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하는 말이지만 남 욕하는 글이 가장 쓰기 쉽다. 흠을 들추고, 약점을 찾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당장 눈에 보이니까. 이미 드러난 문제들을 탓하는 것이야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그런 주제에 누군가를 비판하면서 자기가 그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된 듯한 착각마저 느낀다. 내가 그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고 판단과 능력에서도 더 뛰어나다. 그에 비하면 누군가의 편을 들어 그를 옹호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 대한 비판까지 자기가 모두 뒤집어쓰는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어떤 논리로 그의 입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것인가.


인터넷에 남 까는 글이 넘쳐나는 이유다. 그래도 글 좀 쓴다고 자기가 뭐라도 대단한 존재라 생각한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 착각한다. 너는 이게 문제고, 너는 이런 잘못이 있고, 나는 이래서 안된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이 있고 때로 그런 비판이 본질이 아닌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타진요 사태 당시에도 타블로와 관련한 다른 사소한 문제들은 학력위조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예능에 출연해서 약간의 과장이나 허위를 섞는 것이야 일상에서도 대부분 흔히 하는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회가 되었다고 심지어 가족의 이력까지 뒤져서 별 사소한 일들까지 끄집어 비난의 소재로 삼는다. 당시 참으로 정의로웠던 인터넷의 실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이야 유권자로서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특정 사안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의 편에서 비판자들과 싸우는 것 역시 지지자로서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 비판의 주제가 되는 대상에 대해서까지 폄하하며 공격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야말로 불모지에서 맨땅에 헤딩해가며 겨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여자 아이스하키였을 것이다. 제대로 된 실업팀도 거의 없고 여건도 열악한 가운데 힘겹게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 분명 정책적인 배려가 있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여자 아이스하키가 올림픽 출전권을 딸 수 있었던 것은 선수들과 협회의 피나는 노력이 동반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미안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는 국가적 상황 때문에 그들의 노력을 희생시켜야만 했었다.


그러니 문빠가 욕먹는 것이다. 과거 노빠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을 옹호하는 것은 좋다. 노무현을 변호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쩌면 피해자일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에 대한 사소한 문제들을 들춰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다. 비판의 빌미가 되는 대상을 공격함으로써 비판을 미연에 차단하겠다. 역시나 문재인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도 꼴보기 싫은데 비판적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빠가 까를 만든다. 편들어주는 것도 영리하지 못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낸다. 대통령도 직접 찾아가 선수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것이 옳은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빚을 지는 것과 같다. 내가 그 희생의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잘못으로 당연히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흔히 그런 것을 파렴치하다 부른다.


변호도 옹호도 결국 영리하게 기술적으로 해야 효과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사정을 들출 필요 없이 대통령의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충분히 긍정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다. 한 무리의 리더로서 때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지지하는데 어떻게 지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니까. 능력도 안되면서 마음이 앞서니까. 더구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도덕관념마저 무디게 만들어 버린다. 아무리 그것이 여자 아이스하키팀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일인가.


대통령이 어려운 길을 가려 하면 지지자도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쉽다고 아무 길이나 막 가지 말고 어렵더라도 정도를 걸을 각오가 필요하다. 능력이 안된다면 침묵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국가의 사정이 그렇다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의무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요구가 아닌 요청을 하고 그를 위해 설득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대통령까지 직접 찾아가 겨우 마음을 돌리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나 두드리고 있겠지만. 나라도 다르지는 않다. 가끔 혐오스럽다.

어쩐지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에 대한 논란을 보고 있으면 2012년 겨울 국정원 여직원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민주당을 성토하던 것이 떠오른다. 단지 여성일 뿐이다. 단지 한 개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불법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인권을 최우선으로 존중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이었다. 국가가 국정원에 대해 법으로 금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의혹을 받는 상황이었다. 선관위 직원과 경찰마저 출동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국정원 여직원은 그저 여성이고 한 개인일 뿐이었는가. 국가와 국민에 대한 공적인 책임을 지는 말 그대로 공인이었던 것인가. 국정원의 직원으로서였는가.


전쟁이 일어났다. 지휘관이 되어 중요한 전략요충지를 차지해야 하는데 적의 저항이 완강하다. 반드시 빼앗아야 하는 중요한 거점이기에 가능성은 낮지만 아무거라도 시도해보려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닌 국지적인 우세를 위해서, 더구나 가능성도 높지 않은 상황에서, 그러나 일부 장병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작전을 결단해야 한다. 각자 나름의 사연과 사정을 가진 그들 병사들의 희생을 통해 어쩌면 국지적으로 적에 대해 우세를 차지하고 나아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말했듯 모든 것은 가능성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병사들의 희생이 안타까우니 작전을 포기해야 할까?


전장에서는 때로 병사 개개인을 인간으로서가 아닌 단지 숫자로서만 파악하는 무심함이 필요하기도 하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은 없다. 선택이란 결국 버려지는 것이 있기에 선택이라 불리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익이 된다면 누군가에게 손해가 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선택해야 한다. 삶이란 어쩌면 그같은 선택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희생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 것인가. 그러니까 당장의 북한의 핵개발로 인한 한반도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무력을 사용할 경우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피해를 막기 위해서 어떻게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그 가능성이 보였을 때 아주 사소하더라도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 개개인의 꿈을 위해서 그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개인의 선이 반드시 집단의 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선의가 반드시 정치인으로서의 선의로써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한 집단을 이끌어야 하는 리더에게 지워진 책임의 무게이기도 한 것이다. 싫어도 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있다. 나중에 후회할지라도 지금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들이 있다. 그러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저 집안에서 키보드나 두드리는 것이 전부인 개인들이야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지 모른다. 북핵위기를 이유로 올림픽참가를 고민하던 나라들이 있었다. 당장 북한의 핵개발로 인해 특히 우방인 미국과 일본의 압박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몇몇 철모르는 정치인들이나 무력응징을 말하지 만에 하나 쉽고 빠른 방법을 선택하겠다고 무력이라는 옵션을 사용하는 순간에는 더 큰 참화가 우리 자신에게 미칠지 모른다. 그렇다고 북학의 핵개발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그것은 가장 직접적인 안보의 위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겨우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겠다며 대화의 손을 내밀었다.


사실 그냥 요식이다. 단일팀따위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 공동입장 역시 하든 안하든 대세에는 전혀 큰 영향이 없다. 하물며 북한에서 한국의 스키선수들이 훈련씩이나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 역시 없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남는 것은 바로 그런 요식이다. 이만큼 성의를 보이고 있다. 이만큼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북한도 그에 응하고 있다. 북한 역시 남한의 시도에 호응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과 대화를 통해서 핵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다. 그냥 바람이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바람조차 실제 협상이 문서로 확정되고 단일팀 등으로 구체화됨으로써 현실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그 과정에서 북한이 진짜 한국정부를 통해 핵문제를 대화로 풀려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를 모두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일부러 판을 거창하게 벌리는 것이다.


원래 기업간에 계약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 자체를 과시할 필요가 있을 때 이런저런 행사나 격식들이 만들어진다. 얼마나 요란하게 시끌벅적하게 일을 추진해가고 있는가. 그러니까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해 온 선수들의 사정은 안타깝다. 어렵게 겨우 이루게 된 선수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지금 당장 더 시급한 것이 있다. 어쩔 수 없다. 전체주의라지만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이라는 대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


역시 가장 개새끼는 북한의 김정은이다. 김일성부터 김정일에,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 3대다. 그들이야 말로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악의 근원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적대할 수도 없으니 대화를 시도해 본다. 마냥 대립만 하고 있을 수 없으니 돌파구를 찾아본다. 당장 덕분에 나도 무려 2년 넘는 시간을 군에 묶여 있었다. 북한의 존재만 아니면 굳이 징병제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 열악하고 모멸적인 군생활을 참아내야 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럼에도 선택해야 한다.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이의 고독과 같은 것이다. 10년 전이라면 욕부터 했겠지만. 나도 많이 늙었다. 어쩔 수 없다. 

결국 우선순위인 것이다. 수 년 동안 올림픽 출전을 준비해 온 선수들의 입장과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와의. 바로 얼마전까지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극단적인 선택까지 공공연히 언급되던 상황이었다. 나 역시 문재인 정권 아래에서 오히려 북한에 대한 군사적 응징의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던 바 있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얼마전까지와 같은 극한의 대치가 계속된다면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필요한 선택을 할 것이다. 북한이 대화에 응하지 않는데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이다. 당장 성과는 없을지라도 어떻게든 북한과의 대화의 물꼬를 터야만 한다. 당장 눈에 드러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면 왜 하필 남북단일팀이어야 하는가? 한 마디로 마음에 드는 이성과 우연히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길게 이어가기 위해 아무거라도 대화거리를 찾는 상황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은 사람을 붙잡아 세우기 위해서라도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도 끄집어내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더불어 북한에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렇게까지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북한이 국제사회에 나오고 싶으면 지금 이 손을 잡으라.


올초 있었던 김정은의 신년사를 보더라도 북한이 얼마나 국제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지금의 상황에 대해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당장 그나마 믿고 있던 중국마저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키기 위한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하라는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는 중이다. 명분상 그것을 거부하기란 어렵다. 그래도 만만한 위치는 아니라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야금야금 중국정부의 제재 역시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든 그같은 고립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핵개발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은 더이상 핵개발에 매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에 대한 협박은 그 사실을 인정해달라는 애걸이기도 한 것이고. 하지만 미국은 전혀 그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었고 앞으로도 더욱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에 응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북한 입장에서 다른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하겠는가.


그래서 순조롭게 회담이 진행되던 도중에도 이것저것 서로 잽을 날리며 나름대로 탐색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평창올림픽과 관련한 회담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언급한 것은 국내여론과 국제사회를 의식한 제스쳐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평창올림픽 참가만으로 끝낼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평창올림픽 참가를 위해 북핵문제에 대해 그냥 넘어갈 생각도 없다. 북한에 대해서도 궁극적으로 회담의 목적은 북핵문제의 해결이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북한은 탈북종업원들의 송환을 주장하며 - 당연히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을 것이다 - 한국 정부가 어디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인가 탐색을 시도한다. 그것은 한 편으로 한국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재량의 범위이기도 하다. 전과는 다른 강경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그들의 선택 역시 제한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평창올림픽 참가를 위한 회담을 이어갈 것인가.


아마 물밑에서 이런저런 계산들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서로 다른 자신들만의 생각이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만의 이해와 목적과 이유가 계속해서 부딪혀야 한다. 어떻게든 대화의 물꼬를 트고 방법을 모색해야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말했듯 나는 아직도 군사적 선택의 가능성을 아주 배제하지 않고 있다. 대화로 안되면 결국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평화적인 수단으로 안되면 그때는 전쟁 뿐이다. 오히려 평화를 위한 노력은 전쟁을 위한 확실한 명분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상대를 붙잡아 앉혀 아무것이든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하나라도 더 접점을 만들고 하나라도 더 공유할 부분을 찾아내고 그것이 협상의 기술이기도 하다.


예전 남북단일팀과 분위기가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선수들도 대중도 그래서 아는 것이다. 이것이 남북의 민족적 화해나 공존, 나아가 평화통일이라는 낭만적인 목표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무 의미없는 정치적 협상의 수단으로서 남북단일팀이 이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불쾌감이다. 그냥 아무 의미없이 목적없이 그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남북단일팀이 이용된다. 선수들의 기회가 소모된다. 이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정치에 옳은 일은 없다. 정치에는 오로지 필요만 있을 뿐이다. 개인의 선이 반드시 국가의 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선의가 반드시 정치적인 선의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며 당면한 북한핵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분주히 미국과 중국, 일본 사이를 오가며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었다. 평창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당장 필요하다. 옳은가의 여부는 그 다음에 판단한다. 부디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보람이 있기를 바라지만. 아무튼.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화폐의 가치가 항상 일정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몇 십 년 몇 백 년이든 물가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즉 돈을 쓰든 저축하든 더이상 손해보는 것도 이익보는 것도 없다. 


아니 더 쉽게 가정하자면 오히려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물가가 떨어지면서 가지고 있는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고 있다. 오늘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보다 내일, 아니 모레, 차라리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디다가 마지막 순간에 물건을 사게 되면 더 싸게 더 많은 양을 살 수 있다. 


바로 옆나라 일본이 그렇다. 일본의 높은 저축률을 부러워하던 것이 불과 90년대였는데 이제는 걱정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더구나 버블붕괴로 인해 현물의 가치가 급속히 하락하자 사람들은 더욱 자신이 보유한 현금에 기대게 되었다. 더이상 소비도 않고 투자도 하지 않는다. 미국의 뒤를 잇는 경제대국이면서 소비도 재투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나서서 아무리 돈을 쏟아붓고 이자율을 낮춰봐야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그것이 바로 늪과도 같이 일본을 빨아들이던 잃어버린 10년의 정체였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쓰지 않는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도 그런 경우는 적지 않았었다. 조선의 역사에서도 있었다. 아예 돈을 매점하면 돈의 가치가 올라가므로 소수의 실력자들이 돈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두고 축재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돈은 찍어내는데 돈이 소수의 창고에만 쌓여갈 뿐 시장에서는 유통되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전황이라 부른다. 세계적으로도 곧잘 일어난 현상이다. 문제는 그나마 전근대사회에서는 아직 산업이 미비하고 자본의 생산참여 역시 그다지 크지 않아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란 곧 자본이 생산수단이 되는 체제를 의미한다.


소비자가 지갑을 열어야 상품이 팔리고 기업은 이익을 얻는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투자해야만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 돈을 계속 가지고 있게 하기보다 소비든 투자든 가지고 있는 돈을 계속 시장으로 돌려놓도록 유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시장은 경직되고 심지어 공황에 빠지게 된다. 정부의 지불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시장이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는데 손놓고 있다가는 더 큰 위기를 자초할 뿐이다. 그래서 미국도 달러의 태환을 포기하고 있었다.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화폐를 유통시킴으로써 시장이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인 것이다.


물론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뛰어 화폐가치가 현물가치를 쫓아가지 못하는 고인플레이션은 당장 일상적인 생활마저 불가능하게 만들므로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물가가 오르지 않아도 화폐가치가 일정해도 정작 돈이 시장에서 쓰이지 않으면서 경제 전반을 침체하게 만든다. 그래서 지난 정부에서도 가계부채를 적극 권장했던 것 아니던가. 김대중 정부에서 카드대란을 사실상 조장한 것도 그런 식으로 빚을 내서라도 국민들이 돈을 쓰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난 정부에서 부동산경기를 부양하겠다고 대출을 장려하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렇게라도 시장에 돈이 풀려야 경제도 살아난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동산 등에 대출로 묶인 소비자들의 상태가 시장을 더욱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고보니 이야기는 최저임금문제로도 넘어가게 된다. 바로 소득주도성장이다. 국민 개인에게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해주어 소비와 자본의 투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 주식등을 통해 실제 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당장 나만 해도 월급이 오르면 아파트 대출금 갚고도 몇 십만 원 여윳돈이 생긴다.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된다.


가상화폐가 화폐로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는 또 하나 이유이기도 하다. 하긴 당사자들도 가상화폐를 금에 비유하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금을 화폐로서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아는 때문일 것이다.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기에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발전과 성장을 꾀할 수 있다. 시장은 지속적으로 번영할 수 있다. 더 많은 화폐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쓰일 수 있어야 한다.


터무니없는 것이다. 어제의 가치와 오늘의 가치가 다르다. 내일의 가치는 또 다르다. 심지어 가격이 오른다. 그렇게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심장떨려서 그걸로 소비따위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 사고 내일 후회한다. 참 황당할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실제 금이 화폐로써 기능했던 시기는 얼마나 될까? 실제 거래에서 금을 결제수단으로 사용했던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면 은은 어떨까? 그러면 어째서 현재 세계의 나라들은 금이나 은과 같은 현물화폐가 아닌 신용화폐를 쓰게 된 것일까?


아마 은본위제를 운용했다는 근세의 중국에서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은자같은 건 평생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유럽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동전이 쓰였다. 아무래도 구리라면 은보다는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도 흔히 쓰는 '푼'이 은 1냥에 대한 동전의 가치를 가리킨다. 은 한 냥이 동전 100문에서 최대 400문까지 올라갔었다. 그만큼 은이 귀했다는 이야기다. 그나마도 조선에서는 구리조차 희귀해서 동전의 무게를 줄여야 했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당연히 시장거래는 활발해진다. 그만큼 더 많은 화폐를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항상 그만큼의 금과 은을 시장에 공급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유럽의 봉건영주들이 몰락했었다. 상인들로부터 사치품을 구입하려면 금이 필요한데 정작 금이 귀해지면서 영지에서 생산된 작물로 구할 수 있는 금의 양은 갈수록 적어지기만 했었다.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된 금이 아니었다면 유럽의 화폐경제는 어쩌면 그 순간 이미 절딴났다. 일본의 은광이 고갈되자 이번에는 멕시코에서 대규모 은광이 개발되며 겨우 동아시아에서 은은 결제수단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째서 세계경제는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어야만 했었는가. 결국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이 화폐로써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인 희소성으로 인해 경제상황의 변화에 따른 탄력성과 유연성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금이 필요한데 그만큼의 금을 아무데서나 채굴할 수 있을 것인가. 더 많은 은이 필요한데 원한다고 그만큼의 은이 시장에 공급될 수 있을 것인가. 시장과 화폐와의 괴리가 결국 시장을 교란시키고 끝내는 시장 자체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신용화폐인 것이다. 무엇보다 신용화폐인 달러가 기축통화로써 금을 대신해 통용되기 시작한 이유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금이 기축통화로 쓰이고 있었다면 과연 지금의 화폐경제는 그동안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화폐의 정의와 유통을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시장에서 개인이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무려 수천년에 걸친 실험이었다. 그리고 금과 은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금이 시장에서 실제 화폐로써 쓰인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긴 그동안 인류가 제련해서 쓴 금의 절대량 자체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은도 역시 그동안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에 비하면 아주 적은 양만이 실제 생산되고 거래에 쓰이고 있었다. 하물며 경제가 성장하면 그만큼 더 많은 화폐를 필요로 할 텐데 제한된 방식의 채굴에 의존해 공급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지어 갈수록 채굴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과 노력은 비약적으로 더 커지게 된다. 가상화폐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화폐는 지속적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정도를 넘어 가치가 상승하도록 되어 있다. 더 비싸지도록 되어 있다. 왜 문제인가는 바로 윗글을 보면 된다.


'썰전'에서 유시민 작가가 가상화폐 개발자들이 엔지니어이지 화폐전문가는 아니었을 것이라 지적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팽창하는 풍선과 같은 것이다. 풍선은 곧 경제다. 풍선 안의 공기는 화폐다. 화폐의 양이 일정하다. 화폐의 가치가 일정하다. 그런데 풍선만 부풀고 있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가능하더라도 얼마나 유지될 수 있겠는가. 풍선이 부푸는 만큼 새로운 공기를 주입해서 풍선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팽창할 수 있다. 물론 경제상황이 변하면 시장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을 줄여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역시 발행권자가 책임지고 결정해야 할 부분이다. 시장은 만능이 아니다. 특히 화폐는 시장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


블록체인은 상당히 쓸모있는 기술이겠구나 인정하면서도 가상화폐의 채굴방식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더구나 소수의 거대자본이 이미 가상화폐의 채굴 자체를 대부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에서 괜히 경제상황을 바꾸겠다고 화폐의 가치를 조금만 건드려도 큰 혼란이 빚어지는 것이 실제 현실이다. 하물며 가상화폐 자체를 다수 보유한 개인들에게는 더 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동기부터 분명하다. 특히 많은 가상화폐 개발자들이 개발단계에서 이미 다수의 가상화폐를 자신이 미리 선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화폐로써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난리쳐도 가상화폐에 회의적인 - 심지어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단지 투기수단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화폐로서는 너무 결격사유가 많다.


하도 가상화폐를 금이나 은과 비교하는 주장들이 많기에. 화폐의 정의와 유통마저 시장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장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째서 각 개인이나 기관 등에서 자유롭게 발행하던 화폐를 정부가 독점적으로 발행하고 관리하게 되었는가. 어째서 금과 은이 아닌 정부의 신용에 기반한 화폐가 지배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는가. 화폐의 역사이기도 하다.


블록체인 기술이 실제 현실에서 쓰이게 되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일 것이다. 기존의 가상화폐와는 다른 새로운 공인된 형태의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책임은 역시나 다시 정부에게 지워지기 쉽다. 역사의 과정이다.

금이 절대화폐인 이유는 유일무이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무엇도 금을 대신할 수 없다. 모두가 바라고 희귀한데 그를 대체할 수단이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금은 언제 어느때나 금이라는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화폐 역시 마찬가지다. 화폐란 하나의 단위사회에서 재화의 가치를 계량하는 규준이다. 국제사회에서 모든 경제지표를 달러로 표기하는 것과 같다. 그럼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가치는 달러라는 하나의 규준을 통해 동일하게 계량될 수 있다. 그런데 시장에서 달러와 함께 엔이나 유로, 위안까지 모두 단위로 쓰이게 된다면? 제각각 가치가 다른데 그 다른 규준으로 가치를 계량하게 된다면? 참고로 유로가 처음 기축통화를 선언했을 때 그 기준조차 달러였었다.


이른바 코인에 투자한 사람들부터 말로는 가상화폐가 미래에 제도권에서 쓰일 것이라 주장하면서 시세의 등락에 따라 이런저런 다른 화폐로 빠르게 갈아타고 있다. 비트코인에 미래가 있다면서 이제 나온지도 얼마 안 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코인이 돈이 된다며 나누어 돈을 투자하고 있다. 그러니까 묻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가상화폐의 가능성이란 비트코인인가? 이더리움인가? 아니면 리플인가? 설마 그 모든 화폐가 동시에 통용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시장의 혼란이다. 1비트코인은 몇 이더리움이고 몇 스텔라고 스텔라는 다시 몇 사토시고. 외환시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 단위화폐가 국가단위에서 실제로 쓰이는 화폐들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미국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등에 업은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규준으로 삼는다. 


아니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이제 도대체 어떤 가상화폐가 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상화폐가 존재한다는 이유부터가 특정한 가상화폐여야 한다는 전제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강조하지만 어지간한 가상화폐는 거의 블록체인 기술을 채택하고 있다. 그 말은 곧 블록체인기술만 쓸 줄 알면 아무라도 가상화폐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화폐가 그런 식으로 운영된 적이 있었다. 개인이 귀금속을 가지고 임의로 화폐를 주조해서 유통시켰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중세유럽에서 여러 군주들이 다투어 발행한 화폐들은 그 가치가 너무 제각각이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이슬람의 디나르화가 기준통화처럼 유통되고 있었다. 아무나 만들 수 있고 유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치에 대한 더 확실한 보증이 가능한 정부나 금융권에서도 자체적으로 가상화폐를 만들 수 있다.


전체 가상화폐의 양이 제한적이라는 것도 문제다. 금이 그래서 지금 화폐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역사상 금이 실제 화폐로 쓰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너무 희소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충분히 쓸 만큼의 금을 항상 일정하게 공급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그나마 구리마저 부족해서 화폐공급에 항상 어려움을 겪어야 했었다. 각 정부나 금융권이 당장 필요로 하는 화폐의 양이 있는데 그것을 임의로 조절하지 못한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비례해서 더 많은 화폐를 요구하게 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 시장에서 공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른바 전황이다. 더구나 나중으로 갈수록 일정한 가상화폐를 채굴하는데 더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결코 공짜가 아니다.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서 정책의 안정성에도 해를 끼칠 수 있다. 만일 진정 정부나 금융권에서 가상화폐의 기술이 필요하다 한다면 방법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한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에서 달러를 기반으로 암호화폐를 발행한다. 한국정부에서 원화로 대체할 수 있는 암호화폐를 만들어 시장에 유통시킨다. 기존의 가상화폐들은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확실한 화폐들이다. 그런 화폐들과 경쟁해야 한다. 아니면 공존해야 한다. 이 경우 각 정부들은 채굴업자들이 아닌 정책결정권자인 자신들이 직접 화폐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할 수 있다.


암호화폐시장은 결코 자유로운 개인들이 중심이 된 이상적 시장이 아니다. 당장 암호화폐의 채굴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할 수 있는 소수의 업자들이다. 그리고 현재 가상화폐의 대부분이 이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기도 하다. 정부보다 더 나쁘다. 일부 독재정권들은 정권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함으로써 경제를 교란시키기도 했었다. 갈수록 채굴의 난이도가 높아지며 이들의 독점은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지지 않고 있다. 그래도 견제가 가능한 정부와 견제 자체가 불가능한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어느쪽에 기대야 하는 것일까.


그냥 오를 것 같으니 돈벌기 위해 돈을 넣었다면 뭐라 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를 것 같으면 사는 것이고 떨어질 것 같으면 파는 것이 시장의 일상적인 원리다. 그런데 마치 미래에 무슨 대단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언젠가 아주 대단한 가치가 실현되기라도 할 것처럼. 장관의 말 몇 마디 은행장의 말 몇 마디에도 하루에도 몇 번 씩 등락을 거듭하는 취약한 시장이다. 정부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정부의 정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단지 아직 각국 정부들이 입장을 정하지 못한 틈새를 비집고 눈먼 돈이 몰려들고 있을 뿐이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알게 된다. 비트코인 같은 것이 최근에서야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여러 시도들이 있었고 그만큼 다양한 현상들이 일어났다. 교훈인 것이다. 금이 화폐로써 쓰이지 않는 것 같은. 과연 가상화폐는 어떨까.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는 하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착취론의 핵심은 한 마디로 자본의 이익은 노동자가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데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생산이란 노동자의 노동으로부터 이루어지는데 정작 노동자가 누려야 할 대가까지 모두 자본이 가져가게 되니 자본이 더 부유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의 주장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이윤율저하의 법칙마저 그래서 노동자를 더 착취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낮춤으로써 상당기간 늦출 수 있다고 보았었다. 물론 이 밖에 불변자본의 가격하락과 식민지에 대한 약탈 역시 이윤율저하를 막는 요소로 지적하고 있었다. 


자본이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유지되고 성장하고 발전한다. 더이상 노동자를 착취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이윤율저하의 법칙이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도 거기서 비롯된다. 더이상 노동자를 쥐어짤 수 없는 상황에 여러 이유로 인해 비대해진 자본이 생산을 늘리기 위해 불변자본에 과잉투자될 때 이윤율의 하락으로 더이상 자본의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이 아마 정규교육과정에서 모두가 배우는 기술발전에 따른 생산성과 이익의 상승일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그를 통해 여전히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다.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해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이익을 자본은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된다. 실제 역사를 보더라도 그것은 사실인 것처럼 여겨진다. 기업이 많은 이익을 낼수록 기업이 성장하며 노동자에 대한 고용과 임금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과연 노동자가 얼마나 착취당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실 매우 단순하다. 과연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말하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자신이 받는 임금으로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을 통한 생산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가치에 비례한다. 노동자 자신의 가치에 비례한다. 노동자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노동자의 기회를 사는 것이다. 일정 기간 동안 노동자는 오로지 자신을 고용한 사용자를 위해서만 일을 해야 한다. 그만큼 다른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래서 자신이 받는 대가라 충분치 못하다 여겼을 때 노동자는 쉽게 이직을 결정하기도 한다. 지금 고용된 곳에서 일하기보다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 쪽이 자기에게 더 이익이다. 노동자의 임금 역시 필요한 인력을 자기 회사에 붙잡아둘 수 있는 최소한으로 결정되게 된다.


문제는 그래서 결국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임금을 받고 있는데도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경우다. 일을 해서 받는 임금으로 당장 먹고 자는 일상적인 문제마저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남들처럼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가끔 여행도 가는 여유란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은 곤궁해지고 일상은 피폐해진다. 아니 어찌되었든 많은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지금의 삶을 유지할수만 있어도 큰 불만은 없을 테지만 현실적으로 무척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도 굳이 힘들게 자신의 시간과 기회를 허비해가며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당장 큰 사회문제로 여겨지고 있는 청년실업만 하더라도 일자리가 있는데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기에 거부한 경우 또한 적지 않다는것이다. 그에 대해 어떤 이들은 배가 불러서 그렇다지만 이미 한국사회는 국제적으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배부른 사회라는 것이다. 배부른 사회에는 그에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 있다.


어째서 사람들이 가상화폐시장으로 몰리는가. 유독 한국에서 가상화폐의 가치가 폭등한 이른바 김치프리미엄이라는 것도 노동을 통해 만족스런 삶을 누릴 수 없는 다수가 다른 가능성과 기회를 찾아 눈돌리게 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기에 차라리 도박일지라도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서게 된다. 너도나도 돈을 벌어보겠다고 부동산투기에 뛰어들고, 프로토며 여러 도박에도 손을 대고. 그런 것이 모두 사회적 비용이 된다. 사회적 불안의 원인이 된다. 무엇보다 어찌되었거나 노동임금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가계에서도 굳이 빚을 져가며 돈을 빌리기도 한다. 가계부채가 천정부지로 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가계의 지출을 소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택담보대출조차 결국 자기 집이 필요한데 필요한 돈이 부족하니 대충을 받아 메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도 최저임금을 늘려서는 안된다. 한국사회에서 최저임금은 보편임금이다. 심지어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사업장이나 업주가 아직도 채일 정도로 많이 있다. 경제에 해가 된다. 사용자의 이익에 해가 된다. 사용자의 이익이란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경제사정이다. 국가경제란 곧 노동자가 감수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시 마르크스의 착취론으로 돌아간다. 기술의 혁신이 아니다. 사고의 혁명이 아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그저 경제가 어렵다고 노동자의 임금부터 줄이거나 깎으려 한다. 노동자의 근로시간마저 추가임금의 지급 없이 늘리려 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이윤율이 하락하는데도 그 하락을 막을 수단으로 노동자를 더 쥐어짜고 그들의 몫을 빼앗아 메우려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 경제는 유지된다. 그렇게 해야지만 유지되는 경제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누구의 책임일까. 역시 이미 위에 쓴 내용 가운데 그 해답이 있다. 부가가치를 그만큼 늘리면 된다. 노동자가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 상승하는 만큼 기업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으면 된다. 아니 경제가 성장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기업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면 그만큼 기업도 성장하고 국가경제도 성장한다. 그에 따라 고용도 늘고 노동자가 받는 임금도 늘어난다. 어느 순간 그것이 멈춰 버렸다. 그러니까 노동생산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노동생산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량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생산한 가치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그런데도 그 책임을 오로지 노동자에게 돌리는 것은 나태이고 방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에 의한 기업살리기란 그런 의미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 경쟁을 통한 성장과 발전을 말하던 역대정부들이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이 만족한 삶을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가. 당연히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남들만큼 아쉬운대로 누리며 살 수 있는 최저한의 조건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그러니까 지금의 최저임금으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받고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란 어느 정도인가.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경제와 경제를 이끌어가는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그런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정상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의 최저임금 논란이 우습게 여겨지는 이유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사람이다. 초기자본주의시대를 살았던 구시대의 인간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는 허점이 많다. 모순도 많다. 사실상 현대경제학에서 마르크스의 주장은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다. 하물며 이름이 비슷하다고 막스 베버마저 경기를 일으키며 거부하는 사회에서 그 마르크스를 닮아가려 하고 있다. 하긴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이 처음 미국에 소개되었을 때 돈버는 방법에 대해 쓴 책이라 선전되고 있었다. 국가의 경제도 기업도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몇 년 전 타진요 사태가 생각난다. 그때 타진요의 거짓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던 몇 안 되는 블로거 중 하나가 나였다. 항상 그래왔었다. 나는 원래 겁이 많다. 누군가에게 욕먹는 것도 비웃음을 사는 것도 무척 꺼리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블로그 운영에 필수적인 리플접대를 하지 않는다. 우호적이면 우호적이어서, 적대적이면 또 적대적이어서,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내가 하고픈 말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하고픈 말은 해야 한다. 해야만 하는 말이면 반드시 해야만 한다. 그 다음은 나중 문제다. 얼마나 욕먹든. 어떻게 웃음거리가 되든. 그런 것 다 따져가며 글쓸 거면 그냥 혼자만 볼 수 있게 일기장에나 끄적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남들 보라고 쓰는 글이다. 뻔히 남이 읽을 걸 알고서 쓰는 글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내 글을 읽었을 때 돌아올 반응 역시 충분히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사람이 좋아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글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글이다. 보다 선명하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드러낼수록 상대의 생각과 주장과 부딪히게 된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따라서 더 분명해진다. 그렇다고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읽지 말라 말할 것인가.


하물며 기자다. 물론 기자마다 각각 지향하는 바가 있고 그에 따라 목표로 하는 독자층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밖에 다른 독자들이 아예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반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까지 모두 각오하고 기사를 쓰는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사실이고 알아야 하는 진실이라면. 그래서 반드시 자신의 기사로써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고자 한다면. 그 다음 일은 그 뒤에 생각하는 것이다. 잡혀가서 고문당하든, 회사에서 잘려 백수가 되든, 아니면 길거리를 다니다 썩은 계란세례를 받든. 그래서 기자를 시대의 양심이라며 한 사회의 지성으로 취급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 정도 각오도 없으면서 독자를 탓한다는 것은 너무 아니지 않은가.


진짜 어이없는 인간 하나가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을 아예 묻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 덜떨어진 되다만 기자놈 하나만 기억난다. 그것이 대통령에게 직접 국정현안에 대해 물을 수 있는 기자회견장에서 귀중한 기회까지 허비해가며 물어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일까. 그것도 대통령이 직접 지명해서 질문을 받는데 고작 그따위 질문밖에 할 수 없는 빈약함과 빈곤함이 내가 다 창피해질 지경이다. 이런 놈들이 기자짓하는 사회에서 내가 살고 있다. 이런 놈들이 기자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사회에서 내가 정의를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일개 이름없는 블로거도 최소한 자기가 글을 쓰는 만큼 독자의 반응이 다양할 수 있음을 각오하고서 글을 쓴다. 욕먹고 비웃음당하고 그래서 온통 악플로 도배되도 차라리 안 본 척 못 본 척 애써 무시하며 자기가 써야 할 글들을 쓴다. 만일 그럴 수 없을 것 같으면 거기까지가 자기의 한계인 것이다. 악플 다는 놈들도 문제지만 어차피 악플없이 글쓴다는 건 어려운 일이므로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면 일찌감치 손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기의 선택이다. 그렇게 악플이 싫으면 기자짓 때려치던가. 아니면 모두가 좋아할만한 기사를 쓰거나. 그정도 각오도 없이 기자질을 하려 했던 것일까.


하여튼 덕분에 그때가 생각난다. 타진요가 정의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참 보기도 기분나쁜 리플들을 많이 달았었다. 다행이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약소블로거라 차라리 그런 악플조차 거의 없었다는 점이랄까. 그래도 아랑곳않는다. 내가 보기에 틀렸으니까. 그건 잘못된 것이었으니까. 그러면 쓴다. 사람들이야 뭐라 말하든. 참 한심한 주제들이다. 그래도 언론인이라는 것들이. 가방끈이 아깝다.

2007년 당시 운영하던 블로그에서 이명박 전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전 국민이 돈을 모아서 1년에 1조씩 챙겨줄 테니까 제발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만 있으라."


미안하다. 10조쯤으로 올려썼어야 했던 것일까? 이명박이 국가에 끼친 해악을 헤아리니 50조도 차라리 싸다 여겨진다.


아무리 원전 팔아먹겠다고 국회의 비준도 받지 않은 채 파병까지 전제한 군사협력 MOU를 덜컥 체결하고 있었다니. 그래도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사안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히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러면 한 마디로 사기를 친 셈인데, 그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위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UAE는 중동에서도 국제사회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나라였을 것이다.


얼마나 쪽팔렸으면 같은 당 정치인들에게까지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조용히 있었으면 그냥 모른 채 지나갔을 일을 괜히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이 들쑤셔서 이렇게까지 상황을 키우고 말았다. 모두가 알게 되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전국방장관 김태영이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잘했다며 당당히 밝히고 있었다. 얼마나 염치도 상황파악할 주변머리도 없는 저능한 집단이라는 것인지.


이런 것들이 대통령이고 행정부 관료였었다. 나도 반성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는 아닐 것이라 여겼었다. 정동영 같은 놈에게는 절대 표를 줄 수 없다며 될 리도 없는 진보후보에게 표를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5조 정도 쥐어주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는데. 인간의 스케일이 다르다.


문재인 정부의 인내심이 대단하다. 외교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야당이 되어서도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병신이다. 보수언론 역시.


저런 놈들이 원내 1당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내가 다 수치스럽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다. 

강경화 장관이 오늘 발표한 위안부협상의 후속조치는 결국 세 가지다. 하나 위안부 협상은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 둘 그러나 재협상도 위로금 반환도 않을 것이다. 셋 그러므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해 최대한 명예와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할 것이다.


사실상 원론적인 말이다. 그래서 일본으로서도 더이상 할 말이 없다. 협상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돈도 돌려주지 않고 재협상도 않는다. 하지만 협상의 내용 자체는 부정한다. 협상이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고 무엇보다 피해자를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트집잡을 것이 없다. 만일 이것을 사실상의 파기라 주장한다면 파기의 책임은 일본에게로 넘어간다.


어차피 재협상을 요구해도 받아주지 않을 일본이다. 일방적으로 파기할 경우 외교적인 부담 또한 작지 않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이것을 빌미로 끌려다닐 가능성도 적지 않다. 협상을 해도 이행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협상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해도 정작 국내사정으로 인해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음을 주장하면 그 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여론보다 더 중요한 명분이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북핵문제로 어느때보다 한미일 공조가 중요한 상황이다. 그래서 한국정부도 명백히 잘못된 협상인 것을 알면서도 정면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 공은 일본에게로 넘어간다.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일단 명분상 협상은 유효하다. 돈도 받았다. 위로금은 아니지만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도 일본 정부와 협의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상간 합의가 있었다고 피해자를 나몰라라 하는 것은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맞지 않는다. 정부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해서는 안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너희가 파기하라. 10억엔은 볼모다. 그 용도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순간 위안부 문제는 다시 재협상의 테이블 위에 놓인다.


주도권은 다시 한국정부에게로 넘어온다. 굳이 한국정부가 나설 필요도 없다. 민간단체들의 활동을 정부차원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에 따라 지원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마저 받아들일 수 없다면 파기는 일본의 몫이다. 일본이 파기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한국정부가 바라는대로 이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협상은 분명 존재하지만 실제 실행되지는 않는다. 절묘한 한 수다. 그럼으로써 외교적인 부담도 덜고 위안부 문제에서 주도권도 다시 가져온다. 외교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감정대로라면 바로 파기하는 것이 가장 좋았을 테지만. 그러나 주어진 조건에 최선의 답을 찾는 것이 바로 외교 아니던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한국정부에게 일본과의 외교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한일관계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갖는다. 그래서 역대 정부에서 과거사 문제는 외교현안과 별개로 다루어져 왔었다. 당장 해결될 수 없는 과거사나 영토문제를 외교현안과 연계하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다. 그것을 틀어버린 것이 이명박과 박근혜다. 국내정치를 위해 반일감정을 이용하다가 외통수에 걸리고 말았다.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되며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무리한 협상을 진행해야만 했다.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는다.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외교현안은 현안대로, 그러므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되 그러나 형식은 지난 정부에서 있었던 협상 자체는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고 계승하는 것으로 한다.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해결되지 않지도 않았다. 나머지는 이전 정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일관계 안에서 풀어가야 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의 협상과는 상관없는 진정한 사죄와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협상은 인정하지만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정부의 진심어린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앞으로 한국과 일본 정부가 차근히 해결해 갈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정면으로 반발하려면 일본정부 자신이 협상의 파기를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 한일관계의 경색을 각오해야 한다. 국내외적인 부담은 일본정부에게 돌아간다.


바로 이런 것이 외교라는 것이다. 최대한 둥글게 모나지 않게 튀지 않게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은근슬쩍 이익을 자기 앞으로 끌어온다. 외교적 수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기호학은 그같은 외교적 수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발달했다. 절묘하게 책임은 피하고 권리를 찾으면서 부담을 상대에게 지운다. 트집잡을 여지조차 없이 협상 자체를 사실상 무효화시켜 버린다. 누가 누구더러 아마추어라 하는 것인지.


다른 의미로 속시원한 발표였다. 통쾌하지는 않았지만 무릎을 칠 정도로 절묘했다. 하긴 지난 8개월 동안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외교적 역량이란 것이 이 정도 수준이기는 했었다. 비로소 지난 9년의 시간을 되돌려간다. 아쉽지만 최선이다. 잘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