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물에 빠져 죽게 생겼는데 다른 것 생각할 여유따위는 없다. 그냥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다. 그냥 팔다리가 알아서 움직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물위에 떠있기 위해서. 아무거라도 잡고 버틸 것을 찾기 위해서. 눈으로 보고 찾으면 늦다. 손에 닿는 대로 바로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텨야만 한다. 때로 사람을 구하려다가 덩달아 물속으로 끌려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두운 밤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누군가 뒤에서 자신의 팔을 잡아끈다. 손에 칼이 들렸으면 일단 휘두르고 보는 것이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인데 역시 자신과 함께 며칠 굶은 이웃이 한 줌 먹을 것을 장만해 왔다. 그래도 남의 것이니까. 자기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일단 내가 먹고 살아야 한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않는 사람이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원래 정의도 윤리도 도덕도 배부른 사람들이나 따지는 한가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남혐과 여혐 논란의 근본원인이다. 일단 여성들은 남성들의 폭력이라는 직접적인 위협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길에서도 낯선 그림자만 보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한다.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눈과 입과 손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부조리의 원인이 누구로부터 비롯되는가.


남성 역시 그렇지 않아도 현실을 살아가기가 고달프다. 그래도 남자라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거의 세뇌되다시피 주입받으며 자랐다.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번듯한 직장을 잡아야 한다. 여성들과 경쟁해야 한다. 자신들의 절박한 처지를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다. 다 여성을 위해 그러는 것인데. 억울하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이 처한 열악하고 절박한 처지는 여성의 이기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굳이 줄세우기를 강요당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남들과 같아지기를 강제당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어렵더라도 힘들더라도 한심하더라도 그래도 자신은 살아간다. 자신을 살아갈 수 있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남들과 같아야 하니까. 남들보다 나아야 하니까. 여성들이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공포가 보다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라면 남성이 여서에 대해 느끼는 원망과 분노는 그보다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남성이기에 지워진 사회적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에 부합하지 못한 현실의 좌절과 절망, 무엇보다 그같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로서 길러진 자존감이다. 누군가에 탓을 돌리기라도 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모두 여성들 때문인데 여성이 자격을 잃어버렸다.


여성해방은 그래서 남성해방이기도 한 것이다. 여성주의는 또한 남성주의이기도 하다. 굳이 남성이 더이상 필요이상의 사회적 책임감을 독점하려 해서는 안된다. 진정 남녀평등이란 그냥 알아서 자기들끼리 사는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남성이기 이전에. 여성이기 이전에. 내 삶이고 나의 판단이며 선택이고 내 책임이다. 여성과 자신은 분리한다. 사회와 타인과 자신을 분리한다. 오롯한 자신의 삶이다.


날선 말들로 서로를 상처입힌다. 그리고 스스로 상처입고 만다. 다른 사람만 일방적으로 상처입힐 수 있는 말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옥 가시를 드러낸다. 사납게 벼려진 상처가 더욱 상대를 헤집으려 한다. 내가 살아야겠다. 어떻게든 내가 살려 한다. 필사적인 발버둥이고 비명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인지 자신도 모르기에 막연히 쏟아내는 울음소리다. 서로가 가해자고 서로가 피해자다. 진짜 가해자는 다른 곳에 있다.


누군가를 원망해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거의 드물다. 그래도 위로는 된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할 수 있다. 차라리 미워하기라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이지는 않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을 속이고 만다. 그렇게밖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체념이고 절망이다. 자포자기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도 좋다.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끝낸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무섭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어째서 남성이 여성보다 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데 여성에 대해서만 그렇게 민감한가. 사실 굳이 그렇게 길게 어렵게 쓸 것도 없다. 여성이 피해자인 대부분의 범죄들은 거의 피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피해자가 여성인 것을 노리고 범인들은 범죄를 저지른다. 반면 남성이 피해자인 대부분의 범죄는 특별히 남성을 특정하여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여성 혼자 있으니까. 집에 젊은 여성이 혼자 살고 있으니까. 어두운 밤길에 여성이 혼자 길을 걷고 있으니까. 술을 마시는데 여성이 인사불성으로 만취해 있으니까. 아니 그 전에 술자리에 여성이 끼어 있으니까. 과연 그 많은 범죄 가운데 여성이 아닌 남성을 특정하여 이처럼 일어나는 범죄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여성을 특정하여 일어난 범죄들의 경우 가해자의 성별은 또한 어떻게 될까.


남성이 성범죄를 제외한 다른 강력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으니까. 절대적인 피해자의 수가 여성보다 많다. 가해자도 남성이 더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들은 여성처럼 밤늦었다고 조심해서 일찍 들어가거나 하지는 않는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낯선 타인을 경계하여 피하거나 숨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다수 범죄에 있어 희생자는 여성이다. 여성인 것을 이유로 범죄는 일어난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신안 흑산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의 경우도 피해자가 남성이었다면 그같은 사건이 일어났을까? 성범죄가 아닌 다른 범죄였어도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조심성이 없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자각조차 없는 듯 경찰조사를 받는 태도마저 당당했더란다. 단지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남성인 가해자들은 더 당당하게 피해자를 억압하고 협박하기도 한다. 남성이라는 위세를 빈다.


성범죄를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강력범죄에 있어 거의 압도적인 다수의 경우에 남성이 가해자다. 남성인 피해자를 제외하고도 가해자가 남는다. 여성피해자와 여성가해자를 따로 계산하면 결국 나머지는 남성 가해자에 의한 여성 피해자들이다. 성범죄를 빼고도 그렇다.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남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꺼려해야 한다. 불편해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슬픈 것이다. 안타까운 것이다.

아마 더민주에서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최소 두 자리는 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안된다. 딱 한 사람만 이 바람을 만들고 스스로 탈 수 있다.


오로지 더민주여야 하고, 오로지 특정 후보여야만 한다. 딱 한 번만 쓸 수 있다.


다만 여기다 쓰면 천기누설이 되기 때문에.


아마 이 글 보는 사람 가운데도 어렴풋 짐작하는 사람 있지 않을까.


다음 대선에서 더민주의 승리를 점쳐보는 이유다.


그것만 가능하면. 재미있어질 것 같다.

정의에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정의가 존재한다. 하나는 보편이고, 다른 하나는 합의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경험을 벗어난 선험의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실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할 수 있는 자신과 주위를 벗어나 그를 넘어선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 그것은 신이라 불리웠고, 그리고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면서 정의라는 이름이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정의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보편적 정의에 부합하는가. 일반적인 가치와 충돌하지는 않는가. 무엇보다 과연 보편이란 무엇인가. 일반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보편과 일반의 기준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주 최근까지도 흑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백인 이외의 다른 인종은 같은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 배웠기에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주위에서 잘했다 칭찬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정의란 인종을 초월한 인간에 대한 존중인가, 아니면 인종에 따른 엄격한 구별과 차별인가.


국가의 법이 존재한다. 사회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윤리와 도덕이 존재한다. 그 이전에 자기들끼리 약속한 자기들만의 법이 있다. 자기들만의 윤리와 도덕이 있다. 외부와 일부러 단절한다. 오로지 내부의 논리로만 사고하고 판단한다. 전근대사회가 그랬다. 아직 보편적인 권력도, 일반적인 공동체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 자기 사는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만 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과 판단 또한 자기들끼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었다. 인류보편의 가치야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의 법이나 사회의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관습과 법마저 무시한다. 우리들끼리 옳다 했으니 그것이 옳다.


역시 역사적 맥락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하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 한반도를 지배한 것은 이방인인 일본인들이었다. 이승만 이래 역대 독재정권에서 권력이란 국민과 유리된 그들만의 어떤 것이었다. 국민의 합의에 의해 법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 사회적 가치와 정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보편의 세계란 인식하기도 어렵고 그를 따르기란 더 어렵다. 경험의 세계에 머문다.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보편과 일반의 세계보다 항상 얼굴을 맞대는 직접적인 관계에 의지한다.


하기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절대 아니다. 다만 그같은 경향이 유독 강한 것에는 그런 영향도 적지 않다 해야 할 것이다. 상당수 아직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 소외된 집단에서도 그같은 경향은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보편적인 권력에 대한 인식도 없고,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 이외의 일반적인 세계에 대한 의식도 없다. 자기들끼리만 납득한다. 우리가 옳다면 옳다.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면 틀리지 않았다.


사실 인터넷에도 - 아니 오히려 외적인 권위나 권력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기에 역시 더 강하게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서로에게 묻는다. 맞는가. 옳은가. 서로가 맞다고 옳다고 하면 그것은 맞는 것이고 옳은 것이 된다. 정의가 되고 윤리가 되고 도덕이 된다. 규범이 되고 규준이 된다. 인터넷 문화의 배타성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 우리가 옳다고 결론내렸다. 우리가 맞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았고 맞았다.


법이 금지한 행위다. 노예든, 아니면 규정을 벗어난 부정이든. 하지만 자기들끼리 괜찮다. 자기들끼리 문제없다 정의한다. 그러므로 아무렇지 않다. 검찰이 돈을 받고 수사권과 기소권을 남용해도 관행이니까. 서로 좋자는 것이니까. 지역사회에서 누가 불법으로 노예를 부려도 서로 괜찮다 합의했으니까. 그러므로 오히려 내부의 논리를 부정하고 그같은 사실을 알리는 자체가 더 큰 잘못이다.


보편의 세계를 복구해야 한다. 인류보편의 가치가 적용되는 보다 넓은 선험적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인류란 나와 너가 아니다. 우리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모두다. 생명이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일컫는 것이다. 교육부터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너는 너다. 너만 잘되면 된다. 타인과의 비교는 결국 타인과 자신을 유리시킨다. 저들은 나도 우리도 결코 아니다.


돌고 돌아 결국 모두가 이어진다. 오히려 군 내부의 논리에 의해 옹호되는 군비리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전관예우, 그리고 퇴직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외주회사와 서울메트로간의 유착까지. 여성들이 느끼는 현실의 공포에 대해서도 남성들은 스스로 서로에 묻고 확인하며 자신들의 정당성만을 굳건히 지키려 하고 있었다. 타인이다. 남이다. 상관없는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끼리.


통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섬이다. 북한으로 인해 대륙과의 연결이 막혀 있고, 바다는 일본이 에워싸고 있다.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렇지 않게 국경을 넘어 세계를 경험한다면 그만큼 대한민국이라는 완고한 틀을 벗어나 사고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국경을 넘기가 너무 어렵다. 인터넷시대에도 결국 앞서 말한 것처럼 자기가 동의하는 내용들만을 일부러 찾아본다.


근본의 문제다.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도 처벌되지 않는다. 내부의 논리에 의해 은폐되고 외부집단과의 결탁에 의해 무마된다. 법이 의미가 없다. 보편의 윤리와 도덕이 전혀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술을 먹었으니까. 그때 내게 사정이 있었으니까. 원래 그래오던 것이었으니까. 의지조차 없다. 국가라면 당연히 국가라는 단일한 정체성 아래 공적인 규범이 규준으로써 적용되어야 한다. 소집단에 그저 아부하는데만 열심이다.


우리가 좋으니까. 우리가 옳으니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게 결정했으므로 성폭행당한 것보다 그것을 세상에 알린 것이 더 큰 문제다. 불법을 저지르고 비리를 저지르는 것보다 내부의 논리를 배반하고 외부에 그것을 알린 자체가 더 큰 잘못이다. 닫히고 분리된다. 우리는 우리끼리. 오히려 사회가 그들의 눈치를 본다. 한국사회의 현주소다. 봉건사회다. 누구도 보편의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흥미롭다.

내가 인정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역지사지라는 말도 싫어한다. 정의는 보편적이다. 그리고 일반적이다. 그 말은 곧 인격이 없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다. 누구도 정의를 소유할 수 없다. 사람을 위해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 원래부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성의 역사란 원래 있는 그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아직도 인간은 그런 과정 위에 있다.


그런데 인정은 다르다. 인정은 철저히 개인에게 귀속된다. 그리고 대개는 현실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더 직접적이기도 하다. 그 사람은 착하다. 성실하다. 예의바르다. 주위에 두루 잘한다. 하지만 그 평가조차 결국은 그를 지켜보는 주위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테면 동네사람 누군가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 사실이 알려졌다. 한 사람은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실을 감추려 움직였다. 누가 더 인정이 있는가.


그래서 역지사지라는 말도 싫어한다. 네가 그 입장이 되어 보라. 네가 그 성폭행범의 입장이 되어 보라.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세상의 비난을 받고 법적인 처벌까지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보라. 눈앞에 무방비의 여자가 있는데 너라고 눈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거랑 별개다. 네 가족이 그렇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는데 너라면 참고만 있겠는가. 당연히 참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참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이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 감정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간을 저열한 감정과 욕망의 노예로 격하시킨다.


폐쇄된 시골마을에서 곧잘 이같은 끔찍하고 말하기에도 괴기스런 사건들이 곧잘 일어나게 되는 이유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싸준다. 인정이 넘친다. 그래서 그 인정을 위해 때로 타인을 희생시킨다. 자기 마을 사람이 아니라면 - 즉 서로 인정을 공유하는 '우리'라는 집단에 들어 있지 않다면 기꺼이 그 인정을 위해 대상을 희생시키려 한다. 서로 좋으니까. 서로가 기쁘면 그만이니까. 내일도 보고 모레도 봐야 할 상대다. 그런 사람이 불편한 것이나 그로 인해 자기가 불편한 것을 피할 수 있다. 어차피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자기들끼리 결정하면 폐쇄된 환경에서 그런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여러 해 전 이슈가 되었던 섬노예 사건도 결국 그런 연장이었다. 마을사람 모두 - 심지어 경찰들까지 섬노예의 존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편해지기 싫다. 그냥 이대로 좋은 채 지내고 싶다. 그냥 하찮은 노예 하나 희생시키면 되는 일이다.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한다. 인정의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의 거리에 비례한다. 보편적인 인간이란 보편적인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익숙한 인간의 관계가 보편의 정의와 윤리를 대신한다. 법마저 그 완고한 인정의 고리를 파고들지 못한다. 완벽하게 닫혀 있는 그들만의 세계다.


분명 시골이 도시보다 인심이 좋다. 인정이 많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서로 좋기 위해서. 서로 편하기 위해서. 차라리 피해자를 비난한다. 피해자를 마을에서 쫓아낸다. 너희가 마을 물을 다 흐려놓았다. 너희로 인해 마을의 체면이 떨어졌다. 그렇게 피해자만 쫓아내고 나면 다시 전처럼 문제없이 살수 있다. 죄인가의 여부마저 자기들끼리 결정한다. 서로의 관계를 고려해가며. 그것이 그들의 정의이며 윤리이며 도덕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 대중문화를 통해 이해하는 바로 세계 어디에나 비슷한 문제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때로 시골이라는 공간이 공포와 스릴러의 배경으로 흔하게 쓰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편의 정의가 사라지고 개인의 인정이 지배하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넘어가는 원시사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다. 인간은 정의를 추구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지성이다. 우울한 현실이다.

그러고 보니 실제 그런 회사가 있었다.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하기까지 준비도 하고 회의도 하고 해야 하니 그 시간까지 감안해서 더 일찍 출귾해야 한다. 그래서 실제 출근시간은 공식적인 업무시간보다 1시간이 더 이르다던가? 이게 왜 문제인지 이해 못한다면 할 수 없다.


국회의원으로서 일을 시작하려면 먼저 준비를 해야 한다. 원구성 역시 그 하나다. 어느 당이 어떤 상임위를 맡고, 또 상임위는 어떤 의원들로 구성하고. 일단 그것부터 끝내야 일을 시작할 것 아닌가.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협의과정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른 만큼 타협과 양보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국회의원의 업무와 무관한가.


누가 CEO 아니랄까봐. 참고로 저 위에 말한 회사 역시 IT쪽이다. 빌어먹을 열정페이는 뭣나게 챙겨 강요한다. 공정성장론에 노동자의 권리는 없다. 있어도 거짓이다. 업무를 위한 준비과정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를 위한 노력과 비용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일단 일을 시작해야 일을 하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다. 한 편으로 당연하기도 하다. 이렇게 써놔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이 한국사회에서는 다수다. 오히려 당사자인 노동자들이 반성한다. 내가 일을 못해서 회사가 이익을 내지 못했다. 그러면 경영자 하면 된다. 웃긴다.

끝내 통합행동이 더민주 전준위 당직을 모두 독점하는 모양이다. 전당대회 열라고 전준위 맡겼더니 감투놀이에 정신이 없다. 바로 김부겸이 속한 통합행동이다. 불과 얼마전에도 그들은 모임을 가지며 서로의 돈독한 관계를 과시한 바 있다.


인터뷰에서 친노의 배타성을 지적한다. 독선적이고 독점적인 행태를 비판한다. 그러나 정작 당직을 독점하며 배타성을 보이는 것은 비노인 통합행동이다. 그런데도 그같은 행태에는 아무런 비판 없이 실체도 없는 친노만을 비판한다. 선의를 믿었다. 진심을 믿었다. 지역주의 깨보겠다고 안될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나 도전했던 그 진정성을 믿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그런 것이 계파정치다. 시비의 판단을 계파에 맡긴다. 멀고 가까운 것에 맡기고, 이익이 되는 것에 맡긴다. 원래 통합행동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더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고작 그런 인간이었다니. 계파의 이익을 위해 당을 팔고 정의를 판다. 원칙을 판다.


그래봐야 전당대회까지다. 전당대회 끝나면 새로운 지도부가 당을 이끈다. 감시한다. 더 이상 뻘 짓을 못하도록. 정말 정신없는 인간들이다. 당보다는 항상 자신과 계파의 이익이다. 국민의당이 정말 다행스럽다. 최악은 그래도 이제는 보지 않아도 된다.

하여튼 나라는 인간은 글을 쓸 때만 생각한다. 항상 글을 쓰면서만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 생각하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생각이 이어진다. 노동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파견제라고 하는 현실에 대해서.


노동과 노동자는 하나인가. 아니면 별개로 분리될 수 있는가. 사실 아주 오래전에는 전자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을 소유하기 위해 노동자를 소유했다. 노예제다. 인신을 구속함으로써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을 전유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가는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는가와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내가 필요한 것은 결국 노예가 가진 노동력인데 어째서 노동력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까지 내가 항상 신경쓰고 책임져야만 하는가. 딱 내가 필요한 만큼만 노동력을 가져다 쓰고 나머지는 노동자 개인에게 맡기겠다.


그나마 개인의 경험과 기술에 생산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던 전근대사회에서 기계가 대부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된 근대사회로 넘어오며 그같은 시도는 보다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기계를 돌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과 기술만 갖추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노동자 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만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노동력만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한다. 아무리 일을 해도 정작 노동의 대가로 지급된 임금은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노동자는 사업장을 나가면 누군가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친구이고, 사회의 구성원이며, 국가의 국민이다. 비스마르크가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것은 그가 노동자의 편에 선 진보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철저히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노동과 노동자는 둘이 아니다. 노동과 노동자는 하나다. 노동의 대가로 노동자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용자들이 진심으로 바란 결과가 아니었다. 모든 노동과 관련한 사회적 진보는 사용자의 양보가 아닌 사회와 국가의 강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사회와 국가가 그런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노동과 노동자는 분리된 채로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국가가 보장한 계약직과 파견직과 같은 사용자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제도들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노동력은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다 쓰지만 정작 노동자 개인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인신의 고용과 노동의 사용을 철저히 분리하는 파견제는 그 정수라 할 수 있다. 사용자는 단지 노동자를 고용한 파견업체로부터 노동력만을 대가를 주고 빌려 쓸 뿐이다. 그렇다고 정작 노동력을 사용한 것은 사용자인데 파견업체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없으니 누구도 노동자 자신을 책임지지 않게 된다.


부담은 당연히 사회로 돌아간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미 계약직과 파견직이 존재하는 다른 선진국에서도 사회적으로 모든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그마저도 없다. 자기가 사는 문제는 오로지 자기의 책임인데, 그마저 자신의 중요한 수단인 노동력을 자기로부터 강제로 분리당한다. 말했듯 누군가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친구이며,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다. 무고한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며 때로 무기력증에 빠져드는 사회란 그런 사회적 비용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계약직과 파견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같은 전제에 동의하는 국민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무노동무임금.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자기가 일한 만큼만 대가로 지급받아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하찮고 그 이익이 미미하다면 그만큼 대가도 받아서는 안된다. 공무원의 성과연봉제에 대한 지지여론도 그래서 높다.


그래서 묻게 되는 것인다. 억울한 죽음을 슬퍼한다. 무고하게 죽어간 젊은 영혼을 동정하며 위로한다. 하지만 그 대안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사회가 책임을 지기 싫으면 기업에 책임을 지운다. 기업에 책임을 지울 수 없다면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모두가 돈이다. 내 이익이다. 내 지갑에서 주머니에서 나가게 될 것들이다.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는가.


참고로 노동자의 파업권에 대한 정의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고용된 상태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누구의 소유인가. 기업의 소유라면 노동자는 임의로 자신의 노동을 멈출 수 없다. 노동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고용된 상태에서도 노동이 노동자의 소유라면 노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자신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용자에게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개인의 권리다. 어떤 경우에도 그같은 노동자 개인의 권리는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고용이라는 자체가 조건에 동의하는 것이었으니 충실히 그를 이행해야만 한다. 어떤 부당하고 모순된 현실에도 끝까지 참고 견뎌야만 한다. 일부의 주장이 의미없는 이유다.


노동에 대한 대가만을 지불할 수는 없다. 노동자가 없으면 노동도 없다. 노동이 없어도 노동자는 존재한다. 노동은 전적으로 노동자가 소유한다. 소유자로서 자신의 노동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비용 역시 정당하게 노동자에게 지불되어야 한다.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상식이어야 할 테지만. 그러나 여전히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말이 더 상식처럼 여겨진다. 노동은 노동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노동만 따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 정작 노동을 소유한 노동자를 노동을 이유로 단정짓고 정의하며 차별한다. 하기는 원래 인간이란 모순된 존재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아니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어째서 책임을 지지 않는가.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이다. 우울한 것이다. 아무것도 시작되고 있지 않다.

불관용에는 관용이 없다. 불관용이란 배제다. 부정이다.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관용이란 인정인데 그 전제를 부정한다.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완벽한 자기부정이다. 관용이 없는 것을 관용한다. 이미 그곳에 관용은 없다.


정확히 해야 한다. 일베를 불관용하는 것이다. 일베의 불관용에 대해 불관용하려는 것이다. 일베가 그동안 보여준 혐오와 증오, 차별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다. 다양성을 위해서다. 사회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소수자, 약자들을 위해서다. 사회적 배려가 없으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도 버거운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다. 차라리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대신 주장한다. 그러지 마라.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큰 상처를 입는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냥 말이지만 존재 자체가 죄이기라도 한 양 항상 주위를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는 몇 배나 크게 생살을 헤집는 칼이 되어 날아와 박힌다. 아무리 말도 안되는 비난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사회적으로 너무 불리한 위치에 있다. 아예 못하게 한다. 다른 이를 상처줄 수 있는 행위들을 아예 못하도록 막는다. 법이 못한다면 구성원 스스로 나서서 그러도록 만든다. 최소한 자신이 일베임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도록. 일베의 논리를 밖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고 삼가게끔.


착각해서는 안된다. 억압받는 소수가 아니다. 이미 저들 스스로가 타인을 억압하는 다수다. 더 큰 다수 앞에 소수가 되지만 이전에 그들은 다수로서 소수를 공격하고 모욕한 바 있다. 별개가 아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명백한 범죄라서 법으로 처벌할 수 없기에 대중이 스스로 나서서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저들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울타리를 친다.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이 안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살고 있다.


너무 똑똑해서 본질을 잊는다. 아마 너무 높은 곳에 있다 보니 사소한 것은 그냥 지나치게 된다. 다양성은 중요하다. 관용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다양성과 관용을 해체는 요소들에 대한 주의와 경계가 필요하다. 불관용에는 관용이 없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타인의 조각품을 임의로 부수는 것은 분명 범죄다. 그러나 그 조각품이 상징하는 것이 사회적 혐오와 증오라면 그것을 배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의롭다. 법과 도덕은 하나가 아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잘못은 했지만 잘못하지 않았다. 딱 떨어지는 것은 없다. 언제나.

확실히 알겠다. 안철수와 국민의당의 노동관을. 경제문제는 어쩌면 안철수 자신의 말처럼 상당히 진보적인 스탠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 구체적으로 무언가 나온 것이 없으니 판단할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다만 한 가지 노동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보수적이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다. 무노동무임금.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당연하다.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돈받을 생각부터 한다면 그것은 도둑놈이다. 아니면 사기꾼이거나. 단, 전제가 붙는다. 이미 고용된 상태에서도 단지 일을 해야지만 돈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은 노동과 고용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노동과 노동자는 별개인가. 노동은 노동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가. 사용자는 단지 노동자가 소유한 노동력을 필요한 만큼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용자는 단지 노동력을 소유한 노동자와 계약을 맺고 필요한 만큼 이용하는 것 뿐이다. 그로므로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것은 단지 자신이 노동자로부터 구매하여 사용한 노동력의 양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사용자로부터 받는 임금은 노동력을 소유한 자신에게 지불해야 하는 대가다. 고용된 상태에서 노동력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노동자의 파업권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여전히 노동력은 노동자에게 배타적으로 소유되어 있다.


일한 만큼만 대가를 지불한다. 일하는 동안만 의미가 있다. 일을 통해 생산한 결과를 통해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이외의 시간들은 부정된다. 그 이외의 가치들은 부정된다. 일하지 않는 동안에도 노동자는 살아있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했어도 필요한 비용들은 발생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사용자와 전혀 상관없는 노동자 자신의 문제다. 사용자는 오로지 자신이 사용한 노동력에 대해서만 대가를 지불한다.


얼핏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당연히 임금이란 자신이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자신이 일한 만큼을 계량하여 비례하여 받는 것이 지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내려진 결론이 자신의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결정된 임금수준이 다음 임금을 받기까지 최소한의 생활조차 영위하기 힘든 수준이다. 당장 내일부터 끼니를 걸러야 한다. 추운 겨울인데 난방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노동자가 소유한 노동력은 이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처음의 쟁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노동자와 노동력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가. 노동자와 별개로 노동력에 대해서만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원구성이야 어찌되었든 이미 임기가 시작된 순간 그들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하다못해 4년의 임기 동안 아무것도 않고 집안에 누워만 있어도 그마저 국회의원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게 유권자들에게 인식된다. 개인이 아니다. 사인이 아니다. 그래서 공인이다. 숨쉬고 밥먹는 것조차 공적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 모든 행동들이 크든 작든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주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에 대한 대가다.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여겼기에 국민은 그들을 선택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그 대가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원구성을 못했으니까. 국회가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므로 아무일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진정 아무일도 하지 않았는가. 아무일도 않고 있는가. 하다못해 지역구관리라도 하고 있다. 다음 선거를 위해 당내 정치에도 한 발 담그고 있다. 그마저도 국회의원으로서 회의장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면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다. 그 한 표에 의해 법 하나가 가결되고 부결되기도 한다. 아무리 일 못하는 국회의원이라도 한 표는 한 표다. 자신을 찍어준 지역구 주민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국회의원들은 회기와 회기의 사이 더 열심히 자신의 전문분야와 관심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한다. 최근 국민의당이 공부모임을 갖는다며 호들갑떠는 모습이 때로 우습게 여겨지는 이유다. 굳이 당이 전면에 나서서 행사처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일상을 통해 이루어저야 하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공부들을 안했으면.


공적인 업무만이 업무가 아니다. 여기적기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사람도 만나야 한다. 비공식적으로라도 필요하면 찾아가야 하고 친분이 없어도 만나야 한다.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친인과 지인 등 인간관계 역시 소홀할 수 없다. 개인의 감정을 공적의 영역으로 끌고 오지만 않으면 된다. 공사의 구분만 확실히 할 수 있으면 상관없다. 그마저도 공인으로서 보다 주어진 책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이나 인간관계가 원망하지 못해서 생기는 손실도 결국 사회가 져야 한다. 무엇보다 건강을 책임져야 한다. 몸의 건강은 물론 마음의 건강까지 철저히 관리해야만 한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잘해도 중간에 쓰러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지자가 바라는 정치가 있을 텐데 중간에 쓰러지면서 결국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다음 선거에서도 출마해서 당선될 수 있어야 한다. 더이상 국회의원이 아니게 되면 국회의원으로서 해야 할 일도 못하게 된다. 일을 하라고 뽑아준 국회의원이다. 그 모든 것이 비용이다. 세금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허투루 쓰는 것이 아니다.


결국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게 된다. 국회의원 역시 노동자다. 그렇게 간주해야 한다. 국민에 의해 고용된 선출직 노동자다. 국민에 고용되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중요한 일들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에게 지불되는 세비는 국회의원이 하는 일들에 대한 것인가. 그 일들을 해야 하는  국회의원 자신에 대한 것인가.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은 필요없다 말하기 전에 먼저 국민 자신이 일 잘 할 것 같은 국회의원을 뽑으면 되는 것이다. 만일 잘못뽑았다면 다음에 제대로 잘 뽑아서 시키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않고 놀며 낭비하는 비용조차 잘못된 선택에 대해 국민이 치러야 할 대가다. 국회의원이라고 국민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국민 역시 유권자로서 엄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국회의원도 공짜는 아니다. 이미 국회의원이 되었고 세비를 지급하기로 한 이상 그것은 약속이며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누구도 포기를 강제해서는 안된다.


열정페이다. 공짜로 일하라. 포기하며 일하라. 하다못해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수습기간에도 임금은 지급한다. 처음 입사해서 오히려 일을 배우는 동안에도 돈을 받으며 일을 배운다. 고용에 대한 당연한 책임이다. 국민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국가라고 예외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물며 정당이다. 고용주가 아니다. 그냥 국회의원으로서 특정한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것 뿐이다. 노동자들도 같은 직종에서 다른 노동자보다 형편없이 적은 임금만을 받으면 비난을 받는다. 남을 생각지 않는다. 쟁점으로 삼는다. 더 큰 것을 노기는 사기이거나, 아니면 자각조차 없는 무지이거나. 어느쪽이든 최악이다.


그러고보면 정치혐오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 자신이 뽑았다. 최소한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뽑히는 것을 보기만 하고 있었다. 유권자의 책임은 없다. 국회의원의 의무만 있다. 객관화한다. 대상화한다. 국회의원 역시 결국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은 시민의 일원임을 잊는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정치다. 그런 특별한 사람들을 기대한다. 항상 반복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다시 반기문이 그 대상이 되려는 모양이다.


아무튼 전혀 상관없는 것 같으면서 전체를 꿰어 보면 구체적인 윤곽이 나온다. 일을 해야만 국회의원인가.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가. 비슷하지만 다르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 하지만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일단 고용한 이상 먹이는 것은 사용자의 책임이다.


국회의원이 참 하찮다. 일한 만큼 돈을 받는다. 일을 하지 않았으면 세비도 받아가지 못한다. 국회가 열려야 일을 하는 것이다. 원구성이 끝나야 비로소 일을 하고 세비를 받아갈 수 있다. 하물며 노동자들은. 무노동무임금이 원칙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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