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란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 벨 수 있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자신을 벨 수 없다면 타인도 벨 수 없다. 특정인만을 벨 수 있는 칼은 정작 필요한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칼의 날카로움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은 물론 심지어 자식마저 희생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칼을 뽑았다. 자신있게 휘둘렀다. 아니 아예 난도질을 했다. 정치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도덕성이다. 도덕성이야 말로 한국정치가 추구해야 하는 진실한 가치이며 새로운 정치다. 그런데 정작 자기 당 자기 사람에게서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과연 그 칼은 자기 당 자기 사람 자기 자신에게까지 휘두를 수 있는 칼인가. 자신마저 벨 수 있는 그런 칼인가.


작년 안철수가 도덕성을 앞세워 문재인을 흔들려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안철수를 걱정했다기보다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을 걱정했다. 그런 식으로 지나치게 도덕적인 선명성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스스로 선명성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도덕성을 강조한 만큼 더 엄격하게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해서도 도덕성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새누리당이었다면 이슈가 되지 않는다. 그러려니 심지어 지지자들도차 아무일없이 넘어간다. 더민주였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더구나 유력대선주자인 문재인이 가장 우위에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도덕성이다. 더민주의 도덕성에 흠결이 생기면 바로 대선주자인 문재인에게까지 영향이 간다. 그리고 문재인이 받는 타격은 다시 더민주에게로 돌아온다. 그런데 하물며 새정치였다. 거대양당을 비판하며 대안세력으로서 지지를 호소하며 자리잡은 3당이었다. 그런 정당에서 다른 정당에서도 보기 힘든 구태의 비리가 사실이 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중의 인식이 어떨까?


기소만 되어도 당원권을 박탈해야 한다. 기소된 국회의원의 지역구에는 공천도 해서는 안된다. 비례대표 역시 계승해서는 안된다. 모두 안철수 자신이 새정치민주연합을 뛰쳐나오기 전 문재인을 비판하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이 다시 그대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모두가 지켜본다. 과연 안철수는 자신의 당 소속 국회의원의 불법과 부정에 대해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가. 안철수 자신이 한 말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출당되어야 하고, 그들이 가진 의석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럴 수 없을 것을 알기에 차라리 비판하기보다 비웃으려 한다. 차라리 잘못이기보다 어리석음이다.


시험대에 섰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말을 번복할 것인가. 그렇다고 당대표로서 쉽게 소속정치인을, 그것도 측근을, 심지어 당의 의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다. 어쩌면 뜻밖에 안철수의 그릇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좀 어이없는 사건이다. 너무 뻔하다.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티나게 해먹지 않는다. 들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면 들켜도 문제가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도 아니면 아예 몰랐다. 차라리 우습기조차 하다. 여러가지로 웃게 만드는 사건이다. 전혀 남이면 재미있다.


"여어, 일어났나?"

"어, 고든?"


아마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 사이 200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200년만에 만나는 고든의 얼굴은 15초 전에 보았던 그대로일 뿐이었다.


"이래서야 원 잔 것 같지도 않군."

"흐흐흐... 그렇지?"


무려 1091년에 걸친 원정이었다. 그러나 실제 원정에 자원한 승무원들이 인식하는 시간은 고작 일주일 정도에 불과했다. 200년마다 한 번씩 번갈아 깨워서 데이터로 추출한 의식의 상태를 점검하면 그때나 겨우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는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매번 데이터형태의 의식을 완벽하게 이식하기 위해서 이전의 몸과 똑같이 완벽하게 몸을 구성해서 준비해 놓기 때문에 어색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다. 바로 어제, 아니 바로 의식이 추출되기 직전에서 눈만 잠시 감았다 뜬 듯한 기분이었다.


"별다른 건 없지?"

"그거야 에고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고..."

"하긴..."


사실 우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최소단위가 수십년이었다. 조금만 거리가 멀어지면 수백년은 기본으로 넘어갔다. 인간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다. 몸은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정신이 견지디 못했다. 


그래서 전쟁도 원래는 인간이 아닌 컴퓨터가 도맡아 했다. 인간이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원칙 때문이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원정을 위한 우주선에 탑승하고 있는 인원도 실제 전투원이라기보다는 전투가 끝난 뒤 점령하고 지배하는 행정적인 절차를 수행할 이들이었다. 기본적인 무기조차 한 번도 다루어 본 적 없는 이들이 그래서 절반을 넘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121년."

"금방이네?"

"네 번 째니까."

"아, 그렇지."

"자각이 없네."

"아아..."


주위를 둘러봐도 어차피 하얀 벽 말고 보이는 것은 없었다. 흔한 창문조차 없었다. 어차피 깨어있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하루 정도이니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장식 같은 것도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필요치 않았다. 바깥풍경을 보고 싶어도 수십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인 막막한 검은 공간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도 보통의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깨어나서 잠시 수다나 떨다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컴퓨터가 상태를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나면 다시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데이터로 돌아가 컴퓨터에 저장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미친 짓이야."

"당연히 미친 짓이지."

"도대체 나는 왜 이런 미친 짓에 자원한 거지?"

"인간이니까."

"아아..."


자원하면서도 항상 회의하고 있었다. 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무려 1091년이다. 그나마 공간도약이라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 넓은 우주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의 행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 정도 거리는 기본이었다. 고작 행성 하나에 자신의 깃발을 꽂기 위해 1091년이라는 막대한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것도 벌써 여섯번째였다.


"이번에는 몇 년이나 갈까?"

"뭐 몇 년이나 가겠냐?"

"이번엔 네가 바로 하게?"

"못할 게 뭐 있어?"


고든의 말처럼 그런 게 인간이다. 불가능인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것. 단지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떠나고 보는 것. 그래서 여섯번째다. 여섯번이나 그곳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는 떠났고, 그리고 그때마다 반란이 일어나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 사실이 본성에 전해지면 다시 자원자를 모아 원정군을 꾸리고 징벌을 위해 떠나보낸다.


"내가 반란을 일으켜도 그 사실이 본성으로 전해지기까지 최소 천 년 이상, 어차피 나는 죽고 없을 테고 후손이 있어도 천 년이 넘어가면 그다지 느낌이 없어. 아마 지금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최초의 반란군과 유전적으로 이어졌는가조차 확실치 않은 전혀 생소한 누군가일 걸? 어쩌면 그 사이 본성보다 기술이 더 발달해서 군사적으로 우리를 압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말야. 한 마디로 일단 진압에 성공한다면 말이겠지."

"재미있겠는데?"

"그러라고 자원한 거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우주선에 타고 있는 원정군 가운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꽤 상당할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최소 3세대는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본성에서 그곳까지 사절이 도착하는데도 기본으로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말이 본성이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국의 존재를 3대가 지나도록 여전히 의식하며 정체성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시간은 갈수록 짧아졌다. 이번 반란 역시 도착하고 기존의 반란군과 손잡고 반역을 선언함으로써 고작 천 년만에 다시 원정군을 꾸리게 된 경우였다. 천 년만에 반란사실이 전해졌고 다시 천 년에 걸쳐서 진압군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여튼 부지런한 녀석들이라니까."

"그러자고 자원한 거라구."

"쯧..."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천 년이다. 왕복해서 2천년이다. 굳이 본성을 위한다고 반란진압에 목숨을 걸어봐야 오고가고 결과가 보고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기본으로 필요하다. 살아서가 중요하지 죽고 나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미 오래전 과학이 발견해 낸 유일한 진실이었다. 본성에 충성하려 원정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시공의 거리를 의식하는 순간 거리만큼 희석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만 문제라면 과연 오로지 전쟁만을 위해 세팅된 우주선과 컴퓨터를 어떻게 제압하는가 하는 것이다. 말했듯 전쟁은 컴퓨터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알아서 할 일이었다.


"바쁘게들 살아. 바쁘게들."

"흐흐흐흐..."


아직 한 번의 잠이 더 남았다.




----------------------


제국의 영역은 교통과 통신에 비례한다. 한 마디로 힘을 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명령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에 하나 외적이 침입하거나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 바로 전력을 투입하여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늦지 않게 받을 수 있고 그에 대한 대응을 적절한 순간에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제국의 영토가 역사의 발전과 비례하여 더욱 넓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그래서다.


아주 고대에는 도보로 이동했다. 전차는 이동에 제약이 있었다. 말이 등장했다. 역참이 등장했다. 배는 말보다는 느리지만 지형의 제약도 크게 받지 않으면서 한 번에 더 많은 인원과 물자를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철도가 등장했다. 전신이 등장했다. 무선이 등장했다. 비행기가 음속을 넘어 하늘을 날아다녔다. 사실상 지금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영토는 지구 전체다. 굳이 고정된 국경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하루만에도 타국을 무력화시킬 수단을 미국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 수단들에 들어가는 비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역사상 많은 제국들이 끝내 무너지고 만 또 하나 이유였다. 제국에 한계는 존재한다. 제국이 가질 수 있는 영토의 한계는 명백히 존재한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무리해서라도 한계를 넘어서까지 영토를 넓히려 한다. 알렉산더는 그렇게 넓힌 영토를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현지화를 시도했었다. 당제국은 한계를 넘어선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절도사를 두었었다. 하지만 조금만 틈을 보이면 한계를 넘어서 획득한 영토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는 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노리는 창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었다. 한계를 넘어선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비용이 들어가는데 정작 조금만 약점을 보여도 오히려 반란을 걱정해야만 했다. 제국의 최전성기는 그래서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는 지점이라 보아도 좋았다.


과연 우주에서도 지구에서와 같은 전쟁은 일어날 것인가. 건담에서와 같은 태양계 내에서의 전쟁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아직까지 인간의 지식으로 가능한 한계다. 은하계의 지름만 무려 10만 광년이다. 빛의 속도로 10만년은 날아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거리라는 뜻이다. 이 넓은 우주에 인간이 자리잡고 살아갈만한 조건의 행성은 몇 개나 될까? 그런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소설에서처럼 광속을 뛰어넘어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시공간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한계는 존재한다. 극단이기는 하지만 한 번 원정을 떠나는데도 수십수백년이 걸린다. 겨우 전쟁에서 승리해서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반란이 일어나면 알려지는데만 다시 수 세대가 걸린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데도 인간이 우주에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가능할까?


만일 외계인이 실제 존재하더라도 많은 SF에서 묘사하는 것 같은 그런 침략은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UFO가 실제 외계인의 우주선이라면 압도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지구와 지구인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익이 없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지구를 침략해서 지구를 정복하면 무엇하는가. 그래서 무언가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이 있으니 그런 수고도 감수하는 것이다. 설사 생기는 것이 있어도 남는 것이 있어야 비용이든 시간이든 투자할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역대의 모든 제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먼 미래도 역시 멍청한 짓거리를 반복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 항상 합리만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항상 합리만을 쫓았다면 지금의 인류의 문명은 없다.


바보짓이다. 한 마디로. 우주에서의 전쟁이란. 우주를 무대로 벌이는 정복이란. 하지만 원래 인간이라고 하는 자체가 바보들이다.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같은 바보짓을 반복한다. 이것이거나 아니면 이것이거나. 새벽의 망상이다. 오지 않을 먼 미래의 일이다.

솔직히 나 자신이 원래 자유주의자라서인지는 몰라도 기업의 법인세를 무작정 올리려는 것에 대한 반감이 조금은 있다. 경기도 어려운데 사정도 그리 좋지 못한 기업으로부터 법인세 얼마 더 걷어서 뭘 어쩌려는 것일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대한민국 시장을 과점하며 막대한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 대기업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취지에는 동의한다. 경제적인 이익에 대한 책임은 경제적인 것이 좋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두가지를 조화할까?


오늘 '썰전'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미국에서는 반독점법이라는 아주 강력한 법이 존재한다. 일정이상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질 때 기업의 분할까지도 명령할 수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법이다. 이 법으로 인해 독점적 지위에 있는 대기업들은 일정이상 시장을 독점하지 않기 위해서 경쟁자들을 배려해야 한다.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오히려 반기며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역시 반독점법은 나와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빌려 올 수 있다. 세수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증세는 필요하다. 한국경제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대기업에 대해 책임을 물려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기업활동 전반을 위축시키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아마 대충 여기까지 오면 눈치챘을 것이다. 법인세와 반독점법을 조합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일정규모 이상의 단일기업이 45% 이상, 복수기업이 70%이상 독점적 지위에 있을 때 추가시장점유율에 따라 차등적으로 차라리 시장을 포기하느 것이 나을 정도로 법인세를 인상해서 적요하는 것이다. 신규시장참여자, 혹은 일정규모 이하인 사업자에 대한 기술의 공개도 최소한으로 강제한다. 더 많은 시장참여자가 나와서 제대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대기업의 과점구조를 뺄 수 있도록.


물론 이상론이다. 현실이 그렇게 산수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고려해 볼 만 할 것이다. 무작정 법인세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몇몇 대기업에 의한 독점구조를 개선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경쟁하는 기업이 많아지면 그것만으로도 시장에는 활력이 돈다. 시장의 활력은 돈이다.


몇몇 대기업의 담합만으로도 시장의 질서가 무너진다. 공정한 경쟁 없이 시장은 결코 선의로 유지될 수 없다. 새로운 경쟁자가 끊임없이 시장에서 기득권에 도전해야만 한다. 경제가 강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고려해 볼 만하다. 망상이다.

유시민도 '썰전'에 나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평소 생각도 같고 추구하는 것도 같아서 넌즈시 영입을 제안하면 대부분 난색을 표하더라. 그리고는 얼마 지나니 2번당에 가 있더라. 사람들이 소수정당에서 정치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게 3당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총선이 끝나고 나서도 정치부 기자 가운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철수의 권력의지나 역량은 이제 입증되었다. 그런데 그 주위가 문제다. 결국 1번당도 2번당도 아닌 사람들이 모야 3번당을 만든 것이다. 1번당에서도 2번당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안철수에게 매달려 3번당을 만들게 된 것이다. 엄밀히 3당체제라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독자적인 노선의 3번당이 아닌 이도저도 아닌 나머지의 3번당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문제다. 안철수는 몰라도 안철수를 둘러싼 사람들이 너무 문제다.


정치란 결국 욕망의 관리와 통제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한다. 그래서 때로 실수도 저지르고 잘못도 저지른다. 그것을 사전에 제지하고 사후에 제제한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놓아보내지 않는 포용과 유연성이 필요하다. 잘못을 저질렀다고 매양 벌만 주려 한다면 결국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리더란 때로 주위를 대신해서 흙탕물도 묻히고 똥물에도 발을 담그고 해야 하는 것이다. 리더를 믿고 기댈 수 있어야 집단은 유지된다.


안철수에게 주어진 시련이다. 사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안철수가 했던 제안들은 너무 지나친 것들이 많았다. 대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당을 이끄는 리더의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전자였고 비판자였다. 비평가였고 평론가였다. 수십수백의 정치인들이 하나의 당 이름 아래 공존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을 수 없다.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어떻게 이 문제들을 수습할 것인가. 정치적으로 성장해 있을 것인가.


예상한 바다. 그나마 1번당이나 2번당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 있다. 무언가 마음대로 저질러 보려 해도 그것을 막아서는 장치가 충분치는 않더라도 갖춰져 있다. 상호견제와 감시도 가능하다. 작년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여러 문제들이 불거져나온 것도 계파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쟁계파에 꼬투리잡힐 일은 크게 벌리지 않는 최소한의 상식을 갖추고 있다. 안철수의 사당이다. 안철수와 친소관계로 당이 꾸려져 있다. 허술한 체계 역시 쉽게 유혹에 빠지도록 만든다. 단, 이것이 단지 개인의 일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괜히 거대양당이 아닌 것이다. 수많은 3당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당보다 더 왼쪽에 있는 인사들마저 결국 양당을 선택해야 했다. 현실을 본다. 안철수 개인이 어찌할 수 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결론일 뿐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은 아직 비주류에 머물러 있었다. 하는 사람들만 했다. 단지 인터넷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보통의 일반 대중과 다른 무언가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당연히 비주류로서 당시의 이른바 네티즌들은 사회의 주류에 도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유행하게 된 것이 바로 '엽기'코드였다.


엽기란 기성의 관습과 관성을 부수는 것이다. 기존의 인식과 사고를 부수는 것이다. 혐오스럽고 기분나쁠수록 그것은 옳은 것이었다. 당시도 차마 두려워서 클릭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유행처럼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김구라의 등장 또한 그런 연장에 있었다. 당시 기만적이고 권위적인 기성언론을 비판하며 상스럽고 저렴한 언어로서 인터넷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딴지일보의 한 컨텐츠로써 '김구라와 황봉알의 시사대담'은 시작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금기인 - 그것도 아주 지독할 정도의 욕설들을 공공연히 내뱉어가며 사회각분야를 씹어대는 방송은 그 가운데서도 열렬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 역시 당시 김구라의 방송을 즐겨 듣던 애청자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 당시 인터넷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김구라의 열렬한 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후련했다. 통쾌했다. 아무도 그렇게까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입이 바로 간질간질한데 누구도 감히 나처럼 들을 욕해주지 않았었다. 불만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항상 불만은 넘친다. 그래서 여기 블로그에서도 내 글은 항상 표현이 거칠다. 세상에 불만이 많던 그야말로 아웃사이더를 위한 방송이었다. 그마저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2002년의 대선은 어쩌면 그같은 인터넷 대중들의 뿌리깊은 비주류의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 것이다. 인터넷이 대통령을 만들었다. 인터넷의 힘으로 마침내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인터넷은 비주류가 아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치면서 과감한 정책적 지원과 투자로 고도로 발달한 한국의 인터넷환경은 인터넷이라는 자체를 대중화 보편화시켰다. 이제는 인터넷 없이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인터넷을 지배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 네티즌이다.


이제는 오히려 평가하는 입장이 되었다. 사회의 기성권력에 도전하던 비주류에서 어느새 대상을 평가하고 때로 응징할 수 있는 또다른 권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문희준과 타블로였다. 백만안티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 가운데 자신들의 힘으로 문희준을 어떻게 해아겠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냥 놀이였다. 그냥 게임이었다. 그래서 더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것이다. 그에 비해 타블로의 경우는 타블로를 파멸시키겠다느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대중의 눈에 전과 전혀 다름없이 방송을 하는데도 꼰대라 불리게 된 김구라가 그 다라진 위사을 말해준다.


아니꼬운 것이다. 피곤한 것이다. 늬들이 뭔데 사실 일베를 만들어낸 것은 인터넷에서조차 어느새 권위를 앞세우기 시작한 일부 극성 네티즌들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깨시민이라 말하기도 한다. 전과 하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은데 이미 사회적 위치부터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실질적힌 힘이 그들의 손에 쥐어지고 있었다. 그 힘이 실제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수의 힘으로 더욱 인터넷에서 자신과 다른 소수자들을 억압한다. 반발하여 예전 그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엇나가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엽기다. 혐오와 공포와 불쾌감이 기존의 관성과 인식을 부수는 쾌감으로 돌아온다.


과거와 똑같다. 일베에도 그것은 단지 놀이다. 무언가를 실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일관된 의지가 없다. 공유하는 목표나 의식이 없다. 조롱하며 논다. 비웃으며 논다. 모욕하며 논다. 그런 자신들을 욕하는 것을 들으며 역시 계속해서 논다. 문희준을 욕하던 때처럼.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시 네티즌을 비웃던 기성의 권위들처럼 기성의 네티즌들은 인터넷을 경멸함으로써 자신의 정의를 달성한다.


솔직히 일베와 2000년 초반 유행하던 엽기코드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때 유행하던 것들 가운데는 당시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마저 상당했다. 그리고 이제 일베가 인터넷의 주류가 된다면 이번에는 또다른 엽기코드가 일베에 도전장을 내밀게 될까.


물론 가치의 문제다. 정의의 문제다. 인간으로서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선 표현들도 적지 않다. 비판한다. 부정한다. 이 사회가 고유하는 보편의 정의를 부정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권력이 바뀌기까지 기성의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틀렸다 여기지 않는다. 다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도전인 결국 반역으로부터 시작된다. 반역은 패역이다. 무도다.


문득 떠올랐다. 벌써 오래전 옛날이야기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김구라의 욕이 대중적 코드이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 불쾌해하고 혐오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즐겼다. 다른 일반의 대중이 보는 그 모습은 어땠을까. 역사는 반복하며 발전한다. 김구라는 스타MC로서 확실히 방송의 주류가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사실 일방적으로 더민주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원구성 협상에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던 것은 더민주 뿐이었다. 나머지 두 당은 되도 좋고 안되면 더 좋았다. 아예 대놓고 국회와 대립각을 세우던 청와대나 정치냉소주의에 힘입어 제 3당의 위치에까지 오른 국민의당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원구성이 안되고 계속해서 싸우는 모습만 보인다면 더 이득일 터였다. 보라. 국회가 일은 하지 않고 허구헌날 싸움질만 하고 있다.


안철수가 세비반납이라는 속이 뻔히 들여다 보니는 퍼포먼스로 대중에 어필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우리는 일하는 국회를 지향한다. 어서 하루라도 빨리 원구성을 끝내고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정작 더민주와 새누리당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느라 원구성 협상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다. 그러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그리고 그로부터 이익을 보는 것은 또한 누구일까.


산업통상자원위원회면 알짜 중의 알짜다. 원래 국민의당이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 교문위 역시 안철수가 직접 지명하여 요구한 것이기도 했다. 새누리당은 법사위, 운영위, 개획재정위, 정무위 등을 모두 가져갔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가며 국회의장을 지켜야 했는가 싶을 정도로 더민주가 크게 손해본 협상이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크게 양보하지 않았다면 원구성협상은 길어졌을 테고 그 책임은 모두 더민주에게로 돌아갔을 테니까. 새누리당의 뒤에는 청와대가 있고, 국민의당은 어차피 정치를 냉소하고 혐오하는 이들의 정서에 기댄다. 국회가 욕먹으면 오히려 이들은 이득을 본다. 더 열심히해서 욕먹는 경우란 원래 어디에나 있다.


그만큼 더민주의 정권교체에 대한 의지가 어느때보다 강하다 유추해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전이라면 국회의원 개인이나 계파의 이해 때문이라도 어느 위원회를 가지는가가 더 중요했을 수 있다. 어떤 위원회를 가져와야 어떻게 계파들끼리 나눠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제는 차라리 국회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국민의 지지를 놓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국회를 내주고 정권을 가져오겠다.


하기는 가장 가능서이 높은 때이기도 하다. 반기문은 의외로 상당히 약체다. 그나마 다른 새누리당 대선주자들은 반기문만도 못하다. 안철수가 새누리당의 지지율을 잠식할 것이다. 안철수 혼자서는 절대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지금의 추세만 이어간다면 다음 대선은 더민주의 것이다. 계산이 섰다. 어떻게 하면 대선에서 승리하고 자기도 그 위에 숟가락 하나 당당히 얹을 수 있을 것인가.


나쁜 게 아니다. 권력의지란 정치의 동력이다. 권력을 가지고자 하기에 사람은 정치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국회의장을 가지는 대신 상임위를 양보하고, 상임위를 양보하는 대신 국회에 대한 국민의 비판과 냉소를 피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이번 총선의 결과를 바탕으로 대선까지 노리는 큰 노림수가 보인다. 이번 전당대회만 잘 치른다면. 그놈들을 믿을 수 없다. 그래도 저력이 있는 정당이니까. 기대가 크다. 가능성이 높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지는 불인하다 말한 바 있었다. 인仁이란 곧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으로 해량할 수 없는 의지가 깃들어 오히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어느날 전혀 의도치 않게 고양이와 동거하게 되면서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나와 함께 하는 동안에도 고양이는 나와 전혀 별개로 존재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의도는 아랑곳없이 고양이는 고양이 나름의 방식으로 오늘도 살아간다. 받아들이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고양이를 버리게 되더라도 고양이는 결국 그렇게 자기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사람은 아닐까?


쉽게 착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혹은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다. 자신의 인지가 닿는 범위까지 결국 인식하게 된다. 의식하게 된다. 그 연장에서 인지를 넘어선 미지를 인식하고 의식한다. 모든 것이 나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의 논리와 의도가 모든 것과 상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가 내리는 것도, 바람이 부는 것도, 태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우주에서 신성이 폭발하고 유성이 떨어지는 것까지. 오히려 오래전에는 그런 것이 더 당연했다. 일상을 벗어난 현상에는 분명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나무를 심겠다고 땅을 파는데 정작 그 땅에 살고 있던 개미에게까지 그같은 의도가 전해질 것인가. 인간은 나무를 심지만 개미에게는 그저 살던 집이 어느날 느닷없이 부서지는 재앙이 닥쳤을 뿐이다. 인간이 나무를 심은 것이지만 살던 집이 부서진 자리에 난데없는 나무가 자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어떤 의지도 의도도 개미를 위해 있지 않다. 개미에게 닿아 있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개미에게 무심한 것이다. 설사 집을 잃고 헤매는 개미들이 불쌍하다고 구해주려 하면 그 마음은 개미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인간은 작다. 그리고 무지하다. 무능력하다. 당장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이미 존재한다. 그것마저 모두 이해하려는 것은 오만이고 만용이다. 사실 거기서 모든 문제들이일어난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억지로 이해한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데 스스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고 만다. 비틀린 인과를 억지로 끼워맞춘다. 이를테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넘치면 자르고, 모자르면 늘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고통받고 희생당하더라도 자기의 직관에 딱 들어맞는 결과가 아름답다. 인간이 세계를 파괴하게 되는 이유다.


그냥 존재한다. 그냥 일어난다. 그래서 알 수 있는 만큼만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한다. 동양과 서양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차이였다. 신은 해량할 수 없다. 신의 의지를 계량할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신의 것으로 내버려둔다. 인간의 인지와 의지가 부족함을 인정한다. 무모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까지 억지로 이해하려 허구의 개념들을 만든다.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며 안주하게 된다. 천지는 무심하다. 자연에는 인간의 정이나 마음이 없다. 무심하게 그저 별개의 독립된 존재로서 받아들인다. 과학의 시작이다. 현상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째서 진화론이 그토록 어려운가. 진화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경우가 결국 인간의 존엄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존엄하다고 반드시 필연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존엄과 인과 역시 단지 별개로서 존재한다. 다른 과학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인간을 위해 있지 않다. 과학은 오로지 과학으로서만 존재한다.


어느날 사고가 일어난다. 전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고, 누구도 잘못하거나 실수하지 않았다. 누구도 원인이 아니었고 책임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났다. 이미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신은 필요하다. 아무라도 아무것이라도 대답은 필요하다. 답을 구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간은 너무 가혹하다.


어쩌면 이것이 부처가 말한 입멸인지도 모르겠다.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다. 자신은 독립된 유일한 주체이며 객체다. 주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자신은 객체가 된다.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인과는 단지 우연일 뿐이다. 누구로부터도 무엇으로부터도 비롯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조차 우주에 비하면 너무 짧다. 인간의 삶에 있어 천 년도 아득하게 긴데, 지구의 시간으로는 백만년도 너무 짧다. 우주의 시간으로는 수억년은 거의 금방이다. 수백억년의 시간 속에서 고작 수십년이다. 차라리 막막함을 느낀다. 무모하며 무지하다. 그냥 받아들인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이번 신안 흑산도 사건을 보면서 문득 떠올렸다. 폐쇄집단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이를테면 어떤 이슈가 있다. 그러면 당연하게 개인들은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 가서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생각해?"


자신의 생각에 다수가 동의하면 그것이 곧 정의다. 그러므로 자신은 옳다. 그러므로 자신과 다른 의견은 틀렸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쉴드'다.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데 옹호한다는 뜻이다. 변호할 수 없는 대상을 변호한다는 뜻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너희는 틀린 답이다. 우리가 옳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인터넷에서 가장 큰 커뮤니티라고 해봐야 고작 수십만 정도다. 전체 인구에서 수십만이면 여전히 많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이라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커뮤니티도 인터넷을 벗어나면 얼마든지 있다.


정보의 바다라지만 의외로 경계를 갖는다. 경계가 없지만 의식이 경계를 만든다. 여기는 이런 성향이다. 여기는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오히려 이동이 자유롭기에 자기 입맛에 맞는 곳을 찾아간다. 그래서 확인한다.


"어떻게 생각해?"


그것이 과연 남혐인가. 아니면 여혐인가. 여성차별인가. 아니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인가. 그런데 그것을 여성에게 묻는다. 남성에게 묻는다. 객관화되지 못한 편향된 개인의 성향에 물어본다. 답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동의하므로 그것이 정의다.


오프라인과는 전혀 상관없이 온라인에서만 남혐여혐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많은 이슈들이 그렇다. 오프라인에서는 오히려 조용하다. 자기연마다. 자기단조다. 첨단화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비슷한 말들만 주고받다 보니 불순물이 사라진 순수한 극단만이 남게 된다. 인터넷은 섬이 된다. 오프라인에서는 문제가 되어도 온라인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되어도 자기들끼리는 문제가 안된다. 자기들이 보증한다.


그러고보면 일베라는 것도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극단의 논리와 비슷한 극단의 논리와 만난다. 자기들끼리 그것이 정의임을 확신하게 된다. 서로 자기들만의 근거와 논리를 주고받는다. 확신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옳다. 너희가 틀렸다.


인터넷은 섬이다. 대부분의 커뮤니티는 인터넷이라는 바다 위에 스스로 자신을 격리한 섬이다. 섬의 정의다. 자기가 편한 자기가 안전한 자기에게 동의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간다. 고착된다. 정체된다. 정체는 정체다.


인간의 의식이 가진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본능이다. 원래 인간은 아주 작은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던 존재였다.


나와 같네, 너와 다르네. 너의 생각은 모두와 다르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우리는 이것이 옳아. 바뀌지 않는다. 지겨울 정도로.


사실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것이다. 더 편해야 한다. 더 자유로워야 한다. 더 풍요로워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어쩌면 목적일 수 있다. 더 안락하고 더 여유롭고 더 평온한 삶을 위해 인간은 오늘도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아직 이르다. 현실과 맞지 않다. 우리와 맞지 않다. 그러므로 나중에. 조금 더 현실이 나아지면. 조건이 바뀐다면.


복지에 대한 일반의 시각을 알 수 있다. 복지란 시혜다. 원래 자기 것이기에 있는 것 가운데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나누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 쓰고 남은 것들 가운데 보상으로 큰 맘 먹고 뚝 떼어 주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분리한다. 개인의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아닌 국가의 하부구조로서의 개인을 정의한다.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 통일도 이루어야 한다. 주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위협도 해결해야지만 한다. 그때까지는 인내해야 한다.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견뎌야 한다. 그래야 그때부터 국민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전에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인간이 자원이다. 아무것도 없는 이 나라에 오로지 사람만이 나라를 위한 자원으로서 존재한다. 자원이란 수단이다. 도구다. 객체다. 주인이 아니다. 원래 주인이기에 국가에 자신의 권리를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나라부터. 나라가 잘 살고.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면 다른 나라 가서 살아라. 다른 나라 더 좋으면 그리 가서 살아라. 어렵더라도 힘들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물론 훌륭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훌륭한 사람들이 더 쉽게 더 편하게 더 어려움없이 자신의 삶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으면.


인간에게도 자격이 있다. 국민에게도 자격이 있다. 자격이 없으면 인간도 국민도 아니다.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어려운 이유다. 복지가 아니다. 인간의 기본권이다. 인간으로서 더 존엄한 삶을 누리기 위한 전제다.


경제가 더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이 잘 살기 위해서다. 북한이나 주위 강대국과의 위협이나 긴장관계를 해소해야 하는 것은 더 안전하게 평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것을 국가가 해야 한다. 그래서 개인은 국민이 되고 국가를 위해 세금과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 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변국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근본을 묻는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개인이 국가에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워낙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다. 국가를 위한 개인의 삶이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개인의 존엄과 가치란. 아직도 여전하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어렵다.


인간은 아주 작다. 지구도 아주 작다. 심지어 태양계마저 아주 작다. 인류가 - 아니 생명이 지구상에 타나난 시간도 아주 짧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인간은 매우 특별한 존재다. 생명이란 매우 특별한 의미이며 가치다. 우주적인 스케일에서 지구와 인간을 살펴본다. 생명의 존재와 의미를 생각해 본다. 과연 수백억광년의 우주에서 먼지와도 같은 지구위의 어떤 현상이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이 지금까지 알려진 물리법칙을 거스를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어차피 태양계를 벗어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은하계도 언감생심이다. 빛조차 닿지 않는 먼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이 우주적 규모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는가.


의식을 확장해간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우연이다. 무한에 가까운 우주에서 아주 우연히, 어쩌면 어디선가도 같은 과정이 일어났을 우연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마치 얼굴에 난 여드름처럼. 팔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그렇게 접근하면 진화란 매우 이해하기 쉽다. 진화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타나서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진화라는 과정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존엄을 설명할 수 없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조차 때로 너무 하찮기만 하다.


무한이다. 가끔 상상해 본다. 먼 우주로 나간다. 별조차 없는 막막한 공간과 시간에 자신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본다.


별로 대단한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의식 안에서 인간은, 그리고 생명은 대단하다. 인간에게 대단하고 특별하다. 아마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은 태양계는 커녕 자기가 사는 동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진화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