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선비들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달하거나 하지 않았었다. 설사 당장 오명을 쓰고 일가족까지 모두 볼살당하는 상황을 맞더라도 또한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았었다. 그보다 자신이 과연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을 고민했다. 자신이 배우고 알고 있는 바를 어김없이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는가를 고민하고 두려워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면 먼 훗날에라도 자신의 진실을 알아주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로서 유교의 영원은 역사에 있다고 말하는 이들마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곡학아세라는 말도 나오게 된 것이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세상에 맞춰 자신을 알리고자 한다. 세상에 자신을 알리려 자신이 배우고 익히고 알고 있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비틀고 뒤집고 속인다. 진정한 선비라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대로 여전히 학문을 닦으며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건만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원래는 세상이 알아주면 알아주는대로 조정으로 나가 경륜을 펼치고 알아주지 않으면 또 그대로 고향으로 물러나 학문을 닦는다고 사대부일 테지만 오로지 권력만을 쫓느라 자신을 세상에 맞춰가려고만 한다.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 남들이 자기를 오해하고 다른 곳으로 몰아가려 한다. 그래서 그런 평가를 듣지 않기 위해, 나아가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특정한 행동을 하려 한다. 다른 말로 시류에 편승한다는 것이다. 죄다 누군가를 욕하니 자기도 함께 덩달아 욕하고, 아니 오히려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더 욕하고 비난하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언론의 자유가 소중했던 것은 권력으로부터 탄압받으면서도 그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고자 했던 용기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두렵고 위험하기에 더욱 열정적으로 기사를 쓰고 논설을 쓰고 세상과 맞섰다. 모두가 아니라 할 때 맞다고 말하고, 모두가 맞다고 할 때 아니라 주장한다. 세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가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다른 기자들이 보는 눈이 두렵다고 기사의 방향을 그에 맞춰야 한다는 버러지들이 있다.

 

물론 언론의 역사에 항상 훌륭한 언론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론의 시작과 황색언론의 시작은 거의 같다 보면 된다. 그럼에도 권력에 쫓기면서도 정의를 밝히기 위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이 있고, 어둠에 숨어서 권력이 금지한 진실의 조각들을 인쇄해서 세상에 뿌리던 이들이 있었다. 이명박근혜는 두렵고, 보수언론의 비난은 무섭고, 검찰과 법원으로부터 기사거리를 받지 못하는 것은 겁난다. 대신 뭐라 욕해도 감히 맞대응조차 않는, 맞대응해도 말로써 꺾어 버릴 수 있는 민주당은 만만하다. 그래서 무서운 대상들을 피해서 만만한 대상을 욕하는데 동참한다. 그런 놈들을 위한 언론의 자유란 과연 무슨 의미인 것일까.

 

하긴 벌써 몇 년 전에 나 자신도 그리 선언했을 것이다. 기자가 지식인이던 시절은 이미 끝났다. 언론이 지성을 가리키던 시절은 아주 오래전에 지나갔다. 자타칭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들마저 누가 자기를 인정해주는가에 따라 신념과 주장을 바꾸며 낙엽처럼 나부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시대다. 누가 욕해도 내 할 말은 한다. 세상이 비난해도 내 하고 싶은 말은 한다. 물론 쉽지 않다. 특정 커뮤니티에 가입해 있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그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더이상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무서운 것이 있어서야 나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겠는가.

 

한겨레 기레기들 덕분에 언론의 속성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차라리 고맙기조차 하다. 보수언론의 눈이 무서워서 기사를 그에 맞춰 쓰려 한다. 보수언론으로부터 듣는 말들이 무서워서 차라리 자기 선배와 상사들을 들이받으려 한다. KBS가 파업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근혜가 쫓겨났는데 자기들만 가만 있으면 쪽팔리니 파업이라도 해서 대세를 쫓아가겠다. 그리고 다시 언론의 대세가 반문인 것 같으니 대세를 쫓아간다. 남은 것은 고작 MBC 하나 뿐인 것인가. 과연 언론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시대의 씁쓸한 초상이다. 

한신이 유방에게 말한 '다다익선'이란 한 마디로 소병을 이끌 때와 대군을 이끌 때마다 유연하게 행동을 달리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분대장과 군사령관의 역할은 다르다.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다 다르다. 그런데 분대장이 군사령관처럼 행동하고 군사령관이 분대장처럼 행동하면 어찌할 것인가.

 

생각보다 유방 역시 지휘관으로서 제법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법 정도가 아니라 항우나 한신 정도가 아니면 당대에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한신이 합류하기 전 유방군을 이끌던 것은 유방 자신이었고, 그 상태에서 항우와 견줄 수 있는 인물로 벌써부터 손꼽히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정도나 되니 항우를 상대로도 몇 번이나 패배를 당하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동안 항우와 야전에서 맞붙었던 상대들이 죄다 어떤 꼴을 당했던가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그 실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유방조차 50만이라는 대군이 팽성에 모였을 때는 제대로 군을 통솔하지 못해 고작 3만의 항우군에 몰살당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왜이겠는가?

 

유럽의 전장을 휩쓸던 나폴레옹 역시 50만의 대군으로 러시아를 공격했을 때는 전성기 때의 영민함은 찾아볼 수 없이 느리고 굼뜬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히려 러시아에서 참패를 당하고 주력을 거의 잃고 난 상태에서 마치 예전의 실력을 되찾은 듯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고 있었을 정도였다. 감당하지 못할 대군은 오히려 지휘관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소대장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사단장일 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군단장으로서 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한계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과장으로서는 유능한데 부장이 되고 나니 관리자로서 역량이 심히 의심스럽더라. 부장까지는 괜찮았는데 상무 전무를 달고 나니 영 능력이 미치지 못하더라. 그러니까 사람은 무능해지는 순간까지 유능하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과연 180석 의석의 거대여당의 대표를 경험해 본 사람이 대한민국 역사에 있었던가 싶다. 그것도 법마저 우습게 여기던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아닌 민주주의 체제에서 그만한 거대한 힘을 직접 손에 쥐고 휘둘러 본 사람이 과연 있기나 했었는가. 그러면 180석이라는 의석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가. 오히려 언론이 두려워하고, 검찰과 법원이 두려워하고, 야당까지 겁먹고 주춤거리고 있는데 그런 거대한 힘을 가지고 민주당 당대표는 어떤 태도와 행동을 보여야 하는가. 저들이 저리 극성스럽게 당당히 나설 수 있었던 이유였다. 오히려 겁먹은 것은 이낙연 대표 자신이었다.

 

180석이라는 의석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국회 의석의 거의 3분의 2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을 사용해서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계량하지 못한다. 그저 언론이 무섭고 검찰과 법원은 강하고 야당은 곤란하다는 사실만 경험에 의해 머리에 새기고 있는 상태다. 그냥 하면 된다. 그냥 밀어붙이면 오히려 저들은 막강한 힘을 가진 정부와 여당의 뒤만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힘을 가지고도 협치라는 이름 아래 지레 주눅들어 겁먹고 움츠러들고 만다. 그러니까 결국 이명박근혜 사면이라는 굴욕에 가까운 주장까지 나오게 된 것일 터다. 그렇게라도 해서 보수의 마음을 되돌려야지만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살아남을 수 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워낙 조심스러워서 대통령이 대신 모든 정치적 책임을 져주는 동안에는 유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대표가 되어서 민주당의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자신이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민주당이 입법하려는 법안들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보이는 모든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도 당대표로써 전적으로 그 책임을 짊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말조심 행동조심하라는 말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권력은 가지고 싶고 책임은 지고 싶지 않다. 책임질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다다익선도 아니다. 만일 지금 내 판단이 맞다면 이낙연은 절대 지휘관에 임명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딱 참모까지가 어울린다. 참모로써 지휘관이 책임을 모두 감당하는 동안 제 역할에만 충실한 정도면 온전히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책임이 지워지면 갑자기 무능해지고 만다. 엄중이란 다른 말로 당장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 책임을 지기가 두렵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태도보수란 어쩌면 비겁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그렇다면 차라리 문재인 대통령의 뒤에 숨어 그 후광을 입으며 따라가기만 해도 되었을 것을 당대표랍시고 혼자 뭔가를 해보겠다 나서는 상황일 것이다. 지휘관으로서 책임은 지기 싫은데 혼자서 뭐라도 공은 세워 보고 싶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도 되었을 것을 괜히 혼자서 판단하다가 대국을 망친 멍청이다. 이름도 유명하다. 마속이라고. 일군의 지휘를 맡길 정도로 평소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무능해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지금 민주당 돌아가는 꼬라지가 딱 그렇겠구나 가리키고 있다.

 

아직도 이낙연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매순간마다 교차하고 있다. 기대하는 이유는 이낙연이 현재 민주당의 당대표이기 때문이고, 우려하는 이유 역시 이낙연이 민주당의 당대표이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일까? 어느 쪽 예상이 들어맞을까? 아직까지는 우려에 더 가까운 모양인데. 국민이 바보가 아니란 것이다. 무능은 사악보다 더 큰 악이다. 리더라면.

 

이낙연에게 민주당 대표란 자리가 그렇게 버거웠던 것일까? 이명박도 딱 서울시장까지는 제법 잘했더라는 것이다. 이재명은 과연 경기도지사로서 보여준 능력 만큼 대통령이 되어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 추미애가 인물은 인물인데 검찰과 법원의 연합을 상대하기에 법무부장관이란 자리는 제약이 너무 컸다. 생각이 많다. 불길한 시간이다. 안타깝게도.

사실 지금 직장을 고른 것은 순전히 우연이고 충동이었었다. 이력서 쓰는 것도 면접 보는 것도 다 귀찮아서 그냥 몸쓰는 일이나 하려 했었다. 노가다는 출퇴근이 너무 길고 번거로워 - 그렇다고 숙식제공은 집에 보살펴야 하는 부양가족이 하나 있는 탓에 도저히 아니라서 결국 대상은 물류로 좁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군포 cj에 지원하여 출근하기로 한 당일 조금 더 조건이 좋은 것 같은 곳이 우연히 눈에 띄여 이력서를 넣고 계약직까지 되었다. 2개월짜리 시한부 인생이었다. 그래도 적당히 되는 동안 버티다가 안되면 다른 곳 찾아가도 괜찮지 않겠는가.

 

2018년 이래 정규직 신규채용이 없었다 했었다. 그래서 정규직 채용도 더이상 없는데 뭣하러 기간제 들어와 고생하느냐는 말까지 들었었다. 늦기 전에 더 좋은 일자리 찾아 떠나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조건도 나쁘지 않고 일도 감당할만해서 버티고 있는데 노조가 생난리를 편 결과라며 느닷없이 정규직 채용 공고가 떴었다. 정확히는 무기계약직이다. 물론 무기계약직도 정년 동안 고용이 보장되기에 정규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정부가 추진중인 정규직화의 대부분은 무기계약직으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운좋게도 나이와 근속기간에서 무기직 전환 대상에 딱 포함될 수 있었다. 나보다 늦게 계약직이 된 사람들은 서류심사조차 거의 통과하지 못했었다. 당연하게 면접 결과 무기직 채용 결정.

 

몇 년 만이냐? 그동안 계약직을 전전해 온 세월이 20년을 넘어간다. 매번 과연 내년에도 지금 직장에서 같은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던 세월이 그 정도란 것이다. 그런데 정규직 되어 보겠다 그리 아등바등할 때는 냉정하게 잘리더니 그냥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하고 안되면 다른 길 찾아보겠다 하니까 운좋게 딱 걸리게 기회가 찾아온다. 복권 사는 것도 중단했다. 내일을 알 수 없어 사는 것이 복권인데 60세 정년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생겼으니 복권은 의미가 없다. 나는 나 자신만 믿고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에만 가치를 부여한다.

 

물론 자칭 진보 새끼들 정규직이라고 내가 하게 될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떻게 표정이 바뀔 지 안봐도 눈에 선하다. 내가 자칭 진보가 주장하는 선의나 진정성에 대해 전혀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아주 오래전 그래도 자칭 진보 새끼들이라고 마음놓고 하는 일 밝혔다가 그 사실이 어떻게 이용되었는가 기억이 선명하다. 저들이 노동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인 것이다. 여성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류호정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정의당의 입장처럼 저들에게 노동자란 동등한 주체가 아닌 것이다. 그냥 대상일 뿐이지. 나 자신은 그다지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도 가끔 여기저기서 이름이 보이는 자칭 진보새끼들의 태도가 더 모멸감을 주었다. 나는 과연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는 것인가.

 

아무튼 세상 일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될 일은 어떻게 해도 되고 안 될 일은 어떻게 해도 안 된다.  안정적인 일자리 갖고 싶다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별로 생각 없다 해서 안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안 될 것이라 생각했고 계약기간 끝나면 어디서 일할까 구인사이트 뒤지고 있었다. 앞으로 구인사이트는 더이상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은 일이다. 지금 정부를 더욱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지금 일을 더 오래 아무일없이 하려면 정규직 채용을 더 늘려야 하기에. 이낙연이든 이재명이든 상관없다. 민주당이 희망이다. 더욱 절실해진 이유다.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한다면 그는 좋은 사람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반드시 그리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덧붙였다.

 

"마을 사람 가운데 선한 이들이 좋아하고 악한 이들이 싫어한다면 오로지 그를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진정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려 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울 것이고, 나쁜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때면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들로부터는 지지와 신뢰를, 나쁜 사람들로부터는 원망과 저주를 듣기 쉽다. 당장 경찰 가운데 조직폭력배들이 이를 가는 경찰이 있고 좋아하는 경찰이 있다면 과연 누가 더 좋은 경찰이겠는가. 죄를 뉘우치지 않는 강간살인범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검사와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는 검사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 검사이겠는가. 

 

내가 반공주의자로서 말과 행동이 엄격하고 철저했다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인데 공산주의자들을 조금 고문했다고 원망과 저주를 듣는다면 오히려 포상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가족에 위해가 가해지기라도 하면 더욱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의를 불사른다. 공산주의는 반드시 이 사회에서 추방해야 할 절대악이다. 그런 정도는 되어야 신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공안경찰이고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이 사회에서 배제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이 그런 나를 칭찬하며 존경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산주의자들이 동무라 형제라 부르며 그 가족과도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반공주의자일 것인가?

 

내가 이미 나와 가는 길이 다르다 여기면 뭐라 떠들든 그냥 웃으며 무시하고 마는 이유인 것이다. 들을 필요가 없다. 들을 가치가 없다. 논쟁을 하는 곳이면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여기는 그냥 내 생각과 내 의견을 일방적으로 떠드는 공간인 것이다. 어차피 서로의 입장이 다르고 지향이 다른데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걷는 이들이 서로에게 공감해봐야 무엇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나 공감할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서로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사이인 것이다. 서로 납득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주장들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를 향한 비난과 저주들이 내가 얼마나 철저하고 완벽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국민의힘과 정의당 무리들이 뭐라 떠들든 어차피 그들이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니니 나와 상관없는 그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놈들이 뭐라 떠든다고 내가 귀기울일 이유나 있을 것인가.

 

한겨레 기자것들이 다른 기자들이 친정부네 어용이네 한다고 반발하여 자기네 회사 상사와 선배들을 들이받은 모양이다. 황교익의 말에 오랜만에 공감하게 된다. 어느 놈의 새끼가 그딴 소리를 지껄였는지 다 개소리라 말해주고 싶다. 한겨레는 단 한 번도 친정부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진보라고 하는 자신들의 이념마저 뒤로 한 채 반정부에 올인하고 있던 언론이었다. 진보적 가치에 충실한 정책조차 현정부에서 추진하면 무조건 반대하고 본다. 최저임금도 올려서는 안되고, 근로시간도 줄여서는 안되고, 중대재해법도 통과해서는 안되고, 원전도 폐쇄해서는 안되고. 최저임금을 더 올려야 하기 때문에 지금 수준으로 올려서는 안되고, 근로시간도 더 줄여야 하기에 지금대로 줄여서는 안되고, 중대재해법도 더 엄격해야 하기에 지금대로 통과되어서는 안되고, 탈원전도 더 엄격해야 하기에 지금처럼 탈원전해서는 안된다. 어찌되었거나 정부의 정책은 모두 반대한다. 그래서 심지어 김학의의 출국금지조차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정권차원의 중대한 범죄라고 예단까지 하고 기자의 얼굴까지 드러내며 떠들어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이 싫으면 그럴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죽어도 싫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싫은데는 이유따위 필요없는 것이다.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문제는 그 이유다. 다른 기자들이 그리 말한다. 다른 언론들이 그리 자신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칭찬받고 싶은 것인가? 인정받고 싶은 것인가? 저들과 다른 언론으로 자신들만 우뚝서고 싶은 욕심 같은 건 없는 것인가? 그래서 저들로부터 칭찬받기 위해서라도 정부를 공격하는 기사를 써야 하는 것인가? 그나마 그동안 정부와 여당에 반대하는 기사만을 써오던 것조차 마음에 안 들 정도로 더 과격하게 강경하게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는 기사를 써야만 하는 것인가?

 

벌써 한참은 지난 것 같다. 타진요 사태 당시도 그랬었다. 이후 여러 연예인 논란에서 항상 게시판에는 그런 놈들이 넘쳐났다. 남들이 욕하니 나도 욕해야 한다. 지금 일베들이 각 게시판에서 적극적으로 난동을 부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세를 만들면 눈치를 보며 편승하려는 놈들이 나온다. 모두가 욕하니 나도 덩달아 욕해야 한다. 모두가 한 사람을 욕하고 있느니 나도 남들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도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 더 심한 욕을 해 주어야 한다. 인민재판이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 사람씩 앞에 있는 이를 비난하게 시킨다. 분위기에 휩쓸려 시간이 갈수록 그 강도는 더 세지고 사실따위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내가 말한 빈약한 자아란 것이다.

 

내가 진정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보수적인 언론들과 주장하는 바가 서로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로 인해 비판을 듣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도 너무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훈장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내가 진보라는 가치에 충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진보이기 위해서 보수로부터 진보인 것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한겨레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칭진보 전체의 문제다. 진보를 이상화하고 대상화하여 그로부터 벗어난 모두를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이 진보임을 입증하려 한다. 진보란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아닌 보수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 대상이며 객체다. 그를 위해 가장 흔하게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민주당, 정확히 친노친문인 것이고.

 

얼마나 진보언론으로써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에 확신이 없는 것인가. 자신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겪는 사실들에 대한 진심이 결여된 것인가. 오로지 그들은 존재케 하는 것은 다른 언론사의 같은 기자들인 것이다. 기자가 독자를 대상으로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닌 같은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사를 쓴다. 지식인들이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식인들을 바라보며 기사를 쓴다. 무엇인가? 바로 과두제다. 엘리트공화제다. 대중은 개돼지다. 개중은 붕어다. 자신들만이 오로지 진실을 알고 판단할 수 있다.

 

한겨레 기자들의 개지랄을 보면서 더욱 생각한다. 역시나 예상한 범위란 것이다. 전부터 이야기해 왔을 것이다. 아마 부정한 것은 아직 자칭 진보들에 기대를 가지고 있던 일부 정도가 아니었을까. 저들의 진보는 진정한 민중, 인민을 위한 진보가 아니다. 이 사회의 주류 엘리트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자신들을 위한 장식으로서의 진보다. 그것을 한겨레가 보여준다. 류호정이 어째서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들먹였는지도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내가 그동안 진보를 부를 때 꼬박꼬박 앞에 '자칭'을 붙여 온 이유인 것이다.

 

자칭 진보들이 뭐라 반박하고 욕하든 아예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오히려 그 놈들이 욕하면 나는 내가 글을 잘 썼구나 자뻑에 빠지고 만다. 그런 점에서 일베 버러지들이 와서 분탕질치지 않는 것이 나로서는 원통할 따름이다. 정의당 찌그레기들은 벌레 이하인 존재들이라. 그런 정도 결기도 없이 진보를 자처하는가. 

 

누구로부터 인정받고 누구로부터 사랑받기를 바라는가.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이기도 한 것이다. 문빠새끼들 욕하는 건 그래서 하나도 무섭지 않다. 그러고보니 인터넷에서 글쓰며 무서운 대상은 참여정부 이후로 거의 없는 것 같다. 개새끼는 개새끼고 버러지새끼는 버러지새끼다. 똥은 똥이고 기자는 기자다. 그냥 당연한 것이다.

아직 게임회사 다니던 시절 내 컴퓨터에는 기획서만 수십 개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실제 개발이 진행된 것은 두세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디어는 괜찮다며 계속해서 보완해 보라 해서 짬짬이 내용을 수정해가며 회사를 그만두던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업그레이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썼던 기획서란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아마 대부분 회사들이 그럴 것이다.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그에 대한 보고서나 기획서를 작성하게 된다. 혹은 위에서부터 지시가 내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그냥 문서로만 파일로만 남아 있다 때되면 정리차원에서 삭제되고 끝나는 것이다. 하물며 확장자가 bak거나 tmp라면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대부분 업무용 컴퓨터들이 그리 좋은 사양이 못되는 터라 원활한 작업을 위해서도 적절히 불필요한 파일들을 지워주어야 한다. 감사가 나온다 하면 더욱 빌미가 될 수 있는 불필요한 파일들을 정리해 두는 쪽이 훨씬 편하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만 포기하면 전력공급을 위한 원자력발전소를 한국의 자본과 기술로 지어주겠다는 제안이 벌써 김영삼 정부 시절 실제 실행까지 되었었다. 그게 바로 KEDO다. 국민을 개돼지 정도가 아닌 붕어 이하로 아는 것이다. 하긴 KEDO가 뭔지 모르는 젊은 정치무관심층의 경우 바로 낚여 버린 모양이더만. 정부에서 북한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와 관련해서 그동안 가시적으로 추진된 무언가가 있기는 했던가. 불과 2019년 2년까지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할 기대에 대부분 국민들이 부풀어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할 경우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뭔들 준비하지 않았겠는가. 더욱 그 전 박근혜 정부 시절의 문서들이다.

 

차라 그래도 최소한의 염치라도 남아있는 언론들이 이번 이슈에 적극적으로 올라타려 하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말하자면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인 것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해 온 말이 있는데 아무리 여기서 다시 말을 바꿀 것인가. 사실이 너무 명확한데 여기서까지 가짜뉴스로 선동에 편승할 것인가. 그런 점에서 두드러진다. SBS와 조중동은. 한겨레도 그런 기사 좀 쓰게 해달라고 지금 기자들이 지랄염병하고 있는 모양이더만.

 

진짜 되도 않는 개짓거리인 것이다. 아마 류호정 건만 아니었어도 정의당도 국민의힘과 함께 덥석 이 이슈를 물었을지도. 그랬다면 자칭 진보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전제로 한 대북지원을 비난하는 재미있는 상황도 연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류호정이 자칭 진보를 구한 꼴이랄까? 정권차원의 비리로 단정짓고 윤석열을 응원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니.

 

원래 대부분 직장에서도 감사가 나오거나 하면 불필요한, 혹시라도 트집잡힐지 모르는 내용들은 미리 사전에 정리해서 곤란한 상황을 예방하는 것이다. 평소 감사에 걸릴만한 일들을 일상에서 꽤나 자주 저지르기 때문이다. 특히 보안 관련은 인간의 기억력과도 꽤 깊은 연관이 있는 터라. 웃기는 꼬라지다. 재미있게 돌아간다.

이렇게 또 1승 적립한다. 류호정이 비서를 부당해고했다길래 뭔 소리인가 했었다. 먹고 사는 게 바빠 정의당 일까지 일일이 챙겨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겨우 몇 시간 전에 검색해서 봤는데, 진짜 얘들은 내가 예상한 최악을 벗어나지 않는다.

 

말했다. 걔들에게는 존중받아야 할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이 따로 있다고. 인간이란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렇지 못한 존재는 차라리 개돼지만도 못하다. 여성이라고 다 같은 여성인가. 삼남매의 어머니다. 당연히 여성주의자로서 최우선해서 지켜주어야 할 모성인 것이다. 그런데 어떠했는가. 그리고 정의당과 여성계, 그리고 자칭 진보들의 태도란 어떠했는가.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새삼 확인하니 그저 우스울 뿐. 류호정만일까. 그저 관심이 없으니 알려지지 않아 모르고 있을 뿐 저쪽도 아싸리판이기는 다른 정당만 못하지 않다. 아니 더하면 더할 것이다.

 

그래서 자칭 진보인 것이다. 그래도 진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이 어쩌면 그리 같잖기만 한 것인지. 내가 그놈들을 모르는가. 20년이 넘도록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버러지는 버러지다. 역겨운 것들.

검사동일체란 인정관계가 아닌 이해관계다. 서로 끈끈한 의리로 묶인 관계가 아닌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인 것이다. 정작 자신들의 수장인 채동욱이 국정원에 의해 목이 날아갈 때 검사들이 어쩌고 있었는가 떠올려 보라. 윤석열의 특수부가 공안부나 공판부, 형사부 등 다른 부서 검사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가도 돌이켜 보라. 이해가 다르면 더이상 같은 검사조차 아닌 것이다.

 

물론 처음 공수처로 발령받았을 때는 자기 고향인 검찰을 생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전 동료들이었으니 검찰에서 이런저런 요구나 부탁을 하면 거절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더이상 과거의 상사나 선배들이 자기에게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위치가 아닌 것이다. 검찰을 돕는다고 자기 실적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검찰의 편에 선다고 다시 검찰로 돌아가서 한 자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중요하다. 한 번 공수처로 발령받으면 다시 검찰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굳이 검찰 출신이라고 과거 검찰에 목맬 이유가 어디 있는가. 오히려 자기가 검찰의 목줄을 쥐고 그들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권력을 누리는 쪽이 더 나을 수 있다.

 

공수처로 검찰 출신이 채용될 수 있도록 법이 만들어진 이상 초기 검찰 출신 공수처 수사관들과 검찰과의 유착은 예견된 바 있었다. 그러나 결국 갈라서고 말 것이다. 오히려 더 원수처럼 으르렁거리게 될 것이다. 검사와 판사는 서로 이해가 충돌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서로 배를 맞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쪽이 훨씬 편하고 이롭다. 그런데 공수처는 아니다. 공수처 안에서 자기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도 실적이 필요한 것이다. 공수처에서의 실적을 발판으로 더 큰 무언가를 노리기 위해서도 검찰은 먹잇감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돈을 더 벌려면 변호사를 하지 공수처 수사관따위 하지 않는다. 굳이 검사장급에서 공수처 수사관 자리를 바라는 것은 그를 바탕으로 더 큰 무언가를 바라기 때문인 것이다. 어디까지 검찰의 편에서 검찰의 입장만을 대변하며 자기를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민주당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들만 잘 처리해 놓으면 되는 것이다. 이미 준비중인 개혁법안들을 모두 통과시키고 그를 통해 확실하게 공수처를 검찰의 우위에 놓아 두면 된다. 검찰총장이 감히 공수처 수사관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나 명령을 내릴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빌미가 되어 공수처의 원한만 사게 될 수 있다. 이낙연이 해야 할 일이다. 나는 아직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결과로써 보여준다. 그게 실력이다.

원래 공수처를 설치하는 목적 자체가 대통령과 고위공직자, 정치인 등을 수사해서 처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장 먼저 수사대상이 되는 것은 누구이겠는가.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친인척들이다. 청와대 참모들이다. 행정부 장관들이다. 그래서 과연 공수처가 이들만을 집중적으로 수사한다고 해서 잘못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유불리가 아닌 공수처의 존재의미를 먼저 떠올려 보라. 원래 그러라는 기관이었고 그럼으로써 이후 누가 정권을 잡든 함부로 마음대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강력한 장치가 될 수 있다. 다시는 최순실의 국정농단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물론 공수처가 지금 윤석열 검찰처럼 권한을 남용하며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무리한 수사를 밀어붙일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무리한 수사가 정부와 여당에 정치적인 피해를 입히려면 그것이 여론을 통해 정당화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론이 움직이지 않으면 오히려 욕먹는 것은 공수처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그 여론을 움직이는 언론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나마 공수처가 낫다는 건 법조기자들과 달리 오랜 동안 유대를 맺어 온 출입처 기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과연 공수처 출입처가 만들어질지조차 아직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여기서 더 나가 확실하게 공수처가 언론과 유착할 통로 자체를 차단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정부기관의 출입처 폐지와 둘째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도입과 셋째 그 적극적인 이용이다.

 

더이상 언론탄압이라며 언론이 지랄한다고 물러설 필요가 없다. 국민의힘이 고소고발할 때 언론이 침묵한 것을 들어 언론의 무리한 보도를 좌시할 수 없다고 그냥 밀어붙이면 된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보도가 나오고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면 바로 고소고발 때려 버린다. 오히려 언론이 바라는 것이다. 고소고발 안하면 언론의 자유를 들먹이며 공격하고 고소고발 남발하면 오히려 침묵한다. 언론이 좆같으면 좆같이 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역시 한 편으로 언론에 대한 정부의 보조와 지원을 중단한다. 역시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더이상 정부가 언론에 개입할 통로 자체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정부의 광고도 최소한으로 싣고 여러 정책적 지원도 시장자유주의를 위해 철폐하며 무엇보다 연합뉴스의 기간통신사 자격을 폐지한다. 알아서 살라 그러고 대신 책임은 무겁게 물린다.

 

언론만 때려잡으면 된다. 언론만 제대로 때려잡으면 판사들도 저처럼 지 좆대로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돈 없는 언론사는 알아서 문닫도록 내버려두고, 직장 잃은 기자들 노숙자 되든 말든 신경쓰지 말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문닫고 실직자 되도록 몰아붙인다. 이번 정부 들어 더욱 간절히 깨달은 한 가지다. 언론 스스로도 언론의 자유 같은 건 그다지 간절히 요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언론이 바라는 것은 고소고발로 자신들을 압박하는 대상인 것이다. 윤석열에 무릎꿇은 한겨레가 윤석열 똥을 핥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민주주의 국가에 지금의 언론은 필요없다.

 

아무튼 공수처가 지랄하지 못하게 조치만 완벽히 취해 두면 누가 공수처장이 되든 명분없는 수사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경우를 미연에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겨레 기자들이 저 지랄 하는 것이다. 공수처장 압박하려면 자기들도 윤석열 편에서 하나가 되어 기사를 써야 한다. 검찰개혁은 거의 끝이 보이는데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언론개혁이다. 언론만 바로잡으면 사법부도 마음대로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그러니까 뭐다? 기자출신 이낙연이 진짜 자신의 고향을 생각한다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 되면 차기 대통령으로 지지할 수도 있다. 기대해 본다. 

예를 들어 어디 공장에서 사람이 급하게 필요하다기에 시급 9천원을 받기로 하고 며칠 가서 도와주게 되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일을 도와주고 나니 사장이 일 열심히 잘하더라며 하루치 시급을 더 얹어 주었다. 과연 사장은 근로계약을 어긴 범죄자인 것일까? 원래 계약한 시간과 급여가 있는데 그보다 더 많은 시간과 급여를 인정해서 지급해 주었다. 법원의 판단대로라면 이건 배임에 해당한다.

 

실제 그런 경우가 없지 않다. 2시부터 일이 시작인데 12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또 근무시간이 너무 짧으면 급여가 충분치 않아 사람들이 잘 가려 하지 않으니 굳이 일도 없는데 12시부터 출근시켜서 2시간치 급여를 지불한다. 물론 2시간 동안 사업장에 출근했으면 근로로 인정해야겠지만 늦은 출근까지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후 2시부터 출근케 하고도 12시부터 근무한 것으로 인정해서 급여를 지급했으면 이 또한 범죄로 간주해야 하는 것인가?

 

인턴증명서 같은 사문서에 대해서는 발급권자가 전적으로 모든 권한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내 재량이다. 내 사업장을 이용해서 내 재량으로 인턴을 시키고 그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하는 것이다. 시간을 정하는 것도 무슨 일을 시킬까를 결정하는 것도 그 내용에 대해 평가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재량인 것이다. 6시간 인턴했는데 너무 잘해서 몇 시간 더 얹어 주었다. 그다지 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잘했다는 칭찬도 해 주었다. 심지어 당사자는 전혀 증명서의 내용에 허위가 없다고 주장하는 중이고, 법정에서도 인턴활동 자체는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민주주의 국가 맞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했던 것이다. 김명수가 사법부의 독립을 말했을 때 사법부는 법원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재판부에서 검사동일체 원칙까지 들먹였다고 한다. 검사동일체원칙이 폐지된 지가 언제인데. 사법연수원 동기들이란 것이다. 판사와 검사로 나뉘어 있지만 사법연수원에서 한 솥밥 먹던 동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기소에 심지어 절차에까지 문제가 심각한데도 일방적으로 검사의 손만을 들어준다. 그것이 김명수의 사법독립이다.

 

진짜 이번 판례대로라면 6시간 일하고도 8시간 시급 받았던 사람들은 죄다 감옥에 갈 상황이란 것이다. 일주일 일 시키고 하루치 일급 더 준 사람들도 죄다 감옥에 가야만 한다. 그런 판결이란 것이다. 내용에 과장이 있으니 허위다. 과장이고 뭐고도 결국 발급권자가 판단할 문제란 것이다. 내가 그만하다고 판단했으니 그렇게 증명서에 내용을 써 주었다. 한 점 허위가 없었다. 피고의 주장을 듣지 않으려면 재판은 뭣하러 하는가? 

기축옥사의 원인이었던 대동계의 정여립은 그러나 정작 관군에 체포되기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었다. 많은 이들은 정여립이 실제 죄가 있어서라기보다 어차피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졌으니 절망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선조의 성품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여립이었기에 조정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 할 때 오히려 자신의 죄는 또다른 피바람의 시발이 될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죽음 말고 모면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박원순 시장이 죄가 있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주장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노무현 전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무고해서 억울해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서 그나마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가 실제로는 적지 않은 것이다. 특히 박원순 시장의 경우는 그동안 여성주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었기에 어제까지 동지로서 함께하던 이들과 그들의 논리로써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더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그동안 그들의 언어로써 성범죄에 대해 이야기해 온 것들이 있는데 그 언어로 다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칫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정의당 성추행 사건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이다. 어째서 정의당은 성추행을 이유로 당대표까지 물러나게 했으면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는 것인가. 성추행이라면 어쩌면 개인적인 사유로 당대표의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공적인 책임을 지게 했으면서 성추행의 내용에 대해서는 철저히 개인적인 사유로 묻어두려 하고 있다. 비슷한 상황에 내몰렸던 것은 아닐까. 그동안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해 온 입장이었기에 그들의 언어로써 성추행을 말하며 압박해 왔을 때 달리 그와 맞서 싸울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밝힐 수 없는 내용의 성추행으로 당대표 사퇴라는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공당으로서 그토록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상세하게 내용을 밝혀 사회에 경각심을 높여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그냥 사퇴 하나로 마무리지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내용은 밝힐 수 없고 당대표는 내려와야 하고.

 

박원순 시장에게 성추행 고발 사실을 알린 것이 남인순 한 사람 뿐이었을까. 아니 남인순이 그냥 사실만 알리고 끝났겠는가. 다른 이야기는 없었을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다른 제안이 성추행 고발과 함께 전달되었다. 민주당 여성주의자들도 안심해서는 안된다. 여성주의는 박근혜 정권 당시 원래의 정체를 회복했다. 친일, 친독재, 친권력, 친기득권. 그랬다면 더욱 박원순 시장의 죽음도 아주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같아도 정말 막막했을 것이다. 어제까지 동지라 여겼던 이들에게 칼을 맞고 그 칼날은 손에 쥔 채 마주 싸워야 한다. 사방이 적이고 자기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지금까지의 인생마저 부정당하는 것 같을 것이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은 성추행의 내용을 밝히지 않으려는, 수사조차 받지 않으려는 정의당의 태도다. 아니 심지어 성범죄를 비친고죄로 만들려 그토록 노력해 왔던 여성계가 마치 성범죄를 다시 친고죄로 되돌리려는 듯한 태도마저 보이는 중이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사실을 감추게끔 만든 것일까. 말 그대로 필사적이다. 밝히려 하면 죽는다는 태도니. 많은 의문들이 풀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박원순 시장을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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