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도덕경에서 천지는 불인하다 말한 바 있었다. 인仁이란 곧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으로 해량할 수 없는 의지가 깃들어 오히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어느날 전혀 의도치 않게 고양이와 동거하게 되면서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나와 함께 하는 동안에도 고양이는 나와 전혀 별개로 존재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의도는 아랑곳없이 고양이는 고양이 나름의 방식으로 오늘도 살아간다. 받아들이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고양이를 버리게 되더라도 고양이는 결국 그렇게 자기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사람은 아닐까?


쉽게 착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혹은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다. 자신의 인지가 닿는 범위까지 결국 인식하게 된다. 의식하게 된다. 그 연장에서 인지를 넘어선 미지를 인식하고 의식한다. 모든 것이 나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의 논리와 의도가 모든 것과 상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가 내리는 것도, 바람이 부는 것도, 태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우주에서 신성이 폭발하고 유성이 떨어지는 것까지. 오히려 오래전에는 그런 것이 더 당연했다. 일상을 벗어난 현상에는 분명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나무를 심겠다고 땅을 파는데 정작 그 땅에 살고 있던 개미에게까지 그같은 의도가 전해질 것인가. 인간은 나무를 심지만 개미에게는 그저 살던 집이 어느날 느닷없이 부서지는 재앙이 닥쳤을 뿐이다. 인간이 나무를 심은 것이지만 살던 집이 부서진 자리에 난데없는 나무가 자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어떤 의지도 의도도 개미를 위해 있지 않다. 개미에게 닿아 있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개미에게 무심한 것이다. 설사 집을 잃고 헤매는 개미들이 불쌍하다고 구해주려 하면 그 마음은 개미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인간은 작다. 그리고 무지하다. 무능력하다. 당장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이미 존재한다. 그것마저 모두 이해하려는 것은 오만이고 만용이다. 사실 거기서 모든 문제들이일어난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억지로 이해한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데 스스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고 만다. 비틀린 인과를 억지로 끼워맞춘다. 이를테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넘치면 자르고, 모자르면 늘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고통받고 희생당하더라도 자기의 직관에 딱 들어맞는 결과가 아름답다. 인간이 세계를 파괴하게 되는 이유다.


그냥 존재한다. 그냥 일어난다. 그래서 알 수 있는 만큼만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한다. 동양과 서양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차이였다. 신은 해량할 수 없다. 신의 의지를 계량할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신의 것으로 내버려둔다. 인간의 인지와 의지가 부족함을 인정한다. 무모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까지 억지로 이해하려 허구의 개념들을 만든다.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며 안주하게 된다. 천지는 무심하다. 자연에는 인간의 정이나 마음이 없다. 무심하게 그저 별개의 독립된 존재로서 받아들인다. 과학의 시작이다. 현상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째서 진화론이 그토록 어려운가. 진화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경우가 결국 인간의 존엄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존엄하다고 반드시 필연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존엄과 인과 역시 단지 별개로서 존재한다. 다른 과학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인간을 위해 있지 않다. 과학은 오로지 과학으로서만 존재한다.


어느날 사고가 일어난다. 전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고, 누구도 잘못하거나 실수하지 않았다. 누구도 원인이 아니었고 책임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났다. 이미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신은 필요하다. 아무라도 아무것이라도 대답은 필요하다. 답을 구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간은 너무 가혹하다.


어쩌면 이것이 부처가 말한 입멸인지도 모르겠다.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다. 자신은 독립된 유일한 주체이며 객체다. 주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자신은 객체가 된다.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인과는 단지 우연일 뿐이다. 누구로부터도 무엇으로부터도 비롯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조차 우주에 비하면 너무 짧다. 인간의 삶에 있어 천 년도 아득하게 긴데, 지구의 시간으로는 백만년도 너무 짧다. 우주의 시간으로는 수억년은 거의 금방이다. 수백억년의 시간 속에서 고작 수십년이다. 차라리 막막함을 느낀다. 무모하며 무지하다. 그냥 받아들인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이번 신안 흑산도 사건을 보면서 문득 떠올렸다. 폐쇄집단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이를테면 어떤 이슈가 있다. 그러면 당연하게 개인들은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 가서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생각해?"


자신의 생각에 다수가 동의하면 그것이 곧 정의다. 그러므로 자신은 옳다. 그러므로 자신과 다른 의견은 틀렸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쉴드'다.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데 옹호한다는 뜻이다. 변호할 수 없는 대상을 변호한다는 뜻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너희는 틀린 답이다. 우리가 옳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인터넷에서 가장 큰 커뮤니티라고 해봐야 고작 수십만 정도다. 전체 인구에서 수십만이면 여전히 많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이라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커뮤니티도 인터넷을 벗어나면 얼마든지 있다.


정보의 바다라지만 의외로 경계를 갖는다. 경계가 없지만 의식이 경계를 만든다. 여기는 이런 성향이다. 여기는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오히려 이동이 자유롭기에 자기 입맛에 맞는 곳을 찾아간다. 그래서 확인한다.


"어떻게 생각해?"


그것이 과연 남혐인가. 아니면 여혐인가. 여성차별인가. 아니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인가. 그런데 그것을 여성에게 묻는다. 남성에게 묻는다. 객관화되지 못한 편향된 개인의 성향에 물어본다. 답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동의하므로 그것이 정의다.


오프라인과는 전혀 상관없이 온라인에서만 남혐여혐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많은 이슈들이 그렇다. 오프라인에서는 오히려 조용하다. 자기연마다. 자기단조다. 첨단화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비슷한 말들만 주고받다 보니 불순물이 사라진 순수한 극단만이 남게 된다. 인터넷은 섬이 된다. 오프라인에서는 문제가 되어도 온라인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되어도 자기들끼리는 문제가 안된다. 자기들이 보증한다.


그러고보면 일베라는 것도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극단의 논리와 비슷한 극단의 논리와 만난다. 자기들끼리 그것이 정의임을 확신하게 된다. 서로 자기들만의 근거와 논리를 주고받는다. 확신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옳다. 너희가 틀렸다.


인터넷은 섬이다. 대부분의 커뮤니티는 인터넷이라는 바다 위에 스스로 자신을 격리한 섬이다. 섬의 정의다. 자기가 편한 자기가 안전한 자기에게 동의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간다. 고착된다. 정체된다. 정체는 정체다.


인간의 의식이 가진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본능이다. 원래 인간은 아주 작은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던 존재였다.


나와 같네, 너와 다르네. 너의 생각은 모두와 다르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우리는 이것이 옳아. 바뀌지 않는다. 지겨울 정도로.


사실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것이다. 더 편해야 한다. 더 자유로워야 한다. 더 풍요로워야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어쩌면 목적일 수 있다. 더 안락하고 더 여유롭고 더 평온한 삶을 위해 인간은 오늘도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아직 이르다. 현실과 맞지 않다. 우리와 맞지 않다. 그러므로 나중에. 조금 더 현실이 나아지면. 조건이 바뀐다면.


복지에 대한 일반의 시각을 알 수 있다. 복지란 시혜다. 원래 자기 것이기에 있는 것 가운데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나누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 쓰고 남은 것들 가운데 보상으로 큰 맘 먹고 뚝 떼어 주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분리한다. 개인의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아닌 국가의 하부구조로서의 개인을 정의한다.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 통일도 이루어야 한다. 주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위협도 해결해야지만 한다. 그때까지는 인내해야 한다.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견뎌야 한다. 그래야 그때부터 국민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전에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인간이 자원이다. 아무것도 없는 이 나라에 오로지 사람만이 나라를 위한 자원으로서 존재한다. 자원이란 수단이다. 도구다. 객체다. 주인이 아니다. 원래 주인이기에 국가에 자신의 권리를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나라부터. 나라가 잘 살고.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면 다른 나라 가서 살아라. 다른 나라 더 좋으면 그리 가서 살아라. 어렵더라도 힘들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물론 훌륭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훌륭한 사람들이 더 쉽게 더 편하게 더 어려움없이 자신의 삶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으면.


인간에게도 자격이 있다. 국민에게도 자격이 있다. 자격이 없으면 인간도 국민도 아니다.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어려운 이유다. 복지가 아니다. 인간의 기본권이다. 인간으로서 더 존엄한 삶을 누리기 위한 전제다.


경제가 더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이 잘 살기 위해서다. 북한이나 주위 강대국과의 위협이나 긴장관계를 해소해야 하는 것은 더 안전하게 평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것을 국가가 해야 한다. 그래서 개인은 국민이 되고 국가를 위해 세금과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 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변국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근본을 묻는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개인이 국가에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워낙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다. 국가를 위한 개인의 삶이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개인의 존엄과 가치란. 아직도 여전하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어렵다.


인간은 아주 작다. 지구도 아주 작다. 심지어 태양계마저 아주 작다. 인류가 - 아니 생명이 지구상에 타나난 시간도 아주 짧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인간은 매우 특별한 존재다. 생명이란 매우 특별한 의미이며 가치다. 우주적인 스케일에서 지구와 인간을 살펴본다. 생명의 존재와 의미를 생각해 본다. 과연 수백억광년의 우주에서 먼지와도 같은 지구위의 어떤 현상이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이 지금까지 알려진 물리법칙을 거스를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어차피 태양계를 벗어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은하계도 언감생심이다. 빛조차 닿지 않는 먼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이 우주적 규모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는가.


의식을 확장해간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우연이다. 무한에 가까운 우주에서 아주 우연히, 어쩌면 어디선가도 같은 과정이 일어났을 우연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마치 얼굴에 난 여드름처럼. 팔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그렇게 접근하면 진화란 매우 이해하기 쉽다. 진화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타나서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진화라는 과정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존엄을 설명할 수 없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조차 때로 너무 하찮기만 하다.


무한이다. 가끔 상상해 본다. 먼 우주로 나간다. 별조차 없는 막막한 공간과 시간에 자신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본다.


별로 대단한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의식 안에서 인간은, 그리고 생명은 대단하다. 인간에게 대단하고 특별하다. 아마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은 태양계는 커녕 자기가 사는 동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진화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장 물에 빠져 죽게 생겼는데 다른 것 생각할 여유따위는 없다. 그냥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다. 그냥 팔다리가 알아서 움직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물위에 떠있기 위해서. 아무거라도 잡고 버틸 것을 찾기 위해서. 눈으로 보고 찾으면 늦다. 손에 닿는 대로 바로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텨야만 한다. 때로 사람을 구하려다가 덩달아 물속으로 끌려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두운 밤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누군가 뒤에서 자신의 팔을 잡아끈다. 손에 칼이 들렸으면 일단 휘두르고 보는 것이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인데 역시 자신과 함께 며칠 굶은 이웃이 한 줌 먹을 것을 장만해 왔다. 그래도 남의 것이니까. 자기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일단 내가 먹고 살아야 한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않는 사람이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원래 정의도 윤리도 도덕도 배부른 사람들이나 따지는 한가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남혐과 여혐 논란의 근본원인이다. 일단 여성들은 남성들의 폭력이라는 직접적인 위협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길에서도 낯선 그림자만 보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한다.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눈과 입과 손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부조리의 원인이 누구로부터 비롯되는가.


남성 역시 그렇지 않아도 현실을 살아가기가 고달프다. 그래도 남자라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거의 세뇌되다시피 주입받으며 자랐다.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번듯한 직장을 잡아야 한다. 여성들과 경쟁해야 한다. 자신들의 절박한 처지를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다. 다 여성을 위해 그러는 것인데. 억울하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이 처한 열악하고 절박한 처지는 여성의 이기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굳이 줄세우기를 강요당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남들과 같아지기를 강제당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어렵더라도 힘들더라도 한심하더라도 그래도 자신은 살아간다. 자신을 살아갈 수 있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남들과 같아야 하니까. 남들보다 나아야 하니까. 여성들이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공포가 보다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라면 남성이 여서에 대해 느끼는 원망과 분노는 그보다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남성이기에 지워진 사회적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에 부합하지 못한 현실의 좌절과 절망, 무엇보다 그같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로서 길러진 자존감이다. 누군가에 탓을 돌리기라도 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모두 여성들 때문인데 여성이 자격을 잃어버렸다.


여성해방은 그래서 남성해방이기도 한 것이다. 여성주의는 또한 남성주의이기도 하다. 굳이 남성이 더이상 필요이상의 사회적 책임감을 독점하려 해서는 안된다. 진정 남녀평등이란 그냥 알아서 자기들끼리 사는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남성이기 이전에. 여성이기 이전에. 내 삶이고 나의 판단이며 선택이고 내 책임이다. 여성과 자신은 분리한다. 사회와 타인과 자신을 분리한다. 오롯한 자신의 삶이다.


날선 말들로 서로를 상처입힌다. 그리고 스스로 상처입고 만다. 다른 사람만 일방적으로 상처입힐 수 있는 말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옥 가시를 드러낸다. 사납게 벼려진 상처가 더욱 상대를 헤집으려 한다. 내가 살아야겠다. 어떻게든 내가 살려 한다. 필사적인 발버둥이고 비명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인지 자신도 모르기에 막연히 쏟아내는 울음소리다. 서로가 가해자고 서로가 피해자다. 진짜 가해자는 다른 곳에 있다.


누군가를 원망해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거의 드물다. 그래도 위로는 된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할 수 있다. 차라리 미워하기라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이지는 않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을 속이고 만다. 그렇게밖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체념이고 절망이다. 자포자기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도 좋다.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끝낸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무섭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어째서 남성이 여성보다 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데 여성에 대해서만 그렇게 민감한가. 사실 굳이 그렇게 길게 어렵게 쓸 것도 없다. 여성이 피해자인 대부분의 범죄들은 거의 피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피해자가 여성인 것을 노리고 범인들은 범죄를 저지른다. 반면 남성이 피해자인 대부분의 범죄는 특별히 남성을 특정하여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여성 혼자 있으니까. 집에 젊은 여성이 혼자 살고 있으니까. 어두운 밤길에 여성이 혼자 길을 걷고 있으니까. 술을 마시는데 여성이 인사불성으로 만취해 있으니까. 아니 그 전에 술자리에 여성이 끼어 있으니까. 과연 그 많은 범죄 가운데 여성이 아닌 남성을 특정하여 이처럼 일어나는 범죄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여성을 특정하여 일어난 범죄들의 경우 가해자의 성별은 또한 어떻게 될까.


남성이 성범죄를 제외한 다른 강력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으니까. 절대적인 피해자의 수가 여성보다 많다. 가해자도 남성이 더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들은 여성처럼 밤늦었다고 조심해서 일찍 들어가거나 하지는 않는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낯선 타인을 경계하여 피하거나 숨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다수 범죄에 있어 희생자는 여성이다. 여성인 것을 이유로 범죄는 일어난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신안 흑산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의 경우도 피해자가 남성이었다면 그같은 사건이 일어났을까? 성범죄가 아닌 다른 범죄였어도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조심성이 없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자각조차 없는 듯 경찰조사를 받는 태도마저 당당했더란다. 단지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남성인 가해자들은 더 당당하게 피해자를 억압하고 협박하기도 한다. 남성이라는 위세를 빈다.


성범죄를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강력범죄에 있어 거의 압도적인 다수의 경우에 남성이 가해자다. 남성인 피해자를 제외하고도 가해자가 남는다. 여성피해자와 여성가해자를 따로 계산하면 결국 나머지는 남성 가해자에 의한 여성 피해자들이다. 성범죄를 빼고도 그렇다.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남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꺼려해야 한다. 불편해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슬픈 것이다. 안타까운 것이다.

아마 더민주에서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최소 두 자리는 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안된다. 딱 한 사람만 이 바람을 만들고 스스로 탈 수 있다.


오로지 더민주여야 하고, 오로지 특정 후보여야만 한다. 딱 한 번만 쓸 수 있다.


다만 여기다 쓰면 천기누설이 되기 때문에.


아마 이 글 보는 사람 가운데도 어렴풋 짐작하는 사람 있지 않을까.


다음 대선에서 더민주의 승리를 점쳐보는 이유다.


그것만 가능하면. 재미있어질 것 같다.

정의에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정의가 존재한다. 하나는 보편이고, 다른 하나는 합의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경험을 벗어난 선험의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실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할 수 있는 자신과 주위를 벗어나 그를 넘어선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 그것은 신이라 불리웠고, 그리고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면서 정의라는 이름이 그것을 대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정의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보편적 정의에 부합하는가. 일반적인 가치와 충돌하지는 않는가. 무엇보다 과연 보편이란 무엇인가. 일반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보편과 일반의 기준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주 최근까지도 흑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백인 이외의 다른 인종은 같은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 배웠기에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주위에서 잘했다 칭찬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정의란 인종을 초월한 인간에 대한 존중인가, 아니면 인종에 따른 엄격한 구별과 차별인가.


국가의 법이 존재한다. 사회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윤리와 도덕이 존재한다. 그 이전에 자기들끼리 약속한 자기들만의 법이 있다. 자기들만의 윤리와 도덕이 있다. 외부와 일부러 단절한다. 오로지 내부의 논리로만 사고하고 판단한다. 전근대사회가 그랬다. 아직 보편적인 권력도, 일반적인 공동체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 자기 사는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만 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과 판단 또한 자기들끼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었다. 인류보편의 가치야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의 법이나 사회의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관습과 법마저 무시한다. 우리들끼리 옳다 했으니 그것이 옳다.


역시 역사적 맥락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하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 한반도를 지배한 것은 이방인인 일본인들이었다. 이승만 이래 역대 독재정권에서 권력이란 국민과 유리된 그들만의 어떤 것이었다. 국민의 합의에 의해 법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 사회적 가치와 정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보편의 세계란 인식하기도 어렵고 그를 따르기란 더 어렵다. 경험의 세계에 머문다.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보편과 일반의 세계보다 항상 얼굴을 맞대는 직접적인 관계에 의지한다.


하기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절대 아니다. 다만 그같은 경향이 유독 강한 것에는 그런 영향도 적지 않다 해야 할 것이다. 상당수 아직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 소외된 집단에서도 그같은 경향은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보편적인 권력에 대한 인식도 없고,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 이외의 일반적인 세계에 대한 의식도 없다. 자기들끼리만 납득한다. 우리가 옳다면 옳다.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면 틀리지 않았다.


사실 인터넷에도 - 아니 오히려 외적인 권위나 권력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기에 역시 더 강하게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서로에게 묻는다. 맞는가. 옳은가. 서로가 맞다고 옳다고 하면 그것은 맞는 것이고 옳은 것이 된다. 정의가 되고 윤리가 되고 도덕이 된다. 규범이 되고 규준이 된다. 인터넷 문화의 배타성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 우리가 옳다고 결론내렸다. 우리가 맞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았고 맞았다.


법이 금지한 행위다. 노예든, 아니면 규정을 벗어난 부정이든. 하지만 자기들끼리 괜찮다. 자기들끼리 문제없다 정의한다. 그러므로 아무렇지 않다. 검찰이 돈을 받고 수사권과 기소권을 남용해도 관행이니까. 서로 좋자는 것이니까. 지역사회에서 누가 불법으로 노예를 부려도 서로 괜찮다 합의했으니까. 그러므로 오히려 내부의 논리를 부정하고 그같은 사실을 알리는 자체가 더 큰 잘못이다.


보편의 세계를 복구해야 한다. 인류보편의 가치가 적용되는 보다 넓은 선험적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인류란 나와 너가 아니다. 우리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모두다. 생명이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일컫는 것이다. 교육부터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너는 너다. 너만 잘되면 된다. 타인과의 비교는 결국 타인과 자신을 유리시킨다. 저들은 나도 우리도 결코 아니다.


돌고 돌아 결국 모두가 이어진다. 오히려 군 내부의 논리에 의해 옹호되는 군비리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전관예우, 그리고 퇴직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외주회사와 서울메트로간의 유착까지. 여성들이 느끼는 현실의 공포에 대해서도 남성들은 스스로 서로에 묻고 확인하며 자신들의 정당성만을 굳건히 지키려 하고 있었다. 타인이다. 남이다. 상관없는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끼리.


통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섬이다. 북한으로 인해 대륙과의 연결이 막혀 있고, 바다는 일본이 에워싸고 있다.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렇지 않게 국경을 넘어 세계를 경험한다면 그만큼 대한민국이라는 완고한 틀을 벗어나 사고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국경을 넘기가 너무 어렵다. 인터넷시대에도 결국 앞서 말한 것처럼 자기가 동의하는 내용들만을 일부러 찾아본다.


근본의 문제다.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도 처벌되지 않는다. 내부의 논리에 의해 은폐되고 외부집단과의 결탁에 의해 무마된다. 법이 의미가 없다. 보편의 윤리와 도덕이 전혀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술을 먹었으니까. 그때 내게 사정이 있었으니까. 원래 그래오던 것이었으니까. 의지조차 없다. 국가라면 당연히 국가라는 단일한 정체성 아래 공적인 규범이 규준으로써 적용되어야 한다. 소집단에 그저 아부하는데만 열심이다.


우리가 좋으니까. 우리가 옳으니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게 결정했으므로 성폭행당한 것보다 그것을 세상에 알린 것이 더 큰 문제다. 불법을 저지르고 비리를 저지르는 것보다 내부의 논리를 배반하고 외부에 그것을 알린 자체가 더 큰 잘못이다. 닫히고 분리된다. 우리는 우리끼리. 오히려 사회가 그들의 눈치를 본다. 한국사회의 현주소다. 봉건사회다. 누구도 보편의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흥미롭다.

내가 인정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역지사지라는 말도 싫어한다. 정의는 보편적이다. 그리고 일반적이다. 그 말은 곧 인격이 없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다. 누구도 정의를 소유할 수 없다. 사람을 위해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 원래부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성의 역사란 원래 있는 그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아직도 인간은 그런 과정 위에 있다.


그런데 인정은 다르다. 인정은 철저히 개인에게 귀속된다. 그리고 대개는 현실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더 직접적이기도 하다. 그 사람은 착하다. 성실하다. 예의바르다. 주위에 두루 잘한다. 하지만 그 평가조차 결국은 그를 지켜보는 주위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테면 동네사람 누군가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 사실이 알려졌다. 한 사람은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실을 감추려 움직였다. 누가 더 인정이 있는가.


그래서 역지사지라는 말도 싫어한다. 네가 그 입장이 되어 보라. 네가 그 성폭행범의 입장이 되어 보라.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세상의 비난을 받고 법적인 처벌까지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보라. 눈앞에 무방비의 여자가 있는데 너라고 눈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거랑 별개다. 네 가족이 그렇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는데 너라면 참고만 있겠는가. 당연히 참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참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이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 감정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간을 저열한 감정과 욕망의 노예로 격하시킨다.


폐쇄된 시골마을에서 곧잘 이같은 끔찍하고 말하기에도 괴기스런 사건들이 곧잘 일어나게 되는 이유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싸준다. 인정이 넘친다. 그래서 그 인정을 위해 때로 타인을 희생시킨다. 자기 마을 사람이 아니라면 - 즉 서로 인정을 공유하는 '우리'라는 집단에 들어 있지 않다면 기꺼이 그 인정을 위해 대상을 희생시키려 한다. 서로 좋으니까. 서로가 기쁘면 그만이니까. 내일도 보고 모레도 봐야 할 상대다. 그런 사람이 불편한 것이나 그로 인해 자기가 불편한 것을 피할 수 있다. 어차피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자기들끼리 결정하면 폐쇄된 환경에서 그런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여러 해 전 이슈가 되었던 섬노예 사건도 결국 그런 연장이었다. 마을사람 모두 - 심지어 경찰들까지 섬노예의 존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편해지기 싫다. 그냥 이대로 좋은 채 지내고 싶다. 그냥 하찮은 노예 하나 희생시키면 되는 일이다.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한다. 인정의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의 거리에 비례한다. 보편적인 인간이란 보편적인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익숙한 인간의 관계가 보편의 정의와 윤리를 대신한다. 법마저 그 완고한 인정의 고리를 파고들지 못한다. 완벽하게 닫혀 있는 그들만의 세계다.


분명 시골이 도시보다 인심이 좋다. 인정이 많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서로 좋기 위해서. 서로 편하기 위해서. 차라리 피해자를 비난한다. 피해자를 마을에서 쫓아낸다. 너희가 마을 물을 다 흐려놓았다. 너희로 인해 마을의 체면이 떨어졌다. 그렇게 피해자만 쫓아내고 나면 다시 전처럼 문제없이 살수 있다. 죄인가의 여부마저 자기들끼리 결정한다. 서로의 관계를 고려해가며. 그것이 그들의 정의이며 윤리이며 도덕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 대중문화를 통해 이해하는 바로 세계 어디에나 비슷한 문제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때로 시골이라는 공간이 공포와 스릴러의 배경으로 흔하게 쓰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편의 정의가 사라지고 개인의 인정이 지배하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넘어가는 원시사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다. 인간은 정의를 추구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지성이다. 우울한 현실이다.

그러고 보니 실제 그런 회사가 있었다.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하기까지 준비도 하고 회의도 하고 해야 하니 그 시간까지 감안해서 더 일찍 출귾해야 한다. 그래서 실제 출근시간은 공식적인 업무시간보다 1시간이 더 이르다던가? 이게 왜 문제인지 이해 못한다면 할 수 없다.


국회의원으로서 일을 시작하려면 먼저 준비를 해야 한다. 원구성 역시 그 하나다. 어느 당이 어떤 상임위를 맡고, 또 상임위는 어떤 의원들로 구성하고. 일단 그것부터 끝내야 일을 시작할 것 아닌가.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협의과정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른 만큼 타협과 양보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국회의원의 업무와 무관한가.


누가 CEO 아니랄까봐. 참고로 저 위에 말한 회사 역시 IT쪽이다. 빌어먹을 열정페이는 뭣나게 챙겨 강요한다. 공정성장론에 노동자의 권리는 없다. 있어도 거짓이다. 업무를 위한 준비과정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를 위한 노력과 비용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일단 일을 시작해야 일을 하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다. 한 편으로 당연하기도 하다. 이렇게 써놔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이 한국사회에서는 다수다. 오히려 당사자인 노동자들이 반성한다. 내가 일을 못해서 회사가 이익을 내지 못했다. 그러면 경영자 하면 된다.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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