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정치가에게, 특히 리더의 위치에 있는 이에게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다. 실력. 자신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역량이다. 도덕성은 그 다음이다. 정확히 정치가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 역시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가 대중을 위해 온전히 그 역량을 사용하려 하지 않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대중들에게 돌아가야 할 이익마저 중간에 가로채려 할 수 있다. 그를 위한 역량도 실력이다. 그래서 도덕성을 따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가에게 있어 최대 덕목은 무엇보다 대중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실력이어야 한다.

 

이낙연이 아무리 리더로써 자신의 비전과 구체적인 정책들을 떠들어도 대부분 대중들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무려 180석 거대여당의 당대표까지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입법부인 의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어쩌면 대통령보다 더 큰 권한이 무려 1년 가까이 이낙연 자신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땠는가? 지난 1년 동안 이낙연은 그런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검찰개혁을 제대로 해 노았는가? 언론개혁을 제대로 이루어 놓았는가? 부동산과 관련한 입법들은 어떤가? 정부에서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바로잡을 책임이 입법부에는 있었을 것인데 그동안 이낙연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지난 보궐선거의 참패는 지난 1년 동안의 민주당의 행보에 대한 평가 성격도 있는 것이다. 민주당이 못해도 너무 못했다. 그보다는 아무것도 안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는 책임이 없다며 빠져나가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후 대선후보 경선에서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 또한 어디에도 없다. 나와 상관없고 다 주변이나 다른 누군가의 책임일 뿐이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의 잘못만 들추려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보기에 어떻겠는가. 이놈은 어떻게 해도 책임있는 자리에 앉을 인간이 아니다. 그럴 자격도 갖추지 못한 인간이다. 그래서 비교되는 것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문제로 공격을 받더라도 그동안 결과로써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비전을 밝혀 온 이재명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재명이 이낙연보다는 낫다.

 

즉 이재명에 대한 네거티브를 하더라도 어째서 자기가 이재명보다 나은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빠져 있는 것이었다. 어필하려 해도 그동안 해 놓은 것들이 이재명이 보여준 것들과 비교되며 무색하게 만들고 만다. 윤석열 역시 마찬가지다. 정확히 지금 이재명의 차기 대통령후보로서의 높은 지지율은 다른 후보들과의 비교에 의한 반사효과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낙연보다는 낫다. 윤석열보다는 낫다. 그러면서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영향을 준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놈들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이 더 나아 보인다.

 

하여튼 웃기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간이 거대여당의 대표가 되어서 아무것도 않고 있었다.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시도조차 않았었다. 거대여당의 대표로써 당이 이루어낸 성과들을 자신의 실력으로 삼아 앞세워서 경선이든 대선이든 임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이 이제와서 해내겠다고 떠들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을 호구로 본 것일까? 거대여당의  대표일 때는 아무것도 않던 인간이 대통령이 된다고 뭔가를 해 낼 것이라 믿어 줄 것이라고? 경선이라도 깨끗하게 치렀으면 또 모른다. 도덕적인 문제라면 이 또한 작지 않다. 비호감도의 이유다. 한심한 주제란 것이다.

그러니까 딱 그런 놈들하고만 어울린 결과란 것이다. 2007년 대선을 기억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당시 정동영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는 노무현만 줄창 씹었고, 대선후보로 선출되고 나서는 BBK만 줄곧 떠들었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명확한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저 보기 좋으라고 늘어놓은 공약이라는 이름들의 개별정책들만 있었을 뿐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국정의 큰그림을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래서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정동영이 대통령이 되면 뭐가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희망도 없는데 그나마 경제라도 앞세운 이명박을 제치고 투표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지금 이낙연에 대한 국민의 비호감도가 민주당 지지층에서까지 과반을 넘어서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정확히 이낙연이 차기 대선후보로써 과반에 육박하는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이유 가운데 가장 컸던 것이 문재인 정부의 초대총리이면서 품위있고 안정적이면서도 친화력있는 특유의 언행 때문이었다. 얼핏 핵심을 꿰뚫는 신랄함과 함께 연륜을 드러내는 점잖음까지 느끼게 한다. 지금은 조롱의 대상이 된 '엄중'도 당시까지는 그래서 호감의 이유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고 이낙연이 그동안 해 온 것이라고는 오로지 이재명에 대한 네거티브 뿐이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구체적인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오로지 이재명 깎아내리기에만 혈안이 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단지 대중적으로 유명할 뿐인 황교익을 제물로 삼으려는 무도한 모습까지 보여주었었다. 이 새끼 진짜 뭐하는 새끼인가?

 

심지어 경선이 한창인 와중에 경선의 결과에 대해 승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색마저 넌즈시 여러 경로를 통해 내비치는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사냥을 공공연히 공약으로 내걸다시피 한 윤석열을 차라리 지지하겠다는 자기 지지층에 대해서마저 경선의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다른 후보 흠집내기에, 그 과정에서 민주당 친화 유튜버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작성과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 지지자에 대한 린치, 그리고 경선불복에 대한 의심까지, 그런데도 과연 민주당 지지자들이 그런 이낙연을 민주당의 대선후보로서 지지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국민의힘 지지층에서야 더욱 민주당 대선후보가 마음에 내킬 이유가 없을 테니 그 결과가 바로 전국민 62%라는 압도적인 비호감도인 것이다. 누구때문인가? 이낙연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이낙연의 주위에 어떤 놈들이 포진해 있을지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당시 정동영 주위에는 누가 있었을까? 물론 정청래도 있었다. 이재명도 있었다. 아마 이재명도 그래서 상당히 기시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정청래가 발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이유다. 아무튼 그 주류는 역시 당시 민주당의 구당권파들이었다. 바로 안철수 따라서 국민의힘 갔다가 지금 어디서 뭘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찌그러기들이다. 작년 이낙연이 복당을 추진하다 뒷구멍 수작질이나 부리던 그놈들이다. 당원과 지지자만 아니면 자기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믿던 놈들과 놈의 합작품인 것이다. 버러지새끼. 하여튼 꼬시다. 니 똥이다.

그러고보면 국민의힘은 항상 자기성향 스피커들을 너무 맹신해서 문제였었고 민주당은 너무 불신해서 문제였었다. 차라리 자기들에 편향된 언론보다도 더 극단적인 스피커들만 믿는 국민의힘에 비해 민주당은 그래도 자기들에 우호적인 스피커들보다 일방적인 언론에 더 신뢰를 보냈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자기들에 불리한 주장을 한다고 자기들에 우호적인 스피커들을 대상으로 블랙리스크를 만드는 것은. 저들은 우리 편이 아니다.

 

황교익은 어찌되었거나 정치인이 아니고 당연히 이재명 캠프에 속한 이재명의 사람도 아니다. 그냥 개인이고 그나마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나름 유명인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 임명의 절차나 자질에 있어 문제는 없었는가 따져 물을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개인의 성향이나 양심에 대해서까지 캐물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긴 이 또한 국민의힘이 잘하는 짓거리 가운데 하나다. 별 상관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여 개인의 성향을 문제삼는다. 김정은 개새끼 해보라. 김정은이 개새끼든 뭐든 개인이 그런 것까지 검증받아야 할 이유따위 어디에도 없다.

 

당연히 아무리 민주화된 사회라도 개인이 공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인과 대등하게 대결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개인은 개인이다. 그것도 정치인 개인도 아닌 집단을 이룬 캠프에서 한 개인을 상대로 온갖 막말을 늘어놓는다? 시민의 공복이라는 정치인의 자세로도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단지 경쟁자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격에 대한 모독까지 서슴지 않으며 저지른다. 그런 놈들이 더 큰 권력을 잡는다 생각해 보라.

 

김어준 이 씨발놈이 경선이 시작되고 이낙연에 대한 비판여론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커지자 동지의 언어로써 비판하라 지랄한 바 있었다. 그런데 정작 동지의 언어가 아닌 적의 언어로 지지자들까지 싸잡아 공격하는 놈들은 어디의 누구인가. 하는 짓거리부터가 가장 민주당이 막나가던 시절에조차 차마 하지 못하던 짓거리가 대부분이란 것이다. 김한길이 저런 식으로 한 시민을 다구리놓았는가? 주승용이나 박주선이 그러고 있었는가? 손학규가 그랬을까? 하다못해 안철수도 그따위로는 놀지 않았었다. 이명박근혜나 당당히 그러고 있었다.

 

정도를 넘어섰다. 민주당에 대해 친화적인 스피커들부터 성향을 나누어 블랙리스크로 만들고, 대통령과 정부와 여당의 지지자를 경쟁후보가 한 인사라는 이유로 언론을 이용해 린치하려 한다. 이낙연이 개새끼인 건 알았지만 이건 진짜 버러지새끼다.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그늘이 사라지니 이렇게 자기 본색을 드러내고 마는가. 캠프 관련자 하나? 자원봉사자 하나? 그런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리더란 자리다. 그런데 대통령? 똥이 웃는다.

당연한 것이다. 정통성 확실하고 대중적 지지가 높다면 굳이 미국이라는 외세에 기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기 힘만으로는 권력을 가질수도 지킬수도 없으니 미국이라는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만이 아니다. 영국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고, 프랑스도 그랬고, 중국도 그랬다. 자기들이 아예 다 뒤엎고 직접 지배할 것이 아니라면, 아니 직접 지배하는 경우에도 협력자는 필요했고 따라서 그 대상은 항상 자기들에 기대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이나 개인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분쟁 가운데 상당수가 그렇게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이 뿌려 놓은 씨앗에서부터 시작된 것들이었다.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였었다. 미국이 괜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만 귀국할 수 있도록 강제했던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남아 있던 조선인들이 스스로 자기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조직한 자생적 기구인 건준조차 인정하지 않았었다. 한반도인들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과 지지가 아닌 친일파와 그들의 옹위를 받는 이승만을 앞세우려 했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지배에 협력했던 친일파들의 전문성보다는 역시나 한반도인들로부터 크게 반감을 사고 있었기에 미군의 지지 없이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그 취약성을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 그래서 5.16 당시에도 장면이 아닌 박정희를 선택했던 것이었고, 12.12 이후에도 민주화진영이 아닌 전두환을 후원했던 것이었다. 명분도 정통성도 취약하다면 더욱 이용하기가 수월하다.

 

실제 독립운동가로서 이미 명성이 높았던 이승만이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성과로 대중적 지지가 높았던 박정희의 경우 미국 정부의 뜻대로 움직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의 지지가 아니더라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굳이 미국의 눈치를 보며 미국의 의지대로만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장면 이후 5.16쿠데타를 지지했던 것이었고, 박정희 이후 민주화진영이 아닌 12.12 쿠데타를 지원했던 것이었다. 덕분에 명분과 정통성에서 취약했던 박정희와 전두환은 미국 정부에 많은 것을 양보하며 그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손아귀 아래서 일본에 더욱 종속되어 가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현지인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더라도 역시 명분도 정통성도 지지기반도 취약한 정권일수록 자기들에게 도움이 된다.

 

베트남도 그래서 망했던 것이었다. 베트남의 우파 인사 가운데도 호치민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대중적인 인망과 지지가 높았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청렴하고 능력있고 무엇보다 베트남이란 나라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확고하던 인물이 아주 없지는 않았었다. 아니 1공화국의 응오딘지엠부터가 상대적으로 덜 부패하고 능력도 확실한 인물이었으며 새로운 베트남을 그럭저럭 잘 이끌어나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응오딘지엠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고 지나친 압력과 간섭으로 인해 방어적인 독재로 나아가도록 떠미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을 몰아내기 위해 군부의 쿠데타를 사주한 결과 그나마 유지되던 남베트남의 체계와 질서는 사실상 붕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베트남을 마음대로 하겠다고 응오딘지엠을 몰아세울 게 아니라 적당히 협력하려 했다면 과연 베트남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응오딘지엠까지 경제력이나 행정력, 군사력에 있어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앞서는 상태였었다.

 

그나마 한반도의 사정이 나았던 것은 첫째 그래도 미국이 선택한 이승만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이 김일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으며, 무엇보다 조봉암의 제안으로 시작된 토지개혁의 결과 국민적인 지지역시 매우 높았다는 점일 것이다. 김일성의 명성이 이승만과 비교할 정도가 되었었고 조봉암이 없어서 여전히 지주가 농민을 수탈하는 구조였다면 한반도도 예외없이 베트남과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부패한 독재자로 전락했을 때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손에 끌어내려졌던 것이었고, 박정희도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는 가운데 측근들에 암살당했던 것이었다. 전두환의 군사정권역시 그 결말은 같았다. 명분도 정통성도 없는 부패한 권력은 반드시 국민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진다. 다만 차이라면 한국전쟁과 이후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미국의 많은 지원을 받으며 이미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자발적 친미국가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미국이 그토록 다루기 불편해했던 이승만과 박정희가 결국 한국을 자발적 협력자로 남겨둔 공로자들이란 점에서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원한 반대편에서 미국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졌다.

 

자발적 협력과 지배와 통제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전자는 대한민국이 사실상 유일하다시피 하다. 그리고 후자는 거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었다. 남미에서도 미국이 앞세운 수많은 독재권력이 무너지고 대중적 지지를 받는 반미정권들이 들어서며 미국을 크게 곤란케 만들고 있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해 다시 친미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그 정권의 수반이란 놈들이 거의 비슷한 놈들이라 여전히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한 나라의 사회의 악과 미국의 영향력이 등치된다. 그래서 그 악을 거부하고 배제하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반미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미국은 악이다. 사회의 악이란 곧 미국의 존재다. 그러면 미국 정부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가? 모른다. 누가 그러지 않던가. 미국에 북한 전문가는 없다고. 아시아 전문가도 없다. 미국에는 미국 전문가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민족주의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인을 제외한 각 사회의 저변민중의 의지와 힘에 대해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국제관계를 단순한 힘과 이해의 구조로 이해하고 그를 전제로 모든 계획과 전략을 수립한다. 민주주의란 미국의 가치이지 인류의 가치가 아니다. 국민이 스스로 존엄하며 주권자가 된다는 것은 미개한 야만인들에게까지 적용되는 가치가 아니다. 한국의 모델을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적용하기에는 그 주체인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를 신뢰할 수 없다. 무시한다. 배제한다. 그래서 항상 어딜 가나 뻔한 놈들을 앞세우고 그 대가를 치르고 만다. 배우지 못한다. 베트남에서도, 남미에서도, 불과 몇 년 전 베네수엘라에서 실패를 겪었음에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현지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최대한 존중하고 고려해서 새로운 리더와 질서를 세우려 했다면 사정은 달랐을지 모른다. 실제 힘과 명분을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의 대중들을 이끌 인물을 선택해서 힘을 실어주었다면 이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능한 것을 넘어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조차 희미했다. 당장 탈레반이 수도를 공격해 오는데 필사적으로 맞서고자 하는 의지마저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놈들만 선택한다. 탈레반으로서는 다행스런 일이다. 대중적 지지가 높은 상식적인 인물이 상식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다면 사정은 달랐을지 모른다. 그런데 심지어 미국은 탈레반과 맞설 유력인사들마저 무력화시키는 것에 앞장서고 있었다.

 

제국으로서 미국의 무능이다. 미국의 무능이기 이전에 이전과 다른 제국의 통치방식에 대한 숙제인 것이다. 문명의 차이가 이전처럼 확연하지 않다. 문명의 차이로 억누르기에 민족이라는 존재가 더없이 강고해졌다. 종교와 역사와 전통과 인식과 관념이 하나의 힘이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것을 용인치 않는다. 세계화란 그런 수많은 약소민족들에게도 통용되는 논리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긴 한국마저 어떻게든 예전으로 돌리려 애쓰는 점이 미국이란 제국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기도 할 것이다.

 

정말 기적같은 일이다. 어떻게 한국은 미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공산화가 되지 않고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모두 이루고서도 친미국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인가.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 시절에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은 이후로도 계속 친미의 전도사들이었다. 미국이야 말로 자유고 평등이고 인권이고 민주주의 그 자체다. 반면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 대한민국은 가장 반미정서가 강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보호하고 후원한 결과가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미래 또한 없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인정 없이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불가능하다. 여전히 미국은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한다. 우스운 일이다.

그러고보면 내가 자칭 진보들과 논쟁하기를 싫어하게 된 이유도 그것이었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권위있는 누군가가 그리 주장한 적 있다더라!"

 

저 말을 듣는 순간 지금 내가 뭐하고 있나 싶어진다. 서로 자신의 논거와 논리를 가지고 서로의 주장을 첨예하게 벼려나가는 과정이어야 할 텐데 느닷없이 외부의 힘과 권위를 빌려 나를 찍어누르려고만 한다. 네가 저기 모두보다 뛰어난가? 네 주제가 저토록 저명한 인사보다 더 대단한가? 논쟁이 아니다. 힐난이고 조롱이고 강요지.

 

지식인이라면 다른 사람의 주장과 논리를 가져다 쓰더라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그대로 인용해 쓰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까지 자기가 온전히 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권위있는 누군가의 주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옳다 여기기에 주장하는 것이다. 하물며 해당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검사의 수사나 판사의 판결을 절대적인 근거인 양 앞세우는 것이 과연 지식인이 할 일인 것인가.

 

진중권이 입시전문가들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논쟁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조롱이고 비아냥이었다. 판사가 그리 판결했으니 전문가들의 의견은 소용없다. 하긴 그래서 자칭진보가 더이상 검찰개혁이니 사법개혁이니 언론개혁이니 하는 개혁과제들에 최소한 침묵하거나 오히려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동안 정치권력에 의한 검찰의 수사나 사법부의 판단은 모두 옳았었다. 진보인사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에서 어떤 잘못도 문제도 없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지만 검찰과 사법부를 등에 업고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과 법원이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적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론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적대하고 있었다. 진보적 가치가 우선인가?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적대하는 것이 우선인가? 진보의 정체성은 반민주당에 있다. 정의당이 선언했고 자칭 진보 언론과 지식인들이 긍정했다. 그러므로 민주당과 민주정부를 적대하는 한 검찰과 법원과 언론은 절대적으로 옳다.

 

하다하다 법원이 판단했다고 사실여부에 대한 논쟁조차 부정하는 지식인이란 것들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자기들이 떠받드는 텍스트를 읽어 본 적 없다고 아예 논쟁 자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놈들이 태반이던 것이 바로 자칭 진보였었다. 누가 그런 주장을 했으므로 그를 읽어 본 적 없으면 말할 가치도 없다. 그게 바로 엘리트라는 것들이다. 대개는 서울대거나 그 아랫줄의 명문대 출신들이 많다. 법원이라면 역시 서울대가 주류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감히 말조차 꺼내서는 안된다. 되도 않는 주장을 펼치고 있음에도 여전히 윤석열과 최재형에 대한 기대를 자칭 진보가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대 출신이고 사법고시까지 합격했다면 뭘 해도 잘할 사람들이다. 뭘 해도 전문가 이상이 될 것이다. 이미 말한 바 있다.

 

진중권이 원래 저런 수준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자칭 진보 가운데 나름 자기 주장을 할 줄 아는 인물이라 여기고 있었다. 스스로 지식인이기를 부정한다. 그냥 엘리트일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정의하고 싶은 것이다. 정의당의 정의란 그 정의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자기들은 대중을 이끄는 존재이지 대중과 하나가 아니다.

 

그러고보니 기억난다. 역시 좋은 대학 다니던 자칭 진보였었다.

 

"스스로 대중의 하나로 여기려 한다."

 

논쟁 도중 나를 비난하려 꺼낸 말이었다. 너는 그냥 일반 대중이다. 일반 대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 진중권만이 아니다. 저놈들을 싫어하는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역겨운 것들이다.

 

1990년대 초반 여성이 어떻다 말하면 바로 욕부터 들어야 했었다. 여성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것조차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이라 여겨졌었다. 여성성이 어떻고, 여성의 우월함은 어디에 있고, 그렇게 강한 여성을 묘사하겠다고 남성화시키는 것조차 여성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써 대상화하고자 하는 시도로 여겨졌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결국 같은 인간이다. 개인의 차이가 있을 뿐 성별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 지금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인지감수성은 어떠한가.

 

여성들도 얼마든지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남성과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성적인 의도 없이도 적당한 스킨십을 주고받으며 남성들과 부대낄 수 있는 것이다. 실제 90년대 당찬 여성들은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서로 가까워진 뒤이겠지만 남성과 여성을 굳이 구분하며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자체를 더 불편하게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의 기사도가 여성을 예우한 것은 여성을 동등한 인격이 아닌 단지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고 있다면 여성들은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보트에 먼저 오를 것이 아니라 남성과 함께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런 여성들에게 여성은 약하고 섬세한 존재이니 말 한 마디도 조심하며 해야 한다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성과 남성을 특정하는 여성성이나 남성성 같은 개념은 성차별의 산물이다. 실제 역사를 보더라도 문명이 발달할수록 성차별 역시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성차별의 근거가 되는 성에 대한 단정과 인식이 강화된 때문이었다. 여성은 이렇다 남성은 저렇다 그러므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차별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결과로 남성 역시 여성과 다른 의미로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남성은 어때야 하고 여성은 저때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를 벗어나면 남성도 여성도 아니게 된다. 성을 강요한다. 성을 강제한다. 그렇다면 과연 성인지감수성이란 이름으로 남성들에게 여성을 특정하여 가르치는 것이 여성주의에, 정확히 성평등에 부합하는 행동일 것인가.

 

확실히 다른 점은 서유럽의 기사도나 신사도에 대한 당시 여성주의자들의 평가가 지금과 전혀 달랐다는 점일 것이다. 여성을 도대체 뭘로 보기에 그따위로 행동하는가. 차라리 조선시대의 성구분이 그나마 여성을 한 주체로 인정하려는 것일 수 있었다. 여성을 단순히 출산의 도구나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유교적 가치를 실천하는 주체로써 여기며 사회적 역할을 나누려 하고 있었다. 하긴 바로 그 기사도와 신사도의 시대에 남편의 아내에 대한 폭력은 정당화되었고, 싫증난 아내를 목줄을 걸어 내다 파는 행위가 상식처럼 벌어졌었다.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을 보호와 배려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한 편 그 여성을 보호하고 배려할 주체로써 기득권 남성을 뒤쫓는 것은.

 

한 편에서는 성인지감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남성들을 규탄하면서 한 편으로는 여성을 상대로 끔찍한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옹호한다. 검찰 출신이기 때문이다. 법무부 차관까지 지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의 후배들이 그를 위해 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검찰로써 김학의를 수사한 행위에 대해 기소당한 이성윤은 나쁜 놈이다. 성인지감수성의 결론이다. 자격없는 이의 성추행은 죽어서도 갚지 못할 범죄지만 자격이 있다면 자격없는 여성에 대한 유린조차 범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의 인권만 보호한다.

 

그래서 지금의 여성주의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계약직 방송인인 여성 아나운서가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실직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남성인 검찰 지도부를 움직여서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여성 검사들을 징계하려 하고, 또다른 성범죄 피해자인 여성의 피해사실을 의심한다. 당연하게 여성인 노동자의 삶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여성성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킬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약자인 여성들은 그러므로 여성을 규정한 성인지감수성의 대상에 포함될 수 없는 때문이다.

 

여성은 이렇다. 이런 존재다. 그러므로 여성은 이렇게 대해야 한다. 진짜 90년대 학교로 돌아가서 선배들에게 말했다가는 바로 매장되었을 개소리들인 것이다. 여성은 인간이나. 여성 이전에 한 개인이다. 개인의 발견이야 말로 근대화의 시작이다. 시대가 참 많이 바뀌기는 했다. 내가 여성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90년대 말부터였을 것이다. 여성이기에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여기는 쌍년들이 늘기 시작한 것은. 그런 것들이 여성주의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어디 출신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일제와 군사독재에 부역하던 씨발년들의 그 학교다. 

 

성인지감수성이란 말 자체가 여성을 규정하고 정의하고 일반화하여 대상화하는 성차별의 산물인 것이다. 그 사실을 여성들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여성주의의 퇴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존재인가? 남성과 다르게 대우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동등한 주체로써가 아니라 보호의 대상으로서만 여겨야 할 존재인 것인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이 지금의 여성주의인 것이다. 쌍년에 씨발년들 버러지년들이다. 욕도 쳐아깝다.

앞에 배고파 죽겠다는 사람이 있다. 며칠을 굶어 일어설 힘도 없다며 엎드려 먹을 것을 달라 구걸한다. 그러자 그를 보던 사람이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발로 밟으며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먹던 걸 줄 수는 없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집에 가서 상을 제대로 차려 오리다."

 

집이 어딘지도 모른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무엇을 차려 올 지도 알 수 없다. 그러면 가까운 가게에서 뭐라도 사서 주면 어떻겠는가? 첨가물 때문에 안된다. 트랜스지방 때문에 안된다. 너무 달아도 짜도 매워도 건강에 좋지 못하다. 유기농으로 영양의 균형을 맞춘 건강한 식단이라야 가능하다. 굶고 있는 당사자라 생각해 보라.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최저임금 인상분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반대한다. 근로시간단축이 자기들이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반대한다. 중대재해법도 자기들이 주장하던 것에서 많이 후퇴했으니 아예 통과되지 못하게 반대한다. 그래서 대체공휴일제도 자기들이 주장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에 반대부터 했었다. 무슨 뜻이겠는가. 자기들이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한 어떤 시도도 결정도 반대하여 무산시키겠다.

 

최저임금이 한 번에 1만 원이 되지 못하니 그냥 7천 원 만 받자. 노동시간이 한 번에 주 40시간으로 줄어들지 않으니 그냥 앞으로도 계속 60시간 70시간씩 일하게 하자. 중대재해법에 허점이 많으니 전처럼 그냥 아무 책임도 묻지 않고 노동자가 죽어나가든 방관하자. 대체공휴일도 모든 노동자가 누릴 수 없다면 아예 모두가 누리지 못하게 하자. 그러면 결국 누가 피해를 보는가. 바로 나다. 노동자인 나 자신이다.

 

노동자를 위한다는 자칭 진보인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하겠다는 자칭 진보들이다. 그러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완전한 법과 제도와 정책이 아니라면 반대한다는 순수함마저 보여준다. 아무리 배고파 죽겠다고 해도 제대로 격식과 영양과 맛까지 고려해서 정식을 차려 내와야지 먹던 음식을 내주는 것은 안된다. 내가 자칭 진보를 싫어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보다는 거리감이다. 절대 저놈들과 내가 함께 섞이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자칭 진보들이 그리 좋아하는 계급이란 것이다. 과연 노동자를 위한다고 노동자인 나 자신과 저들은 동류일 것인가.

 

자칭 진보가 그토록 비판했던 2017년과 2018년의 최저임금인상의 결과 그래도 먹고 살 만큼 수입이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아쉽기는 하지만 52시간의 법정노동시간이 강제되며 일상에 많은 여유도 생겼다. 수입도 늘고, 여유도 생기고,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직장에서는 안전을 강조하고, 대체공휴일로 내일 하루 더 쉴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자칭 진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완전하지 못하니 반대만 일삼았다면 어떻게 되었는가. 바로 취미와 현실의 차이인 것이다. 그저 머리로만 생각하고 즐기는 것이라 자칭 진보들은 완벽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을 테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나같은 노동자들은 작은 변화라도 실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을 바라게 된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정작 자칭 진보가 아닌 민주당을 지지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자칭 진보는 주장만 하고 민주당은 아쉬우나마 그것들을 실제로 이루어낸다. 반대하는 보수세력과 때로 싸우고 때로 타협해가며 하나씩 조금씩 현실로 이루어내고 있다. 실제 노동자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은 더 선명하고 올곧은 순수한 주장을 펼치는 자칭 진보가 아닌 그런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는 민주당인 것이다. 그것을 모르기에, 아니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자칭 진보는 민주당을 질투하고 증오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노동자를 위하지 않는데 노동자의 지지를 받는다. 그래서 자칭 진보가 노동자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실제 현실로 이룬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그래도 괜찮은 위치에 있는 이들과 그래서는 곤란한 현실에 살고 있는 이들의 차이인 것이다. 당장 남이 먹던 빵은 거절할 수 있는, 바로 발로 밟아 뭉개 버릴 수 있는 사람과 그마저도 먹을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의 차이인 것이다. 그래도 4년 전에 비하면 월급이 많이 올랐다. 3년 전에 비하면 더 적은 시간을 일하고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도 더 많은 수입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공휴일이 주말이라고 실망할 일도 없고, 사업장에서도 안전을 최대한 신경쓰고 있으니 괜히 떠밀릴 걱정도 줄었다. 더 완벽해야 한다고? 그럼 물론 좋다. 하지만 이나마라도 내게는 매우 고맙고 소중한 변화이고 발전인 것이다. 진보인 것이다. 진정 노동자인 나를 위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이로써 분명해지게 된다. 이나마라도 이루어낸 민주당과 이조차도 반대한 정의당, 누가 나에게 정의인지.

 

한 걸음, 아니 반 걸음이라도 너 나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때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더라도 결국은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현실이란 그만큼 고단하기 때문이다. 변화와 진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이 아니라면 그렇게 조금씩 나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히려 노동자로서의 삶을 더욱 치열하게 몸으로 겪으면서 민주노총에 대한 생각까지 뒤바뀌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노조전임자라는 것이 있었다. 일은 안하고 노조활동만 하는 놈들이다. 노동자면서 노동자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과연 실제 현실의 노동자를 위하고 있는가. 대변하고 있는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의 민주당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그것이 나의 현실이며 정치의 이유다. 내가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당이 나의 현실에 도움이 된다. 나의 현실을 위해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 기대가 있다. 반면 정의당은 어떠한가. 물론 자칭 진보라면 당당히 와서 조롱하고 비난할 것이다. 무지렁이 노동자 따위가 무슨 노동문제식이나 이야기하려 하는가. 그런 건 잘나고 잘배운 지식인들이 하는 것이다. 언론인 지식인들이 하는 것이다. 그게 자칭 진보의 수준이다. 자기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노동자의 실제 현실보다 우선한다.

 

실제 노동자의 삶을 몸으로 직접 겪으며 투쟁하던 이들도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일은 않고 운동만 하던 노동귀족들이 노동자를 대변한지 벌써 오래 되었다. 그마저도 없이 머리로만 남의 이야기를 빌려 떠드는 놈들이 오히려 주류가 되어 있다. 어차피 내 일이 아니다. 그들과 나의 차이다. 계급의 벽이다. 싫어할 수밖에 없다. 더런 것들이다.

권력이란 곧 공포다. 그리고 이익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동을 강제하는 동기다. 거스르면 불이익이 있을 것이고 따른다면 이익이 돌아올 것이다. 아니 불이익을 넘어 치명적인 위협이 있다면 그를 회피하는 것만으로도 큰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너무나 큰 이익이 눈앞에 있다면 그를 얻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보수정당이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였던 이유였었다. 나눠 줄 수 있는 이익도 많고 제재할 수단도 넘쳐났다.

 

소속 정치인 뿐만 아니다. 언론이며 지식인 사회 역시 보수정당 대표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도 상당한 곤란을 겪거나 큰 명예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자칭 진보언론마저 감히 보수정당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후퇴한 중대재해법을 통과시킨 것은 비난해도 아예 중대재해법 자체를 반대한 보수정당은 비판하지 못한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돌리지 못했다고 문재인 정부를 비난해도 감히 최저임금의 인하를 주장하는 보수정당을 비판하지는 못한다. 보수정당 평의원의 한 마디에는 찍소리 못하다가 민주당 당대표 원내대표에는 협박까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칭 진보인 것이다. 민주당이야 어떻게 해도 이익도 불이익도 없지만 보수정당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익도 불이익도 분명하다. 

 

그럴 수 있는 인물들이 그동안 보수정당의 대표를 역임하고 있었다. 대표의 존재감이 살짝 못 미쳐도 그를 대신할만한 존재가 반드시 배후에 버티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명박이라던가 박근혜라던가. 유승민조차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공천도 못받고 정치를 아예 그만둘 뻔 했었다. 이명박이든 박근혜든 당장의 실세를 거스르면 더이상 정치할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대신 말만 잘 들으면 선거에 떨어졌어도 제법 괜찮은 자리가 주어질 수 있었다. 그만한 힘이 있었던 것이다. 수 십 년 독재에 민주당의 자산까지 흡수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당의 기질 자체가 그런 것을 당연시여기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원과 지지자들조차 그런 당대표의 의지를 충실히 쫓고 있었다. 그런데 감히 소속 정치인이 당대표며 지도부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고 심지어 분열을 조장한다? 당대표를 대놓고 비난한다? 가능하겠는가?

 

첫째는 역시 연이은 선거의 패배로 상당부분 권력기반을 잃은 영향이 컸을 것이다. 정권만 빼앗긴 게 아니다. 지자체도 빼앗기고 국회의석도 겨우 100석을 넘기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나눠 줄 자리도 없고, 지역조직은 흔들리고, 거기에 돈도 사람도 더이상 전처럼 국민의힘에 몰리지 않는다. 위협이 될 만한 인사가 당 주변에 있어야 긴장하고 당대표의 눈치를 본다. 대선이 코앞에 있다고 하지만 대선은 총선과 다르다. 대선에 후보로 출마할 정도면 당대표도 눈치를 봐야 할 당내 거물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후 당내 권력은 새로운 대통령 후보에게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총선도 멀었지 대선을 앞두고 거물들이 날뛰지 지방선거는 상대적으로 중앙당의 역할이 크지 못하지, 그런 와중에 당대표마저 세력도 돈도 무엇도 않은 무선의 원외인사다.

 

당장 다른 사람도 아닌 이준석이 국민의힘의 대표로 선출된 것부터가 국민의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당권을 쥐어 줄 것인가. 누구에게 당의 미래를 맡길 것인가. 당을 틀어쥐고 이끌어갈 인사여야 했었다. 자신이 유력 대선후보이거나, 혹은 그 정도 급이 되는 유력정치인으로써 차기 대선에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아니면 다수의 정치인을 배후에 거느리며 자신의 의지를 당의 의지로 바꿀 힘 정도는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그래야 그를 구심점으로 당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며 나아갈 수 있다. 아니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럴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었어야 했다. 당의 미래를 이끌 비전과 역량을 보여주었다면 그를 당의 미래로 삼아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없었다. 이준석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 당대표 선거에 나선 후보들 면면부터 그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이준석이 선출된 것이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차라리 나이라도 젊은 이준석에게 걸어보자.

 

그 결과다. 자기 사람이 없다. 자기 세력이 없다. 그렇다고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것도 아니다. 아니 능력이 뛰어나도 국회의원도 한 번 못 돼 본, 중앙의 정치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아도 당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당대표까지 여러모로 부족한 인사다. 당원과 지지자들조차 선출은 했지만 전혀 신뢰하지도 복종하지도 않는 인사이니 그에게 뭐라 한다고 후폭풍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이 당대표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민주당 지지자들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아싸리판이 벌어지는 배경이다.

 

그동안 민주당 당대표들이 그랬었다. 아니 지금 송영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30% 밑으로 떨어졌다면 벌써 송영길을 흔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40%를 넘어 안정적으로 상승세를 보이니 경선을 치르며 당지도부를 흔들던 인간들부터 벌써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배경이 있어 주니 그나마 민주당이 조용한 것이지 그마저 없을 때는 정말 가관도 아니었었다. 당대표가 소속 정치인들을 징계하기보다 오히려 끌려다니며 임기조차 마치지 못하고 내쫓기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당대표가 한 마디 하면 언론을 통해 반박하고 비판하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을 소신이라 일컬으며 아예 중구난방으로 찢어져 따로 놀기 일쑤였었다. 그만큼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힘을 가진 놈들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도 국민의힘은 이준석이 국회의원 배지 한 번 달아보지 못한 그저 대중적으로만 유명한 최약체의 인물이다.

 

한 마디로 만만한 것이다. 흔든다고 돌아올 불이익 같은 건 없다. 따른다고 주어질 이익 같은 것도 전혀 없다. 차라리 그보다 다른 곳에서 이익을 찾는다. 이를테면 그래도 대선후보로써 지지율이 높은 윤석열이라든지. 혹은 다른 누구라든지. 그나마 유승민이라도 대선후보로써 지지율이 높으면 어찌 기대 볼 텐데, 유승민이나 하태경이나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겨레가 이준석을 그리 찬양했던 것일까? 국민의힘 망하라고?

 

그야말로 2015년 이전 민주당의 모습인 것이다. 더 최악인 것은 그래도 당시 민주당이 분열한 이유가 나름 거물들이 많아서 자기 잘난 맛에 나대던 결과였다면 지금의 국민의힘은 그나마 거물이라 할 만한 인물조차 없이 아예 중심이 될 만한 존재가 없기에 저리 난장판이란 사실이다. 언론조차 우쭈쭈하며 제대로 비판도 정리도 하지 않으니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한다. 되도 않는 곳에 힘을 실어봐야 분열과 갈등만 커진다. 그리고 바로 대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재미있어지고 있다. 윤석열도 사실 국민의힘 입장에서 별 것 아닌 조무라기일 뿐이었는데, 하필 당대표가 그마저 급이 되지 않는 무선의 애송이라 더 상황이 우스워지고 말았다. 자기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지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닌, 그저 언론만 좋게 써주는 당대표가 언론을 등에 업은 윤석열에게 휘둘린다. 과연 지금처럼 중심없는 모습을 보이는 국민의힘을 국민들은 어찌 볼 것인가. 정의당이야 제 자리 찾아갈 궁리만 하고 있겠지만. 하여튼 웃긴다.

지난 대선 직전 여야를 막론하고 대부분 유력정치인들이 검찰과 사법개혁을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근혜의 국정농단에 이은 양승태의 사법농단까지 드러나자 검찰과 법원을 이대로 둘 수 없다며 사방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크게 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정의당이 검찰개혁을 말하지 않게 된지는 아주 오래 되었다. 김학의에 분노하던 정의당이 이제는 김학의를 수사했다는 이유로 기소당한 이성윤을 비난하고 나서는 중이다. 사법개혁은 물론 검찰개혁까지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검찰과 법원과 언론을 개혁하는 것은 독재고 폭거다. 어째서? 아는 것이다. 개혁되지 않은 검찰과 법원이야 말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

 

과연 저들이 조국 전장관과 가족의 무고를 모르고 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유죄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오히려 더 검찰과 법원을 엄정하게 개혁할 수 있도록 스스로 주장하고 행동에 나서며 여론을 만들어갔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면으로 막아선다. 그래야 조국 전장관과 일가족을 유죄로 만들 수 있다. 그를 공격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 나아가 그래야지만 정권이 바뀔 경우 문재인 대통령을 노무현 전대통령처럼 만들 수 있다.

 

무의식이란 것이다. 내 손으로 쳐 죽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며 상대를 압박한다면 이유는 하나인 것이다. 나로 인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며 비판하고 경고하는 이유는 결국 상대를 죽은 사람과 동일시하는 무의식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을 들먹이는 것이다. 보수든 자칭진보든 그러니까 이딴 식으로 하면 문재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총선 직전 심상정이 굳이 탄핵을 들먹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안철수가 말한 것처럼 신천지로 인한 코로나 확산으로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이 최악을 달리던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개혁되지 않은 검찰이 자기들에 더 좋고 개혁되지 않은 법원이 자기들에 더 이익이 된다. 조국 전장관만이 아니다. 김경수 도지사나 손혜원 전의원 등 문재인을 위한 전초전은 이어지는 중이다. 그렇게 문재인을 죽이고 민주당을 망가뜨린다. 그런데도 그 첨병에 있는 윤석열을 지지할 수 있다는 버러지 새끼들이 과연 민주당 지지자일 수 있는 것인가. 문재인 지지자일 수 있는 것인가.

 

이번 재판은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무엇보다 올 초 있었던 초유의 판사탄핵으로 인해 판결은 재판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이 김경수 지사까지 유죄판결을 받고 말았다. 제대로 개혁하지 않은 결과가 이렇게 돌아온다. 이낙연이 그동안 손 놓고 있던 결과가 이렇게 돌아오고 만다. 아무튼 자칭 진보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검찰과 법원이야 말로 진실이고 정의다. 재미있지 않은가.

 

정의당의 논리대로라면 인혁당 사건도 빨갱이들이 정당하게 처벌받은 사건이어야 한다. 조봉암의 죽음도 예외가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건들에서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고 옥살이한 진보인사들 역시 그런 연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긴 지금 자칭 진보는 진보도 아닐 것이다. 버러지들인 것이다. 진보라 말하는 자체가 역겨운. 더러운 것들.

2012년 총선까지만 하더라도 인물은 보수정당이라는 말이 당연한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수 십 년 군사독재의 유산에 김영삼과 김대중에 의해 넘어간 민주당의 유산까지 더해지며 보수정당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삼이 큰 덩어리를 들고 민자당에 합당하고, 그나마 남은 것들마저 김대중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비열한 공작으로 와해시켜 신한국당과 합당하도록 내몬 순간 민주당에 남은 것이라고는 고작 반독재라는 대의와 김대중 개인의 카리스마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김문수도, 손학규도, 이재오도, 제정구도, 장기표도, 당시 재야의 유력인사들마저 군사독재의 후신인 보수정당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인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은 민주당인데 정작 민주화운동의 주류 가운데 대부분이 속한 정당은 그 대상이었던 군사독재의 후신인 보수정당이었다. 당장 민주당에 몸담은 인사 가운데 김문수나 이재오, 이부영, 장기표, 제정구 등과 비견할만한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정의당의 당대표 심상정조차 김문수 앞에서는 감히 노동운동했다고 말을 꺼내기도 민망한 수준인 것이다. 우상호나 송영길, 이인영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노무현이니 문재인이니 자칭 진보가 대놓고 무시하며 적대감마저 내보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서울에서 활동한 것도 아닌 그런 잡놈들따위 어디 가서 민주화운동했다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민주당 구주류가 여전히 노무현과 문재인을 싫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디 근본도 모르는 굴러온 돌이라는 인식에서다.

 

1990년대 좀 이름이 알려지고 쓸만하다 싶은 인재라면 당연히 보수정당의 제안이 들어가고 그를 승락하면 막대한 정치자금과 함께 공권력까지 포함한 조직의 지원을 등에 업을 수 있었다. 언론까지 보수정당 후보에게 우호적이었었다. 2004년 선거를 제외하고 2016년까지 선거만 치렀다 하면 보수정당이 승리했던 이유였었다. 심지어 탄핵역풍을 등에 업고 압승이 예상되던 2004년의 선거마저 거의 간신히 과반을 넘길 정도의 승리밖에 거두지 못했었다.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유리하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당의 역량에서 차이가 크다 보니 후보 자신이 어지간히 못난 짓만 하지 않으면 어렵지 않게 당선될 수 있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정치에 뜻이 있으면 당연히 당선가능성을 위해서라도 보수정당부터 먼저 살피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보수정당에서 먼저 제안이 오거나, 아니면 자기가 먼저 보수정당의 문을 두드리거나, 그래서 안되면 그때 차선책으로 그나마 당선은 노려 볼 수 있는 민주당을 선택한다.

 

그래서 당시까지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는 인물이라면 둘 중 하나였다. 보수정당에서 공천도 받지 못할 정도의 쭉정이거나, 아니면 그래도 도저히 보수정당의 공천은 받지 못하겠다는 인물이거나. 그래서 선택된 인물이 주승용, 박주선 같은 토호들이거나 김민석 우상호 같은 운동권들이었다. 이전의 민주당이 호남정당 운동권 정당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어느 정도는 맞았던 것이었다. 그마저도 없다면 오로지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돈받고 공천권을 판 찌그레기들만 남을 상황이었다. 김대중을 따르던 이른바 동교동계가 저리 형편없는 몰골로 전락한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다. 돈도 없어, 국회의원도 아냐, 더구나 독재권력의 탄압까지 받는 상황에서 김대중의 주변에 남아 있을 인물들이란 어떤 놈들이었을까? 진짜 쓸만한 인물이었다면 독재정권에서 먼저 유혹해서 데려갔을 것이다. 김대중 정도 거물을 배경으로 두면 언젠가 한 자리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대중도 그나마 자기 이름값으로 당선시킬 수 있는 호남에 인물들을 끌어와서 출마시키고 다시 선수 쌓이면 수도권에 출마시키는 고육지책을 사용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김대중의 이름만으로 격전지인 수도권에 출마하려는 인재는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예상되던 2004년에마저 지지자들조차 이런 놈들 공천하고 표를 달라는 것이냐며 분노할 정도였다. 아무리 열린우리당에서 제대로 된 인물을 공천하려 해도 공천을 신청하는 놈들 수준이 그 모양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당장 후보자 약력만 놓고 봐도 보수정당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화려한데 민주당은 민주화나 시민사회에 관심이 없으면 뭔가 싶은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2012년 한명숙이 여성계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 역시 그런 현실을 어떻게든 타개하고자 선택한 방편이었었다. 아니면 인물이 없는데. 반면 보수정당은 항상 선거때면 후보자의 면면이 화려했었다. 덕분에 정당의 스펙트럼도 오히려 민주당보다 더 넓었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민주당은 물론 진보정당까지 포위할 수 있을 만큼 사회각계각층의 유력한 인사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정당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보수정당에서 결정되면 곧 대한민국의 결정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 바뀐 것이 바로 2016년 총선부터였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표창원을 영입했노라 선언했을 때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내가 알기로도 표창원은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이었었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여 상당한 지위에 오른 전문가였으면서 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은 유명인이었다. 원래라면 보수정당에 영입되어 공천을 받았어야 했는데 민주당에 소속되어 정당원으로 활동하려 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영입된 면면을 보면 오히려 보수적이면서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성공한 보수정당에 어울릴 것 같은 인물들이 적지 않았었다. 반면 특히 박근혜를 거치면서 보수정당의 이념성이 강화되며 보수정당의 인재풀은 상당히 협소해지고 있었다. 특정한 이념을 가진 인물들만 주류를 이루면서 예전과 같은 주류정당으로서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2017년 대선을 거치며 2020년 총선에서 극단적으로 강화되고 있었다. 당시 보수정당과 민주당의 후보들과 당선된 면면을 보면 어떠한가. 성공한 법률가, 기업가, 저술가, 전문가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많은 인물이 포진해 있고 어느 쪽이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는가.

 

2016년 이전까지의 보수정당이 그래도 다양한 사회적 논의를 담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주류정당이었다면 이후의 보수정당은 단지 보수라는 특정한 이념만을 고집하는 이념정당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더 과격하고 더 극단적인 언행등을 경쟁하듯 쏟아내며 그런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정당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보수정당을 보면서 인물은 보수정당이란 말이 당연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반면 실제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이나 실적과 상관없이 스펙만 본다면 이제는 민주당 쪽 정치인들이 훨씬 더 한참 우월하다.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정당은 이념싸움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보수정당이 내세울 인물이 윤석열과 최재형, 오세훈 정도다. 이준석을 그리 띄우는 것도 그만한 인물이 보수정당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당은 아무나 찍어 앞에 내놔도 스펙만으로는 절대 보수정당에 꿇리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중진이랄 인물들이 허접해 보일 정도다. 이래서야 대한민국의 주류고 기득권인 정당은 민주당으로 보인다.

 

실제다. 원래 사람은 서는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까지 달라지는 법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보는 세상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도 사회적 약자와 정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졌으니 상대적으로 진보정당을 선택했을 테지만 그들 자신이 놓인 위치가 이 사회의 주류기득권인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미국 민주당을 보면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부유하고 상당한 명성과 인지도를 가진 이들로 이루어진 미국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지만 급진적인 진보내 개혁을 바라지는 않는다. 딱 자신들이 관리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자기들에게 피해가 돌아올 수 있는 불확실성을 피해서 그 만큼만 개혁을 추구하고 실천하려 한다. 미국 민주당이 욕먹는 이유지만 그러나 그들 자신이 미국사회의 주류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기존의 체계와 질서와 가치 안에서 그들은 성공할 수 있었는데 이제와서 급격히 무언가를 바꾸기란 꺼려지는 것이 당연하다. 무엇보다 자신은 몰라도 가까운 누군가 또한 그 영향을 받을 주류이고 기득권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내가 민주당에 대해 최근 냉정해지게 된 이유다. 이낙연의 발언을 보면서도 전처럼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 이유다. 이런 게 엘리트구다. 이런 게 주류고 기득권이란 것이구나. 그래서 화나는가? 그런데도 자기들의 이익 만큼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의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자기가 손해 볼 것을 알면서도 미약하나마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다. 입대차보호법 개정안을 주도한 박주민이 또한 임대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를 대변해준다. 변호사 해서 번 돈으로 건물도 샀는데 그 임대료를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도록 스스로 법으로 강제하게끔 입법을 주도했다. 그것을 모순이네 내로남불이네 떠들지만 그 자체가 오히려 대단한 자기희생일 수 있는 것이다. 법만 없다면 모두가 비판한 것처럼 얼마든지 더 많이 올려 받을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게 스스로 법을 고쳤기에 앞으로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내기란 더 어려워졌다. 김진표처럼 자기 세금 때문에 개혁에 저항하는 놈들도 있으면 그들의 동의까지 끌어내느라 개혁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당의 모든 입법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성공한 기업가이면서, 전문가이면서, 법률가이면서, 아무튼 기득권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상태에서도 기득권의 힘을 꺾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 자기들이 손해를 볼 수 있게 법률을 고쳐야 한다. 자신은 물론 관련있는 주위로부터 원망을 들을 수 있는 법률을 추진해야 한다. 그래서 느리다. 그래서 한참 모자르게 보일 때도 있다. 각오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이만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방향의 개혁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민주당의 존재는 의미가 있다. 그래도 민주당에서 재벌의 사면과 법인세 인하를 주장해도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나오지 않지 않은가.

 

이해찬의 말이 옳다. 진화란 100 가운데 1의 차이가 쌓이고 쌓여 나타난 결과인 것이다. 1만큼 더 생존하는 것이 수 십 세 대 축적되고 나면 그 차이는 절대적이 된다. 100 가운데 1만큼의 개혁도 100번 쌓이면 100 만큼의 개혁을 모두 이룰 수 있다. 조선에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데 100년 넘는 시간이 걸렸었다.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 정권을 잡고 의회까지 장악할 수 있으면 그만큼 다시 조금씩의 개혁을 더 추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인정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욕망에 초연한 성인들의 제도가 아닌 욕망에 휘둘리며 사는 필부필부들의 제도인 때문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민주당이 주류정당으로 거듭난 대가라 할 수 있다. 마음에 안 들 수 있지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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