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의연 논란을 통해 더욱 확실해진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자칭 진보는 수구보다 민주당을 더 끔찍히 싫어한다. 둘째, 더불어 자칭 진보는 조중동을 신뢰하며 두려워한다.

 

오늘 경향일보와 중앙일보가 똑같이 이용수 할머니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 강조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경향일보의 인터뷰에서 윤미향 전대표의 사퇴를 주장하던 이용수 할머니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아예 정의연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이용수 할머니의 진심일까?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경향일보에서 지금까지 보수언론의 정의연에 대한 공격을 최소한 방조한 이유가 바로 이 인터뷰 기사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국회의원 윤미향을 사퇴시켜야 한다.

 

즉 감히 자신들과 연대하던 정의연의 이사장이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자체가 괘씸죄가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악의 온상일 텐데. 진정한 진보사회를 위해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대상일 텐데. 그런데 그런 정당의 당적을 가지고 정의연의 윤미향 이사장이 무려 비례대표까지 되었다. 어차피 윤미향 당선인이 사퇴해봐야 바로 다음 순번의 비례후보가 비례대표를 승계하게 될 테지만, 그렇더라도 정의연의 이사장이 민주당 당적의 비례대표가 되어 대중과 언론 앞에 노출되는 상황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차라리 정의연을 해체하더라도 윤미향 이사장은 사퇴시켜야겠다. 경향만이 아니다. 침묵하기는 한겨레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의연과의 연대보다 민주당에 대한 증오가 앞섰다는 뜻이다.

 

더불어 그렇더라도 그동안 매우 밀접하게 연대해 온 대상인데 그렇게 한순간에 저버릴 수 있는 것인가. 최소한 정의연의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커져가는 가운데 정의연의 존립이유에 대해서라도 근거를 제시하는 기사 정도는 하나쯤 내주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윤미향은 버리더라도 정의연까지 버리지는 않겠다. 윤미향은 민주당 당적을 가졌으니 내치더라도 정의연과 함께 해 온 세월들까지 내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나마 정의연의 편에서 논설이라도 실었던 한겨레조차 차라리 조중동에 사정을 하면 했지 그 논리와 논거의 부당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사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 입바른 소리 그리 좋아하던 자칭 진보 지식인이며 정치인 가운데 보수언론의 공격이 부당하다며 비판하며 나서는 경우도 역시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민주당이 뭐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오만 소리를 지껄이던 그들이었다.

 

결국 뭐냐면 검히 조중동에 맞서기가 두려운 것이다. 그 전에 조중동이 보도했으니 사실로 인정하고 싶은 것이다. 채널A의 검언유착 의혹에 대한 태도에서도 볼 수 있듯 한겨레와 경향은 이미 그와 같은 보수언론의 행태에 대해 하나의 관행적인 취재방식이고 보도방식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상태다. 오히려 조중동의 그와 같은 방식들을 배우지 못해 안달인 상황이다. 그러므로 언론으로서 그와 같은 왜곡된 기사를 내보내는 것도 언론의 보도기술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렇게 보도하게 만든 당사자들이 잘못인 것이지 언론은 정당하게 자신의 권리로서 그리 보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보도되었다면 그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들에게 책임이 돌아가야 한다. 왜곡보도를 한 조중동의 잘못이 아니라 그런 빌미를 준 정의연의 잘못이다.

 

더구나 보수언론이라면 오랜 세월 이 사회의 기득권을 대변해왔을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 자칭 진보들은 깨달았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누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그러므로 진보인 자신들이 이 나라와 이 사회에서 제대로 진보운동을 하려면 누구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지. 조중동의 눈밖에 나면 죽는다. 보수진영의 눈밖에 나면 자신들은 망한다. 그러므로 눈치를 봐야 한다. 바로 어제까지 동지였어도 조중동의 눈밖에 나면 남이고 적이다. 어떻게 그 많은 자칭 진보들 가운데 정의연의 편에서 떠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인가. 그나마 늦게서야 진짜 망하게 생겼으니 띄엄띄엄 한 마디씩 하는 사람들이 보이기는 한다.

 

한국 진보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바로 지난 1월 경향일보에 '민주당만 빼고'같은 칼럼을 진보의 이름으로 게재하고 그를 거의 모든 진보가 지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민주당이 적이다. 민주당이야 말로 최우선으로 타도해야 할 진보의 적이다. 그리고 보수언론은 신뢰하고 두려워하며 복종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정의연도 기꺼이 버릴 수 있다. 인터뷰하는 내내 혹시라도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연에 대한 오해를 풀까봐 조심하는 모습이 눈물겨울 정도다.

 

과연 저들의 의도대로 정의연이 해체되면 누가 더 즐거워할까? 그보다 윤미향 당선인이 사퇴한다면 그런 정도는 상관없다 말할지 모르겠다. 그게 바로 자칭 진보란 것이다. 항상 자칭을 붙이는 이유다. 꼴같잖다.

중앙일보 1면에 나온 이용수 할머니의 인터뷰를 봤다. 아직 정의연의 입장을 거드는 다른 할머니의 발언이 없다면 결론은 났다. 당사자가 싫다는데 선의랍시고 고집부리는 것도 실례고 민폐다. 수요집회도 소녀상도 기념관도 기림비도 다 문제라지 않는가. 정대협은 고쳐쓸 수 없으니 해체하라.

물론 행간은 있다. 윤미향 전대표를 아예 범죄자취급한다. 언론보도를 그대로 믿은 것이다. 그래서 경향과 한겨레가 공범이라는 것. 적극적으로 반박보도를 내주지 않으면 이렇게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만큼 조선일보가 무섭고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정의연은 그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당했다. 정작 피해자들이 거부하는데 정의연이란 단체가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해체가 답이다. 윤미향 당선인도 사퇴해야 한다. 그리고 쓸데없는 시민단체 말고 조금 더 벌이가 좋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일을 찾아야 한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이렇게 정의연과 나아가 진보의 손을 떠났다. 어제 수요집회 현장을 보라. 보수가 다시 한 번 승리했다. 정확히 진보가 또다시 승리를 내줬다.

침묵은 동의다.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에, 보수언론의 보도에, 보슈 정치권의 주장에, 이제 비로서 진보성향 시민단체들도 깨달았겠지. 정작 힘들고 외로울 때 진짜 편들어주는 아군이 누구인지. 정의연은 끝났다. 제 살 길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30년이 허무해진다.

사실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는 그야말로 정의연 해체하라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제까지의 정대협 시절부터의 모든 활동과 함께 정의연의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사익만을 편취해 왔다. 그런 시민단체가 더 이상 이 사회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관계자 전원이 범죄자로서 사법처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마 이용수 할머니 자신은 자신의 폭로가 가져올 파장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언론들이 자신의 발언을 이용해서 정의연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고 활동까지 위축시킬지 멀리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가 기폭제가 되어서 정의연 자체를 해체하라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아마 그렇게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놀라고 당황해서 내놓은 것이 어제의 입장문이었을 텐대, 이미 너무 늦었고 내용도 모호하다. 정의연은 이미 언론에 의해 해체는 커녕 수사받고 처벌받아야 할 범죄자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그냥 정의연 활동 모두 접고 여론을 따라 해체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주변인들의 말이 거칠어지는 것이다. 활동가들이야 그동안 맺어 온 유대관계가 있으니 그렇게 함부로 생각난대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아무래도 그보다 더 가까운 입장만을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더이상 사과하고 반성하겠다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뜻을 쫓더라도 그동안의 활동을 모두 부정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새로 시작해야 한다. 수요집회도 중단하고, 일본정부에 대한 압박도 그만하고, 오로지 모든 역량를 할머니들에 대한 지원에만 쏟아부어야 한다. 정의연이 정의연이 아니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방어 차원에서라도 공격적으로 나서는 것이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아니면 이대로 일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정의연을 해체하고 윤미향도 사퇴해야 하는 것인가?

솔직히 나라면 이렇게 국민적인 욕받이가 되어 가며 그 고생 하느니 남은 돈 다 국고로 귀속시키고 해체한 뒤 다른 일자리 알아본다. 굳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에 내 시간과 수고를 낭비할 정도로 이타적인 인간이 못 되는 때문이다. 재무제표 보니까 월급도 거의 최저임금으로 받았더만. 심지어 자기 돈 내가며 활동한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어제까지 함께하던 누군가가 그동안도 쓸데없었고 앞으로도 의미가 없다며 칼을 휘둘러 찌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그런 정도가 아니라 모두에게 함께 난도질하라고 지시를 내린다면? 차라리 모든 피해자 할머니들이 나서서 그리 주장하면 깔끔하게 해체하고 물러나기라도 하지 그런 상황도 아닌 것이다.

아마 이용수 할머니는 물론 한겨레 경향 정의당 등 자칭 진보들도 처음에는 오판했을 것이다. 그저 괘씸하게 민주당 당적으로 비례대표에 당선된 윤미향 전대표만 혼내주고 말 줄 알았을 것이다. 윤미향 전대표만 사퇴시키면 설마 정의연까지 건드릴까. 물론 보수언론의 의도를 안 뒤에도 차마 반박같은 건 못한다. 그저 보수언론의 선의에 기대어 사정할 뿐이다. 한국 진보의 현주소다. 보수의 인정과 용인 아래 진보는 존재할 수 있다. 조선일보가 까라면 까는 게 진보의 도리다. 그래서 고립무원으로 해체의 위기에까지 몰린 정의연은 더 절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정의연의 존속을 바라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이용수 할머니가 적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당장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을 이용해서 정의연 해체를 주장하고 위안부 협상을 정당화하려는 무리들을 보라. 일본군 성노예 자체를 부정하면서 피해자들을 위하는 양 정의연을 공격하고 있다. 그것을 자칭 진보들은 방조하며 침묵하는 중이다. 그냥 앉아서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것 있는가 싶다가도 상황의 엄중함을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군 성노예를 부정하던 친일세력이 다시 결집해 일어날 수 있게 빌미를 제공한 것이 하필 이용수 할머니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 더이상 함께 하기에도 멀리 가 버린 것이다. 물론 정의연 활동가들이 나처럼 속이 좁지는 않다. 난 안 한다니까. 해체하고 내 살 길 찾아간다. 희생이니 헌신이니 봉사니 하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참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고보면 이미 1990년대 무라야마 담화에 이어 민간기금으로 위로금을 만들어 주겠다 했을 때도 다수의 성노예 피해자들은 정대협의 공식입장과 상관없이 총리의 사과와 위로금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2015년 위안부 협상 때에도 정대협은 반대입장을 밝혔지만 그와 상관없이 돈을 받고 끝내려 한 피해자가 있었다.

 

언론이라고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항상 같을 수 없듯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언제나 성노예 피해자들의 입장이 정대협과 일치했던 것도 아니고, 정대협 역시 성노예 피해자들 모두와 같은 목소리를 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성노예 피해자 전부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했으니 정대협이 잘못한 것인가. 그래서 정대협이 억울하다 항변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정대협이 추구한 것은 일본군 성노예에 대한 진실의 규명과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죄와 배상이었었다. 그런 정대협의 입장과 방향을 같이하는 피해자들이 그동안 정대협과 함께 해 왔던 것이었고. 조선일보더러 한겨레와 논조를 달리하는 기사가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되는 이유와 같다.

 

그럼에도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같은 언론이다. 많은 부분에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항상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같은 주장을 할 수는 없다. 무라야마 담화 당시 위로금을 받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피해자가 있다면 그를 반대했던 정대협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2015년 위안부협상을 수용하려던 피해자가 있다면 그에 반대했다고 정대협이 잘못한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 지금 논란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자칭진보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당사자들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입장과 지향과 주장이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특정 분야에 대한 논조가 다르다 해서 둘을 따로 놓을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결국에 중요한 국면에서 둘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번 정의연 논란과 같은.

 

정의연을 박살내서라도 반드시 민주당에 흠집을 내야만 한다. 다음 대선에서 다시 자신들이 진보언론으로서 이전의 기득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정의연을 희생시켜서라도 민주당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힐 수 있어야 한다. 대의는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항상 함께 행동하고 있다. 지엽적으로 입장만 달리 할 뿐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정의연에 대한 비판도 그리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경향일보는 역시나 언론답게 그런 부분까지 딱 오해하기 쉽도록 보도하고 있었다. 맥락은 같다. 다만 그동안 서로 입장이 달랐던 부분을 이제라도 정리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애초의 목적대로 끝까지 함께 하자. 아마 이용수 할머니의 처음 의도도 그것이었을 테지만 언론이 그를 이용해서 아예 정의연을 존재해서는 안되는, 그동안의 활동조차 부정당해야 하는 단체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기득권 집단으로서 정의당과 미래통합당은 원래 정체성을 같이 한다. 구체적인 정책은 달라도 보수와 진보의 기득권을 지킨다는 당위에는 참여정부 시절부터 그 지향점을 공유해 왔었다. 보수는 정권을 잡고 진보는 그 아래에서 진보운동을 한다. 보수정권에 의해 탄압당하는 것은 진보진영에서 훈장을 쌓아 가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어째서 보수정권보다 민주정부에 더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당장의 주장이 다르다고 서로 완전히 다른 입장인 것은 아니다. 특정 사안에서 중앙과 경향의 논조가 달라도 서로 다른 주장을 펴는 성노예 피해자들처럼 지향점은 공유한다. 각론에서 서로 차이가 드러날 분이다. 그런데 누가 옳고 그르다 따지기 시작하면 그 차이만 드러나며 분열될 뿐이다.

 

정의연에서 언론보도에 반발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한겨레나 경향이나 중요한 이슈에서 언론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비난을 받더라도 더욱 철저하게 입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고. 자칫 채널A의 검언유착을 보도했다가는 MBC처럼 언론임을 부정당하는 지경으로까지 몰릴지 모른다. 아무리 각론에서 다르더라도 동아나 중앙이나 한겨레나 경향이나 조선일보를 정점으로 한 언론의 한 구성원인 것이다. 목적도 같고 지향도 같고 정체성도 같다. 이용수 할머니와 각론에서 차이가 있어도 결국은 정의연은 그런 피해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다.

 

그렇게 이해하면 결론도 쉽게 난다.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향과 한겨레가 조선과 중앙, 동아와 다를 것이라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오해란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분명히 했다. 다만 그동안 자기 마음에 차지 않는 활동들이 있었다. 그런 아쉬움들이 있었다. 아마 오랜 세월 누적해 온 불만들일 것이다. 이제라도 정의연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동의하든 아니면 그럼에도 서로 다른 부분이 있든 그런 모든 것들까지 감수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다름에도 불구하고 결국 끝까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연대고 동지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칭 진보에게 연대란 차라리 보수정권밖에 없지 않을까. 가장 먼저 손떼고 도망쳐 숨은 것들이 그런 자칭 진보들이었을 테니.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다르다고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은 정체라는 것이 현실에는 오히려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오해를 이용한다. 한겨레와 조선은 다르다. 동아와 경향이 다르다. 진중권과 변희재가 다르다. 서민과 정규재가 다르다. 오해를 걷고 나면 사안은 더 분명해진다. 어처구니없는 소란이다.

정말 유시민의 존재가 아쉬워지는 요즘이다. 조중동이 나서면 경향과 한겨레도 뒤따라간다. 경향과 한겨레가 뒤따라가면 자칭 진보들은 최소한 침묵하거나 아니면 그에 동참하려 한다. 시민단체는 움직여도 자칭 진보지식인과 진보정치인들은 굳이 언론이 가리키는 방향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이런 때 유시민이 알릴레오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김어준은 무시하도 유시민을 무시할 수 있는 언론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민주당 것들이 더 싫어지고 미워지는 것이다. 유시민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탓을 돌리며 결국 유시민이란 존재를 민주당에서 지워 버리고 만다. 정작 유시민의 존재가 필요할 때 그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은 민주당이 아닌 그 지지자들이다. 혼란스럽고 답답하기만 한 지금 유시민이 앞장서서 언론이 왜곡하고 있는 진실을 들려주며 돌파구를 열어주었다면 어땠을까. 김어준만으로는 도저히 역부족이라는 것이 김어준은 무시하고 묻어 버릴 수 있다. 청취율 전체 1위라지만 다른 언론에서 받아쓰지 않는 한 그냥 라디오 한 구석에서 혼자 떠드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경향과 한겨레라는 자칭 진보언론들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진보'언론이 아니다. 진보'언론'이다. '진보'라는 정체성보다 '언론'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다. 경향과 한겨레가 항상 조중동을 뒤쫓아 그들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 기사를 써야 하는 이유다. 돈없는 조중동이란 그런 그동안의 보도행태에 대한 비판이고 조롱인 것이다. 조선일보와 정면으로 맞서던 과거의 한겨레는 이미 역사속에 박제로나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조중동과 당당히 맞서던 또 하나의 주류언론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조중동에 종속된 주변의 하나로 전락했다.

 

아무튼 이런 때 누군가 앞장서서 저들의 논리를 반박하며 돌파해 줄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소시민인 때문이다. 내가 뭐란다고 얼마나 귀기울여 들어 줄 것인가. 김어준이 뭐라 해도 그냥 비웃고 무시하고 말면 그 뿐인데. 김영춘과 양정철과 이근형, 박용준, 기타등등등등... 정작 자신들은 이런 때 한 마디도 보태주지 않으면서. 알릴레오가 그립다. 역시 김어준으로는 안된다. 하물며 유시민을 대신하고 싶어하던 그 인간 역시. 누군지도 모르겠다. 씨발.

그러보니 벌써 10년이 넘은 것 같다. 강호동의 세금탈루 의혹이라 해서 이슈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 단지 비용을 과다계상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었다. 즉 전체 수입 가운데 비용을 빼고 수익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겨야 하는데, 강호동은 비용이라 생각하고 제출했던 몇몇 항목들이 국세청의 판단으로 비용으로 간주할 수 없다 여겨지며 추가 세금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냥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오류 가운데 하나다. 실제 그래서 연말정산할 때 보면 이것저것 추가로 계산하고 났을 때 얼마간 더 환급받거나 토해내는 경우가 생긴다. 역시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세금탈루와 신고오류가 다르듯 회계오류와 회계부정 역시 전혀 다른 개념일 것이다. 전담하는 부서나 직원이 따로 없어서 전문적으로 꼼꼼히 관리하지 않는 이상 회계장부에는 반드시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식당에서 불고기 4인분에, 밥 3공기에, 김치찌개 2인분에, 소주 8병 시켜서 먹었는데 그냥 전표에는 15만원으로 찍혀 나오는 경우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당연히 각 메뉴별로 세분해서 따로 계산하는 쪽이 더 정확할 테지만,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로 더 빠르고 간편하기에 그런 식으로 계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때로 그 과정에서 계산오류가 생기며 분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슷한 것이다. 오히려 규모도 더 큰 대기업에서는 그런 경우가 적은데 규모도 작은 자영업이나 중소기업에서는 그런 식으로 회계오류가 적잖이 발생하고는 한다.

 

전혀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회계장부를 작성하려면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내역을 정밀하게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인정따위 개입될 여지 없이 오로지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서만 모든 비용이 치밀하게 계산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영업이 어려운 것이다. 당장 앞서 언급한 식당의 경우만 하더라도 공기밥이나 김치찌개가 서비스로 나갔을 수 있고, 혹은 마지막에 계산하면서 만 원 단위 아래로는 단골이라고 그냥 깎아 준 경우일 수도 있다. 사장과 지인이라 술까지 함께 마셨을 경우는 더 계산이 복잡해진다. 전체 매상과 상관없이 사장과 지인 사이의 합의로 전표는 작성될 수밖에 없다. 이런 걸 영수증까지 써서 낸다고 뭔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면 이것은 횡령이거나 혹은 탈세를 위한 장부조작일 것인가.

 

내가 정의연의 지출항목에 대해서 아주 일찍부터 주장해 온 바일 것이다. 정의연에서 상근하는 직원이 10명만 되어도 거의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만 받고 일하는 것이다. 작년 한 해 급여로 지급된 돈이 2억 6백만원 정도다. 그래서 상근직원이 10명이면 벌여놓은 사업도 적지 않은데 누가 회계만 전담해서 그처럼 철저하게 집행하고 기록까지 했을 것인가. 대부분 시민단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뭔가 사업을 벌인다고 섭외해서 집행을 했는데 현장에서 얼마간 할인도 하고, 혹은 기부한다고 돌려도 주고, 아니면 그 과정에서 추가적인 비용이 생겨서 더 지출하기도 하고, 그러면 그런 항목들을 어떻게 철저하게 장부에 기재할 것인가. 여유도 되고 능력도 되면 꼼꼼히 자세하게 그 모든 것을 장부에 기재할 테지만 아니라면 노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뭉뚱그려야 할 필요가 생길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사정까지 아느냐면 아주 오래전 아주 작은 회사에서 일하면서 내 일도 아닌 영수증 정리까지 맡아서 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하던 일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 없어 하게 되는 일이라 영 허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경험에 비추면 아무리 전산화되고 해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규모가 작은 법인의 경우 그런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전담직원이 있어도 과연 그렇게까지 꼼꼼히 모든 항목들을 챙길 만큼 시민단체들이 치밀하게 조직화되어 있는가. 하드웨어적인 문제도 있을 테고, 혹은 소프트웨어적인 원인으로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장부를 꼼꼼히 기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비용과 노력을 그 부분에만 할애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부금으로 기림비며 홍보등의 활동을 한 것 가지고도 시비거는데, 전문 회계인력을 동원해서 장부를 꼼꼼히 기록했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논란의 핵심은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회계상에 문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구성원 개인들이 사익을 편취한 증겅니 것인가. 그래서 고작 김복동 재단에서 시민단체 활동가 자녀들에 장학금을 지급한 것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장학금 200만원 준 것으로도 시민단체끼리 서로 사익을 나눈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의 유지를 가장 가까이서 듣고 따랐던 것은 정의연 활동가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가까이서 도왔던 적도 없는 이들이 그 유지를 지레 짐작해서는 이것이야 말로 편취고 횡령이라며 흥분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것 말고 과연 회계상에 발견된 오류들 가운데 활동가들 개인의 이익으로 편취된 것이 얼마나 있었는가.

 

아주 교묘한 것이다. 더욱 악랄한 것이다. 그래서 경향과 한겨레, 그리고 정의당과 녹색당과 민중당이 비열하고 비겁하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지적했어야 했다. 그동안 정의연과 연대해 온 세월이 있었으니 더욱 적극적으로 이런 부분들을 비판하며 정의연을 변호했어야 했다. 어떻게 보수언론이 사실을 만들어가며 정의연을 공격하고 있는가 낱낱이 폭로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작 자칭 진보들은 보수언론들의 보도를 기정사실로 간주하며 한 마디 비판조차 못하고 그저 한 마디 씩 거드는 정도로도 버거운 모양새다. 그래서 횡령인가? 그냥 장부상의 오류인가?

 

22억이 회계장부에서 사라졌다. 정확히 이월내역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돈이 고스란히 장부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기사가 된다. 그냥 어느 쪽에서든 기록에 오류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인데도 마치 22억이라는 돈을 정의연에서 횡령한 것처럼. 미디어오늘에서 겨우 정의연을 변호하는 기사를 내고 있었다. 그나마 진보진영에서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며 비난하는 김어준이 정의연의 입장을 충실히 전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정의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나조차 그들의 선의를 벌써부터 부정할 정도는 아니라 적극 반박하며 나서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회계상의 오류인가, 회계상에 어떤 의도가 개입된 부정이며 범죄인가. 언론의 보도취지는 부정인데, 그러나 언론의 보도내용은 단지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오류는 범죄가 아니다. 그냥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더욱 규모가 작을수록 더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란 것이다. 오류가 있다고 다 범죄가 되었다가는 자영업자들 전부 감옥에서 총회를 열어야 한다. 누구도 어디서도 그런 정도를 문제삼거나 하지 않는다. 범죄가 되기 위해서는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들이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어째서 오류가 아닌 부정이며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민주당 혼자서 대한민국의 모든 기득권과 맞서고 있는 모양새인 것이다. 민주당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으면 어제까지 연대하던 사이라도 단호히 손절하고 만다. 보수언론이 공격에 나서면 차라리 따라가지 반박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한겨레와 경향에서 내주는 반론기사는 다른 언론에서도 그냥 양념삼아 더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칭 진보의 스피커 가운데 누구도 정의연을 위해 나서지 못한다. 아직 두려운 것이다. 그보다는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싶은 것이다. 엄석대를 추종하는 '나'처럼. 과거속에 살고 있다. 한심하다.

윤미향 당선인이 조국 전장관의 이름을 굳이 끄집어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언론이란 어떤 존재인지. 언론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그 앞에서 진보란 이념과 가치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동안 일본군 성노예와 관련해서 많은 활동들을 하며 자칭 진보진영과도 상당한 유대를 가져왔을 것이다. 한겨레와 경향 같은 자칭 진보언론은 물론, 정의당이나 녹색당 같은 자칭 진보정당들, 그리고 진중권이나 홍세화 같은 자칭 진보지식인들과도 오랜기간 연대하며 깊은 관계를 맺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그 잘나신 자칭진보 가운데 정작 정의연이 보수언론의 먹이가 되었을 때 오명을 무릅쓰고 나서서 도우려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대충 지금까지 드러난 것들만 봐도 언론들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해가며 정의연을 몰아가고 있는 것은 정의연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나마저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설마 그동안 정의연과, 혹은 그 전의 정대협과 연대하며 정대협에 해 지금 보도되는 내용 만큼도 아는 이가 없을 것인가.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라도 정의연 관계자들에게 물어 알게 된 것들이 있을 것이고, 오히려 속사정에 대해서도 더 깊이 많이 아는 만큼 더 적확한 판단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자칭진보 언론이나 지식인 정치인들도 그를 위해 다만 한 마디라도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주지 않는다.

 

첫째는 윤미향 전대표가 감히 보수정당보다 더 증오스러운 민주당의 비례대표가 되었다는 것이었을 테고, 둘째는 더구나 저 무섭기 그지없는 조중동을 필두로 언론이 총공세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중권이나 김경율이 말한 것처럼 아직 자칭 진보 대부분은 언론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는 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차라리 민주당에 대해서는 왜곡과 날조까지 서슴지 않는 언론들이지만 진보진영에 대해서는 민주당을 더 악랄하게 공격하기 위해서라도 선의를 내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진보정당을 앞세워 민주당을 공격하는 경우는 있어도 민주당을 들어 진보정당을 공격하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자칭진보의 우군이다. 그런 언론에 정의연이 밉보였다.

 

조국 전장관의 경우도 그랬지만 언론의 표적이 된 바로 그 순간 대부분 자칭진보들은 더이상 그를 위해 함께 싸우려 하기보다 재빨리 손을 빼고 도망쳐 숨으며 그저 자기에게까지 피해가 오지 않기만을 바라곤 한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정치보족을 당하는 동안에도 오로지 박지원 한 사람만이 노무현 전대통령을 위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저 수많은 자칭진보 언론과 자칭진보 지식인들, 자칭진보정당들은 오히려 보수정권과 언론과 하나가 되어 노무현 전대통령을 죽음으로 모는데 앞장서고 있었을 정도였다. 바로 그런 일들이 이제 다시 정의연이라는 과거사의 가장 아픈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온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벌어지려 한다.

 

오히려 돈을 앞세워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일본정부의 선의를 인정하며, 돈으로 해결하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이라며 그 이상을 이루어내기 위해 노력해 온 정의연의 활동 자체를 부정한다.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유지하며, 해외에 일본군 성노예의 진실을 알리고 세계시민들의 공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그 모든 과정들을 부정한다. 그러니까 그 돈까지 모두 가져다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썼어야 했다.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 말고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 논리를 단 한 언론, 단 한 지식인, 단 한 정치인이라도 정면으로 반박하며 그 진의를 이야기하고 있었는가. 차라리 정의연더러 잘못을 인정하고 윤미향 대표의 사퇴와 함께 아예 시민단체를 해산함으로써 더이상 자신들에게까지 피해가 오지 않도록 해달라 대놓고 말만 않고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조국 전장관이나 노무현 전대통령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그들이 그렇게까지 지켜야 할 진보의 가치와 정체랄 무엇인가.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칭 진보란 얼마나 비겁하며 무력한가. 그냥 입으로 떠들 뿐이다. 조금만 위험하고 어려워지면 바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저 자신만 보전하려 들 뿐이다. 누구 말마따나 세미나만 열심히 하면서. 일인시위만 죽어라 해대면서. 언론지면에 그럴싸한 말의 성찬이나 늘어놓으며. 그러나 싸우지 않는다. 언론과도, 보수정치권과도, 차라리 싸운다면 만만한 민주당과 싸우겠다.

 

이번 정의연 논란을 보면서 가장 역겨운 부분일 것이다. 몰라서 안하는 것인가. 알면서도 못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동안 나는 자칭진보의 민낯을 너무나 질리도록 가까이서 많이 보아 왔었다.

 

하긴 그래서 조중동이 저리 미쳐 날뛰는 것일 게다. 진보언론은 감히 자신들과 맞서지 못한다. 진보정당과 지식인들 역시 감히 자신들을 거스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칭진보고 자칭진보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정의연도 깨달았을 것이다. 저놈들은 감히 손잡을 가치도 없는 그저 입만 산 쓰레기들이라는 것을.

 

민주당더러 의리없는 새끼들이라 욕했었는데 이건 그런 정도가 아니다. 보수언론이 공격하니 정의연도 기꺼이 내버리겠다. 민주당이 싫어서인지. 아니면 보수언론이 무서운 것인지. 물론 둘 다일 터다. 썩을 것들이다.

상상력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아는, 자신이 경험한 사실들 위에 살짝 더하거나 바꿔가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어릴수록 상상력이 부족하다. 어른의 상상력과 아이의 상상력은 다르다. 아이의 상상력에는 현실과 사실이라는 토대가 부족하다. 그래서 더 허무하도록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반면 어른의 상상에는 슬프도록 구체적인 현실과 사실들이 담겨 있다. 그런 것들을 넘어서 상상하는 자체가 어른들에게는 무척 어렵다.

 

자기가 전염병에 감염되면 가족까지 감염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전혀 생각도 않고 있었다. 자기는 젊으니까. 젊고 건강하면 설사 걸리더라도 크게 앓거나 죽기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자신은 물론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불편을 감수하며 개인위생과 방역에 힘쓰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우습게 보이기까지 한다. 당신들은 그렇게 구차하게 비루하게 조금이라도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나는 쿨하게 용감하게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의 삶을 즐기겠다. 그런 그들의 생각 속에 혹시라도 자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로부터 전염될지 모르는 훨씬 취약한 상태의 주변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찾은 장소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며 자신까지 위험해지게 되면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에 패닉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그저 막연하게 한 두 번 떠올려나 보았을 뿐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고민해 본 적 없는 상황이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도망치고 숨기에만 급급한 것이다. 어찌해야 하지? 당장 이제부터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더 고약한 것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역시나 자기 일 아니라고 아무 생각도 없는 이들이 또한 적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그건 또 그 놈들의 일이다. 그래서 굳이 성소수자를 언급하는 것이다. 자기는 아니다. 자기와는 상관없다. 그래서 모두가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술집을 찾고 그나마 문 연 클럽을 수소문한다.

 

물론 나이가 어려서만 문제인가. 나이가 많다고 모두가 어른의 상상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내가 돌은 던지면 그 돌은 맞은 상대는 아플까? 내가 꼬리를 밟으면 꼬리를 밟힌 고양이는 정말 아파할까? 내가 칼로 찌르고 불로 지지고 몽둥으로 내리친 다음 집어던지면 그러면 강아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이코패스라는 게 아주 드물고 멀리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자신의 행위로 인한 다른 대상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상상하는 능력이 결여되었을 때 아무렇지 않게 그 대상에게 위해를 끼치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되는 것이다. 다만 선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사회화의 과정에 있는 미성숙함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를 뿐.

 

잠시의 쾌락을 위해 자제력을 놓아 버린 결과 형제가 감염되고, 부모가 감염되고, 심지어 가장 위험한 외할머니까지 확진판정을 받게 되었다. 아마 아직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부정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 잘못이 아니다. 어차피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이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부디 아니기를 바라지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저 당장 놀지 못하는 것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너무 많기에.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을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인가. 내 일이 네 일 같고, 네 일이 내 일 같다. 당연히 그럴 리 없다. 내 일은 내 일이고 네 일은 네 일이다. 그 공간을 채우는 나머지다. 공간능력이란 바로 상상력이다. 어째서 부모들은 형제들은 동료와 이웃들은 그렇게 불편하게 인내하고 양보하고 희생하고 있는 것인가. 깨달을 수 있다면. 시간이 해결해주는 부분도 물론 크기는 하지만. 답답한 것이다.

역시나 익명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익명의 취재원이란 허구의 인물이거나 아니면 이해당사자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이름을 밝힐 경우 인터뷰의 신뢰성을 의심받을 만한 인물이기에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말만 따서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다. 과연 윤미향 당시 정대협 대표에게 위안부 협상의 내용을 전달하고 협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당시 외교부가 나서서 합의한 내용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며 반대여론을 주도했던 윤미향 당선자와 정의연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인가.

 

아직은 일방적인 주장이다. 우습게도 박근혜 정부의 외교부에서 위안부 협상과 관련한 모든 내용들을 은폐한 바람에 당시 누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 협상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어떤 증거도 자료도 없는 상태다. 덕분에 아무리 누가 어떤 주장을 해도 그를 확인할만한 어떤 근거도 지금으로서는 남아 있는 것이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없다. 그렇게 당시는 물론 이후로도 철저히 기밀을 유지하고 있는 사안인데 이제와서 유독 윤미향 당선자만은 정부로부터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듣고 협의까지 했었다. 그러나 누가 그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위치에 있었던 누가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 의심이 사실로 드러났다. 결국 이 모든 논란의 배후에는 그놈들이 있는 것이다. 결국 그놈들과 결탁한 언론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정체마저 감춘 채 윤미향 당선자에게 불리한 확인조차 할 수 없는 사실들을 떠들어대고 있는 것인가. 더불어 앞장서서 윤미향 당선자와 정의연을 공격하는 논리라는 것이 그들의 이해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돈을 받고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끝내자. 정의연도 모은 돈 다 털어서 피해자들에게 주고 활동을 이만 끝내라.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그래서 누구 좋으라고?

 

다시 기억을 되돌려 보자. 당시 위안부 협상을 전후해서 사회분위기가 어떠했었는가. 언론을 통해서는 어떤 기사들이 쏟아졌고, 대중들의 여론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는가. 그리고 당시 당사자의 하나였던 정대협은 어떤 태도와 행동을 보이고 있었는가. 무엇보다 당시 외교부의 위안부협상이 그렇게 정대협에게까지 내용과 과정을 공유할 만큼 투명하게 이루어졌었는가. 물론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언론도 기사를 쏟아내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당사자의 이름마저 가려가면서. 고약스런 악취가 풍기고 있다. 언론이 언론한다. 아주 조직적이다.

둘 중 하나다. 기억상실이거나. 아예 관심이 없었거나.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되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해 민간기금을 통해 위로금을 지급하겠다 했을 때 당시 여론이 어떠했었는지 또렷이 기억한다. 2015년 위안부합의가 발표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돈은 우리도 있으니까 일본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나 제대로 진심을 담아서 하라. 그러면 과연 당시 피해자들에게 차라리 우리가 그 돈 줄테니 받지 말고 일본 정부가 솔직하게 진실을 밝히고 잘못에 대해 진심어린 사죄와 반성을 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말했다면 과연 잘못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가만 보면 지금 정의연을 대상으로 의혹보도를 쏟아내는 언론들 대부분이 2015년 당시 정부의 편에서 위안부합의의 정당성을 떠들던 곳들이다.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을 위해 이만한 돈도 내고 했으니 사실상 사과로 받아들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가도록 하자. 그러나 대부분 여론들은 언론의 기사와는 전혀 다르게 그깟 10억 엔 따위 자기들이 모아서 줄 수 있으니 일본 정부로 하여금 제대로 사과부터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었다. 당연히 그런 국민적 여론의 최선두에 있던 것은 수 십 년 동안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시민단체 정의연이었었다. 그래서 급하게 국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생존한 피해자들에게 1억 씩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 그때의 보복인지도 모른다. 당시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한 것처럼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끝냈어야 했었다.

 

대부분 정의연을 공격하는 주체들의 논리라는 것이 그렇다.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되고 일본 정부에서 민간기금으로 위로금을 지급하려 했을 때 반대한 것도 잘못이었었다. 당시 위로금을 거절한 피해자들을 위해서 정부에서 따로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도 역시 잘못한 것이었다. 이미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은 피해자가 있고 그를 거부한 피해자가 있는데 구분을 두지 않고 모두 똑같이 지급한다면 오히려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던가. 그러니까 2015년 당시 위안부 협상에서도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끝내려는 것을 막아섰던 정의연의 행태에 대해 비판해야만 한다. 딱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나아가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받아들이려던 과거 보수정부의 입장이기도 하다. 원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진실을 폭로하며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고 나선 것도 모두 돈 때문이며, 따라서 돈만 주면 다 해결되는 것이다. 진상규명도, 책임의 인정도, 진심어린 사죄와 반성 또한 단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번 정의연의 지출내역과 관련한 논란에서도 일본군 성노예의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세계에 알리며, 세계시민들의 여론을 불러모아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그동안의 모든 활동들에 대해 다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수요집회가 웬 말인가? 기림비가 무슨 소용인가? 해외세미나가 어디에 쓰는 것인가? 소녀상도 다 필요없다. 다른 활동 같은 것 다 필요없고 무조건 성금을 모았으면 피해자들에게만 지급하라. 달리 말하면 그런 활동같은 것 다 의미없고 피해자들에게 직접 금전적인 이득이 돌아갈 수 있는 결론이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무라야마 담화와 위안부 합의로 논리는 돌아가게 된다. 그때 돈만 받고 끝낼 수 있게 하지 않은 정의연의 잘못이다. 사실상 지금 정의연과 관련한 논란이 크게 불거진 이유일 것이다.

 

물론 시민의 기부와 성금으로 이루어지는, 더구나 정부의 지원까지 받는 시민단체로써 그 지출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이야 언론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다 여기고, 여론 역시 그런 부분들에 대해 당연하게 요구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정도를 넘어선 기사와 비판들이란 것이다. 돈만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최선이며 모든 것이다. 돈을 제외한 어떤 것도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그를 위한 모든 활동은 가치가 없다. 그래서 비판받아야 한다. 어째서 그따위 쓰잘데기없는 활동들이나 하느라 피해자들에게 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인가.

 

정의연의 장학금만 하더라도 생전에 김복동 할머니와 정의연 인사들의, 더구나 정의연과 연대해 왔던 많은 시민단체 활동가들과의 유대를 생각한다면 딱히 문제가 될 만한 부분으로 여기기 어렵다. 당연하게 대부분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경제적으로도 넉넉치 못한 경우가 많고, 그동안 자신들을 위해 힘써왔던 만큼 더 좋은 일들을 많이 하라고 그들까지 지원대상에 넣었다면 그것으로 트집잡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러니까 왜 그같은 장학금 지급이 문제인가를 생전에 김복동 할머니의 인터뷰나 혹은 평소 대화등을 통해서라도 근거를 제시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없다. 그냥 막연하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그 돈은 다른 곳에 쓰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문제다.

 

전형적이다. 흑인을 공격하는 이유는 흑인이 백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흑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는 이유도 남성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이 아니었기에 그를 징벌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정의연이 원래 어떤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였고, 그동안 어떤 활동들을 해왔으며, 내부적으로 어떤 원리와 논리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져 왔는가에 대한 어떤 이해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상식만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런 상식의 기저에 정의연에 반대하는 어떤 목적이 숨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동안 정의연의 존재로 인해 방해받고 저지되어 왔던 어떤 목적들에 대한 아쉬움과 반감이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를 계기로 일거에 폭발한 것이다.

 

과연 정의연의 회계는 한 점 오류없이 투명하기만 한가. 당연히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다. 실제 정당하게 지출했어도 그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상식이다. 그와 별개로 과연 그동안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금전적인 보상으로 끝내려는 것에 반대하며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노력해 온 그동안의 과정들의 그처럼 의미없는 행동들이었는가. 내가 굳이 정의연을 변호하며 이런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비판하는 지점이 잘못되었다. 정작 정의연에 더 아프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그런 부분들이 아니다. 어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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