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지중해세계에서는 비의주의로 해석할 수 있는 이른바 미스테리아라 일컬어지는 어떤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간단히 지금 자신들이 사는 세계는 거짓된 것으로 세상 어딘가에는 진실한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그 진실을 통해 인간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한때 예수가 불교를 배웠다는 주장이 유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를 가리키는 메시아와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의 어원이 같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를 보면 불교와 마찬가지로 아예 땅을 파고 들어가서 고행만 하는 종파도 존재했었다. 고행이 자신들을 그 진실로 이끌어주리라.

 

최초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피타고라스 이전부터 존재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여겨진다. 왜냐면 피타고라스 자신이 그와 관련한 명제를 스스로 쳔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세사의 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피타고라스는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진실한 비밀이 바로 수에 있다고 당시 결론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데모크리토스가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 위에 있었다. 말 그대로다. 유럽 문명의 수학과 과학은 바로 동지중해세계에서 유행했던 바로 이 비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수학을, 물리의 법칙들을, 현실의 모든 현상들을 관통할 수 있는 보편의 질서를 찾아낼 수 있으면 그것이 이 우주의 비밀에 닿는 방법인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 플라톤이 나와서 이데아를 통해서 그들이 추구해야 할 비의를 아예 정의해 버렸다. 미숙하고 거짓된 신 데미우르고스와 진실한 지혜의 상징인 소피아도 아마 이때 플라톤에 의해 우화로써 이야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데아는 이후 로마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의 핵심교리와 만나고 유럽사회의 정신적인 뿌리를 이루게 된다. 괜히 이후 유럽의 모든 철학들이 플라톤의 재해석이라 불리우는 게 아니란 것이다. 바로 그 이데아란 무엇인가? 그 이데아에 이르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 이데아를 신으로 구원으로 여겼었고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양심으로 존엄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철학자 가운데 일부는 다시 고대의 지식을 불러와서 수학과 과학으로써 이 세상의 실체를 이해하려 했었다. 바로 그 일원적인 세계가 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중심의 문명에 대해 서구사회가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 그 대상이며 본질인 것이다.

 

하나의 진실을 찾아서. 하나의 질리를 향해서. 그 궁극은 발전이고 번영이고 마침내는 구원일 터였다. 히틀러의 게르마니아도 그런 연장에서 이해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독일민족을 더욱 번영하게 영구히 번성하도록 할 수 있는가. 그래서 경쟁이 되는, 그리고 방해가 되는 대상들을 모조리 절멸하고 가장 우수한 독일인들만을 세상에 남겨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독일인들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들만이 남아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히틀러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사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식이기도 했었다. 누군가는 영국국민을 위해서, 누군가는 프랑스인을 위해서, 누군가는 이탈리아인을 위해서, 각자 그 대상만 달랐을 뿐 본질은 같았다. 그게 파시즘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반발하여 나온 것이 해체주의이고 그 끝에서 현대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온다. 완전히 맞는 건 아닌데 대충 그렇게 흐름이 이어진다 보면 된다. 정확히 그렇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진실과 진리가 아닌 서로 다른 무한히 많은 정의와 가치와 도덕과 윤리와 상식과 양심과 이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해 단지 해석으로써만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더이상 이전 철학자들이 말하던 거대서사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수없이 파편화된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곧 기존의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백인사회가 추구해 온 가치에 대한 해체와 붕괴를 의미한다.

 

반PC주의자들에게 거의 숭배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어느 철학자인지 임상심리학자인지에 대한 글을 얼마전에야 우연히 보았다. 뭔 소리를 하는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한 가지 그런 주장들을 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체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동안 잘 유지되어 오던 서구사회의 정통과 가치를 한 순간에 부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수 반PC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거의 일맥상통한다. 그동안 아무일 없이 잘 지내오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성가신 놈들이 나타나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 잘 지내오던 그대로 세상을 조용하게 만들려 한 것이 히틀러였고, 스탈린이었으며, 그래서 그냥 다시 세상을 시끄러운 채로 내버려두자는 것이 이후 현대의 철학과 사상들의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조용하던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자. 그게 트럼프다. 유일한 하나. 단 하나의 정의와 이익.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모순이 생겨난다. 이전의 착취하는 부르주아와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니 마르크스 주의 자체에 파탄이 일어나는 것처럼. 

 

단 하나의 진리가 존재한다. 단 하나의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만을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 이를테면 인어공주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백설공주는 반드시 유럽계 백인이어야 한다는 믿음처럼. 성소수자는 비정상이고 따라서 소수자로써 다수의 요구에 따라야만 한다. 주류에서 벗어난 소수들은 마땅히 주류가 바라는대로 따라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래도 요즘 유행중인 반PC의 배후에 개신교 교회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90년대에도 영지주의에 반대한다고 록밴드들을 악마화하는 주장이 꽤나 젊은 세대를 사이에 유행한 바 있었다. 실제 저들이 주장하는 대부분 내용들이 특히 미국 남부의 원리주의 교회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인종주의적인 부분까지도. 그래서 그들 자신도 말한다. 미국에서는 백인이 주류이듯 한국에서는 한국인 남성이 주류다. 다르지 않다. 

 

생각났다. 조던 피터슨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뭔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냥 패스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반PC주의의 사상적 근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나름 판단에 도움이 된다 할 수 있겠다. 저들은 어째서 저리 생각하고 저처럼 과격한가. 그런데 어째서 전혀 동떨어진 한국사회에서 반PC주의가 저처럼 세력을 얻고 있는 것인가? 물론 그에 대해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아주 없지는 않다. 아무튼 크게 보자면 이렇다는 것이다. 그동안 유럽문명이 발전시키고 지켜온 그 근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 문제없이 해 오던 대로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갔으면 좋겠다. 그런 목적이 그런 오독을 낳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사실을 넘어선다.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라도 대화할 때마다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계속 물어오면 짜증날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또 많은 미연시들이 그런 식으로 대화를 통해 분기를 만들고 있기도 하다. 한 마디로 대화할 때마다 선택지 나오는 것은 많은 게임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상적인 부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내가 미연시를 절대 안하는 이유 중 하나다. 씨발, 대화 한 번 할 때마다 별 시답잖은 것까지 선택하라고 나오는데 그거 하겠느냐고. 다만 그런 부분을 배제했을 때 자신의 성적지향에 대해 설정토록 하는 것이 그렇게 크게 문제인가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판타지세계에 성소수자가 뭔 말이냐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PC가 필요한 것이다. 성소수자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인위적으로 강제하거나 강요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수 천 년 동안 당연하게 이루어져 온 삶의 양식을 한 순간에 바꾸려 한다. 그러면 수 천 년 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군주제와 봉건적 신분질서는 어째서 사라지게 된 것일까. 그러니까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판타지세계에는 게이도 레즈비언도 바이섹슈얼도 트렌스젠더도 없이 그냥 주류적인 성지향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아, 그렇게 주장하는 것들이 있기는 하다. 바로 개신교. 근본주의 개신교들은 그같은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판타지라는 것도 결국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연장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투사하여 만드는 가공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많은 것들이 판타지 세계에서 구현되고는 한다. 한 마디로 마법도 용도 괴물도 존재하는 세계에 성소수자가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이 불을 쏘고 전기를 만들고 집채만한 괴물도 때려죽이는 세계에서 어째서 게이나 레즈비언이나 바이섹슈열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그건 그냥 그들의 바람인 것이다. 믿음인 것이고. 원래 이상적인 세계에는 성소수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현실에서의 성소수자란 비정상이고 일탈이고 오점이다. 그래서 단지 대화 가운데 자신의 성정체성을 정의하는 선택지가 나오는 자체만으로 강요라 여기고 불쾌하게 느끼기까지 하는 것이다.

 

진짜 어이없는 것이다. 처음 캐릭터를 선택할 때 성정체성을 특정한 것으로 강제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만으로 설정한 것이 그 이외의 성정체성을 가지는 이들에게 특정한 성을 강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수자의 정체성까지 포함해서 자기의 성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었고 거기에는 어떤 강제나 강요가 없었다. 성소수자를 선택하지 않았다 해서 패널티 같은 것도 없었다. 이후 게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반드시 소수자의 정체성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시스템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냥 여러 선택지 가운데 있을 뿐인데 그조차도 용납지 못하겠다. 왜? 이미 소수자의 성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가까운 어떤 곳에 그들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단지 게임에 그들의 존재가 등장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겠다. 그러니까다. 그러니까 강제로라도 늬들과 바로 가까운 곳에서 그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토록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들마저 강요라 말한다. 지금 현실에 성소수자가 존재하고 그들을 위한 선택지도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강제라 말한다. 그러니까 하던대로 성소수자는 없던 것으로 치고 그들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한 채 배제하며 살아가도록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냥 귀찮으니까. 불쾌하고 기분나쁘니까. 내가 그놈들을 철저히 혐오하고 차별하려는 이유다. 그런 놈들이 너무나 싫고 짜증나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을 참을 수 없으니까. 도대체가 뭐가 강요고 뭐가 강제인가. 뭐가 지나친 PC인 것인가 말이다. 단지 선택지 가운데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집어넣어서? 차라리 그런 인터페이스가 귀찮다 말하면 이해한다. 나도 그런 거 아주 질색을 하니까. 게임 가운데 대화할 때 선택지를 두는 것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당연하기까지 한데 그것을 시비거는 것은 무슨 생각인 것인가.

 

더불어 서구권 게임들 캐릭터 못생기게 만드는 건 역사가 아주 유구하다. 아주 멀리 위저드리나 마이트 앤 매직같은 게임만 해도 캐릭터 고르다가 절대 남자캐릭터로는 않는다는 내 신념을 우습게 무시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차라리 남자 캐릭터 못생긴 건 참겠는데 여자 캐릭터 못생긴 건 못 참겠더라. 현실에서 내가 그다지 잘생기지 못했으니 게임에서라도 잘생기고 멋지고 예쁘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다. 그건 PC도 뭣도 아닌 인간의 너무도 당연한 욕망이다. 하지만 그런 한 편으로 진짜 매력적인 캐릭터라면 조금 못생기고 뚱뚱하고 병신같더라도 그것도 괜찮기는 하다. 그런 점을 비판하는 건 확실히 나도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은데, 성소수자에 대한 비판은 정말 어이없기까지 하다. 이래서 2030이라는 것일까. 그들의 반PC도 이제는 흔적조차 사라진 반페미처럼 교조화되고 있다. 저 반PC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면 반페미처럼 보이지 않게 될까. 의심하는 중이다. 저게 과연 진심일지.

 

아무튼 하다하다 별 개소리를 다 듣는다. 판타지세계에는 성소수자가 없다? 판타지세계에는 남성과 여성 뿐이어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은 그것이 주의이고 강요고 강제다? 병신에는 그냥 답이 없다. 저 새끼들은 어떻게 해도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피곤하고 의미도 없다. 불관용에는 관용이 없어야 한다. 마찬가지다. 나태와 무지를 이해하려 하면 그들과 같아진다. 혐오하게 되는 이유다. 한심한 것들이다. 

아포칼립스물을 하나 빌렸다. 당연히 주인공은 이후의 상황들을 모두 꿰뚫고 있다. 이 역시 작가의 불안한 내면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회귀든 뭐든 상황을 혼자 모두 꿰뚫지 않으면 헤쳐나가기 힘들다. 그럴 자신도 의지도 능력도 없다. 재미있는 건 그래서 모든 걸 꿰뚫고 있으니 시작부터 남들과 다르게 잘 헤쳐나가고 있는데, 정작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그냥 지나치기만 한다.

 

"다른 사람을 구하느라 스스로 위험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이 문장이 내내 계속 반복된다. 한 권 빌려서 절반 좀 읽다가 때려쳤으니 이후로도 계속 나올 지 모르겠다. 수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이나 살았는데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나 아무튼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들을 외면하고 자기 갈 길만 감으로써 작가가 바라는 '쿨한' 영웅상을 완성한다. 내가 아포칼립스에 대한 지식을 알고 그를 헤쳐나갈 능력을 가진 것은 내가 잘살자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돕자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느니 나랑 내 주위만 잘 살고 보겠다. 어떻게 이런 소설이 E북으로 출판될 수 있었던 거지? 좋다는 사람이 많다는 거겠지.

 

내가 요즘 이른바 장르소설의 주인공들이 쉽게 이입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래도 얼마전까지는 조금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구하고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들이 대세였다. 자기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그래서 결국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그러나 자기가 가진 힘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이들을 사람들은 영웅이라 불렀다. 무협에서는 대협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영웅들이 사라졌다. 다른 곳에서 수 십만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자기 가족만 챙긴다고 아예 나몰라라 외면하는 놈들이 오히려 대세다. 그래서 소설이 아예 따로 노는 경우도 있다. 세계가 멸망할 정도로 전쟁이 일어나는데 주인공은 주위의 가족과 지인들과 되도 않는 농담따먹기 중이다. 결국 전권 빌렸다가 반도 못 읽고 돈만 날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소설들만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일까?

 

역시나 요즘 유행하고 있는 MZ세대까기로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주소비층도 아마 그들일 테니까. 작가들도 그 또래일 가능성이 높다. 글쓰는 것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세대에 따라 글쓰는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다. 쓰는 어휘나, 문법의 특징이나, 혹은 문장의 호흡 같은 것들이다. 그들이 좋아하니 결국 그런 소설들이 유행을 하는 것이다. 나만 살겠다. 내 주위만 잘살겠다. 다른 사람들이야 뒈지든 말든. 그런 것을 오히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 자찬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것이 세대차이라는 거겠지. 새삼 확인한다. 저들과 나는 인종 자체가 다르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해하고 만다.

나는 장르소설을 좋아한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방에서 무협소설을 빌려 읽고 있었고, 지금도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스마트폰으로 거의 매일 무협과 판타지, SF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웹소설들을 섭렵하고 있다. 그런데 아다시피 이들 장르들은 젊은 세대가 주소비층들이다. 그를 통해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바가 생겨나는 이유다.

 

내가 장르소설을 빌려 첫권을 보다 말고 접는 경우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체가 거지같은 경우.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쓴다는 느낌을 제대로 주는 경우다. 비슷한 종류의 소설만 보다가 글을 쓰다 보니 문법도 맞지 않고 맞춤법도 제멋대로인데다 어휘마저 잘못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다 문장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읽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건 도저히 못 읽는다. 그리고 더불어서 개인의 울분과 열등감을 배설하는 창구로 쓰려 하는 경우일 것이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너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사변적이고 단편적인데다 심지어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그때 내가 내리는 평가는, 아 뭐 이런 찌질이새끼가 다 있나? 진짜 병신같고 찌질하다.

 

이를테면 내가 가난하다. 내가 없고 못산다. 그래서 분노한다. 저 새끼는 잘 사는데. 저 새끼는 다 누리고 사는데. 저 새끼보다는 내가 더 잘났는데. 그러느라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잔뜩 비틀려서는 다른 사람을 왜곡해 판단하기까지 하고. 때때로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나도 어려서 정부 보조 받아가며 가끔씩은 밥도 굶고 하는 삶을 살았었는데 정작 그런 열등감 같은 건 느낀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아주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에만 신경쓰고 살기에는 당장 내 앞에 놓인 매순간들이 더 중요하고 가치있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들도 너무 많고, 적당히 타협만 하면 당장 할 수 있는 일들도 더 많았다. 그리고 지금 내 형편에 맞은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면 족한 것 아닌가. 다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편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그래서 더 짜증나는 것이다. 이른바 힘숨찐이라는 것이 있다. 힘을 숨긴 찐따의 준말이다. 남들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숨기고 찐따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역사야 유구하다. 당장 슈퍼맨부터 조로까지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영웅이란 기본적으로 힘숨찐을 깔고 다니므로. 그런데 이들의 경우는 정체를 숨겨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 그런 것이지만 최근 장르소설의 힘숨찐은 그것과는 결이 상당히 다르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과 나누기 싫다. 내가 가진 힘인데 다른 사람을 위해 그로 인한 책임을 나누기 싫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거부하고 정체를 숨긴 채 혼자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는 것이다. 기껏해야 자신이 위할 수 있는 대상은 가족이거나 사랑하는 사람. 부익부빈익빈 유전무죄무전유죄의 현실에 분노하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보다 더한 이기심으로 자신이 가진 힘을 자신만을 위해 쓰고 있는 것이다. 마치 조선시대 돈을 번 상민들이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려 하기보다 자신들이 양반이 되는 것만을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째서 20대 남성들이 2찍이 되었는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부분일 것이다. 자신의 불우한 현실에 분노하는 것까지는 이전 세대와 다르지 않은데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이 다르다. 나만 불우하고 나만 부당하고 나만 불합리하다. 그것은 외부의 환경으로 인한 것으로, 그 환경을 이루고 있는 모두에 대해 분노하고 증오하고 저주한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나보다 더 누리는 것 같으면 너무 가난해서 정책적인 배려를 받는 경우도, 장애로 인해 국가적인 보조를 받는 경우도, 다른 차별적인 이유로 인해 기회에 있어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경우마저도 전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들보다 먼저 태어나서 더 일찍부터 직장생활을 하며 관리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기성세대들에게도 원망의 화살을 돌린다. 그래서 그들이 현실을 구조적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가? 그냥 내가 저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 누리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귀족이 되면 되는데 평민들의 삶따위 알 게 무어냐는 것이다. 내가 양반이 될 수 있으면 당연히 양반이 누리는 특권들도 내 것이 될 텐데 굳이 그것을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2030 남성들이 조국의 가붕게론에 반발한 이유였다. 나는 용이 되어야지 가재나 붕어, 게처럼 개천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저들 세대와 우리 세대의 사고와 논리 가운데 가장 크게 차이나는 부분일 것이다. 어차피 가재, 붕어, 게로 살아야 하는 이들이 있음을 아는 우리 세대가 가붕게론을 지지했던 반면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2030들은 그것을 조국을 넘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까지 저주하고 증오하는 이유로 삼고 있었다. 그러니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한 편으로 그것이 2030 남성들이 6070세대들과 연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워낙 없이 살던 시절이라 그 시절 세대들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에 크게 거리낌이 없었다. 집도 몇 채나 가지고 번듯한 상가건물까지 있는 건물주가 굳이 가진 것 없는 노인들의 것까지 폐지와 빈병과 깡통을 모아 푼돈이라도 벌려 하는 것이 그런 예일 것이다. 오죽하면 폐지줍는 노인이 자기가 주운 폐지를 모아놓는 창고까지 따로 가지고, 혹시라도 이사하는데 필요한 종이박스라도 구할 수 있을까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게 비싼 값에 팔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의 궁핍은 도덕의 궁핍을 낳고 도덕의 궁핍은 인간의 양심과 존엄까지 저렴하게 만든다. 그래서 대부분 노인들은 이기적이다. 세월호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고 대학입시에서도 배려하려 했던 조치들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했던 것도 바로 이들 세대들이다. 심지어 자기 또래들이 죽어나갔는데도 이태원 피해자들에 대해 가장 가차없이 비판적으로 대하는 것도 이들 세대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많이 닮지 않았을까.

 

위안부 피해자들이야 누구로부터든 돈만 받으면 된다. 일본 정부가 사과했든, 혹은 책임을 인정했든, 그래서 일본 정부로부터 받는 돈이든 아니든, 아무튼 돈만 받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피해는 회복되는 것이다. 그것을 막는 정의연이 잘못한 것이다. 하긴 그건 4050 2찍 진보들도 공유하는 논리니 그들만의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굳이 일본을 자극해가며 그런 판결을 내릴 필요가 있는가. 이미 시간도 많이 지났고 당사자들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불어 내가 힘들게 시험쳐서 정규직이 되었는데 하잘것없는 미화원, 경비원, 시설관리원, 급식실 직원들따위가 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부당하다. 나름대로 일정한 교육도 받고 힘들고 어려운 근무를 하면서 어차피 직렬이 바뀔 일도 없는 무기직으로 전환되는 것인데도 최저임금에 법으로 정해진 수당 받아서 연봉 4천만원 받는 것도 너무 많이 받는다. 이 새끼들 야간미화원 연봉 4천만원 훌쩍 넘는 거 알면 아주 기절할 지 모르겠네. 

 

아무튼 진짜 읽다 보면 하는 소리가 가관이다. 그래서 또 한 편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2030 남성들이 반페미에 빠지게 되었는가? 부화뇌동한 병신들 제외하고는 유시민 작가의 판단이 옳다. 그냥 네놈이 한심해서 여자들이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남녀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려는 것이다. 그냥 네가 병신같아서 취직도 못하고, 알바도 못하고, 어디 가서 여자에게 말도 못 붙여 보고, 말만 붙여도 벌레취급당하는 것인데, 그게 다 여자 때문이라 핑계를 대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저따위 대가리속을 가지고 있는 새끼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가 있여 자기 판단에 보니 여자들이 속물일 것이기 때문에 그 남자에 대한 편견 역시 매우 화려하다. 대개 남자주인공들의 복수의 대상이다. 아 진짜 보고 있는 내 눈이 썩을 것 같을 지경이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다. 아니었으면 애저녁에 장르소설따위 더이상 읽는 것 포기했을 것이다. 다만 그런 내용의 소설들이 너무 많다는게 문제다. 한 사회의 대중문화는 그 사회의 기저를 담는다. 특히 정제된 양식을 포기한 B급 하위문화는 더욱 그런 경향을 가진다. 그런 소설을 쓰는 놈들이나 좋아서 읽는 놈들이나, 그런 거 좋다고 추천하는 놈들이 많으니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 가끔 틈내서 읽는 내 눈에도 뜨이는 것이겠지. 그리고 실제 여기저기서 만나고 이야기해 본 2030의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나는 옳은데 너희들이 틀렸다. 나는 잘났는데 너희들이 잘못했다. 그래서 말한다. 병신 찌질이라고. 어릴 적 표현으로는 찐따뽀대기다. 첩보소설에 제임스본드가 있다면 찌질이에는 찐따뽀대기가 있다.

 

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다.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2찍 2030들은 현정부와 여당에는 절대 분노하지 않는가. 오히려 현정부의 잘못들을 비판하는 것에 적대적이기까지 한가. 그들의 성향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놈들 대가리속이 딱 그 수준이다. 부모들 잘못이다. 그래도 그 부모들이 나보다는 윗세대일 것이라 자위하고 싶다. 딸딸이가 아니다.

사실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이나 그 주제의식은 본질적으로 같다. 과연 지금 당신이 불우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런 불우한 현실을 만든 당사자들인가, 아니면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의 또다른 약자들인가.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야 말로 김기택이고 성기훈이란 사실을. 아니 어쩌면 자신은 국문광일수도, 조상우일수도 있다. 박사장네 집에서, 그리고 오일남과 세계의 거부들이 만든 무대 위에서 서로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발버둥치는 군상들인 것이다.

 

원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만든 것은 자본가들과 그들과 결탁한 정치가들이었다. 더 싼 값에 일자리가 급한 사람들을 고용해서 쓰면서 아무때고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비정규직을 만들고 그것을 일상화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하는 일도 같은데, 아니 하는 일이 다르더라도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해주고 급여를 받는 것은 같을 텐데, 그런 비정규직이라는 부조리한 현실을 만든 당사자들과 싸워 모순을 바꾸기보다 이미 차지한 정규직이라는 알량한 신분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나는 어차피 정규직이 될 것이므로. 정규직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노력할 것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 계약직이 감히 나의 자리를 넘보는 걸 참을 수 없다.

 

같은 사무직이라도 직렬이 다르면 승진과 급여에서 차별을 두는 경우마저 현실에는 매우 흔하다. 이른바 기술직이란 것으로 특정한 업무에만 종사하도록 채용한 경우인데 사실상 무기직이다. 다만 차이라면 승진과 그에 따른 급여의 인상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다만 일정 이상, 특히 임원으로의 승진은 매우 어렵다. 하물며 정규직이라지만 결국 무기계약직이다. 업무도, 직책도, 급여도 전혀 변동없는, 말 그대로 직무급을 적용받는 한정업무종사직원이다. 설마 아무리 보안원 근무하던 직원을 어느날 상관도 없는 총무나 기획팀에 내려꽂겠는가. 그런데 보안원이 정규직 - 아니 무기계약직이 되면 사무직으로 전환도 가능하다는 개소리를 진심으로 믿는 머저리들이 있었다. 좋은 대학 나오고, 열심히 공부해서 입사시험도 합격한 나름 능력을 인정받은 병신들이다.

 

어차피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급하면 주위에 아무나 아는 사람 추천해달라 해서 채우기도 하는 일자리인 것이다. 그런 자리들은 대부분 이직률도 높아서 어느날 눈뜨면 멀쩡히 다니던 사람이 말도 없이 안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에 당장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알량한 최저임금 받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고단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단기간에 그리 많을 리 없다. 어차피 자기도 하지 않을 일이다. 하라 해도 오히려 자기를 업수이여긴다 화를 낼 인간들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업무에서조차 장기간 근무하며 업무능력과 성실성, 인성 등을 판단해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니 난리도 아니다. 정규직이 되려면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었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서울대에서 미화원을 대상으로 한문과 영어시험을 강요했다는 뉴스에 분노하기보다 오히려 옹호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싫으면 나가라. 서울대에서 미화원 하려면 그런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런 의식이 특정 정치인 아들이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다는 뉴스에는 무덤덤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특정인들의 표창장이나 인턴증명서에는 그리 민감하던 것들이, 심지어 단지 체험활동에 지나지 않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인턴을 채용을 위한 준비과정이라 정의하는 자신들의 상식과도 전혀 맞지 않은 판결에 대해서까지 아무런 비판없이 공정을 내세우던 인간들이 대기업 경영자들도 받지 못할 퇴직금에는 오히려 대신 변명해주기 바쁜 것이다. 아버지가 당시 청와대 실세인 민정수석이었으니 무언가 기여한 바가 있었기에 그 돈도 받았을 것이다. 최근 나오고 있는 성과금이라는 변명의 밑바탕이다. 문화재며 천연기념물이며 개발에 장애가 될 만한 부분들을 인맥을 활용해서 해결해 주었기에 그만한 돈을 받을 자격이 되었다. 따라서 공정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래도 되는 신분에 있기 때문이다. 시험봐서 검사가 되었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 합격해서 검사가 된 아버지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사법고시도 합격 못한 법대 교수따위 자격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려면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에서 떨어졌으면 패배자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이유다. 하류인생들의 급여가 오르고 휴식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자신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알바나 하는 것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급여를. 청소나 하고 보일러나 만지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이나 하는 인간들은 일주일에 100시간 120시간이든 일해서 필요한 돈을 벌면 되는 것이다.

 

벌써 십 수 년부터 그래서 인터넷에서 흔히 듣게 되는 말이 '학교 다닐 때 더 열심히 공부하지'란 것이었다. 가난을 호소하며 사회적 약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냉정하고도 준엄한 꾸짖음인 것이다. 지금 너는 벌을 받는 것이다. 정당하게 벌을 받는 것이므로 반항하지 말라. 자신은 그런 위치에 올랐다. 좋은 대학 나왔고 좋은 직장도 가졌다. 승자다. 그러므로 승자로서 권리를 주장해도 된다. 심지어 건강보험이나 전기, 가스, 수도 같은 필수재조차 패배자들과 같이 쓸 수 없다 하여 민영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내가 내 능력 만큼 더 내고 더 나은 서비스를 받겠다. 늬들은 죽어라.

 

그를 위한 공정이다. 바로 '오징어게임'이다. 참가자 모두에게 주어지는 1억씩을 모은 456억을 가져가는 것은 최후의 승자 단 한 사람이다. 나머지는 죽어야 한다. 아니 죽여야 한다. 그래서 주인공 성기훈도 누군가를 죽였다. 죽도록 만들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뽑기'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줄다리기'와 '구슬치기'는 내가 살기 위해 고의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행동했던 경우였다. 심지어 구슬치기에서는 치매로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일남을 대상으로 사기까지 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주최자가 만든 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대를 속여도, 심지어 죽여도 주어진 룰 안에서 정당하며 그러므로 상금이야 말로 오로지 자신의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아마 조상우가 서울대 출신 엘리트로 설정된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게 악착같고 독했기에 조상우는 시스템 속에서 승자로 여겨질 수 있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한다. 게임을 만든 주최자인 일남이 아니다. 일남의 초대를 받아 막대한 돈을 뿌리며 관람하는 세계의 거부들도 아니다. 진행요원들조차 그들에 비하면 크게 대수로울 것 없는 룰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믿는다. 승리하면 저 돈은 내 것이다. 저들을 모두 죽여야 오로지 저 돈이 모두 내 돈이 되는 것이다. 룰이 그렇다고 말하므로 나는 옳다. 90년대부터 인터넷을 해 온 내가 요즘 꽤나 위화감을 느끼는 부분일 것이다. 법이 정의다. 법이 진리다. 법이 윤리고 도덕이다. 언제부터? 검찰이 그리 주장하고 판사가 그리 판결했다고 그것을 반드시 옳다 말할 수 있는가.

 

김기택이 문광을 박사장 집에서 내쫓았던 것처럼, 그래서 쫓겨난 문광이 살기 위해 박사장 집으로 다시 찾아온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돈인 것이다. 그러나 그 돈으로도 성기훈은 끝내 자기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 새벽의 동생을 구하고 조상우의 어머니를 구한 것은 같은 약자였던 성기훈의 인정이었다. 더구나 그 성기훈조차 살아남는데는 주최자인 일남의 인정과 관용을 등에 업지 않으면 안되었다. 너무나 적나라하지 않은가. 승자가 되라. 승자가 되면 모든 걸 할 수 있다. 부모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어린 시절 가르침처럼. 신랄한 것이다.

오래전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채플이라는 것이 있었다. 비싼 등록금 내고 들어온 학생들에게 학교라는 권력을 앞세워서 종교를 강요하던 시간이었다. 더구나 무려 필수과목이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 채플을 반드시 듣지 않으면 낙제처리 되었었다. 바로 그 채플의 한 시간이었다.


미국에서 배우고 돌아왔다는 목사였는데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소재로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네흘류도프가 구원해주려 했음에도 카츄샤는 그를 거부하고 타락의 시베리아로 떠났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워낙 인상적이라 지금도 그 대강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어째서 교회에서 미투운동이 보다 일찍 시작되었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신자들에 의해 철저히 묻히게 되었는가 이해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카츄샤를 타락케 - 정확히 매춘부로 전락케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네흘류도프 자신이었었다. 오히려 카츄샤를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려 했던 것도 네흘류도프 자신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카츄샤는 네흘류도프에 대한 증오나 원망조차 없이 차라리 홀가분하게 유형지 시베리아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더이상 네흘류도프라는 남성에, 러시아의 구체제에 의존하거나 구속되지 않겠다.


철저히 남성의 입장에서 본다. 하긴 다른 설교에서는 첩으로 삼았던 여자노예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고대유대인들의 여성인권, 정확히 야훼의 여성에 대한 인식을 변호하기도 했었다. 듣는 내내 이 뭔 개소리인가 어이가 없어 웃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야훼도 예수도 대부분 교회에서 남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카츄샤를 강간하여 고통을 주고 마침내 타락하여 죄인이 되게 한 것도 네흘류도프였으며, 그럼에도 카츄샤를 구원할 수 있는 것도 남성인 네흘류도프였다. 카츄샤는 오로지 남성인 네흘류도프에 종속된 타자이며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기독교와 설교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생각나서 끄적여 보았다. 전부터도 그다지 인상이 좋지 않던 개신교였지만 그 몇 번의 설교로 개신교에 대한 나의 인상은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건 도무지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 믿을 종교가 아니다. 저런 인간들이 성직자라 불린다면. 그렇다고 다른 설교자들이라도 멀쩡했으면 좋았겠는데 보다시피. 채플 때문에 평생 개신교 믿을 일은 없어진 경우라 할까?


그런데도 자기의 설교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개신교를 믿고 있던 제법 똑똑하고 행동거지도 바른 친구녀석도 저 설교를 열심히 변호하고 있었다. 원래 종교라는 것이 그렇다. 믿음이 이성을 망친다. 항상.

당연한 건데, 국가의 정책과 예산은 오로지 국가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한다. 기업의 정책과 예산 역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쓰여야 한다. 물론 순수하게 학술적으로 지원하는 예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학문은 순수할지 몰라도 국가의 정책까지 순수해서는 안된다. 그저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시작된 연구라 할지라도 연구결과에는 국적이 따라붙는다. 당장 노벨상수상자만 하더라도 이름 뒤에 어느 나라 출신인가를 함께 쓰고 있다. 공동체의 질적인 성장을 위해서라도 보다 문화적으로나 학술적으로도 고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느 정도 학계나 역사마니아들의 우려에도 공감하는 바가 있기는 하다. 정부에서 이런 식으로 정책을 세우고 예산을 배정하면 대개 엉뚱한 지역행사에 눈먼돈으로 흘러들어가기 쉽다. 실제 학술적 연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보여주기식 전시행정으로 소모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역사연구를 하라면서 연구예산은 없고 그를 빙자한 지역사업만 늘어난다. 오히려 역사가 소외된다. 하긴 그런 점에서 시작부터 허튼 짓을 못하도록 단도리를 칠 필요도 있다. 그러므로 사업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 그러니까 국책사업으로 국가적 목적을 위해 역사연구에 지원하려면 제대로 연구자들에게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연구결과야 연구자들의 양심과 능력에 달린 일이다.


국가정책이란 정치적이어야 한다. 당연히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정책도 수립되고 예산도 배정된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인간이 이루는 모든 사회는 정치적인 원리와 동기에 의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정부가 바라는 것은 영호남의 통합을 위한 가야사연구다. 가야사연구를 통해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최소한이나마 해소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도록 할 것인가는 최종실무자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학자들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역사학자들에게 그런 목적의 연구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가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관심이 있는 이들이 신청을 하고 지원을 받아 해당 연구를 해야만 한다.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모든 연구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앞서도 말했듯 정책연구가 아닌 순수연구에 대한 지원은 이전과 동일해야 한다. 아니라면 내가 먼저 까고 본다.


우려도 이해하고 이유도 동의하는데 그럼에도 너무 앞서가지는 말았으면 바라는 이유다. 학술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학문연구에 개입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지금 정부는 이전 정부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여건이다. 연구자의 절대수도 적고 환경도 지원도 모든 것이 열악하기만 하다. 정부가 기침 한 번 만 해도 뒤집힐 정도로 초라하다. 모르지는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지켜봐도 좋지 않을까. 의도와 다른 글이 되고 말았다. 정말 힘들다. 한국 고대사라는 게. 어렵다.

사실 진심어린 조언이란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저 툭 한 마디 내뱉고 돌아서는 것은 걱정도 충고도 아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왜 그런 번거로운 짓들을 사람들은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아무거라도 실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이 대단 존재라 여길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나로 인해 상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받고 어떻게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만으로 자신은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악플을 다는 심리도 그와 비슷하다. 아니 대부분 오로지 상대를 걱정하고 사회의 정의와 미래를 생각해서 굳이 그런 리플들을 달려는 것이니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상대가 반박못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즐긴다. 어쩔 줄 몰라하며 위축되는 모습을 즐긴다. 우월감이다. 그만큼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 곤란해하는 것은 당사자만이 아니다. 그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 가운데 상대의 주위를 이용해서 상대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된다. 걱정해서가 아니다. 함께 고민해주는 것도 아니다. 가학성이다. 그 순간 만큼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된다.


과연 명절이라고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조언을 들려주는 사람들치고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있던가. 다만 얼마라도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던가, 아니면 취업에 도움이 되도록 자기가 먼저 발벗고 힘써주던가, 재미있는 건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굳이 말로 이래라 저래라 다그치는 경우가 그리 없다는 점이다. 정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럴 능력이 된다면 나서서 도와줄 뿐 되도 않는 말로 위세를 떨려 하지 않는다. 말 많은 것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해 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리어 탓을 한다. 너 때문이다. 네가 문제다. 명분쌓기이기도 하다. 내가 그렇게 걱정해주었는데. 내가 그렇게 진심으로 조언도 해주었는데. 그러므로 더이상 내가 너를 도울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한 것이다.


어설프게 아는 친척들이 그래서 더 짜증나고 불쾌하다. 아예 모르거나, 아니면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거나. 진짜 가까운 사이라면 말 한 마디도 쉽게 내뱉지 않으려 한다. 명절이라고 어중이떠중이 다 모이는 탓이다. 오지랖의 이유다.

어려서 들었던 속담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남의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


그런데 감이든 배든 원래 제사상에 올라가는 것 아니었던가. 역시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홍동백서 좌포우혜 두동미서 조율시이...


그 진짜 뜻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원래 제사에는 감이든 배든 대추든 올리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인근에서 제철에 나는 것들 가운데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거나 모두가 맛있거나 혹은 귀하다 여기는 것들로 정성껏 조리해서 제사상에 올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방마다 집안마다 제사지내는 방식도 달랐다. 올리는 제수들도 달랐다. 그래서 가가례다. 집안마다 다르다 해서 가가례인 것이다. 그런데 남의 집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감놔라 배놔라 했으니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즉 지금 제사상은 이렇게 차려야 한다 따지는 자체가 '남의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짓 그 자체라는 뜻이다. 피자도 안되고, 바나나도 안되고, 그런데 정작 산적에는 햄이며 맛살같은 것이 들어가지 않는가 말이다. 무슨 상관인가.


가장 바보같은 짓거리일 터다. 제사는 이렇게 지내야 한다. 제사상은 이렇게 차려야 한다. 근본이 없으니 남이 하는 것만 열심히 살펴서 따르려 한다.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이니까. 예란 원래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제사가 중요한 것은 당시에는 조상을 공경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각자 믿는 종교에 따라, 각자의 처지나 사정에 따라 그에 맞게 격식을 갖추고 예를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원래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근대가 왜곡되어 버린 탓이다. 원래는 우리 스스로 극복했어야 하는 전근대였는데 일제가 중간에 끼어들며 전근대란 민족을 뜻하게 되고 말았다. 만들어진 전통을 민족의 이름으로 강요한다. 여전히. 아직까지도.


감이든 배든 자기들 사정에 따라 놓는 것이다. 오지랖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

부모가 모두 한국인이다. 친외조부모 역시 모두 한국인이다. 당연히 소녀시대 티파니도 혈통적으로 순수한 한국인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인이라면 설사 그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광복절과 욱일기의 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바로 민족이 가지는 허상이다.


민족이란 혈통적 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도자기명인으로 이름높은 심수관 가문의 경우 먼 조상이 조선인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들을 조선인이라 일컬을 수 있는가. 중국의 소수민족인 만주족 가운데는 보장왕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고구려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었으니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민족인가. 민족이라면 함께 공유하고 있어야 할 역사적 경험이나 문화적, 언어적, 정서적 동질성을 이들은 무엇하나 가지고 있지 않다. 


민족을 혈통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그쪽이 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같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서로가 존재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정된 공간 안에 오랫동안 함께 공존해 왔을 때 혈연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따라서 비례해서 높아진다 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시간 동안 불과 몇 번의 결혼만으로 몇 다리 건너면 거의가 사돈이 되고, 외가가 되고, 먼 인척이 된다. 그러니까 착각하는 것이다. 민족은 혈통이다.


어려서 아마 미국에서 자랐을 것이다. 국적조차 한국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서 교육받지 못했고 성장하지 못했다면 한국인 다수가 이해하는 가치에 대해 공유하기란 매우 어렵다. 미국에서야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인 특유의 무모할 정도의 낙관은 굳이 전쟁을 치렀다 해서 일본의 상징까지 사사건건 문제삼지는 않는다. 하필 그녀가 활동하는 곳이 한국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과연 티파니는 민족적으로 한국인인가? 일단 한국인의 후손은 맞다. 혈연적으로 한국인에 가까운 것도 맞다. 그러나 한국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여러 특징들에 대해 과연 모두 공유하고 있는가면 조금 생각해 봐야 한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한국인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상식들을 갖추지 못한 채 교육받으며 자랐다. 여전히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이기를 강요하는 것은 혹시 지나치게 일방적인 억압이나 폭력은 아니겠는가.


미국인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미국인으로서 자신이 교육받고 체화한 방식 그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었다. 만일 티파니가 미국인이었어도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었겠는가. 원래 남이 무슨 생각을 하든 사람들은 거의 관심이 없다. 남이 아니라 여기니 이리 오지랖들인 것이다. 하필 한국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아이돌그룹의 멤버였다. 그냥 생각해 보는 것이다. 티파니는 과연 한국인인가. 정답은 물론 없다. 항상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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