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이 소련 영토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들과 독일 영토에서 저지른 소련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평가가 다른 이유는 하나다. 소련군은 단지 독일군 영토에서 자신들을 침략하여 학살과 강간, 약탈, 파괴를 저질렀던 독일인들에 복수를 했던 것이었다. 반면 나치 독일은 슬라브인에 대한 자신들의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여지없이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이해가 가는가?

 

오래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후손이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미치후사의 머리를 잘라 뱃머리에 걸었던 행동을 두고 너무하다며 비판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오다 노부나가가 자기 처남이기도 했던 아자이 나가마사의 머리를 술잔으로 만들어 연회에서 사용한 사실이 있었다. 그만큼 급박했으니까. 아자이 나가마사가 돌아서며 퇴로까지 끊기고 하마트면 오다 노부나가 자신의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복수다. 그만큼 나를 위험하게 만든 적이었기에 철저한 보복을 통해 그를 되갚아주려 한다.

 

적을 살해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더욱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강력한 적을 철저하게 말살하여 미연에 예방하는 행위는 오히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옳은 행위라 할 수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세 척의 일본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키고 수 천에 이르는 일본군을 몰살시켰어도 누구도 그것을 전쟁범죄라 부르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일본의 민간인들이 일본군을 도와 미군을 살해하고 있다면 마땅히 그 민간인들 역시 적으로 간주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 수단 가운데 필요하다면 생명을 빼앗고 생활시설을 파괴하는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드레스덴 폭격은 끔찍한 비극이지만 당연히 전쟁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인 것이다. 도쿄대공습이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군인만이 아닌 민간인을 포함한 일본이란 국가 자체가 적이었고 따라서 그 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민간일을 대상으로 한 공격 역시 정당화된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질렀더는 민간인 학살이 나치 독일이나 구 일본제국군의 학살과 다른 성격을 가지는 이유다. 남경에서 일본군은 전혀 자신들에 위협이 되지 않는 중국인 민간을 상대로 그야말로 자신들의 쾌락과 만족을 위한 학살과 약탈을 저지르고 있었다. 남경의 중국인들이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그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살과 강간, 약탈, 파괴라는 행동을 저지른 것이었다. 소련에서 나치 독일이 보인 행동 역시 유사했었다. 차라리 소련군이 자신들과 맞서 인정할만한 성과를 보였다면 그렇게까지 무심한 잔혹함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슬라브인은 열등하다. 러시아인은 자신들 게르만인에 비해 열등한 존재들이다. 차라리 분노다. 혐오고 증오다. 저런 열등한 존재들을 가만 내버려두고 있는 자체가 자신들에게 죄책감마저 들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베트남에서 한국군은 베트콩인지 무고한 일반인진지 구분조차 모호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로 직전까지 무고한 베트남의 일반인이었다가 한 순간에 베트콩의 일원이 되어 한국군을 위협으로 내몬다. 어찌해야 하는가.

 

만에 하나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인들이 더 두려워하고 긴장해야 한다 말하는 이들이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열등한 대상들에 대해 학살을 저질러 왔지만, 한국인들은 적을 말살하기 위해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제거해 왔었다. 적이라 여기면 잔인해진다. 한 번 적이라 여기고 나면 무감각해진다. 가장 원시적인 인간의 본능이다. 인종적인 학살에는 죄책감이 있을 수 있어도 적에 대한 말살은 죄책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광주에 대한 양심선언이 그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던 이유였다. 적을 향한 모든 행위는 가혹할수록 정당하다.

 

적은 죽인다. 적은 말살한다. 적은 파괴하고 배제한다. 대신 적이 아니라 여기면 그때부터는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된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그랬었다. 아군이라 여기면 누구보다 친절하다가 적이라 여기면 누구보다 악독하고 가혹해진다. 인종적인 우월감에 기대 약자에게 더 가혹했던 나치 독일이나 구일본제국군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론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도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공산당은 적이다. 공산당에 부역하는 것도 적이다. 적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적은 적이고 오로지 아군만이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할 인간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베트남에서의 학살이나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을 이전의 다른 학살과 구분할 수 있게 된 이유인 것이다. 나치독일과 구일본제국군이 특별한 이유인 것이다. 아니 제국주의 이후 열강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저지른 범죄들이 이전과 다른 이유들인 것이다. 적을 살해하는 것은 정당하다. 적은 철저히 파괴하여 무력화시켜야 내가 안전할 수 있다. 그들은 적인가? 아니면 단지 무력한 약한 존재일 뿐인가. 항상 생각이 깊어지는 이유다.

문득 생각했다. 어째서 자칭 진보란 것들은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면서 정작 검찰과 법원, 언론, 그리고 보수야당은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일까. 오로지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이 권력비판이다. 심지어 이명박근혜 당시에도 이렇게 집요하게 지독하게 권력을 비판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정부에 대해 자칭 진보들이 비판이랍시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 사람 몇이나 될까? 강준만이니 홍세화니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번 정부 들어서야 알았다.

 

어떻게 하면 저들의 사고와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뇌를 저놈들 수준으로 퇴화시켜보자. 스스로 자신의 뇌가 구더기라 최면을 걸어보자. 그리고 답을 얻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쉽게 혼동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절대 그럴 리 없음에도 그 절대란 단어마저 무색케 만든다. 권력과 권리를 혼동한다. 비슷하게 저울 권자 들어가고 ㄹ로 다음 음절 시작하니까 비슷하지 않겠는가. 다만 권력이라면 어쩐지 부정적으로 느껴지고 권리라면 마땅히 보호해 주어야 할 무엇으로 느껴진다.

 

사법시험 존치론을 주장하던 놈들의 논리를 돌이켜 본다. 시험 잘 쳐서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과 지위와 권력과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는 건 능력에 따른 권리에 해당한다. 그에 반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국민들을 속여서 표 많이 받아 얻는 선출직 따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검찰은 시험 잘 봐서 자기 능력으로 얻은 자리고,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국민들 잘 속여넘긴 대가로 얻은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비판해야 하고 권리는 보장해주어야 한다. 답이 나오는가? 보수정당은 원래 학벌과 스펙 좋기로 유명하지 않았는가. 그에 비하면 경희대 나온 대통령따위. 대형 로펌 출신도 아닌 인권변호사따위. 그것도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활동했다.

 

즉 자칭 진보들이 보기에 윤석열 검찰이 누리는 특권은 권리인 것이다. 라임 관계자에게 뇌물과 향응을 제공받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해도 그조차 열심히 노력한 결과인 것이다. 보수정당 정치인들이 성폭행을 하든 성추행을 하든 노력 않고 시민단체나 만들며 시간을 낭비한 박원순 따위에 비해 훨씬 인정되어야 할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뇌물도 부정도 비리도 협잡도 그래서 검찰이든 법원이든 언론이든 보수정당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거만 잘 치렀을 뿐인 민주정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떠올려 보라. 한겨레가 권력비판 못한다고 이렇게 안달한 적이 있었는가.

 

한겨레를 비롯한 자칭 진보들이 필사적으로 검찰과 법원의 편을 드는 이유인 것이다. 아마 최순실이 아니었다면, 아니 박근혜가 서울대 출신만 되었어도 나라를 팔아먹어도 참된 진보라고 찬사를 늘어놓았을 자칭 진보란 것이다. 윤석열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었다면. 뇌가 구더기가 되니 그 사고수준이 이해가 된다. 조선일보와 같아지고 싶다. 한겨레가 조선일보와 다른 것이 불만이다. 그 수준을 이해했어야 하는데.

 

안다. 나는 자칭 진보를 증오한다. 혐오한다. 경멸한다. 무시한다. 오로지 편견과 오해로 자칭 진보를 보려 하고 있다. 문제는 그래서 뭐 얼마나 잘못되었느냐는 것. 내가 자칭 진보에 대해 예언한 것 가운데 틀린 게 몇이나 될까? 거의 다 맞추지 않았는가? 나 자신도 편견과 오해와 감정의 결과라 인정하는데도 그렇게 쓴 글들이 거의 예언이 되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래 자칭 진보란 그런 놈들이었다. 20년이 넘어가는데 달라진 게 없다. 대단한 버러지새끼들이다.

장애인 미혼모들을 '비정상'이라 비하한 김종인의 발언에 대한 자칭 진보들의 태도가 흥미롭다. 여성들이다. 장애인들이다. 그야말로 이 사회의 약자이고 소수자들이다. 그런데 그를 비정상이라 말한 김종인의 발언에 대해서 자칭 진보들은 너무 냉정하고 침착하다. 심지어 김종인과 국민의힘의 해명조차 너무나 관대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왜?

 

가짜니까. 거짓말이니까. 말했잖은가. 저들에게 진보란 자신을 치장하는 장신구 같은 것이다. 어쩐지 진보적인 주장을 하는 자신이 그럴싸해보여 그리 연기해 보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국민의힘이 가진 기득권이다. 그들이 그동안 누려 온 주류라는 위치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행도 성추행도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보다 못하다 여겨지는 영원한 비주류 민주당 뿐이다. 박원순도 국민의힘 소속이었으면 뭔 짓을 저질렀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이 하도 시끄러워 꽤나 논란이 되고 있을 줄 알았더니 벌써 자칭 진보들은 납득하고 끝나 버렸네. 그런 정도의 사안이란 것이다. 국민의힘이니까. 민주당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놈들의 진보란 진정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뇌가 구더기인 줄 아나. 민주당이었으면 다음 대선까지 끌고 갔다. 자칭 진보가 버러지인 이유. 사람새끼가 아니다.

한겨레를 포함 자칭 진보도 오래전부터 공수처 설치와 검찰개혁을 주장해 왔었다. 다만 현정부의 공수처와 검찰개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것을 넘어 적대적이다. 공수처도 검찰개혁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저들이 비판하는 지점을 봐야 한다. 검찰 인사를 하면서 윤석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감히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을 징계하려 했었다. 감히 대통령이 그 징계에 결제까지 했었다. 감히 검찰의 수사와 기소에 대해 왈가왈부 가타부타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엄하게 감히 입법부따위가 검찰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중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검찰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자. 감히 대통령도 검찰에 대해서는 손대서는 안된다. 검찰 인사도 마음대로, 예산도 마음대로, 입법부도 행정부도 검찰에 관여하지 말고, 사법부도 검찰이 마음대로 사찰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즉 검찰을 사법부의 위에 두어 행정부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 사법부 위에서 검찰이 입법사법행정을 보도 감시하며 수사할 수 있도록 하자. 누구도 감히 검찰을 수사하거나 감사하거나 징계할 수 없도록 하자. 그러므로 검찰이 곧 공수처가 된다. 

 

무지렁이 국민따위가 선출한 권력은 무시한다. 어리석고 무지한 국민 나부랭이들이 선출한 권력이 아닌 자기 스스로 실력으로 쟁취한 검찰권력이 그 위에서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윤석열 대권론 따위가 아니다. 대권 위에 검찰을 두어야 한다. 

 

최근 한겨레를 비롯한 자칭 진보들의 검찰에 대한 주장들을 보면 결국 결론은 이렇게 내려진다. 정부의 정책마저도 검찰의 허락을 받고서 그 용인 아래 추진되어야 한다. 물론 그런 검찰의 밑닦개는 한겨레 자신이 될 것이다.

 

시험봐서 좋은 대학 들어갔고 기자까지 되었단 사실 하나가 유일한 자랑거리인 버러지들이라 그렇다. 아니라고? 그러면 기사는 왜 그따위로 쓰는데. 말과 글은 또 왜 그따위로 나오는데.

 

독자를 먼저 부정한 것은 한겨레란 것이다. 나야 일찌감치 탈출했지만 아직도 50대 남성 기득권이란 소리나 쳐들으며 신문 읽어주는 사람들은 그저 불쌍하달 밖에. 늬들은 위한 신문이 아니라는데도 굳이 찾아 읽어준다.

 

자칭 진보에게 검찰개혁이란 뭐다? 윤석열이 곧 검찰개혁이다. 윤석열과 그 가족, 측근들의 범죄들을 은폐하는 것이 곧 검찰개혁인 것이다. 그래서 김학의도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한겨레와 정의당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다. 

과연 조선의 왕권은 약했었는가? 언제부터인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만 보면 왕과 맞먹으려는, 심지어 왕의 머리위에서 존재하는 권신들이 당연하게 악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 권신의 존재와 맞서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정의인 것처럼 대부분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실제 역사에서도 신하들이 왕의 머리 위에서 놀고 왕은 그런 신하들의 눈치나 보는 존재였던 것인가.

 

간단히 중국 전한의 선제가 곽광의 일족을 제거하기까지의 과정과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선제가 곽광도 아닌 그 자신들을 제거하는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었다. 이미 대부분 군권까지 곽광의 자식들이 쥐고 있었기에 그를 빼앗고 만에 하나 모를 반격의 여지까지 없애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많은 주의를 기울여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나가야 했었다. 반면 흥선대원군은 어떠했는가. 아니 그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는 과정조차 바로 당일 입궐하려는 흥선대원군을 막아서는 것으로 끝내고 있었다. 왕명이라는 한 마디에 안동 김씨는 조정을 이루는 여러 세력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심지어 전국의 서원마저 철폐될 지경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잘나서? 원래 조선의 왕권이 그만큼 강했던 탓이다.

 

심지어 안동 김씨에 의해 꼭두각시로 세워졌다는 철종조차도 한 번 제대로 화를 내면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마저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어째서 철종은 안동 김씨의 전횡을 묵인하며 그들의 꼭두각시 역할만을 해야 했던 것인가. 그것이 권력인 때문이다. 어째서 후한의 황제들은 그토록 환관들을 총애하여 국정을 혼란으로 몰아간 것일까? 환관이 사라지면 외척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스스로 명문으로써 상당한 일족을 거느리고 세력을 이룬 외척과 황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환관 가운데 누구를 선택해서 권력을 몰아주어야 하는가는 산수만 할 줄 알아도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아닌 환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고, 일거수일투족까지 아내나 자식이 아닌 환관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권력에 있어서도 환관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을 나누고 부정과 전횡을 묵인하는 대신 오로지 황제 자신에게만 충성하게 만든다. 역대 중국의 황제들에게 어떤 충신보다도 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가 환관이었기에 그것이 권력이 되어 전횡을 저지르게 만든 것이다.

 

권력이란 절대 혼자 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 협력자의 존재가 필요하다.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한으로 여겼던 주원장이 정작 명을 건국하는 과정에서는 지주들을 위한 정책을 앞세워야 했던 이유였다. 덕분에 당시 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강남의 지주들이 주원장의 편을 들어 명의 건국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건문제를 동정하던 강남의 세력이 아닌 자신을 지지하는 하북의 유력자들을 택해서 영락제는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옮겼던 것이었다. 조선도 여전히 고려왕조를 지지하며 새로운 왕조에 반감을 가진 개경을 떠나 한양에 새로운 도읍지를 정했던 것이 아닌가. 권력과 이해를 공유하는 기반이 되는 세력이 있어야 권력 역시 안정되게 권력을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런 친위세력의 도움 없이는 숭정제처럼 스스로 목을 매달거나 단종처럼 왕위에서 내쫓기고 죽임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을 가진 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권력을 지켜 줄 우군부터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지켜 줄 우군이 없었기에 임기 내내 고립되어 온갖 공격에 시달리다 오욕속에 죽어갔던 노무현 전대통령과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을 비교해 보라. 낙하산이네 뭐네 해도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행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여러 자리에 여권의 인사들을 임명한 행위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전리품을 나누지 않으면 누구도 함께 힘써 싸우려 하지 않는다. 이익이 없다면 충성도 연대도 없다. 공동운명체가 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이익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정동영이 그 전리품을 나누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이 직접 나누었다. 이낙연이 불만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가 민주당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상황이 이래서야 앞으로도 문재인 그늘에 가려 있을 뿐이다. 그런 불만에서 나온 오판이 아니었을까. 사면론은. 문재인 대통령의 편에 서 있는 동안에는 자리도 있고 이익도 있다. 그러므로 민주당 정치인들도 모두가 문재인 대통령의 편에 선다. 그래서 참여정부 당시에도 정동영의 뒤에 정치인들은 줄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숙종이 몇 번이나 환국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숙청한 것이었다. 소론에 의해 왕위에 오른 경종이 노론을 숙청한 이유이기도 했었다. 선조는 너무나 비대해진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서인과 손잡고 정여립의 모반을 이용하여 기축옥사를 일으켰었다. 다만 광해군은 선조에 의해 불안해진 자신의 입지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소수파에 불과한 대북에만 의지했다가 결국 서인과 남인의 연합에 왕위를 잃고야 말았다. 태종부터 세종까지 양성된 실무관료들은 서로 분열하여 단종을 지키지 못했고, 절치부심한 종친과 공신의 후예들은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영정조에 의해 사실상 당파가 사라지고 왕을 중심으로 사대부의 줄세우기가 끝난 세도정치 시기 왕들에게 선택지란 무엇이 있었을까? 왕과 가까운 한양의 벌열들만이 사실상 관직과 권력을 독점하는 가운데 소수 가문들의 문벌화가 이루어지면 선택지란 결국 그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세력이 큰 안동 김씨를 등뒤에 세우면 감히 다른 누구도 자신에게 도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라고 정조가 김조순을 순조의 장인으로 삼고 고명을 맡겼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철종과 안동 김씨의 관계는 중국 전한 선제와 곽광의 관계와 비슷하다 봐야 할 것이다. 전한 선제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곽광의 선택 덕분이었다. 곽광이 소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추대된 창읍왕의 행실을 문제삼아 그를 쫓아내고 선제를 차기 황제로 선택했기에 그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당대 곽광의 권세는 감히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었었고, 그런 곽광의 선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에 선제 역시 절대적으로 곽광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곽광을 부정하는 순간 자신의 즉위마저 부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곽광이 죽고 그 일족을 모두 주살한 뒤에도 곽광 만큼은 신원하여 제사까지 지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대에 안동 김씨와 견줄만한 세도가가 없고, 바로 그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오른 만큼 안동 김씨의 권력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안동 김씨와의 공존은 필수다. 다만 그렇더라도 철종이란 존재가 사라지면 안동 김씨의 권세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실제 고종이 즉위하고 그렇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안동 김씨를 몰아내는 과정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안동 김씨를 대신할 세력으로 흥선대원군이 선택한 것이 바로 종친과 풍양 조씨였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안동 김씨의 상당수를 여전히 조정에 남겨두고 있었다. 즉 종친인 전주 이씨와 대비 조씨의 가문인 풍양 조씨에 기존의 안동 김씨의 신파, 여기에 더해 중전 민씨의 친정인 여흥 민씨까지가 모여 조정을 이루고 고종의 왕권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 정도 힘이 있으니 안동 김씨도 몰아내고 고종의 권력기반도 단단히 다잡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신하가 감히 왕의 눈을 똑바로 보고 심지어 막말까지 하는 드라마의 상황 같은 건 실제 역사에서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역대 황제들보다는 못했다 뿐이지 조선의 왕권은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왕권이 약하다 하려면 왕이 언제든 내쫓길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야 하는데 왕권이 가장 약했다는 철종조차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도대체 어느 놈이 시작한 것인지 아주 드라마 볼 때마다 짜증나는 이유인 것이다.

 

영정조의 개혁이 오히려 조선을 약화시키고 쇄망의 길로 이르게 했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당쟁이 사라지고 결국 왕을 중심으로 줄세워진 문벌만이 남게 되자 결국 왕과 특정 문벌과의 결탁이 세도정치로 이어지며 조선을 지탱해 온 국가의 근본까지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세도정치의 시작을 연 안동 김씨의 김조순조차 정조가 어린 세자 순조를 위해 안배한 것이었으니. 당쟁이 문제가 아닌 당쟁이 사라진 이후가 문제였던 것이다. 상식과 달리.

수구정당과 자칭 진보의 가장 큰 공통점 둘을 꼽으라면 첫째가 학벌이고 둘째가 개신교다. 개신교 자체가 미국에서 직수입된 것이어서인지는 몰라도 특히 보편적 가치와 한참 거리가 멀던 군사독재시절 개신교 일각은 상당히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방공을 앞세운 군사독재에 부역한 개신교세력은 그보다 더 압도적이었다.

 

잠시 자칭 진보들과 어울리면서 깨달은 사실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가 많다. 심지어 진보의 이념조차 개신교의 신앙처럼 엄숙하고 경건하게 추구하려는 놈들이 많이 보인다. 자칭 진보에게서 흔히 보이는 이념의 경직성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성주의가 보이는 배타성과 공격성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여성주의를 개신교의 신앙으로 바꾸면 저들의 생각과 행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칭 진보의 윤석열에 대한 추종조차 종교적 열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그들에게 세상은 선과 악으로,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로지 신앙의 증거만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 것이라 믿고 있다.

 

개신교의 광화문집회에 대해 자칭 진보들이 오히려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이유인 것이다. 그들은 진보란 신앙을 가졌으면서 개신교라는 신앙을 믿는 신자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자칭 진보와 수구를 이어주는 고리인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이라는 학벌과 종교라는 신앙을 통해서. 그래서 자칭 진보는 전광훈에 대해서조차 개신교 목사라는 이유로 우호적일 수 있다. 전광훈에게 경찰이 수갑을 채운 것은 인권침해다. 당시 전광훈이 저지른 일과 이후의 행동들을 보라. 자발적 출석이었다고? 그보다는 목사란 신분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이른바 진보적인 시민단체, 지식인들에 대해 더이상 기대와 믿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유인 것이다. 그들 대부분의 학벌과 종교를 보면 그 답은 바로 나온다. 인권위 나부랭이가 수사권도 없이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여부를 판단해서 발표한다. 어째서? 왜? 권익위에서는 현직 검사가 정치적인 의도로 야당에 김학의의 출국금지에 대해 넘긴 것을 공익제보라 판단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째서 한겨레나 경향, 정의당은 민주당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일까. 방향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민주당을 혐오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국민의힘과 손잡을 이유를 찾기 위해서도 있다. 민주당이 악이 되어야 자신들이 국민의힘 편에 서는 것이 정당화된다.

 

지금에 와서는 이명박근혜도 크게 잘못한 것 없고, 조윤선과 최순실도 오히려 억울하다. 사법농단도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니다. 노무현 전대통령과 이명박에 대한 전혀 상반된 한겨레의 평가를 떠올려본다. 유죄판결을 받은 이명박은 공과 과를 판단하고 노무현 전대통령은 차라리 죽으라며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했었다. 원래 그런 놈들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민주당은 악이어야 하고 민주당이 하는 모든 것은 죄악이어야 한다. 김학의도 출국금지시켜서는 안되었고 방사능이 새어나오는 원자력발전소도 멈춰세워서는 안됐었고 코로나 방역도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위안부문제도 그냥 박근혜 위안부 협상으로 끝냈어야 했다. 

 

오히려 전광훈을 감싸는 인권위의 결론을 보면서 작년 개천절 집회를 두고 발악하던 자칭 진보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정확히 여성주의가 장악한 자칭 진보의 태도였을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가. 한 번 자칭 진보인사들 종교를 살펴보라니까. 윤미향이 자칭 진보로부터도 공격받은 이유는 민주당에 몸담았다는 이유 하나였었다. 정의연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 수구의 공격에 동참했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것이 진실이다.

리더란 말 그대로 남들보다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다. 당연히 얼굴을 볼 일이 없다. 길을 가는 동안 내내 사람들은 리더의 뒷모습만 봐야 한다. 리더의 뒷모습만 보며 리더가 가는대로 따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리더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하나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쉴 때, 그리고 하나는 뭔가 잘못되어 사람들의 의견을 구할 때, 그러나 그런 상황에조차 리더는 온전한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에 보여서는 안된다.

 

조조가 양수를 죽인 이유였다. 감히 자신의 속내를 엿보았다. 감히 자신을 마주하고 자신을 이해하고자 했다. 군주는 두려움과 경탄의 대상이어야지 이해의 대상이어서는 안된다. 이해하려는 순간 군주는 신하와 같은 눈높이로 내려오게 된다. 신하가 군주를 이해하고, 군주가 신하를 이해하고, 그 순간 신하는 더이상 군주에게 복종할 수 없고, 군주 역시 더이상 신하 위에 군림할 수 없다. 그래서 군주는 무오류의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명백히 틀린 순간에도 절대 군주가 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올린 것은 선조 자신이었음에도 아주 오래전 만호로 추천한 것을 빌미로 류성룡이 그를 천거한 책임을 온전히 뒤집어 써야 했었다. 죄인 이순신을 수사로 올린 것은 선조가 아닌 류성룡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벌써 수 년 전부터 선조는 이순신을 눈여겨보고 중용하려 하고 있었다.

 

카리스마란 한 마디로 자발적 복종이다. 알아서 상대를 리더로 인정하고 그 아래서 자신의 모든 판단과 결정을 맡기려 하는 것이다. 때때로 얼굴을 마주하고 상의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다. 기꺼이 그로 인한 모든 결과에 승복할 수 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유비가 그토록 수도 없이 패배를 겪고 끝내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였다.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유비란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해가 아니다. 이해였으면 유파처럼 도망쳤거나 진군처럼 일찌감치 다른 사람으로 갈아타고 말았다.

 

내가 여기서 이해하네 어쩌네 말하는 자체가 정치인으로서 굴욕일 수 있다는 이유인 것이다. 이해라는 말에는 연민이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상대를 어느 정도 낮추어 보기에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에 대해서도 자기 기준으로 이해란 것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항상 옳을 것도 기대하지 않고, 맞을 것이란 생각도 가지지 않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그가 틀릴 것을 전제하고 어째서 그래야 했었는지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려 한다. 리더인가? 그런 사람을 끝까지 믿고 따를 수 있을 것인가.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맡길 수 있을 것인가.

 

리더에게는 무능이 더 큰 악일 수 있다는 이유인 것이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사람을 끝까지 믿고 따라도 좋은 것일까? 이 사람의 뒤만 보고 따라가도 과연 온전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새로운 낙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무능한 리더의 등만 보고 따라가다가 사라진 무리가 기록되지 않은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내 운명까지 맡겨야 한다. 못 할 노릇인 것이다. 리더는 이해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시키는, 즉 동의와 복종을 받아내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이낙연에 대해 이해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더욱 그를 리더로서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이낙연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이재명에게 역전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재명은 때로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곳을 건드리며 이슈를 주도해 왔었다.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부터 시작해서 홍남기의 재경부에 대한 공격까지, 문재인 정부의 개혁과 적폐청산을 이어가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과제를 찾아 사람들에게 제시한다. 그 논란의 한가운데 있으려 한다. 그러나 이낙연은 아니다. 이낙연은 한 번도 180석이라는 의석을 가지고서도 사람들보다 앞서서 걸음을 내딛고 그 중심에 서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논란이 다 지나고 나면 그 뒤에야 느긋하게 뒤따라가는 타입이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리더가 아닌 선대로부터 신분을 물려받았을 뿐인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민주당 180석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민주당의 개혁과제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내놓은 것이 이명박근혜의 사면이었다. 과연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이낙연이란 인물에 대해 무엇을 느꼈겠는가.

 

압도적인 대군을 거느리고서도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신중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것이다.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서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사려깊은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개헌을 제외하고 민주당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한 현실에서 민주당은 과연 이 의석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마저 앞장서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리더인 것이다. 거기서 이재명과 이낙연의 차이가 갈린다. 경기도지사로서 때로 범위와 한계를 넘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려 하는 이재명과 당대표로서 항상 머뭇거리고 있는 이낙연의 차이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모두의 판단이 끝난 다음에 뒤늦게 움직여서는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 판단도 행동도 다른 사람보다 느린데 어떻게 그를 리더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이낙연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내가 때로 불쌍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차기 대선주자 이낙연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안되는 것이다. 리더가 불쌍하게 느껴지면 어쩌란 것인가. 앞으로 수 천만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인데. 행정가로서 신중함은 미덕이지만 리더에게 신중함은 우유부단함이다. 하물며 남보다 앞서가지도 못하고 자꾸 뒤만 돌아보는데 답이 있을까? 그 뒤돌아 보는 얼굴마저 항상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결국 이재명밖에 없는 것일까? 그래도 잘만 키우면 차기를 노릴만한 인재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아주 희망이 없지 않기는 하다. 하지만 당장 이재명을 대체할 만한 인물을 민주당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낙연이 조금만 과감했다면. 조금만 더 무모했다면. 그 과감함과 무모함을 자신감과 능동성으로 만들어줄 힘을 민주당이 이미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면. 행동보수가 아니라 그냥 겁이 많았던 것은 아닐까. 겁쟁이도 리더로서 실격이다. 참 안타까운 것이다.

최초 검찰의 김학의에 대한 무혐의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따라서 재수사가 필요했고, 그를 위해서는 김학의가 도피하지 못하도록 출국부터 금지시켰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대검에서 김학의에 대한 출국금지 요청을 묵살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면 법무부의 출국금지를 옹호하게 되는 것이므로 언론이라면 절대 그래서 안된다.

 

어찌되었거나 검찰이 무혐의 판단을 내렸으므로 김학의는 당시 피의자도 아닌 무고한 일반인이었다. 그러므로 법무부는 시민으로서 김학의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고, 따라서 김학의의 출국금지를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한 것은 잘못이다. 심지어 김학의에 대한 재수사를 대통령이 지시했으므로 대통령에게까지 책임이 돌아갈 중대한 정권차원의 범죄가 되는 것이다. 언론의 논리다.

 

양승태의 사법농단은 대한민국의 헌정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었다. 사법부가 행정부의와 거래를 통해 판결까지 좌지우지하려 했었다. 사법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판이라는 중대한 책임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아 조직의 이익과 교환하려 했었다. 그런 행위에 앞장선 현직 판사가 있는데 재판을 통해 혐의 대부분이 입증되었음에도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런 중차대한 국가적인 범죄를 저지른 인물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무사히 퇴직해서 전관으로서 이익까지 챙기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물론 이조차도 정부의 편을 드는 것이므로 언론은 달리 말해야 한다.

 

사법농단 좆도 아니다. 사법농단에 앞장섰다고 크게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니다. 사표 냈는데 그만두면 그만이지 무슨 탄핵까지 하는가. 그래서 박근혜가 문재인보다 낫다. 차라리 최순실이 조국보다 낫다. 이명박이 노무현보다 낫다. 그래야 정부의 편을 들지 않는 객관적인 언론이다. 정부에서 하면 최저임금인상도 반대하고, 근로시간단축도 반대하고, 탈원전도 반대하고, 코로나19 방역도 반대하고, 백신도 반대하고, 심지어 바로 어제까지 동지로 여기던 정의연조차 민주당 당적을 가지니 조선일보와 함께 공격에 나선다. 차라리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이 정의연보다 나았다.

 

그게 바로 한겨레의 정의인 것이다. 중립이고 객관이고 공정이다. 한겨레만이 아니다. 경향도 정의당도 입장은 같다. 홍세화도 진중권도 서민도 심상정도 모두 같은 입장이다. 그래야 자신들은 진보일 수 있다. 검찰의 세월호에 대한 수사결과 역시 검찰을 비판하는 것은 정부의 편을 드는 것일 수 있으므로 말을 조심해야 한다. 보수화가 아니다. 그냥 그들의 진보가 원래 그랬던 것이다. 자기에게서 비롯된 기준과 가치가 아닌 타인의 눈에 보이는 기준과 가치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진보이기 위해 문재인 정부에서 반정부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

 

자칭 진보의 보다 솔직한 속내인 것이다. 그동안 자칭 진보들이 당연하게 해 왔던 일들이 그나마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함으로 인해 한겨레를 통해 불거져 나왔을 뿐. 문재인 정부의 편을 드는 것은 악이다. 반대편에 서는 것은 선이고 정의다. 진리고 진보다. 참 단순한 놈들이다. 원래 그런 놈들인 것은 알았다. 비루하고 비루하다. 한심한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그런 오해를 하고는 한다. 군인들을 더 우대하고 지위도 권력도 높여주면 당연히 군사력도 더 강해지게 될 것이다. 군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군사력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게 되면 당연히 군사력은 더 강해진다. 그런데 정작 무신들이 문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던 고려의 무신정권은 고려 역사상 군사력이 가장 형편없었던 시기였다. 어쩌면 원의 속국이 되었던 이후보다 더 형편없었을 것이다.

 

허구헌날 하극상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인재들이 죽어나가고, 그런 와중에 고려를 위해 쓰여야 할 군사들은 무신들의 사병이 되고 있었다. 거란의 유민이 쳐들어 왔는데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 줄 중앙군을 아끼기 위해 승려들까지 동원하며 졸전을 벌였던 것이 최씨정권이었던 것이다.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당시에도 저 유명한 삼별초는 최씨정권을 위해 정적들을 탄압하고 백성들을 수탈하는데만 앞장서고 있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고려의 전토를 유린하는 동안 한 번도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았었다.

 

무신들에게 군사력은 곧 수단이다. 자신들의 권력이고, 그 권력을 지켜주는 요긴한 수단인 것이다. 딱 그런 수단으로서만 대한다. 그래서 때로 그 권력을 위해 소중한 수단이어야 할 군사력을 함부로 낭비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그런 군사력은 국가가 아닌 개인의 이해를 위해 하극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바로 휴전선에서 북한군과 첨예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권력을 잡겠다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민을 학살하기 위해 특수부대가 동원되는 상황이 그런 예인 것이다. 군은 국가를 위해서, 오로지 국민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 과연 군사독재정권과 이후 문민정부 가운데 어느 쪽이 국가적으로 본다면 군사력이 더 강했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전 군사독재정권에서는 군인들이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것도 당연한 군인들의 권리였었다. 병사들에게 가야 할 보급품을 빼돌리고, 혹은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 공급하며 폭리를 취하고, 그 결과 병사들은 2차세계대전 때 쓰였던 장비들은 90년대가 넘도록 아직도 사용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민주화 이후에나 그런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면 고발도 되고 처벌도 되고 하는 것이지, 아니 지금도 군인 출신이 국방부장관이고 군법정에서 모든 재판과 처벌이 이루어지다 보니 제대로 책임을 묻기도 어려운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수단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다. 도구로 쓰인다는 건 그런 의미다. 군사력은 더이상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군인의 권력은 군사력을 더 약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지금 제 3세계 국가들에서 군사장비 도입과 관련해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조차 아닌 이권들을 보라.

 

검찰권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권력을 사유화하며 그를 국민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하며 낭비한다. 그런 한 편으로 그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내부투쟁에 골몰하며 하극상까지 서슴지 않는다. 윤석열만 검찰이 아니란 것이다. 이성윤도 검찰이다. 그런데 이성윤도 심재철도 같은 검찰이 아니라는 양 검찰 내부에서 공격이 거세기만 하다. 심지어 언론까지 동원된다. 어째서? 검찰총장만 되면 손에 쥐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검장만 되어도 손에 쥐어지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니 그런 것들에 대한 욕심이 자신의 상급자까지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언론은 왜 끼어드는가?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있으니까.

 

윤석열만이 검찰이다. 윤석열의 측근들만이 검찰이다. 나머지는 검찰도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윤석열 측근들과 언론의 태도가 지금 검찰을 더욱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불만이 없을까? 이성윤이라고 자기 사람이 없을까? 검찰에는 특수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판부도 있고 공안부도 있고 형사부도 있다. 그런데도 확신을 가지는 것은 검찰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이다. 어째서 검찰권력을 개혁해야 하는가 그 당위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하겠다.

 

이성윤을 믿지 않는다. 이성윤 역시 검찰이다. 그러나 이성윤의 욕망은 믿는다. 사람이 이 정도 당했으면 당연히 감정이란 게 생기게 마련이다. 윤석열과 그 측근들에게 당해 온 것들이 있다. 언론들로부터 그동안 줄기차게 당해 온 것들이 있다. 그것은 검찰 내부에 검찰과 언론으로 인해 생겨난 균열이다. 최씨정권 이후 무신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느라 틈을 보인 끝에 몰락하고 말았던 것처럼. 과연 검찰권력은 이후로도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검찰권력의 끝이 보인다. 검찰과 결탁한 언론의 끝도 보인다. 사법농단도 죄가 아니라는 한겨레 나부랭이의 자칭진보도 그 끝이 보인다. 조선일보는 그래도 된다.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양승태의 사법농단까지 감싸는 한겨레 나부랭이들이 과연 자칭진보로써 존속할 이유란 것이 있을 것인가. 이성윤이 더 감정적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의감보다 복수심이 지금으로서는 더 공적으로 유용하다. 기대해 본다. 피바람은 남의 일일 때 더 신나는 법이다.

자유의지주의와 법치주의가 만나면 아주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온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면 자기 권한 아래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

 

바로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갈리는 지점이다. 둘 다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장하지만 결과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자유와 규범에 대한 이해다.

 

그런데 원래 자유의지주의와 법지상주의는 자유주의나 법치주의와 꽤나 혼동되기 쉽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오로지 법에 의해 규제되는 질서란 얼핏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보호대상이 아니기에 자기 권한 아래서 약간의 실수는 있었지만 당연하게 해고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해고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법은 누가 만들었을까? 어째서 그 법 안에서 그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그들을 보호해야 할 도덕적 윤리적 책임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인가? 지금 법적인 문제로 다투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망각한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자칭 진보는 이미 저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진중권이나 홍세화 같은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진영 전체가 여성주의와 함께 저쪽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런 정의당을 옹호하는 한겨레의 태도를 보라. 김학의를 출국금지시킨 것이 청와대가 책임져야 할 중대한 정권차원의 비위라 주장하는 저들의 논리를 보라. 그런 정의당을 진보적이라고 지지하는 놈들은 그러면 무엇일까? 뇌가 구더기거나 구더기가 뇌이거나.

 

류호정의 변명과 그를 옹호하는 정의당과 자칭 진보언론들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국민의힘이 더 진보적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래서 국민의힘이 노동존중의 정당이었던 것일까?

 

그래서 자칭인 것이다. 저놈들이 진보라. 류호정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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