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정당과 자칭 진보의 가장 큰 공통점 둘을 꼽으라면 첫째가 학벌이고 둘째가 개신교다. 개신교 자체가 미국에서 직수입된 것이어서인지는 몰라도 특히 보편적 가치와 한참 거리가 멀던 군사독재시절 개신교 일각은 상당히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방공을 앞세운 군사독재에 부역한 개신교세력은 그보다 더 압도적이었다.

 

잠시 자칭 진보들과 어울리면서 깨달은 사실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가 많다. 심지어 진보의 이념조차 개신교의 신앙처럼 엄숙하고 경건하게 추구하려는 놈들이 많이 보인다. 자칭 진보에게서 흔히 보이는 이념의 경직성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성주의가 보이는 배타성과 공격성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여성주의를 개신교의 신앙으로 바꾸면 저들의 생각과 행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칭 진보의 윤석열에 대한 추종조차 종교적 열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그들에게 세상은 선과 악으로,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로지 신앙의 증거만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 것이라 믿고 있다.

 

개신교의 광화문집회에 대해 자칭 진보들이 오히려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이유인 것이다. 그들은 진보란 신앙을 가졌으면서 개신교라는 신앙을 믿는 신자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자칭 진보와 수구를 이어주는 고리인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이라는 학벌과 종교라는 신앙을 통해서. 그래서 자칭 진보는 전광훈에 대해서조차 개신교 목사라는 이유로 우호적일 수 있다. 전광훈에게 경찰이 수갑을 채운 것은 인권침해다. 당시 전광훈이 저지른 일과 이후의 행동들을 보라. 자발적 출석이었다고? 그보다는 목사란 신분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이른바 진보적인 시민단체, 지식인들에 대해 더이상 기대와 믿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유인 것이다. 그들 대부분의 학벌과 종교를 보면 그 답은 바로 나온다. 인권위 나부랭이가 수사권도 없이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여부를 판단해서 발표한다. 어째서? 왜? 권익위에서는 현직 검사가 정치적인 의도로 야당에 김학의의 출국금지에 대해 넘긴 것을 공익제보라 판단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째서 한겨레나 경향, 정의당은 민주당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일까. 방향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민주당을 혐오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국민의힘과 손잡을 이유를 찾기 위해서도 있다. 민주당이 악이 되어야 자신들이 국민의힘 편에 서는 것이 정당화된다.

 

지금에 와서는 이명박근혜도 크게 잘못한 것 없고, 조윤선과 최순실도 오히려 억울하다. 사법농단도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니다. 노무현 전대통령과 이명박에 대한 전혀 상반된 한겨레의 평가를 떠올려본다. 유죄판결을 받은 이명박은 공과 과를 판단하고 노무현 전대통령은 차라리 죽으라며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했었다. 원래 그런 놈들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민주당은 악이어야 하고 민주당이 하는 모든 것은 죄악이어야 한다. 김학의도 출국금지시켜서는 안되었고 방사능이 새어나오는 원자력발전소도 멈춰세워서는 안됐었고 코로나 방역도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위안부문제도 그냥 박근혜 위안부 협상으로 끝냈어야 했다. 

 

오히려 전광훈을 감싸는 인권위의 결론을 보면서 작년 개천절 집회를 두고 발악하던 자칭 진보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정확히 여성주의가 장악한 자칭 진보의 태도였을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가. 한 번 자칭 진보인사들 종교를 살펴보라니까. 윤미향이 자칭 진보로부터도 공격받은 이유는 민주당에 몸담았다는 이유 하나였었다. 정의연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 수구의 공격에 동참했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것이 진실이다.

리더란 말 그대로 남들보다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다. 당연히 얼굴을 볼 일이 없다. 길을 가는 동안 내내 사람들은 리더의 뒷모습만 봐야 한다. 리더의 뒷모습만 보며 리더가 가는대로 따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리더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하나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쉴 때, 그리고 하나는 뭔가 잘못되어 사람들의 의견을 구할 때, 그러나 그런 상황에조차 리더는 온전한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에 보여서는 안된다.

 

조조가 양수를 죽인 이유였다. 감히 자신의 속내를 엿보았다. 감히 자신을 마주하고 자신을 이해하고자 했다. 군주는 두려움과 경탄의 대상이어야지 이해의 대상이어서는 안된다. 이해하려는 순간 군주는 신하와 같은 눈높이로 내려오게 된다. 신하가 군주를 이해하고, 군주가 신하를 이해하고, 그 순간 신하는 더이상 군주에게 복종할 수 없고, 군주 역시 더이상 신하 위에 군림할 수 없다. 그래서 군주는 무오류의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명백히 틀린 순간에도 절대 군주가 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올린 것은 선조 자신이었음에도 아주 오래전 만호로 추천한 것을 빌미로 류성룡이 그를 천거한 책임을 온전히 뒤집어 써야 했었다. 죄인 이순신을 수사로 올린 것은 선조가 아닌 류성룡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벌써 수 년 전부터 선조는 이순신을 눈여겨보고 중용하려 하고 있었다.

 

카리스마란 한 마디로 자발적 복종이다. 알아서 상대를 리더로 인정하고 그 아래서 자신의 모든 판단과 결정을 맡기려 하는 것이다. 때때로 얼굴을 마주하고 상의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다. 기꺼이 그로 인한 모든 결과에 승복할 수 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유비가 그토록 수도 없이 패배를 겪고 끝내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였다.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유비란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해가 아니다. 이해였으면 유파처럼 도망쳤거나 진군처럼 일찌감치 다른 사람으로 갈아타고 말았다.

 

내가 여기서 이해하네 어쩌네 말하는 자체가 정치인으로서 굴욕일 수 있다는 이유인 것이다. 이해라는 말에는 연민이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대를 어느 정도 낮추어 보기에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에 대해서도 자기 기준으로 이해란 것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항상 옳을 것도 기대하지 않고, 맞을 것이란 생각도 가지지 않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그가 틀릴 것을 전제하고 어째서 그래야 했었는지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려 한다. 리더인가? 그런 사람을 끝까지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인가.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맡길 수 있을 것인가.

 

리더에게는 무능이 더 큰 악일 수 있다는 이유인 것이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사람을 끝까지 믿고 따라도 좋은 것일까? 이 사람의 뒤만 보고 따라가도 과연 온전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새로운 낙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무능한 리더의 등만 보고 따라가다가 사라진 무리가 기록되지 않은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내 운명까지 맡겨야 한다. 못 할 노릇인 것이다. 리더는 이해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시키는, 즉 동의와 복종을 받아내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이낙연에 대해 이해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더욱 그를 리더로서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이낙연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이재명에게 역전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재명은 때로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곳을 건드리며 이슈를 주도해 왔었다.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부터 시작해서 홍남기의 재경부에 대한 공격까지, 문재인 정부의 개혁과 적폐청산을 이어가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과제를 찾아 사람들에게 제시한다. 그 논란의 한가운데 있으려 한다. 그러나 이낙연은 아니다. 이낙연은 한 번도 180석이라는 의석을 가지고서도 사람들보다 앞서서 걸음을 내딛고 그 중심에 서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논란이 다 지나고 나면 그 뒤에야 느긋하게 뒤따라가는 타입이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리더가 아닌 선대로부터 신분을 물려받았을 뿐인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민주당 180석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민주당의 개혁과제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내놓은 것이 이명박근혜의 사면이었다. 과연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이낙연이란 인물에 대해 무엇을 느꼈겠는가.

 

압도적인 대군을 거느리고서도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신중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것이다.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서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사려깊은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개헌을 제외하고 민주당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한 현실에서 민주당은 과연 이 의석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마저 앞장서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리더인 것이다. 거기서 이재명과 이낙연의 차이가 갈린다. 경기도지사로서 때로 범위와 한계를 넘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려 하는 이재명과 당대표로서 항상 머뭇거리고 있는 이낙연의 차이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모두의 판단이 끝난 다음에 뒤늦게 움직여서는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 판단도 행동도 다른 사람보다 느린데 어떻게 그를 리더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낙연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내가 때로 불쌍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차기 대선주자 이낙연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안되는 것이다. 리더가 불쌍하게 느껴지면 어쩌란 것인가. 앞으로 수 천만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인데. 행정가로서 신중함은 미덕이지만 리더에게 신중함은 우유부단함이다. 하물며 남보다 앞서가지도 못하고 자꾸 뒤만 돌아보는데 답이 있을까? 그 뒤돌아 보는 얼굴마저 항상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결국 이재명밖에 없는 것일까? 그래도 잘만 키우면 차기를 노릴만한 인재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아주 희망이 없지 않기는 하다. 하지만 당장 이재명을 대체할 만한 인물을 민주당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낙연이 조금만 과감했다면. 조금만 더 무모했다면. 그 과감함과 무모함을 자신감과 능동성으로 만들어줄 힘을 민주당이 이미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면. 행동보수가 아니라 그냥 겁이 많았던 것은 아닐까. 겁쟁이도 리더로서 실격이다. 참 안타까운 것이다.

최초 검찰의 김학의에 대한 무혐의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따라서 재수사가 필요했고, 그를 위해서는 김학의가 도피하지 못하도록 출국부터 금지시켰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대검에서 김학의에 대한 출국금지 요청을 묵살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면 법무부의 출국금지를 옹호하게 되는 것이므로 언론이라면 절대 그래서 안된다.

 

어찌되었거나 검찰이 무혐의 판단을 내렸으므로 김학의는 당시 피의자도 아닌 무고한 일반인이었다. 그러므로 법무부는 시민으로서 김학의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고, 따라서 김학의의 출국금지를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한 것은 잘못이다. 심지어 김학의에 대한 재수사를 대통령이 지시했으므로 대통령에게까지 책임이 돌아갈 중대한 정권차원의 범죄가 되는 것이다. 언론의 논리다.

 

양승태의 사법농단은 대한민국의 헌정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었다. 사법부가 행정부의와 거래를 통해 판결까지 좌지우지하려 했었다. 사법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판이라는 중대한 책임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아 조직의 이익과 교환하려 했었다. 그런 행위에 앞장선 현직 판사가 있는데 재판을 통해 혐의 대부분이 입증되었음에도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런 중차대한 국가적인 범죄를 저지른 인물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무사히 퇴직해서 전관으로서 이익까지 챙기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물론 이조차도 정부의 편을 드는 것이므로 언론은 달리 말해야 한다.

 

사법농단 좆도 아니다. 사법농단에 앞장섰다고 크게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니다. 사표 냈는데 그만두면 그만이지 무슨 탄핵까지 하는가. 그래서 박근혜가 문재인보다 낫다. 차라리 최순실이 조국보다 낫다. 이명박이 노무현보다 낫다. 그래야 정부의 편을 들지 않는 객관적인 언론이다. 정부에서 하면 최저임금인상도 반대하고, 근로시간단축도 반대하고, 탈원전도 반대하고, 코로나19 방역도 반대하고, 백신도 반대하고, 심지어 바로 어제까지 동지로 여기던 정의연조차 민주당 당적을 가지니 조선일보와 함께 공격에 나선다. 차라리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이 정의연보다 나았다.

 

그게 바로 한겨레의 정의인 것이다. 중립이고 객관이고 공정이다. 한겨레만이 아니다. 경향도 정의당도 입장은 같다. 홍세화도 진중권도 서민도 심상정도 모두 같은 입장이다. 그래야 자신들은 진보일 수 있다. 검찰의 세월호에 대한 수사결과 역시 검찰을 비판하는 것은 정부의 편을 드는 것일 수 있으므로 말을 조심해야 한다. 보수화가 아니다. 그냥 그들의 진보가 원래 그랬던 것이다. 자기에게서 비롯된 기준과 가치가 아닌 타인의 눈에 보이는 기준과 가치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진보이기 위해 문재인 정부에서 반정부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

 

자칭 진보의 보다 솔직한 속내인 것이다. 그동안 자칭 진보들이 당연하게 해 왔던 일들이 그나마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함으로 인해 한겨레를 통해 불거져 나왔을 뿐. 문재인 정부의 편을 드는 것은 악이다. 반대편에 서는 것은 선이고 정의다. 진리고 진보다. 참 단순한 놈들이다. 원래 그런 놈들인 것은 알았다. 비루하고 비루하다. 한심한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그런 오해를 하고는 한다. 군인들을 더 우대하고 지위도 권력도 높여주면 당연히 군사력도 더 강해지게 될 것이다. 군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군사력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게 되면 당연히 군사력은 더 강해진다. 그런데 정작 무신들이 문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던 고려의 무신정권은 고려 역사상 군사력이 가장 형편없었던 시기였다. 어쩌면 원의 속국이 되었던 이후보다 더 형편없었을 것이다.

 

허구헌날 하극상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인재들이 죽어나가고, 그런 와중에 고려를 위해 쓰여야 할 군사들은 무신들의 사병이 되고 있었다. 거란의 유민이 쳐들어 왔는데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 줄 중앙군을 아끼기 위해 승려들까지 동원하며 졸전을 벌였던 것이 최씨정권이었던 것이다.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당시에도 저 유명한 삼별초는 최씨정권을 위해 정적들을 탄압하고 백성들을 수탈하는데만 앞장서고 있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고려의 전토를 유린하는 동안 한 번도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았었다.

 

무신들에게 군사력은 곧 수단이다. 자신들의 권력이고, 그 권력을 지켜주는 요긴한 수단인 것이다. 딱 그런 수단으로서만 대한다. 그래서 때로 그 권력을 위해 소중한 수단이어야 할 군사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그런 군사력은 국가가 아닌 개인의 이해를 위해 하극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바로 휴전선에서 북한군과 첨예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권력을 잡겠다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민을 학살하기 위해 특수부대가 동원되는 상황이 그런 예인 것이다. 군은 국가를 위해서, 오로지 국민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 과연 군사독재정권과 이후 문민정부 가운데 어느 쪽이 국가적으로 본다면 군사력이 더 강했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전 군사독재정권에서는 군인들이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것도 당연한 군인들의 권리였었다. 병사들에게 가야 할 보급품을 빼돌리고, 혹은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 공급하며 폭리를 취하고, 그 결과 병사들은 2차세계대전 때 쓰였던 장비들은 90년대가 넘도록 아직도 사용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민주화 이후에나 그런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면 고발도 되고 처벌도 되고 하는 것이지, 아니 지금도 군인 출신이 국방부장관이고 군법정에서 모든 재판과 처벌이 이루어지다 보니 제대로 책임을 묻기도 어려운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수단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다. 도구로 쓰인다는 건 그런 의미다. 군사력은 더이상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군인의 권력은 군사력을 더 약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지금 제 3세계 국가들에서 군사장비 도입과 관련해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조차 아닌 이권들을 보라.

 

검찰권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권력을 사유화하며 그를 국민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하며 낭비한다. 그런 한 편으로 그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내부투쟁에 골몰하며 하극상까지 서슴지 않는다. 윤석열만 검찰이 아니란 것이다. 이성윤도 검찰이다. 그런데 이성윤도 심재철도 같은 검찰이 아니라는 양 검찰 내부에서 공격이 거세기만 하다. 심지어 언론까지 동원된다. 어째서? 검찰총장만 되면 손에 쥐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검장만 되어도 손에 쥐어지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니 그런 것들에 대한 욕심이 자신의 상급자까지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언론은 왜 끼어드는가?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있으니까.

 

윤석열만이 검찰이다. 윤석열의 측근들만이 검찰이다. 나머지는 검찰도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윤석열 측근들과 언론의 태도가 지금 검찰을 더욱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불만이 없을까? 이성윤이라고 자기 사람이 없을까? 검찰에는 특수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판부도 있고 공안부도 있고 형사부도 있다. 그런데도 확신을 가지는 것은 검찰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이다. 어째서 검찰권력을 개혁해야 하는가 그 당위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하겠다.

 

이성윤을 믿지 않는다. 이성윤 역시 검찰이다. 그러나 이성윤의 욕망은 믿는다. 사람이 이 정도 당했으면 당연히 감정이란 게 생기게 마련이다. 윤석열과 그 측근들에게 당해 온 것들이 있다. 언론들로부터 그동안 줄기차게 당해 온 것들이 있다. 그것은 검찰 내부에 검찰과 언론으로 인해 생겨난 균열이다. 최씨정권 이후 무신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느라 틈을 보인 끝에 몰락하고 말았던 것처럼. 과연 검찰권력은 이후로도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검찰권력의 끝이 보인다. 검찰과 결탁한 언론의 끝도 보인다. 사법농단도 죄가 아니라는 한겨레 나부랭이의 자칭진보도 그 끝이 보인다. 조선일보는 그래도 된다.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양승태의 사법농단까지 감싸는 한겨레 나부랭이들이 과연 자칭진보로써 존속할 이유란 것이 있을 것인가. 이성윤이 더 감정적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의감보다 복수심이 지금으로서는 더 공적으로 유용하다. 기대해 본다. 피바람은 남의 일일 때 더 신나는 법이다.

자유의지주의와 법치주의가 만나면 아주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온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면 자기 권한 아래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

 

바로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갈리는 지점이다. 둘 다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장하지만 결과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자유와 규범에 대한 이해다.

 

그런데 원래 자유의지주의와 법지상주의는 자유주의나 법치주의와 꽤나 혼동되기 쉽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오로지 법에 의해 규제되는 질서란 얼핏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보호대상이 아니기에 자기 권한 아래서 약간의 실수는 있었지만 당연하게 해고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해고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법은 누가 만들었을까? 어째서 그 법 안에서 그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그들을 보호해야 할 도덕적 윤리적 책임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인가? 지금 법적인 문제로 다투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망각한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자칭 진보는 이미 저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진중권이나 홍세화 같은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진영 전체가 여성주의와 함께 저쪽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런 정의당을 옹호하는 한겨레의 태도를 보라. 김학의를 출국금지시킨 것이 청와대가 책임져야 할 중대한 정권차원의 비위라 주장하는 저들의 논리를 보라. 그런 정의당을 진보적이라고 지지하는 놈들은 그러면 무엇일까? 뇌가 구더기거나 구더기가 뇌이거나.

 

류호정의 변명과 그를 옹호하는 정의당과 자칭 진보언론들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국민의힘이 더 진보적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래서 국민의힘이 노동존중의 정당이었던 것일까?

 

그래서 자칭인 것이다. 저놈들이 진보라. 류호정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박원순과 김학의 모두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더구나 김학의의 경우는 증거까지 확실했고, 피해자 또한 다른 누군가를 앞세우기보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직접 증언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원순은 수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진 바 없음에도 범죄자로 낙인찍혔고 김학의는 검찰의 1차 수사결과를 이유로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무고한 시민이 되어 있었다. 혐의라는 것도 박원순은 성추행이었던 반면 김학의는 권력과 폭력을 사용한 다수의 피해자에 대한 집단강간이었다. 어째서 이런 논리가 자칭 진보 자칭 여성주의자들로부터 나올 수 있었는가.

 

어이가 없는 것이다. 아직 혐의가 확정적이지 않다며 박원순을 위해, 아니 최소한 박원순에 대해 안좋은 소리는 않으려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려는 이들에게마저 2차가해라며 그 시신에 침을 뱉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가족에게마저 온갖 모욕과 조롱과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박원순에게는 인권이란 없다. 시민의 당연한 권리조차 인정되어서 안된다. 가족간의 천륜조차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면 김학의는 어떤가? 명백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덮어주고, 심지어 출국금지가 된 상황에 대해 수사하려 했다는 상황조차 의인이라며 포장해주고 있는 것이다. 김학의는 보호받아야 하는데 박원순은 아니다. 자칭 진보도 자칭 여성주의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결같다.

 

박원순이 잘못 살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계속 검사를 했어야 했다. 검사를 그만두더라도 전관을 이용해 돈을 더 벌었어야 했다. 수 천억 재산에, 대형 로펌의 임원이거나 혹은 보수정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모욕을 겪었을까? 아마 그랬다면 광화문 한복판에서 백주대낮에 아무 여성이나 붙잡고 강간해도 진정한 여성주의자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차별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는데 앞장섰어도 참된 노동존중의 진보인사라며 찬사를 들었을 것이다. 하필 민주당 당적을 가진 것이 김학의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김학의에 온정적인 기사를 쓰게 해주지 않는다고 젊은 기자들이 편집국을 들이받고 모든 언론이 그런 한겨레를 지지해주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선배기자들도 그런 젊은 기자들을 꾸짖기보다 승복하며 타협하고 있었다.

 

물론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인정받아야 한다. 용인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자신들의 주인에게? 이 나라의 정당한 주인들에게. 길들여진 개인 것이다. 목줄 묶인 개처럼 항상 누군가를 바라보고 허락부터 구해야 한다. 그래서 박원순이 더욱 잘못 살았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단지 수사만 받았어도 세상에 다시 없는 죄인이 되었는데 유죄판결까지 받은 이명박은 그 공과를 평가하려 하고 있다. 그것을 한겨레는 객관이고 공정이라고 당당히 주장한다. 자칭 진보 모두가 그런 논리에 동의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김학의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박원순은 비난과 조롱과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동안의 행적들에도 불구하고.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진보이고 정의이고 여성주의인가.

 

심지어 김학의를 출국금지시킨 것이 청와대까지 위험하게 만들 중대한 범죄라 이야기한다. 박원순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 피해자에 대한 중대한 2차가해인 것처럼 김학의라는 범죄자를 도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은 것이 정권차원에서 책임져야 할 심각한 죄악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의 정의란 어디에 있는가. 저들의 진보와 여성주의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김학의보다 박원순이 악한 정도가 아니다. 김학의를 도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은 청와대가 무협의 결론을 냈던 검찰보다 더 악하다. 똥버러지들이란 이유다.

사회주의가 지나치면 전체주의가 된다. 자유주의를 넘어서면 자유의지주의가 된다. 법치주의의 끝에 사법권력이 있다. 그래서 진보는 오히려 더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세상을 옳게 바꾸고 싶다. 세상을 고루 보편적으로 정의롭게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강제력이 필요하다. 그 강제력을 긍정할 때 스탈린이 된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혁명을 일으켰는데 그 노동자와 농민이 혁명에 부정적이고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하고 학살하기까지 한다. 과연 그것은 정의인가?

 

자유를 위해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자유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인가? 언론이 오보를 내는 것도 자유에 해당하는가? 언론이 자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보도하는 것도 언론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인가?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일상을 억압당하는 상황에서 자기들만 종교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누리겠다면 역시 그 또한 자유라 할 수 있는가? 범죄혐의가 있는 사람의 출국금지조차 권한을 가진 기관에서 시행하면 안되었던 것이다.

 

법치주의를 이유로 수사하고 기소하는 검사와 재판하는 법원을 절대시한다. 감히 감시조차 하지 못한다. 비판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저 받아 옮기기만 할 뿐이다.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서 어떤 죄를 지어도 감히 판사를 탄핵해서는 안된다. 검찰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상관인 장관이 징계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그 검사와 판사는 제대로 법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무식한 때문이다. 딱 시험 볼 만큼만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보고 나면 다 잊어 버린다. 진보는 그저 자신의 지적 허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주의와 비슷하니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쫓고, 자유주의와 비슷하니 자유의지주의를 추종하고, 법치주의와 얼추 같아 보이니 사법권력의 전횡과 농단을 용인한다. 그것이 진보다.

 

원래 수구는 그런 놈들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거의 상식처럼 그런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었다. 그러면 진보는 무엇인가. 진보라고 하는 지적 도덕적 우월감이 더이상의 노력마저 포기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인물이 진중권 홍세화 아닐까.

 

 내가 최근 더욱 자칭 진보를 공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저들은 수구와 같다. 한겨레는 조선과 같고, 정의당은 국민의힘과 같고, 진중권은 신혜식과 같다. 아니 더 못하다. 저놈들과 같이 취급되는 것을 참아야만 하는 것인가.

 

진보가 진보가 아닌 이유다. 진보에는 진보가 없다. 정의당에 정의가 없는 것과 같다. 진보를 진보라 정의한 순간 진보는 정체하고 퇴보한다. 도는 실천이고 과정이고 진화다. 진보 역시 같다. 그 사실을 모른다. 웃기는 것이다.

성리학의 나라라는 조선이었지만 그러나 중기를 넘어가면 사대부 가운데 사서삼경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굳이 몰라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3대에 한 번은 과거급제자가 나와야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바로 그 과거만 노리고 준비하는 기술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과거에 출제될만한 문제들만 모은 족보가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그것만 공부하느라 정작 유가의 경전은 돌아보지도 않게 된 것이다.

 

내가 시험을 통한 능력지상주의에 회의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당장 나부터 학력고사 시절 모의고사보다 무려 40점이나 오른 점수를 받은 경험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모의고사와 학력고사 사이에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점수만 무려 40점이 오르고 있었다. 시험은 능력인가? 운인가? 한 문제 맞고 틀리고에 등급이 갈리고 당락이 갈린다면 그 한 문제의 차이를 온전히 실력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칭기즈칸 시대 몽골에서는 말 잘 타는 것이 능력이었다. 말 잘 타고 활 잘 쏘면 그것으로 알아주는 것이었다. 같은 시대 중국 송나라에서는 사서삼경 잘 외고 시문 잘 짓는 것이 능력이 되고 있었다. 과학자 가운데도 날카로운 직관과 탁월한 계산능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가 있는가 하면 최근의 추세는 반복된 실험에 질려하지 않고 데이터를 꼼꼼하게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맥아더와 같이 자신의 직관을 믿고 과감한 도전을 하는 지휘관이 더 필요했던 시대가 있는가 하면 아이젠하워와 같은 관리형 지휘관이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있다. 그래서 진정 모두가 인정할만한 능력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기타를 잘 친다고 반드시 기타리스트로서 더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노래를 잘한다고 더 높은 인기와 많은 수입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는 중견배우보다 아직 연기도 어설픈 젊고 매력적인 신인배우가 더 높은 개런티를 받기도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하필 그 시점에 가장 평가받을 수 있는 재능을, 더구나 그것을 발현하기 좋은 조건에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시험문제의 제출방식과 평가방식에 따라서도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데 시험 하나 잘 봤다고 과연 그것을 자신의 능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문제란 것이다. 시험이 능력이다. 결과가 능력이다. 그래서 결과를 얻었다.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 덕분에 좋은 직장까지 얻었다. 그것으로 끝이다. 더 노력을 않는다. 자칭 진보들이 진보의 이론과 현실에 대해 무지한 이유인 것이다. 자칭 보수들이 보수의 이론과 현실에 대해 무지한 이유이기도 하다. 원래는 능력이라면 보수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이제 보수는 그저 막말의 아이콘처럼 되어 버렸다. 국민의힘에 진짜 실력있다 여길만한 인물이 누가 남아 있는가. 자칭 진보 가운데 귀기울일만한 가치있는 주장을 내놓는 이가 누가 있는가. 그런데도 학벌과 학위과 전력이 방패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만큼 잘났다.

 

오세훈의 'v' 발언을 보면서 더욱 느끼는 것이다. 언론은 차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제 얼굴에 침뱉기임을 알기 때문이다. 기자놈들도 무식하기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시험이란 단지 과정이며 결과는 이후로 증명되는 것이다. 학벌이 아니라, 전력이 아니라, 시험의 결과가 아닌 실제 누적된 행동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진보가 진보인 이유는 진보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진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류호정이나 장혜영 같은 얼치기들이 오히려 진보를 상징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자기들은 그래도 된다. 그만한 자격이 된다. 그러므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자격이 안되는 너희들이다.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칭 사법부인 검찰과 법원이 아닐까. 엄밀히 사법부는 법원만을 가리킨다. 검찰은 행정부다. 그러나 법원 스스로가 검찰을 같은 사법부로 여긴다. 김명수가 필사적으로 검찰을 지키려 애쓴 이유였다. 같이 시험을 보아 합격하고 연수원생활도 함께 했었다. 동료 아닌가. 고작 시류를 잘 타서 선거로 당선되었을 뿐인 정치인들에 비해 자신들이야 말로 타고난 실력과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이른 이들이다. 감히 국회의원 따위가. 감히 대통령따위가. 감히 국민들 따위가. 그 오만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그리고 그런 오만조차 옳다는 언론의 태도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민주당의 중진 가운데 오히려 그런 이들과 공감대를 이루는 이들은 또 무엇 때문인가.

 

능력지상주의라기보다 시험지상주의다. 시험을 잘봤으면 능력 있는 것이다. 능력이 있으면 자격이 있다. 자격이 있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다. 기자들이 조국 전장관의 일가족을 집요하게 들이파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시험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시험이 정의고 시험이 진리다. 그래서 노무현 전대통령도 참 고생 많이 했었다. 대학에 가지 못했었다. 지금 대통령도 고작 경희대 출신이다. 노회찬도 고려대 출신이었었다. 웃기는 현실이다.

물론 이전에도 여성주의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대적인 페미니즘의 시작은 역시 이화학당 학장이던 김활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김활란이 어떤 인물인가? 김활란과 함께 활동하던 모윤숙, 박마리아 등은 어떤 성향의 인물들이었었는가? 특히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YWCA라는 여성단체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이 단체에서 어떤 식으로 대중문화를 억압하고 탄압해 왔는지 나이 좀 되면 거의 기억할 것이다. 성매매특별법 논란 당시 여성주의자들과 논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었다. 씨발 이년들 그쪽 종자들 아녀? 맞았다. 개신교와 여성주의의 콜라보는 진짜 지옥이다.

 

이른바 레디컬 페미니시트들이 주장하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여러 여성주의적 정책이란 그래서 전혀 낯설지 않다. 원래 그런 종자들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만화책을 불태우고, 게임들을 불태우고, 오만 꼬투리를 잡아서 유해물로 낙인찍는다. 오죽하면 이진주가 좋은 만화상인가를 받게 되었는데 차마 못받겠다고 수상을 망설이고 있었겠는가. 그러면 그런 저들의 성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일제강점기부터 저들은 항상 친일 친독재 친권력 친기득권으로 거의 기생하듯 빌붙어 지내왔던 것이었다. 내가 예전에 말했던 기생페미니즘 바로 자체였었다. 권력에 빌붙어 권력의 은혜로 여성의 지위향상을 이끌어낸다. 그를 위해 여성단체를 이끌고 여성을 동원해서 권력의 친위대 역할을 해 왔었다. 그 정신적 지주가 역시 반공을 또 하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개신교였었다. 당시의 여성주의란 여성 스스로가 실력을 키워 여성의 해방과 자존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닌 권력자와의 유착을 통해 법과 제도로써 그것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독재권력이 물러나자 여성주의는 새로운 숙주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기생충은 숙주 없이는 절대 혼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때마침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향상에 매우 우호적이던 운동권들이 그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향상은 진보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결탁했다. 마침 개신교에서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기에 그 결합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진보는 여성주의고 여성주의는 곧 진보다. 하지만 처음부터 불편한 동거였었다.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은 진보 가운데서도 상당히 극단적인 혁명주의자들 사이에서나 통용될 논리인 것이다. 그나마 여성을 사회적 약자라 여기는 이들의 경우 강제적으로 그들을 평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기도 하지만 그런 전제가 사라질 경우 그들의 방식은 진보 내부에서도 논란이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 그동안 진보진영 내부에서 여성주의자들과의 갈등 과정에서 여러 혐의를 뒤집어쓰고 축출된 이들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는 진보가 아니다.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진보일 수는 없다. 그런데 여성주의는 진보다. 여성주의야말로 진보의 상징인 것이다. 진보는 곧 여성주의여야만 한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진보진영에서 여러 성추문에 휩쓸려 사라진 이들 가운데 그런 논쟁에 휘말린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샌가 여성주의가 진보 전체를 대표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면 진보는 더 진보적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되었는가? 자칭 진보정당과 진보언론과 진보지식인의 급격한 수구화와 여성주의의 진보독점과 과연 무관할 것인가?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메갈리아와 워마드일 것이다. 여성주의에서 그나마 이름뿐인 진보란 가치를 배제한 집단이었으니. 그들이 주장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칭 진보들이 절대 인정하지 않는 부분인 것이다. 2012년 당시 여성주의자들은 군새독재의 정통후계자인 박근혜를 지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2017년 탄핵 당시에도 마지막까지 박근혜를 지지하며 탄핵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메갈리아와 워마드였다. 문재인 재기해라. 문재인 대통령더러 성재기처럼 자살하라 외친 것이다. 왜? 박근혜를 내쫓고 당선된 남성 대통령이었으므로. 그러면 그런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한 자칭 진보들의 태도는 어떠했었는가? 오히려 그들을 제도권으로 받아들였다. 얼굴로 앞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이제부터 진보의 주류다.

 

원래 자칭 진보들이 가지고 있던 지적 허영과 개신교의 종교적인 엄숙함이 친권력 친기득권적인 한국의 기생페미니즘과 결합하며 지금의 노골적인 자칭 진보의 성향들을 나타내게 된 것이었다. 류호정의 부당해고를 오히려 옹호하는 자칭 진보언론들을 보라. 저들은 원래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던 자칭 진보들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류호정에 이어 장혜영이 대표적 수구언론인 조선일보의 1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조선일보 1면이란 조선일보의 정치적 의도의 반영인 것이다. 왜 하필 조선일보는 반대편에 있을 정의당의 국회의원을 1면에 실어주고 있겠는가? 

 

양승태의 사법농단조차도 아무 잘못도 아니라는 한겨레라는 것이다. 아예 박근혜 당시의 국정농단마저 문재인 정부를 끌어들여 부정하려는 것이 지금 자칭 진보들인 것이다. 진보는 포섭되었다. 자칭 진보는 조선일보의 영향력 아래 있다. 자신감의 발현이다. 자칭 진보와 보수가 모두 조선일보의 의도대로 놀아난다. 실제 그러고 있기도 하다. 여성주의가 진보를 집어삼키고 마침내 원래의 자리를 찾아간다. 여성주의에게 원래의 자리란 친일, 친독재, 친기득권의 기생페미니즘인 것이다. 조선일보가 봐주면. 국민의힘이 도와주면.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이 자신들을 알아봐 준다면.

 

지금에 와서도 정의당의 진보를 믿는 놈들이 있다면 뇌가 구더기거나 아니면 양심이 구더기인 것이다. 정의당 기준으로도 국민의힘은 노동존중이 맞는 것이다. 항상 말한다. 진중권은 변절한 적이 없다. 서민도 변절따위 하지 않았다. 원래 자칭 진보란 그런 놈들이었다. 한참 위에서 민주당과 민주정부는 굽어보며 조롱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그러면서 국민의힘과 조선일보에는 항상 약한 모습만을 보이고. 심지어 국민의힘은 성폭행과 성추행의 추문에 휘말려도 한 마디 비판조차 듣지 않는다. 어느 여성언론인도 그를 문제삼으려 않는다. 왜? 그것이 진실이니까. 정의인 것이다. 우습게도.

주류의 특권은 주어진 권한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전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찰이 수사권을 남용하고, 감사원이 감사권을 남용하고, 정치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고, 그래서 나경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당한 자격을 가진 자가 자신의 권한을 사용한 것인데 무슨 문제인 것인가. 그래서 최순실이 문제인 것이다. 최순실은 주류가 인정하기에는 너무 자격이 미달한 존재였었다.

 

류호정을 보면 윤석열 검찰이 떠오른다. 류호정이 보좌관에게 저지른 갑질들을 보면 검찰이 그동안 시민을 상대로 저질러 온 죄악들이 보이게 된다. 그만한 지위에 있으니까. 그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자칭 진보들은 검찰의 그같은 반인륜적, 반헌법적, 반가치적 수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것이었다. 심지어 윤석열을 차기대통령으로 지지하기까지 했었다. 한겨레가 류호정의 반노동적인 갑질행위를 옹호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정의당도 이제는 주류정당이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정의당이 법과 정의, 가치, 윤리, 도덕에 구애받으며 정치해야 하는가.

 

그래서 한 편으로 민주당을 더욱 얕잡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작년 경향이 대놓고 민주당 빼고 찍자는 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도 민주당이 어디 감히 어쩔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보다는 조롱이었고 무시였었다. 늬들은 못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아서 그 부족함을 비난하고 싶어 한다. 국민의힘의 몸에 묻은 똥은 권리니 무시하고, 민주당을 스쳐지나는 바람은 권리를 벗어났으니 비난하고, 

 

그러면 자칭 진보만인가? 물론 자칭 진보만은 아니다. 다만 진보가 누구와 닮으려 하는가. 누구를 쫓고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있는가? 자칭 진보언론들이 수구언론을 동경하고 추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기자로서 마음대로 기사를 조작해서 현실에 개입하려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인다. 기자라면 마땅히 그렇게 기사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진보인가? 그래서 진보란 게 당장의 현실인 것이다.

 

박범계 신임 법무부장관이 자기들 말 안 들어줬다고 바로 수사권으로 보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모습까지 잘한다고 지지하며 추종하는 자칭 진보들을 보면서 더욱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주호영의 성추행은 철저히 침묵하면서 죽은 박원순의 시신만 줄기차게 부관참시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은 진보인 것이다. 진중권과 서민이 아직 진보논객인 이유이기도 하다. 홍세화는 절대 보수정권에는 덤비지 못한다. 항상 그랬었다. 자칭 진보의 현실이다. 정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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