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호의 장점이자 단점은 뭔가 티안나게 모든 걸 잘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딱히 잘한다는 인식도 없이 못하지도 않고 크게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데 그렇다고 잘한다기에는 잘 드러나는 게 없다. 무난하다는 건데 이게 정치인으로서는 독이 된다. 국회의원까지는 괜찮아도 지자체부터는 못해서가 아니라 잘 모른다는 점이 선택에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잘되었다는 것이다. 여성단체가 물어뜯으며 언론도 그의 이름을 다루어주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이름이었다. 모르지는 않는데 딱히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고 자세히 알지도 못했다. 아마 우상호 나름대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리라. 승부수라기보다는 그의 소신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 그럴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아직 확실한 증거도 나온 것이 없는데 수사도 안 된 사안을 유죄로 단정짓고 나몰라라 외면하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면서 아직 박원순을 믿는 지지자들에 어필하는 한 편 언론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슈를 선점하려는 것일 게다. 기사야 부정적으로 나오겠지만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그리 부정적으로 볼 만한 사안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선거 때면 사람들은 정치인에 대해 더 깊이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경향이 커진다.

 

문제는 그럼에도 박원순 시장을 계승하겠다는 것이 시장으로서의 새로운 아젠다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서울시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서울시민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박영선이 영리하다는 이유다. 이름이야 충분히 알려졌다. 실력도 역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하면서 충분히 입증한 바 있다. 나머지는 시장이 되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정도다. 우상호가 무난한 이미지에서 차라리 모난 돌이 되어 자기를 알리려 한다면 박영선은 이제까지의 모난돌을 둥근 돌로 다듬어야 하는 상황이다. 과연 우상호가 얼마나 어디까지 박영선과 정책으로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너무 모범생이어도 정치인으로서는 마이너스다. 민주당이 아주 개판치던 시절에조차 우상호는 존재감이 희미했었다. 그런 점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어렵지 않겠는가.

 

확실히 그런 점에서 이재명의 정치감각은 거의 야생동물 수준이다.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일타강사로 나서도 되겠다. 기본소득과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은 지금 거의 대부분 여권의 대권후보들이 물고 있는 이슈다. 각자가 자기 나름의 기준과 지향을 가지고 그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어쩌면 그 가운데 이재명보다 더 옳고 더 바른 더 정확한 식견도 존재할 것이다. 이재명이 옳아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논란의 중심에 이재명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물어뜯고 있는데 정작 그 중심에서 물어뜯기고 있는 대상이 이재명 자신이다. 그런 걸 바로 아젠다라 부르는 것이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모두가 외면할 수 없는 주제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관련한 화두인 것이다.

 

욕먹어도 된다. 비난을 들어도 된다. 옳든 그르든 중요한 것은 자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 고민에 어느새 다른 이들이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흔히 거물이라 부른다. 반대해도 결국 그가 하는 말을 마냥 외면할 수만 없다. 이낙연이 어디서 뭔 소리를 했는지 관심이 없으면 알기도 힘든 반면 이재명은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도 반대편에 있는 정치인과 지지자들을 통해 어찌되었거나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재명이 좋아서 이재명의 소식을 일부러 찾아보고 알겠는가. 남들이 알려준다. 그러면서 각인된다. 대통령이라는 가장 큰 후광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이낙연과 비교되는 부분이랄까.

 

여성단체들이 박원순 시장 발언을 두고 우상호를 공격하는 것이 딱히 나쁜 일은 아닐 것이란 이유다. 지금 우상호에게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슈가 커지고 그를 통해 자신을 알린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다만 그것이 서울시민을 위한 정책으로 인한 것이 아니란 점이 아쉬운 점이랄까. 지지해봐야 서울시민이 아닌 관계로 그냥 지켜봐야 하는 입장이지만. 분발이 필요하다. 정책은 뭔가 심심한 것들 뿐이다. 우상호답달까.

오래전부터 자칭 진보들은 민족이란 개념을 부정하고 있었다. 민족이란 허구다. 민족이란 단지 국가란 권력을 위한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을 배제하고 봐야만 제대로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자칭 진보가 당시 정대협의 활동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이유였다. 민족이 없는데 어떻게 민족에 대한 범죄가 존재할 수 있는가.

 

일본인이란 민족도 없다. 조선인이란 민족도 없다. 단지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 지배자과 피지배자, 유산자와 무산자,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과 계급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면 일본군위안부란 무엇인가? 주류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주변부여성의 일상적인 사례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동두천 기지촌이나 청량리 588이나 대구 자갈마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류남성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주변부여성의 현장 그 자체란 것이다. 조선인 남성들이 팔아치우고, 일본군에 부역한 조선인 남성들이 이용한 그냥 매춘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위안부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역사문제로서가 아니라 성매매라고 하는 현실의 여성문제로써 접근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자칭 진보들의 일본정부의 책임을 부정한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아마 위안부는 매춘부라 주장했던 박유하에 대해서도 많은 자칭진보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작년 정의연 논란 당시 알면서도 조중동의 왜곡된 주장을 인용해서 정의연 공격에 자칭 진보가 앞장섰던 이유이기도 했다. 원래 싫어했었다. 명백한 여성의 문제이고 성매매라고 하는 현실의 구조에서 파생된 문제일 텐데 민족문제로 접근하여 해결하려는 정의연의 행동에 그리 거슬려하고 있었다. 위안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에서 성매매를 아예 없애야 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착취를 근절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위안부문제에 있어서도 일본 정부의 책임보다는 조선 남성들의 책임을 더 크게 물어야만 한다. 그것이 위안부문제의 진실이다.

 

그래서 매춘부가 되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돈을 받고 몸을 팔던 여성들이었으니까. 어차피 많은 성매매 여성들이 혹은 부모에 의해서, 혹은 남편에 의해서, 혹은 일가친척에 의해서, 혹은 인신매매를 업으로 삼은 남성에 의해 팔려서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성매매를 한 장소가 하필 일본군이 만든 위안소였던 것이지 근본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위안부여성들을 마치 민족의 꽃처럼, 민족이 겪은 역사의 수난을 상징하는 존재처럼 여기고 만들고 있다. 오히려 일본의 책임을 지워야지만 진정한 위안부의 진실이 드러난다.

 

자칭 진보와 여성주의자들이 박근혜의 위안부협정에 지지를 보낸 이유였다. 작년 정의연 논란의 목적 역시 정의연이 앞장서서 반대해 왔던 박근혜의 위안부협정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한 목적도 적지 않았었다. 정의연을 부정함으로써 박근혜의 위안부협정을 올바로 다시 평가한다. 위안부협정으로 허구적인 민족의 허울을 치워내고 진정한 본질의 여성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위안부협정 이후 화해와치유재단에 많은 여성주의자가 참여한 이유이기도 했다. 일본정부의 책임을 지워야 진정한 문제의 본질이 보인다.

 

지금 미국에서 위안부를 왜곡한 교수를 지지한다며 메일을 보내는 놈들 가운데 자칭 진보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을 자신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또한 여성주의자일 것이다. 어째서 자칭 진보가 이념적으로 정반대편에 있을 국민의힘에 더 친근감과 동질감을 느끼는가. 이해가 될 것이다. 하필 여성주의자들이 주류가 되어 버린 지금이라.

 

아마 정의연 논란 당시에도 이 비슷한 내용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더 염치없는 것들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정의연 활동에 연대하며 지지를 보낸 것도 바로 이들 자칭 진보였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과 활동에 진정성따위 없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뒤에서 하는 말과 앞에서 보이는 행동이 다르다. 그래서 자칭 진보다. 예나 지금이나.

그러고보니 지난 정의연 논란 당시 자칭 진보는 선택했을 것이다. 위안부문제의 해결에는 원래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과 외교적으로 풀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역사문제로써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이었고 후자가 정의연이었다. 그리고 자칭 진보는 당시 정의연의 내부사정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수구언론의 보도를 뒤쫓으며 선택을 했었다. 정의연은 버린다.

 

원래는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에 부정적이던 여론이 언론의 정의연에 대한 집중공격 결과 정의연을 부정하고 위안부협상에 대해 재평가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 십 년 간 이어져 온 수요집회며 소녀상까지 철저히 조롱당하고 모욕당하며 부정당하기에 이르렀다. 누가 그런 상황을 만들었는가? 시작은 조중동이었지만 사정을 알면서도 철저히 그들의 논리를 쫓았던 자칭 진보에 있는 것이다.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게 더 괘씸한 이유다. 그 결과 위안부문제는 불쾌한 기억과 더불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하긴 그래서일 것이다. 최근 위안부 이슈에 대해 자칭 진보가 전처럼 적극적이지 않은 것은. 오히려 한겨레는 일본의 입장을 고려해서 과거사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기사를 노골적으로 내보내고 있을 정도다. 무슨 의미인가? 반정부를 위해서라면 친일도 상관없다. 반정부를 위해서라면 위안부문제도 얼마든지 일본의 입장에 맞출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이며 언론의 공정성이고 객관성이다. 대단한 자칭 진보이지 않은가?

 

원래 자칭 진보의 입장이기도 했었다. 정확히 자칭 진보를 장악한 여성주의의 입장이다. 남성이 잘못이지 무슨 일본의 잘못인가? 조선의 남성들이 조선의 여성들을 팔아치운 것이지 위안부 문제에 무슨 민족까지 개입될 여지가 있는 것인가? 아주 오래전 자칭 진보들과 논쟁하며 들었던 이야기였다. 나쁜 것은 조선의 남자들이지 일본이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정의연 공격에 앞장섰던 것일 수 있겠다.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옳았다.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더 나았다. 실제 성한용은 이명박이 유죄판결을 받는 날 그에 대한 안타까움을 장문의 글을 통해 드러낸 바 있었다. 노무현이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온정 가득한 단어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솔직하게 이명박근혜시절이 더 나았다며 고백하는 기자도 있었다. 과연 한겨레 만이겠는가. 정의당도 이명박근혜 시절이 더 나았다. 저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다. 진심일 것이다.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려면 최대한의 사실에 최소한의 거짓만을 섞어야 한다. 확인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사실을 최대한 섞어야 사람들은 진실로 믿을 것이고 그때서야 최소한의 거짓말이 사실마저 거짓으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고수일수록 더 많은 사실과 더 적은 거짓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이라 믿도록 만든다.

 

한 사람이 하면 거짓말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면 어느새 사실로 뒤바뀌게 된다. 문 밖에 호랑이가 있다. 한 사람이 말하면 부정하고, 두 사람이 말하면 의심하고, 세 사람이 말하면 믿어 버린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삼인성호다. 언론 하나가 독감 백신 때문에 사람이 죽어간다고 하면 황색언론이라며 모두가 비웃을 테지만 모든 언론이 한 목소리로 독감 백신을 맞은 뒤 사람이 죽었다 하니 십 수 년 간 검증되어 온 독감백신이 한순간에 사람을 죽이는 위험한 약물이 된다. 그나마 한국 언론의 신뢰성이 바닥이라 별 일 없이 지나간 것이지 아니었으면 코로나19의 재확산 와중에 독감의 감염까지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KBS의 박대기 기레기가 가짜뉴스에 대한 처벌로 혹시 모를 하나의 진실이 가려질지 모른다며 우려하는 트윗을 올린 것을 보았다. KBS의 뉴스가 어째서 그따위인가 한 마디로 설명해주는 트윗이었을 것이다. 99개의 거짓을 보도해도 하나만 사실이면 괜찮은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가짜뉴스를 사실처럼 보도하고 모든 언론이 따라가며 사실로 만들어 놓으면 99개의 거짓은 그야말로 99개의 사실이 되어 버리는 것 아니던가. 99개의 사실 가운데 하나의 거짓이 사실을 오염시켜도 심각한 상황인데 99개의 거짓을 언론의 담합으로 사실로 만들고는 그것을 하나의 사실과 섞는다. 그 해악은 어찌할 것인가.

 

KBS의 수신료를 절대 올려서는 안되는 이유일 것이다. 아니 아예 이 참에 수신료를 폐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저따위 놈들이 공영방송에서 기자질을 하고 있다. 99개의 거짓에 하나의 사실만 보도해도 가치있다는 쓰레기들이 기자랍시고 취재도 하고 보도도 내보내고 있다. 그런데 수신료를 올리라고? 거짓을 사실처럼 보려면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가 그나마 해악이 적을 것이다. 과연 KBS의 뉴스에 그만한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인가.

 

그나마 자기 주장이 상당히 객관적이고 진실을 담은 옳은 주장이라 여겼으니 당당히 모두가 보는 공간에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박대기라면 대중 사이에 인지도도 낮지 않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긴 KBS만일까. 가짜뉴스를 내보내도 정부만 비판할 수 있으면 된다.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가짜뉴스라도 서슴없이 내보내야 한다. 그게 참된 기자정신이다. 자칭 진보 기자들이 주장하는 언론의 자유인 것이다.

 

어째서 언론이 저토록 가짜뉴스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해 민감한가. 당장 KBS부터 한동훈 구하겠다고 검언유착 보도에 가짜뉴스를 섞어 빌미를 주었던 전력이 있었다. 가짜뉴스에 대한 사과라고는 없던 KBS가 그때만은 유독 빠르게 사실을 인정하고 공개 사과까지 하고 있었다.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언론이 언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언론이 언론의 보도를 검증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저널리즘 토크쇼j도 알아서 폐지했었을 것이다. 그것이 KBS고 박대기라면 그 가운데서도 꽤 높은 곳에 있을 것이다. 차라리 해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KBS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쓰레기에 미안할 정도다. 더러운 버러지새끼들일 것이다.

나는 정치인의 선의따위 믿지 않는다.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이나 양심이 아닌 오로지 욕망이라 믿는 편이다. 이른바 권력의지란 것이다. 내가 권력을 가지려는 이유, 내가 권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 그를 위해 내가 치를 수 있는 대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 정치인 문재인에 대해 어떤 신뢰도 기대도 가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사람이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욕망을 전혀 모르겠다. 그런데 하필 경쟁상대들이 박근혜와 안철수였으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문재인이 저딴 인간들만 못하겠는가. 딱 2012년까지 내가 문재인이란 인간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지금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예 알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문재인이란 정치인에게 과연 인간으로서의 욕망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한 것인가. 유시민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더 적극 동의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문재인에게는 흔히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어둠이란 게 없다. 사실 사람에게 어둠이 없으면 평면이 되어 버리기 쉬운데 오히려 어둠이 아닌 밝음으로 입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문재인 만은 욕망이 아닌 선의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앞서 '편'이란 표현을 썼던 것이다.

 

노무현은 오히려 정치인으로서 보다 격렬하게 욕망을 드러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그가 이루고자 했던 바들, 그를 위해 자신이 치러야 하는 대가들에 대해 너무나 선명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고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 빛이 너무 강해서 어둠이 아닌 것들마저 어둠으로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문재인은 담담히 자신의 목적보다 주어진 역사적 사명과 책무에만 충실하려는 것은 아닌가. 그는 어쩌면 이 시대란 요구를 비추는 거울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담담하게 크게 요동치는 법 없이 그냥 일상처럼 지지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대한민국 정치사에 문재인과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명한 권력의지 없이 권력의 정점에 선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경우일 테니까.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대의 요구로 거대한 사명과 책무를 짊어진다는 것은 신화나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이고, 그런 바람을 거부하지 못한 선의가 자기 안에 그런 시대를 담아내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지지자들조차도. 똥파리들이 설치는 진짜 이유일 터다. 딱 자기들 수준에서 정치인을 이해한다. 문재인을 위해서 남경필을 지지한다? 잘하면 민주당을 지지해서 정의당에 표를 주겠다는 말까지 나오겠다.

 

이낙연에 대한 불만들을 곱씹다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올리고 만다. 항상 민주당을 불편하게 욕하며 지켜보기만 하던 내가 당적은 버렸어도 민주당의 행보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민주당에 대한 신뢰로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주당의 정치인으로서의 욕망이 문재인 대통령의 선의에 닿아 있는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 없이는 민주당도 민주당 정치인들도 없는 것이다. 과연 그 절망과도 같은 벽을 이낙연이든 이재명이든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이낙연의 조급함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란 이유다. 새삼 확인한다.

조국 전장관이 구상한 검찰개혁은 상당히 온건한 것이었다. 어차피 아직 경찰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검찰이 독점한 수사권 가운데 일부만 경찰에게 넘기고, 검찰도 실제 일선에서 일하는 평검사들의 지위와 권리 등 조직의 민주화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정도만 되어도 검찰 내부에서 충분히 자체적인 개혁이 가능하다. 문무일이 참 개자식이기는 했는데 그런 점에서 교활하게 능수능란하게 청와대와 법무부와의 관계를 잘 조율하고 있었다. 이 정도만 되어도 검찰은 알아서 열심히 잘 할 것입니다. 지지자들도 그런 검찰의 모습에 의심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적폐수사를 앞장서서 지휘했던 윤석열이 후임이지 않은가.

 

문제는 정치검찰로써 정치력을 십분 발휘하여 저 조국마저 농락했던 문무일과 달리 윤석열은 정치력따위 찾아볼 수 없는 그냥 일선의 수사검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워낙 한직만 떠돌았던 탓에 검찰총장으로서 정치검찰이 드글한 중앙에서 살아남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한 정치력을 학습하고 단련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었다. 칼은 뽑아서 휘두를 때보다 아직 칼집에 있을 때 더 위협적이다. 아무리 검찰의 권력이 막강해도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정권을 가진 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검찰도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살아있는 권력과 정면으로 충돌해서 굳이 검찰조직이 피해를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적당한 수준의 개혁이라면 오히려 검찰 스스로가 주도하여 명분도 얻을 수 있고, 얼마든지 정권이 바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탈을 쓴 멧돼지는 그동안 자기가 해 온 대로만 하면 대통령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것이란 확신마저 가지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인 박근혜와 이명박을 기소해 감옥에 보내고, 대법원장마저 재판에 넘긴 자신들인데 두려울 것이 무에 있겠는가.

 

그래서 이 꼬라지가 난 것이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다. 적당히 이 정도 선에서 검찰과 타협을 봐도 좋겠다. 시작이 중요하지 처음부터 다 이룬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다. 검찰 체면도 적당히 봐주고 현실적인 여러 사항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정도로는 지금 검찰이 하는 꼬라지로 봐서 너무 부족하다. 이런 정도 개혁으로는 검찰이 가진 무소불위의 힘을, 더구나 그를 이용한 온갖 부정과 비위와 범죄들을 예방하는데 턱도 없이 부족하다. 어찌해야겠는가? 그냥 검찰로부터 아예 수사권을 빼앗고 수사청과 기소청을 분리하자. 말하자면 덕분에 윤석열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검찰의 마지막 총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누구의 공일까? 바로 윤석열의 공이다.

 

한겨레가 발악하는 이유다. 한겨레 젊은 기자들이 대놓고 다른 보수언론까지 동원해가며 자기들 선배를 공격한 이유인 것이다. 윤석열을 지켜야 한다. 윤석열 검찰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그만큼 상황이 다급해졌다. 공수처가 윤석열 검찰과 협력하겠다 하는데 윤석열 임기는 올 7월이면 끝이다. 그때부터는 다른 검찰총장이 윤석열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과연 그때도 새로운 검찰총장은 윤석열처럼 그저 무식하게 들이받기만 하는 인물일 것인가. 차기 대권도 민주당에서 가져갈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금 윤석열처럼 정권교체만 믿고 마냥 정부와 여당과 적대할 수만 있을 것인가. 검찰 없이 언론따위가 무슨 수로 정부를 취재하고 감히 비판씩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이제 검찰은 수사와 기소를 모두 마음대로 하는 조직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정의당이 미쳐 날뛰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석열 검찰이 그대로 있어야 자신들이 진보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진보란 민주당을 공격하기에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어설프게 타협하며 끝날 뻔한 검찰개혁을 수사권의 분리라는 정도를 추구하도록 만든 최고의 공로자일 것이다. 아마 그것을 검찰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검찰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다. 윤석열이 자기 사람만 챙기며 검찰을 수단으로 동원하지 않았다면 검찰이 이런 상황에까지 놓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법원도 불만이다. 윤석열에 보조를 맞추다가 초유로 판사가 탄핵되었고 대법원장까지 탄핵 대상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동안 애써 감춰 온 법원의 속내가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 법원이 정부와 여당에 정면으로 적대한다? 이재명이 대통령 된 이후를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이재명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보다 과두정체제에서의 독재자가 더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런 때는 또 유용해 보인다. 얼마나 피바람이 불까? 이재명의 높은 지지율에는 윤석열과 김명수가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으로서도 상당히 큰 희생을 치른 결과였을 것이다. 하마트면 파로스의 승리로 끝날 뻔했는데 마지막에 검찰개혁법안으로 거의 완전에 가까운 성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위험하고 부담스런 대상을 개혁하는데 조국과 추미애를 희생양으로 넘겼으면 상당히 남는 장사인 것이다. 전투에서는 윤석열이 이겼어도 전쟁에서는 검찰이 패했다. 그런 사실조차 아직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윤석열이고 한동훈인 것이다. 어쩌다 검찰에서 저런 정치력 고자들이 실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인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유형의 검찰총장과 그 측근들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검찰개혁을 완결시킨다. 최고의 인선이었던 것이다. 윤석열의 검찰총장 임명은. 그 끝이 보인다.

2012년 문재인은 그야말로 등떠밀리다시피 출마한 아직 야인에 지나지 않았었다.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그저 민주진영에서 나오던 이야기들을 종합한 이상의 전혀 어떤 새로운 주장도 비전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진영에 마땅한 대선후보가 없으니 노무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이전의 수많은 대선후보들처럼 바람을 타고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인으로서 아무리 훌륭해도 과연 정치인으로서도 그만한 역량과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처음 문재인이란 인물은 내게 안철수와 동급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런 문재인에 대한 내 평가가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된 것은 다름아닌 민주당 당대표 선거에 문재인이 출마하며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아젠다를 들고 나오면서부터였다. 그것은 그동안 김대중 이후 민주당이 추구해 온 정책적 지향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그동안 아직 누구도 구체화하여 말한 적 없는 문재인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민주당의 당대표로서 민주당을 개혁하기 위해 내가 그토록 꼴보기 싫어하던 민주당의 구태들의 공격에도 흔들림없이 밀고 나가는 모습에서 그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이 사람이라면 대통령이 되어서도 무언가 남들이 못하는 것들을 이루어 줄 수 있겠다. 어쩌면 노무현보다도 더 능숙하게 굳건하게 내가 바라는 개혁을 보여줄 수 있겠다. 아마 당시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지지하게 된 유권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 기대해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고구마처럼 느리고 답답하다고 비전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의 뒤만 따라갔던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멈춰서서 지지자들과 눈을 마주하며 머뭇거리는 모습도 거의 보여 준 적 없었다. 그냥 묵묵히 자기 길을 간다.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는 이미 정했고 그 과정에서 사소한 장애들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때로 그로 인해 걸음이 늦춰지기도 하고 때로 조금 멀리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방향은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에까지도 40%를 넘나드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문재인이란 인물을 신뢰할 수 있다. 믿고 기대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교감에서 나오는 인정이 아닌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크고 단단한 그의 뒷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감정이었다. 동정을 구하지도 연민에 기대지도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대통령으로서 그 자리를 당연하게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낙연이 문재인과 같다고? 그래서 이낙연이 차기 대선후보로서 국민들에게 어떤 새로운 아젠다를, 자기만의 목적과 지향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있었는가? 그를 위한 자신만의 신념과 의지를 제대로 보여 준 적이 있었는가? 하다못해 문재인 대통령의 후광으로 유력 대선주자로 꼽하고 초거대여당의 대표가 된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뒷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조금 느려도 이낙연만 믿고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이낙연만 믿고 지지하며 뒤따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이나 기대가 없다. 그래서 이낙연더러 그저 문재인 대통령의 뒤라도 열심히 잘 따라가라 주문하는 것이다. 자기 것이 없으면 남의 것이라도 잘 따라가는 것도 기술이다.

 

이낙연에게는 미래가 없다. 내가 믿고 기대할만한 어떤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믿었다. 그래도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따라서 가장 잘 이어받아 완성할 최적의 인물은 이낙연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그동안 별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이낙연에게는 없어도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있다. 이낙연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문재인 대통령만 잘 따라가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재명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런 막연한 믿음을 산산이 부숴 버린 것이 바로 '사면론'이었다. 하필 문재인 대통령과 차별화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고작 전직대통령에 대한 사면이라는 시대를 거스르는 구태의 반복이었는가. 자칭 문빠라는 놈들이 그런 사면론조차도 대통령과 상의한 결과일 것이라 떠들어댔을 때는 어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대통령이 그따위 정치적 유불리를 위해 명백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그놈들을 사면할 인물로 보였던 것이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어이가 없는 것이다. 이낙연은 문재인과 같다. 문재인도 이낙연과 같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느리다고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신중하다고 과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굳이 성급한 임기응변에 기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옳다면 언젠가 당연하게 목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누가 오해하든, 누가 자신에 적의를 가지든, 그래서 방해하며 막아서든 진실은 반드시 정의에 이르고 만다. 이낙연과 비교가 되는가? 아직 이낙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입장에서 가장 어이없는 주장인 것이다. 그것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라는 놈들 입에서. 이낙연따위가 문재인 대통령과 같다.

 

아직 내가 보기에 민주당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비견할만한 인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실력이 뛰어난 인간도 있고, 남달리 정의감과 행동력이 돋보이는 인물도 있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인물도 있는데 그 모두를 아우르며 한 나라를 이끌 리더로써 모든 것을 맡겨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이재명은 조금 더 자기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불안하고 두려우니 자꾸 다른 수단에 기대려는 모습을 보인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재명과 이낙연을 딱 반씩만 섞어서 두 배로 튀겨 놓으면 괜찮겠다 여겼었는데.

 

자칭 문빠, 흔히 문파리라 불리는 놈들의 한계인 것이다. 문재인을 지지한다고 이재명에 대한 증오심만 키우다 보니 정작 문재인 대통령마저 이낙연과 비슷한 급으로 낮추고 만다. 문재인 대통령을 위한다고 남경필을 지지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위한다고 사면론을 지지하고, 심지어 그 사면론이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라는 국민의힘의 주장마저 답습한다. 대통령은 열외다. 이낙연과도 이재명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한민국 정치사에 유독 홀로 튀는 인물이란 것이다. 애써 비교하려니 그 격을 떨어뜨린다. 문빠가 맞기는 한 것인지. 웃다 죽을 지경이다.

문득 생각했다. 어째서 자칭 진보란 것들은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면서 정작 검찰과 법원, 언론, 그리고 보수야당은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일까. 오로지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이 권력비판이다. 심지어 이명박근혜 당시에도 이렇게 집요하게 지독하게 권력을 비판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정부에 대해 자칭 진보들이 비판이랍시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사람 몇이나 될까? 강준만이니 홍세화니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번 정부 들어서야 알았다.

 

어떻게 하면 저들의 사고와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뇌를 저놈들 수준으로 퇴화시켜보자. 스스로 자신의 뇌가 구더기라 최면을 걸어보자. 그리고 답을 얻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쉽게 혼동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절대 그럴 리 없음에도 그 절대란 단어마저 무색케 만든다. 권력과 권리를 혼동한다. 비슷하게 저울 권자 들어가고 ㄹ로 다음 음절 시작하니까 비슷하지 않겠는가. 다만 권력이라면 어쩐지 부정적으로 느껴지고 권리라면 마땅히 보호해 주어야 할 무엇으로 느껴진다.

 

사법시험 존치론을 주장하던 놈들의 논리를 돌이켜 본다. 시험 잘 쳐서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과 지위와 권력과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는 건 능력에 따른 권리에 해당한다. 그에 반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국민들을 속여서 표 많이 받아 얻는 선출직 따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검찰은 시험 잘 봐서 자기 능력으로 얻은 자리고,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국민들 잘 속여넘긴 대가로 얻은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비판해야 하고 권리는 보장해주어야 한다. 답이 나오는가? 보수정당은 원래 학벌과 스펙 좋기로 유명하지 않았는가. 그에 비하면 경희대 나온 대통령따위. 대형 로펌 출신도 아닌 인권변호사따위. 그것도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활동했다.

 

즉 자칭 진보들이 보기에 윤석열 검찰이 누리는 특권은 권리인 것이다. 라임 관계자에게 뇌물과 향응을 제공받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해도 그조차 열심히 노력한 결과인 것이다. 보수정당 정치인들이 성폭행을 하든 성추행을 하든 노력 않고 시민단체나 만들며 시간을 낭비한 박원순 따위에 비해 훨씬 인정되어야 할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뇌물도 부정도 비리도 협잡도 그래서 검찰이든 법원이든 언론이든 보수정당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거만 잘 치렀을 뿐인 민주정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떠올려 보라. 한겨레가 권력비판 못한다고 이렇게 안달한 적이 있었는가.

 

한겨레를 비롯한 자칭 진보들이 필사적으로 검찰과 법원의 편을 드는 이유인 것이다. 아마 최순실이 아니었다면, 아니 박근혜가 서울대 출신만 되었어도 나라를 팔아먹어도 참된 진보라고 찬사를 늘어놓았을 자칭 진보란 것이다. 윤석열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었다면. 뇌가 구더기가 되니 그 사고수준이 이해가 된다. 조선일보와 같아지고 싶다. 한겨레가 조선일보와 다른 것이 불만이다. 그 수준을 이해했어야 하는데.

 

안다. 나는 자칭 진보를 증오한다. 혐오한다. 경멸한다. 무시한다. 오로지 편견과 오해로 자칭 진보를 보려 하고 있다. 문제는 그래서 뭐 얼마나 잘못되었느냐는 것. 내가 자칭 진보에 대해 예언한 것 가운데 틀린 게 몇이나 될까? 거의 다 맞추지 않았는가? 나 자신도 편견과 오해와 감정의 결과라 인정하는데도 그렇게 쓴 글들이 거의 예언이 되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래 자칭 진보란 그런 놈들이었다. 20년이 넘어가는데 달라진 게 없다. 대단한 버러지새끼들이다.

장애인 미혼모들을 '비정상'이라 비하한 김종인의 발언에 대한 자칭 진보들의 태도가 흥미롭다. 여성들이다. 장애인들이다. 그야말로 이 사회의 약자이고 소수자들이다. 그런데 그를 비정상이라 말한 김종인의 발언에 대해서 자칭 진보들은 너무 냉정하고 침착하다. 심지어 김종인과 국민의힘의 해명조차 너무나 관대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왜?

 

가짜니까. 거짓말이니까. 말했잖은가. 저들에게 진보란 자신을 치장하는 장신구 같은 것이다. 어쩐지 진보적인 주장을 하는 자신이 그럴싸해보여 그리 연기해 보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국민의힘이 가진 기득권이다. 그들이 그동안 누려 온 주류라는 위치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행도 성추행도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보다 못하다 여겨지는 영원한 비주류 민주당 뿐이다. 박원순도 국민의힘 소속이었으면 뭔 짓을 저질렀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이 하도 시끄러워 꽤나 논란이 되고 있을 줄 알았더니 벌써 자칭 진보들은 납득하고 끝나 버렸네. 그런 정도의 사안이란 것이다. 국민의힘이니까. 민주당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놈들의 진보란 진정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뇌가 구더기인 줄 아나. 민주당이었으면 다음 대선까지 끌고 갔다. 자칭 진보가 버러지인 이유. 사람새끼가 아니다.

한겨레를 포함 자칭 진보도 오래전부터 공수처 설치와 검찰개혁을 주장해 왔었다. 다만 현정부의 공수처와 검찰개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것을 넘어 적대적이다. 공수처도 검찰개혁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저들이 비판하는 지점을 봐야 한다. 검찰 인사를 하면서 윤석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감히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을 징계하려 했었다. 감히 대통령이 그 징계에 결제까지 했었다. 감히 검찰의 수사와 기소에 대해 왈가왈부 가타부타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엄하게 감히 입법부따위가 검찰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중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검찰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자. 감히 대통령도 검찰에 대해서는 손대서는 안된다. 검찰 인사도 마음대로, 예산도 마음대로, 입법부도 행정부도 검찰에 관여하지 말고, 사법부도 검찰이 마음대로 사찰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즉 검찰을 사법부의 위에 두어 행정부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 사법부 위에서 검찰이 입법사법행정을 보도 감시하며 수사할 수 있도록 하자. 누구도 감히 검찰을 수사하거나 감사하거나 징계할 수 없도록 하자. 그러므로 검찰이 곧 공수처가 된다. 

 

무지렁이 국민따위가 선출한 권력은 무시한다. 어리석고 무지한 국민 나부랭이들이 선출한 권력이 아닌 자기 스스로 실력으로 쟁취한 검찰권력이 그 위에서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윤석열 대권론 따위가 아니다. 대권 위에 검찰을 두어야 한다. 

 

최근 한겨레를 비롯한 자칭 진보들의 검찰에 대한 주장들을 보면 결국 결론은 이렇게 내려진다. 정부의 정책마저도 검찰의 허락을 받고서 그 용인 아래 추진되어야 한다. 물론 그런 검찰의 밑닦개는 한겨레 자신이 될 것이다.

 

시험봐서 좋은 대학 들어갔고 기자까지 되었단 사실 하나가 유일한 자랑거리인 버러지들이라 그렇다. 아니라고? 그러면 기사는 왜 그따위로 쓰는데. 말과 글은 또 왜 그따위로 나오는데.

 

독자를 먼저 부정한 것은 한겨레란 것이다. 나야 일찌감치 탈출했지만 아직도 50대 남성 기득권이란 소리나 쳐들으며 신문 읽어주는 사람들은 그저 불쌍하달 밖에. 늬들은 위한 신문이 아니라는데도 굳이 찾아 읽어준다.

 

자칭 진보에게 검찰개혁이란 뭐다? 윤석열이 곧 검찰개혁이다. 윤석열과 그 가족, 측근들의 범죄들을 은폐하는 것이 곧 검찰개혁인 것이다. 그래서 김학의도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한겨레와 정의당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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