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장 과격해지는 것은 언제일까? 대개는 둘 중 하나다.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거나, 아니면 더이상 지켜야 할 것이 없을 때다. 남성들이 이른바 남초사이트에서 서슴없이 여성을 비하하고 대상화하는 행위들을 일상화하며 공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누군가 문제삼더라도 결국 아무일도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굳이 결과를 책임질 필요가 없다면 얼마든지 과격해질 수 있다.
반대로 아랍의 가난한 어머니들이 죽은 자식을 위해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자살테러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더이상 자식도 세상에 없고 이제 곧 자신도 죽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다만 하나라도 믿고 기댈 희망이 있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지 않는다. 희망이란 내일이다. 이제 곧 자신이 누리게 될 미래다. 아무도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죽음으로 내달린다는 것은 차라리 절망에 더 가깝다. 더이상 아무것도 지킬 것도 지킬 수 있는 것도 남아있지 않다면 차라리 자기를 비롯해 보는 것을 부숴버리는 편이 낫다.
과연 메갈리아나 워마드는 여성으로서 여성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가. 그런 것 없다. 그냥 배설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느껴온 분노와 억울함, 좌절감, 절망 들을 그저 모두가 모인 공간에서 배설하며 즐기는 것이다. 미국 정부군에 쫓기며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리던 원주민들의 발악과도 같던 마지막 축제를 떠올린다. 정작 정부군이 바로 코앞까지 추격해 왔는데도 원주민 전사들은 모닥불 주위를 돌며 약에 취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고 있었다. 어리석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어차피 자신들에게는 더이상 아무 희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더 나아질 것은 어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전혀 자신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 많이 배우고 이론적으로도 투철한 활동가들이야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견디기조차 버거운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런 꿈과 같은 이야기들을 믿고 기다리기에는 현실이 너무 갑박하다. 어째서 메갈리아나 워마드 등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행동들에도 많은 여성들이 그리로 이끌릴 수밖에 없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욕이라도 하고 본다. 소리라도 지르고 본다. 발악이라도 해보고 본다. 다행히 그곳에는 자신들이 하고픈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주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메갈리아 논쟁의 시발도 그저 메갈리아에서 판매하는 T셔츠의 문구에 동의했던 어느 여성 성우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었었다. 단지 메갈리아의 여러 주장 가운데 일부를 동의하여 인용한 것이 자신의 직업에까지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지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많은 진보언론과 지식인들이 메갈리아보다는 정확히 메갈리아에 우호적이던 여성을 공격하는 대중과 대립하게 되는 계기였었다. 메갈리아의 운영진이 누구이고 무엇을 추구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원래 시작도 그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많은 여성들이 메갈리아나 워마드와 같은 극단적인 주장에 공감하고 여성들이 주류를 이루는 커뮤니티에서 그런 주장들이 재생산되고 있는가. 어쩌면 이 사회의 평범한 다수는 아닐지 몰라도 적지 않은 수의 여성의 입장에서 그들을 헤아릴 필요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메갈리아를 공격하는 이들은 그들의 외모마저 문제삼고 있다. 혐오를 혐오한다면서 자신들이 혐오를 실천하고 있다.
실제 메갈리아 등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문제가 되는 글들은 단지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일부러 더 과격한 언어로 투사하는 배설들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행동으로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이 없다. 실제 현실에서 이런 문제들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이나 토론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냥 배설하고 그런 배설을 공유하며 그 안에서 나름의 만족을 얻으려 할 뿐이다. 어떤 투철한 이념에서라기보다는 그저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현실에 대한 반발이라 보아도 좋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런 다수의 절망에 빠진 여성들에게 충분한 대안과 희망을 보여주지 못한 여성주의 리더들에 대한 비판을 끊임없이 해왔던 것이었다. 기존의 여성주의가 여성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이런 식의 극단적인 행동에 동의하는 여성들이 이렇게까지 많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메갈리아 논쟁에 여성과 여성주의까지 휩쓸려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메갈리아를 핑계로 아예 여성에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글이나 주장을 보면 노골적인 혐오와 경멸을 감추지 않는 다수의 남성들이야 말로 대부분의 여성들이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평소 여성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척 하지만 메갈리아가 오히려 그들의 민낯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부정하고, 여성이기에 당하는 불이익을 부정하고, 여성주의 자체를 아예 근본적으로 부정하려 한다. 심지어 자기 딸에게는 밤늦게 인적없는 골목에서 남성을 보더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도록 교육시키겠다는 당찬 남성에 이르면 현실인식이 이렇게 다르구나 깨닫게 된다. 그저 그동안 명분이 없어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척 해왔을 뿐 처음부터 그들은 여성의 현실에 대해 이해하지도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바로 그런 남성들을, 그리고 그런 남성들에 의해 길들여진 남성화된 여성들을 현실에서 수도 없이 만나고 부딪혀야 한다.
어째서 회사에서 여성을 채용해서는 안되는가. 여성을 채용하더라도 인사와 급여에서 불이익을 주어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이기심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여성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을 즐기려 자신에게 투자하면 그마저도 불편한 눈으로 보며 타이르려는 이들마저 적지 않다. 여전히 여성은 성실하고 선량한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으로 남지 않으면 안된다. 그같은 요구에 따를 수 없는 여성들은, 따를 수밖에 없더라도 불만을 삭여야만 하는 여성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모여서 남들 듣는 데서는 하지 못할 말들을 공유하는 것이야 남성들도 거의가 하는 것이다. 남초사이트 게시판을 스스로 여성이라 가정하고 살펴본다면 참 가관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소해야 하는 욕망이란 것이 인간에게는 있다.
이를테면 포르노와 같은 것이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자 도구다. 성욕만이 욕망은 아지다. 식욕을 위한 포르노도 존재한다. 이른바 먹방이라 불리우는 것들이다. 현실의 불만을 배설할 수 있는 포르노도 필요하다. 서로 욕하고 비웃고 경멸하고 조롱하며 심지어 자신마저 비하하고 멸시한다. 그것을 즐긴다. 일베도 사실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일베와 메갈이 서로 닮았다는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서로가 가진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이 보다 강한 힘에 기대어 그를 흉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닮았다. 약자를 경멸하고 혐오한다. 약한 자신을 멸시하고 증오한다. 그들은 과연 자신이라고 사랑하거나 존중하고 있을까? 파괴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메갈리아나 워마드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에게 여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이다. 바로 그 자체가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의 이유다. 그들의 동기다. 그들의 신념이다. 어차피 더 나아질 것은 없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전략도 계획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은 중심없고 무질서하다. 그래서 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려운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없다.
아무튼 역시 재미있는 것은 메갈리아와 관련한 논란에서 여전히 비판자들에게 오히려 비판적인 이들에게 가해지는 일베와의 비교일 것이다. 일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듯 따져묻는 사람들을 본다면 이 역시 무의식이 아니겠는가. 과연 메갈리아 논란이나 남혐여혐의 현상들이 반드시 성의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단지 그저 편리한 대상들에 자신들의 분노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에 간단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