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낙연이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같은 서울대라도 경희대 묻은 서울대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같은 서울대임에도 고졸이 묻은 유시민을 저들이 인정하지 못했던 이유와 같다. 서울대 대통령이란 진정 대한민국의 주류를 대표할 수 있는 대통령이어야 한다. 민주당이 주류인가? 친노친문이 주류인가? 서울대가 자랑인 이유가 무엇인가. 고등학교까지 공부 열심히 하고 시험 잘 봐서 가장 좋은 대학 들어갔다는 한 가지 아니던가. 박정희의 성골이 죄인으로 전락해 감옥에 갇힌 지금 진정 진골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어디의 누구인가? 왜 저들은 이낙연이 아닌 윤석열을 선택한 것일까?

 

지금 검찰과 법원과 타협을 시도하는 순간 대통령의 꿈은 물건너가는 것이다. 지금 상황만 잘 관리해도 당내 경선만 통과하면 대통령은 꿈이 아닐 테지만 타협하는 순간 항복으로 받아들여지고 정동영이 그랬던 것처럼 문재인을 치는 도구로 쓰이고 그냥 버려질 뿐이다. 아니 대통령까지 바라보던 유력정치인이기에 그냥 버려지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철저히 짓밟히고 마는 것이다. 그때 과연 누가 이낙연 자신을 지켜 줄 것인가? 이낙연 자신이 대통령을 배신하고 지지자를 저버렸는데 누가 이낙연을 위해서 눈물이라도 흘려줄 것인가?

 

물론 기우인 것은 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을 거치면서 권력에 눈멀고 두려움에 눈멀면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어질 수 있는가 직접 몸으로 겪어 봤다는 것이다. 검찰과 법원과 언론과 야당이 한 몸이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언론과 정치권과 지식인사회가 하나가 되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적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의당은 이미 올초부터 대통령 탄핵을 입에 담았고, 법원의 판결이 대통령 탄핵 발언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어쩌면 한겨레 경향은 문재인 대통령의 묘비명까지 미리 써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무현 전대통령 때 그랬던 것처럼 그럴싸한 반성문 하나 올리고 그 시체 위에서 어떻게 다시 돌아온 영광을 누릴까 열심히 계산중일 것이다. 그런데 타협을 시도한다? 그들과의 공존을 시도한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그런데 적이 너무 강하다 보니 겁먹고 움츠러드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런 것이다.

 

지지자들도 명심해야 한다. 이낙연이냐 이재명이냐 가지고 싸울 때가 아니다. 서울시장 누가 나가고 부산시장 누가 출마하느냐를 두고 분열할 상황이 아니다. 저들은 지금 죽이겠다고 손잡고 달려드는데 누가 마음에 드네 마네 내부에서 싸우느라 힘을 낭비하면 결국 또 한 번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타협은 항복이고 곧 죽는 길인 것이다. 대통령이고 뭐고 그냥 내 한 몸 살고 싶다 한다면 바로 은퇴하고 외국으로 이민갈 것을 추천한다. 이낙연만이 아니다. 무려 174석이라는 공포를 겪어 봤기에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에 대한 사냥도 시작될 것이다. 정경심 재판에서도 보지 않았는가. 전혀 상관없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도 검찰이 기소만 하면 법원에서 유죄로 판결할 수 있다. 혼자는 살 수 있을지 몰라도 민주당의 당적으로 살아남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박병석이나 박용진 정도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겨야 한다.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탄핵은 그냥 탄핵이 아니다. 박근혜처럼 절차 지켜가며 재판받게 해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철저한 모욕과 수모 속에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윤석열이 지금 그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고, 국민의힘과 정의당과 법원과 언론과 지식인사회가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손잡고 나가고 있다. 문재인 한 사람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닌 것이다. 저들은 그럴 각오로 덤비는데 욕먹기 싫다고 몸을 사리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옳은 행동일 것인가. 누구든 싸움에 자신을 내던지며 앞장서는 이를 지지한다. 그가 차기의 주역이다. 내 결심이다.

 

어째서 이낙연에게 이렇게 엄격하냐고? 지금 가장 앞장서야 할 차기 리더니까. 문재인 대통령을 이어 정권을 잡고 개혁을 위해 기득권과 싸워야 할 민주당의 다음 중심일 테니까.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민주당의 당대표이자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 이낙연을 지지하는 대가인 것이다. 만일 이재명에게서 그럴 가능성이 보인다면 대상은 이재명으로 바로 옮겨간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정권을 지키고 개혁을 이어나갈 수 있는 주역이다. 그만큼 절박하고 심각하다. 유튜브 앵벌이들과 다르다. 진짜 좆같은 상황이다. 믿을 놈이 없다. 당장은.

정경심 재판에 대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해야 할 말은 딱 하나다. 아무리 표창장을 위조하고 인턴증명서를 위조했어도 징역 4년이 말이 되는가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상식의 범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설사 표창장과 인턴증명서 위조가 사실이더라도 어째서 그런 중형이 선고되었는가? 그건 알아서 판단하라.

 

서울대 인권센터에도 갔는데 뒷풀이 갔다 그러고, 다른 대학 인턴 간 것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유죄판결이 난 것이다. 어렵게 설명할 필요 없다. 길어지고 복잡해지면 어차피 안 듣는다. 그런데 판사가 생각하기에 인턴활동을 하기는 했는데 전문적으로 열심히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유죄가 났다. 여기까지면 거의 끝난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재판 내내 무죄를 주장한 것이 괘씸죄가 되어 징역 4년에 법정구속까지 된 것이다. 자기 재판인데 무죄주장도 못하는가.

 

사실 표창장위조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국민의힘 지지자조차 너무 쪼잔하다며 고개를 돌린 부분이다. 사모펀드가 중요한데 그게 무죄가 났으니 나머지는 잡스럽다며 관심도 가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언론도 유죄와 형량만 집중해서 보도하는 것이다. 내용을 상세히 들어가면 이건 재판부 엿먹이는 꼬라지밖에 되지 않는다.

 

눈높이에서 간결하게, 그러니까 당신 아들이 봉사활동하러 갔는데 전문적으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봉사활동을 한 것이 아니게 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 재판 받을 때 억울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재판정에 증인을 불러오면 그것 때문에도 가중처벌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안되면 어쩔 수 없고. 그런데도 열심히 떠드는 언론이란 뭐하는 것들인가.

 

사법부는 스스로 자멸을 선택한 것이다. 김명수가 대법원장이 되어 그나마 남아 있던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시궁창에 쳐박아 버린 것이다. 법에 대해 조금만 알아도 판결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법을 모르지 않을 정의당이나 자칭진보가 저리 법원을 맹신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알몸들을 드러낸다. 끔찍한 괴물의 모습이다. 역겹다.

이렇게 투명한 놈들이 또 있을까. 법원의 의도를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그대로 번역해서 들려준다. 특히 판사출신 국회의원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 법원의 윤석열 징계에 대한 효력정지 판단은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다.

 

올 초부터 끊임없이 나오던 말이었다. 미래통합당의 심재철이 시작하고 정의당의 심상정이 받았다. 대통령을 탄핵하겠다. 그런데 총선에서 망하니 이제 와서 법원이 가세한 것이다. 김명수의 의중이라 보면 된다. 법원은 대통령을 부정한다. 대통령을 탄핵하려 한다. 그런데도 법원이 순수하게 법리로 판단했을 것이라 믿는 병신들은 어디의 누구인가?

 

대통령을 엿먹인 것이다. 그래서 알기에 대통령도 직접 나서서 바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민주당 국회의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대통령을 등에 업고 당선되었는데 대통령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자신들은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다음 총선에서 과연 공천을 받더라도 당선은 될 수 있겠는가. 생각 바로 하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정경심 재판 판결과 윤석열 징계 효력정지는 사법부의 정부와 여당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이재명의 침묵이 그래서 괘씸하다. 진짜 싸워야 할 때는 지금인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일까.

 

전쟁의 논리는 하나다. 이기는 자는 살고 지는 자는 죽는다. 항복은 지레 싸우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생사를 상대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그 정도 의지도 목적도 동기도 없는 것인가. 이낙연을 믿어본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다.

전략은 낙관으로 세우고 전술은 비관으로 짠다. 전쟁은 당위로 하지만 전투는 계산으로 한다. 낙관이 당위고, 당위가 필요다. 당연히 그리 되어야 하고 그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국토를 잃고 좁은 낙동강 방어선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동안의 패배로 많은 병력과 물자도 잃었고 사기도 바닥이다. 그래서 어째야 하는가? 전황이 불리하니 항복할 것인가? 그래도 승산을 믿고 끝까지 싸워 볼 것인가.

 

어차피 질 것을 알면서도 전사자나 더 늘려 보겠다고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미친 놈들이나 하는 짓거리인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이 그랬었다. 아예 어차피 질 전쟁 패배한 국민에게는 자격이 없다며 히틀러는 독일의 기간산업까지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파괴할 것을 명령했었고, 일본의 대본영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모든 일본인이 같이 죽자는 1억 총옥쇄를 주장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자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이기지 못할 것이니 다 같이 죽자는 소리이니 제정신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남길 수라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은 낙관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 될 것이다. 그리 할 것이다. 그래서 전략은 당위로 세우는 것이다. 그리 되어야 한다. 그리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많은 변수가 있는데 낙관과 당위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 그래서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서 전술을 세우고 가능성을 따져가며 전투를 치른다. 당연히 이겨야 하고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지만 그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의 피해와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희생을 두려워해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희생없는 전쟁이란 없다.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만한 전쟁은 있어도 아무 희생없이 끝낼 수 있는 전쟁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가. 적이 강하다. 병력도 몇 배에 무기와 물자까지 모두 압도적이다. 그런데도 아무 희생없이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것이면 그냥 일찌감치 항복하는 쪽이 더이상의 피해와 희생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각오한 것인가. 10만의 병력으로 100만을 막아내려 한다면 9만이 희생되더라도 오히려 적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9번의 싸움에서 10만이 모두 전멸하더라도 그 사이 한 번의 싸움에서 100만을 막아낼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충분히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술은 비관인 것이다. 전투란 계산인 것이다. 몇 번의 싸움에서 얼마의 병력을 잃었지만 그 결과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런데도 반드시 감수해야만 할 전쟁이라면 해야만 한다.

 

검찰은 강하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 자신의 힘만으로도 비할 수 없을 정도지만 언론과 사법부까지 함께하기에 더 막강하다. 그런 검찰을 개혁하려 한다. 그것도 민주적인 수단으로 바꾸려 한다. 그냥 될까? 아무 피해없이 희생없이 가능할까? 그렇다고 그냥 둘까? 조국 전장관이 아까우니, 그 가족들이 불쌍하니, 추미애 장관이 안되었으니 그냥 검찰을 내버려두어야 할까? 그런 검찰과 결탁한 수구세력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처음의 당위가 중요한 것이다. 처음 검찰개혁이라는 전쟁을 하고자 했던 이유와 목적이다. 반드시 검찰개혁을 이루겠다는 의지와 목표다. 우리는 지금 이 싸움을 해야 한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를 위해 한두번의 실패나 패배, 혹은 희생들은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에 자신의 의지로 서 있는 자가 승자가 되는 것이다.

 

역사상 명장이라 불리는 이들의 공통점인 것이다. 어떤 최악의 패배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로 인한 절대적인 열세 아래에서도 희망과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과연 명량해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가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나머지 11척의 전선이 전장까지 따라나서기나 했었을까? 그래도 이순신이 앞장서니 흩어졌던 병사도 전선들도 다시 이순신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것이었다. 300척이 넘는 적선을 상대로도 물러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지금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다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민주당 의석이 174석이다. 우호의석까지 모두 합하면 180석이 넘어간다.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된다. 고수전쟁과 고당전쟁 당시의 고구려와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강한 전력이다. 명량해전에 임하던 이순신의 함대에 비하면 비교하는 것조차 송구스럽다. 아무리 사법부가 미쳐 돌아가도 법을 만드는 것은 입법부고 입법부를 장악한 것은 민주당이란 것이다. 그 힘을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민주적 원칙은 지키더라도 그 원칙을 저버리고 도발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직접 몸으로 확인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조국 전장관이나 그 가족들, 추미애 장관까지 그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니면 그냥 무의미한 희생에 지나지 않게 된다.

 

지지자들도 확실히 해야 한다. 당연히 해야 하는 싸움이면 그 과정에서의 피해 역시 어쩔 수 없다. 희생 또한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이겨야 한다. 실망도 좌절도 없이 계속해서 싸워 이겨야 한다. 오히려 신난다. 아직 민주당이 계속 집권해서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멈출 수 없다. 게을러진 틈조차 없다. 희생은 당연한 것이다. 실패도 좌절도 당연한 것이다. 마지막 승리만 가져가면 된다. 바빠지는 것이다. 곧 선거시즌이다. 우리가 이긴다. 단 하나 당위다.

지금 정부 출범 초부터 사법시험 존치를 두고 여론몰이를 하던 놈들이 있었다. 사법시험이야 말로 신분상승의 사다리다. 사법시험을 폐지하는 것은 그 사다리를 치우는 것이다. 로스쿨을 없애고 사법시험을 부활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알 것이다. 바로 그 사법시험이 검찰과 법원이라는 사법카르텔을 이어주는 강고한 고리라는 것을.

 

사법시험에 의해 법조인을 선발하던 시절에는 판사든 검사든 변호사든 모두 사법연수원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당시의 법조인들에 대해 설명할 때 사법연수원 기수를 반드시 언급하고는 한다. 윤석열은 몇 기고, 한동훈은 몇 기고, 따라서 누가 검사장이 되면 누군가는 옷을 벗어야 하고, 그런데 이게 검찰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판사까지 함께 적용된다. 알고 보니 검사 누구와 판사 누가 동기라더라. 그러면 몇 년 동안 함께 연수도 같이 받았는데 그냥 동기인 것으로 끝나고 말까?

 

그래서 검찰이 사법부인 것이다. 정확히 검찰과 함께 사법권력이라 불리는 것이다. 검찰은 수사와 기소를 맡고 판사는 재판을 맡는다. 같이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연수까지 받은 동료가 각각 검사와 판사로 나뉘어 수사와 기소, 그리고 재판을 맡게 된다. 그동안 검사의 반인권적인 강압수사로 인한 누명사건에는 반드시 판사의 판결이 함께 얽혀 있었다. 판사가 그냥 검사의 기소내용을 인용해서 판결한 결과 진실을 밝힐 기회조차 없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경우가 생겨난 것이다. 재판도중 분명히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고, 고문과 가혹행위에 대해 고발까지 했음에도 오히려 괘씸죄까지 더해 판결을 내린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정경심 재판만 유독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경우가 그동안에도 비일비재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나중에 판사 그만두고 전관변호사 되면 같은 판사들에게만 손을 벌려야 할까? 아니면 검사들의 도움도 받아야 할까?

 

검사에게 잘해야 나중에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 편하다. 마찬가지로 판사에게 잘해야 나중에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 돈 벌기 쉬워진다. 그래서 동업자인 것이다. 공범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이 징계를 받자 복수하듯 되도 않는 표창장 가지고 징역 4년이라는 무리한 판결을 강행한 것이었다. 현정부에 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봤을 때 과연 봉사표창장이라는 것이 실제 위조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중형을 받을만한 범죄인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기사도 몇 없다. 기사가 너무 나가면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에서 사법시험을 없애고 로스쿨 체제로 바꾸려 한 것이었다. 일단 한 해 배출되는 변호사 수가 늘어나고, 더구나 그들이 로스쿨단위로 나뉘게 되면 지금처럼 사법연수원을 통해 검사와 판사가 유착되는 구조를 어느 정도는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사법시험을 존치해야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새삼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에 대해 이재명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에 의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이재명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사법시험의 존치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냥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신분이동의 사다리로써 남겨두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법시험의 또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인가? 사법시험을 다시 부활시키면 사법연수원을 통한 사법권력의 카르텔 역시 보다 강고해지게 된다.

 

민주당이 이낙연을 중심으로 검찰개혁의 고삐를 강하게 죄려는 지금 그 말많던 이재명이 조용한 이유에 의문을 가지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물론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경기도정이 매우 바쁘다는 것을 안다. 나 역시 경기도민이기에 매일같이 속출하는 확진자들에 경기도지사로서 한가하게 SNS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이란 점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 한가해서 SNS나 하던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바빠도 자기 할 말은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윤석열에 대해서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진짜 전혀 관련없는 우연의 일치일 뿐인가.

 

정경심 재판과 윤석열 징계 효력정지를 통해 분명해졌다. 검찰권력은 언론권력이고 사법권력이다. 원래 재판부는 검찰과 한 몸이었다. 하긴 재판부가 적절히 판결을 통해 검찰의 수사를 견제했다면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졌다고 절대권력이란 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사법부은 검찰의 시녀다. 그래서 검찰의 독립이 사법부의 독립이 되는 것이다. 김명수가 사법독립을 외친 이유였다. 그런 사법시험을 존치해야 한다 주장한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얼마전부터 계속 머리에 맴돌던 생각이다. 유독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사법시험에 대한 주장들이 많았었다. 그냥 신분이동의 사다리라는 자체에 집착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법개혁이란 바로 이 사법시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법시험의 폐지부터 사법개혁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아주 무관한 것인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과연.

그러고보니 요즘 많이 느슨해졌던 것 같다. 사실 일이 힘들다. 일하는 시간도 길고, 워낙 피곤해서 집에 돌아오면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것조차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잠이 부족해서 항상 졸리다. 그러니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것도, 그에 반응해 글을 쓰는 것도 게을러진다. 그래서 유튜브 채널도 개인에 대한 호불호로 아주 선별해서 한두개만 겨우 보는 정도다. 확실히 인터넷이란 개인의 투쟁본능을 극한으로 이끌어내는 공간인 모양이다. 나는 이토록 평화롭고 온건한 일상을 사랑하는데. 그런데 왜 이리 신나는 것일까?

 

더 강한 적을 만나면 지레 움츠러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더 좋다고 투쟁본능을 자극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인터넷이란 안전한 공간에서는 더 그렇다. 딱 좋다. 검찰만으로는 시시했는지 모르겠다. 법원이 가세하지 않았다면 벌써 윤석열은 끝났다. 법원이 윤석열의 편에 서지 않았다면 윤석열이고 뭐고 검찰개혁은 이미 끝이 난 상태였을 것이다. 아니 법원이 검찰과 유착해 있지 않았다면 검찰개혁이란 자체가 아예 필요없었을 수 있다. 당연하다. 검찰이 마음대로 수사하고 기소해도 법원에서 제대로 재판해서 걸러냈으면 검찰이 저렇게 마음대로 날뛸 수 없는 것이다. 검찰개혁은 그냥 검찰만 개혁하고 끝이 아니다. 검찰을 개혁함으로써 검찰과 법원이라는, 수사와 기소와 재판이 일체화된 카르텔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저들을 모두 개혁해야만 한다.

 

김어준의 말처럼 신발끈을 다시 묶어야 할 상황인 것이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의지를 더욱 다지고 전의를 일깨워야 하는 때가 돌아온 것이다. 원래 검찰과 한 편이던 법원이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며 구원군을 자처하고 나섰다. 윤석열 검찰이 절체절명의 한계에 내몰린 상황에서 법원이 나서면서 기사회생정도가 아닌 역전을 노릴 상황이 되고 말았다. 어찌해야겠는가? 법원까지 나섰으니 손놓고 물러나서 항복해야 하겠는가? 그 법원까지 물리치고 목적을 달성해야 하겠는가? 항복도 불가능한 이유는 저들이 노리는 것은 현직과 차기 대통령 모두이기 때문이다. 항복하기 위해서는 이낙연이 차기 대권을 포기해야만 한다. 과연 이낙연이 타협을 시도한다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걸 저들이 두고 볼 것인가.

 

그런 점에서 이낙연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불신은 없다. 오히려 의심을 갖는다면 이재명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상당히 선명한 주장을 내놓는데 검찰이나 법원에 대해서는 그다지 적극적인 입장을 내비치지 않고 있다. 검찰과 법원에 대한 민주당의 반응이 이낙연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면 결국 이재명의 의지는 이재명의 말을 통해서 확인해야 하는데 그 말이 현재 사라진 상태다. 역시 나는 이재명이 아닌 이낙연을 믿고 지지해야 하는 것일까. 선택지가 제한되었지만 그래서 더 나을 수 있다. 아무리 김어준이란 개인을 싫어해도 이런 때 김어준이란 스피커를 통해 결집함으로써 의지를 드러내야 하는 것처럼 더욱 이낙연을 중심으로 민주당의 차기에 대한 의지를 굳혀야 하는 때가 된 것이다. 어디 한 번 해보자. 그래도 차기 대통령은 민주당에서 나올 것이고, 검찰개혁과 사법개혁과 언론개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다음 대선을 위한, 아니 지속적인 이 사회 기득권의 개혁을 위한 의지를 다잡아야 하는 것이다. 싸움은 시작되었다. 저들은 이미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오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물러서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다시 비극이 반복될 뿐이다. 그냥 정권만 잃고 끝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다시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자칭 진보언론과 정당과 지식인들로부터 그 살의를 느낀다. 저들마저 살의를 품을 정도면 그 진짜 주체의 의지란 얼마나 강한 것일까? 문재인도 정경심처럼 만들어주겠다. 김명수의 결심이다. 다시 그런 상황을 반복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한다? 이겨야 한다.

 

그래서 먼저 뒤를 쳐야 한다. 배후를 없애야 한다. 여전히 자칭진보들에 미련을 두고 있는 지지자들이 문제란 것이다. 유시민도 문제다. 자칭 진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는다면 유시민도 결국 버려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지 모른다. 아마 그래서 더욱 정치비평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과 민주당 정권의 재창출을 위해서도 자칭 진보와 함께 갈 수 없는 현실을 아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지지자들부터 정의당과 한겨레와 진보지식인 나부랭이들을 버리고 기득권과의 전쟁에 올인해야 한다. 죽느냐 사느냐. 중간은 없다. 그래서 전쟁이다. 좋아 죽겠다.

여기서도 몇 번 이야기한 적 있지만 난 원래 조국이라는 인물에 대해 그다지 호감이 없었다. 그보다는 싫어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 조국사태가 터졌을 당시 그럴수도 있겠다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래 그놈들이 다 그런 놈들인데 조국이라고 다를 것인가. 그런데 바로 그게 내가 정의당을 보는 시각이다. 정의당이 검찰에게 감히 못덤비고 언론의 눈치를 보는 이유다. 정의당 인간들 털어보면 아주 재미있지 않을까.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 당시 의외로 당시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귀족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그냥 이름만 귀족인,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반 시민과 크게 다를 것 없었던 몰락귀족 뿐만 아니라 실제 상당한 기득권을 누리던 고위귀족 가운데도 혁명주의자가 있었고, 또한 많은 혁명주의자들이 이들의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저술도 하고 활동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왕이나 황제, 혹은 다른 귀족들을 공격하는데 아직은 무력한 존재인 이들 혁명가들을 이용한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지성과 교양을 갖춘 지배층으로써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는 입장에도 선다는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프랑스에서는 한때 귀족의 특권과 부패를 비판하는 연극이나 저술을 후원하는 것이 귀족사회에서 유행이기조차 했었다.

 

내가 이만큼 배웠다. 이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서서 주장도 해야 한다. 실천도 해야 한다. 단 내가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내 이익이 침범당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게 바로 강남좌파라는 것이다. 집에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돈이 있다. 나름대로 내세울만한 사회적 지위와 명성도 있다. 그래서 공동체의 정의를 위해 나선다는 자존과 명예까지 탐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기득권으로서 이만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가며 노력하고 있다. 희생은 개뿔. 정의당이나 한겨레, 경향, 혹은 홍세화나 진중권 등 자칭진보들이 검찰의 법까지 무시하는 전횡과 횡포를 오히려 지지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민주화 이후 과연 그들이 검찰을 두려워 할 만큼 진정으로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위해 직접 나서서 싸운 적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까 검찰이 위법한 증거를 앞세우고, 증인들을 협박하고 회유하며, 법원이 증인들의 증언을 오히려 위증으로 몰아세우는 것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는 것이다. 자기들이 당한 적이 없으니.

 

프랑스혁명 당시도, 러시아혁명 당시도, 우리 역사에서도 동학혁명이나 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대한 기득권의 입장도 유사했었다. 평소에는 그리 시민들, 국민들, 조선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척 하다가 정작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하면 바로 태도가 돌변하고 만다. 그토록 백성들을 위하고 아끼는 모습을 보이던 사대부가 정작 백성들이 못살겠다 무기를 들고 일어서니 단호하게 그들을 진압하는 편에 서서 잔혹할 정도로 진압에 나선다. 동학혁명을 진압하는데 참여한 사대부들이 모두 탐관오리나 매국노들은 아니란 것이다. 그들에게 애민이란 딱 자기들의 기득권이 도전받지 않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혁명에 동참하고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여전히 지키기 위해 그들은 귀족이란 신분을 버리지 않았었다. 귀족의 신분까지 포기했던 진짜 혁명주의자는 귀족 가운데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더이상 권력과 대립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들은 적당한 부와 지위와 권력까지 가진 기득권이다. 기득권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저들 자칭 진보들이 항상 결정적인 순간 기득권의 편에서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이던 것은 그것이 그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지키는 방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이만큼 진보적이다. 이만큼 개혁적이다. 이만큼 시민의 권리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기득권을 해체하고 진보와 개혁을 이루려 할 때는 노무현 정부에서나 현정부에서 보이는 모습 그대로 거의 기득권의 편에서 개혁을 저지하는 입장에 서고 있었다. 과연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과 연대해가며 이루고자 했던 진보와 개혁이란 무엇이었는가. 어떤 공동체의 진보와 개혁을 위해 저들은 한나라당과 연대했던 것인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다가 부당하게 탄압을 당할 때 쓰이던 그 구조에 대해 저들은 오히려 동조하며 편승하려 하는 중이다. 검찰의 별건수사와 먼지털이수사, 그리고 검찰과 유착한 사법부의 존재를 자신들의 근거로 사용하는 중이다.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결은 항상 옳고 개혁도 필요하지 않다. 어디서 그런 논리가 나오는 것인가? 말하지 않았는가? 검찰과 법원과 언론이 정의로운 이유가 곧 진보가 정의로운 이유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자칭 진보에서 유력한 젊은 논객과 한 네티즌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그런데 논쟁 과정에서 네티즌이 공개한 학력을 알게 된 젊은 논객이 그것을 퍼뜨리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과연 지켜보던 자칭 진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서울대라는 학벌이 그리 자랑이던 젊은 논객이었다.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자기 이름 앞세워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지지자들도 많다. 이런 게 강남좌파구나. 좋은 대학 나왔다. 집안도 그만하다. 심지어 정당에 몸담고 있으니 정치권력과도 가깝다. 언론도 자기가 말하면 어쨌거나 기사로 내주기도 한다. 원래 좋은 대학 출신도 아니고 집안이 좋지 않아도 그런 놈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쪽을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게 싫어 저쪽 인간들과 관계를 끊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 인정받고 싶어서 자꾸만 그쪽으로 생각과 글이 옮겨가는 것이 싫고 불편해서 항상 예민해져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예민해진 상태의 나를 저쪽에서 견디지 못하더라. 그래서 지금 물류센터에서 몸을 써가며 돈벌고 글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 쓰고 싶은대로 쓴다.

 

아무튼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강남 좌파란 무엇인가. 기득권 진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그런 점에서 조국 사태는 흔한 강남좌파이던 조국 전장관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냥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다. 다른사람들처럼 자식들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런저런 신경도 쓰며 노력도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는 것이 한 편으로 당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부정당했다. 사실 민정수석 당시 해 놓은 것을 보면 당시까지 조국이나 정의당이나 크게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 것을 검찰개혁 사법개혁이라고 내놓았던 것인가.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용인하고, 적당히 욕먹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그런 정도마저 부정당하고 말았다. 기득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정도로도 너무 나갔던 것이었다. 정의당이 검찰개혁에 대한 입장을 바꾼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기득권 안에서 진보로써 인정받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선을 지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강제로 배척당하며 더이상 강남좌파일 수 없게 된 조국은 선택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대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생존을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될 것인가?

 

전처럼 듣기 좋은 말만 하며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진짜 혁명가다. 진짜 개혁가다. 진짜 정치인이다. 정의당이 정치동아리 소리를 듣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국민의힘도 자신들이 진짜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판받고 공격받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그게 신념이다. 그게 의지다. 그런 것 없이는 그냥 동아리인 것이다. 내가 저들을 일컬을 때 항상 앞에 '자칭'을 붙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 진보언론이라면서 수구언론과 정면으로 맞붙어 논쟁할 의지도 용기도 없다. 진보적 이념과 가치를 추구한다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수구언론의 논리를 따라가고 만다. 설혹 주장을 하더라도 정면으로 맞붙는 것을 피해서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를 욕하듯 민주당 붙잡고 훈계나 일삼는다. 정확히는 조선일보를 공격하다가 조선일보로부터 부정당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자신들이 진보언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조선일보가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의 조국 전장관 일가족에 대한 수사와 재판에 대해서, 그리고 윤석열에 대한 법원의 징계 효력정지 판결에 대해서 정의당이 내놓은 논평이란 그런 연장에 있는 것이다. 장혜영이 공수처법개정안에 기권하고, 검찰의 입장을 받아서 검찰내부에서 알아서 개혁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며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저들에게 진보란 이 사회 기득권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엘리트라는 카르텔 안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석열을 징계한 사유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엘리트라면 그 정도 일탈은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고 어렵게 시험봐서 좋은 대학도 들어가고 검사며 판사도 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도 그 기득권을 누릴 수 있다.

 

여성주의자들이 진짜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을 위해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한다는 단체에서 진짜 경제적으로 약자인 소수자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자칭 진보 정치인들이, 자칭 진보언론들이 진짜 그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주장이 아닌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본 적이 있기는 한 것인가? 진짜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정작 그 법과 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과 그 반대편에 선 이들 가운데 누구를 비판하고 공격하고 있었는가? 중대재해방지법에 대해서도 정작 입법을 추진한 민주당을 공격하며 국민의힘에 노동존중이라는 수식어를 안겨준 것이 바로 저들 자칭진보들이었다.

 

당장 현정부에서 청년과 신혼부부, 그리고 취약계층을 위해 공급하려는 공공임대주택에 대해 아파트전세를 거론하며 비판하고 나서는 것이 지금 자칭진보들의 현실이란 것이다. 여전히 다수 국민들이 훨씬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더 비싼 주거비용을 지불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딱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기준으로 비판하며 나서는 것이다. 저들에게 이미 정부의 정책이 절실한 서민의 존재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수구언론의 서민과 자칭 진보의 서민 사이에 얼마나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인가. 그에 비해 현정부와 여당의 정책이 가리키는 서민은 훨씬 더 현실에 가까이 존재한다.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는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저들이 강남좌파인 이유고 기득권인 이유다. 정당이든 언론이든 지식인이든 상관없이. 활동가들도 아랑곳없이 누가 진짜 진보인가.

 

이제 분명히 해야 한다. 실천하는 진보와 말 뿐인 진보에 대해. 그저 듣기만 좋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자신을 치장하는 수단으로써의 진보와 실제 현실을 뒹굴며 행동으로 이뤄가는 진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유독 진보 정치인 가운데 노회찬만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저들의 정체를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자칭 진보인 것이다. 과연 진짜 진보란 무엇인가. 진짜 개혁이란 무엇인가. 현실이며 투쟁이다. 저들이 자칭인 이유다. 현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치부전이란 바보흉내는 내더라도 미치지는 말라는 뜻이 아니다. 미쳤다는 건 한 마디로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상식이란 대세다. 주류다. 그래서 노무현은 임기 내내 바보가 아닌 미친 대통령이었다. 지금 사법부가 원하는 게 무언가. 법원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법원의 판결로 대통령을 꺾어 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굽혀준다. 어찌되었거나 이런 혼란이 야기된 것은 인사권자인 자신의 책임이다.

 

이로써 분명히 각인시켜 준 것이다. 사법부가 은연중 대통령을 무시하고 모욕주려 한 의도를 바로 받아서 기꺼이 무시당하고 모욕당해준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대통령을 싫어한다면 대부분 반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면 법원의 판결이 가진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사법부가 대통령을 부정하고 능멸하려 한다. 행정부를 무시하고 검찰과 함께 모욕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누구보다 사법부의 의도를 정확히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법부는 지금 검찰과 함께 행정부에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사과로 그 의도가 분명해졌다.

 

남은 과제는 하나다. 사법부까지 포함해서 권력기관 개혁을 완성할 것인가? 아니면 만만치 않은 적이 하나 더 추가되었으니 그 거대한 힘에 짓눌려 항복하고 말 것인가. 저들의 목적은 분명하다. 문재인을 노무현처럼 만들겠다. 정의당과 한겨레가 미쳐 날뛰는 이유인 것이다. 경향이 바라는 것도 그것이다. 말하지 않았는가. 노무현 전대통령의 불행한 소식이 들렸을 당시 한겨레 편집국에서는 환호성이 울려퍼졌다고. 설마 싶었는데 사실이었다. 문재인을 죽여야겠다. 그동안 저들이 보여온 모든 행보가 가리키는 단 하나의 목적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설사 스스로 선택하지 않더라도 강제로라도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들의 힘과 타협할 것인가? 마지막까지 싸울 것인가?

 

이낙연의 시험대라 말하는 이유다. 국제사회에서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타국이 한국 국민의 이익을 강제로 제한하려 했을 때 국가원수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상대가 강하니 무조건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가? 그럼에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인가. 대통령이 사과했다. 법원의 폭거에 대통령이 스스로 굽히며 나섰다. 이런데도 현실인식이 안된다면 뒈지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전쟁이다. 대통령이 몸소 보여줬다. 죽여야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과연 몰랐을까? 추미애 장관이 전혀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일까? 어째서 그토록 답답할 정도로 형식과 절차를 지켜가며 징계위원회를 열도록 지시했던 것일까? 추미애 장관은 또 정직이 결정된 직후 바로 사표를 냈던 것일까? 어차피 어떤 징계가 나오든 법원에 의해 무효화될 것임을 알았기에 리스크를 줄이려 했던 것이었다. 해임이 아니었기에 집행정지가 되었어도 타격이 적고, 더구나 장관이 사의까지 이미 밝혔으니 집행정지가 되었다고 추가로 책임을 물을 일도 없다. 대신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행정부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는 사법부의 진의만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모를 수 없는 것이다. 김명수를 대법원장에 지명한 당시까지야 아직 정보가 부족했으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청와대의 정보력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동안 법원이 보여준 이상한 행보가 한둘이 아닌데 김명수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하면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당시의 사정이 그러나 현직 검찰총장에 대한 초유의 징계라는 승부수를 던지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바로 민주당 안에서 검찰과 타협하려는 사쿠라들의 존재였다. 검찰과 타협해서 검찰이 납득할만한 법안을 만들고자 내부에서 준동하던 버러지들이었다. 단일대오를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검찰개혁은 언론개혁은 물론 사법개혁까지 동반해야 하는 현실을 지지자들과 당원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준다. 어디까지 검찰과 법원이 한 몸이고, 그들은 지금 현정부와 여당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아마 벌써 겁먹고 오줌을 지리며 항복하자고 외치는 새끼들이 민주당 안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자칫 괜히 더 나갔다가는 검찰의 수사대상이 되어 기소까지 이루어지면 증거고 증인이고 상관없이 바로 유죄판결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자기는 괜찮더라도 마누라 자식 하여튼 주변인 모두가 곤란해지고 피곤해질 수 있다. 그래서 이대로 물러설 것인가. 특히 이낙연에게 그런데도 여전히 좋은 사람 행세나 하고 있을 것인가. 아마 이후 민주당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추미애 장관의 유임까지 결정될 가능성도 있다. 추미애 장관이 유임된다는 것은 언론이고 여론이고 상관없이 한 판 제대로 붙어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된다. 그러므로 비상의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민주당이 준비하고 있는 법안들이 많다. 언론개혁과 사법개혁을 위한 법안들이 여럿 준비되어 있고 절차만 남겨둔 상태다. 민주당의 힘을 보여준다. 이낙연의 리더십을 보여 줄 때다. 지금 보여주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은 전시이고 전시에 좋은 사람은 자기 목 내밀고 죽여달라 사정하는 병신머저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일 것인가? 죽을 것인가? 악인으로 살 것인가? 선인으로 죽을 것인가? 이낙연 자신이 직접 하기 뭣하다면 주위의 사람을 앞세워도 좋은 것이다. 지금 민주당 안에도 앞장서라면 기꺼이 앞장설 사람이 적지 않다. 원래부터 법원도 개혁의 대상이었다. 개혁의 대상에서 전쟁의 상대가 되었다. 당연한 사실을 너무 허투루 지나가는 건 아닌가. 우려스럽다.

 

어제 올린 글에 적시해 넣었는가는 모르겠지만 의도는 그거였다. 정경심 재판의 판결은 사법부의 정부와 여당에 대한 선전포고다. 오로지 검찰의 편에서, 같은 사법시험 출신들끼리 힘을 합쳐 감히 자신들을 넘보려는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꺾어 버리고 말겠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상에 행정부에서 부처의 장이 자신의 권한으로 징계를 내린 것을 사법부의 판단으로 집행정지시키고 있었다. 누구의 의지겠는가?

 

어제 올린 글에서 더하고 뺄 것도 없는 그대로인 것이다. 검찰이 특별한 이유는 법원이 특별한 이유와 같고, 판사가 특별한 이유도 검사가 특별한 이유와 같다. 따라서 검사가 모욕을 받으면 판사가 모욕받는 것과 같고, 판사가 능멸당하면 검사가 능멸당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 오랜 룰을 윤석열과 한동훈이 양승태를 수사하며 한 번 깨기는 했었다. 하지만 양승태와는 결이 다른 김명수 아니던가.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서라도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과 더욱 강하게 깊게 밀착하지 않으면 안된다. 윤석열이 이겨야 사법부도 더 큰 힘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정의당도 이번에 본색을 드러냈다. 내가 말했지. 정의당은 윤석열 검찰의 편이라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아주 지겹도록 떠들어댄 바 있었다. 검찰개혁이 아니라 검찰길들이기다. 왜이겠는가? 첫째는 길을 잃은 진보가 고아신세인 것이고, 줄때는 이제 슬슬 순혈 서울대 출신 대통령이 나올 때가 된 것이다. 민주당만 사라지면 정의당에게 길이 열린다. 민주당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친노와 친문이 사라지면 정의당에 그 지지가 돌아온다. 그를 위해서라면 적폐든 수구든 고를 게 무언가. 윤석열이 모든 걸 다 이루어 줄 것이다. 언론과 함께. 강자가 진보를 이루어준다.

 

아무튼 이젠 전쟁인 것이다. 검찰만이 아닌 법원과도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손혜원 전의원 재판부터 그런 조짐이 있었다. 김경수 항소심 판결도 그런 맥락이 읽혔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변명의 여지가 있었는데 정경심 재판과 윤석열 징계 집행정지는 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섰다. 과연 그와 같은 판결들을 정부와 여당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자기 양심에 따라 그리 결정했다 여기는 것인가.

 

지금까지 정치인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지휘관이어야 한다. 이낙연에게 새로운 시험이 주어졌다. 과연 검찰과 법원이 언론과 합세해서 정면으로 선전포고를 한 현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며 풀어갈 것인가. 강대강이다.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180석을 가지고도 지금 상황에 아무것도 못한다면 대통령이고 뭐고 리더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전쟁은 어느 한 쪽이 죽어야 끝나는 것이다. 난세가 요구하는 리더란 전장의 지휘관이다. 지켜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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