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는 명분, 다른 하나는 힘이다. 명분이 없으면 단지 폭력일 뿐이고, 힘이 부족하다면 공리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북핵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명분과 그를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한 마디로 그럴 수 있는 명분도 그럴만한 힘도 가지지 못했기에 정작 당사자이면서도 그동안 주도적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북핵문제가 지금처럼 어렵게 꼬여버린 이유 역시 명분과 힘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된 현실 때문이었다. 북한이 대화를 요구하는 것은 실질적인 힘을 가진 미국이다. 미국은 언제든지 무력으로 북한정권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이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인질처럼 잡혀 있는 대한민국의 존재 때문이다. 대한민국이야 말로 원래 북한과 역사적으로 한나라를 이루어왔던, 한때 참혹한 전쟁까지 치렀었고, 지금까지도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직접당사국이다. 그렇더라도 전략적인 가치가 그다지 높지 않다면 그냥 포기하면 될 텐데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군사대국을 그런 식으로 쉽게 함부로 포기한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실은 미국의 직접적인 무력응징을 원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응징하는 순간 자칫 파멸적인 전쟁으로 다시 대한민국 전체가 휩쓸릴 수 있다.


북핵문제는 대화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방법을 쓰면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을까? 하지만 북한 자신이 대한민국을 원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런 북한을 강제로 협상테이블로 끌고나올 힘을 대한민국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명분은 있는데 그 명분이 북한에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동안 김영삼부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까지 매번 방법을 달리하며 북핵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온갖 삽질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직접적인 수단을 가지지 못한 채 강경하게 대응한다고 하는 수준이 미국의 전략적 인내를 등에 업고 말뿐인 강대강 대치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북한에 유화적인 태도로 다가서서 대화를 시도해봐야 뒤에 있는 미국이 호응하지 않으면 그 또한 아무 의미없는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미국의 힘과 대한민국이 가진 명분을 최대한 일치시킬 것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미국을 설득해서 대한민국의 전략이 미국의 전략이 될 수 있도록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더구나 국내정치적인 문제도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유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의 지지가 곧 정부의 힘이고 국정의 동력이 된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데 정부가 힘을 가지고 일관되게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도 그런 정부의 주장에 크게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정권이다. 언제 선거에서 져서 정권을 내주고 교체될지 모르는 정부다. 괜히 인기도 없는 정부와 협상이라도 맺었다가 그것이 다시 무효화되거나, 아니면 그로 인해 국가간 관계가 훼손된다면 손해가 막심이다. 하물며 북핵문제와 같은 중대한 사안에 있어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예상할 수 있는 일관되고 합리적인 최대한 변수를 배제할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같은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국민의 여론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국민이 불안해하고 필요하다 여긴다면 그대로 따라준다. 


그동안도 몇 번이나 강조해 말했던 가치부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사드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드의 배치가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 가장 중요한 힘을 가진 미국이 요구하고, 국내 여론 역시 사드배치에 호의적이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그것도 이전보다 비약적으로 파괴력이 높아진 실험결과로 인해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최대한 북한의 핵무기가 대한민국 국민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정부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사드는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무기라기보다 정부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배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을 달래고 국민을 안심시킨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이며, 국민들에게도 미국과 함께 북핵문제에 단호히 대처할 것임을 천명한다. 국민이 마음놓고 정부를 지지하며, 대한민국이 자기 동맹임을 미국이 믿고 신뢰하게 된다면 바로 그것이 한반도에서 북핵문제를 정부가 주도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미국과 보조를 함께 하며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을 설득하고 나서는 작업을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결국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미국의 힘이고, 대한민국이 가진 직접당사자로서의 명분이다. 물론 나름 경제강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의 대한민국의 지위도 그다지 허투루 여길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일본의 아베 총리와도 그래서 첨예한 과거사문제를 잠시 뒤로 하고 북핵문제 해결을 최우선과제로 협력을 강화하겠다 선언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야 어쨌든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뭉친 동아시아 군사동맹의 중요한 한 축이다. 일본을 배제하고 미국하고만 동맹을 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더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다. 일본과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해야 미국과의 관계도 원만해질 수 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불협화음도 최소화할 수 있다. 정확히 미국을 향한 메시지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이만큼 중요한 과거사 문제까지 양보해가며 북핵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할 모든 각오와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미국의 이익을 거스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가 강력해지면 대한민국의 행보는 곧 중국과 러시아에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만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부담을 덜고자 할 때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어찌되었거나 미국 없이 북핵문제의 원만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국내적인 문제 역시 순리대로 풀어가기가 어려워진다.


중대한 상황이다. 그야말로 비상상황이다. 수소폭탄이면 이미 준전시상태라 봐야 한다. 서로 총알이 날아다녀야 전쟁이 아닌 것이다. 군대는 그 전쟁을 치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지 군대가 전쟁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비상상황에서는 비상의 대책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정부가 주도권을 잃지 않고, 필요한 명분과 힘을 확보한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현재의 심각한 상황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이 일어나면 인신과 물자 역시 정부의 의지에 의해 임의로 징발하게 된다. 때로 전쟁의 승리를 위해 일시간 국내의 치안과 질서를 억압적으로 통제하기도 한다.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드배치에 대한 개인의 판단이란 이같은 엄중한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도 나는 사드는 그다지 실전에서 쓸모가 있는 무기가 아니라 여기고 있다. 성능은 어떨지 몰라도 대한민국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 그로 인한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부담 또한 작지 않다. 그러나 필요하니까. 결과적으로 필요하다 여겨지니까. 그런 점에서 지지가 아닌 용인이다. 정부가 하려는 목적을 위하 그같은 수단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정부를 지지하기에 그 필요성도 인정하게 된다.


모순되지 않다. 무엇을 위해 사드를 배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사드를 어디에 쓰려 무리하게 배치하고 있는가 하는 단순한 물음이다. 과거의 용도와 지금의 용도가 다르다. 과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 정부가 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전과는 전혀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미운 건 그래서 북한이다. 그놈들이 다 망쳐놓았다. 지금으로서는 북핵문제 해결이 최우선 과제다. 그만큼 절박하다.

이를테면 조선을 건국하며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신진사대부들 또한 권력을 잡으면서 앞세웠던 명분이 바로 도덕이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이전의 권문세족들과는 다르다. 온갖 특권을 누리며 부패와 타락의 끝을 보여주었던 고려의 지배층과는 다르게 자신들은 세상과 백성들이 더 나아지게 만들고자 하는 고매한 이상과 고결한 의지로 무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보아라,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얼마나 도덕적이고 아름다운가를.


그래서 과연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주장한 만큼 도덕적이고 이상적이었는가. 물론 고려의 귀족들보다는 나았다. 제도나 실천에 있어 분명 고려의 귀족들보다 상당히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다. 하지만 권력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 조선을 건국할 당시만 하더라도 사방이 적이었고 기반 역시 확실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고 지배권력 역시 확고해지자 조선의 지배층 역시 고려에서와 같은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부패를 답습하며 보여주고 있었다. 권력을 이용해서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그렇게 모인 부를 사용해서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렸다. 다만 전제는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집 대문밖을 나서서는 안된다. 담장 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처럼 엄격하게 성리학의 윤리를 지켜서 엄숙하고 고결한 삶을 살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봉건적인 귀족신분을 밀어내고 새로운 유럽사회의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르주아가 주장한 것은 보편적인 가치와 원리였다. 오로지 귀족들에게만 독점되어 있던 모든 특권들을 해체하여 나누기 위한 수단으로써 특정하지 않은 보편의 다수가 일반적으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가치와 원리를 주장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자유로워야 하고 평등해야만 한다. 한 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대중들은 이전의 부패하고 타락했던 귀족들과는 다른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완결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또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의 부르주아들은 이전의 귀족들과 다르게 엄격하고 엄숙한 도덕을 실제로 지키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지배하게 된 명분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과 실제 행동을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 모두가 알게끔 하지만 않으면 된다.


도덕이 새로운 지배의 수단으로 등장한 이래 그것은 하나의 일관된 패턴이었다. 중국의 공산당은 아니었을까? 일본의 유신지사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단지 그만한 권력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에 미처 타락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뿐이었다. 권력이 있으면 쓰고 싶다. 돈이 생기면 당연히 자신을 위해 마음껏 쓰고 싶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도덕적이란 것은 절제와 금욕을 전제로 한다.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대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들 모르게 - 물론 모두가 알지만 공식적으로는 없는 공공연한 사실로써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린다. 정치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일삼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신들의 지배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명분적인 도덕을 강화하게 된다. 근대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를 위선사회라 일컫는 이유다. 겉으로는 엄격하고 엄숙한 도덕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이전의 귀족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러 억눌린 만큼 기괴하게 비틀린 타락과 부패를 저지르고 있었다.


조선시대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나 이후의 군사독재 역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사회였다. 그런데 그 구분은 명확하지가 않았다. 고려의 귀족처럼 단지 혈통만으로 상속되던 것이 아니었다. 조상이 양반이라고 양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친일파의 자식이라고 역시 친일파로써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대한민국이 성립한 뒤에는 아예 그런 구분조차 모호하게 단지 지배권력과 피지배신민이라는 현실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배권력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자신들에 의한 지배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처음에 그것은 반공이었고, 그 다음에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내세웠던 것이 조국근대화였다. 이름은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가정의례준칙이라고 조선에서 상조하던 주문공가례와 비슷한 것이다. 이전의 미신과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도덕적 규준을 세우자. 단순히 힘으로 누르는 것만이 아닌 개인의 행동의 원리인 도덕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였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이 미개한 나라를 더 낫게 더 잘살게 만들겠다. 물론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뒤에서 했던 행동들은 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박정희에 대해 직접 겪었던 당시의 세대들과 그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뒷세대의 인상과 평가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는 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대중들에 노출된 박정희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도덕의 화신 그 자체였다. 아직도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에 대한 신화가 당시 대중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유 역시 그 연장에 있었다. 농민들 사이에서 함께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는 소탈하고 검박한 서민적인 모습과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현실 위에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삶만을 걱정하는 초인적인 모습이 있었다. 박정희 자신이 주장하고 대중들에 강요하고 있었던 새로운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항상 부지런하게 검소하게 성실히 열심히 일만 하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자신마저 돌보지 말고 희생적으로 노력하라. 개인의 욕망은 부정한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이기를 추구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해악이다. 물론 그 욕망과 이기에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욕구 역시 포함된다. 개인이란 단지 국가와 국민이라고 하는 더 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물론 그 국가와 국민은 박정희 자신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의 후계자인 전두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박정희와 전두환의 권력이 살아있던 1980년대는 어쩌면 그나마 나았는지 모르겠다. 왜냐면 그때는 박정희와 전두환 등 독재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바꾸고 지울 수 있었으니까. 차라리 향락과 퇴폐를 통해 국민이 현실을 잊을 수 있으면 자신들을 위해서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같은 절대권력이 해체되고 다양한 현실적인 위협들 앞에 노출되고 난 뒤였다. 이를테면 전제주의 시대의 귀족이 근대산업사회의 부르주아로 내던져진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지금껏 누려온 권력과 권위만큼은 순순히 내놓을 수 없다. 그러니까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와 관련한 논란은 1990년대 IMF사태가 터지기까지 개인이 최대의 자유를 누려가던 전환기에 일어난 상징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서태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서태지와 마광수의 차이라면 이후 한국사회의 새로운 주류가 된 이들 역시 여전히 이전의 도덕적 엄숙주의를 답습함으로써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권위와 권력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도덕적 엄숙주의에 있어 성이란 가장 흔하고 쉬우면서 명징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기존의 구태적 관습과 도덕을 비웃으며 도전하던 인터넷 여론이 자신들만의 도덕과 정의를 앞세워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도 그런 연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초창기 네티즌이란 전체 대중 가운데 소수였고 당연히 주변에 머물고 있었다. 주류의 매체 가운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드물었고 실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저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들끼리만 나누던 무엇이었지 실제 현실에서 의미있게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만큼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무책임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 모인 개인의 수가 늘어나며 자신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현실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자신들에게 유의미한 권력이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혹시라도 훼손되지 않도록 지킬 것인가. 끊임없이 먹잇감을 찾으며 그 희생양을 통해 자신들이 가진 힘을 확인하고 모두가 두려워하게끔 만든다. 타진요는 물론 지금도 끊이지 않는 인터넷과 관련한 논란들이 바로 그를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인터넷은 이미 권력이다. 권력의 속성을 닮아가고 있다. 자기들만의 규준을 만들고 그 규준을 잣대로 타인을 억압한다. 현실과 유리될수록 사실과 분리될수록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권위를 증명하게 된다. 타인을 희생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은 증명된다. 주체는 달라졌어도 권력의 속성은 언제나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는 어느서나.


마광수 교수가 억울하게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영영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인 것이다. 하필 1990년대였다. 권력의 교체기였다. 그리고 마광수 교수가 복권을 시도했을 때는 새로운 권력이 자신들의 도덕을 과시하고 있던 때였다. 갑질이 아직 우리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다. 수직적 권력과 권위에 더 익숙하다. 새롭게 주류가 된 계층들 역시 자신들을 권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도덕은 권력의 힘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을 사회를 혼란케 하고 결국 자신들이 가진 권위와 권력마저 위협한다. 더구나 1992년이면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노골적인 성애소설들이 다수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던 무렵이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마광수의 소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오죽하면 마광수 교수가 구속되고 호기심에 소설을 구해 읽었던 이들이 표현의 수위에 실망을 토로했겠는가. 이후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모습이란 소설의 내용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긴 어쩌면 소설 '즐거운 사라'의 주인공이 여성이어서 문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남자들이 주고받는 일상의 대화는 그보다 더 노골적이었고 다수 남성들의 사생활 또한 그보다 더 퇴폐적이었으므로. 일상에서 그런 것들은 당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광수 교수의 현실이 현실의 도덕률을 배반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마광수 교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인가?


당시도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마광수 교수가 죄인이 되어야 했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 물론 머리로는 안다.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어째서인가? 왜 마광수는 그런 실망밖에 주지 못하는 소설을 이유로 죄인이 되어 낙인이 찍히고 주류사회로부터 영영 내쫓겨야 했었는가. 그에 동참했던 시민들이 있었다. 여전히 그에 가담하고 있는 개인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을 이유로 마광수를 죄인으로 만들고 지금까지 그를 놓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현실 또한 당시와는 크게 달라졌다. 사람들이 겪는 일상은 그때와 전혀 달라져 있다. 이제는 사실이 아닌 인상만이 남았다. 소설 '즐거운 사라'도 없고 그저 소설을 쓰고 죄인이 되었던 '마광수'라는 인상만이 남았다. 아직도 논란은 남아있다.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태어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세상과 이별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자유주의란 스스로 존엄하고자 하는 정신이다. 삶이 그를 존엄하게 할 수 없다면 존엄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순간은 스스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울한 한 시대가 그렇게 스쳐지나간다.

지금 북핵문제해결에 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심지어 중국마저도 정작 북한을 말릴 어떤 방법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유신정권 말기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정작 미국 카터행정부가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인권유린을 문제삼고 나오자 미국과의 관계단절마저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한민국의 안위보다 정권의 보전이 우선이다. 북한도 같다. 아무리 중국과 혈맹이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더라도 김정은의 권력보다 그것이 우선하지는 않는다.


김정은이 김정남을 무리한 수단을 동원해서까지 공개리에 암살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중국이 김정남을 앞세워서 자신을 끌어내리려 할지도 모른다. 김정남이라면 김정일의 장남이니 그럴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 권력기반이 부실하다. 창업군주인 할아버지와도 오랜 후계계승작업을 거친 아버지와도 다르다. 무엇보다 지금의 자리에 오르는데 측근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군부의 지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다. 당장 자기 주변의 눈치부터 봐야만 한다. 그것이 김정은의 행동의 폭을 좁히는 역할을 한다. 중국이 뭐라 하든 김정은은 이대로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결국 남은 방법은 김정은 제거 뿐인데 이것 역시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군사적 행동은 자칫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친중인사들을 이용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더라도 김정은의 제거가 북한지도부의 제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자칫 북한이 내전에 빠져들기라도 한다면 그 여파는 한국에까지 미치게 된다. 가장 확실한 것은 한국정부의 동의 아래 미국과 함께 평양을 타격하여 조기에 김정은과 수뇌부를 제거하고 중국이 지도부가 사라진 북한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 중국은 패권국으로서 자신의 동맹을 적국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명분적인 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오랜 혈맹이던 북한 정권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그만한 보상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문재인 정부에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타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일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지금 정부로서는 시간을 벌고 있는 중이라 말할 수 있다. 조기에 북한의 지도부를 타격하여 제거하고 혼란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최소한 그럴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북한의 미사일도발 이후 정부가 보여온 일련의 행보들이 말해주고 있다. 군사적 옵션도 아주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인내하지만 그 인내가 무한하지만은 않다. 그 사실을 한국 야당과 보수언론들만 모르고 있다. 만에 하나 군사적 행동을 취하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조기에 사태를 수습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 그 결과는 북한에 친중정부가 들어서며 영구히 북한과의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쉽다.


문재인 정부만을 탓할 수는 없다. 이제 더이상 말로는 누구도 북한을 달래수도 설득할수도 없다. 북한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이상 남은 방법은 없다시피 하다. 물론 중국이 제제에 동참하면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체제가 더이상 희망없는 위기로 내몰리게 되면 어떤 선택을 할 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또하나 불안요인으로 남는다. 중국에게 바라는 것은 제제의 동참이 아닌 그를 통한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실력행사다. 중국에게도 무리한 요구라는 것이 현재 난맥의 가장 큰 이유다. 또다른 가능성은 미국이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꾸는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일 테고. 답답하다.

봉건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다름아닌 토지에 대한 예속의 정도와 강도에 있다 할 수 있다. 봉건사회 이전에는 농업의 생산성 자체가 그다지 높은 편이 못되었었다. 어차피 농사에 불리한 지역이라면 죽어라 땅만 파기보다 다른 일을 해서라도 식량을 사들일 재화를 만드는 편이 유리했다. 아니면 무기를 들고 남의 것을 빼앗던가. 당연히 근대 이후에는 공업의 생산성이 농업의 생산성을 한참 앞지르고 있었다. 더이상 토지에 집착하기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아 나서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면 그같은 생산수단의 차이가 어떤 식으로 사회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가.


일단 모든 사고와 행동이 토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일단 땅만 지키면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다. 농사만 제대로 지을 수 있으면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 불확실한 다른 수단에 기댈 필요 없이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땅을 지키며 어김없이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 새벽같이 일어나 들로 나가 해가 저물 때까지 밭을 갈고 김을 맨다. 봄이면 밭에 씨를 뿌리고, 여름이면 김을 매고 벌레를 잡고, 가을에는 익은 열매를 수확해서 저장한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대로 물꼬를 내고, 배가 내리지 않으면 개울이며 저수지를 찾아서 물을 퍼다 나른다. 자신의 삶이 아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다. 토지가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이 토지를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이 시기 아이를 많이 낳는 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한 노동력확보의 의미가 더 컸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아내가 임신해서 낳았던 자신의 소유인 자신의 아이여야 했다.


즉 봉건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이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았었다. 목적으로서의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았었다. 목적은 오로지 토지였다. 나를 먹여살리고 집단을 먹여살린 토지를 위해 모든 것은 존재해야만 했다. 그러면 그 토지를 위해 존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농경사회에서 일찌감치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나타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그저 농민들이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 농민이 자신을 수단으로 삼아 토지라고 하는 신을 마음껏 경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면 되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어느 농민은 격양가를 부르며 왕을 능멸했던 것이었다. 정확히 농민이 격양가를 부를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고대 군주들의 역할이었다. 일일이 농사 이외의 일에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끔 역할을 지정하여 토지와 함께 세습케 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였으므로 다수인 농민들이 그 토지를 세습하고, 정확히 토지에 예속되어 세습되고 그 농민들을 위해 정치와 군사등의 역할을 맡을 특권계급이 생겨났다. 사회만이 아닌 가정내에서도 모든 구성원들은 남성인 가장을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 아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되어야만 했었다. 바로 엄격한 사회적 위계 - 다시 말해 신분제의 출현이었다.


시민사회는 봉건사회와 반대라 보면 되었다. 시민사회의 시작은 오히려 봉건사회보다 일렀다. 첫문단에서 말한 어차피 농사만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아나서야 했던 탓이었다. 생산에 불리한 지역에서는 일찌감치 물물교환의 필요성에 눈뜨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토지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혁명 이후 공업의 생산성이 농업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은 뒤에는 굳이 토지가 아니라도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한 수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역량으로 얼마든지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공업자로써 자기가 더 나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고, 상인으로써 더 나은 거래처를 찾아서 더 비싸게 많이 팔 수 있다면 굳이 토지에 예속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더 많은 부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중요하다. 더이상 자신이란 다른 무엇에 예속된 존재가 아닌 주체이며 목적인 존재로써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시민계급이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을 존재케 하는 것은 정부도 권력도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근대의 시작이 곧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의 근대적 사고의 등장과 발전, 확산과 비례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곧 시민들 자신이 공동체의 주체이고 주인임을 선언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제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억압하고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없다. 시민의 성장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자본주의의 새로운 생산양식이란 이전의 봉건적 생산양식과 그만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가.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니 이미 인클로저를 통해 지주들 자신이 더이상 농민을 토지에 예속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토지의 주인이었던 농민들이 신분을 바꾼 지주들에 의해 토지로부터 내쫓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도시의 공장들은 더 심각했다. 그래도 봉건적 농경사회에서는 토지를 경작할 수단으로써 농민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후손을 번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보장해주고 있었다. 농민이 하나 죽는 것은 노동력을 하나 상실하는 것이었다. 농민이 자식을 하나 더 낳고 못낳고는 노동력 하나가 더 늘고 주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더 많은 생산을 위해서도 농민들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고 후손을 번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지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말하는 도덕적 지배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통사회에서는 토지를 중심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유기적 연결이 자본가에 의해 강제로 단절되고 있었다. 농민은 토지에서 쫓겨나고 공장노동자 역시 사용자의 변덕에 의해 얼마든지 일자리를 잃을 수 있었다. 결국 달라진 환경은 이전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강제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와 농민 자신도 자신의 노동력을 수단삼아 도시의 부르주아들과 대등해지거나, 아니면 이전의 봉건주의로 회귀하거나.


이를테면 산업화된 사회에서 더이상 노동자의 노동력은 중요한 생산수단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임금노동자가 아니더라도 기계가 더 많은 생산을 가능케 해준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토지 대신 공장의 기계에 예속되어 불안정한 고용 아래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현실이 펼쳐진 것이다. 결국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공장 등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을 때 노동자도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과거 봉건사회에서처럼 더이상 내쫓기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대를 이어가며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더라도 여전히 계속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용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더 확장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회 상층부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운명도 이익도 결정된다. 그들 결정권자들에게 잘보임으로써만, 그들이 베풀 자비에 기대해서만 그들은 자신의 현재와 내일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 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짐에 따라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돈을 버는데 노동자들은 여전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입만을 얻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도 줄어들고 갈수록 불안해진다. 자신이 가진 노동력만 믿고 자본가들과 경쟁하기에는 현실의 조건이 너무 열악하다.


중세에도 봉건적인 장원과 자유로운 도시가 공존하고 있었다. 토지에 예속된 농노와 자유로운 시민이 같은 시간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진보란 결국 사회의 엄격한 위계를 부정하는 개인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더 합리적으로 더 자유롭게 하라. 그 전제는 오로지 인간으로서 개인의 존엄이며 이성이고 양심일 터였다. 그에 비하면 보수는 이제까지의 엄격한 사회적 위계를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역시 언제나처럼 전과 같은 곳에서 같은 지위와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 같은 삶을 보장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일 없을 것이다. 원래 봉건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일 역시 지금처럼 영원할 것이라 여겼었다. 현실을 불변하고 결정된 것이다. 개인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가장 오랫동안 봉건적인 인습 아래 살아왔던 일본과 독일에서 장인정신이 크게 발달한 것도 의미심장하게 볼 필요가 있다.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주어진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그 밖의 것은 자신이 신경쓸 일도 관심을 가질 일도 아니다. 그것이 현대라고 하는 공간에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얼마든지 자기 실력으로 자기 한 몸, 혹은 자기 가족 먹여살리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라 여기는 자신감과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진보와 보수로, 특히 진보가 더 계급적 이익과 일치하는 이들에게 보수를 강요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냥 유럽 근세사를 뒤적이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다. 바로 막 떠오른 아이디어라 두서없고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다만 근대 유럽에서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그를 통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의 사상적 변화가 일어난 과정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생산양식의 변화가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바뀌게 한다. 어째서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이들보다 더 보수적인가. 나도 사장한데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이제 잘리면 갈 데도 없다. 사장이 하는 말과 행동은 무조건 옳다. 어쩌면 진실은 단순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어째서 블로그 글쓰기버튼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로그인도 일부러 티스토리 홈페이지로 우회해서 해야만 한다. 글쓰기 역시 홈페이지로 우회해서 관리화면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할 수 있다. 어지간히 쓰고 싶지 않으면 그다지 감수하고 싶지 않은 귀찮음이다. 이유와 해결법을 아시는 분은 도움을 좀 주시길. 어차피 요즘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글 쓸 시간이 없기는 하다. 책은 많이 읽고 있다. 생각만 많아진다.

철근이 휘어졌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완전할 수는 없다. 한 번 휘었던 흔적은 분명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그럼에도 결국 반대로 한 번 더 휘어야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다시 되돌릴 수 있다.


똥을 뿌렸다. 사방에 있는대로 똥물을 뿌려놓았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청소하는 것도 결국 인위가 아닌가. 청소하는 것도 원래의 자연스러움을 왜곡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라. 자신들이 더럽혀놓은대로 내버려두라. 자기들이 똥을 뿌린 행위와 그 똥을 치우려는 행위를 같은 것으로 놓는다. 정연주가 부당하게 권력에 의해 내쫓긴 것과 김장겸이 그동안 해온 일들로 인해 방송국의 기자와 아나운서, pd들의 분노를 사서 내쫓기게 된 상황을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하긴 kbs의 경우는 틀리지 않다. 그래서 나는 KBS를 언론취급하지 않는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노조가 나서서 정연주 쫓아내고, 이제는 문재인 대통령 되었다고 고영주를 쫓아내려 한다. 그 새끼들은 진짜 박형준과 똑같은 수준이다.


아무튼 차라리 모르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인다면 이해라도 한다. 어디 공원이나 지하철에서 배운 것도 없는 노인네가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며 목소리를 높인다고 뭐라 따져물을 수 있을까?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없어서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는데. 하지만 많이 배웠으니까. 그만큼 아는 것도 많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배운 바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태연히 먹히지 않을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혹시라도 그에 현혹될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면서. 그냥 사기꾼이다. 저런 놈이 대학교수씩이나 하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가지는 이미지가 그렇다. 지식장사꾼.


자기들이 언론을 망쳐놓은 것도 이전 정권애서 그랬으니까. 자기들이 망쳐놓은 언론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도 외부의 강제와 인위에 의한 것이니 자기들이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들은 똥을 뿌려도 되지만 너희들은 세제도 뿌려서는 안된다. 하다못해 물을 뿌려 그것을 씻어내려 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개새끼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는 순간 너희도 개새끼가 된다. 유시민이 어이없어 한다. 그렇게 황망한 표정은 참 오랜만이다. 되도 않는 헛소리인데 과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문재인이 직접 나선 것은 없었다. mbc 파업에 정부가 직접 나서서 어찌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지부진했다. 유시민의 말마따나 김장겸 하나 쳐내는 것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정부가 아닌 언론 스스로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mbc 구성원 자신들이 나서서 먼저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mbc구성원들이 바라는 바대로 정부가 나서서 도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정부의 의지가 직접 개입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정부가 바라는대로 될 테니 정부의 의지가 개입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명박 정권 때 그따위로 언론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언론이란 권력의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전리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열쇠를 채우는 것이다. 너희는 정의로우니까 우리처럼 그러지 말라.


저놈들의 뻔뻔스러움이다. 훔친 물건을 다시 주인에게 되돌리는 것도 자기들이 소유한 것을 빼앗는 강제다. 이쪽이 훨씬 비유로써 적확하다. 물건을 훔쳤지만 이미 내가 소유하고 있으니 그것을 몰수하는 것마저 강제이고 약탈이다. 너희는 그러지 말라. 하필 며칠 전 그와 관련해서 쓴 적 있었다. 한계에 이른 계급이 어떤 식으로 새로운 계급과 맞서싸우는가. 자기들은 지킬 수 없지만 너희는 지켜야 한다. 국민이 병신이면 통했을지 모르겠다.


아, 진짜 저 새끼 보기 싫어서 썰전도 망설이게 되네. 유시민이 너무 점잖다.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저런 개새끼는 좀 자근자근 밟아줄 필요가 있다. 방송이라는 것을 십분 이용한다. 호로잡놈의 새끼다. 더 심한 욕은 차마 나의 체면땜에 하지 못하겠다. 욕나온다.

그래서 말했잖은가. 국민의당의 정체성은 반문재인이라고. 문재인 싫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었다. 아니더라도 국민의당에 몸담은 이상 문재인을 싫어해야만 한다. 얼만큼? 어디까지? 최소한 이명박과 박근혜보다 더 문재인을 싫어할 정도로.


이명박을 편들어서가 아니다. 이명박에게 진짜 아무 잘못도 없다 생각해서가 아니다. 문재인이 하니까. 문재인이 그러겠다니까. 그러니까 문재인이 하려는 것은 모두 나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철수와 국민의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더이상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까지 노무현과 문재인을 싫어하는 유권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그런 게 정치다. 권력을 가질 수 있으면 무엇이라도 한다. 마누라도 팔고, 자식도 잡아먹고. 이념이나 신념따위야. 다른 사람도 아닌 권은희다. 그 권은희에게 저런 발언을 시키는 것이 안철수의 한계다. 처참한 수준이다. 여러가지로 많이 웃게 된다.

그러니까 나도 가끔 주식투자를 해볼까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하나 잘 물어서 몇 배의 수익을 얻었다는 사람이 있으면 솔직히 부럽다. 빚까지 내서 투자했는데 그 수익이 몇 배나 되었다. 사실 그래서 주식에 덤벼들었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건너건너 얻는 것은 내부정보가 아니다. 그런 정도의 정보는 시장에도 넘쳐난다. 그런 정보에 놀아났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골라서 성공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같은 사람한테나 2억이 큰 돈이지 직업이 변호사쯤 되면 사실 그리 큰 돈도 아니다. 이유정 자신도 변호사고 남편이 판사인데 법복 벗고 변호사로 개업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과연 당시 이유정 후보자의 주식거래가 명확히 내부정보에 의한 불법적인 것이었는가.


이유정 후보자에게 아무 잘못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과연 명백히 밝혀진 구체적인 잘못이 무엇인가 묻고자 하는 것이다. 정황은 있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관계는 없다. 네추럴엔도텍과의 관계도 정작 네추럴엔도텍의 주식을 매도한 시점에서 비로소 수임한 사이이기도 했었다. 의심은 있는데 증거가 없다. 그러면 계속 의심해야 하는가? 증거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가? 주위에 하도 주식으로 돈벌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유정 후보자도 그닥 알려진 것 만큼 크게 이익을 보지 못한 것 같다는 점에서도 조금 더 두고 볼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한두번은 크게 성공하기도 한다. 서너번도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과연 지속적으로 주식거래를 통한 이익실현이 가능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잘못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조선일보가 잘하는 짓이다. 이번 정부 들어서도 매 인사마다 언론들이 반복해서 해오던 짓거리다. 수많은 의혹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진짜 사실같았었다. 그때마다 판단을 미루었었다. 아직은 정황뿐이다. 그리고 대부분 정황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인간의 어리석은 이성은 그같은 불완전한 정황만으로도 완전한 그림을 그리도록 만든다. 자기가 직접 그린 그림이기에 의심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의심스럽다. 아니 저 사람은 분명 구린 구석이 있다. 부정한 부분이 있다. 범죄자다. 악인이다. 내가 똑똑한 놈들 잘 안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설프게 똑똑해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정확한 사실은 일단 두고보려 한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때는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수밖에 없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치우치지 않게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한다. 너무 성급하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미있다.

원래 정치인 안철수가 내세운 이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혐오' 한 가지였다. 아니 나중에는 '증오'도 추가되었다. 새정치라는 말 자체가 그 혐오를 전제한 개념이었다. 기존의 정치는 모두가 잘못되었다. 엉터리에 더럽고 추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내가 새로운 제대로 된 더 깨끗하고 멋진 정치를 해보이겠다. 물론 그 새정치가 어떤 정치인가는 따라서 기존의 정치에 대한 비판 이상 어느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안철수가 혐오한 것은 부패한데다 권위주의적이기까지 한 이명박이나 박근혜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군사독재와 싸우고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견제해 온 정통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당장 정권을 쥐고 있는 새누리당과 맞서기 위해서는 먼저 야당인 민주당의 자리를 노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통적으로 1번당 후보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2번당 후보를 자신이 대신해서 대통령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작 정권을 심판하고 새정치를 하겠다면서 2012년 대선에서도 안철수의 행보는 절묘하게 민주당을 겨냥하여 대선전략을 근본부터 흐트리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대선후보경선의 컨벤션효과를 덮어버리지 않나, 한창 대선과 관련해서 이슈를 개발하고 경쟁해야 할 상황에 단일화로 힘을 빼버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기호 2번은 안철수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안철수의 문재인에 대한 증오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자기의 것을 빼앗겼다. 자신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겼다. 지지자의 인식도 안철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안철수였다면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꺾고 당선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2017년 대선에서 드러난 안철수의 실체를 감안했을 때 그럴 가능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어찌되었거나 그래서 문재인이 2015년 자신이 만들었다 여기는 새정연의 당대표경선에 출마해서 당선되자 안철수의 행보는 철저히 문재인을 겨냥한 반동적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 안철수를 이용해서 당대표인 문재인을 흔들고 싶어 했던 민주당의 구당권파들이 가세하면서 2015년 문재인흔들기에 이은 연쇄탈당으로 만들어진 정당이 지금 안철수가 대표가 된 국민의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안철수는 철저히 문재인에 대한 반동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오로지 그를 위한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문재인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선거에서 문재인을 이길 수 있는 후보가 누구인가? 이제 다시 문재인 정부와 가장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당대표 후보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국민의당 대표로 안철수가 당선된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국민의당도 그렇게 만들어진 정당이라는 것이다. 기성 정치에 대한 혐오와 특히 문재인에 대한 증오가 국민의당이 만들어지는 첫째 동력이었다. 고작 한 줌 남았다. 한때 20퍼센트도 훌쩍 넘던 높은 지지율이 이제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한 마디로 액기스 가운데 액기스다. 가장 핵심적인 지지층만이 남은 상황인 것이다. 과거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새누리당은 지지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노무현과 그 후계자인 문재인을 지지할 수도 없었던 그야말로 정수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문재인을 꺾고 민주당을 누르는 것. 국민의당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안철수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안철수가 정치를 시작한 것이나 국민의당이 만들어진 목적 가운데 어디에도 그런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오로지 현실정치에 대한 혐오와 특히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증오만이 그들이 정치를 시작하고 지금껏 정치에 몸담아온 가장 크고 중요한 이유였던 것이었다. 이제와서 호남정치를 복원하고 문재인정부와 개혁경쟁을 하자는 것은 그런 국민의당의 정체성과도 정치인 안철수의 지향과도 맞지 않는다.


한 마디로 원래의 초심으로 돌아갔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당의 원래 정체성을 다시 찾고자 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철수가 곧 국민의당의 초심이며 정체성이다. 이념이고 지향이고 정책이다. 정치적 목표다. 그래서 굳이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남을 욕하며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려는 것들을 과연 평가할 의미가 있을까? 남을 비난하며 그것으로 자신이 우월한 증거로 삼는다. 남을 비하하고 조롱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증명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그런 놈들이 인터넷에도 발에 채일 정도로 넘친다. 죽으러 가는 것이다.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죽거나, 만일 그들이 죽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이 죽거나. 자유한국당보다 더 지독하다. 최소한 그들은 현실정치가 무언지 안다. 머리로 생각하고 계산할 줄 안다. 영악하지도 못하고 본능적인 혐오와 증오에만 기댄 무리들과는 수준부터 다르다.


그냥 원래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있다 보면 될 것이다. 가고자 했던 길이고 가야만 했던 길이다. 단지 안철수의 무능이 그 길을 잠시 멀리 돌아가게 만들었을 뿐이다. 안철수가 그곳에 있고 안철수만을 바라보는 대중이 있다. 처음부터 안철수가 정치를 시작했던 이유이고, 지금도 정치를 하고 있는 이유다. 국민의당이 만들어진 이유다. 그러므로 국민의당과 안철수는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다. 한심하다.

원래 전통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차피 나면서부터 누군가의 딸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여야만 했을 터였다. 그러니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불리면 그만이지 따로 이름따위 가질 필요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영애이고, 영부인이고, 혹은 자당으로 불려야 했다. 그것은 독립적인 인격에 대한 것이 아닌 소유한 남성에 종속된 지칭에 지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리 말하잖는가.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아무거나 담을 수 있기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용도도 가치도 달라진다.


사실 여사(女史)라는 단어를 여성에 대한 존칭의 의미로 쓰기 시작한 것은 역시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원래 여사란 전근대 중국왕조의 궁정에서 일하던 여관을 뜻하던 관직이름이었다. 특히 황제의 후궁을 관리하는 직책이라 그 위세가 상당했었는데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호칭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어느 정도 지위가 있거나 한 남성을 두고 아무 상관도 없는데 '선생님'이니 '사장님'이니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비슷하게 쓰이는 '사모님'과의 차이라면 굳이 결혼여부와 상관없이 여성 개인에게 존칭으로써 붙여 쓸 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굳이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어머니가 아니어도 일정한 나이가 되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를 갖추면 여사라 불릴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 중국에서는 여사의 사史자를 선비 사士로 바꾸어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최소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여사라는 것은 역사적 맥락도 그렇거니와 누군가에 종속되지 않은 여성을 가리키는 유일한 존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부인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아내인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잘못 번역되고 있는 단어가 그래서 백작부인이니 공작부인이니 하는 말들이다. 정확히 여백작이고 여공작이다. 물론 남편이 백작이고 공작이어서 백작부인이나 공작부인으로 불려야 할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남편 없이 여성이 작위를 계승했을 경우 그들은 분명 여백작이고 여공작이라 불려야 옳을 것이다. 누군가의 아내여서가 아닌 자신이 백작이고 공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각각 자신의 작위를 여성형으로 바꾸어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연 누구의 부인 아무개씨라 하는 것이 과연 독립된 인격에 대한 제대로 된 호칭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 부인쯤 되면 대통령과 독자적으로 공식적인 의전을 받고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그들은 단순히 남성인 대통령에 부속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대통령부인을 과거에도 따로 영부인이라 불렀던 것은 그런 사회적 맥락이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그래서 대통령 부인을 퍼스트레이디라 따로 칭하고 있다.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의 수반이며 군통수권자이기도 한 대표인물이기에 그 아내 역시 그에 준하는 의전과 더불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정확히 사적인 생활이라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 관저를 나서는 순간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그 사회에서 공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디서 동창들과 모여서 밥을 먹고, 오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동네 사람들과 어딘가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가고, 개인이라면 단순히 자신의 사생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도 그저 대통령의 부인이라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단지 이름 뒤에 '씨'만 붙이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아내는 과연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는 것인가.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한다. 남성의 사회적 성공에는 집안에서 살림만 하는 아내의 내조 또한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아내가 집안에서 그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키우는 것만으로도 남성이 사회적 성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있는 것이다. 만일 아내가 남편과 다른 판단을 하고 전혀 다른 요구를 하게 된다면 남편들 역시 지금까지와 같은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기가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남편과 아내는 동지적 관계에 있다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누군가에게 임명장을 수여할 때 그 가족을 함께 불러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남편 혹은 아내 혼자서 잘해서 지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의 동의와 지원이 있었기에 마음껏 자신의 의지와 실력을 발휘해서 지금의 위치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과연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 가운데 아내인 김정숙 여사의 지분이 전혀 없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나 박근혜씨에 대한 지지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의 지분이 상당했던 것을 모두가 인정한다.


아니 그 이전의 것이다. 말 그대로 퍼스트레이디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의 아내로서 공적인 의전과 업무를 수행하는 공적인 지위에 있는 인물이다. 그를 보통사람들과 같이 호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부른다고 퍼스트레이디를 그대로 가져다 부를까? 그래서 영부인이라 불렀는데 사실 이 말도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를 때 쓰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군사독재의 권위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무엇보다 여성을 남성에 종속시킨다. 그에 비하면 여사는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그나마 독립적인 인격으로서 여성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적합하지 않은가. 일상에서도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여성들에게 그 남편의 유무나 신분에 상관없이 여사라는 호칭을 붙여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사다. 정히 여사(女史)라는 단어 자체가 불편하다 여겨지면 중국에서처럼 여사(女士)라 바꿔쓰면 되는 것이다. 고대 궁정의 궁인들은 전문직들이었다. 아마 여성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아예 없다시피 하던 시절에 유일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출세할 수 있었던 지위였을 터다. 그렇게 그 호칭이 문제인 것인가.


그러고보니 얼마전 강준만씨가 '싸가지없는 진보'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어째서 진보의 주장 가운데는 상당히 옳은 것들이 많이 있음에도 정작 그것이 목적하는 기층대중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가. 내가 자칭진보들과 어울려 본 결과는 자명하다. 정작 자신들의 주장을 들려주어야 할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 그들을 위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오로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 한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처럼 계급이 다르면 사고도, 언어도, 행동도 모두 달라진다. 각자 자기의 계급에 어울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이 위하고자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과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지식인의 결벽함이다. 선지자인 것이다. 내가 저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스스로 자신을 따라야 한다. 수많은 선지자 가운데 어째서 예수만이 지금 세계종교의 지도자로서 아직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전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자신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차라리 한겨레일보의 항복선언이 고깝게 들리는 이유인 것이다. 너희가 이겼다. 그러나 너희는 틀렸다. 시사인의 한 기자의 말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우리는 옳았지만 너희들의 부당한 폭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 뿐이다. 그러면 하지 마라. 진정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면 언론인의 양심으로 차라리 끝까지 대중과 맞서 싸우라. 그것이 오히려 대중의 눈높이에도 맞는다. 그래도 지식인인데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는데도 그저 눈앞의 이익 때문에 포기한다면 그것은 지신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옛날 선비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문의 안위마저도 내던지고는 했었다. 그런 것을 곡학아세라 부른다. 진정 신념으로써 대중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자 결심해서가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대중을 조롱하며 자신을 꺾는 것은 기만이며 대중과 자신에 대한 모멸이다.


어째서 그동안 한겨레일보와 경향일보가(의도적인 오칭이므로 지적은 사양한다) 정작 자신들의 주독자층이어야 했을 자유주의적인 시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어려움을 겪어야 했었는가. 대중이 어리석어서? 대중이 잘못된 광기에 사로잡혀서? 그렇다면 끝까지 자신들의 양심과 지조를 지켰어야 했다. 시민들과 타협하는 것도 결국은 영합이다. 아직도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언어로 누구의 방식으로 사실을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다. 저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한. 차라리 그동안의 어리석은 고집이 그래도 있어보이기는 했었다. 웃음도 안나온다.

도덕률이란 이를테면 벽이다. 계급간에 벽을 쌓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있지만 너는 해서는 안된다. 나는 해서는 안되지만 너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도덕적으로 너보다 더 우월하며 따라서 계급적으로도 너보다 더 우월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도덕률을 앞세우는 것은 기존의 지배계급이거나 아니면 그에 도전하는 새로운 계급이기 쉬웠다. 부르주아들이 귀족들과 싸울 때, 그리고 노동자들이 부르주아들과 싸울 때 각각 자신들만의 도덕적인 규준으로 단결을 도모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보라, 귀족은,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했다. 우리들이야 말로 진정 도덕적이고 존귀한 존재다.


그렇게 새로운 계급은 항상 새로운 자신들만의 도덕률로 무장하고 기존의 지배계급이 도전하고 투쟁해 왔었다. 때로 승리하기도 했고 때로 패배하기도 했다. 새로운 계급이 승리하면 지배계급은 교체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과연 기존의 지배계급은 새로운 계급의 도전에 대해 그저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었겠는가. 안타깝게도 도덕률이란 자체는 현실의 반영이기 때문에 나중에 나타난 새로운 계급에 더 유리하게 적용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지배계급이 보이는 행태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여기고 있기에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덕률을 앞세운 것이었다. 이른바 말하는 적폐라는 것이다. 더이상 저들이 그동안 해온대로 계속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번 기회에 모조리 뜯어고쳐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된다면 기존의 지배계급은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그동안 누려온 특권들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된다. 지켜야 한다. 막아내야 한다.


그래서 역사상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기존의 지배계급은 대개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첫째는 그냥 뻔뻔스럽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잘 해 왔다. 아직까지 크게 문제가 없었고 앞으로도 전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다고 새로운 저들의 도덕률이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란 보장이 있는가. 무엇보다 지금 자신들의 도덕률이 진짜 정의가 될 수 있도록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는 있다.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기성세대를 젊은 세대가 비판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너희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런다."


세상을 잘 알아서 뇌물을 주고받고 하는 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너무나 잘 알아서 불법과 탈법을 일삼고 협잡과 일탈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보아라. 그래서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지 않았는가. 정의로운 너희들이 그래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부정이 현실이고 비리가 지혜이며 부패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실제의 정의다.


두번째 반응은 자기는 지키지도 못한 보다 엄격한 도덕률을 앞세워 새로운 계급을 비판하고 나서는 것이다. 새로운 계급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률의 모순 때문이니 역으로 새로운 계급이 가진 도덕률의 모순을 파헤쳐 그들을 누르려는 것이다. 문제는 시작은 그럴듯해도 결국 그 본색까지 모두 감추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 앞에서 떠드는 소리와 뒤에서 실제 보이는 행동들이 전혀 달라지고 만다. 단기적으로는 새로운 계급을 힘으로 누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내부적으로 그 모순과 괴리로 인한 파탄이 일어나고 만다. 기성의 지배계급이 그동안 자신들을 지탱해 오던 명분과 권위를 결정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조선시대 양반들도 그랬었다. 일본 에도시대 사무라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향신들은 달랐을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예학을 통해 다시 양반의 권위를 끌어올리려 했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양반이 양반으로서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조건들을 우스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이만하니까 양반이구나. 그런데 모든 양반이 그 모든 자격을 다 갖추며 살아가는가. 처음에는 속을지 몰라도 지나고 나면 저것들이 겨우 야바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에도말 사무라이들이 만들어낸 부시도의 실화를 가장 잘 실현한 것은 정작 쵸닌계급이 주를 이루던 신센구미였었다. 쵸닌계급이 오히려 사무라이보다 더 사무라이답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라는 신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중국의 향신들은 그보다는 프랑스의 앙시앵레짐과 마찬가지로 뻔뻔스러운 경우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늬들 하찮은 민중이 자신들을 향해 무엇을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부러우면 너희들도 우리처럼 향신이 되라.


문득 요즘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니 떠오르는 생각이다. 어찌보면 새로운 도전자들이다. 새로운 세대이고, 새로운 집단이고, 새로운 이념이다. 그래서 보다 엄격한 도덕률을 부여한다. 자신들 스스로도 그러고자 노력했고 기득권 역시 그렇게 굴레를 씌웠다. 유독 새로운 도전자들에게만 항상 더 엄격한 규준들이 적용되고는 했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가하는 비판에 대해 자신들은 항상 충실했는가? 최소한 납득할 수 있는 모습을 보였는가? 과거의 방식은 이제 전혀 통하지 않고, 새로운 규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한계가 결국 방향을 잃고 좌충우돌하며 자신마저 부정하는 혼란으로 이어지고 만다. 단지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 예정된 결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된다. 야당과 그 지지세력이 지리멸렬해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모순의 결과가 결국 대중을 각성시키고 말았다.


어차피 저들 자신도 지키지 못할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냥 입으로만 떠드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 비판이 비판으로서 의미를 잃게 된다. 그들이 그동안 해온 일들은 이제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한 줌 조금 넘는 지지자들만이 악에 받쳐 놓치 못하고 있을 뿐 현실의 지형은 급속히 한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노무현이 너무 빨랐다. 하지만 노무현으로부터 시작된 변화가 비로소 저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며 문재인에게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예정된 운명처럼. 그냥 드는 생각이다. 의미없는. 느리지만 역사는 확실한 진보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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