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더욱 떠오르는 인터뷰가 있다. 자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를 찍었다.


벌써 전부터 그런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자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누구를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아주 제대로 명치를 얻어맞았다. 하는 일마다 모두 젊은 세대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노인들을 공경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젊은 세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노인들이란 없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질시하고 어떻게든 그들에 위해를 끼치려 하는 늙은이들이 있을 뿐이다.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자기들은 그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노력으로 지금의 삶을 일구었다. 그러므로 노력하라.


즉 자신들처럼 되어라.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서 출발하라.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나타났다. 


여전히 노인 다수는 그 누군가를 지지한다. 한결같다. 자신들이 기대한 바를 이루어주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싫어한다. 젊은이들이 곤란해한다. 젊은이들이 좌절과 절망을 느낀다. 자신들의 기쁨이다.


지나친 것 같지만 아주 망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자식세대가 힘들어도 그 힘들게하는 정책을 펴는 정치인과 정당을 지지한다.


이미 노인 자신이 젊은이를 적으로 여기고 있다. 안타까운 이유다. 경로사상은 의미없다. 현실이다.

오래전이다. 아마 노무현 정부 때였을 것이다. 이영훈이 100분토론에 나와서 한 이야기들로 한바탕 시끄러웠었다. 물론 다수는 이영훈을 비난하는 쪽이었다. 그럴 때 분연히 일어나서 어리석은 대중을 질타하며 민족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역사의 진실을 밝힌 양심적인 교수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잘한 인간들은 잘 기억도 나지 않고 그 가운데 한윤형과 노정태를 기억한다. 아, 한윤형 얼마전에 한바탕 당했던가?


그들의 논리는 한 가지였다. 민족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이다. 한민족이라는 민족이 없는데 어찌 민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 당시 합법적인 정부는 일본제국이었고, 일본제국의 조선총독부였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바로 이들 조선총독부로부터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본 정부가 자국민에 대해 저지를 잘못이고, 그 과정에서의 모든 책임은 일본이라고 하는 국가나 민족이 아닌 결정하고 집행한 개인들에 있다. 조선인 가운데서도 그에 부역한 개인들이 적지 않았기에 책임을 한국인 역시 같이 져야만 한다. 


탈민족이 대세였던 터라. 민족을 부정하고 역사를 보려니 저런 재미있는 결론이 나온다.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해방이 되지 않았으면 일본인으로 더 풍요로운 사회에서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 한탄하던 진보지식인도 있었다. 민족을 말하는 모든 것이 부정한 것이고 부당한 것이다. 민족을 벗어난 것만이 옳다. 더불어 아마 한윤형의 경우 위안부 문제를 굳이 남녀문제로 치환하려 했을 것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윤형이 진보진영에서 데이트폭력 문제로 매장당하다시피 한 것이 재미있어서다. 종군위안부-혹은 일본군 성노예의 본질은 주류남성에 의한 주변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다. 종군위안부에 대해 부정적인 일부 극렬페미니스트들의 주장도 이와 통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런 한윤형이 진보내 여성주의자의 타겟이 되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이영훈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여전히 한결같다. 일관되다. 자기 양심을 걸고 하는 짓거리다. 같은 서울대였기에 이영훈 교수의 양심을 믿고자 했던 한윤형이나 역시나 서울대 출신의 진보지식인들 역시 그런 점에서 매우 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진보를 믿지 않는 이유다.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배운 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머리로만 진보다. 입으로만 진보다. 좌파의 현실이다.


메갈리아 논쟁에서 일정 부분 비판자들에게 동의하는 부분이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현실과 한참 오래전부터 유리되어 있었다. 사실 메갈리아도 그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여성주의가 아닌 남성혐오에 더 쉽게 기대게 된다. 여성주의란 무엇인가. 하지만 여성의 현실과 밀착해서 여성들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는 페미니즘은 없었다. 길을 잃으면 사람은 극단이 되기 쉽다. 아무튼 재미있다. 그리운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성과랄 것도 없다. 방문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니. 괜히 국내언론과 정치권에서 더민주 초선의원들의 방중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확대해석하며 일을 키웠을 뿐이다. 중국을 직접 찾아가서 중국 현지의 여론을 듣고 한국의 다른 주장들에 대해서도 전한다. 원래 외교는 채널이 많을 수록 좋다. 그렇게 한 편으로는 강경으로 한 편으로는 유화로, 하지만 외교조차 국내정치의 연장으로 보는 덜떨어진 인간들이 있다.


더 웃기는 것은 어떻게든 결과를 냈어야 했다며 그러지 못할 것이면 아예 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똑똑한 인간들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더민주라도 나서서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의 끈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 자체로 성과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일이면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국회의원이 되어서 어찌 가만히 있는가?


당장 시중의 여론도 그렇다. 중국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중국과의 관계악화가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당장 한국경제의 상당부분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크든작든 직간접적이든 중국과 관계 않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더민주의 지지율이 그것을 보여준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그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 발목을 잡은 것은 누구인가. 똑똑하다고 항상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있으라. 정부가 그렇게 결정했다. 대세가 그렇다. 여론이 그렇다. 손익이 안맞는다. 현실이 불리하다. 하지만 해야 한다. 해야만 한다면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거창한 의도로 시작한 방중이 아니었다. 판을 엉뚱하게 키운 것은 사드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몰린 정부와 보수언론이었다. 그것을 받아 덥썩 문 것이 똑똑한 네티즌들. 참 잘도 낚인다는 생각이다. 그만하면 되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정한다.

그냥 한 마디만 묻고 싶다. 지금 세계의 수많은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나라들 가운데 중국에 대해 할 말 다 하며 사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중국의 입장이야 어떻든 우리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며 마냥 밀어붙일 수 있는 나라가 미국 제외하고 과연 있기나 할까?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장 중요한 논리는 바로 힘이다. 그리고 이익이다. 이익만 된다면 자국이 자랑하는 예술작품도 보이지 않도록 천으로 가릴 수 있다. 과연 지금 자신들이 옳다 해서 하는 행동이 자신보다 강한, 혹은 무시할 수 없는 다른 누군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장차 자기 나라에 어떤 결과로 돌아올 것인가. 감정적으로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 이전에 냉정하게 따지고 계산해야 할 문제다.


위안부협상이 어째서 저처럼 졸속으로 이루어졌는가. 위안부문제로 일본과의 감정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아예 단절하다시피 했었다. 과연 대한민국이 일본을 이처럼 마냥 무시한 채 버틸 수 있는 나라인가. 여전히 세계 2위의 경제강국이다. 군사력에 있어서도 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이다. 미국과의 관계도 있다. 무엇보다 바다 건너 바로 튜브만 타고도 건너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위안부는 위안부 외교는 외교다. 독도는 독도 일본과의 외교는 외교다. 단지 감정적으로 불편하다고 외교를 단절한다? 그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마추어도 이런 아마추어가 없다. 국민이야 몰라서 그럴 수 있다. 굳이 그런 복잡하고 엄격한 사실들에 대해 고려할 여유도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일단 대통령이고 정부이고 여당 아닌가. 그런 일 하라고 적지 않은 급여와 수많은 권한과 의전들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보다 한 차원 높게 한 발 앞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대주의라 한다. 적국에 영합한다 말한다. 그래서 언제부터 중국이 적국이었는가? 중국에 우호적인 행동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관계인 것은 언제부터였는가? 바로 누구 때문인가?


사드는 사드 중국외교는 중국외교다. 사드를 배치할 수밖에 없다면 그 만큼 중국정부에도 이해를 구하고 일정부분 양보하는 제스처를 취할 수 있다. 미국도 중요하지만 중국 역시 중요하다. 반미도 멍청하지만 반중도 만만치 않게 멍청하다. 반일도 바보짓이다.


돌아가는 이야기가 우습다. 저것이 과연 정부인가. 저러고 있는 것이 과연 이 나라의 국정과 외교를 책임질 정부이고 여당인 것인가. 언론은 무엇인가. 국민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다수의 국민은 그런 것에 관심도 없다. 대단하다. 여론이 웃는다.

얼마전 컴퓨터가 고장나서 한참을 헤맨 적이 있었다. 원인은 리셋단자에서 일어난 이상전류. 리셋단자에 스위치를 연결하면 이상전류가 발생하여 메인보드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무한재부팅. 그런데 설마...


무심코 파워단자와 리셋단자를 함께 연결한다. 메인보드를 테스트해도 굳이 리셋단자만 따로 테스트하지 않는다. AS센터에 가서 고장여부를 확인할 때도 파워버튼만 건드려 부팅여부를 확인하지 리셋단자의 이상전류까지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는다. 그런 건 정밀검사로 따로 들어가야 하는데 과연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할만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차근히 하나하나 원인을 따지다 보면 언젠가는 찾아내기야 하겠지만 과연 언제이겠는가.

하지

그동안 원인을 몰라 이것저것 부품을 갈아끼고, 용산의 서비스센터까지 왕복하고, 그 사이 컴퓨터를 쓸 수 없으니 피씨방에서 게임을 대신하고, 그 비용을 모두 더하면 최소 몇 만원은 나오지 않을까? 그래서 하다하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동네수리점에 맡기고 돌아나오면서 최소 한 5만원은 부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5만원쯤 불러도 나로서는 굉장히 싸게 한 것이라고. 10만원은 조금 비싸지 않을까. 그런데 웬걸? 아주 미안한 목소리로 2만원이라 말한다.


얼마나 시달렸을까? 굳이 부탁하지도 않은 컴퓨터 내부정리에, 무한재부팅으로 멈춰 있던 윈도우 설치까지 알아서 모두 끝마쳐놓고 있었다. 쇼트가 원인이지만 내부가 너무 엉망이라 그런 것일 수 있다. 그 정도 변명은 용인해 준다. 인터넷을 찾아보더라도 컴퓨터 수리비에 대한 원성들이 자자하다. 수리점 없이 혼자서 컴퓨터를 고치려면 도대체 얼마의 시간과 돈이 더 들어가야 할까?


어쩌면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다. 어째서 닭 한 마리의 값은 얼마인데 치킨값은 그 몇 배나 받고 있는 것인가. 집에서 만들어 먹으라. 닭을 자신이 먹는 치킨과 똑같이 조리해서 먹으려면 도대체 얼마의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들어갈까? 하나의 맛을 개발하는데도 막대한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간다. 그를 위한 회사도 운영해야 하고, 그러자면 사람도 고용해 써야 하고, 각종 기자재며 설비도 필수적이다. 원가만 따질 것이면 아무 노력도 않고 이익도 챙기지 말라는 것인가. 자본주의는 가치를 극대화하는 데 그 목적을 가지며, 그것을 이루는 것이 생산자의 노력이고 지식이고 기술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니까. 직접 만져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무심코 무시하게 된다. 당장 거기에 필요한 유형의 원자재들만을 보게 된다. 리셋단자에 쇼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그것 알아내자고 따로 돈이 더 들어갈 리 없지 않은가. 그저 부품 하나하나 떼어내며 이상여부를 확인하면 된다. 그게 참 귀찮은 짓이다. 지루하고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것을 대신한다. 무엇보다 리셋단자의 이상을 의심할 정도면 그동안 컴퓨터를 다뤄 온 경험과 내공이 보통은 넘는다 할 수 있다. 그저 개인 컴퓨터나 만지작거리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결국 수리점에 맡긴 탓에 아낀 나의 시간과 노력과 비용들을 계산해 본다. 그래서 2만원이란 비싼 비용인가. 5만원도 사실 결코 비싸다 할 수 없는 가격이다.


그럼에도 직접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의심하며 따져묻는다. 어떻게 그렇게나 받아먹을 수 있느냐며 시비를 건다. 그만큼 수리기사의 말투는 지쳐 있었다. 그만큼은 받아야 가게도 유지되겠지만 그럼에도 받기 어려울 것을 알기에 굳이 변명거리를 만든다.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까지 더한다. 내가 더 미한하다. 곰곰히 생각했다. 과연 그것이 그렇게 미안해 할 일인가.


사회전반에서 발견되는 문제다. 공장노동자는 과연 그저 사용자로부터 월급만 받아먹는 존재인가. 누군가 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을 하는 것은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이다. 그 가운데는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도 적지 않다. 깡그리 무시한다.


새삼 확인한다. 얼마나 한국사회에서 사람의 존재란 하찮은가. 사람이 가진 지식과 경험과 기술의 가치란 이처럼 보잘 것 없는가. 보이는 것만을 보고 직접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한다. 즉물적 세계다. 일차원의 사고다. 덕분에 컴퓨터는 잘 쓰고 있다. 이어진다.

현대과학에 대해 알면 알수록 결국 불교의 사유에 빠져들고 만다. 정확히 고대 인도인들의 상상력이다. 인간과 그리고 우주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은 물음이다. 과연 우리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우주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러나 시간을 거스르고 또 거슬러 고대인도인들이 찾아낸 대답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시작은 없다. 당연히 끝도 없다.


우주의 탄생 이전에 대해 상상해 보자. 불가능하다. 우리가 경험으로, 혹은 선험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지금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인간의 지식이란 존재하는 우주 가운데서도 아주 일부만을 인지하고 인식할 것이다. 그런데 우주는 바로 우주의 탄생 이후 당연한 말이지만 생겨난 것이다. 수십억년의 광대한 공간도, 시간도 모두 우주과 더불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이 탄생하기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무엇이 있었는가고 묻는 자체가 공간과 시간을 전제하는 것이다. 공간도 시간도 없는데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존재했을까? 최소한 인간이 아는 형태의 존재는 아닐 것이다.


의식을 넓혀간다. 인간에게서 지구로, 태양계로, 은하계로, 우주로, 그리고 그 너머로. 우주는 과연 얼마나 넓은가? 우주 밖에서 보는 우주는 얼마나 거대한가? 공간도 시간도 존재하기 이전의 우주 이전의 우주를 기준으로 우주는 얼마나 거대해졌는가? 공간이 없으니 우주가 얼마나 거대해졌는가의 기준도 없다. 시간이 없으니 우주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의 기준도 없다. 우주라고 하는 자체가 없다. 태양이라는 거대한 천체 가운데 원자 하나에서 전자가 지나가는 경로에 있던 한 지점이란 태양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존재하지 않는 한 점에서는 과연 지금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러면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간은 인지할 수 있을까?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그토록 인간이 진화를 통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오랜 과학적 추론과 관찰, 실험의 결과가 어째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는가. 어떻게 우연이라는그 불확실한 과정을 통해 인간이라는 무엇보다 특별한 존재가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유일한 존재인데 우연이 그런 존재를 만들어냈다는 가정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 인간중심의 사고다. 인간이란 특별한 존재이기에 다른 특별한 존재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을 것이다. 지구와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그 특별한 존재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인간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수소원자 표면위로 전자가 스치는 궤적의 작은 흔들름만도 못한 존재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한에 가까운 우주에서 고작 태양계 하나, 그 태양계 가운데 행성 하나, 그 행성 위에 존재하는 고작 50억의 개체들에 불과하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인간과 같은 존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인간이 아무리 진화라고 성장하더라도 우주적인 차원에서 끼칠 수 있는 영향이란 거의 없다시피하다. 과연 지구에만이라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훼손하고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지구적인 규모에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해도 좋을 정도다. 그저 때되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태풍조차 미리 예방하거나 중간에 없애지 못한다. 멸종한 종은 새로운 종이 대체할 것이고, 바뀐 환경은 그에 적합한 새로운 종을 출현시킬 것이다. 인간이 마침내 사라졌을 때 지구와 지구의 환경에는 어떤 영향을 남기게 될 것인가. 그 영향은 과연 얼마나 이어지게 될 것인가.


그냥 우연히 무작위로 키보드를 두드리도록 세팅해놓은 컴퓨터에서  수십억년의 시간 동안 한 부분을 떼어 놓고 보니 세익스피어의 문장과 유사한 것이 발견되었다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의 어느것도 완벽하지 않다. 완결되어 있지 않다. 수많은 허점이 있고 나머지 짜투리가 있다. 그 가운데 유의미한 몇 가지만이 현실에 발현되어 존재한다. 인간의 게놈 가운데 그 역할이 밝혀진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수십억년이다.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 시간이다. 그 시간을 인간은 제대로 묻기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묻고 묻고 또 묻는다. 사유하고 사유하고 또 생각한다. 한바탕 물거품과 같다. 비로소 빅뱅을 통해서 우리가 아는 시간이 생겨났다. 공간이 생겨났다. 비로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간이 아직 없다면 공간을 인식할 수 없다. 시간이 아직 없다면 시간 역시 의식할 수 없다. 얼마나 큰가도 알 수 없다. 얼마나 작은가도 알 수 없다. 얼마나 오랜가도 당연히 알 수 없다.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찰라이기도 하고 영원이기도 하다. 다행히 인간의 의식은 제한적이나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다만 그 너머의 것까지 보기에는 인간의 의식은 한계가 있다. 우주란 과연 무엇인가. 그 우주에서 인간이 가지는 위치란 어떤 것인가. 인간이란 우주적인 규모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때로 허무하기도 하다. 히틀러의 학살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우주적 규모에서 본다면 그냥 아주 찰라의 원자핵보다도 작은 티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 자기가 한 만큼 당연히 대가를 받게 된다. 그만큼 각자의 행위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그러나 당장 한국에 사는 자신에게 브라질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살인사건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어린 소녀를 강간한 범인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 얼마나 대단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 선도 악도 없다. 죄도 벌도 없다. 현상만이 존재한다. 의미는 인간이 만든다. 빅뱅 이후 태어난 시간과 공간처럼.


하기는 그래서 더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마저도 없다면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은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가. 그냥 인간의 의식이 인간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없이 단지 인간의 의식이 인간을 현실에 존재할 수 있게 한다. 존재할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하고 색을 칠한다.


논란의 해법은 간단하다. 우주적 규모에 있어서 지구의 위치는, 그리고 인간의 크기는. 우주씩이나 신경쓸 필요도 없다. 수십억년의 지구 가운데 모두가 이간에 신경쓸 필요도 없다. 단지 인간이 특별한 것이 문제다. 인간인 자신이 특별하다. 특별한 곳에서 왔다. 재미있다.

올인은 퇴로가 없다. 따거나 아니면 모두 잃는다. 딴다고 모두 따는 건 아닌데 잃는 건 확실히 모두 잃는다. 그나마 돈만 잃으면 상관없는데 돈을 모두 잃고 나면 당장 살아갈 수단을 모두 잃게 된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한 판이다.


혼자라면 상관없다. 혼자 죽는 것이야 누가 뭐라겠는가. 아내 수술비다. 딸 등록금이다. 아들이 사고당해 받은 보험금이다. 당장 집 전세 계약할 돈이다. 그런 걸 두고 흔히 미쳤다고 말한다. 그런 인간은 가장으로서 자격도 없다.


민주주의의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든 외교든 군사들 올인은 결코 있어서 안된다. 잘되면 좋지만 자칫 잘못되면 그대로 망하는 것이다. 한 사람만 망하는 게 아니다. 단지 국가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퇴로를 만든다. 여지를 만든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가능성도 아직 이 사회 안에 남아 있다. 대안이 남아 있다.


사드배치가 중국을 자극할 것이라는 것은 세 살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당장 중국을 근접에서 감시할 수 있는 수단이 미국에 주어진다. 중국의 많은 중요한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미국에 넘어갈 위험이 있다.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단지 그 가능성만으로도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밀히면 강대국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뻔히 옆나라에서 자신들에 위해가 될 수 있는 행동을 실제 하려 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위신에도 크게 손상이 간다. 국내외적으로 중국정부가 손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의 요구를 마냥 거절할 수는 없다. 미국이 사드를 배치하자는데 동맹국의 입장에서 마냥 못하겠다 버티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일단 들어주어야 한다. 대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설사 전쟁이 일어나 미국의 편에서 파병하게 되었더라도 중국에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야 한다. 미국과 동맹관계라 어쩔 수 없이 입장을 함께 하는 것일 뿐 대한민국 자신이 중국을 적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직접 설명은 못하더라도 적당한 정치외교적 제스처를 통해 중국의 반감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중국의 원한을 사서 적대하게 되는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예 중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면 모를까 결국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공존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숙명이다.


사드는 배치해야 한다. 그에 대한 논의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반발하는 중국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설득을 시도해봐야 한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이해를 구해야만 한다. 원래는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여당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최소한 사드배치로 인해 양국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통제하고 관리해야만 한다. 그것이 외교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도 여당도 전혀 아무것도 않은 채 오히려 중국에 대한 적대감만을 키우고 있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국민들로 하여금 오히려 중국에 적대감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래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 중국과 사이가 나빠져도 그다지 대한민국과 국민들에 실질적인 피해는 없을 것이다. 사이가 나빠지는 자체가 피해인 것이다.


결국 정부도 여당도 하지 않는다면 야당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물론 정부와는 달리 야당 국회의원들이 중국에 가서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국가간에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국회의원 개인자격으로 찾은 것이기에 거기에서 나눈 대화나 했던 말들에 대해 어떤 구속력 같은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양국 정부는 굳이 필요없다 싶으면 그냥 무시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야당 국회의원들이 현지에 가서 의견을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차라리 중진급 거물이 아니기에 크게 정치적 외교적 부담 없이 자신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또다른 대한민국의 목소리를 현지에 전하고 민간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최소한 여기 있는 이들 초선국회의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중국의 적이 아니다.


전쟁이 아니다. 일사불란할 필요는 없다. 전쟁중에도 굳이 모두가 하나의 전략만을 쫓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만에 하나의 퇴로를 만들어둔다. 정부가 한다고 모든 것이 옳은 것도 아니고,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반드시 국가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당장 중국과의 관계에서 만에 하나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도 노력을 벌써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일부는 - 아니 다수는 끊임없이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중국정부에도 명분이 된다. 한국정부가 미국의 편에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양국 사이가 서로 긴장해야 하는 불편한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정부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삐져서는 아예 생까고 외면하는 것은 한 나라의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초선의원인 것은 그만큼 부담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다. 중진이 아니기에 그만큼 말과 행동에 무게가 실리지 않고 한국정부나 중국정부 역시 조금 더 가볍게 그들의 행보를 지켜볼 수 있다. 그마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현정부의 참을 수 없는 옹졸함이다. 국민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외교를 전쟁으로 착각하는 무지함이다. 그래서 사드 배치하고 중국과 적대하면 영영 중국 안 보고 살 것인가? 중국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고 동떨어져 살려는 것인가? 그런 와중에도 더민주 내부에서 다른 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것이 더민주 모두의 뜻은 아니라고 하는 역시 또다른 퇴로다. 초선의원들의 어설픈 혈기가 그같은 무모한 행동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물론 원내대표 우상호가 그들의 뒤를 받쳐주고 있다.


바로 어제 전쟁했어도 오늘 당장 화해하려 나서야 하는 것이 중국과 한국의 관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도 그토록 처참한 피해를 입고서도 조선조정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바로 이웃해 있는데 여전히 적대하고 있어서야 국가적으로 너무 많은 비용이 소모된다. 언제 다시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지 몰라 군비에만 모든 자원을 쏟아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국에는 당장 대한민국의 경제적 이익까지 걸려 있다.


창구는 여러개 만드는 것이 좋다. 굴은 여러개 파놓는 것이 좋다. 다행히 더민주 초선의원들이 주로 민간을 대상으로 현지 여론을 듣고 한국국민의 입장을 전하겠다 시도하고 있다. 구체적인 결과는 당연히 내놓을 수 없다. 그러나 과정이 중요하다. 외교는 언제 어떻게 달라질 지 모르는 생물이다.


논의가 참 저열하다. 사대 아닌 외교가 어디 있는가. 나보다 세면 눈치봐야 하는 것이다. 당장 내 목숨줄이 걸려있으면 자세를 낮춰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생존이다. 외교란 서로 위협이 될 수 있는 강자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의 전략이다. 우습다. 그냥 당연한 것이다. 

일본 자민당이 문재인의 독도방문을 이유로 위안부재단에 약속했던 10억엔을 주지 않겠다 말했다 한다. 모두가 바라던 것이다. 그깟 10억엔-우리돈으로 100억원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정 필요하면 5천만 국민이 200원씩만 내도 100억은 어떻게 만들 수 있다. 10억엔을 주지 않는다면 아베와 박근혜 사이에 이루어졌던 위안부협상은 무효가 된다. 이미 협의한 약속내용을 어떤 이유로든 이행하지 않았다.


아주 한국정부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동안도 오히려 일본정부가 나서서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명백한 협의위반이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그래도 된다. 한국정부는 그러면 안된다. 심지어 한국정부는 그같은 명백한 위반에도 항의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 10억엔을 주지 않더라도 한국정부는 자신들과 협상한대로 해야만 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한 번 호구잡히면 이렇게 무섭다. 그냥 무시당한다. 철저히 부정당한다. 인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불쌍하게 보이면 밟힌다. 그런 정부더러 외교 잘한다고 지지하는 국민이 무려 40퍼센트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가히 경악이다. 문재인이 참 큰 일을 했다. 원래 그럴 의도까지는 없었을 테지만 덕분에 명분만 하나 더해졌다. 위안부협상은 무효다. 다시 확인한다. 정부만 병신이다. 웃는다.

많은 사람들이 드러난 현상만 보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지금 성주를 비롯한 영남권에서 새누리당을 비토하는 것은 사드배치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여전히 사드는 배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동네, 혹은 인접한 지역이어서는 안된다.


당장 성주에 사드를 배치하네 마네 다투던 것이 조용해지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과연 어느 당이 사드에 찬성했느냐 반대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드가 대한민국의 안보에 크게 도움이 된다 여기고 있을 때 사드에 대한 반대여부는 곧 안보에 대한 정당의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그리 멀지 않다. 바로 대선국면으로만 들어가도 성주는 뒷전으로 밀리고 사드를 앞세운 안보논란이 더 크게 불거지게 될 것이다. 최소한 침묵한다. 더민주의 전략이다.


어차피 지금 더민주가 나서봐야 성주든 사드배치는 정치문제로 비화될 뿐이다. 구체적인 내용이나 그에 대한 시시비비와는 상관없이 새누리당이냐 더민주냐로 편갈라 싸우기 바쁠 것이다. 새누리당이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주의 사드배치에 반대하던 이들도 더민주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새누리당의 편에서 그들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다. 그동안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어 온 일이었다. 세월호 당시도 당시 새정연이 나서는 순간 새누리당과 새정연, 나아가 보수유권자와 비보수유권자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진짜 대선을 먹으려 한다. 대권을 노리고 있다. 될 수 있으면 손해가 될 만한 일은 나서지 않으려 한다. 당장 이익이 없어도 더 큰 손해만큼은 막으려 한다. 대선은 총선보다 비토세력의 유무도 무척 중요하다. 이긴 사람이 다 먹는다. 다시 말해 누군가 자신이 바라지 않는 후보가 이긴다면 그 손해와 피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다. 타겟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논란도 만들지 않는다.


당장의 지지율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지역주민이 하는 말에 쓸데없이 휘둘릴 필요 없다. 선거때가 되면 다 바뀌게 된다. 그것이 바로 대통령선거라는 것이다. 엄하게 힘쓰고 발목잡힐 수 있다. 잘하고 있다. 그저 국민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하는 것만이 바른 정치는 아니다. 영리해져야 한다. 진보한다.

가끔 대통령이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선대로부터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을 터임에도 많은 2세들이 단명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는가 저도 모르게 이해하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권력의 한가운데 있었다. 권력의 한가운데에서 권력에 둘러싸여 자라고 있었다. 권력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지는 대신 현실감이 떨어지게 된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단지 권력의 도구로,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한 마디로 선대가 남겨놓은 유산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자신이 물려받은 나라는 소수의 권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째서 수많은 정복자들이 마침내 모든 목적을 이루고 스스로 무너져내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갔는가 대통령의 이름이 등장하는 뉴스들을 통해 실제처럼 느끼게 된다. 오로지 정복이 목표였다. 권력이 목표였다.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정복을 마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감만 넘친다. 자신의 힘으로 정복을 끝냈다는 생각에 조심성이 사라진다. 그동안 자신을 옹위해 온 친위세력들도 있다. 어차피 대구경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지할 것이다. 부산경남 역시 자신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임기 3년차, 그러나 지지율은 40%에 육박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의 지지율은 전국평균보다 한참 높다. 무엇을 해도 된다.


대구경북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 부산경남 역시 오래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자만했다. 너무 자신만만했다. 대구경북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부산경남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실이 아닌 권력의 흐름만을 본다. 현실을 살아가는 다수의 국민이 아닌 특정한 이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권력의 향배만을 살핀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의 지지 없이 권력을 가지기도 지키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어차피 자신은 대통령을 했고, 싫은 놈이 대통령되느니 이대로 깽판놓더라도 상관없고, 어차피 이미 이룰 건 다 이뤘다.


기분나쁜 무심함을 느낀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단지 성취와 보상이라고만 생각한다. 대중에 대한 의무를 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 그래도 자신은 된다. 그동안의 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아니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자신감이다. 왕조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나마 5년 남은 임기만 마치면 그의 이름 앞에 '전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현재를 통해 역사를 배운다. 흥미롭다. 결국 천하를 통일하고도 어렵게 손에 넣은 권력마저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믿었던 이들의 반란에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만다. 마치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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