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낚시란 잡을 물고기를 특정하여 미끼를 던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미끼를 던지고 물고기가 그것을 물면 그제서야 낚아 올리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당연히 미끼야 상관할 바 없다. 당연히 미끼는 배고픈 놈이 먼저 문다. 아니면 욕심이 많거나.


정치란 그와 같다. 대중의 지지가 필요한 정치인들은 일단 아무것이나 대중이 좋아할만한 미끼부터 던지고 본다. 대중이 흥미를 가지고 지지를 보낼만한 이슈를 꺼내서 던지고 반응을 기다린다. 때로 재촉하기도 하지만 역효과가 날 수 있으므로 유능한 정치인은 신중하고 인내심이 강하다. 그렇게 대중이 일단 미끼를 물고 자신이 의도한대로 움직여주면 그 다음에는 어차피 미끼는 그냥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처음부터 정치인과 대중은 추구하는 목표 자체가 다르다. 정치인은 항상 저 위를 본다. 더 높은 지위와 더 강한 권력을 가지기 위해 그들은 정치라는 것을 한다. 대중이 바라는 것은 소박하다. 당장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그래서 대중은 쉽게 정치를 불신하게 된다. 자신이 바라는 것과 정치인이 추구하는 것이 실제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미끼를 문다. 대중은 정치인이 던진 미끼를 문다. 소박하다. 순진하다. 그래서 순수하게 믿어 버린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이것이야 말로 진심일 것이라고. 성급하게 달려들어 미끼를 물고는 바로 후회하고 만다. 배신당한다. 그렇다고 정치인만의 책임인가. 하지만 한 편으로 그렇다면 반대편에 있는 또다른 정치인들은 어째서 그와 같은 먹음직한 미끼를 던지지 않았던 것일까.


낚일 수밖에 없다. 항상 물고기들은 굶주려 있다. 대중 역시 굶주려 있다. 불만족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미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놓치지 않으려. 더이상 굶주리지 않으려.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런데 미끼는 항상 복수로 던져진다. 그래야 한다. 그 가운데 훨씬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은 미끼를 선택하여 문다. 그 정도 이성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반대편에서는 그만큼 매력적인 미끼를 준비하지 못한 것일까.


브렉시트를 단순히 선동한 정치인이나 그에 부화뇌동한 대중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몰아가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면 EU는 그동안 영국의 대중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런 영국의 다수 대중들을 위해 어떤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들려주었는가. 그래서 그나마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었다. 단지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쪽이 더 우세했을 뿐이다.


정치의 근본이다. 정치와 대중의 관계의 기본이다. 정치인은 낚시하는 사람이다. 대중은 그에 낚이는 물고기다. 한 편으로 낚시꾼들은 낚시를 통해 물고기들에게 본능을 충족시킬 먹이를 제공한다. 정치인 역시 대중의 욕망에 봉사하게 된다. 낚이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낚시꾼이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자칫 물고기가 죽거나 도망치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그래서 항상 정치인과 대중은 긴장관계에 있어야 한다. 자칫 미끼만 떼이고 허탕칠 수 있다. 기껏 잡아놓고도 물고기를 놓칠 수 있다. 물고기가 죽어서는 안된다. 살아있어서 더 가치있는 물고기여야 한다. 쉽게 지지를 내주어서는 안된다. 너무 쉽게 보았다. 자신들의 선동에 넘어간 영국의 유권자들을 오히려 바보취급하고 있다. 정작 영국인을 바보취급하는 것은 영국독립파들 자신들이 아니었을까.


정치인과 대중의 관계설정이 실패한 대표적 사례를 보고 있다. 그리 낯설지는 않다. 어디선가는 항상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굳이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정작 유권자 자신이 책임을 물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떠들고 마음대로 선동하며 마음대로 낚시한 뒤 마음대로 미끼까지 거둬간다. 나는 이미 내가 목적한 모든 것을 이루었으므로 더이상 대중의 반발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소박하고. 그다지 야심이랄 것도 없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면 여기서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서는 안된다. 영국의 대중이 우습게 보였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그것으로 충분하거나. 그래도 상관없다. 여기서는 그래도 된다.


우스운 것이다. 그래도 역시 가장 책임을 묻게 되는 것은 어째서 반대편에서는 그만한 근거와 논리들을 대중에 들려주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투표하고 후회한다. 결과를 보며 반성한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역시 정치의 책임이다. 반대편 역시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재미있다.

여러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여자를 보았다.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여자를 구한다. 아니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여자의 위험을 외면한다. 과연 무엇이 이성이고 무엇이 감정일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것일까? 


본능으로 안다. 직관으로 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지. 단지 알고 난 뒤에 이유가 따라붙을 뿐이다. 어째서 옳은가. 어째서 틀렸는가.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인가. 그래서 그것들은 사실인가. 의심없는 진실인가.


어쩌면 이성처럼 사람에게 많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합리화라 말한다. 합리가 아니다. 정당화라 말한다. 정당이 아니다. 논리는 인간이 가진 고도의 지적활동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옳았고, 그러므로 손해였다. 이유가 판단을 결정한다.


강간은 나쁘다. 강간당하는 여자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여자를 도우려다가는 강간범들로부터 위해를 당할 수 있다. 강간범들을 물리치고 여성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내 힘이 못미치므로 나라도 살아야겠다. 그래서 틀렸는가.


EU체제에 대한 영국인들의 불신은 그동안 축적된 경험의 결과다. 실제 자신이 경험한 현실들의 누적이다. 그러므로 EU체제는 잘못되었다. EU가 자신들의 삶에 손해를 끼치고 있다. 다만 그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고 빠른 답을 찾는다. EU에서 탈퇴한다.


이미 여러 매체들을 통해 어째서 많은 영국인들이 EU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는가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영국인들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는 분석이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 무엇이 영국인들로 하여금 EU를 불신하고 EU에 반감을 가지도록 했는가.


실제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모든 대중의 판단은 옳다. 모든 인간의 선택은 타당한 근거를 가진다. 인간을 긍정함으로써 그 이유를 보다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은, 직관은, 본능은, 인간을 이루는 이미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영국인들은 어리석은가. 브렉시트에 찬성한 영국의 대중들은 지적으로 열등한 대상들인가. 그런 섣부름이 정작 중요한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이들이 원하지 않았던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는가.


아마 저 맨 위의 물음은 앞으로도 몇 번 더 인용될 것이다. 아주 오래전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화두였다. 어느 정도 답을 찾은 듯하다. 인간은 정의로운가. 인간은 이성적인가. 인간은 동물이기 이전에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것은 악이고 반대하는 것은 선인가. 전자는 감정이고 후자는 이성인가. 전자는 무지이고 후자는 지성인가. 인간을 그렇게 쉽게 나눌 수 있다면 세상에 혼란 따위는 없다. 냉정해진다. 흥미롭다.

원래 국가주의 국가에서 모든 생산과 소비는 국가를 단위로 이루어진다. 물건을 생산해서 팔면 그 이익은 모두 국가경제로 귀속된다. 자본가는 자본을 투자해서 공장을 짓고 생산을 하며, 생산된 상품을 시장에 내다팔아 이익을 남긴다. 그리고 그 이익은 다시 고용된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지급되며 이들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자본가가 가져간 이익 역시 시장에서 사용됨으로써 모든 가치는 시장에서 순환하며 소비된다.


그런데 세계화 이후 이같은 전통적 관계가 상당히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당장 생산에 투자되는 자본부터 다양한 국적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투자에 따른 이익의 상당부분은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향한다.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그 이익이 향하는 경로를 세금이 없는 다른 곳으로 틀어놓는 경우도 많다. 물건을 생산해서 시장에 내다팔아 이익은 많이 남겼는데 정작 그 이익이 그 나라의 사회와 개인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 아마 최근 크게 이슈가 되었던 옥시 역시 이런 중요한 사례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생산도 판매도 거의 국내에서 이루어지는데 정작 이익은 대부분 영국의 본사로 돌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옥시의 제품으로 인해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건만 어떤 책임도 가지지 않고 단지 이익만을 탐한다.


당연히 경제활동을 통해 이익을 얻었으면 세금을 내야 한다. 시장에서 이익을 얻은 만큼 사회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싫다고 자본은 국경을 넘는다. 세금도 내기 싫고 의무도 지기 싫다고 국경을 넘거나 아니면 정부를 협박한다. 국적자본이든 다국적자본이든 그런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보니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을 두고 국가가 경쟁해야 한다. 그 경쟁에서 희생되는 것은 결국 국가에 속한 사회이고 개인들이다. 자본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희박해지고 국가는 국부를 앞세워 사회와 개인에 양보를 강요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기보다 노동력들이 알아서 국경을 넘어 찾아오도록 국가를 압박한다. 메르켈이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 대단한 인도주의적인 신념 때문이라 여긴다면 순진한 것이다.


자본이라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기에 자본가들은 국가를 자신들을 위해 경쟁시킬 수 있다. 반면 수단을 보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국가에 의해 경쟁하는 입장이 된다. 더 싼 임금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과 경쟁하며 더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한다. 자본의 이익과 반비례해서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는 줄어드는데 정작 노동자의 소득은 비례해서 감소한다. 삶은 더욱 열악해지고 사회는 더욱 불안해진다. 차라리 나라문을 닫고 우리들끼리 잘살자. 더 잘 살 필요도 없이 그냥 있는 것으로 어렵더라도 우리들끼리 살아보자.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체험과 직관의 영역이다.


본능적으로 안다. 무엇이 자신의 삶을 이토록 열악하게 만들었는지. 특히 노동자의 입장에서. 쇠락한 생산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나라문을 닫고 노동을 영국 국민들만이 독점하자. 영국의 자본으로 하여금 영국에 투자하도록 만들자. 영국에 투자하고 그 이익을 다시 영국사회에 돌려준다. 문제라면 이미 그렇게 하기에는 영국 자신도 유럽연합체제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산업구조가 그렇게 개편되었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분야는 도태시키고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분야만을 집중해서 성장시킨다. 혼자서 살아남기에는 지나치게 기형적인 구조가 되어 버렸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에서 경상도나 전라도가 따로 떨어져나간다면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구조를 다시 바꾸려면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필요하다. 그것을 과연 영국은 감당할 능력이 되는 것인가.


자본가들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국경을 넘나든다. 노동자 역시 더 좋은 조건을 찾아 국경을 넘나든다. 그리고 평준화된다. 기업에 더 유리하면서 노동자에게는 더 불리한 환경으로. 사회저변은 취약해지며 단지 겉보기 규모만 성장한다. 숫자는 늘고 규모는 커지는데 정작 실질적으로 와닿는 것은 없다. 누적되며 반복된다. 그래도 단지 숫자의 단위가 괜찮으니 괜찮은 것인가. 묻는 것이다. 그래도 좋은 것인가고.


굳이 중국에 공장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다. 집도 절도 없는 아랍의 난민들이 맨몸으로 유럽으로 들어간다. 어떻게하면 이들은 더 값싸게 자신들을 위한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니 조선족을 받아들여 귀화시키면 된다. 이민을 받아 인구를 늘리면 된다. 한국의 기득권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예전으로 원대래도 돌아간다. 불가능한 꿈이지만 그럼에도 바라게 된다. 바로 문제다.

과연 일반 대중에게 국가적, 혹은 국제적인 이슈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고 결정할 능력이 갖춰져 있는가.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사실을 판단하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가운데 다수는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다수는 지적으로 충분히 남들보다 뛰어나다 말하기 어렵다. 그런 다수의 대중에게 판단을 맡겨 선거, 혹은 투표의 결과에 따라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과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가. 그것은 옳은가.


하지만 한 편으로 고도로 훈련받은 선택된 소수의 엘리트라 해서 항상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인가. 최소한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대학도 나오고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경력을 쌓은 그 사회의 엘리트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항상 바른 판단과 결정만을 내리는가. 당장 영국에서 브렉시트 여론을 주도한 이들 역시 영국사회의 주류들이었을 것이다.


군왕은 무치다. 그것은 전적으로 군왕에 속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말아먹어도 자기 나라를 말아먹는 것이다. 나라 재정을 축내고 백성들이 신음해도 자기 재정 자기 백성이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모두 국왕에게 속한 군왕 자신의 권리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못하면 군왕을 바꾸면 된다. 바꾸지 않는다면 여전히 군왕이기에 그가 하는 모든 행위는 옳다.


민주주의다. 국민이 주권자다. 항상 잘할 수는 없다. 항살 옳을 수도 없다. 때로 잘못하기도 한다. 때로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모두 전적으로 주권자로서 국민에게 주어진 권리이며 책임이고 의무다. 옳아서가 아니라. 항상 바른 결정을 내려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국민이 가지는 권리인 것이다. 틀릴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고, 오해하고 실수할 수도 있다.


브렉시트가 과연 옳았는가. 그건 나중에 가서 결과가 드러나면 판단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든 감정이든 무엇에 의해서든 영국인들 스스로가 EU에 남아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과반수의 영국인들이 EU를 거부했으므로 영국 역시 EU를 탈퇴한다. 옳고 그름 이전의 당위의 문제다. 국민이 그리 선택했다.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거기에 이것저것 양념을 섞고 장식을 얹어 이익을 추구하려는 몇몇 인간들이 문제일 뿐.


왕이 잘해서 왕이 아니다. 왕이 훌륭해서 왕인 것도 아니다. 그렇게 왕을 고르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실력으로 왕위를 쟁취했다고 왕으로서 항상 훌륭한 것도 아니다. 찬탈자가 과연 이전의 무능한 군주보다 더 훌륭했는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군들에게도 하나나 둘 쯤 아쉬운 점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다. 왜? 왕이니까. 국민은 주권자다. 국민의 뜻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한다. 국민이 주권자니까.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굳이 왜 그런 판단을 했어야 했는가 물을 수는 있다. 그같은 판단이 과연 적절하고 옳은 것이었는가 토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같은 판단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다수의 결정에 의한 결론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하물며 국민이 가진 주권을 비웃고 의심한다. 옛날같으면 반역이다. 묻고 또 묻는다. 듣고 또 듣는다. 가장 기본인데 가장 어렵다. 여러 과정 가운데 하나다. 먼 시간 가운데 찰라다. 국민은 그래서 항상 옳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국민의당에서 먼저 나서서 엄정하게 진실을 규명하고 당사자들을 징계하는 것이다. 당에서는 모르고 있었는데 조사해 보니 다른 사람들 모르게 몇몇 국회의원들이 개인적으로 부당한 이득을 챙기려 했다. 책임정당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정중히 사과한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박선숙과 김수민 등 관련자들을 전적으로 믿는 스탠스를 취했어야 한다. 물론 그 전에 먼저 관련 당사자들을 불러 조사하는 모양새는 취했어야 한다. 당사자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일은 없었다더라. 같은 당의 동료이고 오랜 동지이기에 그들의 선의를 믿고자 한다.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믿을 수 없다 말한다면 동정표는 얻을 수 있다. 나쁜 건 부정을 저지른 당사자들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했다. 엄정하게 진상을 조사하지도, 그렇다고 관련자들을 전적으로 믿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두루뭉수리하게 이도저도 아닌 태도로 일관하는 사이 의혹은 당지도부에게로까지 번지고 만다. 이런 상황에조차 당대표가 침목하며 대중의 상상력은 끝도 없이 온갖 곳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자르지 못한다. 그나마 어설프게 잘라내려다 김수민의 반발만 사고 말았다. 역풍이 분다.


작년 새정치민주연합을 뛰쳐나가면서 내세운 명분이 첫번째였다. 문재인은 두번째에서 한 발 더 나갔다. 두 사람이 가진 성향의 차이이고 그릇의 차이다. 설사 잘못했어도, 그래서 죄를 짓고 처벌받는 처지가 되었어도 쉽게 자신의 인연을, 신뢰를 물리지 않는다. 그것은 곧 주위의 신뢰로 이어진다. 문재인을 비판하는 사람도 그런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적개심을 누그러뜨린다. 아예 안티는 그냥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엄정하게 조사해서 먼저 징계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같은 당 국회의원이니 당 차원에서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을 인위로 키운 것인가면 그것은 더욱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만일 2012년 저선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참 재미있는 캐릭터다. 

국가란 관념의 공동체다. 실체가 없다. 과연 5천만 국민 가운데 현실에서 실제 얼굴이라도 한 번 스치며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실제 자신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이들로 한정하면 범위는 더 좁혀진다. 그런데 한 번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라 묶는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과연 그같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자신의 권리나 의무와 같은 것들은 그래서 여전히 모호하다.


세금을 주인없는 돈이라 여기는 이유다. 국가가 주인이다. 국민이 주인이다. 그러나 실체가 없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눈 먼 돈이다. 그래서 부정을 저지른다.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부정이라는 자각조차 없다. 국회의원이 보좌관을 채용하면서 등급을 실제보다 올린다. 보좌관에게는 원래 주기로 한 임금만 지급하면서 올려서 받는 만큼의 차액은 자기가 가진다. 국민의 세금이다. 그런데도 심지어 언론조차 그것이 보좌관의 돈이라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국회의원이 국가를 속이고 임명해서 받아낸 돈인데?


대우조선 사태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세금이 들어갔다. 그것도 몇 조나 되는 막대한 돈이 들어갔다.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 돈의 주인들이 아무말 없으니까. 그런 놈들을 책임있는 자리에 올린 것부터가 잘못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럴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 것도 국민 자신이다. 국민 자신조차 세금을 남의 돈이라 여긴다. 그래서 세금 내기도 싫어하고, 복지도 싫어한다. 딱 내 돈 남의 돈 그 수준에서 의식이 머문다.


국가라는 실감이 없으니까. 국민이라는 실체를 느끼지 못하니까. 여전히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그들이 그들이 인식하는 세계의 전부다. 가족, 친척, 친구, 동창, 동료, 동향, 혹은 기타등등등... 막연하게는 안다. 하지만 실천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런 인간들 가운데 국회의원이 나오고 대통령이 나온다. 잘한다 칭찬한다. 의리있다. 인정있다.


내가 인정이니 의리니 하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특히 공인에게 있어 그같은 말은 혐오의 대상이다. 공적 관계다. 공적 존재다. 정작 공인이어야 할 이들에 대해서는 관대한데 고작 연예인에게 공인이라며 현미경으로 잣대를 들이댄다.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동창, 내 동향, 내 동료... 물론 아주 없어질 수는 없다.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그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며 인간의 본성이다.


죄의식조차 없다. 보좌관에게 임금으로 지급되어야 할 세금을 호위신고로 횡령한 더민주의 서영교나, 허위계약서로 선거자금을 부풀려 국고를 축내려 했던 국민의당이나. 나는 그들을 믿는다. 선의를 믿는다. 그래서 그들이 끔찍하도록 혐오스럽다. 그들의 선의란 국민의 돈은 주인없는 돈이라는 선의다. 실체가 없으면 인정하지 않는 선의다. 대한민국의 현주소인가. 새삼 깨닫게 된다. 섬뜩하다.

윈터펠 전투에서 존 스노우와 산사는 싸움에 임하는 동기도 목적도 자세도 모두 달랐었다. 존 스노우는 스타크의 성을 물려받지 못한 말 그대로 서자에 불과했다. 당연히 윈터펠을 상속할 권리 역시 롭의 유언장이 전해지지 않은 지금 그에게는 없었다. 윈터펠 전투에 참가할 당시 존 스노우는 단지 스타크 가문의 일원일 뿐이었으며, 윈터펠이 아닌 오로지 스타크를 위해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반면 산사는 윈터펠의 영주 에다드 스타크와 그의 아내 캐틀린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였다. 어쩌면 산사가 릭콘의 죽음을 방관하자고 주장한 것도 이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에다드와 캐틀린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 중 행방이 밝혀진 것은 산사와 릭콘 뿐이었기에, 만에 하나 릭콘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윈터펠을 수복하게 된다면 아들인 릭콘이 에다드의 정식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산사의 늑대는 너무 일찍 죽었다. 고향인 북부가 아닌 킹스랜드에 너무 물들어 버렸다. 꿈에서 깨고 그동안 보아온 것이 세르세이와 조프리, 그리고 리틀핑거였다. 탐욕과 모략과 살육에 익숙해 있다. 굶주린 개를 풀어 램지를 살해하는 장면은 그것을 보여주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스타크의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냉혹함과 잔인함을 보여준다. 윈터펠을 가지겠다. 자신이 윈터펠의 주인이 되겠다. 그를 위해 리틀핑거를 용서하고 그의 군대를 이용한다.


바로 그 차이였던 것이다. 윈터펠인가, 아니면 스타크인가. 윈터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스타크라는 이름을 위한 것인가. 그럴 자격조차 없었다. 그런 자각마저 없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릭콘의 위기를 보자마자 바로 말을 달려 뛰쳐나갔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릭콘을 구하려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롭과 에다드가 보여주었던 스타크의 모습이었다. 그에 비하면 산사는 자신의 영지를 되찾고자 하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냉정하고 치밀하며 그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존 스노우마저 도구로 사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베일의 기병이 램지군의 뒤를 치며 전세가 역전되자 존 스노우가 바로 몸을 일으켜 램지를 뒤쫓은 것도 무슨 거창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없었다. 그냥 어머니는 다르지만 자신의 형제이자 마지막 남은 스타크의 아들인 릭콘을 죽인 범인을 어떻게든 잡아 죽여야겠다는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슬플 정도로 초라하게 그는 램지를 뒤쫓아 성문을 부수고 다시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램지를 잡아 때려누인다. 무기가 아닌 맨주먹이라는 점이 그래서 무척 인상적이다. 무기란 권력이다. 하다못해 램지의 굶주린 개조차 권력이라는 수단이다. 램지를 내리치는 동안 존 스노우의 손까지 피로 물든다. 그냥 하나의 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아닌 존 스노우라는 개인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


바로 롭과 존의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태어나면서부터 롭은 스타크의 후계자였다. 적장자로서 아주 어렸을 적부터 스타크의 후계자로서 길러졌었다. 스타크와 윈터펠, 북부에 대한 고결한 책임과 의무는 그때부터 이미 롭과 하나였다. 그러나 존 스노우는 단지 에다드 스타크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어머니조차 알지 못하는 사생아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트워치에서도 그는 사실 그렇게 리더로서 책임을 느낄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나마 산사는 윈터펠의 상속자로서 이리저리 떠넘겨졌고 킹스랜드와 리틀핑거, 특히 램지로부터 직접 겪으며 배운 것들이 있었다. 스스로 군주이고자 하는 자와 군주라는 자각조차 없는 자와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개인이었다. 단지 존 스노우였다. 에다드 스타크와 이름도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으며, 롭과 산사와 아리아와 브랜과 릭콘의 형제였다. 그래서 형제를 위해 스타크를 위해 싸움에 나섰다. 아무런 공식적인 작위도 직함도 없이 그냥 스타크라는 이유만으로 싸움에 나선 것이었다. 다만 이 싸움의 결과 산사가 윈터펠을 차지한 이후가 중요할 듯하다.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고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아마 소설보다 드라마의 존 스노우가 훨씬 나이가 많을 것이다. 드라마가 시작되고 상당한 시일이 지났으니 더 나이가 들어 버렸다. 그래서 착각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존 스노우는 그냥 철부지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롭 스타크도 결국은 그런 미숙함이 자신의 죽음과 스타크의 파멸을 불러오고 말았었다. 도대체 작가는 소설을 언제나 끝내려는 건지. 나이도 적지 않고만. 가장 큰 불안요인이다. 성장하기에 아직 남은 시간이 충분하다.

작년 이목희가 걸렸을 때도 그리 말한 바 있었다. 이건 상납이 아닌 횡령이다. 딸을 인턴으로 취업시켰다. 차라리 딸에게 월급을 그대로 주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딸에게 지급해야 할 인턴월급마저 자기 후원계좌로 넣어 버렸다. 


그냥 일차원적으로 보자면 그저 자기 딸에게 돌아가야 할 월급마저 어머니라는 이유로 갈취한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자면 원래 지급하지 않아도 되었을 돈을 일부러 딸을 인턴으로 채용하면서까지 굳이 세금에서 받아갔다. 


원래 국회의원 상납의혹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원래 채용하기로 한 직급보다 한 단계 이상 높여 채용함으로써 법으로 보장된 임금을 보다 많이 받도록 함으로써 그 차액만큼을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계좌로 넣는다. 혹은 사무실의 운영비로 쓰고 추가로 고용된 법외인력들에 대한 인건비로 사용한다. 결국은 원래 세금에서 지급되었을 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공문서를 위조하여 가로채는 것이다.


보좌진들도 모르고 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동의하나 도의하지 않으나 받는 돈은 같다. 단지 외부로 드러난 직급만 차이날 뿐이다. 임금은 같은데 직급은 더 높다.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후자쪽이 더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다만 국회의원과의 사이가 틀어질 경우 이것을 빌미삼기도 한다.


자꾸 상납이라 하니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보좌관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급여 가운데 일부를 후원으로 운영비로 내놓았다. 모두가 합의한 관행적 행위였다. 하지만 그 관행이 사실은 국민의 재산인 세금을 임의로 유용하는 관행이었다. 나라를 속이고 국민을 속이는 관행이었다.


딸을 인턴으로 채용하는 것은 전에도 말했듯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턴으로 채용해서 정당하게 월급을 주고 제대로 일도 시켰다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인턴이 아니더라도 부모를, 혹은 친인척이거나 지인이기에 가까이서 돕는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채용하고서 정작 인턴으로서 일도 안 시키고 급여도 정한대로 주지 않았다. 법을 어긴 것이다. 법을 속인 것이다.


그래서 기다린 것이다. 구체적인 사실들이 드러나기를. 이런 걸 관행이라 부른다. 이미 마비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위인지. 얼마나 크고 중대한 범죄인지. 냉장고에 머리를 식히며 찬찬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 의미에 대해서.


이러니 그놈이나 이놈이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정치인이란 다 똑같다며 냉소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최소한의 죄의식마저 없다. 세상이 그들을 그리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런 놈들이기에 세상이 이모양인 것인지.


더민주 차원에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차라리 보좌관의 수를 늘리라. 당연히 늘어난 만큼 세금에서 확실히 임금은 지급한다. 다만 후원은 금지한다. 기부도 금지한다. 보좌관들의 임금을 보호하며 규제한다.


다시 말하지만 상납이 아니다. 본질을 흐린다. 세금을 횡령한 것이고 그를 위해 공문서를 위조한 것이다. 위계로써 보좌관들에 범죄에 가담하도록 한 것이다. 모두 잡아 처벌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디까지 썩은 것인지. 한심하다.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으려다 보면 두 마리 다 못잡는 경우가 있다. 아니 오히려 두 마리 다 잡는 경우가 더 드물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다 보면 모두를 불만족시키게 된다. 그래서 항상 선택이 중요하다. 누구를 만족시키고 누구를 달래줄 것인가.


장고끝에 악수다. 아무거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않 해 버린다. 결과적으로는 부산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부산의 입장에서 김해공항은 지난 수십년 동안 자신들이 이용해 온 공항이기도 하다. 그와 관련한 모든 인프라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가덕도와 밀양의 대결이었기에 가덕도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으로 부산의 편을 들어준 것도 아니게 된다. 문제는 어떻게 확장하는가다.


그동안 동남권신공항 건설과 관련해서 뜨거웠던 이유였다. 김해공항의 확장 또한 또 하나 대안일 수 있지만 너무 어려움이 많다. 무엇보다 김해와 부산의 도심과 주택가에 너무 인접해 있다. 주변의 토지에 대한 수용문제도 역시 난제로 남아 있다. 활주로만 넓히려 해도 주위의 산을 깎아야 하지만 그마저도 사소해 보일 정도로 근본적인 지역주민들과의 이해조정의 과정이 첨예하게 남아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미 가덕도든 밀양이든 결정될 것을 전제로 개발계획까지 세워놓았던 김해시였다. 바로 가까이에 김해공항이 국제공항으로 확장되면 그만큼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당사자의 반발까지도 고려해야만 한다. 그냥 땅파고 콘크리트 부어서 공항만 뚝딱 만들면 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밀양도 부산도 안된다면 결국 기존의 김해공항밖에 없다.


더민주의 승리다. 더민주가 나서지 않았다면 신공항이 밀양에 들어서더라도 누구 하나 말릴 사람이 없었다. 더민죽가 앞장서서 가덕도를 주장했다. 부산시민의 입장을 대변했다. 같은 당의 중진 김부겸까지 나서서 바람을 잡았다. 같은 당인데도 각각 대구와 부산을 위해 당적마저 잊고 열심이다. 가덕도에 신공항이 들어서면 더민주의 공이다. 가덕도가 아닌 밀양으로 결정되면 오로지 새누리의 책임이다. 그래서 타협안을 내놓는다. 밀양도 가덕도도 아닌 김해공항. 그런데 어차피 김해공항은 부산의 권역이다. 부산의 이익을 지켰다.


새누리당도 마냥 실패는 아니다. 가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산을 지켰다. 가덕도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민주의 역할과 기여를 최소화했다. 새누리가 결정했다. 청와댁가 결정했다. 정의당은 처음부터 김해공항 확장을 주장했으므로 목소리를 키울 땍가 되었다. 우습게 되었다면 뻔한 이약기만 하닥가 결국 양비론으로 흐르고 만 국민의당이다. 국익을 고려해서 신속히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어디에? 어떻게? 아무말 없이 원론만 떠들다가 결과가 나오니까 둘 다 잘못했다. 최소한 영남권에서 이 이상의 지지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차라리 반대편에 섰어도 입장이 분명한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 입장이 바뀌면 나와 같은 편에 선다.


아무것도 안하지만 그래서 누구에게도 손해는 아니다. 모두에게 약간씩의 이익은 돌아간다. 그리고 어차피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기에 대안을 마련하기도 쉽다. 김해공항의 확장이 어려운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때 현정부는 그곳에 없다.. 그냥 임기동안에만 지지율 빠지지 않게 적당히 관리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뒤로 미룬다. 김해공항 확장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질 때 그때 다음 정부든 그 다음 정부든 다시 이야기한다.


승자는 부산시민이다. 부산의 이익을 지켰다. 어차피 밀양이야 잃을 것도 거의 없다. 대구가 조금 불쾌하겠지만 어차피 그곳의 표심은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총선의 결과다. 청와대마저 꺾었다. 우습게 되었다. 재미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에도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평생을 통틀어 단 한 번 싸움에서 패했었다. 바로 다케다 신겐과의 미카타가하라전투였었다. 당시 아직 젊었던 도쿡가와 이에야스는 무모했고 결국 그의 용맹은 전국최강이라 일컬어지던 다케다 신겐의 군대에 대부분의 병사와 가신들이 몰살당하는 참패로 이어졌다. 하지만 바로 이 싸움을 반면교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음흉할 정도로 진중하고 교활할 정도로 냉정한 책략가로 거듭난다.


한 편 이릉싸움에서 참패하며 모든 기반을 잃었던 유비도 있었다. 유비가 삼국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제까지의 다른 전쟁과는 달랐다. 그냥 신하였다. 탁군에서 처음 거병했을 때부터 함께였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도 관우와 장비는 자신을 주군으로 받드는 수많은 신하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신하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기반을 걸고 복수전을 벌였다. 오히려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기에 유비는 신화가 될 수 있었다. 설사 싸움에서 패했어도, 결국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어도, 그러나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이었다.


형제를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로 적진을 향해 달려간다. 어쩌면 그가 서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친형제였기에 산사는 릭쿤에 대해 냉정할 수 있었다.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에다드 스타크의 아들임을. 롭과 리쿤의 형제임을. 스노우가 아닌 스타크임을. 전투에서 입었던 피해는 오히려 그에 비하면 사소하닥고 할 수 있다. 명분을 가진 사람에게 사람은 모인다. 존 스노욱가 나이트워치에서 모두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정규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하나의 군을 이끌고 싸워본 경험이 없었다. 하나의 무리를 대표해 본 경험도 없었다. 무모했고 어리석었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낸다. 형제를 구학기 위해 목숨을 건다.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단지 형제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누가 진정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었는가. 산사의 늑대가 일찍 죽은 것은 예언과 같다. 역시 인간과 역사에 정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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