안이 아니라면 문재인 이후는 없다. 절박함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싫어도 한 배를 탄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하여튼 문재인과 문재인 지지자가 모든 언론의 주적이다. 확실히 마르크스가 옳다는 것을 앓았다. 계급은 직업이다. 카스트는 원래 자티다. 자티는 하나의 직업을 세습하는 가문의 단위다.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끼리, 언론은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언론들끼리. 그러니까 문재인 지지자도 문빠니 뭐니 가리지 않고 그냥 문재인 지지자로. 어째서 문빠들 싫어도, 그래서 욕하면서도 함께 할 수밖에 없는지 저들 자신이 보여주고 있달까.


자기들이 잘하면 나도 나서서 문빠새끼들 한다. 언론이 잘하면 내가 먼저 나서서 엄한 짓 벌이는 문빠들 욕하고 비판하고 할 것이다. 지들이 먼저 잘하고 문빠 어쩌고 해야지. 문빠보다 더한 새끼들이 바로 자기들인 것을. 거울을 한 번 보라. 자기들이 문빠를 욕할 자격이 있는가를.


경향이고 한겨레고 진보언론에 대한 기대는 지난 9년을 거치며 깡그리 사라진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보수언론과 손잡고 문재인 정부 끌어내리기에만 몰두한 모습을 보며 결국 그런 놈들이었구나. 신뢰가 없으니 타격도 없다. 자업자득이다. 진짜 웃기는 새끼들이다.

사용자들은 흔히 말한다.


"너 아니라도 사람은 많아!"


어느 관리는 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죽자 왕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었다.


"한 해에만 전장에서 죽은 병사의 수 이상이 왕도에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대한민국 인구만 5천만이 넘어간다. 말이 5천만이지 한 사람 앞에 삽 한 자루씩 주고 산을 허물라 하면 백두대간도 평지로 만들 수 있는 인력이다. 물론 그 많은 인원이 땅을 팔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다는 전제 아래서.


사람에게 돈이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보다 생존에 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한다. 얼어죽지 않으려면 무어라도 따뜻한 것을 걸쳐야 한다. 혹시라도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충분한 장구를 지급해야 한다. 군인이라면 전장에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아예 그런 모든 것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먹이지도 입히지도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그냥 전장에 밀어넣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서 희생된 그 이상의 숫자를 끊임없이 동원하고 밀어넣을 수 있으면 아주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물론 2차세계대전 당시 막장으로 꼽히던 구일본군도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경우는 드물었었다.


당시 구일본군이 저지른 막장짓 가운데 지금도 회자되는 것이 가미카제일 것이다. 비행기를 문제없이 띄우고 착륙하는 것만도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심지어 전투 도중 배치된 조종사의 항모이착함을 훈련하다가 함재기의 절반을 잃은 경우마저 있을 정도로 정상적으로 이착륙할 수 있다는 것만도 이미 대체하기 힘든 전력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조종사들을 일회용 자살공격에 동원하고 있었다. 살아돌아왔으면 그 경험을 바탕으로 더 유용한 전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가능성을 단지 한 번 적함에 돌격해서 피해를 입히는 용도로 사용하려 했던 것이었다. 조종사를 길러내기는 어렵고, 더구나 조종사로 훈련시킬만한 인재를 찾기도 결코 쉽지 않다. 설사 자살공격이 성공해서 적에게 일정한 피해를 주더라도 뒤가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자살공격이 성공해서 미군이 진격을 멈추면 이미 많은 인력을 소모한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전근대의 군주나 지휘관들이 마음이 좋아서 굳이 병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장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장차 일어날 상황을 대비해서 병사들을 훈련해야 한다. 얼마나 많이 잘 훈련시키는가에 따라 전쟁의 결과가 달라진다. 함부로 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더 잘 먹이고 더 잘 입히고 더 잘 무장시켜서 만일의 상황에 자신을 위해 용감히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흔히 말하는 정병, 혹은 정예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껏 길러놓은 정예병을 잃거나 하면 귀한 신분의 지휘관이 처벌을 받기도 했었다.


실력과 경험을 두루 갖춘 숙련된 소방관 한 사람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 노력이 필요하다. 당장 아무나 소방관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춰야 소방관으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고, 다양한 상황에 대한 많은 훈련과 실전경험을 거치면서 숙련된 소방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에 하나의 경우 큰 화재가 났을 때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기에 화재를 진압하고 위험에 빠진 시민들을 안전하게 구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들 숙련된 소방관들인 것이다. 이제 겨우 소방관이 되어 일을 시작한 사람이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런데 누군가 아무것도 없이 그런 숙련된 소방관들이 스스로를 희생해가며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해야 한다 주장하고 있다.


화재현장에서 무엇보다 소방관들이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겨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화재는 이번만이 아니다. 지금 눈앞의 한 사람만 구하고 끝날 것이 아니다. 자기 말고 여전히 더 많은 소방관이 남아 있다 마음놓아서는 안된다. 자기 말고는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실제 한 사람이 희생되면 누군가 그 한 사람을 대신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희생된 한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경험 만큼 경험을 쌓을 공백이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도 소방관은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첫번째 책임인 것이다. 물론 소방관에게도 가족이 있다.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소방관 역시 소방관 자신이 지켜야 할 시민의 한 사람이다.


어이가 없다. 말로야 친일당이라 하지만 원래 정치란 그런 것이라 수사적인 표현이라 여겼지 설마 싶었었다. 인력도 지원도 아닌 희생과 헌신이라. 장비도 증원도 없이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희생과 헌신을 말하고 있다. 누구의 희생이고 누구의 헌신인가? 그러면 먼저 자기부터 세비를 반납하면 어떨까? 진정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세비같은 것 없이 자원봉사로 국회의원 노릇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원내대표다. 무려 원내대표씩 되면 그 한 마디는 그 당의 의견을 대변하는 대표성을 갖는다. 심지어 자신있게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까지 하겠다 말하고 있다. 너무 금배지 달고 으스대다 보니 자기가 소방관들과 같은 사람이고 시민이라는 당연한 사실마저 잊은 것은 아닐까.


그저 건조하게 받아쓰거나 요식적으로 비판하며 보도하는 언론들부터가 문제다. 확실히 진보언론들까지도 자유한국당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여전히 자기들은 야권이라는 것일까. 이 정도 수준이만 막말도 보통 막말이 아닐 텐데 언론은 오히려 조용하다. 하긴 자기들이 쳐맞지 않았으니까. 국익보다 중요한 것이 기자인 자신의 체면이고 자존심이었지 않은가. 


하여튼 원래 그런 정당인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막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했다. 항상 상식을 깨부수는 파천황들일 것이다. 그에 동조하는 시민들도 아주 없지는 않으리라 장담한다. 내 목숨 아니니까.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무나 소방관이 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있을 테니까. 돈도 얼마 못받고 대우도 못받는 그깟 소방관따위. 과연 누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가. 아무나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위기에서 지켜줄 수 있을까.


원래는 소방관의 장비를 개선하고 인력을 증원하는데 무관심했던 이전 정권과 야당들에 더 큰 책임이 지워져야 했을 텐데.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다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 뿐이다. 화가 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명나라가 왜 망했느냐면 변경의 상황에 대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조정이 통제하려 해서 망했다. 원래 싸움이라는 것이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겼다가도 지고 지다가도 이기는 것이 바로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험을 쌓고 명장이라 불리우는 지휘관이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처음부터 아예 타고나서 그런 것 없이 잘싸우는 지휘관도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다. 무엇보다 휘하의 장수와 병사들이 싸움을 통해 단련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싸움 한 번에 일희일비하며 혹시라도 지거나 후퇴하면 책임을 물 궁리부터 한다.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다. 바로 이순신이 조정의 대책없는 간섭으로 인해 결국 파직되고 옥고를 치러야 했었다. 싸워야 할 때가 있고 싸워서는 안되는 때가 있다. 나가서 적을 무찔러야 되는 때가 있고 물러나서 그저 지키고 있어야 하는 때가 있다. 전국시대 일찌감치 군사개혁을 통해 진과도 겨룰 수 있는 강군을 길러냈던 조나라도 그러나 염파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 조정의 간섭으로 인해 장평에서 30만이 넘는 장정을 잃고 말았다. 하긴 조나라가 망할 때도 왕전의 군대를 불리한 조건에서도 훌륭히 막아냈던 이목이 간신 곽개에 의해 죄인으로 몰려 처형을 당하기도 했었다. 참고로 이 염파와 이목은 천자문에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란 문구가 나올 정도로 당시 중국에서 최고로 꼽히던 두 명의 장군 가운데 하나였다. 저기서 파목이 바로 염파와 이목이다. 그런데도 조나라는 막대한 군사를 잃고 망했던 것이다.


바로 말하는 관료제의 폐해라는 것이다. 현장에는 현장의 논리가 있다. 현장의 상황이 있고 현장의 이론과 이유가 있다. 원칙을 벗어난 임기응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있다. 아니면 거꾸로 임기응변을 사용하기 어려운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것도 있다. 그것을 바로 현장에서 당사자들이 결정한다. 하지만 중앙의 관료들은 그것을 단지 문서로써만 판단한다. 하긴 굳이 중앙의 관료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1차세계대전 당시에도 전선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각군의 지휘부들은 일선의 지휘관들에게 수많은 별 필요도 없는 서류작업을 강요하며 전선의 상황에 맞지도 않는 명령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요컨데 거리다. 그리고 그런 만큼 직접 현장을 마주하고 있는 일선의 책임자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래서 '손자병법'에서도 지휘관은 전장에 나가면 왕의 명령도 듣지 않는다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조작업을 하다 보면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불을 끄다 보면 한 번에 쉽게 꺼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항상 쉽게 불을 끄고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칫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최선이라 여겼던 판단이 최악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소방관 자신들이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는 전문가들 아닌가. 설사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현장을 책임지는 당사자로써 그 판단과 결정을 먼저 최대한 존중하며 더 자세한 정황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판단과 결정에 대한 심사를 받고 평가를 받는다면 과연 같은 상황에서 소방관들이 자유롭게 적극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징계나 심지어 처벌까지 받게 된다면 지난 세월호 참사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판단에 대해 평가할 누군가의 결정을 기다린다. 혹은 전문가로서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에 의한 판단이 있음에도 주위에 휩쓸려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기자새끼들이라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기레기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쳐맞아도 잘맞았다며 좋아라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다. 기자가 아닌 다른 일반 시민이었으면 반응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소방관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고 있었다. 진실을 묻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당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사실을 알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소방관이 타겟이었다. 유족들의 입을 빌어 소방관의 책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소방관의 뒤에는 행정부의 수반인 문재인 대통령이 있다. 언론 보도에 힘입어 야당이 문재인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을 보라. 그리고 그같은 집요한 물어뜯기의 결과 마치 죄인처럼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소방관들이 죄인이 되어 압수수색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래서야 과연 또다시 같은 화재가 일어났을 때 소방관들이 냉정하게 전문적인 판단을 적극적으로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어째서 불법주차된 차들을 단호하게 견인하도록 조치하지 않았는가. 아니 그 전에 화재현장에서 문을 부수고 창문을 깨는 행위조차 망설이게 되었는가. 그만한 충분한 재량을 주고 그에 대해 최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예우가 있어야 소방관들도 더 자유롭게 자신들의 전문적 판단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이제 가스탱크가 불타는 옆에 있어도 감히 물뿌릴 생각도 못할 것이다. 어차피 기자들이 터지지 않을 것이라 단정지었으니 불이야 붙든 말든 구조대원 없이도 진압대원들이 건물로 진입해야 할 지 모른다. 내부 상황을 정확하기 파악하지 못한 사태에서도 유가족들이 원하면 통유리든 벽이든 일단 부수고 봐야 한다. 그러고도 또 누군가는 책임을 물을 것이다. 탓을 하고 비난을 할 것이다. 그냥 소방관 없는 세상에서 살면 어떨까? 나같으면 자괴감에 소방관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말겠다. 돈이라도 많이 주는 게 아니고 별별 하찮은 일들에까지 동원하며 이렇게 졸지에 죄인취급을 해버리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기자새끼들 어디 가서 쳐맞든 뒈지든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저 새끼들 어디 가서 불에 타 뒈져도 소방관들이 구해주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새끼가 아니다. 불이 난 원인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을 끄기도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운 이유가 있었다. 알고 있다. 소방관 증원을 반대했다. 예산증액도 반대했다. 지방직이라 지자체장이 예산을 전용하는 것도 묵인하거나 찬동했다. 자기들도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방관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기자가 지식인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사람같지도 않은 것들이 되었다. 토할 것 같다.

하긴 그동안도 애써 감추려 않고 솔직하게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로 자기들은 부당하게 비판을 들었다. 부당하게 책임이 지워지고 그로 인해 정권까지 잃게 되었다. 당장 여론이 불리하니 참기는 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되돌려주겠다.


이로써 자칭 진보언론인 경향과 한겨레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도 분명해졌다. 제천화재는 세월호와 같다. 소방관들은 당시 해경과 같고,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와 같다. 그러므로 소방관들은 당시 해경들처럼 초동대처를 잘못했어야 했으며 문재인 정부 또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어야 했다. 그렇게 맞추고 몰아가는 것이다. 너희들도 한 번 당해보라. 그러니까 이런 너무나 뻔한 의도에 부화뇌동하는 것들이 누구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현정부가 들어서고 몇 번이나 강조했었다. 소방관 수를 늘려야 한다. 소방관의 처우나 장비 등을 위해서라도 국가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서 당시 야당과 언론이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하고 있었는가. 뻔히 드러난 사실로도 인력이 부족해서 기본적인 화재진압과 인명구조마저 병행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력이 부족하고 예산이 부족하면 장비관리도 부실해지는 것이다. 소방관 더 채용하라고 추경예산 내려보냈더니 다른 데 쓰는 것을 두고 또 야당과 언론은 무엇이라 했었는가. 그런데 이제와서 정부 책임이다.


그냥 복수다. 앙갚음이다. 되갚아주려는 것이다. 부당하게 권력을 빼앗겼다. 문재인 정부는 부당하게 권력을 쟁취한 부정한 정권이다. 그저 그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유가족과 소방관들이 안타까울 뿐. 그 뻔뻔함은 과연 불에도 타지 않겠다. 

카리스마란 여러 해석이 있지만 결국 기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 삼국지에서도 사람들이 조조와 유비를 따르는 이유가 각각 달랐었다. 조조의 심복들에게도 조조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듯이 유비의 측근들에게도 유비가 아니면 안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를 위해서 두 사람의 신하들은 때로 목숨을 바쳤고 위험과 고난을 무릎썼다. 무엇이겠는가. 내가 지금 충성을 바침으로써 내가 바란 결과가 돌아올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돈일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권력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혈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항상 모든 경우에 그 기대란 것이 뚜렷한 실체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형체도 없는 막연한 그 기대를 쫓아 무작정 한 사람을 따라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그마저도 자신이 가진 어떤 불안과 불만에 의한 것이기 쉽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결핍과 요구가 그것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을 것 같은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원래 막연했던 만큼 그 불안과 불만의 형태 역시 그 대상이 결정하기도 한다.


세상이 혼란스럽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해서는 안되는 행동들을 저지르고 있다. 아니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정상을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머리가 아닌 본능이 그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면 되는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이예 이전의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거나, 아니면 다시 모든 부정과 일탈을 바로잡아서 원래의 정상으로 되돌리거나. 중요한 것은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함으로써 답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명장이란 싸워서 이길 것 같은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아무리 싸움이라고는 처음이라 해도 어찌되었든 함께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게 만드는 것이 명장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빠를 만든다. 광적인 추종자를 만든다. 심지어 자기 자신은 물론 소중한 가족까지도 그를 위해 기꺼이 내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이다. 아니 무리를 짓고 사는 모든 존재가 가지는 본능이다. 누군가는 의지하려 하고 누군가는 이끌려 한다. 대부분은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그 대상을 찾는다. 당연히 그 대상은 자신들을 잘 이끌어줄 수 있는 존재다. 이끌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잘 이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불안과 불만을 해결해 줄 수 있음을 뜻한다.


어째서 문재인이었는가 돌이켜보자. 무엇보다 어째서 노무현과 문재인을 대하는 지지자들의 태도가 다른가도 헤아려보자. 김대중에게는 김영삼이라는 대안이 있었다. 그리고 1997년 대선에서 경쟁자였던 이회창 역시 썩 그렇게 몹쓸 선택은 아니었었다. 노무현은 바로 그 김대중을 계승했다. 그리고 어찌되었거나 김영삼 이후 무려 15년 간 이루어져 온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장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유시민 자신도 그리 말하고 있었다. 새누리당 정권 잡는다고 나라 망하는 것 아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떠했는가.


2012년 대선 직전 불었던 안철수 바람 역시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안철수의 경우는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부정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놈도 저놈도 다 마음에 안드는데 안철수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안철수라면 지금까지의 대통령들과는 다른 정치를 보여주지 않을까? 그것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안철수가 내건 '새정치'라는 구호였었다. 그리고 그것은 2017년 대선까지도 여전히 유효했었다. 그래도 안철수라면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무언가 다르지 않겠는가.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의 선전은 그같은 막연한 대중의 기대에 힘입은 바가 컸었다. 그리고 2017년 대선을 치르고 안철수라는 인간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안철수의 바람은 비로소 끝나고 만다. 안철수의 정치에는 전혀 자신들이 바라는 새로운 무엇이 없었다.


물론 안철수 자신의 힘으로만 안철수 바람을 끝냈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그저 막연한 기대였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보이는 모습을 통해 저절로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처음 안철수에게 대중들이 기대했던 그 모든 것이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에게 있었음을. 그러므로 안철수가 아닌 문재인이 자신들이 바라는 정치를 이루어낼 것임을. 지지율이 꺼져도 너무 한 번에 꺼져 버렸다. 그래도 유력대선후보로서 본전이란 게 있었을 텐데, 아예 남은 것이라고는 없이 모두 한 번에 털어먹고 말았다. 무엇이겠는가.


노빠들이 문재인을 지지한 이유는 하나다. 노무현의 후계자다.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다. 하지만 노빠가 아닌 사람들이 문재인을 지지한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아마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던 것은 민주당의 분당 과정에서 문재인이 지켜낸 혁신안이었을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었다. 또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타협하며 만신창이가 될 것이라 예단했었다. 하지만 집요한 흔들기에도 문재인은 고집스럽도록 우직하게 혁신안을 지키고 오히려 흔들던 이들이 제 발로 뛰쳐나가도록 만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인상을 쓰거나 험한 소리를 내뱉는 법 없이 완벽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었다. 진짜 이 사람은 다르구나. 정치인으로서 이 사람이라면 다른 기대를 가져봐도 괜찮겠구나. 그 전까지 막연하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낫겠거니 여기던 것이서 지금으로서는 이 사람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문재인 말고 지금 누가 있다는 것인가.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 아니면 심상정?


과거 노빠들도 이유는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대통령으로서 문재인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문재인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그 다음에는 희망이 없다. 그러니까 문재인의 잘못을 비판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문재인 정부의 힘이 꺾이면 누가 그 대안이 될 것인가 말이다. 노무현에게는 그나마 열린우리당조차 없었다. 노무현 한 사람도 불만스러운데 하물며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그보다 더 형편무인지경이었다. 문재인이 바꾸어 놓은 민주당이 또한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든든히 버티고 있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보다는 그래도 민주노동당이 아닐까. 그러나 이제 어느 정당도 정치인도 민주당과 문재인을 대신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가진 당연한 권리로써 나의 기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문재인과 민주당을 지켜야 한다. 물론 그것은 지금 나 자신이 동의하고 있는 지금의 문재인과 민주당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카리스마를 신뢰라고도 말한다. 어떤 이들은 정직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기대인 것이다. 내가 바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기대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깨진다면 다시 노무현 때처럼 나는 문재인에게서 등돌릴지 모른다. 다만 노무현과는 달리 문재인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9년을 견디고 만난 대안이라는 것이다. 김대중과도 김영삼과도 이회창과도 비교될 수 있었던 노무현과는 달리 그 가면이 벗겨진 이명박과 박근혜, 그리고 홍준표, 안철수 등이 그 비교대상이 되고 있다. 기대치도 다르고 그만큼 만족도도 다르다. 어찌되었거나 아무리 그래도 다른 야당이나, 설사 같은 민주당이라도 안희정보다는 훨씬 나은 대안이다. 어떤 경우에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은 피할 수 있다.


이른바 진보언론이나 지식인들과 문빠들이 갈리는 지점일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절박감이 없다. 문재인이 아니면 안된다는 위기감 같은 것이 없다. 그러니까 반드시 문재인이어야 한다는 당위같은 것은 느끼지 못한다. 이해한다. 나도 노무현 때 그랬으니까. 그래도 설마 민주화가 이루어진지 몇 년인데 한순간에 그렇게 모든 것이 무너질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으니까. 어차피 자신들이 원한 정권이 아니었으니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박근혜나. 그나마 욕하기 좋다는 점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이 더 좋은 점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되었든 자신들이 바라는 정권이 아니었으니 그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정히 이해하지 못하겠으면 진보지지자 가운데 극단적인 사례를 몇 골라보면 좋을 것이다. 여성주의자 가운데는 워마드와 메갈리아 등에 그런 유형들이 넘쳐나고 있을 것이다. 아예 자기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못할 것 같으니 그냥 투표를 포기하라. 지금은 다른 이유로 매장되다시피 한 어느 유력 진보논객이 수 년 전 선거에서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다. 바로 그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정치에 참여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개인이 아닌 정당이면 더 좋다. 개인이 아닌 이념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솔직히 문재인과 나와는 이념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다. 민주당과도 과연 이념적으로 통하는가 의문스러운 부분이 상당히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당장이 위급한 비상상황인데. 그래서 카리스마란 대개 혼란 속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때로 카리스마는 개인의 힘으로 사회의 인습과 통념, 가치, 질서, 체계, 구조마저 뒤바꾸는 파천황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오로지 개인이 가진 역량에, 그보다 그에 대한 기대에만 기댈 수밖에 없으니 그밖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된 결과다. 그러니까 과연 그동안 민주당이, 야권이, 진보진영이 대중에게 무엇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기대하면 되는 것인가. 그래도 한때 교섭단체까지 노리던 민주노동당이 지금의 정의당으로 쪼그라들기까지, 그리고 민주당의 주류 다수가 국민의당으로 뛰쳐나가기까지 그들은 대중들에 어떤 믿음과 기대를 주고 있었는가.


솔직히 나도 문빠들 싫다. 노빠들도 원래 싫어했다. 하지만 언젠가 진중권이 진보당 지지자들에게 일갈하던 말을 기억한다. 너희들은 왜 노빠처럼 하지 못하는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저렇게 극성맞게. 저렇게 단합된 행동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가. 말 그대로다. 가만히 앉아 옳은 말이나 늘어놓는 정의로운 사람보다 틀렸더라도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행동하려 하는 이들을 더 신뢰한다. 차라리 틀렸거나 잘못된 것은 반성하게도 하고 고치도록도 만든다. 그런데 처음부터 아무것도 않는데 무엇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을까.


싫으면 싫은대로 부딪힌다. 마음에 안들면 마음에 안드는대로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 사회는 더 다양해지고 그 다양성 속에서 새로운 대안도 나타난다. 주장하는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마저 부정하는 정의라는 것은 무슨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문빠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그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적인 것이다.


어째서 문빠들이 나타났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어째서 그들이 그렇게까지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더욱 지식인이라면 그것은 의무이자 당위이기도 하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문빠 몇몇이 이런 눈쌀찌푸려지는 짓을 하고 있으니 그들은 나쁘다. 배제해야 한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만들었는가. 그 주범들이 그러고 있으면 지켜보는 사람은 그저 웃고만 싶어진다.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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