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레토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혹은 2080의 법칙, 달리 잉여의 법칙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개미 사회를 자세히 관찰했더니 20%의 개미가 대부분의 일을 하고 나머지 80%는 놀고 있더라. 20%를 따로 떼어 놓아도, 다시 80%를 따로 떼어 놓아도 그 비율은 변함이 없었다. 한 집단에서 대부분 성과를 주도하는 것은 항상 소수의 그룹들이다. 실제 사람 사회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모든 개인이 선량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며 희생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공동체란 그런 점에서 그런 나머지를 부양하기 위한 구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놀고 있다고 아주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사냥할 때는 잉여라도 농사지을 때는 더 유능할 수 있고, 평화시에는 잉여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더 많은 활약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혹시라도 다른 이유로 결원이 생기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역시 그 나머지들인 것이다. 그래서 농사지을 줄 모르는 놈들도 먹여살리고, 사냥에 도움이 안되는 놈들의 몫까지 챙겨주며, 싸움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놈들까지 앞장서서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태원 클럽에서 확진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에 나 역시 분노를 금치 못했었다.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마스크도 쓰지 않고 좁은 공간에서 춤추고 노느라 감염되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퍼뜨리는가. 2차 감염자 가운데는 누나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혹은 친구도 있었다. 더구나 아예 신상이 노출되지 않도록 허위로 명부를 작성하고 그나마 연락처를 알아내어 연락을 하더라도 아예 무시하는 경우마저 상당하다. 사실상 공동체를 위한 당국의 방역을 훼방놓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인간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군의 길잡이 역할을 하던 조선인들이 있었으며, 구한말에도 또한 일본군과 목숨걸고 싸우던 의병들을 밀고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이 있었다. 흉년이 들면 오히려 식량을 매점매석해서 폭리를 취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고, 재해를 맞아 모두가 피해 있는 사이 텅 빈 거리를 약탈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도 나타나는 것이다. 모두가 땀흘려 일하는데 혼자서 술에 취해 뻗어 있고, 모두가 목숨 걸고 싸우는데 피난지 거리에서 거들먹거리며 협박이나 일삼고, 모두가 복구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데 그 와중에 곁눈질이나 하는 인간들도 있다. 그러면 그런 인간들은 모두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인가. 해방되었다고 친일파는 모두 죽이거나 내쫓고 봐야 하는 것인가.

 

노래를 못해도 가수다. 그림을 못그려도 화가다. 공을 못 던져도 투수다. 아무리 일본이 좋아도 한국인은 한국인이고,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고 한국인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놈들까지 모두 한국인이라는 국적으로, 혹은 민족으로 끌어안고 함께 가는 것이 바로 공동체란 것이다. 가장 혐오스럽고 경멸스런 쓰레기 자식들조차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욕나오지만 어쩔 수 없는 당위란 것이다. 질본조차도 방역을 위해 열심히 협력하는 사람들만이 아닌 자기와는 상관없다며 제멋대로 병을 퍼뜨리는 인간들까지 모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써 지키고자 존재하는 기구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변수들까지 모두 고려해서 일정 이하의 확진자만 관리 가능한 범위 내에서 꾸준히 유지된다면 그 자체로 성공인 것이라고 전부터 말해왔던 것이었다. 아무리 정부가 방역을 위해 노력해도 모든 개인을 감시하며 그 행동 하나하나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시민들이 방역을 위해 정부의 지시와 통제에 충실히 따르더라도 다만 한 두 명이라도 그를 거부하면 바로 거기서부터 변수가 생기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최악의 경우들까지 고려해서 더 신중하게 삼가며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열심히 마스크도 쓰고, 외출도 자주하고, 손도 자주 씻어야 한다. 혹시라도 자신이나 주위에 의심스러운 경우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당국에 협조한다. 어차피 어디서든 튀어나올 놈들이었으니 지금이라도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면서 주위에서도 조심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고 협력한다.

 

의료진들이 안타까운 것이다. 질본이며 그동안 방역을 위해 노력해 온 관계기관 종사자들이 안타까운 것이다. 무엇보다 코로나19의 종식을 위해 많은 것들을 스스로 희생하고 양보하며 인내해 온 수많은 시민들의 노력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그 흔한 외출도 제대로 못하고 방역을 위해 열심히 협력해 왔는데 자제를 모르는 몇몇 놈들 때문에 다시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마저도 공동체로써 함께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것들마저 모두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관리가 중요한 것이다. 완전한 근절은 불가능하다. 코로나19도 문제지만 사람이 더 큰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신중하게 더 철저하게 더 집요하게 통제와 관리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더 확산되지 않도록. 더 겉잡을 수 없이 확진자가 늘어나지 않도록. 현재 대한민국의 의료체계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물론 그에 대한 모든 대비는 전문가 집단인 질병관리본부 - 질병관리청에서 다 사전에 마련해 놓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저 하등의 쓸모가 없는 잉여들 몫까지 지금부터 더 열심히 노력하며 돕지 않으면 안된다. 생각이란 게 있다면 저들 잉여들 역시 자발적으로 나서서 당국의 방역을 위해 협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힘빠지는 상황이란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뭐 하고 있었나 싶기도 하다. 약속도 거의 잡지 않고, 어쩌다 나갈 일이 있어도 항상 마스크를 올려쓰고 다니느라 뺨이 다 따끔거릴 정도다. 그런데 결국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고 말았다. 원래 그런 놈들임을 인정하면서. 그런 놈들까지 포함해 모두가 공동체임을 이해하면서. 억울해도 조금 더 노력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해 놓은 것들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화만 난다. 일단 욕부터 힘껏 내뱉고. 다시 힘내 보자.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렇게 목숨을 건 처절한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라 한다. 아마 10대 중반 쯤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춘향이도 사또 무서운 줄 모르고 고문을 견디며 이몽룡을 기다렸던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 역시 그런 젊은이들의 무모함 때문이라고. 1차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유럽 각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입대를 자원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화려하게 공훈을 쌓고 영웅이 되어 부와 명예를 손에 거머쥐겠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그 전부터도, 항상 젊은이들은 전쟁을 기회라 여기고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앞장서서 뛰어들고는 했었다. 그러니까 근본주의자들도 테러를 저지를 때 딱 그 나이의 어린 소년들을 대상으로 자원자를 모으고는 하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중학생에게 1억이라는 돈의 가치가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생명의 가치 역시 그렇게 절실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죽으면 죽는 거지. 아니 그렇게 늙어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오래 살아 무엇 하겠는가. 그러고보면 내가 어렸을 때도 주위의 녀석들은 하나같이 40 이전까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40 넘어가면 더 추해지기 전에 깔끔하게 죽어 사라져야지. 나이를 먹어가며 비로소 깨닫게 된다. 돈이 소중한 만큼 사람의 목숨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의 가치라는 것을. 다만 일 분 일 초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의 본능이란 것을. 생명의 본질이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똥구덩이를 뒹굴든 타는 불속을 헤엄치든 조금이라도 더 살아야 한다.

벌써부터 그런 우려가 있었다. 나이가 젊고 어리면 코로나19에도 잘 걸리지 않고 걸려도 증상없이 바로 낫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기들은 걸려도 죽지 않는다. 나아가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다가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일 당장 죽어도 자기는 아까울 것이 없다. 그러면 가족은? 부모와 형제는? 친구는? 동료는? 이웃은? 그러니까 생명의 가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남겨지고 남겨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결국 자신으로 인해 형제가, 부모가, 이웃이, 친구가 자신은 상관없다면 그 병에 감염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아직 현실이 아닌 것 같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그냥 코로나19가 그런 병일 뿐이다.

우리나라만 그러냐면 전세계적인 현상일 것이다. 바로 얼마전까지 그런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을 우리는 비웃고 있었다. 차라리 코로나19에 감염되더라도 클럽에 가서 춤추고 놀아야겠다. 내일 당장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죽더라도 일단 오늘 놀아야 하는 것은 놀아야겠다. 그것이 자유고 용기고 의지다. 클럽에서 감염자가 속출하는 와중에도 서울시장이 집회금지를 명령하기까지 클럽 앞에는 그런 젊은이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 비까지 맞아가며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젊은이들의 무모함이 전쟁도 끊이지 않게 하고 코로나19도 여전히 현실로 남기고 만다.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이것은 코로나19라고 하는 바이러스와 모든 인류와의 전쟁인 것이다. 또 한 걸음 후퇴하고 만다. 어디로 튀었는지 모른다. 누가 감염되어 다시 주위로 확산시키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생활방역은 사실상 물건너 갔다. 하지만 예상한 범위다. 클럽이 여전히 영업하고 사람들이 몰리는 상황에 이 정도 대비조차 안하고 있을까. 과연 몇 명 선에서 막을 수 있을까. 천 명 만 넘지 안아도 큰 성공일 텐데. 안타깝다기에는 원래 그런 존재이기에 뭐라 말하기도 어렵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 젊은이들을 죽이는 것은 그들의 순수와 용기다. 다른 말로 멍청한 무모함이다. 그런 젊은이들이 인류의 역사를 여기까지 발전시켜 왔다. 새삼스럽다.

언론에서도 사실을 교묘하게 호도하고 있다는 것이, 정의연의 원래 활동목적이 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시민단체에 대한 기부라는 것도 시민단체의 유지와 운영, 관리를 위한 비용까지 포함해서 기부하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만으로 꾸려가기에는 시민단체의 활동에도 상당한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일단 정의연이 활동가들의 생계에 구애받지 않고 지속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임금을 받으며 오로지 정의연을 위해서만 일할 수 있는 상임활동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의연에서 중요한 행사를 해야 하는데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해서 참여하지 못하는 활동가가 많으면 그 또한 곤란한 것이다. 더불어 그런 활동가들은 정의연의 활동은 물론 일본군성노예문제 전반에 대한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지식을 평소에도 연구하고 학습해서 체득해두어야 한다. 어디서 일본군 성노예와 관련한 인터뷰라도 있으면 바로 이들이 불려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피해자들을 위해 경제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정의연의 전신인 정대협을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일본으로부터 진심어린 규명과 사죄를 받아내겠다고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활동한 내역들이 기념관을 짓고, 세미나를 열고, 세계로 강연회를 다니고, 세계의 다른 활동가들과 연대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뉴스만 띄엄띄엄 봤어도 정의연이 일본군 성노예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 왔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정의연만 그런 활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홍보비며 기념관 유지비며 다른 부대비용들이 인건비만큼 상당액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과연 이런 활동들이 정의연의 설립취지와 크게 어긋나는 것들인가.

더 고약한 것은 그렇게 정의연의 활동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한 경제적 구제에만 국한시키다 보니 과거 일본으로부터 돈만 받고 적당히 끝내려 했던 과거 정부들에 대한 재평가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규명이든 진심어린 사과든 상관없이 일본 정부가 주는 적지 않은 돈만 받았어도 피해자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을 텐데 정의연으로 인해 그러지 못했엇다. 박근혜 정부의 협상결과 10억엔이라는 돈을 받아 피해자들을 위해 쓸 수 있었을 텐데 정의연이 자기들 이익에 눈이 멀어 그마저도 막았다. 사실 이게 진짜 목적일 것이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최선의 활동은 돈을 주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동안 보수정부는 잘 해 왔었다. 반대하는 정의연이 나쁜 것이다. 그래서 기억을 되돌려 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돈만 받으면 된다고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묻고 있었는가.

확실히 정의연 인사가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니 언론이 감춰왔던 민낯을 바로 드러내고 만다. 돈이나 받자는 것이다. 돈만 받으면 끝나는 것이다. 돈으로 받을 수 있는 걸 막았으니 돈으로 보상해 주어야 한다. 다른 활동은 의미없다. 그런 활동들을 위한 활동가들의 존재 또한 필요없었다. 감정을 가라앉히면 사실은 명확해진다. 물론 보아하니 내가 보기에도 납득이 안되는 용처가 몇 보이는데 원래 시민단체라는 게 그렇게 주먹구구인 경우가 많다. 개인의 선의를 공공의 선의로 착각하고 섣부르게 행동하는 아마추어들이 상당수다. 심지어 시민단체가 생업이 되면 그때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관료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주변적인 문제들이 본질까지 부정할 정도로 큰 것인가.

그동안 일본군 성노예와 관련해서 정의연이 해 온 일들만 대충 훑어봐도 기부금의 용처라는 게 얼추 이해가 된다. 이런 활동도 했었고, 그러니 저런 곳에도 돈을 써야 했을 테고, 그러다 보니 결국 피해자들에게 돌아갈 몫이 그리 많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활동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옥석구분 없이 피해자들에게 직접 주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일반의 관념을 이용해서 구체적 사실을 뭉개고 호도한다. 언론이 언론하는 짓거리라 할 수 있다. 아직은 더 지켜봐야겠지만. 시민단체에 대한 이해가 아직 많이 부족한 탓이다. 기자가 무식하거나. 아니면 무식한 척 하는 것이거나. 더러운 것이다.

당연히 기억은 왜곡된다. 종군위안부나 강제징용 등 과거사 피해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군사독재의 희생자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면 기억이 오염되었으니 그 모든 증언이 거짓인가? 어차피 기억이 오염되었을 텐데 재판정에 증인을 불러 증언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부분일 것이다. 세상에 100%는 없다. 어떤 증언도 증거도 자료도 100%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그나마 당시 당사자에 의해 기록된 것들 정도만이 1차 사료로서 100%에 가까운 신뢰를 가지는 정도다. 그조차도 개인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있기에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역사연구에서도 사료비판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된다.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를 다양한 수단을 사용해서 교차검증하여 확인하는 것이다. 재판에서도 그래서 증인이 나와서 증언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원고와 피고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질문을 하여 그 내용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재판정에서 증인 누가 나와서 어떤 증언을 했다고 재판이 끝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원고측 증인이면 피고측에서 반대신문을 하게 될 것이고, 피고측 증인이면 원고측에서 반대신문을 통해 그 증언을 탄핵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증인의 증언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가. 어디까지 증거로써 인정해도 좋은 것인가. 이를테면 10년도 넘은 일이라 기억도 가물한데 원고측에서 증거를 제시하며 그런 일이 있었지 않았느냐 묻자 그렇다 대답했었다면 과연 그것은 자신의 기억인 것인가. 반면 그렇더라도 다른 증거들을 통해서 그 증언의 신빙성이 인정되면 다소의 불완전한 증언이라도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 그런 것이 재판의 기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왜곡된 기억에 의해 오염된 부분인가. 그러므로 얼마나 그 증언들에 대해 신뢰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누군가는 사소한 오류를 트집잡고, 누군가는 검증 가능한 확실한 사실들을 통해 그 신뢰성을 높이려 하는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기억들 역시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객관적 사실로써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서 당시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려는 세력들이 있다.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그럼에도 쏟아지는 수많은 증거와 증언들이 그 대부분의 내용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군위안부나 강제징용은 어떨까?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아니 그것이야 말로 원래 일본 극우의 주장이며 한국 수구의 주장이기도 하다. 객관적인 증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피해자들의 증언만이 있을 뿐이다. 객관적인 사실로 입증할만한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개인들의 증언에만 의지해서 과거사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영훈 류가 잘하는 짓거리다. 그런 전제 위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몇몇 예외적인 사례나, 혹은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경우들을 들어 당시의 사실들에 대해 사람들이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교차검증도 하고, 그 증언한 내용들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직접 확인도 하면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그 타당성 여부를 검증하는 과정은 수도 없이 이루어져왔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한 두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일본제국주의가 패전을 앞두고 증거들을 없애려 했어도 워낙 크게 저질러놓은 탓에 증거 역시 여기저기 수도 없이 남아 있는 상태다. 피해자가 한국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 유럽인 가운데도 피해자가 있어서 직접 증언한 바 있었다. 그래서 개인의 증언 가운데 사소한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그 신빙성 자체를 탄핵할 수 있을 정도인가. 정히 그러고 싶으면 한 번 일본 정부가 나서서 당시의 사실에 대해 검증이라도 해 보라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억에 오염이 있을 경우 증언의 신빙성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그 피해에 대해 인정받지 못하게 될 지 모른다. 세상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해서 연구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내린다. 지금 전세계에서 종군위안부, 정확히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성노예에 있어 당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거의 일본 하나 뿐일 것이다. 그만큼 전세계적으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것이 온전히 피해자들의 증언만을 의심않고 믿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그래서 정의기억연대에서도 기억의 오염을 이야기하면서 그를 반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를 내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주장과 주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면 그를 뒷받침할 물적 증거로써 그 시시비비를 가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틀린 주장을 했다고 해서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 그냥 어떤 이유로 기억에 왜곡이 생겨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증언 가운데 사소한 오류가 있어도 당시의 고통스런 경험과 이후 긴 시간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기억이 오염된 결과라 변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의 오염에도 불구하고 여러 정황과 증거들을 통해 그 증언의 타당성은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좀 어이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뭐라 공격하든 일본군 성노예는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개인의 증언 가운데 사소한 오류가 있더라도 이미 더 많은 증언과 증언들을 통해 교차검증이 이루어지며 그 상당수가 신뢰할만한 사실임이 입증되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과 세계의 수많은 당사자와 전문가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닌가. 아무것도 없이 그냥 증언만 믿고 사실이라 확정지어 버렸다. 그런 게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 성노예와 강제징용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며 일본 정부가 반드시 청산해야 할 과거의 죄과란 것이다.

 

이번 논란을 통해 가장 당황스러웠던 부분이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저 대충만 살펴봐도 그런 피해자들의 증언이 어떤 식으로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 바로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주장이란 단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생트집일 뿐이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인정이며 반성인가. 안타까운 것이다.

재미있는 것이 검찰의 채널A에 대한 압수수색에 대해서는 언론의 자유를 앞세우며 반대하는 대부분 언론들이 정작 MBC에 대한 압수수색은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처음부터 언론의 자유 때문에 언론사인 채널A의 압수수색을 반대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채널A가 언론이면 당연히 MBC도 언론이다. 하지만 대부분 언론들이 보기에 채널A는 언론이지만 MBC는 아니다. 한겨레와 경향, 혹은 KBS마저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채널A를 압수수색해서는 안되지만 MBC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된 것은 잘못이다. 결국은 당파성이다. 하긴 그래서 한겨레가 조선일보의 논조를 쫓아서 기사를 써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허용한 방향을 벗어난 기사를 쓰면 더이상 언론도 아니게 된다.

 

오히려 덕분에 MBC에 대한 의심이 걷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MBC가 그동안 조국 전장관 가족과 관련한 재판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었구나 이해도 하게 되고. 그냥 카르텔이다. 서로가 암묵적 강제에 의해 유지되는 이익공동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이 언론을 비판하지도 못하고, 언론이 언론과 다른 기사를 쓰지도 못한다.

 

MBC를 지켜야 할 것 같다. 언론이 MBC를 버렸다.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놈들이 MBC만은 예외라고 대놓고 인정해 버렸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에 언론은 MBC 하나만 남았단 말씀. 어디 가서 기자새끼들이 언론의 자유 어쩌고 떠드는 게 눈에만 띄어 봐라. 기자는 사람이 아니다. 과학이다.

민주당 승리, 그것도 압승이 확실한 모양이다. 왠일로 기자놈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사과를 다 하네? 다음은 언론 개혁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일까?

김대중 정부 당시와는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당시와 지금 언론에 대한 인식과 신뢰도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기자놈들 죄다 골라서 북한으로 추방해도 나처럼 지지할 국민이 적지 않은 것이다. 코로나보다 국가에 더 해악이 바로 언론이다.

한겨레가 왜 김남국을 받지 않았는지 알겠네. 세계일보가 느닷없이 imf발표 oecd성장률 1위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낸 이유와 같을 것이다. 민주당의 압승이 확실하다. 알아서 기자. 경향일보는 멍청하거나 곤조가 있거나.

살다살다 기자놈들이 사과하는 꼴도 다 본다. 그래서 선거는 이기고 보는 것이다. 투표하자. 모르는 사람도 일단 투표장에 데리고 가자. 이기자!

지금 영국의 의료진 가운데 4분의 1 가량이 코로나19로 인해 자가격리중이라 한다. 자가격리가 풀리면 다시 영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검사도 하고 치료도 하다가 도중에 확진자와 접촉하면 자가격리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악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부실한 보호장비에 의지한 채로 영국의 의료진들은 코로나19와의 거대한 싸움에 필사적으로 나서고 있는 중이다.

이탈리아에서도 스페인에서도 미국에서 역시 수많은 의료진들이 코로나19에 감염되고 심지어 사망자가 속출하는 와중에도 은퇴한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현장으로 달려가 시민들을 검사하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총동원상태다. 레벨D 방호복이 없이는 안전이 위험하므로 어떤 의료행위도 하지 않겠다는 어느 의사의 말과는 달리 쓰레기봉투로 몸을 친친 감은 상태에서도 저들 의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코로나19와의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어떤가. 저들 나라들에서는 의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아주 없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상당수 언론과 그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당당히 대한민국의 지금 상황에 대해 그리 주장한다. 정부가 잘한 것이 아니다. 의사들이 잘한 것이다. 의사들이 헌신하고 희생한 결과 지금과 같은 성공적인 방역이 가능했던 것이다. 의사들이 잘했고 질병관리본부가 잘한 것이지 정부는 오히려 잘못된 판단과 행동만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예로 든 나라들에도 질병관리본부에 해당하는 정부기관은 있었을 것이고, 역시나 말한 그대로 코로나19의 확산과 그로 인한 시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분투중인 의료진의 헌신이 있었을 것이다. 쉬운 말로 의사들이 갈려나갔다지만 이들 나라에서도 의사들은 과장 없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저들 나라와 우리나라의 코로나19의 방역이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대부분 군인들은 용감하다. 지켜야 할 대상이 있는 군인들은 용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장에서 모든 군인이 용감한 것은 아니다. 한 마리 사자가 지휘하는 백 마리 양과 한 마리 양이 지휘하는 백 마리 사자의 비유는 흔히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어떻게 가진 자원들을 적재적소에 충분한 동기마저 부여한 채 배치하고 활용할 것인가. 같은 자원을 가지고도 어떻게 훌륭히 활용해서 최대의 효과와 효율을 이끌어낼 것인가. 그것이 리더십이다. 다른 나라들과 우리나라와의 차이는 이것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그로 인해 선거에서 크게 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절대 숨기지 않고 일부러 늦추지도 않고 신속하게 감염병과 정면으로 부딪힌다. 있는 의료진들을 어떻게 동원하고 관리하며 어디에 투입하고, 질병관리본부는 어떻게 제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그를 위해 필요한 지원은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레벨D급 방호복 없으면 위험하니 아무것도 않겠다는 의료진들 달래가며 필요한 모든 물품을 어떻게든 준비해서 공급해 온 것이 바로 정부당국이란 것이다. 그 모든 지휘를 하는 것이 장관이고 총리고 대통령이다.

웃기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나라 의료진의 수고와 헌신을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료진들이 고생하는 것이 비단 우리만의 일은 아니란 것이다. 의료진들이 대가없이 고생하고, 그로 인해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그럼에도 오로지 코로나19로부터 시민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것이 우리만 그런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마치 다른 나라 의료진들은 놀고 있는 것처럼. 받을 것 다 받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가 고생하고 있고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은 의료진이 있다면 다들 그만한 이유가 있어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런 의료진들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현실과 오히려 더 오만하게 정부에 싸움을 걸며 가짜뉴스까지 생산하는 그 차이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정부가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정부 혼자 잘해서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다만 정부의 공을 인정하기 싫어서 다른 나라 의료진과 전문가, 관계자들의 노력까지 폄훼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같은 의사라면. 더욱 더 위험한 현장에서 더 고통스런 싸움을 치르고 있는 그들에게. 그냥 인정할 것만 인정하고 넘어가면 된다. 정부도 잘했고, 질본도 잘했고, 의료진도 잘했다. 100점은 아니더라도 합격점을 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게 그리 쉽지만 않다. 의료진도 잘했고 질본도 잘했는데 정부만 못했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의료가 정치가 된다. 참혹한 현실이다. 감염병보다 정치가 더 무섭다.

아직도 대부분 서민들에게 해외유학이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는 그야말로 남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 부담없이 유학을 결정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하나의 특권처럼 여겨지게 된다. 사실 이것이 계급이다. 경제적 조건에 따른 서로 다른 인식과 사고와 행동, 즉 서로 다른 세계의 경계인 것이다. 실제 그동안도 대한민국의 관습과 상식과 법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유학생들로 인해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빚어지기도 했었다. 한국보다 훨씬 발전한 나라들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자신들이란 것이었다.

 

최근 코로나19와 관련해서 심지어 해외유학생들의 입국을 막으라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상당히 강하게 일고 있는 대중의 적개심은 이같은 계급적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대부분 정부의 권고마저 우습게 무시하고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격리자를 양산해 낸 이들 가운데 강남에 거주지가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평소 대한민국의 법과 상식과 관습을,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인 자신들을 무시하던 저것들이 이번에도 역시 자신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며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외국인 입국금지를 요구하는 것과 다른 층위의 감정인 것이다. 외국인을 입국금지하라는 것은 인간에게 어쩌면 본능일 수 있는 이방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기반한 것이라면 유학생에 대한 것은 그동안 한국사회에 내재되어 왔던 계급적 갈등의 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유학생이 있는 집 자식들인가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등록금 내겠다고 알바에 쫓기느라 과제할 시간조차 부족한 많은 젊은 학생들에게는 집안 돈으로 해외에서 유학까지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유학생들이 전세계적인 위기에 쫓겨 국내로 도망쳐 오면서 여전히 자신들을 무시하고 사고만 치고 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많은 젊은이들이 히틀러에 열광했던 것은 갈 곳 없는 자신들의 불만과 분노를 히틀러가 대변해준다 여겼기 때문이었었다. 이놈이 나쁘다. 이놈이 밉다. 이놈이 원인이다. 이놈을 쳐야 한다. 그 답은 항상 너무 간결하고 분명했다. 더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더이상 진짜를 찾아 헤맬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위험신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도 싫고, 돈많은 것들도 싫고, 여성도 싫고, 성소수자도 싫고, 노동자도 싫고, 자본가도 싫다. 그러면 자신들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그에 대한 답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주위의 젊은 친구들에게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면 신분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신의 불만과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알기도 쉽지 않다.

 

아무튼 흥미로운 현상일 것이다. 전부터 눈여겨 봐 오고 있었다. 페미니즘 논란에서부터. 지금 청년세대들이 얼마나 갈 곳 없이 안에서부터 들끓고 있는가. 혁명가가 되거나 아니면 테러리스트가 되거나. 그러기에는 또 대한민국 청년세대들은 너무 착하고 너무 약한 존재들이다. 너무 선량하고 섬세해서 그만큼 더 상처입기도 쉽다. 차라리 조금 더 독하고 강했더라면. 온라인에서만 과격해진다. 내가 온라인 여론을 무시하는 이유이기도 할 테지만.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위기가 많은 것들을 바꿔놓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저 분노만 하고 끝날 것인가. 지켜볼 일이다.

 

나는 애들을 싫어한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애들 떠드는 소리만 들려도 머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다.

 

내가 애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말이 안통한다. 도무지 말로 해서는 들어먹지 않는다. 그렇다고 야단치거나 매라도 들면 서럽게 울어대기 시작한다. 나만 나쁜 놈이다. 고양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보면 혐오라는 게 어떤 감정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이다. 내가 민식이법에 찬성하는 이유는. 스쿨존은 아이들의 통행이 가장 많은 지역일 것이다. 학교에 가야 하니까. 더구나 어린이집과는 달리 학교는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이들이 교통법규가 어떻고 안전하게 보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가르친다고 알아서 들어먹겠는가. 들어먹는다고 그대로 충실히 따르겠는가. 어차피 아이들은 스쿨존을 통해 이동해야 하고 그 길로 또한 차들도 다녀야 한다.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다. 둘 다 법규를 잘 지키면 문제가 아니겠지만 어느 한 쪽에 그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제 그래서 민식이법을 비판하는 여러 주장들을 보면 아이들의 인지와 판단능력을 어른의 그것과 같은 수준으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이들도 가르치면 배우고 물어보면 대답도 잘하니 알아서 올바로 판단해서 교통법규를 잘 지키며 안전한 방어보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부모와 학생의 잘못이지 어째서 그 책임을 운전자에 돌리려 하는 것인가. 그냥 아이들과 하루만 같이 있어 보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괜히 개학이 연기되고 하루종일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부모들이 그로 인해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 알게 될 것이다.

 

다만 너무 처벌이 지나치다 싶은 부분이 있다면 현실을 고려해서 일부 개정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이 되는 대전제, 즉 아이들의 인지와 판단능력은 어른들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낮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스스로 안전하게 보행하도록 가르치는 것보다 어른이 더 많이 조심하는 쪽이 더 현실적이고 더 합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이 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더 엄격한 책임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부모들 역시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책임을 가진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혹시라도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운전자의 시야를 가릴 수 있는 불법주정차에 대한 단속이 더 엄격하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고가 일어날 경우 불법주정차된 차량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졌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엄격하게 묻는 방향으로 법이 보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학부모 차량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사실 가장 중요하다. 모퉁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운전자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어난 사고들은 불법주정차된 차량으로 인해 시야가 제한된 것이 원인이 되고 있으니.

 

그냥 애들이란 어떤 존재인가만 알면 바로 답이 나오는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애들이 싫다. 너무너무 끔찍하도록 싫다. 하지만 아이들도 길을 다녀야 하고, 스쿨존은 그런 아이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이다. 싫은 것과 사고가 나도 좋은 것은 전혀 별개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려 한다. 어쩌겠는가. 사고는 막아야 하고.

 

아이들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 모든 논의는 그런 점에서 지금 시점에서 의미가 있다. 단 거기서부터다. 아이들이 어른 수준이면 스쿨존 자체가 불필요하다. 출산률이 낮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부모도 감당이 안된다. 

원래 아돌프 히틀러는 육군 부사관 출신이었었다. 하지만 총통이 되고 난 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지나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자신이 참전했던 1차세계대전만 해도 군부의 호언장담만 믿고 전쟁을 시작했다가 패전으로 끝난 경험이 있었다. 더구나 독일 군부를 이루고 있던 장성들 대부분이 귀족과 지주인 융커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계급적인 거부감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에 찌든 참모본부의 돼지들보다 자기가 더 낫다는 확신 아래 수많은 군사작전에 직접 개입했지만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았다.

 

후촉의 왕소원이나 남송의 곽예나 스스로 제갈량을 자처하며 군을 지휘했지만 돌아온 것은 즙갈량이라는 오명 뿐이었었다. 그냥 타고난대로 자기 역량에 맞는 삶을 살았다면 이들 역시 굳이 즙갈량이라는 조롱과 함께 역사에 기록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북송의 환관 동관 역시 자기 능력에 맞지 않게 대군을 이끌고 요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괜히 여진의 금을 끌어들이며 북송이 망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찌되었거나 요를 정벌하는데 성공했다고 쓸데없이 자신감만 키운 나머지 오히려 금을 공격하려다가 역공을 당한 것이 북송이 멸망하는 정강의 변의 원인이었었다.

 

상당히 거창한 예들을 들었지만 원래 능력이 안되면서 과분한 자리에 앉으면 이렇게 크게 사고를 치고 마는 것이다. 정확히 지나치게 과분한 자리에 앉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과신하게 되어 무리한 일들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더욱 자리에 어울리는 자신의 능력을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할 필요까지 있다. 바로 기레기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니 이제는 기레기라는 말조차 쓰레기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그냥 기자라는 말로 기자에 대한 평가까지 함께 하는 것은 어떨까. 기자가 기자했다. 언론이 언론했다. 피서지의 쓰레기가 기자같다. 태평양의 쓰레기섬을 보고 있으니 언론만큼이나 해악스럽다. 능력도 주제도 안되면서 언론이라고 자의식만 넘친 나머지 그것을 항상 드러내려고 한다.

 

선출직이 되어 본 적도, 임명직에 나서 본 적도, 시험에 합격해서 고위직을 맡아 본 적도 당연히 거의 없을 것이다. 스스로 사업을 해 본 것도 아니고, 기업의 임원으로 경영에 참여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기껏 기사를 쓴다면 언론사에서도 대부분 평기자들일 텐데, 그러나 그들이 만나는 상대는 거의 유력정치인이거나, 고위공직자거나, 차장검사, 사장, 회장, 전무, 상무들인 것이다. 일반 대중들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이란 언론을 통해 자주 많이 보도 되었기에 알게 되는 이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일반 대중보다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이들 기자들이다. 그렇다 보니 착각하게 된다. 자기가 이만큼 대단한 사람이다. 당대표며, 장차관이며, 심지어 대통령까지 만나서 직접 묻고 답을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그에 걸맞는 대단한 일들을 해야만 한다. 대단한 기사를 내야만 한다.

 

물론 이명박근혜 시절에야 기자라고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그때는 기자들도 권력 앞에서 한없이 겸손했었다. 한겨레와 경향이 언제부터 정부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이었었다고. 차라리 야당인 민주당에 더 가혹하면 가혹했지 이명박근혜 정부를 정면으로 겨냥해 비판을 쏟아내지는 못했었다. 어쩌면 그 보상작용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실제 언론인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고는 한다. 이명박근혜 때 그러지 못했으니 이번 정부에서는 반드시 그러고야 말겠다. 언론의 자유도 높아지고 언론인의 지위 역시 그만큼 따라서 좋아졌으니 그에 맞는 무언가를 언론인으로서 해내야겠다.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언론인으로서의 책임에 맞게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써야만 한다.

 

야당을 외면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야당은 자신과 격에 맞지 않는다. 검찰도 자신들과 격에 맞지 않는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비판하려면 정부를 비판해야 한다. 여당과 대통령을 비판해야만 한다. 그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아니 사실관계 자체에 아예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정부와 대통령을 비판함으로써 그들과 자신의 격을 맞추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은 자신들이 비판하는 권력과 같아질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권력의 위에 설 수 있다. 그러면 권력 이외의 대상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그래서 우한 교민들이 격리되어 있는 시설을 몰래 촬영하는 짓거리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라면 당연히 범죄가 되어야 할 행위이지만 기자이기에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다. 허용되어야만 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자신은 이렇게까지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국가든 사회든 개인이든 모두 기자인 자신이 취재할 대상으로 여긴다. 기사를 쓸 수단으로만 여긴다. 그래서 얼마나 기자란 자신의 직업에 어울리게 멋드러진 기사를 써 낼 것인가. 모두가 관심을 가질 만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만한. 여기에 기자가 아닌 인간의 상식이나 양심 같은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언론으로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사실과 진실 역시 끼어들 자리가 없다. 자신들이 이상으로 삼는 언론인상을 만들고 그를 사명처럼 자신을 열심히 끼워 맞춰갈 뿐이다.

 

그러면서도 단지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어느새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며 기자로서 자신의 목표는 한없이 높아만지는데 현실은 그저 박봉의 일개 기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겨레도 경향도 기자들이 자꾸 선배들을 들이받는 것이다. 회사의 선배들조차 이제는 아예 안중에 없는 것이다. 업계 1위라는 조선일보처럼. TV조선처럼. 돈없는 조중동이 아니라 조중동이 되지 못한 한경이라 보는 것이 옳다. 자기들도 저렇게 해야 하는데.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러나 현실은 그를 따라주지 못하고.

 

연합뉴스에서 시설에 격리 중인 우한 교민들을 멀리서 몰래 촬영한 것을 바로 직전에 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항의하는 문자에 반응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어째서 이토록 언론은 오만하며 일반의 상식조차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진중권이 이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이로구나. 어쩌면 비슷한 부류인지 모르겠다. 이상은 한없이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 사실을 스스로 절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저 사실만 충실히 보도하면 되는 것을 항상 그 이상을 추구하느라 사실도 진실도 항상 뒷전이다. 인간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이 아닌 기자가 되어 버린다.

 

역시 교육의 문제일 것이다. 자아가 확실하다면 저렇게까지 직업에 휘둘리거나 하지 않는다. 만나는 주위에 휘둘려 자신을 잃어 버리고 하지 않는다. 기자란 어떤 직업인가. 자신은 어떤 기자가 되려 하는가. 하지만 기자가 되어 만나는 사람들과 자신이 놓인 주변의 환경들이 그런 자신마저 쉽게 잃어 버리게 만든다. 검사를 만나면 검사가 되고, 정치인을 만나면 정치인이 되고, 사업사를 만나면 기업경영자가 된다. 그러는 사이 그 어디에도 자신의 시각은 남아 있지 않는다. 기사가 쓰레기인 이유다. 기자는 그 쓰레기 이하다. 세상의 해악이다. 괜히 히틀러를 언급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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