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중권이나 서민 등의 글을 읽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것 없다.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주제로 글을 쓰다가 중간에 뒤집어 엎는 이유도 같은 이유다. 쓰이지 않는다.

 

글이란 생각을 따라가고, 생각은 곧 흐름이다. 조각조각의 생각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면 그것이 글이 되고 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잘 쓰인 글은 그 내용에 대한 이해와 상관없이 잘 읽히는 것이다. 논리가 어떻고 사실관계가 어떻고 따지기 이전에 진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쓴 글이기에 쉽게 한 번에 읽히는 것이다. 반면 아무리 내용이 타당해도 억지로 끼워맞춘 글은 읽기가 영 불편하다. 물론 아예 다른 사람이 따라가는 자체가 버거운 사고의 레벨을 가진 인간들도 존재하기는 한다. 이를테면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부류들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결국 이해하고 났을 때 희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마저 없다면 그걸 뭐라 판단해야 할까?

 

글을 쓰다 말고 뭔가 자꾸 말을 지어내려 하면 그건 이미 내 스스로가 나 자신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미 다음 문장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라야 하는데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억지로 부여잡고 이어붙이려 한다. 그건 이미 내 생각이 아닌 것이다. 그런 건 써봐야 나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 글에 욕이 많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내 생각을 쓰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욕까지 거르지 않고 - 물론 그럼에도 상당부분 순화시켜 곁들여 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경우 내가 쓴 글을 나중에라도 다시 읽게 되면 당시 내가 어떤 감정상태였는지까지 생생하게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솔직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의 진중권은 그런 게 없다. 서민의 글은 예전부터도 잘 안 읽혔다. 그래서 아예 이름 자체를 기억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진중권은 몇 년 전까지 동의여부와 상관없이 꽤 잘 읽히는 글을 쓰고는 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참 쉽게 읽힌다. 그런데 최근 진중권의 글을 보고 있으면 세 줄을 넘어가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건 뭐 배설도 아니고 진짜 글쟁이로서 고약한 상황이라 봐야 할 것이다. 글의 내용이 아닌 호흡을 중요시하는 내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영 읽기 고약한 것이 지금 진중권의 글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김용민이나 이동형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어도 잘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다. 의도하여 만드는 목소리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이유다. 진영과 상관없이 말로 글로 먹고사는 놈들은 그래서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나마 강준만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읽히는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진심인 것이다. 변절이 아니라 그냥 지금 강준만이라는 개인의 보는 현실과 판단이 그렇다는 것이다. 바로 강준만과 진중권의 차이다. 강준만은 보는 방향이 달라졌고, 진중권은 말하는 대상이 달라졌다. 그 차이는 작은 듯 너무 크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제발 진중권 글 좀 퍼다 나르지 말라는 것이다. 덕분에 요즘 내가 갑자기 난독증이 왔나 고민하게 되었다. 읽히지 않는 글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들리지 않는 말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남의 말 듣지 않고 남의 글 읽지 않으면 어느내 말을 해도 들리지 않고 글을 써도 읽히지 않게 된다. 그런데 지식인이라 불린다. 지식인이 그렇게 값싸진 것일까.

 

아침부터 핸드폰 찾는다고 물속을 헤집고 다녔더니 피곤하다. 확실히 요즘 핸드폰들 방수기능이 짱짱하다. 밤새 물속에 쳐박혀 있었는데 여전히 멀쩡하다. 일단 말려서 써야 할 것 같고. 진중권은 제발 부고기사만 보기를. 사는 게 힘들다.

 

 

나도 한 때 인터넷에서 글쓰는 행위에 나름 의미를 부여하던 때가 있었다.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지 않나 싶다. 돌이켜보면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것인지 부끄럽기만 하다. 인터넷은 인터넷이고 글질은 단지 글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 블로그하면서 그 흔한 리플접대도 않게 되었다. 뭔 의미인가? 나는 내가 쓰고 싶은대로 쓰고 사람들은 찾아와 자기 읽고 싶은대로 읽고 리플을 단다. 그 이상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 내 생활은 블로그가 아닌 현실에 있다.

 

결국 육체노동을 시작했다. 요즘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그 일이다. 물류가 공사장 노가다보다 좋은 점은 매일 일정한 거리를 출퇴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따로 숙식을 하지 않으면서도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까지 짧다. 그리고 주 6일이 대부분인 공사장에 비해 주 5일로 주말을 온전히 쉴 수 있다. 한 마디로 더 많은 시간을 휴식과 충전에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대신 일도 더 힘들고 급여도 더 적고 야간에 일을 해야 하며 급여상승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은 단점이다. 어찌되었거나 역시 다른 기술 없이 돈 벌려면 몸 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좀 더 편한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급여수준을 생각하면 사실상 대안은 없다고 봐야 한다.

 

아무튼 그래서 더욱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 벌이는 내 몸이 고생해서 벌어들인다. 블로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예 까맣게 잊고 있을 때 쯤 100달러인가 입금되었다고 메일 날아오는 정도는 용돈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진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다 블로그에 쏟아낼 수 있다. 내가 구독자 눈치를 보겠는가? 리플 단다고 그 내용을 굳이 신경쓰며 고려하겠는가? 블로그질 그냥 귀찮으면 안하면 그만이다. 성가시면 때려치면 그만이다. 이 블로그가 아마 한 11번째인가 12번째인가 그럴 것이다. 한창 때는 블로그질에 의미를 부여하느라 싸움질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아예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다 개무시한다. 그러고 싶은 사람들은 그러는 것이고 나도 내 하고 싶은대로 한다. 그래서 유튜브는 처음부터도 고려도 안했다. 나는 어떻게 해도 엔터테이너는 되지 못할 사람이다.

 

내가 진중권 부류를 혐오하고 경멸하는 이유다. 정확히 변희재니 뭐니 하는 입만 산 놈들은 그냥 개무시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기자놈들은 다를까? 최소한 나는 남 욕하면서 돈벌지는 않는다. 남 모욕하고 조롱하고 상체를 후벼파면서 내 이익을 구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내가 이익을 얻자고 다른 이의 고통과 불행을 이용하려는 패악질은 하지 않는다. 아마 얼마전에 썼을 것이다. 진중권이나 서민의 욕설을 보면 진정성이 없다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 위악같은 위선을 뒤집어쓰고 쓰는 거짓된 분노의 배설물일 뿐이다. 어째서? 목적이 다른 것이다. 그를 통해 얻고자 하는, 구하고자 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때문이다. 그들에게 글과 말이란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쓰고 싶어 쓰고 싸고 싶어 싸는 나와 다른 이유다.

 

돈을 벌기 위해, 명성을 얻기 위해, 인정을 받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다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서 글을 쓰고 말을 한다. 그래서 저들의 말에는 진심이 들어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더 자극적으로 더 선정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게 글을 쓰고 말을 할까만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그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논객, 혹은 평론가라 부르는 놈들의 실상이다. 김어준이나 김용민, 이동형 등의 부류도 내게는 그래서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겨진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은 글이 수단이 되고, 말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말이 곧 수단이 된다.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 버린 글과 말에 어떤 진정성이라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을 수 있는가. 그러니까 어느날 갑자기 김어준이 문재인 욕을 하고, 김용민이 민주당 욕을 하기 시작해도 저들이 지금 버는 수입과 명성과 인지도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그나마 서민은 교수질이라도 하니 인정은 한다. 그런데 교수질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뭐한다고 잘 모르는 분야에 저리 끼어드는지. 아마 기생충 전문가일 때보다 더 여기저기서 불러주기도 하고 알아주기도 하는 사실에 맛들인 때문일 것이다. 그 맛 진짜 죽여준다. 나 역시 미미하지만 경험해 본 바이기에 아주 모르지 않는다. 막 여기저기서 추켜주고 누군가는 팬이라 그러고 누군가는 직접 생일이라고 불러서 술까지 사주고 진짜 내가 뭐라도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구나. 개뿔. 그러니까 학생들 가르치고 기생충 연구하는 일이나 열심히 하시라.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생겼을 때 내가 했던 것처럼 착 딸라붙는 욕설로 문재인이든 조국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 대차게 까면 그게 진짜가 되는 것이다.

 

아주 오래던 도시탈출에서 오히려 욕은 황봉알이 더 많이 더 독하게 했음에도 김구라가 더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이유인 것이다. 황봉알은 아무데서냐 욕질을 했지만 김구라는 딱 자기가 욕해야 하는 순간을 골라 그때만 욕하고 끝냈다. 말하자면 진중권과 서민 류의 욕설이란 당시 황봉알의 욕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수준이란 것이다. 김용민과 김어준 사이에도 급의 차이가 있는 것도 개인적으로 그런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김용민이 오버할 때는 그래서 오히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김어준은 그냥 나르시스트고.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고 춤추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황홀해 할 사람이 바로 김어준이란 인간이다. 진중권이 차라리 김어준같은 나르시스트였을 때는 그나마 글이 읽어 줄 만은 했었는데.

 

다만 그럼에도 같은 글로 말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 가운데서도 인정하는 몇 명 중에 유시민이 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그동안 읽었을 수많은 텍스트와 고민했을 수많은 시간들이 느껴지는 때문이다. 그건 노동이다. 그야말로 일이다.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고 말을 하니까 돈이 되는 수준인 것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글과 말이기에 돈을 버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자료찾기 싫어서 진지한 글 쓰자고 카테고리 만들어 놓고는 몇 달에 겨우 하나 쓰기도 버거워하는 내가?

 

아무튼 일이라는 건 소중한 것이다. 내가 내 몸으로 내 손으로 직접 일해서 돈을 벌어 먹고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다.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루어야 사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자체가 의미가 있고, 산다는 자체가 오로지 존귀한 것이다. 살아있기에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허투루여길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과연 글과 말을 목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냥 내 손으로 내가 벌어 먹고 산다. 글은 그냥 취미생활일 뿐. 대개는 어디서 술쳐먹으며 되는대로 떠들던 소리들을 대충 정리해 올리는 것들이다. 그 이상 무슨 의미가 필요한가. 사회적으로도 무엇이 더 가치있는 일인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놈팽이 새끼들은 진짜 사회의 잉여며 해악들이란 것이다. 손가락으로 입으로 떠드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정도로 취해 버린 진짜 놈팽이들은 결국에 세상에 쓸데없는 말들만 넘쳐나게 만든다. 하긴 그런 놈들 모아서 월급까지 주는 언론사라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썩은 선비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고래로 하는 일 없이 주둥이로만 한 몫 하려는 놈들은 항상 문제였었다. 새삼 느끼는 것이다. 저 새끼들이 싫다. 끔찍하게도 싫어 죽겠다.

내가 다니는 회사 사장이 뉴스에 나왔다. 글쎄 다른 기업 사장들과 담합을 했단다. 심지어 정권에 뇌물도 상당히 갖다 바쳐 구속위기다. 그런데 그렇게 담합하고 뇌물 갖다 바치는 사이 회사의 매출도 늘었고 덕분에 성과급까지 두둑하게 월급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들어오게 되었다. 직원 입장에서 사장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그래서 공인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개인이 아닌 공적 존재로써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이들인 것이다. 때로 개인의 선과 도덕과 양심을 벗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군사작전을 지시하고 승인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 큰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서 작전에 참가한 군인들은 물론 상당수 민간인의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단호히 군사적인 행동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쿠바 미사일사태 당시 3차세계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에도 끝까지 단호한 행동으로 소련과 대치했던 케네디의 리더십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좋은 사람이 리더가 되면야 당연히 좋겠지만 일단 리더가 되고 나면 마냥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이유인 것이다. 좋은 리더가 될 것인가,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 리더로서 전체의 이익을 위해 차라리 악역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 할 것인가. 후자를 들어 흔히 송양지인이라 부른다. 차라리 내가 비난을 듣고 나라를 살리는 것이 리더로서 어울리는 덕목인 것이다. 내가 모든 오욕을 감수하고 나라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리더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가치인 것이다. 집단의 이익이 지켜질 때 리더는 비로소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래서 공인이다. 한겨레가 이명박에 대해 평가한 것을 두고 찬양이라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찌되었거나 개인적으로 어쩐 부정을 저질렀든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익도 지켜내지 않았는가. 대통령에게 그 이상 뭘 바라게?

 

사람들이 리더에게 바라는 것도 이런 것들이다. 나 대신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손에 오물을 묻히고 온몸에 피칠갑을 할 수 있는. 어떤 비난과 모욕과 조롱에도 기꺼이 나를 대신해서 내 이익을 지켜 줄 수 있는. 그러니까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어떤 가난한 이들은 '그 분이 다 해 주실 거'라며 눈물까지 흘렸던 것이었다. 나쁜 사람인 것은 안다. 탐욕스런 인물인 것도 안다. 대신 그만큼 기꺼이 악역을 맡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삶을 나아지게 해주지 않을까. 그러니까 당장은 반대편으로부터 비난을 듣고 공격도 받겠지만 당원과 지지자들을 위해서, 무엇보다 국민을 위해서 차라리 그런 모든 것을 감수하고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겠다. 필요하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반드시 국민을 위한 결과를 내놓고야 말겠다. 과연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차기 리더로써 그만한 결심과 각오가 보이고 있는가.

 

지금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 이낙연의 차기대선후보로서의 지지율이 경기도지사 이재명에게 추월당하며 지지부진한 상황에 놓은 이유인 것이다. 무려 174석의 거대여당이다. 열린민주당 등 우호의석까지 모두 더하면 민주당 혼자서도 모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거대여당의 대표로써 과연 그동안 이낙연이 이룬 것이 무엇이 있는가? 공수처법을 통과시켰는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통과시켰는가? 아니면 말로라도 이재명처럼 강경한 목소리로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고 있었는가? 이재명이 직접 전면에 나서서 무사안일의 관료사회를 비판하며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부르짖고 있는 동안 이낙연은 여전히 총리시절 그대로 사람 좋은 당대표로써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 내 발을 오물에 닿게 하지 않겠다. 내가 진흙투성이가 되지는 않겠다. 그러니까 모양 좋게 그 모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겠다. 자국민이 타국에서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도, 아니 대한민국의 영토를 타국이 침략한 상태에서도 그저 사람 좋은 자기 이미지만 챙기겠다는 뜻인가.

 

미안하지만 이낙연에게 남은 시한은 그리 많지 않다. 윤석열을 향해 비로소 한 마디 내뱉기는 했지만 이재명과 달리 이낙연은 말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행동에 나서야 한다. 주어진 힘을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결단해야만 한다. 지금도 이미 많이 늦었다. 어차피 언론은 반대다. 어떤 언론도 지금 민주당이 추진하는 개혁법안들에 좋은 기사따위 써주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힘도 그것을 알기에 끝까지 반대하며 훼방놓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저들로부터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 그저 인내하기만 하는 것은 그냥 멍청하다는 소리다. 개인으로서는 인품이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리더로서는 무능을 넘어 그냥 병신찐따짜가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재명을 그다지 미더워하지 않는 나로서도 거의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벌써 이낙연 지지에서 이재명 지지로 돌아선 이들도 제법 보이고 있다. 민주당을 개인의 선의를 위한 수단으로 여길 것인가? 자신마저 민주당의 정의를 위한 수단으로 여길 것인가?

 

어쩌면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당대표가 안되었다면 영영 이런 이낙연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자칫 대선후보 경선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결단하지 않는 이낙연은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자격을 넘어 기본 자체가 안되어 있다.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하고, 책임져야 할 때 책임지지 못한다. 비난과 공격이 두려워서 마냥 주저하며 눈치만 본다. 지난 20대처럼 민주당 의석이 국민의힘과 비등비등한 상황이면 또 달랐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단호했던 추미애 장관과도 그래서 비교가 되는 것이다. 추미애 장관을 지지해 볼까? 스스로 정치생명까지 내주어가며 검찰개혁을 위해 온몸으로 부딪혀 싸우고 있는 추미애 장관에 비하면 이 얼마나 한심한 모습인가.

 

이미 공수처설치는 앞으로 나가기 위한 과정이 아닌 단지 출발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일단 공수처부터 설치하고 나야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주 전 이낙연에 대해 글을 썼을 때는 대권을 위한 상당한 디딤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안정감도 좋지만 결국 국민이 바라는 것은 주어진 힘을 필요와 목적을 위해 과감하게 사용할 줄 아는 용기와 의지, 즉 리더십을 갖춘 대통령이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사람이 리더가 될 수는 있지만 리더가 항상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리더가 좋은 사람이고자 하면 그는 리더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과연 이낙연에게 무언가를 책임질 수 있는,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리더십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사람은 좋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것이다. 한계가 가까워 온다. 실망이 크다.

유시민 이사장도 말한 적 있었다. 한국 언론은 자기들끼리 논쟁하려 않고 자꾸 정부를 가르치려고만 든다. 서로의 주장과 논리로 경쟁하기보다 누가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가로 경쟁하려 한다. 물론 민주정부 한정이다. 어딜 보수정부에 진보언론 나부랭이가 비판하고 훈계까지 하려 하는가. 이명박근혜 정부 당시 자칭 진보언론 진보정당의 모습이란 딱 독재국가에서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허락한 관제언론 관제야당을 넘어서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니까 비판도 견제도 하는데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는 선까지 넘어서지는 않는다. 민주당에 대해서만 그런다.

 

최저임금에 대해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이 개소리를 늘어놓는다. 물론 저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정론이다. 그러면 그래도 진보를 자처하는 언론과 정당에서 보수정당과 언론을 향해서 반박도 하고 비판도 하면서 논쟁을 통해 여론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른 방향으로 이끌려 노력해야 하지 않는다. 절대 않는다. 민주정부 시절에는 그럼에도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 선명한 진보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며 정부와 여당을 꾸짖고, 보수정부 아래에서는 그럼에도 정부와 언론의 반대에도 민주당이 그것들을 관철시켜낼 수 있어야 한다며 야단만 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민주당 무능론이다. 민주당 무능론을 강화하고 확산시킨 것은 다름아닌 이들 자칭 진보들이란 것이다. 보수정당과 언론의 반대에도 진보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무능한 가짜들이다. 저들이 지금도 민주당을 혐오하는 근거로 삼고 있는 것들이다.

 

최근 정의당 류호정이 대통령 앞에서 김용균법과 관련해서 1인시위를 한 것을 보며 분노를 넘어 혐오의 감정마저 느끼게 된 이유였다. 아마 기억할 것이다. 김용균법이 한창 이슈가 되었을 당시 민주당은 어떻게든 김용균법을 입법하려 하고 있었고 당시 자유한국당이 그것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법안을 입법하고 보자고 민주당에서 자유한국당의 요구에 많은 양보를 했었고, 그러고도 부족해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당시 조국 민정수석이 운영위에 출석해서 되도 않는 의혹들에 반박해야 했었다. 그러면 당시 자칭 진보언론과 정당, 지식인들은 누구를 비판하고 있었는가? 김용균법을 반대한 자유한국당? 여론을 움직여 김용균법을 약화시킨 주범인 보수언론? 이미 말했지 않은가. 그때도 똑같았다. 정부가 문제다. 민주당이 문제다.

 

이번 류호정의 1인시위에 대해서도 국민의힘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 - 아니더라도 국민의힘과 보수언론에 잘 보이려 기획한 것이라 의심하는 이유인 것이다. 김용균법이 그렇게 된 것은 그나마 민주당의 법안을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이 비틀고 훼손한 덕분이란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책임을 대통령과 민주당에게 돌린다. 그동안 해 온 대로 김용균법이 그렇게 된 모든 원인은 대통령과 민주당에게 있다. 실제 법을 통과시키려 했던 정당과 정부가 있고 그것을 막아서며 법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려 했던 정당과 언론이 있는데 어째서 저들 자칭 진보의 비판은 항상 한 쪽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는가. 그래서 정부와 여당에서 김용균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서고 보수정당이 반대하면 그때는 과연 자칭 진보들이 정부와 여당의 편에서 보수정당과 보수언론과 논쟁하며 싸울 결심은 하고 있는가 묻게 되는 것이다. 그때도 민주정부 탓, 민주당 탓만 하고 있겠지.

 

오죽하면 자칭 진보언론의 기자란 것들이 방송에 나와서까지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민주정부는 무능하며 악의 온상이다. 왜 그런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의 공세에 무력하게 떠밀리기만 했고, 정권을 잃었을 때는 보수정부의 기세에 아무것도 못한 채 허송세월만 보냈다. 그러면 정의당은? 지역구 의석 하나 가지고 아직도 버티고 있는 정의당은 도대체 뭔가? 정의당은 그래서 뭘 했었지? 무얼 하려 했었지? 그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하며 무엇까지 싸워 봤었지? 그러나 상관없이 이 모든 것은 민주당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칭 진보가 한국사회 주류로부터 진보임은 인정받는 수단이기도 했다. 민주당을 공격하는 동한 자칭 진보도 진보를 자처하며 존재해도 괜찮겠다.

 

그동안 말해 온 내용이다. 한국 진보가 진보로써 존재할 수 있는 비결이다.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당을 공격해야 한국사회의 주류로부터 이쁨을 받는다. 괜히 민주당과 보조를 같이 해 봐야 지난 선거에서처럼 자기네 후보들 신상이나 털릴 뿐이다. 정의당 털릴 것 많다. 사실이든 아니든 내가 여기저기서 주워듣는 이야기들이 있다. 조국 전장관 식으로 털면 나올 게 그리 없을까? 류호정도 그냥 맛배기로 살짝 건드린 것 뿐이다. 주류사회로부터 진보라고 하는 지분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 민주당은 무능하며 악하다. 위선적인 가짜들이다. 말하자면 학습된 증오인 셈이다. 민주당을 증오해야 진보로써 존재할 수 있다.

 

정의당이 저토록 민주당 비판에 목을 매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눈치보는 것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좀 봐 달라. 윤석열을 나름대로 비판하던 박원석이 윤석열의 편에서 추미애를 비판도 아닌 비난하는 꼬라지를 보라는 것이다. 정의당과 한겨레를 분리할 필요가 없다. 서민과 진중권과 홍세화와 강준만을 따로 분리해서 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경향은 아직까지도 자칭 진보언론으로 저들과 한 편에 있다. 그래서 저들은 과연 진보적인 가치를 위해 지금껏 무엇을 해오고 있었는가. 조선일보도 때로 민주정부를 공격할 때는 진보적인 논조의 기사를 내기도 한다. 한심한 것이다.

형사재판이란 피고가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것이 아닌 기소한 검사가 범죄혐의를 입증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무존재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행위를 구체화할 수 있는 증거를 통해 사실을 명백하게 재구성함으로써 범죄를 입증하면 그제서야 범죄사실을 인정하여 유죄판결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검사가 제시한 증거들이 부실하고 허술하여 범죄를 입증하는데 부족한다 여겨질 경우에는 피고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로 판결하게 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과연 김경수 지사가 당시 현장에서 킹크랩의 시연을 보았는가? 시연을 보면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거나 한 적이 있었는가? 그래서 드루킹 일당의 댓글공작에 김경수 지사가 얼마나 직접 관여하고 있었는가? 심지어 특검이 제시한 타임라인마저 결국 닭갈비를 포장해 간 사실이 밝혀지며 부정되었던 터였다. 특검이 제시한 타임라인대로 김경수 지사가 시연을 볼 수도 지시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닭갈비를 포장해 간 사실 자체가 아예 시연을 보지 않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에 바로 유죄가 나오고 말았다. 안 봤을 수도 있지만 아주 안 봤다고 단정지을 수 없으니 본 것으로 간주하고 유죄판결을 내리겠다. 이건 또 어느 나라 법논리인가?

 

피고가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피고는 그저 검사의 기소내용을 반박하여 혐의만 부정하면 되는 것이다. 검사의 기소가 사실이 아니면 범죄가 아니게 된다. 그런데 검사의 기소내용이 반박되었는데 피고의 무죄입증이 부실하다고 유죄판결을 내린다면 도대체 재판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판사란 종자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 것인가. 판사들 그리 혼맥 좋다더니만 한 번 뒤를 파헤쳐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전형적인 심증재판이다. 예단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알면 알수록 고약하다. 공부 잘하는 머저리들이 이래서 문제다. 시험이 정의고 공정이다? 지랄이다.

"입을 맞추고 허위의 진술을 한 사실은 분명히 있으나, 수감 중에 자신들 기억을 증명할만한 객관적 자료가 불충분하다고 여긴 나머지 때로는 거짓된 때로는 과장된 진술 했다고 하여 그저 이를 탓하며 그들의 진술 전체를 없는 것으로 돌리는 건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형사재판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그동안 시험성적으로 줄세워 뽑은 사법제도의 현실인 것이다. 저 말의 내용이 이해가 가는가? 한 마디로 앞뒤도 안맞고 거짓말로 드러난 부분이 있어도 판사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진실로 여겨질 수 있다는 뜻이다. 증거도 필요없고, 주장의 객관성과 일관성도 필요없다. 내가 유죄라 판단했으니 유죄고 내가 무죄라 여기고 있으니 무죄다. 내가 공부 잘해서 판사씩이나 되었으니 내 마음대로다.

 

사법농단의 이유였다. 검찰이 부패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니 그런 검찰과 언론이 붙어먹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서울대 나왔는데. 내가 명문대 출신인데. 그 가운데서도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에까지 합격했다. 그러니까 그 보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대로 할 거다. 그래서 저따위 판결문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증거가 없는데 서로 말도 맞추고 거짓말도 하고 과장도 하고 그러나 진실이다.

 

김경수는 드루킹 같은 인간들을 걸러내지 못한 것으로도 일단 내 기준에서 아웃이다. 아무리 선거가 급해도 만날 사람을 만나야지 선거운동 급하다고 저따위 인간들과 어울리는가. 그와 별개로 참 재판부가 병신같다. 원래 인간이 병신인데 그런 인간에 너무 신뢰를 가지고 너무 큰 권한까지 부여한 탓이다. 저따위가 판사란다. 부모가 대체 뭘 가르쳤는지. 저래도 판사자식이라고 좋아라 방방곡곡 자랑하고 다녔겠지? 에휴.

한국도 대통령이 4년 중임제였고 2007년 대선이 이명박의 재선도전이었으면 정동영도 해 볼 만 했겠구나. 

 

마치 시계를 13년 전으로 돌려 놓은 듯 내내 그 생각 뿐이었다. 이명박이랑 정동영이로구나. 그것도 아주 늙은 정동영.

 

반트럼프 말고 내세울만한 아젠다가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비전도 정책도 다 준비되어 있겠지만 대부분 선거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재선되어서는 안된다는 한 가지만으로 치러지는 듯하다.

 

재미있는 건 트럼프 지껄이는 소리에 바로 눈쌀부터 찌푸리는 민주진영 지지자들은 트럼프를 지지하는데 오히려 트럼프의 헛소리에 열광하는 놈들은 바이든을 지지하고 있는 역전된 현실일 것이다. 오바마가 그동안 한국에 싸놓은 똥이 그만큼 독하고 양 또한 상당하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반면 그 동안 한국에 해 준 것들도 제법 되고.

 

아무튼 위악과 위선 가운데 그나마 무엇이 더 나은가면 그래도 위선이라는 것이다. 위악이란 그나마 선을 혐오하고 경멸하지만 위선은 최소한 선이 좋다는 정도는 안다. 지행일치가 안된다고 근본부터 부정할 필요는 없다. 역사상 완벽하게 지행일치를 이룬 이들은 몇몇 '성인'이라 불리는 위인들 뿐이었다. 원래 모순이 있어야 인간인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더구나 일본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누가 우리에게 유리하냐는 것인데.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되었든 맞춰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끌어오면 되는 것이긴 하다.

 

미국도 참 많이 망가졌다. 그보다는 시스템이 늙었다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오바마가 미국 사회에서도 그다지 이룬 게 없다는 인상이다. 오바마의 실패가 다시 늙은 미국으로 회귀하게 만든다.

 

역시 중요한 건 한국 대통령이다. 한국 정부다. 잘 맞춰 가기를. 다음은 이낙연일까? 이재명일까? 누가 되었든.

검찰더러 정치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늬들 마음대로 정치하라는 뜻이 아니라 아예 정치를 하지 말라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선출된 권력이 검찰에 대한 지휘감독을 맡게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선출된 권력이 검찰에 대한 지휘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바로 선거를 통해 심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출된 권력이 검찰을 잘 지휘감독 하고, 검찰은 그 아래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최대한 억제하며 오로지 법리에 충실하며 수사해야 한다. 그런데 뭐라? 이제는 아예 검찰총장이 정치하겠다 나서고 있네?

 

이 또한 불문율이었다. 검찰총장을 역임했으면 정치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하물며 대통령이라니. 그것도 퇴임후가 아니라 재임 중에 정치하겠다 선언까지 하고 있었다. 비판하는 언론조차 하나 없다. 재임 중에 정치를 하겠다 선언했으면 이미 정치인 아닌가. 차기 대선주자로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정치적 중립이라고? 자기가 이미 정치인이고 어느 편에서 정치를 할 것인지가 거의 정해진 상황에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말하는가? 검찰의 정치적 독립은 그냥 내 마음대로 정치하겠다는 선언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닌가.

 

물론 이해는 한다. 박근혜 탄핵 이후 자칭 보수진영에 문재인 대통령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없었고 이후로도 여러 과정을 거치며 하나씩 꺾이며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자칭 진보들이야 원래 앞세울만한 인물이 없기는 했었다. 더구나 서울대 출신이어야 하고, 명망가여야 하고, 무엇보다 그토록 증오스러운 민주당 정권을 상처입힐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심지어 자칭 진보들조차 현직 검찰총장이 정치하겠다 나서는 상황에 대해 한 마디 비판조차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검찰개혁이 아닌 추윤대립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검찰개혁 실패라는 프레임으로 윤석열을 지원하는 중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윤석열이 대선후보로 나서면 자칭 진보와 자칭 보수를 아우르는 범진보보수 단일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튼 정경심 교수의 재판에서도 그 의도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른바 친박 태극기부대에 대한 추파인 셈이다. 정경심은 최순실이다. 정경심의 범죄는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같다. 박근혜를 감옥으로 보냈듯 정경심과 함께 문재인도 반드시 감옥에 보내겠다. 한겨레와 경향, 홍세화, 정의당 무리들이 저리 윤석열에 목을 매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무현 전대통령 죽기 전 심상정이 얼마나 집요하게 물어뜯고 있었게? 다시는 근본도 없는 친노친문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서 아예 그 뿌리를 뽑고야 말겠다. 사모펀드는 이미 조범동 재판에서 무죄가 났고, 고작 표창장에 인턴증명서 가지고 과연 7년이라는 징역이 가능하기는 한가. 그런데도 굳이 그런 무리한 구형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선언하는 것이다. 박근혜를 죽였듯 이제는 문재인을 죽이겠다.

 

하긴 전에도 말한 것처럼 그 정도 형량은 나와야 작년부터 1년 넘게 그토록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데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부터가 작년 조국사태의 진짜 목적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겨레와 경향이 미쳐 날뛴 이유이고, 정의당이 뒤늦게 - 진짜로 뒤늦게인지는 모르겠지만 - 조국비판에 가세한 이유인 것이고, 자칭 진보 지식인들이 윤석열 편에서 진보의 이념인 인권을 거름구덩이에 쳐박는 소리를 지껄여 온 이유인 것이다. 박근혜가 불쌍하다. 박근혜가 과연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지은 것인가. 설마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테니. 서민의 박근혜 동정론을 보라. 이명박근혜보다 차라리 문재인이 더 못하다는 한겨레를 보라. 그렇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박근혜도 못했지만 문재인은 더 못하다.

 

단위부터 차이가 난다. 그렇게 다 긁어모아봐야 벌금 9억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나마 권력을 써서 그랬는가면 권력이 실제 개입한 정황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박근혜와 같다. 최순실과 같다. 그냥 정치적인 구형인 것이다. 그런 짓거리를 그냥 보고만 있는 자칭 진보들도 똑같다. MBC도 그래서 마냥 신뢰하지 않는다. 비판해야 할 때 정작 비판하지 못한다. 벌써부터 윤석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기득권 동맹이다. 트럼프와 샌더스를 막기 위해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이 함께 움직였던 것처럼. 민주당은 성공했지만 공화당은 실패했다. 한국은 윤석열로 대동단결이다.

 

저들의 민낯을 똑똑히 봐야 할 때인 것이가. 검찰이 정치를 한다. 검찰이 독립을 넘어 중립을 무시하고 아예 노골적으로 자기 정치를 하겠다 선언한다. 그 모든 것이 작년의 연장에 있다. 그런데 한 마디 비판조차 않는다. 한 마디 말로라도 견제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검찰의 편에서 정부를 비판하느라 여념이 없다. 과연 저들이 주장하는 진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고용유연화까지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한국 진보의 가치와 지향이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보수야 오히려 윤석열로 망할 지경이라. 한국의 진보는 검찰진보다. 그리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아마 처음 추미애 장관이 법무부장관이 지명되었을 때 특히 검찰은 상당히 만만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정치인이란 참 지켜야 할 것이 많은 부류들이다. 욕심이 없이는 정치같은 건 할 수 없다. 더구나 무려 5선, 당대표까지 지냈고 차기 대선후보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인물이니 얼마나 아쉬운 것도 많고 지키고 싶은 것도 많을까. 그러니까 적당히 건드려주면 자기의 큰 꿈을 위해서도 적당히 타협하지 않을까.

 

그래서 안되는 것이다. 추미애 장관은 삼국지로 치면 장비와 같은 인물인 것이다. 앞에 '여'도 필요 없이 그냥 장부다.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말했지. 자기는 오늘만 산다고. 내일을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을 이길 수 없다고.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칼집부터 버리고 본다. 여기서 내가 죽거나 네놈들이 뒈지거나. 노무현이 괜히 정몽준 앞에 두고 추미애를 차기 대통령감으로 꼽았던 것이 아니란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중을 생각지 않는다. 내가 하기로 했으면 한다. 내가 해야만 한다면 한다. 내가 검찰개혁을 해야 한다면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한다.

 

그야말로 자기 정치생명까지 내던지고 덤벼든 싸움이란 것이다. 5선의 국회의원이, 전직 여당의 대표에, 차기 대선주자로까지 손꼽히는, 대한민국 여성정치인 가운데 가장 거물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검찰 하나 때려잡겠다 나선 상황인 것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물러날 곳도 없다. 타협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모든 언론을 동원해서, 심지어 여론조사까지 인용해서 모욕주고 흔들려 발악해봐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아마 지금 추미애 장관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 한 사람 뿐일 텐제, 추미애 장관이 무엇까지 걸고 지금 싸움을 하고 있는가 아는 문재인 대통령이 과연 그를 뜯어말릴 수 있을까? 자신이 요청하여 추미애 장관은 그 많은 것들을 버리고 내걸어야만 했었다.

 

만일 윤석열이 진정으로 추미애 장관을 이기려 했다면 윤석열 자신 역시 자신의 미래를 걸었어야 했다. 검찰총장이라는 자리와 장차 대권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모두 내던지고 전력으로 부딪혀야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추미애 장관보다 지켜야 할 것이 더 많았던 것은 정작 윤석열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켜야 할 것들을 붙들고 있는 사이 하나씩 손발이 잘리고 가야 할 길을 잃게 된다. 이길 수 있을까?

 

처음 추미애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했을 때가 어쩌면 윤석열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는지 모른다. 정확히 검찰이다. 그때 윤석열이 자리를 내던지고 나왔다면 조금은 추미애 장관에게도 어느 정도 타격이 가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이란 조직 전체보다 자신과 주위의 측근들만은 집요하게 생각하는 타입이다 보니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이런 궁벽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만다. 그런데도 대선후보감이라 띄워주는 언론은 얼마나 병신들이란 것인가.

 

그야말로 자신의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을, 장래를, 포부를,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내걸고 하는 싸움이란 것이다. 그래서 무섭다. 확실히 조국 전장관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조국 전장관 그냥 두고 적당히 어르고 달래며 기득권을 지키는 쪽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 후회하는 목소리도 나오는 것이다. 요즘 지켜야 할 것이 없어진 조국 전장관이 얼마나 사나워졌는지 모두가 보았지 않은가. 추미애는 태생이 싸움꾼이다. 적이 아니라 다행이다. 진짜 무섭다.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다시 없을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사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었다. 앙리 4세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종교까지 가톨릭으로 바꾸고 있었다. 권력이란 수단이다. 수단이기 때문에 목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유시민도 입버릇처럼 정치에 대해 때로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 말한 것 아니던가. 유시민이 바로 그걸 못해서 지금 야인으로 남은 것이다.

 

신념? 좋다. 양심? 좋다? 약속과 신뢰? 아주 좋은 말들이다. 당헌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 당연히 지켜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자리를 후보조차 내지 않고 다른 정당에 내준다면 누구에게 좋은 것일까? 지자체장이란 지자체를 이루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장차 더 큰 선거에서 당의 승리를 도울 지역조직의 구심점이기도 한 것이다. 아니 굳이 조직도 필요없이 해당 지자체장이 어떤 행정을 펼치는가에 따라 다른 선거운동도 필요없이 당의 정책과 강령을 시민들에 알리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냥 부산시장 하나 서울시장 하나 내주는 것이 아니다. 부산에는 민주당원이 없는가? 서울에는 민주당 지자체장이 들어서기를 바라는 지지자가 없겠는가? 더불어 부산과 서울에서 민주당의 이념과 정책을 마음껏 펼치고자 하는 인재들이 민주당 안에서도 넘칠 정도다. 그들이 지자체장으로서 자신의 이상과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 역시 정당의 역할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의 실력과 당이 지향하는 정책적 방향성을 대중들에 알리고 확인받고 인정받고 나아가 다시 정권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선거를 당헌 몇 줄 때문에 포기하자?

 

그래서 당원들에 묻는 것 아닌가. 이대로 좋은가. 원래 국가간 종약도 너무 불리하고 굴욕적이다 싶으면 알아서 기회봐서 일방적으로 파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당이니까. 당헌이란 너무나 중요한 공당으로서의 약속이며 신뢰일 테니까. 그러니까 당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럼에도 약속을 지켜서 후보를 내지 않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만 공당으로서 후보를 내서 검증받는 것이 더 옳을 것인가. 정치란 공적인 것이다. 개인의 양심보다 신념보다 공적인 책임을 우선한다. 그러므로 공당으로서 어떻게 책임을 지는 것이 옳은 것인가.

 

오거돈은 몰라도 박원순은 유죄가 확정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냥 일방적으로 유죄라고 단정짓고 낙인까지 찍은 결과인 것이다. 그런 것 다 차치하고 그렇지만 공당으로서의 책임은 그런 사적인 책임을 위해 지자체장이라는 공적인 자리를 거부하는 작은 것이 아닌 그럼에도 지자체장을 차지하여 공적인 책임을 다하는 더 큰 것에 있다. 당원들의 동의까지 받지 않았는가. 이것이 공당으로서 당원의 의지에 따른 책임이고 선택이다. 당연한 것이다. 말은 의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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