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물을 하나 빌렸다. 당연히 주인공은 이후의 상황들을 모두 꿰뚫고 있다. 이 역시 작가의 불안한 내면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회귀든 뭐든 상황을 혼자 모두 꿰뚫지 않으면 헤쳐나가기 힘들다. 그럴 자신도 의지도 능력도 없다. 재미있는 건 그래서 모든 걸 꿰뚫고 있으니 시작부터 남들과 다르게 잘 헤쳐나가고 있는데, 정작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그냥 지나치기만 한다.

 

"다른 사람을 구하느라 스스로 위험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이 문장이 내내 계속 반복된다. 한 권 빌려서 절반 좀 읽다가 때려쳤으니 이후로도 계속 나올 지 모르겠다. 수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이나 살았는데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나 아무튼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들을 외면하고 자기 갈 길만 감으로써 작가가 바라는 '쿨한' 영웅상을 완성한다. 내가 아포칼립스에 대한 지식을 알고 그를 헤쳐나갈 능력을 가진 것은 내가 잘살자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돕자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느니 나랑 내 주위만 잘 살고 보겠다. 어떻게 이런 소설이 E북으로 출판될 수 있었던 거지? 좋다는 사람이 많다는 거겠지.

 

내가 요즘 이른바 장르소설의 주인공들이 쉽게 이입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래도 얼마전까지는 조금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구하고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들이 대세였다. 자기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그래서 결국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그러나 자기가 가진 힘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이들을 사람들은 영웅이라 불렀다. 무협에서는 대협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영웅들이 사라졌다. 다른 곳에서 수 십만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자기 가족만 챙긴다고 아예 나몰라라 외면하는 놈들이 오히려 대세다. 그래서 소설이 아예 따로 노는 경우도 있다. 세계가 멸망할 정도로 전쟁이 일어나는데 주인공은 주위의 가족과 지인들과 되도 않는 농담따먹기 중이다. 결국 전권 빌렸다가 반도 못 읽고 돈만 날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소설들만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일까?

 

역시나 요즘 유행하고 있는 MZ세대까기로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주소비층도 아마 그들일 테니까. 작가들도 그 또래일 가능성이 높다. 글쓰는 것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세대에 따라 글쓰는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다. 쓰는 어휘나, 문법의 특징이나, 혹은 문장의 호흡 같은 것들이다. 그들이 좋아하니 결국 그런 소설들이 유행을 하는 것이다. 나만 살겠다. 내 주위만 잘살겠다. 다른 사람들이야 뒈지든 말든. 그런 것을 오히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 자찬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것이 세대차이라는 거겠지. 새삼 확인한다. 저들과 나는 인종 자체가 다르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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