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나오는 말이다.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행동한다면.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모습만을 보인다면. 무슨 뜻인가. 내가 납득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다면 나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렵게 말할 것 없다. 내 기준에 맞아야만 그들을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다. 도대체 호모포비아와 차이가 무엇인가.


어째서 퀴어축제는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때로 불편하고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한 과장된 모습들을 보이는 것인가. 의도적으로 일반 대중의 불쾌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겠는가. 그런다고 당신들이 우리를 어쩔 것인가. 당신들이 불편하게 불쾌하게 여기는 그들 역시 바로 우리들이기도 하다. 그런 불편함과 불쾌감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그토록 불편하고 불쾌해도 그 또한 이 사회의 구성원의 하나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싫다. 그 불쾌함이 싫다. 그마저 자신이 원하는 기준에 맞춰야겠다. 자신이 바라는 기준에 맞춰야만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겠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받을 수 있도록 행동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인 자신들에 맞춰야 한다. 말했잖은가. 바로 그것이 포비아의 시작이라고. 항상 다수의 입맛에 맞는 모습만을 보일 것이면 무엇하러 그들은 소수자로서 우리 사회의 변방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같은 상당히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이 배려다. 상대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끔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먼저 이해하려 노력한다. 최소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상대를 단정짓지 않는다.


모든 혐오와 차별은 원래 이상적인 대상을 전제한다. 일반의 보편적인 기준에 맞추어 그와는 다른 기준들마저 평가하려 한다. 그러므로 잘못되었다. 남성이 바라는 여성이 아니기에, 다수가 바라는 소수자가 아니기에. 그러므로 그들은 잘못되었다.


여전히 반복된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포비아가 아니다. 혐오도 차별도 하지 않는다. 단지 보편의 상식에서 벗어난 비일상의 모습이 불편하고 불쾌할 뿐이다. 딴 며칠 일 년 가운데 아주 짧은 동안만 허락된 복장이다. 평소 그러고 사는 것도 아니다.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도 않는다.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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