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하긴 나만 그리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기껏 여러 취재원들로부터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굳이 문제가 될 만한 형식으로 내보내면서 논란을 자초했다. 그리고 당사자가 반발하자 유례없이 바로 꼬리내리고 사과하면서 도리어 반대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그를 근거로 수사심의위에서 수사중단권고까지 나왔으며, 바로 같은 시간대 뉴스를 통해 권고를 무시한 수사를 비판까지 하고 있었다. 과연 이 모든 게 우연이었겠는가?

 

김경록PB의 법정증언에 따르면 이미 작년 9월 KBS 법조기자 한동훈의 이름을 언급하며 협박 겸 회유를 했었다고 한다. 한동훈 당시 반부패부장이 김경록PB의 범죄혐의를 중대하게 보고 있다는 말에 검찰이 요구하는대로 진술하며 협조하게 되었다고. 즉 이미 전부터 KBS 법조팀은 한동훈 지금 법무연수원 연구위원과 상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취재와 보도를 통해 상당히 밀접하게 협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검찰로부터 정보를 받아서 김경록PB를 인터뷰하고, 또 검찰의 의도대로 인터뷰를 왜곡해서 내보냈고, 더구나 그 과정에서 직접 실명을 거론하며 협박과 회유를 했다. 그런데 역시 어디서 많이 본 그림 아닌가? 바로 이동재와 한동훈이 했던 바로 그 과정들이다.

 

KBS가 필사적으로 검언유착을 권언유착으로 돌리려 발악한 진짜 이유였던 것이다. 채널A의 검언유착이 드러나는 순간 KBS의 검언유착도 드러나게 된다. 한동훈의 통화내역이 까발려지는 순간 KBS가 그동안 한동훈과 유착해 온 내용들 역시 까발려지고 마는 것이다. 물론 진실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언론이었다면 그럼에도 더욱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KBS가 그런 언론일 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프레임 전환을 위해 결정적인 오보라는 오명을 스스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알리바이를 위해서 한동훈은 기꺼이 자신을 위해 오보를 내 준 기자들을 위해 민사소송까지 걸었다. 한겨레의 하어영은 무려 검찰총장으로부터 형사고발을 당했는데 수사 한 번 받은 적 없었다. 민사소송도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지, 판결이 났어도 안받겠다 하면 안주고 끝내면 그만인 것이다.

 

실제 당시의 오보 이후 과연 KBS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채널A와 한동훈의 검언유착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는가 살펴보면 그 의도는 너무 명확해지는 것이다. 큰 오보를 내기 위한 밑그림이었던 것이다. 오보를 내고, 사과하며 인정하고, 그를 통해서 검언유착이 권언유착으로 프레임전환되도록 상황을 유도했다. 권경애의 한상혁 저격은 당시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보는 것이 옳다. 타이밍이 요상해지며 의미가 퇴색되었을 뿐 상황만 맞아떨어졌으면 확실한 한 방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KBS 오보가 근거가 되어 수사중단 권고가 나왔는데 권고를 따르지 않는다며 자사 보도로 비판하고. 심지어 오보를 내고 사과한 당사자는 유튜브 채널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에 나와서 참언론인 행세하며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한다. 아마 이동재가 지금 이런 표정이겠구나. 정연욱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래서 이동재가 떠오른다.

 

물론 전적으로 한동훈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첫째는 한동훈과 유착한 자신들의 전력을 감추고 싶었던 것일 테고, 둘째는 어찌되었거나 KBS 노조위원장이 약속한대로 문재인 대통령의 목을 따서 자신들이 파업한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만 공격할 수 있으면 광화문에서 코로나를 퍼뜨려도 정당하고,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인질로 삼아도 정의롭다. KBS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훈을 구하고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언론으로서 오보라는 오명까지 기꺼이 뒤집어 쓸 수 있다. 한겨레가 KBS의 검언유착을 가리기 위해서 역공당할 것이 뻔한 김학의 연루의혹을 터뜨렸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정황이 김경록PB의 입을 통해서 법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KBS 법조팀의 반박에 애처롭게 들리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법정이었다. 그것도 모든 언론이 보도한 그대로 정경심 교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기 위해 나온 자리였다. 자신의 항소심을 위해서라도 굳이 검찰과 재판부를 자극할 만한 발언을 할 이유가 없었던 자리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모든 언론이 정경심 교수에 불리한 증언을 한다는 와중에 하필 KBS 법조기자의 입에서 한동훈의 이름이 나왔다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김경록PB가 법정증언 중에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아니면 작년 일도 기억 못해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거나? 그러면 당장 위증죄로 처벌부터 받아야 할 상황이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

 

아무튼 그래서 결국 집에 TV를 들이는 것은 다시 먼 훗날로 미뤄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대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욕할 일 있으면 찾아갔었는데, 이제는 그냥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에 나와 참기자 행세하는 놈들 역겨워서 클릭하기도 꺼려진다. 그러니까 이런 놈들이 그동안 일베 욕하고 조선일보 욕하며 참언론인 행세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공영노조가 문제다? KBS 자체가 문제다. KBS의 터가 문제인 걸까? 아니면 사람들의 피가 문제인 것일까?

 

결국 하나의 그림인 것이다. 작년 조국사태부터 올 초 유시민을 타겟으로 한 검언유착 의혹까지, KBS가 김경록PB의 인터뷰를 왜곡하고, 채널A가 한동훈과 손잡고 유시민을 사냥하려다 들통나고, 다시 그것을 가리기 위해 KBS가 자발적인 오보를 내는 이 모든 과정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KBS는 어째야 한다? 과연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아닌 척 해서 더 더러운 벌레새끼들이다. 죄다 격리조치했으면.

그러고보면 사람들이 이토록 필사적으로 자기 집을 가지러 애쓰는 이유는 집없는 설움이란 것이 정서적으로 유전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남의 집에 세들어 살려니 집주인의 횡포가 서럽고, 둘째는 일단 집만 사놓으면 값이 오르니 일찌감치 집 한 채 사 놓지 못해 남들처럼 이익을 보지 못해 그것이 또 서럽고, 무엇보다 그래도 나이 먹어서 자식들에게 물려줄 집이라도 한 채 있어야 면이 설 텐데 그마저 없으니 인생이 서럽고 미안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살아서 자식들 다 자라기 전에 집 한 채는 장만하자.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첫째 집주인들이 횡포 못부리게 하고, 집을 사놔도 값이 오르지 않으면서, 더구나 자식에게 굳이 집을 물려줄 필요가 없어지만 집을 살 이유도 사라지는 것 아닌가. 역시 내 이야기다.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고 그래서 늙으면 그냥 혼자 살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예정이기에 일단 집을 물려줄 필요가 없고, 집값 오르는 것에 신경쓸 이유도 없고, 그나마 단 하나 집주인의 횡포가 문제인데 집주인이 느닷없이 나가라 해서 집을 옮긴 경우는 지금까지 딱 한 번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직장 때문에 이사를 해도 했지 집주인 문제로 이사한 경우가 없으니 그냥 그때그때 편한 곳에 월세 얻어 사는 것에 오히려 크게 불만이 없다.

 

세를 살면 가장 안좋은 점이 바로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 주소만 한 열 번은 넘게 바뀌었던 것 같다. 내가 첫 기억이 구로동 철로변 살 무렵이었는데, 그 이후로 이사한 횟수가 가만 보자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10번, 이후로도 한 10번은 되는 모양이다. 대개는 그나마 가장 오래 살았던 것이 부모님 집에 함께 살 때와 그 전에 마음 좋은 집주인 만나서 한 집에서 6년을 살았을 때였던 것 같다. 나머지는 거의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녀야 했었다. 매번 살던 동네가 달라지고, 그러면서 친구와도 멀어지고, 새로운 동네에서 또래들은 낯설기만 하고, 그런 일을 그렇게 자주 겪고 나면 자연스럽게 어딘가 정착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역시 자기 집을 가지고 싶은 첫째 이유일 것이다. 어디 한 곳 마음에 맞는 동네를 찾아 자기 집 가진 친구처럼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아무 일 없이 살 수 있다면 굳이 내 집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집값이 올라서 집을 넓혀 가는 것도 참 허무한 것이다.

 

6년 동안 한 동네 살면서 그리 이웃들끼리 친해지고 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후 이사도 가까운 곳으로 간 탓에 한 3, 4년은 여전히 서로 왕래하며 지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 사는 곳도 멀어지고 그러면서 서로 한 번 얼굴을 보기에도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되었다. 거의 10년 넘게 만에 동생 결혼식 때 한 번 얼굴을 보고 지금껏 소식도 모르는 이도 있다. 10년, 20년, 30년, 그래서 이웃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결혼하고 독립하는 모습까지 모두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 이웃이란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그만큼 이웃으로 지낼 기회가 사라진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집 가진 것처럼 한 곳에서 원하는 만큼 오래 살 수 있도록 한다면 과연 어떨까?

 

장기적으로 주택임대를 자기 소유의 주택에 대한 임대인의 재산권 이외에 실거주하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임차인의 생활권을 더욱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여기는 이유다. 4년도 사실 적다. 하긴 그래도 그동안은 2년 동안 별 걱정없이 그동안 내던 월세 내며 살 수 있었고, 다시 2년 계약을 연장할 때도 따로 계약서를 쓰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많이 나아진 것이었는데 이제 앞으로 4년은 기본으로 보장된다. 4년이 8년이 되고 16년이 되고 평생이 된다면, 즉 일정한 월세만 계속해서 낼 수 있다면 굳이 이사갈 일도 없는 현실이 되어 버리면 그때는 굳이 집을 사거나 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죽어서 집 한 채 못 물려주는 미안함도 그냥 자식들도 그렇게 살면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는 것이다. 주택임대를 임대인의 재산권만이 아닌 임차인의 주거권과 생활권으로 이해한다면 절대 문제가 될 정책이 아니다.

 

그래서 얼마나 마음대로 전세든 월세든 올릴 수 있는데? 전세는 기본적으로 집값보다 일정 이상 싸야 수요가 생긴다. 전세와 집값의 차이가 거의 없으면 차라리 돈을 얼마간 더 빌려 집을 사면 샀지 굳이 그렇게 비싸게 주고 전세를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집값이 이후 오를 것이란 보장이 있다면. 월세 역시 그래서 내가 서울에서 밀려나 경기도민이 되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월세가 싸다. 그런데 경기도라고 다 나처럼 경기도에서 일자리를 찾느냐면 거의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같은 경기도라도 서울과의 접근성에 따라 월세도 크게 차이가 난다. 어차피 비싼 동네는 더 비싸게, 싸게 살 수 있는 곳은 싸게, 그것이 시장주의 아니겠는가. 그래도 아마 전세금 모으는 것보다 한 달에 들어가는 비용은 더 쌀 것이다. 결국 자기 것도 아니고 나중에 자식에게나 물려주게 될 전세금에 한 달에 쏟아 붓는 돈이 그렇게 많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받거나.

 

즉 지금 정부의 주택정책이란 집을 살 능력이 안되는 사람들이 무리하게 집을 사려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는 정책이란 것이다. 조국 전장관이 말한 미꾸라지 붕어들이 살기 좋은 개천을 만드는 정책이다. 굳이 자기 집을 가지려고 일상까지 포기해가며 자신을 희생시키지 말고 그냥 안정적으로 임대하며 살면서 자신의 삶을 더 많이 즐기라. 임대주택을 더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정부가 정한 임대료만으로 주거비를 해결하며 더 많은 부분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된다. 내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집이 필요한가? 그런데 있다. 대출금이 월세보다 더 많다. 빌어먹을 일이다.

어려서 어른들은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물리선생님은 어설프게 머리 좋은 놈들이 세상에 가장 큰 해악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맹자는 말했다. 무릇 사람은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고,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지킬 수 있어야 비로소 선비라 할 수 있다고. 뭔 말이냐면 사람이 마음을 지키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내가 여기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심지어 방문자수며 리플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내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내 직업은 블로거가 아니다. 블로그에 글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 와서 내 글 읽고 리플 달아주는 누구도 내 삶에 아주 작은 도움조차 되지 못한다. 내가 지금 고민해야 하는 것도 앞으로 뭔 일을 해서 먹고 사느냐지 여기서 어떤 글을 써서 방문자 끌어모으는가가 아닌 것이다. 바로 첫번째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당연하게 땅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직접 농사를 짓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려면 노비를 거느려야 하고, 노비를 거느리려 하면 재물과 권세가 있어야 한다. 아예 농사 자체를 짓지 않으려면 대신 먹을 식량과 생필품을 살 돈이 어디선가는 나와야 한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도 처가며 형의 가족까지 먹여 살리겠다고 장인을 따라 무예를 배워 무관의 길로 나선 것 아니던가. 그나마 이순신 장군은 무관으로서 길을 이끌어 줄 장인이라도 있었지 그마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한명회가 괜히 능참봉이나 하다가 수양대군 밑으로 들어가 정난같은 걸 일으킨 게 아니란 것이다.

 

실제 조선후기에 들어가면 대부분 선비들은 그저 양반 신분이나 유지하려고 향시 정도나 보았을 뿐 대과에는 아예 응시조차 않는 경우가 더 많았을 정도였었다. 굳이 벼슬살이 하지 않아도 농사 지으면 자기 먹을 정도는 충분히 나오고, 땅도 좀 있고 노비도 좀 있으면 권세는 없어도 유지행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농사지어 충분히 먹고 살며 인근에서 제법 기침도 할 수 있는데 굳이 벼슬 살겠다고 구차한 꼴을 볼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긴 이 무렵 되면 대부분 관직은 한양에 모여사는 이른바 벌열들이 독점하고 있기도 했다. 남산골에서 하는 일 없이 글이나 읽는 허름한 선비들이 늘어난 이유도 그나마 한양을 떠나기라도 하면 다시는 권력의 주변에조차 다가갈 기회가 없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책에 나오는 것처럼 선비가 수틀린다고 관직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고향에 따로 먹고 살 방도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봐야 직접 농사지을 땅조차 없는 형편이라면 어찌 감히 그나마 녹봉이라도 나오는 관직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질 수 있을 것인가. 권력의 단 맛을 봤다면 그래서 더욱 정약용처럼 자식들이 아예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한양을 벗어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 더러운 꼴 안 보고 그냥 내 땅에서 내가 벌어 먹으며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 그게 또 사대부다. 물러나면 물러난 대로 먹고 살 길이 있고, 관직에 나가면 나가는대로 권세가 따른다. 관직이 없다고 지역사회에 영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관직에 나가면 권력을 가지고 국가단위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문제는 원래 그나마도 없었거나 있더라도 만족할 수 없는 경우들일 것이다. 어떻게든 스스로 권력을 가지거나 권력을 가진 누군가의 주변에 머물며 그 찌꺼기라도 받아먹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생활도 되고 자기 욕심도 채울 수 있다. 역사상 간신이라 불리는 부류들인 것이다. 탐관오리라 불리는 놈들이 대개 여기에 속한다. 권력을 위해 글을 팔고, 지식을 팔고, 나중에는 양심까지 판다. 하긴 최근에도 연구비를 대는 스폰서의 입맛에 맞게 데이터까지 조작해가며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경우가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연구결과를 도출하는 자연과학의 논문에서조차 그렇다. 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다. 특정 문중의 영향력에 사료가 왜곡되어 잘못된 사실이 진실처럼 통용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그래도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했으니 박사학위도 땄을 텐데 환경학자로서 4대강이 환경에 더 도움이 된다며 앞장서 주장하던 학자들을 떠올려 보라.

 

어쩌면 현대민주주의가 가지는 또 하나 모순일 것이다. 원래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이란 다른 이들과 같은 그저 한 사람의 시민일 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 가운데 선출되어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나면 다시 시민으로 돌아간다. 원래 자기 일을 하다가 선출직인 대통령이 임명하면 장관도 되고 청장도 되었다가 역시 임기를 마치면 다시 원래의 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현대가 너무 고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계속 그 일만을 맡아 해야 하는 사회적 필요가 생겼다. 권력이 직업이 된다. 사회적 직위가 곧 자신의 생업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과연 사심없이 오롯이 국가와 시민만을 위해 공공에 봉사하는 공직자라는 것이 얼마나 가능하겠는가.

 

아무튼 이렇게 별 되도 않는 소리를 길게 지껄이는 이유는 어느 석사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강연도 열심히 다니시는 것 같다. 여기저기 칼럼도 꽤 연재하는 것 같다. 역시 돈이 된다. 어쩌면 어렵게 얻은 대학교수 자리도 박차고 나온 것이 온전히 자의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는지. 사실 보수는 돈이 된다. 진보는 돈이 되지 않는다. 당장 유튜브만 봐도 보수채널은 슈퍼챗만 한 번 방송할 때마다 천 만 단위로 쏘아지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 돈 바라보고 보수유튜버로 전향하신 분도 계신다. 자기 생업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생업이 없으면 K값 같은 것이나 떠들면서 후원금 장사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정의당도 그래서 걱정이네. 정의당이 애매하다는 것이 정치를 직업으로 계속 하기에는 정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입이란 것이 없고, 그렇다고 어차피 당선도 못될 것 취미로만 하기에는 따로 대단한 본업을 가진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진보활동가 진보운동가라는 게 사실 그리 돈이 되지 않는다. 홍세화도 돈을 벌려면 강연회에도 가고 책이나 글도 팔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뭔가 그럴싸한 것이 필요하다. 작년의 정의당과 올해의 정의당이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도 작년의 정의당은 뭔가 여유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 정의당 비례대표들은 국회의원 그만두면 어디서 뭘 하며 살아야 할까?

 

결론은 자기 하고 싶은 말 마음껏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려면 그만한 물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 먹고 살 무언가가 있어야 한결같은 마음을 지킬 수 있다. 먹고 사는 게 불안하면 마음도 불안해진다. 그래서 그리 추워했던 것일까. 그래서 역시 글은 취미로나 쓰는 게 최고인 것 같다. 아마 이전 다른 블로그도 봤으면 알겠지만, 아니 특정 매체에 기고할 때조차 양식은 지켜주되 내용은 항상 내 마음대로였었다. 거기서 주는 돈으로 먹고 산 적이 없다. 심지어 어차피 최저임금 일자리 아무데나 가도 그 정도는 받는다는 마음에 전직장에 대해서도 그다지 애정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생쥐스트도 혁명의 끝자락에 모든 프랑스 시민을 위해 땅을 나누어주려 했던 것일 테고.

 

먹고 사는 게 불안해지면 그리 글도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혹은 다른 욕심이 마음 한 구석에 깃들기 시작하면 생각에도 그늘이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변절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미혹의 순간에 자신의 한결같은 마음이 흔들리면 새롭게 찾은 믿음을 흔히 변절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라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오로지 의지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사람이 현실을 딛고 사는데 어찌 의지만을 가지고 살 수 있겠는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돈 많은 보수진영에서 이들을 좀 잘 챙겨주기 바란다. 덕분에 김지하 시인도 제법 먹고 사는 것 같지 않은가. 진보진영에 계속 붙어 있었으면 그다지 좋은 꼴 보기가 힘들었다. 더불어민주당조차 의석만 많았지 돈은 미래통합당보다 없다. 잘 먹고 잘 살기를. 현실보다 더 큰 명분은 없다. 아닌 척 하는 게 문제일 뿐. 너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전쟁중이다.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 전장에서 주력군을 이끌고 싸우던 지휘관이 정부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전쟁이 끝나도 종신 군사령관직을 보장하고, 국무회의 참석과 국가가 투자한 대기업의 지분 일정량을 달라."

 

한신이 그러다 뒈졌다. 한고조가 항우에게 열심히 깨지는 것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며 자기 이익만 챙기려다 오히려 전쟁 도중 군권마저 빼앗기고 그나마 항우까지 죽고 난 뒤에는 여후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이런 짓거리 내버려두면 버릇만 나빠진다는 것이다. 항상 왕이 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설 수도 없는 것인데 주력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군과 왕조의 명운을 볼모삼아 협박할 때마다 다 들어주면 왕이고 뭐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원숭환이 모문룡따위를 죽였다고 숭정제에게 능지처사를 당한 것을 보라. 

 

그래서 하마트면 이순신 장군도 선조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것이었다. 게긴다고 여긴 것이었다. 조정이 어렵게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서 돌아온다는 정보를 얻어서 요격해 죽이라 지시했는데 이순신이 함정이라며 꿈쩍도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실제 이순신은 조정의 명에 따라 부산까지 함대를 이끌고 출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거나 조선에서 가장 정예라 할 수 있는 이순신의 수군을 지휘하는 통제사가 조성의 명을 함부로 거역한다는 것은 조정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을 파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할 때 조정 내부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이었다. 류성룡조차 감히 이순신을 감싸고 나설 수 없었다.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그렇지 않아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험한 상황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의료진이 코로나19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방역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위급한 상황을 기회삼아 의료인력들이 - 정확히 의사들이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여기서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완전히 굴복하지 않으면 국민들이야 죽든말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국민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얼마나 고통받고 죽어가든 자신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 정부에서 코로나19 재확산이 수습될 때까지 유보하겠다며 한 발 양보한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자며 먼저 손을 내민 상황에서도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무조건적인 항복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국가적 위기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부를 위협하겠지.

 

웃기는 건 그동안 철도파업이나 운수노조파업이나 금속노조파업 등 수많은 파업들에 대해 그들 의사들이 보였던 태도라는 것이다. 아니 같은 병원 안에서 간호사며 병원직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했을 때 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까? 간호사를 포함한 병원직원들이 노조를 만들어 파업할 때 의사들이 그를 비웃으며 내세운 논리가 바로 환자의 생명과 안전이었다. 의사 새끼들이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내가 말을 않겠다. 천룡인들이라 그렇다. 사람의 목숨 따위 내 손아귀에 들어 있으니 내 말 만은 죽어도 들어야 한다. 그래야 할까?

 

설사 이번 코로나19 재확산이란 국가적 위기로 인해 일시적으로 정부가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더 엄격해지고 더 강경해질 것이다. 다시는 의사들이 국가적인 위기를 틈타서 국민을 볼모삼아 국가에 덤비지 못하도록. 물론 지금도 가능한한 강경하게 의사들의 부당하고 불순한 의도가 관철되지 못하도록 대응하려 할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의사들과 달리 정부 입장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들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지금을 기회라 여기는 것이다. 의사들 자신에게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란 단지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지만 정부에게는 목적 그 자체다. 그러니 정부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의사집단을 박살낼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의사의 수입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의대정원을 늘리고, 외국인의 의대 편입을 통한 의사고시 응시를 허락하는 것이다. 더 다급하면 일정 이상의 의료수준을 갖춘 국가들과 협정을 맺고 의료진의 교류를 추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다시는 의사놈들이 단합해서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짓거리를 감히 하지 못하도록. 지금 의사들은 국가의 위급상황에 국민을 볼모삼아 정부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중이니.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명분은 정부가 먼저 대화를 제안하고 유보를 표명한 이상 어디까지나 정부에게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재확산이 기회라는 의사들의 오만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의사파업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자신들이 직접 그리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정부를 이길 수 없다. 국민을 인질삼아야 의사도 정부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 그런 놈들을 내버려두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때려잡으라.

 

얼마나 강경하게 의사들의 반란을 진압하는가 똑똑히 지켜보겠다. 이건 테러 수준이 아니라 그냥 반란이다. 국가도 국민도 안중에 없는 이익집단이 국가의 위기를 빌미삼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반드시.

여기저기 커뮤니티마다 의사를 자처하는 이들이 열심히 의사 입장에서 주장을 펴는 것이 보인다. 역시 일반인과는 사는 세계가 다른 것일까? 공공의료 인력과 시설의 확충이 어제오늘 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당연히 의대정원확대와 공공의대 설립 역시 오래전부터 나온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말 한 마디 없이 밀어붙인다? 그동안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듣지도 않고 반대부터 한 것은 어디의 누구였던가?

 

아무튼 가장 흥미로운 것은 어째서 코로나가 재확산하는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파업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지금이어야 하니까'라는 대답이었다. 즉 코로나의 재확산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지금이어야만 파업의 효과가 극대화되어 정부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란 논리였다. 당장 국민이 죽게 생겼는데 정부가 끝까지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겠는가. 당장 코로나19로 죽는 국민이 생긴다면 책임은 모두 정부에게 돌아갈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코로나19의 재확산은 정부의 공공의료확충 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매우 요긴한 기회가 되어 주고 있다는 뜻이다.

 

어째서 광화문집회에 경기도 의사협회장이 직접 참석하고 있었는가. 어째서 의사란 인간이 야외에서는 감염이 되지 않는다며 확진자가 쏟아지는 상황에 사람들이 집회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며 안심시키고 있었는가. 광화문에 참석했던 인원 가운데 일부가 의사 집회에도 연루되어 있었다. 과연 무관한 일인가? 처음부터 의사협회와 교회와 미래통합당이 결탁하여 코로나 재확산을 기회삼아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려던 것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무튼 더욱 의사들의 파업을 지지할 수 없게 된 이유인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상황을 오히려 기회라 여긴다. 국민이 죽게 생긴 상황에 오히려 기회라 여기고 자기들 이익만 챙기려 하고 있다. 국민이 죽으면 전부 정부의 책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보를 하든 보류를 하든 완전철회하지 않으면, 정부가 완전히 굴복하지 않으면 국민을 인질삼아 계속 파업을 하겠다. 사람새끼들인 것인가? 요즘 대학 가면 다 이따위가 되는 것인지.

 

전혀 아무 거리낌이나 어색함 없이 떠들 수 있다는 점이 더 신기했을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기에 몰린 지금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기회다. 지금이라면 정부를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다. 국민에게는 재난인데 저들에게는 그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킬 기회란 것이다. 그런 말을 너무 당당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래도 의사면허는 박탈할 수 없으니까. 죄다 쫓아내고 의사나 좀 수입해 왔으면 좋겠다. 한국 의사 수준이다.

중세유럽에서 군이란 곧 기사를 의미했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고 대신 기사는 전쟁이 일어나면 무장을 하고 달려와 왕을 위해 싸우는 구조였었다. 전국시대 이전 중국도 다르지 않았고, 메이지유신 전까지 일본 또한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제도가 그렇고 계약 또한 그와 같이 맺어져 있다 하더라도 결국 지키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나라의 유왕이 죽고 호경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며 춘추시대가 시작된 원인도 역시 견융이 쳐들어왔는데 정작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지 않았기 때문 아니던가.

 

몽골이 쳐들어 왔을 때도 계약에 따라 제후들이 병사를 이끌고 모이기는 했지만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야 했기에 참패를 당해야 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외부의 침략과 맞서는 경우라면 어느정도 제후들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같은 제후를 징벌하는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원래 당대에만 지급되었던 영지가 세습으로 바뀌게 된 이유였다. 서로 이해가 맞아 떨어지다 보니 영지 반납 않는다고 정벌하려 해봐야 다른 제후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심지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제후 자신의 이해에 따라 멋대로 봉신계약을 맺고 창을 거꾸로 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긴 일본 전국시대에도 이마가와나 다케다 같은 유력가문들조차 시세가 불리한 것 같으니 가신들이 모두 돌아서면서 어이없이 멸망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아무때고 왕이 필요하면 동원할 수 있었던 상비군이란 것이었다. 처음에는 용병이었고 근대 이후로는 국민개병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국가 입장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대상은 국민 말고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확산되기 시작하면 정부 입장에서 어떻게해야 하겠는가. 예기치 못하게 자연재해가 발생해서 환자가 속출하고 있는데 민간병원과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동원될 것만 기대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를테면 지난 2월 신천지 사태의 경우처럼 대구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하고 있는데 민간 의료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이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간병원의 보유한 병상을 활용하는 것도 그만큼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바로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인력과 시설이 보다 많이 확보되어 있다면 어떻겠는가. 지난 2월 대구와 경북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의 확산에 홍준표가 폐쇄한 진주의료원을 아쉬워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래도 정부가 바로 지시해서 움직일 수 있는 군의료진과 공보의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가. 군간호학교 졸업생들은 졸업식을 마치고 바로 대구로 향하고 있었다. 정부 입장에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필요할 때마다 민간의사와 병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하기보다 차라리 정부에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공공의료진과 시설을 더 확보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모든 의사가 대구로 내려갔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의사가 코로나19의 방역에 협력했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의사협회가 어떤 식으로 코로나19를 수단삼아 정부를 공격하며 정치질을 하고 있었는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집단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매우 정치적이고 의료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집단이란 것이다. 코로나19로 하루가 시급한데 그런 의사들을 상대로 언제까지 협력을 구하며 그들의 동의를 끌어내려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어야 하는가. 민간의사와 시설의 도움 없이도 정부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인력과 자원을 미리 확보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의대 정원을 늘리고 공공의대를 설립하겠다 정부가 방침을 정한 것이었다. 정부의 의지대로 일정 기간 동안 근무지까지 강제할 수 있는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일 의료인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조치인 것이다. 근대국가로서 너무 당연하다. 민간 의사들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하려 한다면 그들과 별개로 정부가 임의로 움직일 수 있는 공공의료의 확충은 필수인 것이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지금 의사들이 파업하는 자체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 파업해야 정부가 의사인 자신들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코로나19로 국민들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지금이어야 정부에서 마음대로 의사인 자신들을 무시하고 정책을 밀어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방침대로 공공의료의 인력과 시설이 지금보다 확충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정부의 입장과 의사들의 입장을.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정부와 그를 수단삼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이기적인 개인의 집합인 의사라는 존재에 대해서. 근대국가와 전근대국가의 차이인 것이다. 중앙집권이란 단순히 중앙권력의 강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중앙이 통제할 수 있는 체제 안에서의 모든 구성과 구조를 가리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봉건영주처럼 의사로서의 특권을 지키고 싶은 의사들의 욕심이 문제란 것이다. 코로나19로 위기이니 자신들에게 기회다. 딱 그대로. 전혀 다르지 않다.

의사가 천룡인은 천룡인이네. 그래서 조국 전장관의 아들이 아닌 딸이 타겟이었던 모양이다. 어딜 감히 의전원을. 아마 아들 조원씨도 조민씨처럼 로스쿨에 합격했다면 입장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로스쿨도 못 간 아들과 의전원에 진학해서 의사를 앞두고 있는 딸 가운데 후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먹혀서 제대로 난리가 났던 것이었고.

 

지금 정부가 의대생부터 전문의까지 의사들의 집단파업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른 노동자들의 집단파업에 대한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철도노조가 파업하던 당시를 떠올려 보라. 서울 지하철노조가 파업했을 때 당시 정부는 어떤 대응을 내놓고 있었는가. 운수노조가 파업했을 때도 당시 정부들은 언론과 함께 국가경제와 시민의 편의를 들먹이며 파업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정당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법으로 엄단하겠다. 시민의 안전과 국가경제를 볼모로 한 불법적인 파업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가 없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런 정부의 대응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당장 언론부터 시민의 편의와 안전, 그리고 국가경제를 들먹이며 파업을 압박하고 있었다. 시민들 역시 파업의 정당성보다 당장의 불편함과 불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파업하는 주체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파업들을 나라를 망치는 악으로 몰아세우던 놈들이 이제 와서 의사들의 파업은 정당하며 정부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장한다. 도대체 뭐가 그리 정당한데? 공공병원 짓고 의료인력을 늘리겠다는 정부의 정책 어디에 그렇게까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공공병원과 공공의료인력을 확충하는 한 편 지방에도 의사가 의무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정책을 세우겠다는데 그렇게 의사들이 나서서 파업까지 할 일이던가.

 

의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라서 저리 당당한 것이고, 의사이기에 저리 관대해지는 것이다. 의사가 아닌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이었다면? 혹은 서울대학교 시설관리원이나 미화원이 파업하고 있어도 저리 관대했을까? 파업따위 하니까 정규직이든 무기계약직이든 다 쓸데없다고 욕하던 놈들이 바로 그놈들이었었다.

 

그래서 지금 의사들의, 의대생을 포함한 예비의사들의 파업이 그렇게까지 모두가 파업에 동참해야 할 정도로 절박하고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조민씨가 타겟이었던 것은 의전원 때문이라니까. 어딜 감히 불가촉천민이 의전원같은 천룡인의 과정을 밟는가. 정의당이 뒤늦게 지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냥 벌레들이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전환 논란에서도 말한 적 있었지만 한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징벌사회라 할 수 있다. 실력없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벌받는 것이 당연하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조차 누리지 못하고 가난과 좌절과 절망 속에 신음하며 사는 것은 어쩌면 매우 정의로운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노력하고 실력을 갖추려 할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면 그 반대편에 뭐가 있어야 하는가.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 보상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직원들이 계약직 직원들의 정규직화를 앞장서서 반대한 이유도 이것이다. 내가 그렇게 노력해서 정규직씩이나 되었는데. 내가 얼마나 노력해서 공기업 정규직이란 타이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정규직으로 전환되더라도 하는 일 자체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 같은 건 그들에게는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단지 자기들처럼 노력도 안했고 실력도 없는 무지렁이들이 자신들과 같은 정규직이라 불리게 될 것이란 자체에 분노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노력 않고 실력도 없으니 벌받는 게 당연하고 자기들은 노력도 했고 실력도 있으니 상을 받는 게 당연하다. 보안검색요원들이 정규직된다고 자기들처럼 급여도 오르고 사무직으로도 전환될 것이라며 되도 않는 주장을 하고 스스로도 강하게 믿는 자체가 그같은 자신의 노력이 부정될 지 모른다는 절박한 두려움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의사는 어떨까? 이과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이들이 선택받아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의대였다는 것이다. 이과 나와서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도 존경과 신망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의사인 때문이었다. 의대를 나와 의사만 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가난한 집 출신들은 신분도 바뀔 수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 다 참고 고등학교까지 공부만 했으며, 의대에 가서도 그 어렵고 힘든 과정들을 버티며 수련의도 거치고 전공의도 거치며 지금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의대를, 자기는 그렇게 어렵게 딴 의사자격증을 이제는 정원도 수 천 명이나 늘려 마구 퍼주겠다 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 벌어야 할 돈은? 내가 누려야 할 명성과 지위는? 본전생각 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의사라는 아주 특별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정부도 자기들을 특별하게 예우해야 한다.

 

의사들이 민주당을 싫어하는 이유일 것이다. 민주정부는 기본적으로 의사를 이 사회를 이루는 여러 구조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의료라고 하는 이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구성원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 반면 보수정당에서는 의사들을 검사들처럼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자기들 자식부터 의사를 시키고 싶어 안달하는 이들이니. 자식들 배우자로 의사가 좋지 않을까 고민하는 이들일 것이니. 어째서 조국 전장관의 딸 조민씨가 부산의전원에 입학한 사실로 온 나라가 들썩였는가. 조민 씨가 어떤 생각으로 의사가 되고자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의사를 그리 우습게 여기던 민주진영의 자식이 의사라는 특별한 신분을 가지려 했다는 자체에 대한 반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기자들이 그랬다지? 어떻게 조국이 그럴 수 있느냐고. 아들이 아닌 딸이 타겟이 된 이유도 그래서라 보는 것이 옳다. 그냥 사회적으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인가, 아니면 특권을 가진 신분이고 지위인가?

 

의사들이 파업하겠다 나서는 이유인 것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의사가 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노력한 보상을 받아야겠다. 자신들이 의사가 되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만 하겠다. 그것은 자신들이 다른 신분들과 다른 존재라는 증거이기도 할 터다. 딱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전환 논란 당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던 부류들이 딱 이 논쟁에도 비슷한 논리로 같은 입장에 선다. 의사는 보상을 받아야 하고, 공항 보안검색요원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므로 의사들 수가를 올려주기 위해서라도 건강보험의 보장을 줄이지 않으면 안된다. 건강보험의 건전성을 위해 보장은 줄이고 나머지는 민간보험에 맡기라. 이 뭔 개소리인가? 건강보험료 더 나가는 것은 싫고, 그러니까 자기 실력껏 민간보험에 의지해 살아갈 테니 국민보편의 의료복지인 건강보험은 의사들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라. 설사 자기가 그 피해자가 되더라도 그것이 정의라면 받아들이겠다.

 

그래서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전환을 끄집어내 가지고 온 것이다. 같은 맥락이다. 누군가는 벌을 받아야 하고 누군가는 상을 받아야 한다. 벌을 받을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고 상을 받을 사람은 상을 받아야 한다. 그 대상이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인 것이고 의사인 것이다. 박형순이라는 판사도 아시아나 해고노동자의 집회는 코로나를 이유로 불허하면서 민경욱의 집회는 허락했었다지? 같은 맥락이다. 어렵게 공부해서 판사씩이나 되었는데 해고노동자들과 같이 놀아서는 정의가 아닌 것이다. 해고노동자들에게는 벌을, 정치인과 같이 성공한 이들에게는 상을. 

 

온 나라가 코로나19의 급속한 재확산으로 난리인 상황에서 의사들만 한가하다. 의대생들, 수련의들, 전공의들만 한가하게 자기 밥그릇 챙기는 중이다. 자기들은 특별한 존재니까. 그렇게 특별한 존재로 인정해주는 이들을 찾아서 그들 스스로 광화문까지 찾아갔던 것이고, 광화문에서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부모들부터 그렇게 가르쳐 왔으니. 저들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저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당연한 상식이며 정의다. 어디까지 썩어 있는 것인가.

그리 오랜 일도 아니다. 불과 90년대까지 때만 되면 만화책들 모아서 불태우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뉴스를 통해 보도되고 있었다. 만화는 저급하고 해로운 것이니 아이들이 읽게 해서는 안된다. 누가 그랬을까? 아마 만화 좋아하는 사람이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YWCA다. 

 

YWCA는 약자에서도 알 수 있듯 개신교 기반의 여성단체였었다. 한국 YWCA 창설을 주도한 면면을 보면 그 성격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김활란과 최활란, 박마리아 등은 한국 여성운동의 효시라 할 만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김활란이나 박마리아 등의 자유당정권 이후의 행보에서도 볼 수 있듯 상당히 보수적인 여성인사들이 그 중심이 되고 있었다. 친일과 친독재는 그들의 본성과 같았다. 그런 이들의 후예가 과연 얼마나 진보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YWCA의 만화 모니터링은 그 취지와 상관없이 그래서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만화에 대한 검열과 함께하고 있었다. 별 거지발싸개같은 되도 않는 이유들을 스스로 만들어 갖다대며 우수만화와 저질불량만화의 경계를 결정지었었다. 김수정 작가의 '아기공룡 둘리'도 그래서 고길동을 만년과장이라고 놀린 부분을 두고서 과장을 비하했다며 불량만화로 판정한 바 있었다. 리니지가 아마 동성애 미화로 엮였던가 그랬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아무 이유라도 갖다 붙여서 저질불량만화로 만들고는 5월이면 모여서 화형식을 거행했었다. 오죽했으면 우수만화라고 상을 준다는데 이진주나 이희재나 도저히 못받겠다 거절하려 했었는가. 이진주는 후환이 두려워서 받아서는 내던져 버렸고, 이희재는 진짜 거절했었다. 바로 이 YWCA가 한국 여성주의의 온상과 같은 곳이었다.

 

이해가 되는가? 같은 만화가가 여성주의를 이유로 다른 만화가의 창작 자체를 금지하려 하고 있다. 그 엄혹하던 시절 선배 만화가들이 필사적으로 싸워서 쟁취한 자유를 그들 스스로 여성주의를 이유로 내다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달동네를 말 그대로 달동네처럼 그렸다는 이유로 작품을 난도질당해야 했던 작가가 있었다. 도둑놈을 쫓더라도 어른인 도둑에게 아이가 반말을 써서는 안되고, 부모자식이든 형제자매든 성별이 다른 가족이 같은 방에서 자서도 안된다. 아, 이건 그제 국세청장 청문회에서 나온 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부모님과 여동생 둘과 단칸방에서 같이 먹고 자고 했었거든? 가난하다는데 집도 넓고, 방도 여럿이고, 담도 다 쓰러져가는 블록담이 아니라 미국스런 나무담이다. 여기가 어디냐? 그래서 게기면 아예 출판 자체가 안되었다. 그런 시절을 거치며 청소년보호법의 억압을 넘어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여성주의를 이유로 작가의 창작 자체를 금지하겠다?

 

원수연이 나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원수연도 엄연히 그 뒷세대라 할 수 있다. 아마 빨라야 80년대 말 데뷔일 것이다. 자신도 겪은 것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바로 윗세대 선배들이 겪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전해들었을 것이다. 97년 청소년보호법 제정을 직접 맞서 싸워야 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후배란 것들이 어느새 여성주의라는 완장을 차고서 같은 작가의 창작을 금지하겠다 설치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니.

 

원래 뿌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피가 그렇다. 김활란과 최활란, 박마리아, 그리고 YWCA라는 한국 여성주의의 유전자라는 것이 그렇다. 권력에 기대어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야 했던 그 비루함이 그들의 본질이란 것이다. 다르지 않다. 같은 여성이고 약자인 계약직 방송인인데 자기들과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밥줄까지 영영 끊으려 하는 그 잔혹함이야 말로 그들의 본성인 것이다.

 

진짜 옛날생각 나려 한다. 요즘은 여성주의지 당시는 반공주의였었다. 달동네를 달동네처럼 그리지 못했던 이유도 북한이 보고 좋아 할까봐. 북한이 보고서 체제선전에 이용할까봐. 그래서 아무리 가난한 집도 남매의 방은 따로 있어야 했다. 집도 제법 번듯해야만 했었다. 그 뿌리가 어디 가겠는가.

 

그래서 새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한겨레와 경향이 조선과 손잡고 정의연을 친 이유가 김재련 같은 박근혜에 부역했던 여성주의자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박근혜에게 마지막까지 충성했던 집단이 바로 이들 여성주의자들이었고 보면. 피가 어디 가지 않는다. 벌레같은 것들. 시대가 달라졌어도 그들은 여전하기만 하다.

사실 PC방보다 음식점이나 카페가 전염병 감염에 더 취약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대부분 혼자 PC방을 찾는 경우 옆자리에서 뭘 하는지조차 관심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친구끼리 PC방을 찾았어도 굳이 의자를 돌리거나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얼굴 마주보고 침 튀길 일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더구나 마스크까지 계속 쓰고 있으면 헤드셋에조차 바이러스가 튀거나 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뭔가 먹는 동안에는 마스크를 벗어야 하고, 특히 카페 같은 경우는 그냥 커피만 먹으려 들르는 곳이 아니라 대화하는 도중 서로 침이 튈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PC방은 규제하고 음식점과 카페는 내버려두는 것인가.

 

간단하다. 밖에서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밥을 사먹어야 할 때가 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 좋기는 한데 아무래도 어려우면 가까운 음식점에서 한 끼 해결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카페 또한 식사 후 한 잔의 커피는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요긴한 수단이기도 하다. 몸이 피곤해서도 카페인은 필요하고 마음이 헛헛해서도 카페인은 공급해 주어야 한다. 한 마디로 필수시설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에 비해 PC방은 굳이 안 간다고 일상에 크게 불편하거나 할 일은 없지 않은가. 게임 좀 못한다고 크게 곤란한 사람이 있기는 하던가? 이밖에 영업을 금지한 시설들을 보면 일상을 위해 필수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른바 위락시설들이다.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음식점이나 카페가 전처럼 아무 제약없이 영업할 수 있는가면 또 아니라 할 것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아예 영업을 금지하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란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혹시라도 음식점과 카페마저 영업을 금지할 정도라면 그때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이 코로나로 인해 끝장난 상황이라 봐야 할 것이다. 최소한의 사회활동조차 할 수 없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음식점도 카페도 모두 영업을 중단시켜야 한다. 아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여기기에 필요시설은 최대한 남겨두고 불필요한 시설부터 순차적으로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를 욕해야 한다? 잘 풀리는 것 같던 상황을 꼬아 버린 놈들을 욕하면 되는 것이다. 민경욱, 김진태, 김경재, 차명진, 김문수, 전광훈, 그리고 기타등등등등...

 

정부로서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하위에 있는 업소부터 차례로 규제하며 시민들의 대인접촉을 최소화함으로써 감염의 위험을 차단한다. 욕먹어도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불만을 쏟아내도 정부로서는 더 많은 시민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PC방 업주들로부터 욕먹고 노래방 사장들로부터 비난을 듣더라도 감염의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욕해야 할 대상이 틀렸단 뜻이다. 진짜 욕해야 할 놈들은 따로 있는데. 하긴 이러라고 언론은 열심히 물타기중일 것이다. 이미 감염은 확산되고 있었는데 광화문에만 탓을 돌린다. 수 만의 사람이 자가격리자와 밀집한 채 함께 어울리고 있었다. 기자같은 상황이란 것이다. 더럽고 더럽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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