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80년대를 주름잡았던 코미디언 김병조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팔짱끼고 지켜보는 사람을 웃기기란 불가능하다. 아예 작심하고 어디 한 번 웃겨보라며 팔짱부터 끼면 어떻게 해도 웃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자발적 동의라 한다. 코미디언이 하는 농담이나 액션에 기꺼이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그 의도에 맞춰 웃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TV에 나오는 인물들이 배우 신혜선이나 김정현이 아닌 중전이고 철종이라는 가정에 동의할 수 있어야 이후 드라마의 내용에도 공감하며 온전히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배우 송중기가 아니고 빈센조이며, 배우 전여빈이 아닌 홍차영이다. 그런데 아예 그런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너희는 어차피 배우 송중기고 김태리이며 김태호도 장선장도 아니다. 2090년대에 궤도엘리베이터나 스페이스콜로니의 건설은 불가능하다. 나노머신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 그래서 스타워즈도 일단 포스가 말이 안되므로 황당하기만 하다.

 

코미디만 그런 것이 아니다. 타인과 대화할 때 일단 팔짱부터 끼면 더이상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어찌되었거나 상관없으니 한 번 네 생각을 말해봐라. 내가 평가하겠다. 진정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할 의지가 있다면 먼저 상대와 자신과의 사이에 중간지대를 만들고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할 지 대충 알고 있으니 서로 편하게 대화가 통할 중간지점에서 일단 시작해 봅시다. 그런 때 사람들은 대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상체를 바짝 상대에게 붙이거나, 혹은 의자를 상대 쪽으로 옮기기까지 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의 입장에서 한 번 들어보겠다. 그게 바로 존중이고 소통이란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이야기를 전혀 들을 생각이 없을 때는 가만 먼 극단에서 그냥 듣기만 하게 된다. 아마 언젠가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상대를 아예 부정하고 거부하려 할 때 나타나는 원리와 이상에 근거한 비판이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상대든 자신이든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현실적인 어떤 굴레 안에서 이루어지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아예 가장 극단의 가장 이상적인 무언가를 전제로 그를 평가하려 한다. 이를테면 가수 오디션을 하는데 프레디 머큐리나 로버트 플랜트 세바스찬 바하만을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려 한다. 혹은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 샐린 디옹 등을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려 한다. 과연 호평을 들을 수 있는 참가자가 누가 있을까? 그냥 떨구겠다는 소리다. 아인슈타인 정도가 아니면 물리학과는 꿈도 꾸지 마라. 스티븐 호킹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물리학자라고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다. 대학교수인데 과학자 취급도 못 받는다. 세상에 그렇게 완전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물론 보수정부나 정당에 대해서는 항상 그런 현실적인 교집합은 전제되고 있었을 것이다. 보수 정부에서 이 정도면 적당하다. 보수적인 정당에서 이런 정도면 훌륭하다. 그래서 노동존중의 정당이고 여성존중의 정권이지 않았는가. 어차피 그런 국민의힘이니까. 국민의힘이 그런 성향이란 것은 자신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반면 민주정부나 민주당은 예외없이 항상 이상적이고 원리적인 기준을 강요하려는 경향이 더 강하다. 그럼에도 민주당과 민주정부는 절대 그래서는 안되고 그러는 자체가 변절이고 후퇴이고 타락이다. 최근 일베와 자칭 진보의 논리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다. 일베가 정의당을 응원한다. 장혜원과 류호정을 지지한다. 그래서 원래 수구가 자칭 진보를 용인하고 오히려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 온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진보의 관점에서 민주당의 정책을 비판한다. 그래서 민주정부에서 최저임금을 인상해서는 안되었던 것이었다. 근로시간을 줄여서도 안되었던 것이었다. 권력기관을 개혁해도 안되었던 것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기준을 전제로 그들이 얼마나 원리와 이상에서 벗어나 있는가를 확인시켜준다. 그러므로 틀렸다. 그러므로 잘못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원리적인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이 그 비판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이 자칭진보이며 그러라는 것이 곧 자칭진보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향에서 절대 현실을 이유로 대상을 용인하는 법 없이 타협없이 비판할 수 있는 존재로써 자칭 진보는 수구에 유용할 수 있는 것이다.

 

가덕도 신공항을 4대강에 빗대는 자칭진보나 그를 그대로 받아서 민주정부와 민주당을 비판하는 논리로 활용하는 일베의 관계는 그런 연장에 있는 것이다. 김해공항은 이미 포화상태다. 동남권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신공항은 필수다. 하지만 그런 현실의 논리를 환경이라는 원리로써 희석하며 훼손시킨다. 그래도 진보정권이라 불리는 민주정부인데 더 진보적인 정의당이 진보의 입장에서 환경을 앞세워 저리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가덕도 신공항은 4대강과 같다. 그 정도 수준의 환경파괴를 불러오는 잘못된 정책이다. 

 

자신들이 생각한 도덕적 이상에서 벗어나 있기에 민주정부와 민주당은 심지어 이명박근혜만도 못하다. 그래서 자칭 진보들의 이명박의 유죄판결에 애석해하며 박근혜에게 동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못하니 이명박도 박근혜도 그저 억울하기만 할 뿐이다. 완전무결하지 못한 것은 서로 같은데 법적인 처벌까지 받게 되었느이 애처롭고 안쓰럽기만 하다. 그런데 과연 자칭 진보가 앞세우는 도덕적 기준이란 사람이 따를 수 있는 기준인가. 자식을 명문고나 명문대학에 입학시켜서도 안되고, 입학시키려 법이 허용한 시도나 노력들을 기울여서도 안된다. 돈을 벌어서도 안되고, 집을 가져서도 안되고, 부나 명예를 추구해서도 안된다. 사돈에 팔촌까지 한 점 부끄럼없이 청정해야만 한다. 그러지 못했으니 민주정부는 이명박근혜와 같다. 그러면 국민의힘은? 이명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수많은 불법과 탈법을 저지른 인사들은? 어째서 저들과는 기준이 다른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그래서 진보가 아닌 자칭 진보라 말하는 것이다. 저들이 주장하는 원리와 이상이란 오로지 수구를 위한 것이다. 수구의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그럴 수 있고, 민주당과 민주정부의 입장이 원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다. 아예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주장하는 안철수나 홍준표에게는 관대하고, 오히려 결과적인 약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인 문재인에 대해서는 테러까지 서슴지 않는다. 어째서? 인정과 존중과 공존의 대상과 그렇지 못한 타자와의 차이인 것이다. 혐오이고 증오이며 차별이다. 민주정부와 민주당 인사에게는 인권이란 없다. 개인과 인권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칭 진보가 민주정부와 민주당만 예외로 여긴다. 그렇다면 그들을 과연 진짜 진보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수구와는 소통과 인정을, 민주정부와는 혐오와 증오와 차별만을 드러내는 그들일 텐데.

 

자칭 진보 지지자들 보라고 쓰는 글이다. 민주당 지지자 안에서도 혹시라도 정의당에 미련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읽으라 쓰는 글이다. 한 번 곰곰히 돌아보기 바란다. 과연 자칭 진보가 누구를 대할 때 원리와 이상을 앞세우고 있었는지. 원리와 이상만을 앞세우며 비판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현실적인 이유로 타협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는지. 노무현은 죽어 마땅한데 이명박은 잘한 것도 있는데 너무 아쉽다. 한겨레의 논평이었다. 노무현더러 죽으라 등떠민 인간들이 이명박에게는 동정과 연민을 아끼지 않는다. 차라리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김학의를 무고한 시민으로 만드는 이유와 같다. 조국을 대하는 것이 최순실을 대하는 것보다 더 악랄하다.

 

한겨레와 경향은 이미 방향을 정했다. 정의당도 일찌감치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들의 정체성은 국민의힘에 더 가깝다. 조중동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더 옳다. 착각하고 오해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런 자칭 진보들에게 아직 힘을 실어주는 것은 어디 사는 누구인 것인가. 어째서 지난 총선 직전 자칭 진보는 수구의 공격에 다시 태도를 정해야 했을까? 모르면 병신이고 알면 개새끼다. 합치면 개병신새끼다. 자칭 진보에 어울리는 호칭이다.

 

정말 오랜만에 김규항이라는 이름을 듣는 바람에 다시 열받아 버렸다. 저 놈들과는 역시 함께 어울릴 수 없다. 내가 노동자인 동안에는. 내가 무산계급에 속한 동안에는. 대한민국에 진보는 없다. 진보를 자처하는 수구의 수족만 있을 뿐.

내가 누구의 편에서 뭔 글을 쓰든 항상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나 자신이 노동자다. 고작 25만원짜리 반지하 월세에 사는, 얼마전에 무기계약직 되었다 그저 좋아할 뿐인 이 사회의 바닥을 이루는 수많은 노동자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나 자신의 말과 글은 증명되는 것이다. 더이상 추가적인 증명 따위 필요 없이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주장도 하는 것을 나의 신분이 증명해 주는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해 노동자로서 사회적 약자로서 이런 주장들을 한다. 그래서 그 잘난 자칭 진보들이 나보다 더 나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문득 생각했다. 자칭 진보들은 어째서 저토록 도덕적 결벽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일까. 어째서 단 한 점의 오류도, 의혹도 모두 거부하고 부정하려고만 하는 것일까. 그로써 자기를 증명하려는 강박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나는 이만큼 도덕적으로도 엄격하기에 사회의 정의와 진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상관없는데? 몇 번이나 썼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비루함에 대해서. 힘없는 이들의 비굴함과 비겁함에 대해서도. 얼마나 그들은 쉽게 자신의 양심을 도덕을 윤리를 약간의 이익과 바꾸고 마는 것인가. 약자가 선량하다는 것은 강자가 만든 올가미와 같은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 선량에서 벗어난 순간 약자는 약자로서 자격을 잃게 된다.

 

아마 성소수자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성소수자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사회적 규범에 충실할 때만 존중과 인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일반적인 상식에서 불쾌하고 혐오스런 행동을 하더라도 성소수자라는 이유 자체로 그들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항상 올바른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성소수자 역시 온전히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제시한 기준을 충족해야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아니라면 마땅히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항상 모든 개인이 보편적으로 제시된 기준을 오로지 충족하며 살고 있는 것인가. 그래야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가.

 

차별의 이유다. 미국의 백인들이 그냥 아무 이유없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백인이라도 이탈리아인이나 아일랜드인을 차별할 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 그 이유란 것들은 엄격한 사회의 도덕률이다. 같은 백인들도, 혹은 잉글랜드계나 독일계의 백인들이라도 흔히 범하는 잘못들인데 오로지 그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그래서 차별이라 부르는 것이다. 차별이란 어쩌면 상대를 부당하게 비하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기준을 제시하고 강요하는 것인지 모른다. 여성에게만 혼전순결을 강요하던 전근대사회의 윤리처럼. 여성에게만 이성에 대한 절개를 강요하던 전통사회의 도덕처럼. 오로지 여성에게만 딸로써 아내로써 어머니로써 자격을 강제한다. 그래서 여성은 차별받아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사회에서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가 강요한 도덕적 기준을 철저히 지켜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가 자칭 진보의 도덕적 결벽증에 대해 최근 느끼는 지점들이다.

 

자칭 진보가 민주진영과 수구진영을 비판하는 도덕적 기준이 전혀 다른 이유인 것이다. 말 그대로 강박이다. 수구진영에 대해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던 도덕적 잣대가 민주진영에 대해서만 엄격하게 들이밀어진다. 그래야지만 자신이 진보일 수 있다. 진보로서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누구의 기준인가? 누가 그렇게 강제하는가? 정확히 자신이 진보라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진보적 가치를 주장해도 좋은 것인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사회의 보편적인 믿음과 때로 상반되는 주장을 서슴없이 펼쳐도 좋은 것인가. 그래서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저들이 제시한 기준을 지키려 한다. 결론은 스스로 노동자도 소수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 그들의 편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전 자칭 진보들과 어울리며 내린 결론이었다. 저 놈들은 자신들을 무지렁이 노동자 농민과 다른 존재로 여기고 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스승이거나 선도자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저들과 자신은 다르다. 정의당 한 번 제대로 털면 재미있을 것이라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원래 노동자도 약자도 소수자도 아니면서 그들의 편에서 사회의 주류와 맞서 주장을 펴야만 한다. 그러니 저들이 인정할 수 있는 자신의 자격을 갖춰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는 마땅히 더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를 과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제물은 당연히 진보에서도 주류가 못되는 민주당이다.

 

내가 자유롭게 민주당의 편을 들 수 있는 것과 달리 홍세화나 김규항 등이 민주당에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말을 하는 것을 스스로 꺼리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노동자다. 노동자로서 노동자라는 자신의 계급과 신분을 위해 주장하는데 다른 증명이란 것이 필요하기는 한 것인가. 스스로 주체라 동지라 공동체라 여기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욕하면 욕하는대로 듣는다. 비난하면 비난하는대로 듣는다. 그런 허튼 주장들에 구애되기에는 그 모든 주장들이란 절박한 자신의 사정인 것이다. 대학교수라도, 기업경영자라도, 전업정치인이라도 그런 주장들이 모두 자기의 일인 양 절박한 현실로 여겨지는 것이다. 욕하고 비난하는 것이 전혀 아프지 않다. 그래서 우상호가 박원순을 계승하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이 절박한 일들을 실제 행동에 옮기려 한다.

 

타자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 사실을 스스로도 인정한다. 억지로 노동자를 위하고, 인위로 약자와 소수자를 위하려다 보니 그 괴리를 어떻게든 메우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인정받고 싶어한다. 자기가 진보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항상 확인받으려 한다. 정의당 털어보면 진짜 재미있을 거라니까. 녹색당도 내부사정 들여다 보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저들은 나와 다르다. 내가 잠시 자칭 진보들과 어울리고 내린 결론이다. 차라리 태극기가 나와 계급적으로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적 김규항인지. 발전도 변화도 거의 없다. 자칭 진보의 현실이다.

한겨레와 경향, 오마이 등 이른바 자칭 진보언론에서 집요하게 악마화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해 보도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보자. 그래도 개인의 존엄을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자칭진보가 예외로 여기며 중대한 침해행위조차 당연하게 여기는 대상인 것이다. 이명박일까? 박근혜일까? 가족이라면 혹은 우병우의 가족이었을까? 김학의는 어떨까?

 

김학의와 윤중천에게 글로 다 쓰지 못할 끔찍한 일들을 당한 피해자들을 위한 분노보다 김학의를 출국금지시킨 정권에 대한 분노부터 드러낸다. 최소한 김학의는 출국여부조차 관계공무원들이 살펴봐서는 안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존엄한 인격이었다. 그러면 조국 전장관은 어떨까? 대통령의 일가족은 어떨까? 여당 정치인의 주변은 어떨까? 그러니까 자칭 진보언론이 한 번이라도 과거의 부패한 정권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집요함을 발휘한 적이 있는가.

 

정의당 역시 마찬가지다. 진중권이니 홍세화니 서민이니 하는 자칭 진보지식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민주정부에만 현미경을 들이대고 더 과격한 비판들을 쏟아낸다. 그것이 마치 자기증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칭 진보의 본질은 반민주당에 있다. 민주당이야 말로 이명박 박근혜보다 더 큰 악이며 이 사회 악의 근원이다.

 

그같은 자칭 진보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직 수사중이던 노무현 전대통령과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이명박에 대한 한겨레의 전혀 상반된 평가였을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더러는 죽으라 했었고 이명박에 대해서는 아쉽다 했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조국이 최순실보다 더 큰 악이다. 아니 조국도 아닌 그 가족조차도 이명박보다 더한 악인들이다. 물론 나경원이나 장제원, 혹은 동아일보 사장 딸 등은 그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 국회의원 보좌관은 노동자로서 보호받을 대상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오래전부터 자칭진보라 불러왔던 것이다. 이제는 지지자들도 똑같다 생각한다. 한두번은 어찌되었든 속아넘어갈 수 있어도 그동안 도대체 몇 번이었는가. 라임과 옵티머스에 심지어 실제 검찰과 야당 관련 인사가 연루된 사실을 알면서도 청와대만 바라보는 것이 바로 자칭 진보들이다. 진보란 무엇인가? 수구의 아류다. 결론의 이유다.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류호정 정의당 비례대표 의원이 보좌관을 부당하게 해고했을 때 자칭 진보언론들은 누구의 편에서 기사를 쓰고 있었는가. 단 하나의 언론이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은 끝에 해고까지 당한 보좌관의 편에서 류호정 정의당 비례대표 의원을 강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낸 적이 있었는가.

 

인터넷 언론사 기자가 야당의 당대표에게 성추행당했을 때는 또 어떠했었는가? 지방지 언론사 기자가 자치의회 의원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인터넷언론사 기자가 성추행을 당할 당시 자칭 진보언론들은 누구의 편에서 기사를 쓰고 있었는가? 무엇보다 말로 하기도 끔찍한 성범죄를 저지른 김학의와 그 피해자 가운데 누구를 더 동정하며 기사를 쓰고 있는가. 김학의 문죄판결은 입다물고 오히려 김학의를 수사할 수 있게 출국금지한 사실을 정권차원의 범죄로 규정짓고 비판하는 기사를 쓰고 있는 것이 자칭 진보언론이다. 그래서 자칭 진보언론이라도 과연 약자의 편에서 기사를 쓰고 있다고 지금 이 순간 자신할 수 있는 것인가.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정권차원의 사찰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결론을 냈을 때 자칭 진보언론은 어디에 있었는가? 가습기살균제 무죄판결이나 인보사 무죄판결 당시에 자칭 진보언론은 어디서 어떤 기사를 내고 있었는가? 한 번이라도 수사를 한 검찰이나 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강경한 입장을 내보인 적이 있었는가? 특히 인보사 판결은 논리적으로도 어이없는 내용이었음에도 조국 전장관의 부인을 재판한 재판부이기에 한 마디 비판 없이 그대로 지나가고 말았었다. 하물며 자칭 진보란 것들도 조선일보 따라가기 바쁜 상황에서 뭘 어쩐다고 새삼 강자에게 무기를 쥐어준다는 말이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최저임금인상도 반대, 근로시간단축도 반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반대, 진정 자칭 진보들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해 온 일이란 것이 무엇이더란 것이다. 주장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언가 실제 행동을 보여준 적이 있기는 하던가.

 

오마이뉴스가 충실하게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입을 빌어 내놓은 기사를 보면서 어이가 다 없었다. 딱 환경을 앞세워 가덕도 신공항을 반대하는 정의당의 모습 그대로다. 국민의힘이 정면으로 반대하기 곤란한 입장이니 원리적인 위치에서 대신 강경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를 통해 반대논리에 힘을 실어준다. 진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 정의나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민의힘과 이해를 공유하며 그들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때로 국민의힘의 논리를 자신들을 위해 빌리기도 한다.

 

세상에 가장 웃기는 것이 자칭 진보들이 사회적 약자 운운하는 것이다. 너무 높은 곳에서 굽어보며 판단하기에 일본군위안부나 일반 성매매여성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정의연을 무력화하는데도 앞장섰던 것이 바로 자칭진보들이었다. 무려 20년을 기다려 공격을 퍼부은 것이었다. 그런 고담준론을 따라가지 못하기에 나는 오늘도 그들을 혐오한다.

 

한경오가 망한다면 그것으로 좋다. 한경오가 망해서 한국에 자칭 진보언론이 사라지면 그것만으로도 절반의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다. 수구언론을 돕는 손발도 못되는 손가락 발가락 몇 개 더 잘라내면 그만큼 세상은 더 좋아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바퀴벌레가 싫어한다고 가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난 환경주의자가 아니다.

검찰이 세월호 유족 사찰의혹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을 때 자칭 진보는 조용했었다. 가습기살균제와 인보사와 관련해서도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한 마디 비판조차 못하고 있었다. 탄소배출이 많다고 가덕도 신공항을 반대하는 바로 그 자칭 진보다. 방사능물질이 유출되어도 경제성 평가에서 수치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정권차원의 범죄라던 바로 그 자칭 진보인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에 대해서도, 유가족에 대해서도, 인보사와 가습기 살균제에 대해서도 검찰의 수사나 법원의 판결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당연하다. 동지인 것이다. 반정부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자칭 진보의 가치다. 세월호보다도, 가습기살균제보다도, 인보사보다도 더 우선하는 절대의 가치인 것이다. 그런 정부를 상대로 상처를 주는 수사와 판결을 보여주는 검찰과 재판부를 향해 감히 자칭 진보가 비판같은 걸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호에 대한 검찰의 수사도 정당하고, 가습기살균제와 인보사에 대한 재판부의 결론도 정당하다. 그냥 민주당과 민주정부에만 불리한 수사와 판결을 내리면 그것만으로 나머지 모든 수사와 판결이 정당화될 수 있다.

 

흥미로웠다. 김학의의 범죄보다 김학의를 출국금지시킨 자치에 더 분노하는 자칭 진보와 자칭 여성주의에 대해서. 월성원전의 위험성보다 월성원전의 조기폐쇄를 더 심각한 문제로 여기는 자칭 진보를 보면서. 류호정이 새삼스러운 게 아니란 소리다. 오래전에 말했었을 것이다. 언론이 마음먹고 털기 시작하면 정의당이 아주 재미있어질 것이다. 류호정 건도 당시 대표가 미투로 물러나면서 애써 무마해 오던 것이 터져나온 결과였었다. 조선일보처럼 되고 싶다. 국민의힘처럼 되고 싶다. 그래서 자칭 진보인 것이기도 하다.

 

염치가 사라졌다. 자기들도 어떻게든 가짜뉴스를 만들어서 조선일보처럼 현실정치에 영향을 미쳐야겠다. 결론은 뭐다?자칭 진보를 지금도 소비하고 있는 그놈들도 공범이란 것이다. 조선일보처럼 가짜뉴스를 내고, 국민의힘처럼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가와 사회에 얼마든지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참여정부 시절부터 자칭 진보는 한결같았었다. 국민의 힘을 위해 가덕도 신공항 반대에 목숨을 거는 모습에서 그 실체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알고 있었지만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버러지는 버러지다. 다른 논리는 필요없다.

과학은 데이터가 전부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데이터를 통해 결론을 유추하고 이론을 찾아내는 것이다. 지금 아스트라제네카 접종자 수가 전세계적으로 2억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게 다 데이터다. 그래서 아스트라제네카 접종자 가운데 부작용을 경험한 이들은 몇이나 되고 그 가운데 위중한 지경에까지 이른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결과적으로 얼마나 코로나19 면역에 효과가 있었는가.

 

조선시대에는 왕이 농사를 짓고 왕비가 길쌈을 했다. 특별한 신분에 있는 이가 솔선수범하여 백성들에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은 그저 수많은 국민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5천만 국민 가운데 하나이지 특별한 하나가 아니다.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냥 수많은 데이터 가운데 하나일 뿐 그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2억 명의 실제 사례가 있는데 대통령 한 사람 맞고 안 맞고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백신이 불안하면 기존에 이미 접종한 사람 가운데서 부작용을 찾으면 되는 것이지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맞는다고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이해한다. 기자들이다. 정치인들이다. 한국 교육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 새삼 깨닫게 된다. 공부 많이 한 놈들이 과학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2억 명이란 데이터가 가지는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대통령만 바라보고 대통령이 접종만 하면 안심하고 맞아도 되겠다. 집단으로 조선시대에서 타임슬립해 온 것도 아니고. 기본적인 과학의 방법론만 알고 있어도 해결될 문제란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맞으면 문제가 없는가? 병신은 답이 없다.

내가 자칭 진보들 보면서 가장 어이없었던 것이 윤석열이 중앙지검장이던 시절 이미 옵티머스에 대한 고발을 무혐의처분내린 사실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면서 오히려 정부와 여권의 유착의혹만을 불지피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그렇게 라임과 옵티머스가 중대한 범죄이고, 그와 연루된 인사들의 면면과 혐의가 중요하다면 윤석열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만 빠진다. 심지어 라임의 김봉현으로부터 향응을 받은 검사들이나 그들의 존재를 은폐하려 했던 윤석열의 행동도 비판의 대상에 오르지 않는다. 왜일까?

 

한겨레나 경향이나 정의당이나 자칭 진보들은 항상 자신들을 비판하는 이들을 두고 문빠라며 비하하고 무시하는 행태를 보여 왔었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문빠라 그런 것이다. 문재인 따위나 지지하는 50대 남성 기득권들이 자신들에 반대하는 자기들을 적대하여 그러는 것이다. 그러면 묻는다. 자신들 자칭 진보를 비판하는 것이 문빠라면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윤석열 개인이나 그 주변의 범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는 자신들은 무엇인가? 심지어 검찰이 판사사찰을 한 사실조차 정당화하며, 검찰이 무혐의 결론을 낸 김학의를 출국금지시켰다고 정부를 공격한다. 이미 안전성에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 월성원전을 조기폐쇄한 것도 정권차원의 범죄다. 왜? 윤석열이 그리 주장하니까. 자칭 진보를 공격하는 이들이 문빠라서 그런 것이라면 그들은 윤빠라서 저따위 주장을 하는 것인가?

 

자칭 진보가 아예 묻어 버린 윤석열의 범죄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판사를 사찰해도 무죄, 주가조작에 사기까지 쳤어도 무죄, 그런 범죄를 검찰총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묻으려 해도 무죄, 한 사람을 언론과 검찰이 결탁해서 범죄를 조작하려 했어도 무죄, 그를 은폐하려 했어도 무죄, 금융사기에 검찰이 가세하고 그를 은폐하려 했어도 무죄, 오히려 그를 징계하려 한 장관과 대통령에게 더 큰 잘못이 있다. 진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작년 추미애 장관이 윤석열을 징계하려 했을 때 정의당의 논평을 기억한다. 한겨레와 경향이 어떤 식으로 기사를 냈는가도 기억한다. 검찰의 범죄는 범죄가 아니다. 윤석열의 범죄는 그 자체로 정의다. 수사해서도 처벌해서도 징계해서도 안된다. 

 

윤석열 없이 과연 진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할 것인가. 그런 정당을 지지하고 그런 언론을 믿고 보는 자칭 진보란 어떤 존재일 것인가. 예전에는 그래도 지지자와 정당을 따로 구분해 봤지만 최근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김학의를 출국금지시켰다고 장관청문회에서 따지겠다는 게 바로 정의당이란 것이다. 당원이나 지지자들이 그에 대해 한 마디 비판이라도 햇었는가. 오히려 류호정에게 부당하게 해고당한 보좌관에게 몰려가 욕설이나 퍼붓는다. 자칭 진보가 자칭 진보인 이유다. 저런 놈들이 진보를 떠든다? 나경원이 애국을 말하겠다.

가장 순수한 감정은 공포다. 여기에 증오를 더해야 한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공포와 증오에는 끝이 없다. 대개는 시작도 없다. 공포라 여기니 공포가 되고, 증오하게 되니 증오가 된다. 상대가 완전히 말살된 이후에조차 공포와 증오는 영혼 속에 깊이 각인된다.

 

그래서 공포와 증오는 단순하다. 논리가 필요없다. 공포는 공포이면 되고 증오는 증오이면 된다. 공포영화에 설명이 너무 많으면 곤란한 이유도 그래서다. 스릴러에서 악역에 대해 너무 많은 설명을 하다 보면 이야기는 깊어지겠지만 대신 스릴러로서 긴장감은 떨어지게 된다. 악은 그냥 악인 것으로 족하다.

 

이른바 보수유튜버에 비해 반대편의 리버럴 유튜버들은 진짜 말이 많다. 너무 많이 많고 논리도 복잡하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이 그만큼 복잡하니까. 반면 보수유튜버들은 논리가 참 단순하다. 저새끼 나쁜 새끼다. 저새끼 하는 짓거리 전부 나쁜 짓이다. 하긴 검찰 관련해서 리버럴 유튜버들의 논리도 거의 비슷하다. 최근 이낙연에 대한 발언들도 거의 비슷한 맥락을 이룬다. 똥파리들이 이재명에 대해 떠드는 것이나 비슷하다. 복잡할 필요가 없다. 저 새끼는 나쁜 새끼고 저 새끼 내버려두면 반드시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저 새끼 조져버리자. 더 이상 필요한가?

 

어째서 유튜브에서는 보수유튜브가 리버럴유튜브에 비해 더 극성인 것인가? 선택적 미디어의 한계인 것이다. 보편적 미디어는 어찌되었거나 보고 싶지 않아도 정해진 내용은 끝까지 지켜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선택적 미디어는 그냥 지 보고 싶은 것만 그 안에서도 골라서 볼 수 있다. 그러면 대중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포와 증오를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계산 없이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케 만들기 때문이다. 저 새끼 죽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자기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테러에 나설 수 있다. 저 새끼로 인해 내가 내 가족이 내 나라와 내 민족이 위험하다는 두려움 하나만으로 어린아이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강간하고 고문하고 학살할 수 있다. 그래서 선동은 공포와 증오로 하는 것이다. 그 공포와 증오를 풀어내는 논리는 그만큼 복잡하고 정교하고 치밀한 반면 무력하다. 

 

그래서 무언가? 내가 자칭 진보 자칭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에 기반해 쓴 글들이 예언이 되는 이유다. 나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증오이기도 하다. 증오는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근거들을 찾아낸다. 내가 생각하는 자칭 진보와 부합하는 근거들이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자신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믿게 된다.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언론이 하는 짓거리다. 보수유튜버들이 생산하고 있는 공포와 증오를 위해 근거를 만들어 제공한다. 한겨레 기자들 가운데도 아마 신의한수나 펜앤마이크, 혹은 가세연 구독자가 적잖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면 그를 뒷받침할만한 기사를 자신들이 생산해서 보충해준다. 아주 악질적인데, 그래서 보수유튜버가 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증언보다 더 자극적인 더 믿고 싶은 더 체계적인 근거들이 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의 알릴레오는 공포와 증오에 맞서는 지성의 마지막 보루인지 모르겠다. 알릴레오가 심심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공포가 없다. 증오가 없다. 자극적인 그 무엇이 없다. 그저 온건하고 치밀한 치열한 지성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기자들도 관심이 없다. 아마 그 내용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기자도 이제는 거의 없지 않을까.

 

그러고보면 내가 김용민 유튜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김용민의 조급함은 공포에서 비롯된다. 증오에서 비롯된다. 이동형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물러나 있고, 김어준은 아예 가지고 놀려 한다. 그래서 그런 선동이 얼마나 먹히느냐면 현재 집권자는 문재인 대통령이고 집권당은 민주당이란 것이다.

 

도고일척마고일장이란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도가 한 자 자라면 마귀는 한 길을 자란다. 보편의 진리다. 그 이유이기도 하다. 공포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드무므로. 아마도 아닐까?

한 쪽에서는 그리 코로나19를 걱정하며 정부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범죄자 동료 지키겠다고 코로나19 의 위협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는 백신의 접종을 거부하겠다 한다. 바로 의사새끼들이다.

 

작년 의사파업 당시 의사들의 선의를 강조하던 버러지 새끼들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코로나 시국을 틈타 코로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더라. 사람이 얼마나 뻔뻔하면 그럴 수 있는 것인지. 의협과 의사는 별개라는 주장은 작년 의사파업으로 개소리임이 드러났다. 작년 의사파업에 다른 목소리를 냈던 의사가 과연 몇이나 되었던가. 의협과 이해를 같이했었고 행동도 같이했었고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동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이다.

 

범죄를 저질러 처벌받았으면 면허도 박탈하고 재발급도 해주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 법안인데 이 새끼들이 지금 사람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고 있다. 바로 의사새끼들이란 버러지들의 민낯인 것이다. 하다하다 이제는 코로나19 백신접종까지 거부하는 지경에 왔는가. 아무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기자란 새끼들은 그를 비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정세균이나 이낙연 같은 어중띤 인간들로는 안된다는 이유다. 확신이 생겼다. 다음 대통령은 보다 더 젊고 선명한 인물이었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아니면 총리라도. 버러지는 버러지일 뿐이다. 답은 명확하다.

자칭 진보는 내가 안다. 그런데 우습게도 자칭 여성주의자들까지 내가 거의 꿰뚫게 되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자칭 여성주의자들은 오히려 하버드대 교수의 논문에 적극 찬동하는 입장일 것이라고. 김재련이 박유하와 주고받는 대화를 보라. 여성가족부장관이 논문을 읽고도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일본군위안부는 매춘부다. 2000년대 초반 이미 자칭 진보에 자칭 여성주의자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란 것이다. 일본군위안부는 일반 매춘부와 다르지 않다. 민족의 희생양이 아니라,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민족범죄가 아닌, 그냥 남성에 의해 희생된 여성들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성매매특별법 이슈가 하필 비슷하게 불거지는 바람에 더 적나라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군위안부를 민족문제로 역사문제로 국가문제로 삼는 것은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일본군위안부도 588이나 자갈마당 같은 현실의 성매매여성들과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성주의자들이 화해치유재단에 적극 합류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의당과 한겨레, 경향이 뻔히 사정을 알면서도 조중동의 정의연공격에 동참했던 것이었다. 정의연을 무력화시키고 위안부문제를 국가와 민족, 역사로부터 분리해내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바라는 진정한 문제해결을 시작할 수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민족의 꽃이 되고 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순결한 꽃으로 가공되고 있다. 일부 인정하는 바다. 다만 그 의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한다.

 

딱 이 사안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정의당과 민주당을 나누는 기준일 수 있는 것이다. 정의당의 진짜 열성지지자는 차라리 잘되었다 기회로 받아들이려 할 지 모른다. 그동안 위안부에 대한 자칭 진보 자칭 여성주의자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예상대로다. 저놈들은 진짜 발전이란 걸 모른다.

 

진보에 대한 편견을 접어야 할 때가 되었다. 진보가 정의이거나 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항상 그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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