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김학의 출국금지를 다시 들쑤시는 이유는 별 것 없다. 이를테면 이슬람교도에게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혈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귀족을 포로로 잡아서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욕하도록 만든다. 김학의같은 파렴치한 범죄자를 출국금지시켰다는 이유로 대통령이 수사의 대상이 되고 사법처리의 가능성까지 이야기된다.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수록 그런 상황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 것이다.

 

대통령의 지시로 인해 김학의에 대한 재수사가 시작된 점을 들어서 김학의가 정권에 의한 희생양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려는 것인지 모른다. 심지어 한겨레 기자새끼들조차도 출국금지시킨 그 시점에 김학의가 검찰에 의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중이다. 당시 김학의는 피의자도 무엇도 아니었고 무혐의로 수사가 종료된 일반인 신분이었다. 무슨 뜻이겠는가? 정권에 의한 사찰이고 표적수사고 희생양이다. 말도 안된다 여기겠지만 지금 언론 상황을 보라. 정치권 상황을 보라. 시민사회단체들의 현실을 보라.

 

당장 정의당의 입장부터 너무 분명하다. 박범계 지명자의 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묻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상태다. 김학의를 출국시켰는데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절차에 문제가 있었으니 김학의가 해외로 도피하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절차에 문제가 있었으니 불법적으로 사찰당하고 출국까지 금지당한 김학의가 억울한 피해자라는 것인가? 그것을 또 왜 하필 신임 법무부장관에게 묻겠다는 것인가? 김학의 사건에 대해 재수사토록 하고, 그를 끝내 법정에 세운 것이 정권차원의 심각한 범죄라 여기는 것은 아닌가? 바로 한겨레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원래 정의당은 작년 심상정이 탄핵발언을 하던 그 순간부터 지금을 기다려 왔었을 것이다. 비로소 확신이 생겼다. 주호영이나 윤석열이나. 언론은 이미 자기들 편이다. 김학의를 재수사하던 당시 그토록 열을 올리던 언론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라. 김학의의 범죄는 사라지고 김학의를 출국금지시킨 위법성만 남아 뉴스에 오르내리는 중이다. 김학의는 무혐의였다. 김학의는 일반인이었다. 청와대가 개입했다. 대통령이 지시했다. 웃기는 건 출국금지 자체는 장관이나 법무부의 재량으로 피의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법적으로 가능하더라는 점이다. 그야말로 환관 조고가 일부러 대신들 앞에 사슴을 던져놓고 말이라 한 상황과 닮아 있는 것이다.

 

어째서 하필 김학의였는가면 김학의야 말로 자신들이 연합한 힘이 어떠한가를 확인할 가장 훌륭한 소재이기 때문이었다. 김학의같은 파렴치한 범죄자조차 억울한 희생양으로 만든다. 권력에 의한 무고한 피해자로 만들어 오히려 그를 수사하고 체포하고 처벌한 이들을 공격할 칼로 돌변하도록 만든다. 거기에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칭 진보들이 앞장선다면 얼마나 그림이 좋겠는가. 그러니까 정의당이 총대를 매는 것이다. 한겨레가 그럴싸하게 논리를 퍼뜨리고 나서는 것이다. 사법부는 기다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하고 법정에 서는 순간을. 김학의같은 파렴치범을 출국금지시켰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게 될 그 순간만을. 그러면 국민은 어디 있는가?

 

그래서 문제다. 국민은 과연 개돼지인가?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주체일 것인가? 과연 언론과 정치권과 검찰과 법원과 시민사회단체까지 총동원된 지금의 상황에서 과연 제대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렸을 것이다. 대통령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저들의 마음대로 여론이 움직이고 국가가 움직이는 절망적인 미래를 걱정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의당도 한겨레도 홍세화도 한 발 담근 것이겠지만.

 

바로 그제였다. 정의당이 김학의 출국금지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이. 워낙 일때문에 바빠서 지금에서야 겨우 검색해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너무 예상한 대로라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김학의의 인권이 그리 소중하다. 김학의가 저지른 범죄를 처벌하기보다 법적인 절차를 지켜 그 권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 정의당과 자칭 진보에게는 그리 정의롭다. 지지자 있으면 한 번 떠들어 보라. 그렇다고 법에 없는 권한인가? 그래서 늬들이 버러지인 것이다. 역겨운 것들이다.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것들 중 하나인데 범죄의 성립요건은 의도가 아닌 행위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서 인공호흡하는 것은 좋다. 그런데 인공호흡한다면서 심장이 있는 명치 부위가 아닌 여성의 가슴 부위만 그것도 손을 펼쳐서 움켜쥐려 한다면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는가? 당사자가 그것을 느꼈고 주위에서 그 사실을 인지했다. 사람을 살리려 그런 것이라 변명하면 과연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냥 좋은 뜻에서 한 마디 한 것인데 상대가 수치심을 느꼈으면 그게 바로 성희롱인 것이다. 상대가 불쾌감을 느끼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을 때 모르고 했다 미안하다 사과한다면 그때는 실수가 될 수 있다. 상대가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했음에도 자신의 선의만 주장한다면 그 순간 고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호영의 경우도 주호영이 실수였다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해명하는 한 마디만 했어도 상황이 달라졌다 말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충분히 실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의가 아니었어도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어떤가? 그 행위로 인해 수치심을 느낀 피해자가 있는데 오히려 언론을 협박하며 자신의 행위를 지우는 데에만 급급하다.

 

성인지감수성 이전에 의도가 악해서 범죄가 아니란 것이다. 의도는 선해도 남의 가게에서 물건을 집어가면 절도다. 아무리 공익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몸에 위해를 가하면 상해죄가 되는 것이다.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죽게까지 했으면 과실치상 과실치사가 된다.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여성주의자, 여성기자들이 그동안 노래를 불러왔던 것이 바로 성인지감수성이란 것이었다. 여성이 있는 공간에서 말도 행동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지금 여성주의자 자칭진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무튼 주호영의 편에서 같은 남자라고 편들고 싶은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이번 사건에서도 중요한 것은 의도의 여부가 아니다. 실수였는가의 여부도 아니다. 설사 우연이고 실수였어도 스스로가 그 부분에 대해 사과하고 해명할 기회를 내던져 버렸다. 우연이고 실수였다면 사과 한 마디로도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지만 그마저 거부한 순간 행위만 남고 마는 것이다. 진짜 하물며 성인지감수성이라면야. 원래 개소리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여성주의자들, 언론들, 기자들이 그동안 떠들어 온 성인지감수성이란 얼마나 의미없는 헛소리였는지.

 

다시 말하지만 우연이고 실수였고 오해였다면 사정을 설명하고 혹시 모를 상대의 감정에 대해 사과하고 양해를 구하면 되는 것이다. 거기서 더 넘어가면 문제삼는 쪽의 잘못이 된다. 그게 바로 사회생활이란 것이다. 거기서 더 나간 것들이 여성주의자들이니 욕을 먹는 것이고. 우연도 실수도 오해도 없다. 모든 것은 가해자의 고의에 의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인지감수성이란 것이다. 그 차이는 인지해야 한다. 그게 여성주의가 벌레인 이유다.

아예 대놓고 만지겠다고 작정하고 손부터 내미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고수는 자연스러운 순간을 노린다. 남자라면 거의 알 것이다. 아니 여자들도 거의 알 지 모르겠다. 우연히 거리가 좁혀지고 몸이 서로 맞닿는 순간을 이용해서 의도적으로 상대의 몸과 접촉하고 그 느낌을 즐긴다. 원래 그러려던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기회를 놓칠 수 없기에 본능으로, 그마저도 계획한 상태에서 상대의 몸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고서 혹시라도 당사자가 항의라도 하면 우연히 실수로 그런 것이라며 변명할 여지도 남긴다. 성추행일까? 아닐까?

 

다른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짧은 순간 과연 그 손은 상대의 중요한 부위를 움켜쥐었을까? 혹은 쓰다듬었을까? 다른 외설행위는 하지 않았을까? 그리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다. 한 번 손에 힘을 주어 만지는데 무슨 분 단위의 시간이 필요한가? 그래서 정작 그런 수치스런 일을 당하고서도 증거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가 현실에 적지 않다. 물론 그런 일을 저지른 당사자는 현장에서는 아니라고 발뺌하다가 동성의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물론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고작 그런 일로 자랑 씩이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평소의 습관이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앞에 여자가 있고, 우연히 신체접촉이 일어났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물론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의 억지주장일 수 있다. 너무 과민하게 당시의 신체접촉에 대해 반응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거나 성추행당했다는 피해자가 전면에 나서서 가해자까지 지목한 상황이란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성이라면, 더구나 여성에 대한 성범죄에 대해 사회적 이슈로서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하는 여성주의자라면 어떤 반응이 구체적으로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물며 피해자가 언론사 기자라면 같은 기자로서 여성 기자들이 침묵하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재작년 장용진이 지나가듯 한 말 한 마디로 여성기자들이 얼마나 몇 주를 난리를 피웠었는가. 그런데 지난번 지방지 기자에 이어 인터넷매체의 기자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여성주의자들과 여성기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저들은 저토록 철저히, 아예 없는 사실마냥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두 가지다. 결국은 하나다. 신분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신분이 남다르다. 한국사회의 주류들은 보수야 말로 한국 사회의 정당한 지배자라 생각한다. 심지어 자칭 진보들조차도 진보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은 보수여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들이 바라는 노동존중의 사회는 민주개혁정당이 집권해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보수정권 아래에서 자신들의 강연과 세미나와 집회와 칼럼 등을 인정받아 보수정권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정부에서는 민주정부 욕만 하며 날을 지새다가 보수정부가 들어서면 제발 들어달라고 글도 쓰고 강연도 하며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특별히 보수를 지지하고 진보를 혐오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주류와 정당하지 못한 찬탈자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 같은 것이다. 박근혜 앞에서 두 손 곱게 모으고 듣기만 하던 기자들이 정권이 바뀌었다고 기자회견장에서 남들 보라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릴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마 조선시대 백정 출신이 정승 자리에 올랐으면 성균관 유생 가운데 저러고 반발하는 놈이 분명 하나쯤 나왔을 것이다.

 

여기에 피해자의 신분이라는 것이 걸린다. 박원순 시장의 경우는 그래도 같은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김재련이 대리인으로 나섰기에 여성주의자들의 문제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과연 일개 시장 비서의 하소연을 누가 들어주기나 했었을까?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은 타고나기를 좋은 집안에서 나서 좋은 대학 나와 번듯한 좋은 직장에, 때로 좋은 남편을 만나 고생 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여성주의자들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여성이란 그런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여성들인 것이다. 그런데 앞서 가해자의 신분에 비추어 '서울의소리'라면 강선 친문매체라는 점에서 여성주의자들의 존중과 보호를 받기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더구나 여성기자들 입장에서도 이전 지방지에 이어 이번엔 듣보잡 인터넷 매체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문제가 되는 것은 주류매체의 기자들이지 그런 하찮은 매체의 자칭 기자들이 아니다.

 

그래서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소연하고 있음에도 그토록 다른 목소리를 용납지 않으며 2차 가해를 외쳤던 여성주의자들과 여성기자들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설사 일어났더라도 자신들까지 개입할 사건은 아니다. 가해자가 고귀하신 신분에, 피해자는 비천한 천민인 것이다. 양반이 백정의 아낙을 성추행하면 양반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문제이지 추행당한 아낙의 상처를 살필 사안일 수 없는 것이다. 결론은 뭐다? 김학의 출국금지가 정권차원의 범죄라 믿는 정의당과 한겨레를 보라는 것이다. 답은 분명하다. 벌레들이다.

마음에 안 드는 기사는 고소고발한다.

 

마음에 안드는 방송은 폐지한다.

 

마음에 안드는 방송인 언론인은 쫓아낸다.

 

그래도 침묵한다. 왜? 국민의힘이니까.

 

벌써부터 그려진다. 만에 하나 백만에 하나 억만에 하나 국민의힘이 집권하면 언론은 어떻게 바뀔까?

 

김완 기레기부터 당장 청와대 달려가서 두 손 곱게 모으고 개소리 듣겠지.

 

장용진이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한 것 가지고 얼마를 울궈먹었는데 지난번에는 영남이었고 이제는 당대표네? 과연 여성기자들이 이 사안에 대해 나설 것인가? 명백한 증거까지 있는데.

 

세상에 더러운 놈들이 사람 가리는 놈들이다. 잘해주면 기어오르고, 엄하게 하면 비굴해지고. 착하면 이용해먹고, 악하면 빌붙어먹고. 그런데 이게 룸펜들의 특징이라. 결기도 용기도 없는 놈들이라 그렇게밖에는 살지 못한다. 

 

정의당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게만 기어 오르는 이유. 

 

언론의 자유는 다 쓸데없다. 언론이 그를 증명해 보여준다. 국민의힘을 대하는 것을 보라. 저들이 바라는 언론정책은 저런 것이다. 저들이 바라는 언론의 자유다.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들 뿐이다. 모두 좋은 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망도 더이상 없다.

어떤 주장이 옳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는 논증이란 걸 해야 한다. 논증은 대개 논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른 주장과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강조하며 그 타당성을 증명한다. 문제는 논쟁이라는 게 반드시 옳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고, 괜히 잘못 나섰다가 몰리기라도 하면 낭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말싸움에서 지더라도 논쟁을 통해 그 가치를 드러내면 그만큼 의미있는 과정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자신이 시작한 논쟁을 누군가 받아서 더 발전시켜 마침내 승리하면 그 또한 승리다. 그에 대한 확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

 

어제 쓴 글의 연장이다. 어째서 자칭 진보는 정부를 향해서만 지랄하는가. 어째서 전혀 반대편에서 전혀 상반된 주장을 하는 수구언론이나 수구정치권, 지식인들과 논쟁하기보다 단지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을 뿐인 민주정부를 향해서만 날을 세우는가. 당연하지 않은가. 언론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민주정부와 민주당이라면 굳이 날선 비판을 한다고 적대적으로 논쟁을 벌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이다. 그래서 민주정부와 민주당에서 보다 강하게 자신들의 주장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전가의 보도인 언론의 자유를 앞세우면 된다. 민주정부와 민주당이 언론의 보도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언론을 억압하고 있다. 늘 보던 패턴이다.

 

당연하게 자신들의 주장에 반박할 수구진영과 논쟁하면 자신이 없다. 토론을 벌여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기에 자신들의 실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엘리트니까. 진정 주류집단일 테니까. 그에 비하면 민주당은, 그 가운데서도 친노친문은 말 그대로 떨거지들 아닌가. 운이 좋아서 대중적으로 인기 좋은 문재인과 노무현이라는 대통령에 줄 잘 서서 한 자리 했을 뿐인 자기들 이하인 것이다. 문재인이나 노무현도 대통령 되기 전에 어디서 뭐 하던 놈들인지 알 게 무언가. 그래서 만만한 정부를 시비삼는 것이다. 문제는 수구와는 아예 방향이 다르지만 민주정부와는 그래도 방향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방법을 비판하려는데 때로 선을 넘어 버리면 아예 그 방향까지 부정하게 된다. 자기부정이 된다.

 

탈원전이 그 예다. 검찰이 수사하나 원전폐쇄는 범죄다. 대통령까지 직접 수사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정의당의 공식 입장이고 한겨레와 경향의 입장이다. 다수 자칭 진보 지식인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김학의는 어떤가? 검찰이 대충 수사해서 무혐의 처분한 김학의를 검찰이 무혐의로 결론지었다도 무고한 시민으로 전제한 뒤 역시나 출국금지에 대해 청와대 차원에서 책임져야 할 중대한 범죄로 단정짓는다. 아마 자칭 진보의 머릿속에는 수의를 입은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김학의가 저지른 범죄들을 보라. 그 범죄들이 어떻게 처벌조차 받지 않고 지나갔는지 생각해 보라.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해야 하니까. 국민의힘은 무섭지 않은가. 국민의힘 잘못 비판하면 고소당한다. 다시 한 분 윤석열에 그랬던 것처럼 오체투지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지 모른다. 

 

그동안 현정부의 진보적인 정책들에 대해서 방법론적으로 비판해 온 내용들이 오히려 그 방향마저 수정하고 혹은 퇴보하게 만드는데 일조한 것이 그런 이유들인 것이다. 그래도 진보적인 정책을 펼치면 방법론적으로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방향 자체는 동의해야 하는데 그마저 반대한다.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그냥 하지 말아야 한다.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아예 그런 정도도 하지 않았던 이전 정부보다도 방법론적으로 틀린 정책을 펴는 정부가 더 나쁜 것이다. 그래서 국민의힘보다 민주당이 더 나쁜 것이다. 경향일보는 차라리 솔직하다. 요즘 대놓고 수구언론짓이더만. 그런데 수구언론은 아니다. 정의당이나 한겨레 하는 꼬라지 보면 그게 바로 자칭 진보의 본모습이다.

 

비겁한 것이다. 정확히는 이제 자기들 주제를 알게 되었다 해야 할 것이다. 올해 초 잠깐 민주당과 손잡았다가 언론의 총공격을 받고 나서 더욱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민주당과 달리 정의당 나부랭이는 감히 언론의 눈밖에 났다가는 버티지 못한다. 그리고 한겨레는 그보다 더 일찍 깨달았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눈밖에 나면 자신들따위 그냥 가루가 되고 만다. 그래서 자기들이 진보라는 증명을 민주정부와 민주당을 통해서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구는 감히 비판할 수 없으니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통해 자신들이 진보임을 드러낸다.

 

돌이켜보라. 과연 자칭 진보가 자칭 보수와 정면으로 논쟁을 붙고 주도한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아주 오래전에는 있었다. 한겨레가 조선일보의 기사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논쟁을 하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지금은 없다. 정의당도 감히 국민의힘에 정면으로 논평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엘리트라서 그렇다. 어려운 일 한 번 겪어 보지 못한 룸펜들이라 감히 그런 치열함을 감당할 수 없다. 민주당이야 항상 전장의 진흙탕 속에 뒹굴고 있으니까. 아무리 곱게 자라왔어도 민주당에 몸담는 순간 그렇게 된다. 그 차이다. 그게 자칭 진보의 수준이다. 비웃는 이유다.

이 새끼들은 진짜 왜 이리 투명하냐? 내가 말했지? 자칭 진보놈들 검찰이 김학의 출국금지 수사한다고 한 순간 문재인 대통령 유죄로 단정짓고 재판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김학의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범죄를 저질렀고, 그럼에도 어째서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당시 출국금지가 어떤 상황에서 내려진 것인지에 대한 아무 고려 없이 검찰이 수사를 시작했으니 범죄고 유죄다. 하긴 사실이 무슨 소용인가. 검찰은 무조건 기소할 것이고 법원은 무조건 유죄판결을 내릴 것이다. 죽느냐 감옥에서 사느냐의 차이일 뿐 저들에게 진실따위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겨레 이 새끼들 또 뭔 개소리 지껄이는가 유튜브채널 들어갔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진보를 자처하는 놈들이 설마 싶었었는데 마지막 기대마저 깡그리 부숴준다. 덕분에 또 하나 적중시킬 수 있었다. 김학의 출국금지를 누구 선에서 지시하고 결정했는지 아직 다 밝혀지기도 전에 청와대가 위험하다 아예 단정짓고 있다. 고작 범죄자 하나 출국금지시키는데 대통령까지 개입했을까 싶지만 그런데도 검찰이 수사하고 있으니 청와대가 무사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예상이라기보다 바람이다. 분석이라기보다 기대다. 그랬으면. 제발 그래 줬으면.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자칭 진보의 선의를 지껄여 보시라.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아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당당히 활보하며 변호사 개업해서 잘 먹고 잘 살던 인간을 제대로 수사하자고 출국금지시킨 것이 그렇게 정권차원의 심각한 범죄인 것인가. 사소한 절차를 문제삼아 대통령까지 걸고 넘어질 정도로 중대한 문제인 것인가. 바로 그것이 지금 자칭 진보란 것이다. 하긴 들떠 있을 것이다. 남의 재판에서 뜬금없이 판결까지 받은 박원순처럼 문재인도 검찰이 기소만 하면 유죄판결이 나올 것이다. 죽이자. 그러라고 상관없는 재판에서 되도않는 판결을 읊은 것이다.

 

저 새끼들의 의도는 분명해졌다. 죄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아주 작은 꼬투리만 있으면 된다. 뉴시스 김태규의 손가락은 저놈들의 속마음이기도 하다. 김학의를 출국금지시켰으니 청와대가 위험하다. 법무부에서 결정한 것인데 벌써부터 대통령까지 위험하다. 검찰의 의도라는 건 알겠고 한겨레는 물론 자칭 진보의 바람이라는 것도 알겠다.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 아직도 착각하는 병신들이 좀 있는 것 같지만. 정신차리라, 유시민, 박주민, 최강욱, 김진애. 자칭 진보는 더이상 같은 길을 가는 우군이 아니다. 그냥 적일 뿐이다. 다시 확인한다. 버러지새끼들이다.

 

어른들이 대화 끝에 나이를 앞세워 어린 상대를 윽박지르는 것은 대화에서 주도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어린 사람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무지나 어리석음, 치우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어쩌나. 그로써 상대에게 우습게 여겨지고 권위를 잃게 되면 어쩌나. 그래서 어른은 나이를 앞세워 윽박지르고, 나이가 어리면 나이를 따라서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이를 앞세운 순간 틀려도 틀린 게 아니게 되고, 그저 따르기만 한다면 자기 책임이 아니게 된다.

 

사전위탁보호제와 같은 제도는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논의될만한 사안일 것이다. 양부모가 아이를 입양하기 전에 위탁의 형식으로 함께 생활하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나면 입양을 취소하거나 혹은 새로운 입양아를 소개해준다. 한 편으로 아이를 대상화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한 편으로 그럼으로써 혹시나 입양 이후 서로 맞지 않아 벌어질 문제들을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러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사전위탁보호제에 대한 입장을 언론사마다 기자마다 정리해서 대통령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논쟁의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제도가 입양아나 부모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냥 입양아들을 물건취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어째서 소득주도성장인가. 어째서 최저임금은 인상되어야 하는가. 어째서 근로시간은 단축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자칭 진보언론이 이들 사안들에 대해 자칭 보수언론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세월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긴 자칭 보수언론도 거의 다르지 않았다. 저널리즘 토크쇼J가 언론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이유인 것이다. 감히 언론을 상대로 비판을 하고 있다. 언론의 기사를 대상으로 논쟁을 하려 하고 있다. 기자들끼리는 논쟁하면 안된다. 언론사들끼리는 기사를 가지고 경쟁하려 해서는 안된다. 왜? 틀리면 망신이니까. 논쟁에서 지면 기자나 언론이나 큰 망신을 사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아예 싸움을 회피하고 그 대상을 만만한 정부로 돌린다. 물론 그래도 되는 정부만 한정이다. 논쟁에서 지는 것이 두려운데 감히 권위주의적으로 언론을 대하는 대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언론은 하나라는 것이다. 언론이라는 집단 안에 들어가면 그들은 다른 언론으로부터 비판받지 않아도 된다. 공격받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언론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엘리트라 그렇다. 워낙 좋은 집안 출신에 좋은 대학까지 나온, 항상 인정만 받아 온 엘리트들이라 그런 실패나 좌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실패도 아니다. 좌절도 아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논쟁은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과 결론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틀렸어도 의미있는 결론을 도출했다면 그것으로 의미있다. 내가 졌어도 나 자신이 제기한 의제로 인해 사회가 가치있는 고민을 함께 했다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다. 그보다는 논쟁에서 누가 이기고 졌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지식인으로서 논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기보다 구경꾼이 되고 심판이 되고자 한다. 그러니까 허구헌날 남 싸움붙이는 기사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언론의 비판이라는 게 일정한 주관이나 지향을 보이고 있는가. 없다. 어제 한 말 다르고 오늘 한 말이 다르다. 자기 입장은 없이 오로지 비판을 위한 비판만을 하고 있다. 내가 어떤 입장과 지향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부분을 비판하는 게 아닌 그냥 비판하는데만 의미를 둔다. 그래서 민주정부에 대해서만 날을 세우는 것이다. 비판하는 자신에 도취된다. 비판하는 언론이란 집단에 매몰된다. 그러니 대통령에게 뻐큐를 날릴 수 있는 자신은 대단하다. 기자들 뿌듯했을 것이다. 언론사 기자가 대통령에게 뻐큐를 대놓고 날릴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기자들이 이렇게 용감하고 대단하다. 당연히 그런다고 기자들을 어떻게 할 정부가 아닐 테니까.

 

빈약한 자아인 것이고, 엉성한 자존인 것이고, 그로인한 나약함과 비겁함인 것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기 기사에 대해 비판을 듣는 것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 기사에 책임을 지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논쟁하지 않는다. 한겨레와 조선이 논쟁하지 않고, 경향과 중앙이 논쟁하지 않는다. 그냥 따라간다. 그래야 다치지 않을 수 있다. 검찰만 따라가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기레기는 기레기인가. 언레기는 언레기인 것인가. 논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끼리 서로 비판도 감시도 논쟁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기자를 보호한다. 언론이 언론을 보호한다. 그래서 안에서 썩어들어간다. 기자가 기레기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놈들이 바로 기레기다. 맞는 말이다. 기레기를 거부하는 놈들이 기레기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 엘리트중에서도 B급 엘리트다. 누가 저런 놈들을 엘리트로 인정하는가. 그게 또 하나. 그냥 병신들인 것이다.

부모자식 관계를 천륜이라 부르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지는 것이 아니고, 아이를 가지기 싫다고 다 피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가지게 된 아이를 낳았을 때 어떤 아이가 태어날 것인가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외모가 아빠를 닮을지, 성격이 엄마를 닮을지, 머리가 좋을지, 운동을 잘할지, 성실하고 진중할지, 재빠르고 영특할지, 그것도 일단 낳아서 길러 보고, 또 기르는 환경에 따라 어떻게 될 지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실 대부분 가정폭력의 원인은 부모의 부모로서의 서툼과 어색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 가정폭력의 가해자들은 그럼에도 선의로 가족을 생각해서 폭력을 휘두른다 주장한다. 물리적 폭력이든 언어적 폭력이든 혹은 환경이나 행동 태도 등에 의한 간접적 폭력이든 결론은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몰라서 가장 쉽고 빠른 수단에 의존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들이란 것이다. 아이가 자기 생각 같지 않을 테니까. 아이도 아이지만 아이를 기른다는 것도 자기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그런 당황과 혼란을 쉽게 폭력으로 해소하려 한다. 부모가 먼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낳아 기른 아이가 자기와 맞지 않기까지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럼에도 천륜이 천륜인 이유는 하늘이 정해준 운명에 의해 부모자식으로 만났으니 어떻게든 서로 맞춰가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도무지 아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식은 자식이니까, 부모가 도저히 이해도 납득도 안되는 사람들이더라도 부모는 부모니까, 더구나 성인이기에 부모는 더욱 자식에 자신을 맞추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올바른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맞지 않는 사이인데 서로에게 맞춰가는 일이 과연 그렇게 말처럼 쉬울 것인가. 모성애 부성애 말해도 결국은 인간이란 것이다. 개인이란 것이다. 괜히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물며 피로 이어진 관계도 아닌 그저 법적으로 이어진 입양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피로 이어진 사이라는 출발점에서도 결국 파탄나고 마는 경우가 현실에 저리 많은데 아예 남에서 부모자식이 되었다고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당신이 이 아이의 부모니 아이를 위해 모든 최선을 다하라 한다고 어차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그리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래서 지금도 아이를 입양할 때는 엄격한 심사를 통해 최대한 아이를 잘 보살필 수 있는 부모를 찾아주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도 심사과정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정작 입양을 하고 나니 여러가지로 사정이 달라지며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그리 많은 것이다. 아이를 길러보지 않은 경우라서도 그렇고, 입양이란 것을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라서도 그렇다. 입양하고 나니 아이와 생각보다 맞지 않으면 그것도 스트레스인 것이다. 그래도 부모니까 아이를 잘 보살피라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런다고 말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해외에서도 입양할 때 일단 일정기간 함께 살아보고 서로에 대해 더 이해하고 적응한 뒤에 입양을 결정하는 숙려제도가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부부가 입양을 원한다면 최대한 부부와 부모자식으로서 잘 맞는 아이를 선별해서 소개하는 것도 한 방법인 것이다. 이런 아이라면 진짜 자기 자식처럼 크게 불만없이 잘 보살필 수 있을 것이다. 

 

아예 친부모로부터도 부모노릇을 제대로 못하면 친권을 박탈하는 것이 현재 세계의 추세란 것이다.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모로부터 아이를 떼어놓지 않으면 안된다. 부모가 도저히 기를 수 없다 여긴다. 생각한 것과 너무 달라서 이대로 아이를 기를 자신이 사라진다. 아이가 자기가 기대한 것과 너무 달라 도무지 정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입양한 양부모들의 선의에만 맡겨서 그래도 열심히 잘 해보라 말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인가. 부모도 아이도 모두 행복할 수 있도록 최적의 조건에서 서로 잘 맞은 사이끼리 함께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입양한 양부모가 더 잘하면 된다. 그러니까 친부모도 그렇게 못하는 경우가 현실에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법으로 엄격하게 처벌해서 그러지 못하도록 하자. 그러면 아예 입양을 않으려 들겠지. 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정해도 지레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며 입양의 기회 자체가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다 쉽게 자신을 입양할 부모를 찾을 수 있도록 하면서도 그로 인해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한다.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해 볼 만한 문제인데 그냥 말꼬리 잡는 것도 그친다. 가운데 손가락이나 들고 있는 기자놈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가.

 

아무리 악인이라도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만들어 스스로 범죄자가 되고 싶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입양했는데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모로서의 역할이 생각과 너무 다르다. 혹은 자신도 알지 못한 폭력성향을 뒤늦게 발견했을 수 있다. 아예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입양한 것이 아니면 중간에 그럴 이유가 자신들에게도 생겨난 것이다.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 양부모에게 맡기고 잘하라 못하면 처벌하겠다 어르기만 하면 끝이 아니란 것이다. 인간의 선의에만 맡겨서는 안된다. 당연한 말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게 소비된다. 빌어먹을 것이다.

아마 정치나 시사관련 유튜버 혹은 블로거 가운데 공포나 증오와 같은 감정에 대해 나처럼 중요하게 깊이 파고드는 경우는 거의 드물 것이다. 정치와 시사란 단지 사실과 진실의 문제라 여기는 경우 공포나 증오와 같은 감정은 단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어떤 논리로써 그것을 타당하게 정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내가 아는 시사란 감정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과거 서프라이즈 이후 내가 천착해 온 문제이기도 했었다. 인간은 얼마나 이성적이고 감성적인가? 대중이란 얼마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존재인가?

 

그래서 공포나 증오와 같은 대중의 감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 온 만큼 그에 대해서도 민감한 편이었다. 당연히 수구진영에 대해서는 공포의 감정을 가지고 있고, 자칭 진보에 대해서도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본능처럼 가지게 되었다.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려가 없지는 않았다. 자칭 진보의 실체나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단지 나 자신의 편견과 오해가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고. 또 그를 근거로 예상하는 자칭 진보의 모습이란 나의 생각이나 믿음과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런데도 쓴다. 말했듯 나는 나에게 유리하게 글쓰기보다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쓰기를 선호한다. 그것이 내가 얼마 안되는 블로그 방문자들과 소통하는 방법이다. 차라리 내가 틀렸다면, 그래서 자칭 진보들에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정의연 논란이 남긴 개인적으로 가장 큰 성과인 것이다. 정의당이 시민단체의 내부사정에 무지하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칭 진보언론이 시민단체 내부의 문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오히려 조롱거리나 될 만한 주장인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당시 법과 제도 아래에서 어떻게 운영되어 왔는지 모르지 않는다. 정의연이 시민단체로써 어떻게 운영되어 왔는지 절대 모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떠했는가? 직접 정의연에 대해 취재하고서도 한겨레는 조선일보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정의당 역시 시민단체의 내부사정에 대해 모르지 않았을 터임에도 조선일보가 만든 프레임에 따라 윤미향을 공격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탈원전을 주장하던 자칭진보가 탈원전을 수사하겠다는 검찰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넘어 이미 청와대를 정권차원의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 집단으로 단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지게 된 확신이다. 김학의의 출국금지에 대해 국민의힘이 문제삼고 검찰이 수사하겠다는데 김학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모른 채 침묵하는 모습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내가 증오와 공포, 혐오와 경멸이라는 최악의 감정을 전제로 이해한 자칭 진보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검찰이 수사하니 문제이고 국민의힘이 문제삼으니 범죄다. 오히려 증오와 공포라는, 혐오와 경멸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전제하여 이해하고 예측한 자칭 진보의 모습이 더 현실에 가깝다.

 

틀리기를 바라면서 글을 쓰는데 사실로 맞아 떨어질 때의 느낌은 아마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틀렸을 것이라 여기며 감정을 배설하듯 글을 쓰는데 실제 그대로 이루어진다. 정의연 논란이 남긴 최대 성과일 것이다. 그  전까지는 증오와 공포라는 감정까지는 있었어도 사실이고 진실일 것이라는 확신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알게 되었다. 저들의 진보란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저들의 정의란 누구를 뒤쫓는 정의인 것인가? 조선일보가 앞장서고 국민의힘과 검찰이 주장하면 진실이 된다. 저들의 진보란 조선일보와 국민의힘과 검찰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긴 그래서 정의당과 한겨레는 그토록 조선일보를 의식하며 주장하고 기사도 쓰고 했을 것이다.

 

허무한 것이다. 스스로는 증오란 것을 알고 있다. 혐오이고 경멸이란 것을 스스로 느끼며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설마 틀렸겠거니. 그냥 편견과 감정에 의한 배설이겠거니. 그런데 사실이었다. 사실을 넘어 예언이었다. 월성원전에서 방사능이 누출되었다는데 오히려 자칭진보는 침묵하고, 김학의의 출국금지에 대한 검찰수사에도 철저히 침묵을 지키는 중이다. 저들에게 진보와 정의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내가 믿고 있던 진보와 정의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총선 때마다 민주당은 예외로 하고 진보정당에 표를 주어 온 나를 조롱하는 것 같다. 나는 과연 병신이었는가.

 

정의당의 진보는 조선일보가 판단한다. 한겨레의 진보 역시 조선일보가 판단한다. 그래서 진중권은 진보다. 홍세화도 진보다. 강준만도 진보다. 어째서 자칭 진보는 조선일보와 국민의힘을 저토록 의식할 수밖에 없는가. 굳이 반복할 필요 없이 그동안 지겹도록 떠들어 온 내용일 터이므로. 자칭진보의 현주소인 것이다. 그래서 뻔히 사정을 알면서도 정의연을 외면해야 했던 것이고, 그동안 주장해 왔음에도 탈원전은 범죄여야 하는 것이다. 김학의의 출국금지는 정권차원의 범죄이고 인권유린이어야 한다. 그래서 자칭 진보란 뭐다? 내 생각이 맞아서 더 열받는 것도 생소한 경험이라 하겠다. 

역대 로마의 황제들이 굳이 이집트로부터 로마로 밀을 배에 실어 날랐던 이유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하는 일 없이 먹고 놀며 애낳는 일만 하는 잉여들이라 해도 그들은 로마 시민들이었다. 가진 것 없이 그저 황제만 바라보며 손을 벌리는 무지렁이들이라 해도 그들의 지지가 있어야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정통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굳힌 정통성과 권위로 로마 황제들은 마음껏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황제자리에서 내쫓일 때까지.

 

복지란 과연 시민의 권리인가? 아니면 권력의 시혜인가? 시민의 권리로써 마땅히 국가가 져야 하는 의무인가? 아니면 권력의 선의로써 국민에게 베푸는 은혜인 것인가? 바로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권력이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선의로만 국민들에 굳이 자기의 부를 헐어가며 무언가를 베풀 이유가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렇게 국민들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환심을 샀으면 그 다음은 무엇일 것인가? 복지와 포퓰리즘이 분리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를 통해 더욱 국민의 권리를 강화해 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단지 권력자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만 쓰려 할 것인가?

 

포퓰리즘의 유래가 된 페론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도 대중에 영합하여 얻은 권력을 부정부패와 전횡과 독재를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론은 대중주의자이기는 했어도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 차이인 것이다. 민주주의란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의 권리이고 의무이고 책임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보편의 권리를 위해 반대급부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더 많은 지지와 그로 인한 더 큰 권력과 그에 뒤따르는 더 큰 부와 같은 것들이다. 대중의 마음을 사는 정책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 쓴다면 그것은 진정 대중을 위한 것이겠는가. 그래서 시혜가 되는 것이다. 특정한 권력자가 대중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어떤 일들을 해주었다. 

 

바로 이 말이 핵심인 것이다. '해 준다'. 원래는 안그래도 되는데, 굳이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직접 이루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포퓰리즘에서 복지란 개인에 대한 숭배와 지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페론주의인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구성원들 사시에 합의된 보편의 상식과 가치와 정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페론 대통령 개인, 혹은 에바 개인의 선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만든 것은 페론의 부패와 독재를 문제삼아 쿠데타를 일으켜 내쫓은 이후의 정체세력들이 그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 더 클 것이다. 페론이기에 가능했다. 에바이기에 가능했다. 그들만이 진정 우리를 위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다시 불러들여 원래의 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이 모습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수구진영에서 복지에 대해 반대할 때마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반박의 근거다. 대부분 복지정책들은 박정희가 먼저 시작했었다. 의외로 현대의 대부분 사회보장정책들은 독일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국민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면 기득권에 비판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나설 여지가 줄어들고 더불어 막 통일을 이룬 독일제국의 단합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박정희 시절이 살기 좋았다 추억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생활보호정책 덕분에 동사무소에서 받아온 쌀과 밀가루로 연명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는 것이다.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어지는 의료보험증도 꺼리지 않고 받아주던 돌팔이 동네의원도 기억한다. 왜 그랬겠는가? 어쩌면 가난한 이들이 더 권위주의적인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으니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이 아니더라도 알량하게 주어지는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정책에 의한 것이 아닌 개인의 동정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들이라도 그 차이를 깨닫기 힘들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 가난한 이들이 더 보수적으로 더 권위주의적으로 더 자유지상주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보편적 복지에 더 반대할 수 있는 이유는 부를 독점한 이들이 알량하게 베푸는 자선에 있는 것이다. 저들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자신들을 위해서도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는 돈보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가난한 이들이 지지한 결과로 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복지고 포퓰리즘인 것이다. 그래서 시민의 권리이고 대중에 대한 영합인 것이다. 결국에 포퓰리즘은 권위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 문재인 대통령이기에 노동자를 위해, 자영업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만이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준다. 문재인 대통령이 더이상 대통령따위 않겠다 해도 이래서야 대중에 의해 다시 끌려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다. 시민의 보편적인 권리여야 한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지난 4년 좀 안되는 시간들을 되돌아 보라. 당시 언론들은, 정부와 여당은 무엇이라 떠들고 있었는지.

 

정의당이라서 해주는 것이 아니다. 정의당만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이고 정치권이 져야 할 책임이기에 정의당이 앞장서는 것 뿐이다. 바로 여기서도 정의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드러난다. 정의당과 자칭 진보들은 자신들의 선의를 대중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리 서운하고, 민주당은 굳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어찌되었거나 이룰 것은 이루려 한다. 어째서 진보적인 대중 상당수가 정의당이 아닌 어차피 똑같이 한 줌에 불과했던 노무현과 문재인을 지지하여 뭉치게 된 것인가. 이념적으로 나같은 경우 노무현이나 문재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도, 그래서 심지어 노무현과 문재인을 때때로 심하게 조롱하고 비난하기도 했음에도 끝내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당은 무산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정당이고, 친노친문은 당연한 시민들과 보편적인 과제들을 함께 해내가는 진영이기 때문이다. 친노친문이 자칭 진보들 보기에 극성맞을 정도로 적극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정의당과 민주당, 정확히 이제는 민주당의 주류가 된 친노친문의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엘리트주의와 진정한 대중주의다. 대중영합적 엘리트주의와 대중이 중심이 된 대중주의의 차이인 것이다. 그래서 때로 답답할 정도로 보편과 타협을 중시하기도 한다. 개새끼 씹새끼 욕하다가도 어느새 같이 손잡고 연대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그를 위한 과정이다. 민주주의란. 노무현이 무언가를 해주었다? 문재인이 무언가를 해 주었다? 그게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과제들을 그들이기에 대신해 이루어 준 것이다. 그래서 보편인 것이다.

 

하필 오세훈이가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바람에. 더구나 바로 직전 정의당이 정부의 거리두기 연장을 비판하는 논평을 보고야 말았다. 오세훈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리고 정의당이 정부의 거리두기 연장을 비판하며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법안들을 보았다. 무엇이 복지이고 무엇이 포퓰리즘인가? 무엇이 시민의 권리이고 무엇이 대중에 영합하는 것인가? 정의당이 내놓은 대안이라는 것이 과연 그같은 보편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인가? 원래 쓰려던 내용과 그래서 조금 벗어나고 말았다. 민주주의의 근본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어째서 복지이고 포퓰리즘인가?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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