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중세를 심지어 문명이 퇴보한 암흑기로 여기게 된 것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자신감과 그에 비례한 구시대에 대한 오만함에 가득차 있던 근대유럽의 지식인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유럽사회에 자신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정착시키려는데 당연히 구시대의 가치와 질서는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철저히 부정한다. 철저히 극복한다. 새로운 유럽을 만든다.


르네상스 이후 많은 유럽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중세의 유럽이 아닌 그 이전의 그리스와 로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 것도 그런 의도였다. 당장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이슬람과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보다 한참 앞서 있었던 이슬람의 부와 문명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있어 동경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하필 이교도였기에 동경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슬람이 아닌 이슬람문명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와 로마를 배운다. 정확히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다시 되살린다.


사실 많은 유럽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명과는 크게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오히려 로마제국의 전성기에 대부분의 유럽인들의 직계선조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족들로 로마인들의 정복대사이 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로마를 약탈하는 입장에 있었다.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결국 훈족에 쫓겨 장성을 넘었던 이들 게르만의 여러민족들이었고 보면 지금 유럽인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계승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쩐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로마제국이 있던 이탈리아반도마저 이들 이방의 야만족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로마인 역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시 말해 유럽의 중세란 원래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상실한 채 문명적으로 퇴보해 있던 시대라기보다는 오히려 야만상태에 머물러 있던 유럽인들이 비로소 서로마제국의 유산을 통해 조금씩 문명이라는 것을 배워가던 시기라 여기는 것이 더 옳은 것이다.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아니었던 중세의 유럽인들이 로마의 문명을 통해 어느새 그리스와 로마를 계승하는 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자신감이었다. 이만하면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히려 유럽의 중세가 있었기에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건만,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에 비하면 너무나 한심한 수준이던 유럽의 중세는 유럽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원래 없던 것이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잃은 것이다. 자신들의 직계조상들을 부정함으로써 더 멀리 있는 위대한 조상들을 가지게 된다.


즉 유럽의 중세가 암흑기라는 말은 고대로마에 비해 그렇다는 뜻이다. 아니 그마저도 고대로마는 이미 멸망한 제국이었다. 신화로서 고정되었다. 아무런 발전 없이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제국을 아직 살아있는 현실의 문명이 추월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러나 신화란 이상화된다. 과거 감히 누구도 견줄 수 없었던 고도의 문명을 세웠던 로마제국에 대한 기억은 그들을 이상화된 신화로 고정시키고 말았다. 유럽인들이 아무리 자신들만의 문명을 발전시켜도 여전히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유럽인들이 기억하는 고대로마는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여전히 유럽인들의 문명은 초라하고 비루하다. 저급하고 한심하다. 그같은 이상화된 선입견이 멸망한 고대로마제국과 비교하여 현재를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을 정당화하는 동기로 쓰이게 되었다. 사실상 이 단계부터 이미 고대로마를 벗어나 유럽인들만의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이름 아래.


바로 유럽의 중세가 암흑기여야 했던 이유였다. 그래야 로마가 될 수 있었으므로. 이상적인 로마로 다가가는 동기가 될 수 있었으니까. 지금까지의 유럽을 극복한다. 이제까지의 현실을 넘어선다. 로마가 된다. 지금까지의 현실인 유럽을 벗어나 이상적인 로마제국의 문명을 다시 되찾는다. 새로운 시대를 연다.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과거는 철저히 부정하고 잊는다. 과거의 유럽을 잊는다. 심지어 이 시기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구국의 영웅이던 잔다르크마저 비웃고 있었다. 과거의 무지와 야만이 만들어낸 허황된 신화에 불과하다.


간단한 것이다. 원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유럽인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마제국은 파괴되었고, 동로마제국은 유럽과 동시에 존재했으며, 이후 동로마제국의 영토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의 유산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처음으로 문명을 배웠고 문명화를 이루게 되었다.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한 번도 문명인이 아니었던 시절이 없었다. 고대로마의 문명은 곧 유럽인 자신의 것이다. 그것을 잇는 고리다. 암흑시대란. 

아무래도 소비수준이 높아진 때문일 것이다. 기왕에 먹는 것 맛있는 것으로 먹고 싶다. 맛도 좋고, 영양도 있고, 분위기도 있는 그런 곳에서 비싸더라도 제대로 먹고 싶다. 그래서 맛집열풍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 백종원으로 대표되는 직접 맛있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맛있는 것들로 마음껏 배불리 먹으려 하다가는 살이 찌고 만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상에서 벗어난 체형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살찐 것은 부도덕한 것이다. 살을 빼지 않는 것은 죄악과 같다. 이율배반이다.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으면 살이 찌고, 그렇다고 살을 빼자니 맛있는 것들을 마음껏 먹지 못한다. 먹고는 싶고, 살은 빼야겠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 먹게 하는 것이다. 내가 먹지 못하니까. 내가 먹어서는 안되니까. 남이 먹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맛을 상상하고, 그 느낌을 상상하고, 그 순간의 만족을 상상한다. 그것만으로도 즐겁다. 


욕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금욕은 인간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당위다. 당위는 도덕이 되고 정의가 된다. 금욕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그런데 욕망은 본능이다. 그래서 원래 역사적으로도 억압된 사회일수록 이상한 짓거리들이 발달했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추구하지 못하니 그늘에 숨어 대리만족을 발전시킨다. 얼마나 이 사회는 식욕을 부추기면서 한 편으로 식욕을 억압하고 있는가.


그러고보면 나도 역시 배불리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살찌는 것이 싫다. 배나오는 것이 싫다. 차라리 먹는 것을 줄인다. 배고픔을 참아낸다. 먹방을 보면 가끔 자신도 그런 쾌감을 느낀다. 맛있겠다. 배부르겠다. 좋겠다. 부러움을 넘어 그 느낌을 탐내고 가져오려 한다. 


식욕을 부추기는 것이나, 식욕을 억압하는 것이나, 심지어 억압된 욕망의 비틀어진 틈을 비집고 이용하는 모든 것이 자본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또한 욕망이다. 욕망이 욕망을 낳고 욕망을 억압하고 억압된 욕망을 이해한다. 이 사회의 구조를 보여준다. 문득 떠올리는 재미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은 아직 비주류에 머물러 있었다. 하는 사람들만 했다. 단지 인터넷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보통의 일반 대중과 다른 무언가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당연히 비주류로서 당시의 이른바 네티즌들은 사회의 주류에 도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유행하게 된 것이 바로 '엽기'코드였다.


엽기란 기성의 관습과 관성을 부수는 것이다. 기존의 인식과 사고를 부수는 것이다. 혐오스럽고 기분나쁠수록 그것은 옳은 것이었다. 당시도 차마 두려워서 클릭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유행처럼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김구라의 등장 또한 그런 연장에 있었다. 당시 기만적이고 권위적인 기성언론을 비판하며 상스럽고 저렴한 언어로서 인터넷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딴지일보의 한 컨텐츠로써 '김구라와 황봉알의 시사대담'은 시작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금기인 - 그것도 아주 지독할 정도의 욕설들을 공공연히 내뱉어가며 사회각분야를 씹어대는 방송은 그 가운데서도 열렬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 역시 당시 김구라의 방송을 즐겨 듣던 애청자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 당시 인터넷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김구라의 열렬한 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후련했다. 통쾌했다. 아무도 그렇게까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입이 바로 간질간질한데 누구도 감히 나처럼 들을 욕해주지 않았었다. 불만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항상 불만은 넘친다. 그래서 여기 블로그에서도 내 글은 항상 표현이 거칠다. 세상에 불만이 많던 그야말로 아웃사이더를 위한 방송이었다. 그마저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2002년의 대선은 어쩌면 그같은 인터넷 대중들의 뿌리깊은 비주류의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 것이다. 인터넷이 대통령을 만들었다. 인터넷의 힘으로 마침내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인터넷은 비주류가 아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치면서 과감한 정책적 지원과 투자로 고도로 발달한 한국의 인터넷환경은 인터넷이라는 자체를 대중화 보편화시켰다. 이제는 인터넷 없이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인터넷을 지배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 네티즌이다.


이제는 오히려 평가하는 입장이 되었다. 사회의 기성권력에 도전하던 비주류에서 어느새 대상을 평가하고 때로 응징할 수 있는 또다른 권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문희준과 타블로였다. 백만안티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 가운데 자신들의 힘으로 문희준을 어떻게 해아겠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냥 놀이였다. 그냥 게임이었다. 그래서 더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것이다. 그에 비해 타블로의 경우는 타블로를 파멸시키겠다느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대중의 눈에 전과 전혀 다름없이 방송을 하는데도 꼰대라 불리게 된 김구라가 그 다라진 위사을 말해준다.


아니꼬운 것이다. 피곤한 것이다. 늬들이 뭔데 사실 일베를 만들어낸 것은 인터넷에서조차 어느새 권위를 앞세우기 시작한 일부 극성 네티즌들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깨시민이라 말하기도 한다. 전과 하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은데 이미 사회적 위치부터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실질적힌 힘이 그들의 손에 쥐어지고 있었다. 그 힘이 실제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수의 힘으로 더욱 인터넷에서 자신과 다른 소수자들을 억압한다. 반발하여 예전 그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엇나가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엽기다. 혐오와 공포와 불쾌감이 기존의 관성과 인식을 부수는 쾌감으로 돌아온다.


과거와 똑같다. 일베에도 그것은 단지 놀이다. 무언가를 실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일관된 의지가 없다. 공유하는 목표나 의식이 없다. 조롱하며 논다. 비웃으며 논다. 모욕하며 논다. 그런 자신들을 욕하는 것을 들으며 역시 계속해서 논다. 문희준을 욕하던 때처럼.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시 네티즌을 비웃던 기성의 권위들처럼 기성의 네티즌들은 인터넷을 경멸함으로써 자신의 정의를 달성한다.


솔직히 일베와 2000년 초반 유행하던 엽기코드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때 유행하던 것들 가운데는 당시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마저 상당했다. 그리고 이제 일베가 인터넷의 주류가 된다면 이번에는 또다른 엽기코드가 일베에 도전장을 내밀게 될까.


물론 가치의 문제다. 정의의 문제다. 인간으로서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선 표현들도 적지 않다. 비판한다. 부정한다. 이 사회가 고유하는 보편의 정의를 부정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권력이 바뀌기까지 기성의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틀렸다 여기지 않는다. 다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도전인 결국 반역으로부터 시작된다. 반역은 패역이다. 무도다.


문득 떠올랐다. 벌써 오래전 옛날이야기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김구라의 욕이 대중적 코드이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 불쾌해하고 혐오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즐겼다. 다른 일반의 대중이 보는 그 모습은 어땠을까. 역사는 반복하며 발전한다. 김구라는 스타MC로서 확실히 방송의 주류가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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