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과 부시가 맞붙었던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은 이 한 마디를 앞세워 승리한 바 있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 문제가 무엇보다 뼈아팠던 것은 그로 인해 무능이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무능해서 부동산가격이 폭등했다. 가만 내버려두면 되는 것을 괜히 들쑤셔서 가격만 천정부지로 올리고 말았다. 그런 주제에 세금까지 올려서 부담만 커졌다. 이제까지의 모든 성과를 덮어 버리는 최악의 프레임이었다. 여기에 더해 재난지원금과 관련해서도 선별지원으로 인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그 불만까지 무능이라는 프레임에 더해지고 있었다. 무능한 놈은 나쁘다.

 

당연한 것이다. 다수의 생사를 좌우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무능하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조차 아무것도 못하고 최소가 방치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나락으로 떨어지고 심지어 죽어가는 이를 위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권력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회사경영을 잘못해서 수많은 직원들이 실직자가 되고 그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고 개인이 목숨을 잃는 상황까지 벌어진다면 그 모든 책임까지 경영자에게 지워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근대시대의 군주들을 평가하는 말 가운데 암군이며 혼군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이다. 왕으로서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백성이 도탄을 겪는다면 그 자체로 그는 군주로서 최악인 악이란 것이다. 그것은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제대로 이끌라고 국정을 맡겨 놨는데 제대로 하지 못해 오히려 혼란만 키운다면 그는 당연히 심판받아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을 두고 최악의 암군이며 혼군이라 평가하는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거나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정권을 내주고 가까운 이들마저 고통받게 만들었다. 개인의 선이 반드시 집단의 선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도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닌 전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부패나 부정보다 더 혐오하고 경멸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의 무능인 것이다. 바이든이 반드시 인격적으로 트럼프만 못해서 인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격적으로는 트럼프보다 더 훌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통령으로서 재임기간 동안 유의미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이익이 될만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제 다시 트럼프가 차기대통령으로 유력시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다. 트럼프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든 그래도 최소한 바이든보다는 낫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인격적으로 트럼프보다 오바마가 더 훌륭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있어서는 트럼프가 오바마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반드시 언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윤석열 하나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실망한 국민들이 더 많았을 테고, 이후 중요한 고비마다 행정부의 장들에게 휘둘리며 제대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코로나 시국에 보여준 능력 덕분에 퇴임까지 40%대의 지지율은 지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당적도 버린 송영길을 구속한다고 정권심판의 여론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건.

 

검찰이 이제와서 송영길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법원이 받아들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날이 떨어지기만 하는 지지율을 돌려보고 싶은 것이다. 아니 지지율은 내버려두더라도 정권심판의 여론이라도 어떻게 누그러뜨려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에 범죄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부정과 비리라는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 수박 새끼들이 개새끼들이라는 이유다. 이탄희는 결국 민주당 동지가 아니었다. 민주당에 강제로 씌우려는 저들의 프레임을 오히려 환영하고 부추기는 새끼들을 과연 동지라 부를 수 있는가. 최소한 방관하며 남의 일처럼 대하는 놈들은 그저 남이고 적일 뿐이다. 아무튼 문제는 그런다고 얼마나 여론이 돌아서겠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검찰이 아예 수사조차 않고 면죄부를 주었던 여러 의혹들을 국민들이 모르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국가경제가 나락으로 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정부의 무능과 방기다. 젬버리부터 드러난 무능과 무책임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집단에 정권을 맡기긴 어렵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당연할 것이다. 새삼 2찍 진보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실감을 하게 되는 이유다. 물론 지금도 야근중이라는 넥슨과 같은 IT노동자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윤석열에게 주 120시간도 할 수 있도록 해달라 건의한 것이 판교 IT종사자들이었었지? 주 69시간 노동에, 주휴수당을 폐지하고, 최저임금도 낮추고, 정규직해고도 자유롭게 하고, 산업재해에도 책임을 묻지 않고, 2찍 진보들 입장에서야 진정한 노동존중의 정책들이겠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아니다. 가장이라면 집에 들어가서 열심히 설득해야 할 것이다. 총선의 결과에 따라 당장 내 월급이 최소 30만원 이상 줄어들지 모른다. 정규직인데 어느날 갑자기 잘리게 될 지 모른다. 무엇보다 심각한 부분이다. 그래도 좋다는 2030 남성들이야 그러라고 그러고 당장 살아야 하는 나는 그것을 어떻게든 반드시 막아야 한다. 2찍 진보들이야 민주당만 어떻게 할 수 있으면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 테지만. 민주노총 이렇게 조용한 것 살다가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무튼.

 

정책방향도 나 자신의 삶과 정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실제 하는 것도 보면 해야 할 것도 못하는 무능과 무책임과 무기력으로 일관하고 있다. 언론이 그나마 최대한 화장을 해 줘서 이 정도라는 것이다. 언론이 제대로 보도만 했어도 박근혜 말년의 지지율이 우스웠을 것이다. 그런데 송영길 하나 구속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아니 이재명이 징역을 살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재명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민주당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이재명이나 민주당이 더 나아서가 아니라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너무나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화장하는 사이사이 흘러나오는 이슈들만으로도 차곡차곡 국민들의 무의식에까지 쌓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란 걸 해 보지 못했으니 여전히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헛짓만 한다. 이탄희가 왜 저러는가 새삼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이탄희도 원래는 저런 부류였었던 것이다.

 

장제원이며 김기현이 괜히 말없이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다. 결국에 기회는 돌아온다. 지금처럼 돌아간다면 결국 자신들에게도 또 한 번 기회가 돌아온다.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지금 괜히 목숨걸고 덤비기보다 그냥 물러나서 돌아가는대로 지켜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는 것이다. 대충 견적이 나왔으니 국민의힘도 선택을 하게 된다. 정치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다. 그런 기자놈들의 말을 믿고 정치를 했던 이낙연이 그래서 병신이라는 것이고. 이탄희가 병신인 이유인 것이다. 언론을 믿고 정치하는 개새끼는 그냥 버러지새끼밖에 안된다.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가장 못한 부분이었다. 여전히 화장만 잘하면 살 수 있다 믿는 그 머저리 새끼들에 여전히 휘둘리려 한다. 진짜 병신새끼들이다.

그동안 검찰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약자로 피해자로 위장하는 기술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정권이 부당한 지시를 하면 대부분은 따르면서도 한두 명 씩 항거하며 옷을 벗는 모습도 보였었고, 그러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살아있는 권력과도 정면으로 맞서며 검찰이 원래 그런 조직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했었다. 물론 전자의 경우는 차라리 옷벗고 나가서 전관예우 든든하게 받으며 돈버는 쪽이 낫기도 해서 그런 것이고, 후자의 경우도 그래도 후환이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을 때만 그러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그런 노력들로 인해 검찰은 권력의 강압에 의해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일 뿐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정의로울 수 있는 집단이라는 기대를 국민들의 무의식에 심어 주었었다. 노무현과 문재인 정부 당시 정권이 검찰을 풀어주면서 정권에 칼끝을 돌렸을 때 오히려 다수 국민들이 검찰의 편을 들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었다.

 

더구나 검찰에게는 중요한 아군이 있었다. 하나는 검찰이 주는 소스를 가지고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었고 다른 하나가 검찰 대부분의 출신학교인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학벌이었다. 검찰이 중요한 고비마다 저런 연기를 시작하면 기자들이 받아서 부풀리고 다시 서울대 출신 지식인들이 이어서 확산시켰었다. 한 마디로 이 사회의 주류네트워크가 모두 검찰의 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검찰보다 배후의 권력을 더 강하게 비판하고 견제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또 다른 이 사회의 감시자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 살아있는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고 비판하는 이들이 고비 때마다 검찰의 편에서 그들을 대변하고 있으니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오죽하면 검찰을 행정부로부터도 입법부로부터도 어떤 감시도 견제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래야지만 오롯이 검찰이 법과 정의를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런 주장을 하는 놈들 가운데는 권력의 분산과 엄정한 감시를 주장하는 2찍 진보들까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검찰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을 때도 얼마든지 검찰은 여론의 방향을 돌려 이전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검찰의 연기와 주류 네트워크와의 연대가 가장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 바로 지난 정부에서의 조국사태에 이은 검찰의 난장이었을 것이다. 검찰이 하니까 옳다. 검찰총장이 주장하고 지시했으니까 사실일 것이며 정의로울 것이다. 그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으면 하극상도 심심찮게 벌어졌었다. 기자가 검찰로부터 받아쓰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당연하게 기사는 기자가 검찰로부터 받아서 쓰는 것이다. 검찰이 잘못되었다면 네가 입증해야지 우리가 취재해서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검찰의 의심을 받았으면 그 자체로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자신이 알아서 입증하고 풀려나야 한다. 심지어 그런 주장을 하는 놈들 가운데는 평소 시민의 권리를 그토록 강조하던 놈들까지 상당했다는 것이다. 손석희와 김규항, 홍세화, 진중권, 혹은 정의당과 녹색당 나부랭이들 가운데 과연 당시 검찰로부터 부당하게 수사를 받던 이들을 위해 시민의 권리를 주장한 놈들이 누가 있었는가. 검찰이 그리 주장했으니 김학의도 무고하고 탈원전도 잘못이라는 것이 그놈들 입장이었었다. 그렇게 언론과 주류 지식인들의 결탁에 의해 검찰은 정의가 되었고 상식이 되었고 공정 그 자체가 되었었다. 검찰의 정의를 위해서라도 검찰정권을 출범시켜야 한다. 그래서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윤석열은 언론과 주류 지식인사회가 합심해 만든 대통령이고 그들은 처음부터 검찰이란 기득권과 유착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동안은 검찰의 위에 있던 다른 권력들에 그 존재가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검찰 자신이 저들의 유착에 의해 실제 권력이 되었다.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이제 더이상 책임을 떠밀 존재가 사라진 채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아 버린 것이다. 과연 검찰에게 무한한 자유와 재량을 허락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소신대로 검찰로서 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것인가? 그동안 언론과 주류 지식인들은 그것이야 말로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 것일 것이라 주장해 왔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가? 그리고 더불어 그럼에도 철저히 침묵하며 진실을 가리는데 앞장서는 언론과 주류지식인사회의 모습에서 그들의 유착의 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처음부터 이놈들은 한 몸이었다. 비로소 사람들도 깨닫게 된 것이다. 실제 검찰의 모습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를 가리는 저들의 유착에 대해서까지. 이래서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

 

언론과 주류지식인들에 의해 강제로 돌려졌던 검찰개혁에 대한 요구가 어느때보다 커져가는 이유일 것이다. 심지어 윤석열과 한 편이어야 할 보수정당 지지자 가운데서도 검찰을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불과 작년까지 반대입장이었던 검수완박에 대해서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정권은 지켜야겠기에 대통령 윤석열은 지지하지만 다음 정권을 가져오기 위해서라도, 아니 최소한 자신들이 믿는 상식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검찰은 어떻게든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언론과 주류지식인사회 역시 이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이낙연에게 더이상 희망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도층들도 알아 버렸다. 실제 그동안 그 중요한 과업을 방치해 온 주체가 누구였었는지. 민주당은 어째서 권력을 잡았을 때 더 적극적으로 그러한 정책과 법안들을 밀어붙이지 않았는가? 지금 나와서 이재명 욕하는 저 새끼들이 막았었다. 이낙연 책임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진짜 평소 입바른 소리 잘하던 언론인들 가운데도 아예 자리를 내던진 소수를 제외하면 지금도 여전히 이낙연이나 이탄희 불러서 이재명 욕해달라는 놈들이 거의 태반이란 것이다. 윤석열 정권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감고 외면하면서 이재명을 불러들여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 놈들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 적극적으로 부합하려는 것이 수박들의 본모습인 것이고. 이탄희는 그냥 조경태 시즌2다. 어차피 국회의원 그만두더라도 전직 판사 출신에 전직 국회의원 출신 변호사니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어떠한 견제도 감시도 없이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니 벌이에는 그쪽이 더 낫다. 오해들 하는데 판사라는 자리는 돈벌이보다는 명예다. 더 큰 돈벌이를 위해 더 높은 자리에서 퇴직하려는 것이지 벌이만 따진다면 그냥 변호사 개업하는 게 더 낫다. 판사자리 박차고 나오는 게 반드시 희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탄희라는 인간의 실체에 대해 새삼 확인하게 되는 계기다.

 

아무튼 그렇지 않아도 윤석열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거의 콘크리트에 붙어 있는데 다시 총선을 앞두고 그 얼굴 중 하나인 한동훈을 비대위원장으로 내세웠다는 소리를 듣고 그저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나마 이명박은 박근혜라는 자신의 대항마를 중요한 고비마다 앞세워 책임을 분산시켰었다. 이명박이 잘못했어도 박근혜라는 그를 견제할 대안이 있다. 오죽하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지지율이 낮은 대통령의 분신이라 할 인사를 비대위원장으로 내세워 총선을 치르겠다? 하지만 이미 보았듯이 검찰 출신이 아닌 다른 인사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이다. 윤석열 자신 만이 아닌 그동안 검찰과 유착해 온 다른 주류네트워크의 구성원들에게도 검찰출신, 그것도 윤석열의 측근이 아니고서는 너무나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해 온 대로 한동훈을 어떻게든 띄워 올리며 그의 이름으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 이제 남은 희망이라고는 이낙연 뿐인 것일까? 이낙연이 신당창당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저들의 요구가 그렇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임계에 이르고 말았다. 더이상 도망칠 곳이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군사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검찰이 가진 수사권과 기소권을 이용해서 강제로 정권을 연장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언론과 주류 지식인사회가 검찰의 편이니 여론을 만들기도 당시보다 상대적으로 수월하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까지? 검찰이 합법적인 수단을 포기하는 순간 그들은 실질적인 무력을 보유한 군사정권보다 무력한 집단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검찰권력이 무너지는 순간 언론 또한 개혁의 대상으로서 그 칼날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각종 단체들이나 개인들은 이미 검증의 대상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그들의 제도권 진입에 대한 견제이기도 하다. 이 사회가 재구성된다. 비로소 개혁이 이루어진다. 마지막 단추였던 모양이다. 검찰이 개혁되면 남은 것은 사법부다. 이탄희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이놈들도 만만치 않다. 그러고보니 박범계도 판사 출신이었던가? 참 갈 길이 멀다. 아직도.

문재인 정권 초기만 하더라도 민주당 지지자 다수의 여론은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국민 스스로가 다양한 성향과 지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를 대변할 수 있는 다양한 세력들이 제도권 안에서 서로 경쟁하는 것이 국가 전체를 위해서도 나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국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제도권 정치가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은 정치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할 수 있으면 좋다. 다만 지금 해도 좋은가면 안좋은 사례를 이미 보아 버린 터라 많이 회의적이다.

 

당연하게 그 안좋은 사례란 정의당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금도 이따위인데 괜히 진보정당을 배려한다고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았거나 혹은 정의당이 민주당과 연합해서 위성정당을 만들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정의당이 총선에서 20석을 가져갔다면 국회에서 국민의힘 지분이 20석 더 늘어나는 것이다. 진보정당에 파이를 나눴더니 오히려 수구진영의 파이가 커지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거의 모든 이슈에서 수구정당과 연합하는 진보정당을 보면서 과연 저들을 위해 민주당의 의석을 나눠야 하는가 회의가 드는 것이다. 저들에게 표를 주는 것이 과연 이 사회의 진보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 것인가? 당장 저들의 입장에서 진정한 노동존중과 여성존중의 정당이란 국민의힘일 것인데.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혜택을 보게 될 비제도권 정치집단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인 것이다. 대부분은 다른 일 안해도 되는 그래도 이 사회에서 엘리트라 불리는 이들일 것이다. 나처럼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알량한 월세조차 내지 못하는 처지의 평범한 서민들이 아니라 입바른 소리만 해도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그런 신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들의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부모를 잘만났거나, 자기가 노력해서 좋은 대학을 나왔거나, 혹은 남들이 알아주는 대단한 직업을 가졌거나, 그런 자부심 위에 그래도 사회를 위해 기여하겠다고 입바른 소리도 하고 실제 행동으로도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런 선의에 의한 선행조차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그들만의 엘리트 의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가 지난 정부에서 보여줬던 자칭 진보, 시민사회단체들의 검찰에 대한 맹종이었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검찰이 수사하면 나쁘다. 검찰이 혐의를 가지면 이미 죄인이다. 검찰이 무고하다 하면 무고한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김학의를 출국금지시켰다고 문재인에게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고 당사자인 검사는 승진도 막아야 한다던 것이 바로 여성주의를 앞세우던 2찍들의 태도였었다. 검찰이 무고하다 했으니 무고한 시민의 권리를 제한한 것은 범죄다. 심지어 검찰이 수사하지 않았어도 조선일보가 그렇게 보도했으니 문제라는 인간들마저 있었다. 그래서 지난 정부에서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대부분 단체나 개인들은 정부의 반대편에서 수구세력과 손을 잡고 있었다. 수구언론과 연대하고 검찰에 협력하며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리는데 힘을 모으고 있었다. 실제 드러난 현실이 그런데 그런 놈들의 제도권 진출을 돕는다는 것이 민주당과 지지자 입장에서 무슨 큰 의미가 있을 것인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다양한 정치세력이 제도권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을 통해 반윤연대를 만들자. 명분은 좋다. 그런데 누구와 반윤연대를 만들 것인가? 이준석은 아예 처음부터 반윤연대 같은 건 않겠다 선을 그었다. 정의당은 대선 전부터 국민의힘과 연대하며 같은 노선을 걸었었다. 김학의 출국금지시켰다고 국정감사에서 따지고 이성윤 고검장의 승진조차 막아섰던 것이 바로 정의당이었다. 김건희와 관련한 의혹을 제기했다고 대변인을 앞세워 오히려 민주당을 공격했던 정의당과 반윤연대를 한다? 검찰이 읊으면 읊는대로 민주정부를 욕하던 자칭 시민단체들은 어떤가? 검찰이 주장하니 송영길도 이재명도 이미 유죄라는 그놈들과 과연 연대가 가능할까? 검찰이 주장하면 당장 민주당사에 쳐들어가 불이라도 싸지를 그놈들을? 도대체 누구와 반윤연대를 만든다는 것인가? 진정 윤석열 정권에 문제가 있고 그래서 그에 맞서기 위해 의회권력이라도 지켜야 한다면 민주당으로 힘을 모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실재하는 가능성은 무시한 채 불확실한 희망에 모든 걸 걸려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이고 반윤연대일 것인가?

 

이미 물은 흘러갔고 배는 지나왔는데 배에 새겨놓은 표식을 보고 잃어버린 칼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일컬어 각주구검이라 한다. 이미 시대는 흘러갔고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예전 시대의 상식과 정의를 고수하려는 어리석음을 비유한 고사다. 이미 주는 몰락했고 열국이 쟁패하며 새로운 가치가 대두되고 있는데 이전 시대의 가치만을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란 뜻이다. 정의당이 국민의힘과 야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의미를 가졌다. 정의당과 자칭 진보들이 수구언론과 검찰을 맹종하는 꼬라지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제도권으로 들어오면 이 사회를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한 동력이 되어 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드러난 현실은 조선일보를 보고 아예 지령을 받듯 기사쓰는 자칭 진보 언론들과 검찰이 주장하면 그것을 근거로 삼아 공격하는 2찍 진보 인사들과 아무 근거 없이도 민주당이면 공격할 수 있는 단체와 개인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민주당을 공격하는 것은 살아있는 권력을 감시, 비판하는 것이고 국민의힘과 연대하는 것은 따라서 너무나 정당하다. 그래서 민주당과 민주당 정부를 공격하는 한 검찰에 대한 어떤 개혁시도도 불의하고 부당하다. 그래서 그런 놈들이 제도권으로 들어오면 얼마나 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묻고 싶은 것이다. 아직도 그런 확신을 가지는 근거가 무엇인가.

 

지난 정부에서 지겹도록 보았고 정권이 바뀐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자칭 진보, 그러니까 2찍 진보들이 정권이 바뀌고 나서 살아있는 권력인 지금 정부와 그를 견제하고 있는 민주당 가운데 어느 쪽을 더 많이 욕했을까? 민주당 안에서도 윤석열 정부와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는 이들과 오히려 윤석열 정부에 협력적인 이들 가운데 누구를 더 많이 거세게 공격했을까? 모르면 병신이고 알면 공범이다. 이탄희를 좋게 보았었기에 이제는 오히려 환멸만 남았다. 자신이 여기저기 언론에 불려갈 수 있는 이유를 모르는 것인가? 알면서도 그 의도에 동의하고 있기에 그러는 것인가? 아무튼 그래서 지금 민주당의 현실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민주당을 보다 진보적인 쪽으로 이끌기보다 결국 그로 인해 이 사회의 수구성만 강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라기에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문재인 정부 당시만 하더라도 당장 최저임금 1만원으로 올리고 근로시간도 주 40시간으로 낮춰야 한다 떠들며 정부와 여당을 욕하던 2찍 진보들이 지금은 너무나 조용하다는 것이다. 정권퇴진하라고 앞장서서 시위하던 놈들조차 그런 일이 있었는가 아예 입다물고 쥐죽은 듯 조용히 있다. 성인지감수성이라는 이야기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저놈들이 저리 떠든 이유가 이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2찍 진보들이고 진보를 자처하던 집안좋고 학력좋은 놈들의 실체인 것이다. 그런 놈들이 제도권으로 들어와봐야 좋은 놈은 따로 있다. 그것을 원한다면 그놈은 그냥 적일 뿐이다. 지금 가장 진보적인 정치세력은 유일하게 민주당 뿐이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말했잖은가? 내가 괜히 한국 여성주의를 기생페미니즘이라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것이 기생의 마인드다. 정확히 상당한 권력과 지위와 재산을 가진 유력자를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의 사고방식이다. 여성의 인권이 열악한 사회에서도 오직 이들만은 어지간한 남성들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특권을 누리고 살았었다. 오죽하면 근세 유럽의 궁정에서 정식으로 결혼한 왕후보다 더 중요하게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국왕 개인의 애정에 기댄 정부들이었을 정도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래서 신분도 더 낮은 장녹수나 장희빈 같은 이름들이 가문도 훌륭하고 자신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정식 왕후들보다 더 친근하고 익숙하게 들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신분과 상관없이 유력자 남성의 마음만 사로잡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모두의 위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결과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높이는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여성주의자들과 한 번이라도 말을 섞어 봤으면 나의 이 말에 대부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여성주의자들 대부분은 나같은 힘없는 노동자 남성이 굳이 자신들을 이해하려 하거나 편까지 들어주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감까지 가진다. 여성주의에 남성은 필요없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에는 진짜 그런 줄 알았었다. 실제 그런 여성들이 주위에 있었다. 너무 힘들어 얼굴까지 빨개진 상태에서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으로부터 일방적인 도움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고 팔은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자기도 같은 인간이니 자신의 힘으로 직접 모든 걸 해내겠다. 하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또한 전혀 달랐었다. 이를테면 박근혜가 그 예일 것이다. 단지 아버지의 이름을 등에 업었을 뿐인 박근혜에 대한 저들의 태도는 어떠했었는가? 아니 그 전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특별한 신분에 있거나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태도는 또한 어떠했었는가? 노동자 남성들의 도움은 거절하면서도 저들은 기꺼이 남성인 검찰 지도부를 움직여서 같은 여성인 검사들,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마저 압박하려 했었다. 어째서 노동자 남성과 기득권 남성에 대하는 태도에 저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인가? 권인숙이 자신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앞장서서 도왔던 박원순을 냉정히 저버린 이유다. 모두로부터 공격받는 박원순은 더이상 자신이 고마워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당장 여성할당제라는 것도 처음에는 워낙 여성에게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니 일정한 기회를 항상 열어두어 여성들로 하여금 도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지만 지금은 단지 이미 존재하는 기득권 남성들의 선의에 기대어 그만한 자격을 가진 여성들이 수월하게 기득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으로 바뀌었다. 여성할당제 아래에서도 남성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여성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 아닌 오로지 기득권 남성들의 선의에만 기대서 그같은 선의에 접근할 수 있는 소수를 위한 기회만 항상 열어두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경찰 체력시험과 관련한 논란이었을 것이다. 한 여성유튜버가 여성도 남성과 대등하게 체력시험을 치를 수 있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는데 감탄하며 도전의욕을 보이기보다 오히려 몰려가서 테러를 가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여성이기에 특혜를 받아야 한다. 여성이기에 혜택과 배려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야만 한다.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하기를 포기한다. 대신 남성이 양보하는, 정확히 기득권 남성들의 판단에 의해 주어지는 특혜만을 누리려 한다. 스스로 노력하기보다 남성의 선의에만 기대려는 그같은 여성주의를 과연 무엇이라 정의해야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이다. 기생들이 남들보다 잘나가는 이유는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뛰어나고 말재간이 훌륭한 것도 결국은 남성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서구적인 빼어난 외모도 남성의 취향이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옛스러운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얼굴보다 못할 수 있다. 누군가는 글래머를 좋아하겠지만 누군가는 슬랜더를 좋아할 수 있다. 중국의 전설적인 미인 가운데 하나인 양옥환은 꽤나 비만한 체형이었다고들 한다. 그래서 미인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달라지는 기준에 따라 많은 여성들은 기를 쓰고 맞춰가려 한다. 그러니까 기생이 누가 더 잘나고 더 훌륭한가 따지는 기준은 결국 자신을 선택한 남성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보여주는 방식도 자신을 선택한 남성의 사회적인 신분과 권력과 부에 있는 것이다. 그를 드러내는 수단이라는 것도 따라서 그를 한 눈에 보여줄 수 있는 실질적인 무언가일 것이다. 조선시대 의상이나 장신구 가운데 가장 사치스러운 것들이 대개 기생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그런 결과인 것이다. 오히려 신분이 고귀한 귀부인들보다 상류층을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들이 더 화려했고 더 사치스러웠다. 그것만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사치스럽지 않은 매춘부를 굳이 존중해줄 사람이란 현실에 거의 없다. 그러니 그 사치가 얼마나 진실한가가 더 중요하다.

 

고가의 명품을 개인적인 자리에서 선물로 받았다. 권력자에 대한 선물은 아무리 순수한 선의에 의한 것일지라도 결국은 뇌물이다. 가족이 아닌 이상 타인이 주는 모든 선물은 그 신분과 지위와 가진 바 권력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도와 상관없이 일단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는다면 그에 대한 감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고가의 선물을 개인적으로 받았다는 사실보다 그 선물이 진짜이냐에 더 관심을 가진다. 실제 그 선물이 그만한 가치를 가지느냐에 더 집중하며 비중을 둔다. 그만한 가치가 없다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다. 진실하게 그만한 가치를 가진 선물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더 큰 죄다. 아마 진심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게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일 테니까. 선물을 주려면 진실하게 진짜를 주어야지 다른 의도를 가지고 가짜를 준다는 것은 너무 무례하고 무엄하지 않은가. 그런 분이 심지어 여성주의자를 대표하는 위치에서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숙 여사와 관련해서는 오만 별 사소한 것까지 들추고 씹어대던 2찍 진보들이 상대적으로 크게 조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오히려 목소리는 보수를 지지하는 언론들과 인사들 사이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그에 비해 2찍 진보들은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여성을 위한다면 선물을 해도 진짜로 해야 하고, 의도 역시 진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오히려 그쪽을 더 비판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나마 지금껏 비판적인 기사도 간간히 쓸 수 있었던 것은 아직 가짜라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일 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조만간 입장이 달라지지 않을까. 대선 내내 온몸을 던져 지금 영부인을 수호했던 게 2찍 진보, 특히 여성주의자들이었으니. 김규항이나 홍세화 등이 현정부 비판하는 거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 안들리는 곳에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 귀에 들릴 정도가 아니면 아무말 않는 것이다. 모르는 곳에서 떠드는 놈을 지식인이나 논객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아무튼 그런 점에서 어째서 2찍 진보는 현정부에 대해 저토록 조용한가. 여성주의자들은 더욱.

 

류호정은 그런 점에서 참 투명하다 할 수 있다. 너무나 솔직하다. 자기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소속정당도 바꿀 수 있다. 자신의 정치적 주장마저 달리할 수 있다. 단지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보다 류호정을 지지하고 힘을 실어주던 것이 2찍 진보들이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설마 같은 정당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정당을 지지해서 기사를 쓰면서 그런 본성을 아주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자기에게 기회를 주는 사람을 위해 얼마든지 지금까지 주장하던 여성주의도 포기할 수 있다. 반대 입장에서 주장도 할 수 있다. 양성징병제는 정말 놀랍기만 하다. 그게 바로 한국 여성주의고 2찍 진보들의 실체인 것이다. 전부터 느껴왔지만 새삼 확실해진다. 그래서 기생페미니즘이다. 스스로 감탄하는 네이밍일 것이다. 너무 적확하다.

어쩐 일로 한겨레가 대통령과 영부인을 비판하는 기사를 낸다 했다. 이 새끼들이 약을 쳐먹었나? 아니면 뭐라도 달라는 뗑깡인가? 그런데 웬걸? 그보다 더 수위높게 정밀하게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서도 비판기사가 나오고 있는 중이다. 한 마디로 위기라는 것이다. 이대로는 다음 총선이 위험하다. 눈물겨운 충정 아닌가? 목숨을 걸고 압수수색당할 각오까지 해가며 총선패배를 막기 위해 저리 나서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조선일보가 조용하다.

 

기자협회장도 인정한 바 있다. 정부가 아무리 언론장악을 하고 탄압을 해도 조선일보가 나서지 않으면 다른 언론들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조선일보가 나서야지만 다른 언론들도 기사를 쓰든 투쟁을 하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조선일보가 나서면 그때부터는 진짜 정권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역시 조선일보 입장에서도 이대로는 바로 4개월 뒤로 다가온 총선이 불안하다. 그러니 아귀가 맞는다.

 

조선일보가 비판하는데 우리라고 빠질 수 없다. 조선일보가 기사를 쓰는데 우리도 따라써야만 한다. 그래서 결국 자기들이 다 취재해 놓고도 조선일보가 비판하더라는 결론을 내리던 곳이 한겨레다. 과연 한겨레가 조선일보의 허락 없이 현정부와 대통령, 영부인을 비판하는 기사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가? 더구나 지난 대선 내내 김건희를 수호하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던 것이 한겨레와 정의당을 비롯한 2찍 진보들이었다. 그런 2찍 진보가 김건희를 비판하고 있다면, 그것도 자기들이 온몸을 내던져 방어하던 그 부분들에 대해 비판하고 나서는 자기모순을 어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결국은 외부의 오더가 있었다 봐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까지 나서면 상황이 너무 커진다. 진짜 정권말적인 상황까지 올 수도 있다. 박근혜 탄핵이 그 결과였다. 그래서 조선일보 자신은 너무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말 잘듣는 꼬붕을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한겨레가 감히 대통령과 영부인을 비판하는 기사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조차 중앙일보나 동아일보보다도 수위가 조절된 내용으로. 그러면서 이낙연을 띄우는 것은 분명 의도가 있다 봐야 한다. 민주당을 망하게 해야 한다. 노랑봉투법 거부권에도 민주당에만 적대적인 민주노총처럼. 정의당을 지지한다는데 정의당이 어디의 2중대인가 보면 답이야 분명하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2찍 진보들은 여성정당을 지지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의힘을 위해 반민주당 선거운동을 했었다.

 

그만큼 저쪽도 위기감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민주당 지지층보다 더 절박할 수 있다. 2찍 진보들에게 진보적 가치란 곧 검찰이다. 검찰을 수호하고 검찰이 떠드는대로 읊조리는 것이 곧 진보적인 정의와 질서를 실현하는 것이다. 어지간해서 2찍 진보가 검찰을 공격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고보니 연동형비례대표제도 정의당이 공수처법 막는다고 질질 끌어 검찰개혁 전체를 좌초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었다. 그게 2찍 진보다. 한겨레다. 너무 투명하다.

그러고보니 2020년이었던가? 당시 임대차 3법을 발의하는 과정에서 전세제도를 비판하는 여러 발언들이 민주당 내부에서 들려오자 아주 오만 곳에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나마 서민이 어렵게 모은 목돈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수 있는 유리한 제도인데 그를 부정하려 하는가? 그렇게 목돈을 모아 어떻게든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이 서민이 가진 유일한 희망인데 비싼 월세 내가며 그런 기회마저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2찍 진보야 당연하고 보수며 자칭 중도층이며 그런 발언을 하고 법안을 입법한 민주당을 성토하느라 거의 대단합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그 발언의 취지에 동의하는 소수의 목소리가 있기는 했었다. 나도 아마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전세란 얼마나 불합리한 제도인가? 세상에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적인 선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나름대로 자기를 위한 계산을 하고 이익이 있을 때 그를 동기로 행동에 옮긴다. 전세란 그렇다면 반드시 세입자에게만 유리한 제도인가? 그러면 임대인들이 굳이 전세라는 세입자들을 위해서만 유리한 제도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임대인들에게 전세라는 제도가 가지는 이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세입자가 어렵게 모은 목돈이 한 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 목돈을 굴려 자산을 증식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오래전에는 은행이자가 꽤 높은 편이었기에 전세금을 받으면 그 이자만으로 어느 정도 월세를 벌충할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 아마 연이율이 13%인가 그랬었는데 전세가 2천이면 연 260만원의 이자를 기대할 수 있다. 월세로 치면 대략 22만원 조금 안되는 정도다. 더구나 목돈을 돌려받는 것은 세입자 뿐만 아니라 집주인도 마찬가지라 다음 세입자가 들어오면 전세금 만큼을 다시 그 자리에 채워 넣으면 손실도 전혀 없다. 나쁘지 않다.

 

은행 이율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는 집값이 오르고 있었다. 올해 1억이던 집값이 전세금을 돌려주어야 하는 2년 뒤에는 1억 2천이 되어 있다면 그 사이 2천이라는 시세차익이 생기는 것이다. 당연히 집값이 오르는 만큼 전세금도 올려받을 수 있으니 다음 세입자로부터 그 만큼의 수익을 더 보전받게 된다. 기존의 세입자가 계속해서 살고 싶어 한다면 그만큼 돈을 더 모아서 전세금을 올려주면 된다. 2년 동안 2천만 원의 전세금을 올려주려면 1년에 천만 원, 매달 100만원 조금 안되게 돈을 모아야 한다. 그래도 다시 돈을 돌려 받으면 1억 2천이 고스란히 남으니 돈을 집주인에게 맡겨 두었다 여기면 손해는 아니다. 그래도 매달 전세금 올려주기 위해 모아야 하는 돈이 월세와 거의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다면 과연 그마저도 세입자를 위해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시세차익을 노리고 전세금을 받아서 주택구매에 투자하는 경우마저 언론에 의해 부추겨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본금 없이 아파트를 수 십, 아니 수 백 채까지 소유하게 된 것을 무슨 대단한 재테크의 방법인 양 공중파까지 나서서 홍보한 것이 불과 십 수 년 전이다. 집을 사서 전세를 놓고, 그 전세금으로 아파트를 계약해서 계약한 아파트로 다시 대출을 받아 집값을 벌충한다. 그렇게 일단 집을 계속 사 놓으면 결국에 아파트값이 오르고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므로 앉아서 큰 돈 들이지 않고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월세 사는 2030 남성들이 임대차 3법과 종부세에 입에 거품을 물고 분노를 드러낸 이유였다. 자기도 그렇게 부자가 될 수 있는데 정부가 그것을 막아 버렸다. 그래서 나온 말이 벼락거지다. 집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자기만 그로부터 소외되었으니 그게 다 정부와 여당 탓이다. 그런데 집값이라는 게 그렇게 한정없이 오르기만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를테면 나같은 경우 집값이 일정 이상 오르면 차라리 조금 외진 곳으로 가서 싸게 월세 내며 사는 쪽이 훨씬 경제적으로도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정없이 오르는 집값을 실제 감당할 수 있는 경우란 결국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데 그렇게 받아서 과연 그런 비싼 집값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임차인들이 월세보다 전세를 선호하는 것도 월세 내는 것 자체가 알량한 수입에서 꽤나 부담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집값이 오르면 오를수록 수입이야 뻔한데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한정된 수요 안에서 집에 대한 기대수익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를 해결하고자 나온 정책이 전세대출이고, 사회적으로는 부모의 지원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지원 없이 전세조차 얻지 못하고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또한 결혼과 출산이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또 하나 원인이 되고 있기도 했다. 대출 없이는 전세조차 살 수 없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가는데 과연 언제까지 집값은 지금처럼 가파르게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선진국들처럼 집값이 어느 순간 안정화될 경우 그때도 전세라는 제도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전세라는 제도는 언젠가는 사라져야 하는 제도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당시에는 모두로부터 얻어맞던 민주당 내부의 의견들이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현실로써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집주인들이 돌려주던 전세금이란 결국 다음 세입자들이 똑같이 어렵게 모은 목돈이었던 것이다. 집주인 자신의 돈이 아니라 누군가가 어렵게 모은 돈으로 이전 세입자는 전세금을 돌려받고 다시 다른 전세를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입자들마저 지나치게 오른 집값에 따른 전세금의 상승을 감당하지 못하고 더이상 비싼 전세를 구할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집값이 너무 오르고 따라서 전세금도 너무 오르니 차라리 더 싼 다른 수단을 알아보느라 전세라는 제도가 존재할 기반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전세금을 낮춰 받자니 오히려 그동안 받은 전세금에 자기 돈까지 더해서 돌려줘야 한다. 그런데 그 자기돈도 결국 다른 아파트에 묶여 있는 경우가 많다. 남의 돈으로 돌려가며 유지하던 전세라는 제도의 바닥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 남의 돈이 없을 때 원금이라도 보전받을 수 있다는 전세의 신화는 사라지게 된다. 내가 일찌감치 전세를 포기하고 월세를 살게 된 이유다. 차라리 싼 월세가 애매한 전세보다 더 안전하다.

 

어차피 전세라는 것도 내가 어렵게 모은 돈에 이자비용과 그 돈을 사용해서 얻을 수 있는 유무형의 가치 등 실제 상당한 비용을 지속해서 지불해야 하는 점까지 고려하면 절대 원금 그대로 돌려받는 유리하기만 한 제도가 아닌 것이다. 차라리 전세금 더 마련할 돈으로 고기를 한 번 더 먹고 여행을 한 번 더 가는 것이 자신의 삶의 질을 위해서도 더 나을 수 있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내가 낸 돈을 고스란히 돌려받기만 하는 제도는 없다. 그런 사실을 적확하게 알렸어야 하는 언론마저 그 책임을 방기했다. 그런 현실을 알고 지적했어야 하는 2찍 진보들 역시 전세라는 기득권을 위해 자신의 양심을 저버렸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렸던 것이다. 언젠가는 드러날 사실들이었음에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한민국에만 전세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라져야 하는 제도인 것이고. 옳은 말을 하고서도 욕먹는 것은 민주당에 몸담은 정치인들의 숙명일 테지만. 같은 여성비하에 대해서도 여성단체들은 국민의힘에 대해서는 절대 어떤 비판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여성주의에 적대적인 이준석을 추앙하며 그와 손잡으려는 것이 여성주의의 실체이기도 하다. 모르는 놈은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놈들 뿐이다. 이낙연 같은 놈들. 아마 그때부터 민주당 내부에서 수박들이 증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언론의 눈치를 보며 언론을 배경으로 삼는다. 여성주의와 손잡고 노동계와 결탁한다. 진보와 수구를 아우르는 이 사회의 기득권들인 것이다. 역겨운 것이다.

이낙연이 지금도 크게 착각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나마 사면발이 직전까지 민주당 지지층 내에서 지지율이 꽤 지켜지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이낙연의 지지율은 그 전부터 빠지고 있었다. 민주당 대표로 있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중도층이 먼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민주당 밖에서 이재명의 지지율이 높았고 이낙연은 민주당 지지층 내에서 굳건한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지금 이낙연이 욕하는 민주당 강성지지층이 마지막까지 이낙연을 지지한 층이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낙연에 대한 지지율이 빠졌다기보다 민주당에 대한 중도층의 지지가 돌아서면서 이낙연의 지지율도 같이 빠졌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지금도 민주당이 뭐만 하면 그리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왜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이런 법안들을 입법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이라는 게 하나밖에 없다. 그때 당대표가 이낙연이었다. 지금도 내부에서 반대목소리를 내는 이른바 이낙연계가 당시 당의 주류였다. 그때 그래서 먼저 중도층이 돌아서면서 선거마다 판판이 깨지던 상황이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아예 만방으로 깨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낙연의 지지율이 지켜진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의 당대표이고 유력대선후보이기에 나를 비롯한 많은 지지자들은 마지막까지 이낙연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으며 한결같은 지지를 보냈었다. 그런 지지자들의 기대를 먼저 배신한 것은 과연 어디의 누구였을까?

 

이낙연이 다시 돌아와 국회의원을 하든 당대표를 하든 대선후보로 나서든 결국 이낙연이란 정치인에게 표를 줄 사람들은 바로 그들 이낙연 자신이 강성이라며 비하하는 지지자들인 것이다. 이른바 이재명 당대표에 대한 적극적 지지층을 대표하는 개딸은 전체 지지자의 숫자에 비하면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들의 행동이 너무나도 옳고 바르고 현명하다 여겨졌기에 다수 지지자들이 그들을 응원하며 지지를 보내고 있는 구도인 것이다. 그들이 진정 전체 지지자 중에서도 소수였고 고립되어 있었다면 똥파리가 그랬던 것처럼 일찌감치 도태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처럼 모든 언론이 하나가 되어 때려대는 상황에 지지자들의 응원조차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자신에게 표를 줄, 과거 지지를 보냈던 지지자를 조롱하고 비하하고 악마화한다. 이게 과연 인간이 할 짓인가.

 

솔직히 반성한다. 나 역시 언론에 속았다. 김어준과 유시민에게 속았다. 무엇보다 이낙연이라는 인간을 바로 보지 못했었다. 의심은 품었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관성적으로 비판없이 지지했었다. 과거 그를 지지했던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마지막까지 그를 지지했던 것이 그리 비난받을 일이었을까? 마지막까지 민주당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낙연을 지지했던 행동이 그리 비하당할 행동이었던 것일까? 이낙연과 수박들은 주장한다. 민주당이 민주당 다우려면 그때 이미 민주당과 이낙연에 대한 지지를 접었어야 했다. 과연 그런 놈들이 앞으로 하고자 하는 정치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것이겠는가? 그런 놈들이 만들고 싶은 민주당이란 어떤 정당일 것인가? 무엇보다 진보를 자처하는 놈들이 그런 놈들만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꼬라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저놈들이 주장하는 진보란 또한 무엇인가?

 

그야말로 배은망덕이다. 그래도 이낙연이 사면발이 전까지 민주당 당대표로써 차기 대선주자로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행세할 수 있었던 배경 자체가 그럼에도 끝까지 그를 지지했던 민주당 지지층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를 응원하던 김어준에 있었던 것이었다. 유시민이야 일찌감치 조직적인 린치에 등에 칼 찔리고 물러나 있었지만. 그런데 그런 지지자들을 부정했다. 세상에 자기 혼자서 정치하는 놈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반성한다. 내가 부끄럽다. 그런 놈이었다. 처음부터 정치를 해서는 안되는 놈이었다. 언론이 띄우는 정치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언론은 망해야 한다.

사실여부를 확인해보지 않아서 신빙성을 담보할 수는 없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은 만주와 중국에 대한 공략에 성공할 경우 한반도로 수도를 옮기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중국까지 점령하게 되었을 경우 일본열도는 전체 영토에서 상당히 동쪽으로 치우친 구석에 위치하게 된다. 보다 효율적인 지배와 운용을 위해서라도 수도를 보다 중심에 가까운 곳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일본 정부가 서울로 옮겨오게 되면 당연히 다수의 일본인도 따라서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한반도에 살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 비해 한 단계 아래인 2등국민으로 차별받고 있었는데 보다 우월한 신분인 1등 국민 일본인들이 다수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의 일본인들이 서울을 자기 영토로 여기고 정착헤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하게 원래 조선인들의 땅이던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은 밀려나거나 차별받으며 저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는 것이다. 매일같이 일본인과 마주하며 차별받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당시 조선사람들의 감정은 어떻겠겠는가 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싸움질이나 하고 상인들 등이나 쳐먹던 깡패를 마치 민족의 영웅처럼 소설이며 영화며 수도 없이 만들어가며 소비하는 이유라는 것도 결국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 깡패들이 원래 한반도에 살던 조선사람들을 상대로 폭력도 휘두르고 갈취도 하는데 대신해서 그들과 맞서 싸우면서 폭력도 휘두르고 갈취도 하는 같은 조선 사람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더구나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량한 조선사람들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핍박하며 착취하는 행위들마저 정당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아예 땅까지 빼앗는다. 원래 조선인들의 땅을 일본인들이 차지하고서는 내쫓긴 조선인들을 다시 차별하고 착취한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매일같이 마주하는 일본인들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죽거나 상처입는 사람들까지 수도 없이 보고 겪게 된다. 그런데도 평범한 일본인들만이 아닌 일본의 정치인이나 실제 조선사람들에게 위해를 끼친 개인들만을 구분해서 분노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하기는 하겠는가? 조선의 식민지화를 지지했던 외국과 외국의 국민들에 대해 좋은 감정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독립투쟁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도 아직까지는 조선이 조선인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조선에 살고 있는 다수는 조선인들이었고, 매국노라 손가락질당할지언정 조선의 지배에 조선인들의 지분이 아주 없지만 않았다. 그래도 일본에 협력하면 매국노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인정받고 나름대로 대우받는 삶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없이 조선인이라면 아예 서울에서 모두 내쫓고, 아니 조선인들을 일본의 부라쿠처럼 차별적인 거주구역을 나누어 살게 하면서 억압하려 한다면 그래도 조선인들은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건하게 막연히 일본의 지배에 불만을 품으며 소극적인 저항으로 만족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도, 혹은 중국에서 결사활동을 하다가도, 그럼에도 포기할 수만 있으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일상으로 돌아갈 여지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진다. 돌아가봐야 내일이라고는 없는 절망적인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에 대해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대입해 이해하려 시도하다가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마는 이유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일본과 당시 식민지 조선처럼 철저히 별개의 존재로서 분리하려 한다. 이스라엘에게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있고 팔레스타인에도 팔레스타인의 영토가 있다. 서로가 타자로서 단지 어느 한 쪽이 힘의 우위에 기대어 억압을 가하는 구조로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인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이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이었다. 원래 살던 땅에서 내쫓겨서 거주지역을 제한당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일방적인 폭력과 억압과 착취를 매일같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수많은 끔찍한 범죄들이 저질러지고 있었다. 원래 살던 땅에서 내쫓기고, 그나마도 답답한 장벽 안에 갇힌 채 내일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러자면 조금 더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현실에서도 안창호나 여운형 같은 이들은 그렇게 신사적인 투쟁만을 고집했을 것인가.

 

그래도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과 잘 협력해서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자치론자들이 나름대로 자기 지분을 가질 수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우호적으로 협력해서라도 지금보다 더 나은 지위와 권력을 얻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짓거리지만 결과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보다 나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게 잘보인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좋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서방세계에 잘 보인다고 더 나아질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단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뿐이다. 아니 갈수록 더 나빠지기만 할 뿐이지만 그래도 더 급하게 나빠지지는 않는 정도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과 잘 지내보자는 주장이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아라파트가 실패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허락 아래 세워진 자치정부란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구도 안에서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현상유지는 결국 팔레스타인을 말려죽일 뿐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우위에 의해 알량하게 남은 팔레스타인의 영토는 야금야금 먹혀가고 있는 중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식민지 조선의 그것과 같을 수 없는 이유다. 아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들었다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독립운동과 비교하는 것이 꽤나 불쾌하고 부당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런 식민지 조선의 역사에서조차 한가하게 이념적인 선택을 두고 따지는 것이 안전한 곳에서 입이나 놀리는 인간들의 현실인 것이다. 아무리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했어도 사회주의를 선택해서는 안되었다. 사회주의세력의 도움을 받으려 해서는 안되었다. 도움을 받았어도 미국이나 일본의 도움을 받았어야 했다. 태평양전쟁 도중에도 미국은 식민지 조선의 독립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조선을 위해서도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더 많았다. 일본의 조선점령을 처음부터 지지했던 것도 미국이라는 나라였다. 그러니 차라리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는 것이 미국과 일본을 위해서도 나았다. 아마 지금 대한민국 국민 40%는, 전혀 존경할 가치가 없는 늙다리들은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그 늙다리들이 당시에는 아직 어린 것들이라 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아무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놓인 현실이 다르고 당연히 그에 대한 인식과 감정이 다르다. 그러면 행동도 달라지게 된다. 나라면 어찌할 것인가? 역지사지란 그런 것이다. 서로의 입장을 바꾸려면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이 지금 팔레스타인과 같았는가. 친일파라 불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그것에 비하면 양호한 축이었다. 이스라엘도 제국주의 열강들이 실제 식민지에서 저질렀던 짓거리들에 비하면 특별히 더 나쁘다 할 수준은 아니다. 그게 더 좆같은 것이다. 그게 인류의 역사이기도 했다. 현실인 것이다.

1987년 6월 10일 이른바 운동권이라 불리우는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 직장인들은 물론 버스기사며 택시기사에 상인들까지 모두 거리로 쏟아져나와 민주화를 외쳤었다. 정확히 당시 시민들이 외친 구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재타도, 다른 하나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야 당연하고 호헌철폐란 무엇이었는가.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은 체육관에 정부가 임명한 대의원들이 모여서 간접선거로 선출했었다. 박정희가 다시 선거를 치르면 김대중에게 질 것 같으니 유신개헌으로 바꿔 놓은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다시 다음 대통령선거에서도 그대로 간접선거로 치르겠다며 현재의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대놓고 선언했으니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게 바로 6월 항쟁이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우상호였고, 그래서 우상호와 우현이 같이 찍은 사진이 꽤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었다. 이원욱도 아마 그 세대였을 것이다. 63년생이니 얼추 맞다. 우상호가 62년생이다. 그런 이원욱이 직접민주주의는 나치라 주장한다. 하긴 그래서 내가 전부터 말했을 것이다. 우상호든 권인숙이든 당시 민주화운동을 깊이 후회하고 있을 것이라고. 내가 기억하는 운동권 집행부의 모습이라는 것도 학생들은 전경이랑 싸운다고 밤새 피터지고 있을 때 기숙사에서 아주 편히 쉬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 선배 몇 명도 전경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끌려갔었고, 다음날 거리는 온통 최루탄 투성이었었다. 아, 이런 게 바로 운동권이라는 거구나. 내가 학생운동 집행부를 신뢰하지 않았던 이유다. 이후 김민석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보인 행보에도 그래서 상당부분 이해하고 있었다. 원래 그런 새끼들이다.

 

직접민주주의는 나치다. 직접민주주의는 틀렸다. 그러므로 소수에게 다수를 대표할 자격을 주는 간접민주주의가 옳다. 그래서 유신헌법이 옳았다는 것 아닌가. 민주당 대의원이라는 것이 권리당원에 의해 직선제로 선출되는 대의기구라면 또 모르겠다. 대개는 지구당을 장악하고 있는 소수에 의해 의도적으로 임명되듯 만들어지는 신분인 경우가 더 많다. 말하자면 조직과 기반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신분이란 것이다. 그래서 유신정권의 체육관선거와 대의원에 의한 선거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선출하는 대의원들도 어찌되었거나 유권자들일 터다. 어쨌든 정부가 선별해서 임명한 이들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정당한 대의기구로써 존재한다면 어째서 대의원과 일반 당원 사이에 의견차이가 이토록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것인가? 더구나 그렇게 의견차이가 크다면 민주주의의 원칙에 있어 다수인 당원과 소수인 대의원 중 누구를 따라야 하는 것인가?

 

70년대부터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한 마디인 것이다. 소수의 자격이 있는 엘리트가 지배하는 것이 옳다. 무지한 대중이 아닌 소수의 자격을 인정받은 이들이 이끌어가는 것이 바르다. 바로 어제인가 2찍 진보가 대의원제 수호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썼던 그 맥락이다. 더불어 이원욱에게 역사교육을 다시 시켜주자면 직접민주주의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왕이 없던 아테네 등의 폴리스들에 한정된다. 로마는 민주정이 아닌 공화정이었다. 시민을 대표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합의에 의해 이끌어가던 체제였다. 차라리 로마의 공화정이 민주당의 대의원제와 유사하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그래서 로마의 시민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해가는 상황에서도 로마의 시민들은 사실상 자신들을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했던 아테네의 몰락은 직접민주주의 자체보다는 시민들이 더이상 참정권을 행사하기를 포기하면서부터였다. 페리클레스 시대부터 이미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한계에 이르렀고 소수의 유력한 시민들에 의한 과두적인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당연히 독일의 나치는 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그 민주주의에 의해 심판할 기회 자체를 부정하며 권력을 유지했었다. 역시 소수의 유력자의 독점에 의해 유지된 체제이지 나치 치하에서 나치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될 방법이 없었다.

 

아무튼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저런 새끼들이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거들먹댄다. 아니 민주화운동을 한 이유 자체도 원래는 주위에 거들먹거리고 싶어서 시작한 것일지 모르겠다. 민주화운동 한다면 먹어주거든. 더구나 집행부에 한 발 걸치고 있으면 특히 대학생들은 꺼뻑 죽어준다. 당시 문화가 그랬었다. 송강호의 저 유명한 '현정화' 그 장면이 바로 민주화운동 선후배사이의 토론장면이다. 일반적인 주입은 있어도 쌍방향적인 토론은 없었다. 그런 새끼들이 나더러 쁘띠라며 욕질하고 했었으니. 다시 말하지만 소수의 대표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공화제와 민주정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도대체 학교 다니며 뭘 배웠기에 저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인지. 이런 새끼들이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민주당이 제대로 돌아갈 리 있나. 어이없을 뿐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아테네가 몰락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솔직히 몰락이라고 하기에는 당시 상황이 좋지 못했었다. 무엇보다 전염병으로 당시 정치지도자이던 페리클레스까지 죽어나갈 정도로 큰 타격을 받은 상태에서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테네가 정치적으로 크게 후퇴했다는 것은 시민들이 더이상 정치에 참여하기를 꺼려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와 같은 소수에게 맡기고 방임하는 것을 선택하면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빛을 바래게 되었다.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인가. 80년대 민주화세대의 학생운동을 부정하는 선언인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옳았다. 민주화는 틀렸다. 그래서 민주화인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2찍 진보들이 민주당의 대의원제 약화에 발작하는 이유와 민주노총이 넥슨 노조를 무시하고 회사 앞에 가서 시위한 맥락은 어찌보면 같은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을 것이다. 국민과 노동자는 그저 무지하고 무력한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재명이 아내가 다쳐서 연차를 냈다고 하자 아내 다쳤다고 연차쓰는 노동자가 어디있느냐고 발악했던 진중권이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군인이 휴가나가서 몸이 안좋아 전화로 휴가연장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고 지랄하던 2찍 진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직장인이나 군인이란 여전히 그런 이미지에 불과하다.

 

직장인은 아직 아내가 다쳐도 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아니 그냥 술먹고 아주 죽을 것 같아서 나 오늘 쉬겠다 당일 전화로 연락해도 연차가 된다니까? 심지어 오후 늦게 일어나서 연차처리 좀 해달라 하면 그렇게 해준다. 결근도 연차가 남아 있으면 연차로 대체해주는 직장이, 특히 연차사용을 권장했던 문재인 정부에서는 생각하는 이상으로 꽤 많았다. 그리고 군인이 휴가나갔다가 사정이 생기면 전화로 복귀를 늦추거나 휴가를 연장하는 것은 내가 현역이던 90년대에도 이미 상당부분 가능했었다. 하지만 2찍 진보라는 것들이 실제 직장을 다녀봤거나 군복무를 제대로 해 본 적 없을 테니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래서 관념적으로 판단한다. 직장인은 이럴 것이다. 현역 군인이라면 저럴 것이다.

 

노동자는 회사와 분리되어 있다. 회사의 이미지나 이익과 무관하게 그저 월급만 받고 일하는, 그러면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착취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회사에 문제가 생겼어도 노동자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오히려 회사에 소속되어 있어도 같은 노동자로서 연대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노동운동계에서도 더이상 사회주의란 의미를 잃은 지 오래일 것이다. 노동자의 소외라는 관점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생산으로부터의 소외보다 더 심각한 것이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다. 자신의 일로부터 어떤 의미도 가치도 보람도 느끼지 못한다.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수단으로서 내다 팔고 만다. 그런데 급여까지 적으니 착취이고 약탈이다. 하지만 모든 노동자가 그러한가.

 

열정페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IT 노동자들이 120시간 노동을 스스로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보람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 노동자들이 그렇기도 하다. 나는 내 회사 욕해도 되는데 남이 내가 다니는 회사 욕하면 기분이 나쁘다. 일하면서 초단위로 쌍욕을 내뱉다가도 그래도 내가 일한 결과물이 상품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팔리는 것을 보면 뭔가 뿌듯하기도 하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건설현장의 일용직들이다. 나도 가끔 남부순환도로와 코엑스 별관을 기분내키면 떠벌리기도 한다. 거기서 노가다 좀 뛰었었거든. 내가 다니는 회사고 내가 내 시간과 노력을 들어 만든 결과물들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의에 의해 오염되고 왜곡되고 심지어 그로 인해 비난까지 받고 있다. 그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해야 한다.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가? 그런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와 연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인 회사와 더 협력해야 하는 것인가?

 

국민은 무지렁이다. 더구나 좋은 대학을 나오지도 못하고, 높은 수준의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정치권이나 시민사회단체 등 이슈의 중심에서 현실을 치열하게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그런 국민들이 과연 정치적으로 어떤 판단을 중요하게 내리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가? 그래서 2찍 진보들이 윤석열을 좋아하는 것이다. 어째서 2찍 진보들이 윤석열 비판하고 나서는가 했더니 벌써 한동훈으로 갈아탄 사람들마저 적지 않다. 서울대거든. 더구나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까지 합격해서 검사가 되어 활약한 이들이고. 서울대라면 그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더구나 사법시험까지 어렵게 합격한 영감님들이라면 그러는 것이 다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반면 어디서 뭐하는지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 뭐라 주장한다고 해서 거기에 의미를 두기는 곤란하다. 실제 2찍인지는 모르지만 자칭진보로부터 들은 말이다. 무지한 대중. 그러니까 민주당도 제대로 당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무지렁이 당원들이 아닌 선별된 소수의 엄정한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거기에 더해 대의원제가 유지되어야 시민사회단체든 진보진영이든 민주당에 지분이 생긴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더해지기는 한다.

 

어째서 진보를 자처하며서 저리 몸을 던져가며 윤석열과 한동훈을 지지하는가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이다. 국민의힘이야 말로 노동존중의 정당이고 여성존중의 정당이다. 민주노총이 정권차원에서 대놓고 간첩몰이해도 그저 당하고만 있는 이유다. 노란봉투법에 대해 정작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정권과 여당이 아닌 굳이 정치권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히 건드려서는 안되는 절대존엄이 존재하는 것이다. 저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세계관이다. 구시대의 잔재처럼 여전히 그들의 머릿속에는 절대적인 계급과 신분이 존재한다. 그를 근거로 판단한다.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에 가까울수록 더 민주주의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더 많은 다수의 주체가 직접 참여해서 자신의 정치적 주장과 요구를 현실에 반영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는 더 그 근본에 가까워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지하고 무능한 다수가 아닌 선별된 소수의 특별한 이들이 그 판단과 선택을 주도해야 한다. 자칭 진보가 2찍 진보로 진화한 진짜 이유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지적해 온 바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은 지금도 행동으로 입증해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감탄이 절로 나올 뿐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