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핵무기는 전략무기가 될 수 없다. 당연히 전술무기도 될 수 없다. 다음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한 번 쓰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핵에는 핵밖에 없다. 상대에게 핵무기가 없어도 기존의 핵보유국들이 완전한 파멸로 이를 수 있는 그같은 무모한 도박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는다. 누구라도 먼저 핵을 사용하는 순간 모든 핵보유국, 열강들의 제제를 받아야 한다. 그것도 가장 끔찍하고 완전한 형태의 제제을 가능성이 높다.


누구보다 북한이 그것을 더 잘 안다. 설사 남한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해서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없다. 일본에 핵미사일을 떨어뜨려 초토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없다. 미국 본토에 대륙간탄도탄을 떨어뜨리면 뭐라도 크게 변할까? 바로 미국의 핵보복에 의해 북한체제는 물론 북한영토 전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바뀌게 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북한정권이 무력에 의해 뒤집히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그것을 실전에서 쓸 수 있겠는가?


그러면 북한은 어째서 별 쓸모도 없는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을까? 사실 핵보유국이라는 타이틀도 현실적으로 그다지 메리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열강을 제외하고 인도와 더불어 제 3세계 국가로는 드물게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은 파키스탄의 경우를 보자. 그래서 뭐가 크게 달라졌는가? 그래서 뭐라도 더 나아진 것이 있는가? 말이 핵보유국이지 국제사회에서 이렇다 할 발언권 하나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냥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나마도 기존의 열강들이 인정해주어야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이 공인했을 때 핵무기보유라는 것도 국제사회에서 실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당장 그것이 문제다. 미국은 전혀 북한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미국이라고 모르지 않는다. 어차피 북한이 개발하는 핵무기라고 해봐야 실전에서 사용했다가는 아예 북한이라는 나라 자체가 지도에서 사라질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을. 북한이 핵보유국을 선언해도 중국과 러시아가 동의하지 않으면 국자사회에서 아무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 실제 효력을 발휘하려면 일단 핵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다시 첫번째 경우로 돌아가게 된다. 핵무기를 쓰면 파국이다. 그런데 핵무기를 쓰지 않으면 결국 국제사회의 공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사실을 인정하고 협상에 나오지 않는 이상 북한은 실전에서 써먹지도 못할 핵무기 개발에 모든 자원과 노력, 비용을 쏟아부어야 한다. 언제가 될 지 모르는 기약없는 인정을 위해 자기 살을 깎아 가며 버텨야 한다.


북한의 도발이 부쩍 잦아진 이유다. 인내심이 바닥난 것이다. 더이상 버틸 여력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제발 들어달라. 제발 알아달라. 중국까지 질려하고 있다. 중국의 입장마저 돌아보지 못할 만큼 북한은 막다른 상황으로 몰려 있다. 사실 그래서 더 문제다. 북한이 저리 발악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체제보장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북한이 살려면 개혁개방은 필수일 텐데, 자칫 그 과정에서 북한 체제가 붕괴된다면 남 좋은 일만 하는 꼴이 될 수 있다. 북한이라는 나라와 나라의 국민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지도부란 최소한 북한 정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동안 북한주민들을 끝없이 희생시켜가며 온갖 사치와 영화를 누려온 이들이다. 기득권을 내려놓기에는 그동안 그들이 누려온 것들이 너무 크고 달콤하다. 그러니 북한이 스스로 개혁개방에 나서더라도 자신들의 기득권만은 최소한 보장해달라. 바로 미국에게서. 그런데 미국이 아에 무시해 버리니 자기 혼자 달아올라 버렸다.


부시 정부와는 다르다. 클린턴 정부와도 다르다. 두 정부 모두 대외문제에 있어 적극적인 개입을 마다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부시정부의 지리한 소모와 낭비를 부채처럼 짊어지고 출범한 정부였다. 지나치게 대외문제에 개입할 경우 당장 자신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정부였다. 한국정부의 입장도 김대중, 노무현과는 크게 다르다. 만일 체제보장을 약속받으려 했다면 노무현 때 조금 더 인내하고 굽히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한국정부가 괜찮다는데 미국정부가 괜히 나서서 수고와 비용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북한정부의 오판이다. 오히려 지금 대미관계에 있어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정부다.


스스로 만든 함정에 갇혀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정부에도 마냥 좋은 일인가면 그것은 아니다. 결국 만에 하나 최악의 경우 북한정부가 막다른 지경에서 상상하기도 끔찍한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사회가, 국민들이 감수해야 하는 안보환경의 비용이다. 북한이라는 변수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이상 한국정부에 정장이라는 최악의 불확실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물며 핵무기를 동반한 위협이다. 다만 정작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미국에게 그것은 단지 남의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외면하는 이상 북한의 의도와 요구는 받아들여질 리 없고, 그때까지 지금처럼 도발만 하다가는 체제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시간이 문제다. 아무것도 않고 그저 북한이 안에서부터 무너지기만 기다릴 것인가. 적절히 북한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북한의 붕괴를 통제가능한 범위 안에 가둘 것인가. 현정부가 추진하는 것이 바로 전자,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것이 후자다. 북한의 체제변화도 남한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조율하고 통제하여 피해를 최소화한다. 이익을 극대화한다. 무엇이 최선인가는 결국 조금더 시간이 흐르고 결정될 문제다.


답답할 것이다. 핵무기를 뜯어먹고 살 수는 없다. 원자폭판을 집삼아 침대삼아 매일매일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써먹을 곳이 없다. 정작 써먹을 수 있는 곳에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관심을 돌려야 한다. 이제는 핵실험 좀 했다고 동요하는 사람마저 그리 많지 않다. 쓸 수 있는 카드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된다. 자칫 위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스스로 걸어들어간 함정이다.

루퍼트 머독이라면 여러 메이저 언론사를 소유한 언론재벌이다. 자기가 소유한 언론사이니 자기 입맛대로 기사를 쓰도록 만든다. 그래서 뭐가 잘못되었는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지분을 사들였고, 따라서 자신이 소유한 언론사가 돈값을 해주기를 바란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보다 확실한 권리가 어디 있는가.


독자의 권리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내 돈을 들여 해당 언론사의 기사를 소비한다. 그러므로 언론사의 기사에 대한 권리가 자신에게도 있다. 언론사의 보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자기가 보고자 하는 보도만을 내보내도록 소비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무기로 삼아 압력을 행사한다.


그저 조용히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절독한다. 상관없다. 그래서 부수 떨어져사 재정이 악화되면 자연스럽게 망하는 거니까. 그렇더라도 마지막까지 언론은 자기 양심에 따라 보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무기삼아 기사를 강요한다. 양심을 강요한다. 보도에 압력을 가한다. 정상인가?


루퍼트 머독이 괜히 욕먹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루퍼트 머독의 언론권력은 현실이다. 독자라고 하는 권력 역시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언론이 그에 굴복해야 하는가는 별개다. 한 번 굴복하고 나면 더이상 언론으로서 자기 양심을 지켜내지 못한다. 현실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대중의 눈치조차 보지 않는 언론이 하나 사라진다는 것이 한 사회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대중의 입맛에 맞는 보도만을 하는 언론만 남는다면 그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독자이기 이전에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라 하는 것인데. 어찌되든 알아서 잘들 하겠지. 재미는 있다.

아마 이솝우화였을 것이다. 길잃은 새끼양을 보고 늑대는 자기가 새끼양을 잡아먹어야 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떠든다. 그리고 새끼양은 그때마다 늑대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말이 막힌 늑대는 그냥 새끼양을 잡아먹어 버리고 만다.


다수를 상대로 싸울 때 가장 짜증나는 게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근거도 이유도 없다. 이놈저놈 말이 다 다르다. 그래서 하나하나 반박하다 하나 얻어 걸리면 그리로 대동단결이다. 다구리가 무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저기 덤비다 막혀도 한 곳멘 뚫으면 그곳으로 아주 몰매를 놓을 수 있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유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어진다. 자신마저 어이없이 속아넘어가고 만다. 그게 진짜 이유였던 양 의분에 차서 행동에 나선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짜 이유였는가는 지나온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돌고 돌아 마지막에 이르는 곳이 어딘가면, '태도'다. 전가의 보도다. 말하는 태도가 글러먹었다. 말하는 투가 기분나빠서 옳은 말인데도 들어주지 못하겠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이유던가.


사람 많은 곳에 어지간하면 가지 않는 이유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 문득 사람들과 멀어져 자신마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니 그제야 내가 무엇을 실수하고 있었는가 깨닫게 된다.


그나저나 시사인도 참 무모하다.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적 선택의 문제다. 독자랑 싸워서 뭘 어쩌려는 것일까? 진상은 진상이고 진상이랍시고 괜히 함부로 대하면 정상적인 손님마저 떨어져나가는 것은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말이 진상이지 진상 역시 자기와 같은 손님이라 생각한다. 자기와 같은 손님인데 함부로 대한다 여기게 된다.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과 싸우자는 것은 장사 그만두자는 소리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시시비비를 가리는 수준이라면 이번 고재열 페이스북은 완전히 싸움이네.


다시 말하지만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를 갖는다. 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장사 망하더라도 손님 안받는다면 그것도 권리다. 하지만 출판사라는 게 그렇게 유지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책 팔아서 그야말로 휴지값도 안 나온다.


뭐랄까 감정적으로 그냥 갈 데까지 가보자는 상황인 것 같다. 그만큼 시사인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일 테고. 어지간했으면 이렇게까지 날선 반응은 아니었을 텐데, 상처를 헤집을 때 사람은 여유를 잃고 날카로워진다. 시사인도 이제 얼마 안 남은 듯.


어차피 시사인 하나 망한다고 세상에 크게 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MBC가 저 모양 됐다고 뭐가 크게 달라졌던가? KBS야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싸움의 끝이 보인다. 안타깝지만 예정된 결론이었다. 진상 싫으면 가게 문 닫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항상 느끼는 바다.

장사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이거다.


"어디 감히 손님에게!"


부당한 요구에 대해 완곡하게 거절하려 해도 그것이 마치 자기를 대단하게 모욕이라도 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손님을 이기려 든다."


일단 손님이 말했으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먼저 허리부터 굽히고 나서 다음 이야기를 시작해도 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긍정하고 복종하고 따르고 난 다음에 손님 나가고 나면 그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것이다.


왜냐면 손님은 왕이니까.


도대체 누가 만든 말인지, 감히 손님에게 아닌 건 아니라 말도 못한다. 안되는 건 안된다 말해서도 안된다. 손님은 무조건 옳다.


소비자의 권리란 무엇일까? 자기가 논리적이라 착각한다. 자기가 논리적이니 옳다. 정확히 옳으니 논리적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는가. 노인들 말 막히면 하는 말이 있다.


"어디 감히 버릇없이 어른을 이기려 드느냐?"


어른이나 손님이나. 소비자도 벼슬이다. 자기 딴에는 왕이다.


그럼에도 자기는 진상이 아니다. 세상에 자기가 진상인 사람은 없다. 

삼국지 조조의 일화다. 어느날 조조의 군영에 쌀이 떨어졌다. 담당자가 조조에게 상의해왔다.


"남은 쌀이 얼마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조조는 일단 병사들에게 보급을 줄이라 명령했다. 당연히 병사들은 반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담당자를 불러 대뜸 목부터 잘랐다.


"이놈이 쌀을 빼돌려서 보급이 줄어든 것이다. 이제부터 다시 원래대로 보급을 돌린다."


덕분에 담당자를 욕하며 조조의 은혜에 감복한 병사들로 인해 전쟁에서 이겼다던가?


원래 불만에 가득한 놈들 다루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나쁜 놈 하나 만들면 끝이다.


어째서 교실 안에서는 왕따가 이루어지는가. 교실만이 아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거의 어디나 왕따가 있다.


"저놈이 나쁜 거다. 그러니 우리가 저놈을 응징하자."


나쁜 놈 하나 응징하는 동안 그들은 하나가 된다. 그들은 정의가 될 수 있다.


"저기 빨갱이가 있다!"


한국전쟁 이후 아주 지겹도록 들어왔던 이야기다. 일단 빨갱이라는 말 한 마디면 그동안의 불만이나 논란도 모두 그만두고 빨갱이 잡는데 모두가 하나가 된다. 빨갱이를 때려잡는 그 가학과 성취감이 현실의 불만을 대신한다.


최근 그 '빨갱이'는 '베충'과 '메갈'이 대신하는 듯한 느낌이다. 뭐만 하면 베충이다. 뭐만 하면 메갈이다. 한때 그것은 타블로였다. 아주 짧았고 국소적이었지만 잠시 가수 적우가 그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대상을 악마화한다. 어떤 이유든 붙여서 대상을 악으로 정의한다. '악'이란 더이상 어떤 논의도 비판도 필요치 않은 절대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를 응징하기 위한 자신들의 모든 수단을 정의롭다. 이를테면 제주학살 당시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목으로 강간과 약탈, 방화, 학살을 일삼던 서북청년단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자신의 불순한 욕망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배설함으로써 현실을 잊고 만족을 얻는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항상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논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공격이다. 항상 증오의 대상을 찾고 그를 증오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에 대한 다른 반론들은 단지 부당하게 악을 변호하는 '실드'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들은 옳고 그들은 틀렸다.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틀린 것이다. 이문열이 그것 하나는 제대로 봤다. 최근 가장 가까웠던 예가 바로 중국의 홍위병들이다.


무엇이 옳은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자신들이 옳게끔 만들 수 있다. 그럴 힘이 있다. 그것을 항상 확인해야 한다. 반대자들을 짓밟고, 비판자들을 억압하며, 오로지 한 가지 정의만으로 악을 응징하는 것이 유일한 의미이고 가치다.


그만큼 현실이 우울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우울하니 하루에도 몇 시간 씩 인터넷에 매달려 별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들추며 정의로운 놀음에 날을 지새는 것이다. 의외로 일베든 메갈이든 오프라인에서는 그다지 크게 이슈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일베가 이슈가 되었던 것은 그들의 사회의 강자인 기득권과 결탁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현실에서 실제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갈에서 여성들이 아무리 크게 떠든다고 - 더구나 그 배후에 정의당이니 뭐니 있다고 과연 자신들에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하지만 커져야 한다. 대단해져야 한다. 악이어야 한다. 용서해서는 안되는 악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정의로울 수 있다. 자신들의 행동이 정의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드러난 행동들이란 과연 일베나 메갈 등과 얼마나 다른 것이 있는가. 대상이 일베와 메갈일 뿐 하는 말이나 행동들은 근본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동기는 같다. 그냥 배설하고 싶다. 단지 서로가 악마화시키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사람은 집단이 되면 때로 쉽게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만다. 양심도 이성도 집단에 맡겨 버린 사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잃어 버린다. 2차세계대전은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다수니까 옳다. 대중이니까 옳다. 과연 그것이 근거가 된다 여기는가.


개인도 하는 짓이 한심하면 경멸해마지 않듯 대중 역시 마찬가지다. 대중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웃음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대중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고 얼마든지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대중의 뒤에 숨는 것처럼 한심하고 비루한 짓거리도 없다. 자신들이 대중이기 이전에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틀렸기에 비판도 하고 조롱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정하는 것은 '헬조선'이라는 말처럼 그들의 삶이 얼마나 각박한가 하는 것이다. 일베도 다르지 않다. 메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으니 그저 맹목적인 증오에만 매달린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비틀린 만족이나마 누군가를 공격함으로써 얻으려 하는 것이다. 어쩌면 기득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도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현실에서 실제 행동으로 무언가를 바꾸는 것이다.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는 것에는 비판적이다. 무언가 나서서 행동하려는 이들에 대해서는 냉소적이다. 그들의 정의는 오로지 인터넷이라는 공간 안에만 머문다. 그것이 쉽고 또 안전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우울하기 때문이다. 그 우울한 현실을 잊으려 하기 때문이다. 잊으면 된다. 다른 것을 이용해서라도 잊을 수 있으면 된다. 현실은 이렇게 나약하고 비루하다. 비겁한 정의다. 증오로만 해소될 수 있는 정의란. 현실이 한심하다.


그리고 이름하여 전범기. 누군가 그러더라. 국기모독죄로 신고해야 한다. 그렇게까지 이같은 합성이미지를 혐오하고 불편해해야 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전부터도 나는 인터넷의 자칭진보네 자칭야권이네 하는 인간들 그다지 탐탁치 않았다. 조금만 파 들어가 보면 결국 새누리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 본질을 깨닫게 된다. 차라리 시사인보다는 조선일보가 낫다. 그들의 솔직한 속내다. 그동안 참느라 많이 고생했다.


아무튼 둘 중 하나일 게다. 단어 하나만 넘어가면 이해력이 딸리는 얼간이거나,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거나. 개인은 존중하는데 집단은 존중하지 않는다. 집단을 등에 업고 설치는 인간들은 더더욱.


재미있어졌다. 확실히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내가 이해한대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다. 사람만 여럿 모인다고 똑똑해지는 것은 아니다. 거의 본질에 가깝다.

권력의 권자는 원래 저울 권자다. 저울이란 규준이다. 계량하고 판단하는 기준이다. 정의를 계량하고 진실을 판단하는 것이 바로 권력의 역할이었다. 법을 만들고 도덕을 강제하고 진실여부를 판단한다. 그래서 많은 시대 많은 사회에서 권력이 맡아온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재판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누구에게 더 정의가 있고 진실이 있는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권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때로 판관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은.


이를테면 드라마 '왕건'에서 궁예가 보여주었던 관심법과 같은 것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 역시 문자의 옥을 통해 진실을 꿰뚫는 자신의 혜안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단서만으로도 자신은 모든 진실을 꿰뚫을 수 있다. 모두가 자신을 속이려 하지만 결코 자신은 그들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근대사회 어느 왕조에서나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진실을 만들 수도 있다.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모두 죽인 다음 사실을 조작하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 그래서 군왕이 된 자는 부끄러움도 없고 잘못도 없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을 것이다. 타블로의 학력을 가지고 거의 모든 인터넷이 들끓었을 때 보인 모습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주 작은 꼬투리라도 잡아서 그것을 확대하여 사실로 확정한다. 다수의 네티즌들이 자신들이 찾아낸 사실들을 공유하며 진실을 만들어간다. 어떤 전문가보다, 어떤 공인된 기관보다 자신들이 더 정확히 사실을 알고 진실을 꿰뚫고 있다. 그리고 그처럼 자신들끼리 만들어낸 진실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타블로는 물론 그 주위까지 괴롭히기 시작한다. 직접 집까지 찾아가고, 집요하게 타블로에 대한 악플을 달고, 그러면 타블로가 끝끝내 지쳐서 진실을 털어놓을 것이다. 타블로와 같은 거짓말장이 외국인이 더이상 이 사회에 발붙이고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진실이며 정의다.


그들이 자신들과 다른 주장이나 의견을 내놓는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에 대해 오만하다 비판하는 이유다. 오만하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주제넘는다는 뜻이다. 충분히 자겨과 실력을 갖추고 남들보다 높은 곳에서 솔직하게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을 굳이 오만하다고까지 말하지는 않는다. 수학선생님이 학생에게 문제의 풀이와 답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주는 것을 오만하다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라 하는 것은 실제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프로팀에서 선수로 뛰었던 사람이 사회인 야구팀에서 기술이나 전술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고 가르치려 한다면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지 건방지다며 비난하는 경우란 역시 거의 없다. 자격이 없다. 실력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들과 다른 생각이나 주장은 틀린 것이다. 틀린 것을 옳은 것처럼 고집하고 있으니 그들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의견이나 주장을 내놓고 있으니 더이상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


그러면 과연 네티즌들이 주장하는 근거라는 것은 항상 옳은가. 벌써 예를 들지 않았는가. 거의 다수의 네티즌들이 타블로의 학력위조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공격에 동참하거나 최소한 침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네티즌들이 내놓은 근거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처럼 타당한 것들이었는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타블로의 태도나 대응을 문제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자신들이 옳았던 부분도 있지 않은가. 타블로가 잘못한 부분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다수가 그같은 주장에 동의했을 때 그것은 사실이 된다. 그것이 전부다. 다수가 자신의 주장을 인정하고 동의해준다는 것. 다수가 곧 정의다. 집단이성이라기보다는 집단의 광기다. 고장난 CPU 수만개를 모아봐야 알파고는 커녕 고철고만 될 뿐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홈그라운드니까. 인터넷이란 자신들의 공간이니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비슷한 생각들을 공유한다. 어차피 비슷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다. 인터넷은 개방적인 듯 보이면서 의외로 폐쇄적이다.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매우 억압적이다. 오히려 외부의 강제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더욱 개인의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 다수가 허용하는 폭력은 정의다. 단지 인터넷에서 텍스트로 이루어지는 폭력이기에 자각조차 없다. 악을 몰아낸 쾌감을 서로 공유하며 결속을 강화한다. 일베나 메갈리아나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생겨난 것들이 아니다. 일베니까 당연하다. 메갈리아니까 자연스럽다. 서로가 서로의 정의를 담보하고 증명해준다. 그곳에서 자신들은 전혀 아무 문제도 없다. 일베나 메갈리아나 단지 인터넷 커뮤니티에 불과한 자신들의 집단과 정체성에 대해 자부심 비슷하게 공유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외부의 공격은 단지 정의로운 자신들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다.


굳이 일베와 메갈리아를 먼저 지적했지만 다른 커뮤니티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그 폐쇄성은 단지 자신들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집단적인 행동으로 곧잘 표출되고는 한다. 특정한 이슈에 대해 자신들이 얼마나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가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다. 다르다는 것은 곧 분란이며 어그로다. 악은 퇴치되어야 한다. 단지 그 극단에 일베와 메갈리아와 같은 정상을 벗어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같다. 단지 그 모든 모순이 모이며 집약된 것이 일베와 메갈리아라는 특수한 공간이었을 뿐이다. 어디에나 있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없다. 일베와 메갈리아가 특별하다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인터넷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느 커뮤니티든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굳이 어그로가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민감하고 폭력적인 집단의 반응에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사람도 넓은 인터넷에서는 적잖이 일어난다. 그래도 쫓겨난 사람이 원래 잘못한 것이다.


이미 자기들끼리 합의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사실이고 진실인지. 이미 결론이 내려졌으니 다른 의견따위 전혀 필요치 않다. 자신들이 내린 결론을 뒷받침할 근거들이 필요한다. 항상 결론이 먼저다. 근거는 나중에 따라붙는다. 직관이 먼저고 그 다음에 논거와 논리가 뒤따라온다. 그를 거스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리 전문적으로 교육받고 훈련받은, 실무에서 경험까지 쌓은 전문가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틀리다 말하면 틀린 것이다. 왜냐면 자신들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근거가 된다. 소수로서 다수를 설득하려는 것은 가르치려는 오만이며 월권이다. 판단은 자신들이 한다. 결론도 자신들이 내린다. 그리고 자신들은 항상 옳다. 항상 옳을 수밖에 없도록 자신들이 근거를 찾아낸다. 완결된 세계에 다른 가능성이란 없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만든다. 그것이 정의다. 다른 답은 필요없다.


하긴 그래서 더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폭력성을 띄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초의 이슬람이 포교를 위해 전쟁을 시작했던 이유였다. 볼셰비키가 소수파에서 이름 그래도 다수파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정의란 원래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아직 소수의 커뮤니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자신들은 다수라 주장하지만 대한민국 전체만 놓고 보더라도 모든 커뮤니티든 단지 한 줌도 안되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소수로써 다수의 보편을 추구한다. 폭력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다수라는 사실만이 오로지 자신들의 정의를 담보하는 근거이기에 다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소수를 억압하고 축출함으로써 다수를 유지한다. 누군가 뭐라도 한 마디 더하면 모두가 동의해주는 동질의 다수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언제나 옳다.


선민이란 다른 누군가가 그리 주장하거나 입증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동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은 무오류의 신성한 존재가 된다. 자신들은 누구라도 비판할 수 있다. 모욕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항상 확인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권력이란 폭력과 정의의 합성어인 것이다. 여기서 정의는 곧 권력의 의지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은 정의여야 하고, 자신들이 정의이기에 폭력까지도 모두 옳다. 바로 권력의 논리다. 대중은 권력이다.


자신들이 보는 것만을 인정한다. 정확히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인정한다. 그밖의 것들은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들이다. 있더라도 없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이야 말로 정의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항상 자신들이 진실을 꿰뚫고 악을 응징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항상 옳을 수밖에 없다. 어쩐 비판도 조언도 필요치 않다. 완전무결하다. 차라리 신성이다.

사람이 가장 과격해지는 것은 언제일까? 대개는 둘 중 하나다.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거나, 아니면 더이상 지켜야 할 것이 없을 때다. 남성들이 이른바 남초사이트에서 서슴없이 여성을 비하하고 대상화하는 행위들을 일상화하며 공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누군가 문제삼더라도 결국 아무일도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굳이 결과를 책임질 필요가 없다면 얼마든지 과격해질 수 있다.


반대로 아랍의 가난한 어머니들이 죽은 자식을 위해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자살테러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더이상 자식도 세상에 없고 이제 곧 자신도 죽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다만 하나라도 믿고 기댈 희망이 있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지 않는다. 희망이란 내일이다. 이제 곧 자신이 누리게 될 미래다. 아무도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죽음으로 내달린다는 것은 차라리 절망에 더 가깝다. 더이상 아무것도 지킬 것도 지킬 수 있는 것도 남아있지 않다면 차라리 자기를 비롯해 보는 것을 부숴버리는 편이 낫다. 


과연 메갈리아나 워마드는 여성으로서 여성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가. 그런 것 없다. 그냥 배설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느껴온 분노와 억울함, 좌절감, 절망 들을 그저 모두가 모인 공간에서 배설하며 즐기는 것이다. 미국 정부군에 쫓기며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리던 원주민들의 발악과도 같던 마지막 축제를 떠올린다. 정작 정부군이 바로 코앞까지 추격해 왔는데도 원주민 전사들은 모닥불 주위를 돌며 약에 취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고 있었다. 어리석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어차피 자신들에게는 더이상 아무 희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더 나아질 것은 어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전혀 자신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 많이 배우고 이론적으로도 투철한 활동가들이야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견디기조차 버거운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런 꿈과 같은 이야기들을 믿고 기다리기에는 현실이 너무 갑박하다. 어째서 메갈리아나 워마드 등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행동들에도 많은 여성들이 그리로 이끌릴 수밖에 없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욕이라도 하고 본다. 소리라도 지르고 본다. 발악이라도 해보고 본다. 다행히 그곳에는 자신들이 하고픈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주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메갈리아 논쟁의 시발도 그저 메갈리아에서 판매하는 T셔츠의 문구에 동의했던 어느 여성 성우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었었다. 단지 메갈리아의 여러 주장 가운데 일부를 동의하여 인용한 것이 자신의 직업에까지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지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많은 진보언론과 지식인들이 메갈리아보다는 정확히 메갈리아에 우호적이던 여성을 공격하는 대중과 대립하게 되는 계기였었다. 메갈리아의 운영진이 누구이고 무엇을 추구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원래 시작도 그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많은 여성들이 메갈리아나 워마드와 같은 극단적인 주장에 공감하고 여성들이 주류를 이루는 커뮤니티에서 그런 주장들이 재생산되고 있는가. 어쩌면 이 사회의 평범한 다수는 아닐지 몰라도 적지 않은 수의 여성의 입장에서 그들을 헤아릴 필요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메갈리아를 공격하는 이들은 그들의 외모마저 문제삼고 있다. 혐오를 혐오한다면서 자신들이 혐오를 실천하고 있다.


실제 메갈리아 등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문제가 되는 글들은 단지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일부러 더 과격한 언어로 투사하는 배설들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행동으로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이 없다. 실제 현실에서 이런 문제들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이나 토론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냥 배설하고 그런 배설을 공유하며 그 안에서 나름의 만족을 얻으려 할 뿐이다. 어떤 투철한 이념에서라기보다는 그저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현실에 대한 반발이라 보아도 좋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런 다수의 절망에 빠진 여성들에게 충분한 대안과 희망을 보여주지 못한 여성주의 리더들에 대한 비판을 끊임없이 해왔던 것이었다. 기존의 여성주의가 여성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이런 식의 극단적인 행동에 동의하는 여성들이 이렇게까지 많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메갈리아 논쟁에 여성과 여성주의까지 휩쓸려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메갈리아를 핑계로 아예 여성에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글이나 주장을 보면 노골적인 혐오와 경멸을 감추지 않는 다수의 남성들이야 말로 대부분의 여성들이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평소 여성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척 하지만 메갈리아가 오히려 그들의 민낯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부정하고, 여성이기에 당하는 불이익을 부정하고, 여성주의 자체를 아예 근본적으로 부정하려 한다. 심지어 자기 딸에게는 밤늦게 인적없는 골목에서 남성을 보더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도록 교육시키겠다는 당찬 남성에 이르면 현실인식이 이렇게 다르구나 깨닫게 된다. 그저 그동안 명분이 없어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척 해왔을 뿐 처음부터 그들은 여성의 현실에 대해 이해하지도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바로 그런 남성들을, 그리고 그런 남성들에 의해 길들여진 남성화된 여성들을 현실에서 수도 없이 만나고 부딪혀야 한다.


어째서 회사에서 여성을 채용해서는 안되는가. 여성을 채용하더라도 인사와 급여에서 불이익을 주어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이기심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여성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을 즐기려 자신에게 투자하면 그마저도 불편한 눈으로 보며 타이르려는 이들마저 적지 않다. 여전히 여성은 성실하고 선량한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으로 남지 않으면 안된다. 그같은 요구에 따를 수 없는 여성들은, 따를 수밖에 없더라도 불만을 삭여야만 하는 여성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모여서 남들 듣는 데서는 하지 못할 말들을 공유하는 것이야 남성들도 거의가 하는 것이다. 남초사이트 게시판을 스스로 여성이라 가정하고 살펴본다면 참 가관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소해야 하는 욕망이란 것이 인간에게는 있다.


이를테면 포르노와 같은 것이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자 도구다. 성욕만이 욕망은 아지다. 식욕을 위한 포르노도 존재한다. 이른바 먹방이라 불리우는 것들이다. 현실의 불만을 배설할 수 있는 포르노도 필요하다. 서로 욕하고 비웃고 경멸하고 조롱하며 심지어 자신마저 비하하고 멸시한다. 그것을 즐긴다. 일베도 사실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일베와 메갈이 서로 닮았다는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서로가 가진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이 보다 강한 힘에 기대어 그를 흉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닮았다. 약자를 경멸하고 혐오한다. 약한 자신을 멸시하고 증오한다. 그들은 과연 자신이라고 사랑하거나 존중하고 있을까? 파괴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메갈리아나 워마드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에게 여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이다. 바로 그 자체가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의 이유다. 그들의 동기다. 그들의 신념이다. 어차피 더 나아질 것은 없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전략도 계획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은 중심없고 무질서하다. 그래서 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려운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없다.


아무튼 역시 재미있는 것은 메갈리아와 관련한 논란에서 여전히 비판자들에게 오히려 비판적인 이들에게 가해지는 일베와의 비교일 것이다. 일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듯 따져묻는 사람들을 본다면 이 역시 무의식이 아니겠는가. 과연 메갈리아 논란이나 남혐여혐의 현상들이 반드시 성의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단지 그저 편리한 대상들에 자신들의 분노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에 간단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촌스런 것이다. 그리고 유치한 것이다. 개인은 그래도 된다. 그냥 이름없는 다수의 대중들은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도 사회란 품이 있고 격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공당이 하는 일인데 판단도 결정도 실천도 그만큼 고민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보다 어이가 없었다.


"오유야 미안해"


미안할 짓은 처음부터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정히 미안한 일이 있다면 사과도 격식을 갖춰서 예를 갖춰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게 뭔가?


저런 걸 소통이라 착각한다. 저건 소통이 아니다. 비루한 것이고 비굴한 것이다. 그토록 자신들이 옳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저렇게 해서는 안된다. 진심이 아니기에 그렇다. 진심이 아니기에 진심인 척 꾸미느라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진다.


사람이든 집단이든 자존을 잃으면 그때부터 안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허세라도 없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사람이 견디며 살아갈까. 참 못났다. 이래서 내가 진보를 싫어한다. 지적허영심 빼면 저놈들은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다 몸서리쳐진다. 웃고 만다.

나는 모든 전직대통령을 욕한다. 물론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들이야 처음부터 자격이 없었으니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최초의 문민정부였던 김영삼이나, 마침내 민주화세력이 주도하여 정권교체를 이뤄낸 김대중, 그리고 비주류의 신화 노무현, 뿐만 아니라 그를 뒤이은 대통령들까지. 그러고 보니 참 대통령으로 인정할만한 사람도 몇 없다는 게 대한민국 현대사의 슬픈 부분이다.


아무튼 굳이 전직대통령이고 세상에 없는 고인이라고 내가 저들에 대한 욕을 삼가야 할 이유를 지금으로선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살아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천수를 다하고 자연사한다면 하늘이 저들을 벌주지 않은 것을 원망할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 총 들고 쳐들어가서 쏴 죽이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저 인간 죽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면 기쁘기도 할 것이다. 죽고 나서는 죽은 인간 모욕하며 분을 풀지 않을까.


전직대통령이고 고인이라고 그를 모욕하는 행위가 잘못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다. 다만 방송등을 통해 몰래 그같은 의도를 내보내려는 시도는 비겁하기에 문제가 된다. 모욕하고 싶으면 당당히 모욕하라. 욕하고 조롱하고 비웃고 싶으면 당당히 그렇게 하면 된다.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자신의 권리다. 그런데 그것을 숨어서 한다. 남을 속여가며 한다. 비판은 언제나 당당해야 한다.


또다시 일베의 전직대통령비하가 문제가 되고 있다. 뭐 그러려니 한다. 지나칠 정도로 반사회적, 반역사적인 행위만 아니라면 그럴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때로 그 선을 아주 심각하게 넘는다는 것이 문제지 그런 정도로 뭐라 하기에는 나부터가 노무현에 호의적이지 않다. 모든 사람이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속이지 말고 당당했으면. 그나마 그것이 자신의 행위를 변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유치하다. 그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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