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총선까지만 하더라도 인물은 보수정당이라는 말이 당연한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수 십 년 군사독재의 유산에 김영삼과 김대중에 의해 넘어간 민주당의 유산까지 더해지며 보수정당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삼이 큰 덩어리를 들고 민자당에 합당하고, 그나마 남은 것들마저 김대중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비열한 공작으로 와해시켜 신한국당과 합당하도록 내몬 순간 민주당에 남은 것이라고는 고작 반독재라는 대의와 김대중 개인의 카리스마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김문수도, 손학규도, 이재오도, 제정구도, 장기표도, 당시 재야의 유력인사들마저 군사독재의 후신인 보수정당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인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은 민주당인데 정작 민주화운동의 주류 가운데 대부분이 속한 정당은 그 대상이었던 군사독재의 후신인 보수정당이었다. 당장 민주당에 몸담은 인사 가운데 김문수나 이재오, 이부영, 장기표, 제정구 등과 비견할만한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정의당의 당대표 심상정조차 김문수 앞에서는 감히 노동운동했다고 말을 꺼내기도 민망한 수준인 것이다. 우상호나 송영길, 이인영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노무현이니 문재인이니 자칭 진보가 대놓고 무시하며 적대감마저 내보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서울에서 활동한 것도 아닌 그런 잡놈들따위 어디 가서 민주화운동했다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민주당 구주류가 여전히 노무현과 문재인을 싫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디 근본도 모르는 굴러온 돌이라는 인식에서다.

 

1990년대 좀 이름이 알려지고 쓸만하다 싶은 인재라면 당연히 보수정당의 제안이 들어가고 그를 승락하면 막대한 정치자금과 함께 공권력까지 포함한 조직의 지원을 등에 업을 수 있었다. 언론까지 보수정당 후보에게 우호적이었었다. 2004년 선거를 제외하고 2016년까지 선거만 치렀다 하면 보수정당이 승리했던 이유였었다. 심지어 탄핵역풍을 등에 업고 압승이 예상되던 2004년의 선거마저 거의 간신히 과반을 넘길 정도의 승리밖에 거두지 못했었다.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유리하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당의 역량에서 차이가 크다 보니 후보 자신이 어지간히 못난 짓만 하지 않으면 어렵지 않게 당선될 수 있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정치에 뜻이 있으면 당연히 당선가능성을 위해서라도 보수정당부터 먼저 살피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보수정당에서 먼저 제안이 오거나, 아니면 자기가 먼저 보수정당의 문을 두드리거나, 그래서 안되면 그때 차선책으로 그나마 당선은 노려 볼 수 있는 민주당을 선택한다.

 

그래서 당시까지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는 인물이라면 둘 중 하나였다. 보수정당에서 공천도 받지 못할 정도의 쭉정이거나, 아니면 그래도 도저히 보수정당의 공천은 받지 못하겠다는 인물이거나. 그래서 선택된 인물이 주승용, 박주선 같은 토호들이거나 김민석 우상호 같은 운동권들이었다. 이전의 민주당이 호남정당 운동권 정당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어느 정도는 맞았던 것이었다. 그마저도 없다면 오로지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돈받고 공천권을 판 찌그레기들만 남을 상황이었다. 김대중을 따르던 이른바 동교동계가 저리 형편없는 몰골로 전락한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다. 돈도 없어, 국회의원도 아냐, 더구나 독재권력의 탄압까지 받는 상황에서 김대중의 주변에 남아 있을 인물들이란 어떤 놈들이었을까? 진짜 쓸만한 인물이었다면 독재정권에서 먼저 유혹해서 데려갔을 것이다. 김대중 정도 거물을 배경으로 두면 언젠가 한 자리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김대중도 그나마 자기 이름값으로 당선시킬 수 있는 호남에 인물들을 끌어와서 출마시키고 다시 선수 쌓이면 수도권에 출마시키는 고육지책을 사용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김대중의 이름만으로 격전지인 수도권에 출마하려는 인재는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예상되던 2004년에마저 지지자들조차 이런 놈들 공천하고 표를 달라는 것이냐며 분노할 정도였다. 아무리 열린우리당에서 제대로 된 인물을 공천하려 해도 공천을 신청하는 놈들 수준이 그 모양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당장 후보자 약력만 놓고 봐도 보수정당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화려한데 민주당은 민주화나 시민사회에 관심이 없으면 뭔가 싶은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2012년 한명숙이 여성계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 역시 그런 현실을 어떻게든 타개하고자 선택한 방편이었었다. 아니면 인물이 없는데. 반면 보수정당은 항상 선거때면 후보자의 면면이 화려했었다. 덕분에 정당의 스펙트럼도 오히려 민주당보다 더 넓었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민주당은 물론 진보정당까지 포위할 수 있을 만큼 사회각계각층의 유력한 인사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정당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보수정당에서 결정되면 곧 대한민국의 결정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 바뀐 것이 바로 2016년 총선부터였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표창원을 영입했노라 선언했을 때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내가 알기로도 표창원은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이었었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여 상당한 지위에 오른 전문가였으면서 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은 유명인이었다. 원래라면 보수정당에 영입되어 공천을 받았어야 했는데 민주당에 소속되어 정당원으로 활동하려 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영입된 면면을 보면 오히려 보수적이면서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성공한 보수정당에 어울릴 것 같은 인물들이 적지 않았었다. 반면 특히 박근혜를 거치면서 보수정당의 이념성이 강화되며 보수정당의 인재풀은 상당히 협소해지고 있었다. 특정한 이념을 가진 인물들만 주류를 이루면서 예전과 같은 주류정당으로서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2017년 대선을 거치며 2020년 총선에서 극단적으로 강화되고 있었다. 당시 보수정당과 민주당의 후보들과 당선된 면면을 보면 어떠한가. 성공한 법률가, 기업가, 저술가, 전문가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많은 인물이 포진해 있고 어느 쪽이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는가.

 

2016년 이전까지의 보수정당이 그래도 다양한 사회적 논의를 담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주류정당이었다면 이후의 보수정당은 단지 보수라는 특정한 이념만을 고집하는 이념정당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더 과격하고 더 극단적인 언행등을 경쟁하듯 쏟아내며 그런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정당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보수정당을 보면서 인물은 보수정당이란 말이 당연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반면 실제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이나 실적과 상관없이 스펙만 본다면 이제는 민주당 쪽 정치인들이 훨씬 더 한참 우월하다.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정당은 이념싸움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보수정당이 내세울 인물이 윤석열과 최재형, 오세훈 정도다. 이준석을 그리 띄우는 것도 그만한 인물이 보수정당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당은 아무나 찍어 앞에 내놔도 스펙만으로는 절대 보수정당에 꿇리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중진이랄 인물들이 허접해 보일 정도다. 이래서야 대한민국의 주류고 기득권인 정당은 민주당으로 보인다.

 

실제다. 원래 사람은 서는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까지 달라지는 법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보는 세상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도 사회적 약자와 정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졌으니 상대적으로 진보정당을 선택했을 테지만 그들 자신이 놓인 위치가 이 사회의 주류기득권인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미국 민주당을 보면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부유하고 상당한 명성과 인지도를 가진 이들로 이루어진 미국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지만 급진적인 진보내 개혁을 바라지는 않는다. 딱 자신들이 관리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자기들에게 피해가 돌아올 수 있는 불확실성을 피해서 그 만큼만 개혁을 추구하고 실천하려 한다. 미국 민주당이 욕먹는 이유지만 그러나 그들 자신이 미국사회의 주류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기존의 체계와 질서와 가치 안에서 그들은 성공할 수 있었는데 이제와서 급격히 무언가를 바꾸기란 꺼려지는 것이 당연하다. 무엇보다 자신은 몰라도 가까운 누군가 또한 그 영향을 받을 주류이고 기득권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내가 민주당에 대해 최근 냉정해지게 된 이유다. 이낙연의 발언을 보면서도 전처럼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 이유다. 이런 게 엘리트구다. 이런 게 주류고 기득권이란 것이구나. 그래서 화나는가? 그런데도 자기들의 이익 만큼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의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자기가 손해 볼 것을 알면서도 미약하나마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다. 입대차보호법 개정안을 주도한 박주민이 또한 임대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를 대변해준다. 변호사 해서 번 돈으로 건물도 샀는데 그 임대료를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도록 스스로 법으로 강제하게끔 입법을 주도했다. 그것을 모순이네 내로남불이네 떠들지만 그 자체가 오히려 대단한 자기희생일 수 있는 것이다. 법만 없다면 모두가 비판한 것처럼 얼마든지 더 많이 올려 받을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게 스스로 법을 고쳤기에 앞으로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내기란 더 어려워졌다. 김진표처럼 자기 세금 때문에 개혁에 저항하는 놈들도 있으면 그들의 동의까지 끌어내느라 개혁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당의 모든 입법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성공한 기업가이면서, 전문가이면서, 법률가이면서, 아무튼 기득권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상태에서도 기득권의 힘을 꺾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 자기들이 손해를 볼 수 있게 법률을 고쳐야 한다. 자신은 물론 관련있는 주위로부터 원망을 들을 수 있는 법률을 추진해야 한다. 그래서 느리다. 그래서 한참 모자르게 보일 때도 있다. 각오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이만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방향의 개혁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민주당의 존재는 의미가 있다. 그래도 민주당에서 재벌의 사면과 법인세 인하를 주장해도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나오지 않지 않은가.

 

이해찬의 말이 옳다. 진화란 100 가운데 1의 차이가 쌓이고 쌓여 나타난 결과인 것이다. 1만큼 더 생존하는 것이 수 십 세 대 축적되고 나면 그 차이는 절대적이 된다. 100 가운데 1만큼의 개혁도 100번 쌓이면 100 만큼의 개혁을 모두 이룰 수 있다. 조선에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데 100년 넘는 시간이 걸렸었다.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 정권을 잡고 의회까지 장악할 수 있으면 그만큼 다시 조금씩의 개혁을 더 추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인정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욕망에 초연한 성인들의 제도가 아닌 욕망에 휘둘리며 사는 필부필부들의 제도인 때문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민주당이 주류정당으로 거듭난 대가라 할 수 있다. 마음에 안 들 수 있지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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