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진화에 있어 형질의 우위란 기껏 100 가운데 1, 혹은 그 이하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돌연변이로 한 번에 특정한 형질이 생태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교체되는 것이 아닌 101과 99, 혹은 100.1과 99.9의 차지가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어 우열이 결정되는 식이다. 다만 1, 혹은 0.1, 아니 그보다 더 작은 차이라도 생존에 더 유리한 점이 있으면 그것이 누적되어 기존의 형질을 대체하고 새로운 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의 진보라는 것도 그와 같다. 하나씩 조금씩 역사의 과정이란 그래서 그같은 아주 작은 도전과 시행착오의 연속인 것이다. 역사를 낙관적으로 보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반동으로 후퇴하더라도 결국에는 더 나은 방향을 찾아 나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바로 유비가 아들 유선에게 유언으로 말했다는 선이 아무리 작다고 행하지 않으려 하지 말고 악이 아무리 작다고 행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말의 진짜 의미일 것이다. 아주 작은 선이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더 큰 선이 되지만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또한 더 큰 악이 될 수 있다. 작은 선을 존중할 줄 알아야 큰 선이 나타나고 작은 악을 경계할 수 있어야 더 큰 악을 막을 수 있다. 내가 오십보백보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때에 따라 오십보를 도망치는 것과 백 보를 도망치는 것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실제 전장에서 오십 보를 도망친 사람이 아무래도 백 보를 도망친 사람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런 차이가 모여서 하나의 전투, 나아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고고하고 순결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차피 오십 보 도망치나 백 보 도망치나 같다. 똥이 묻으나 겨가 묻으나 같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와 같다. 오롯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것으로 악과 같다. 온전히 악이 아니라면 크게 정의롭지 못한 것과 차이가 없다. 그렇게 전쟁에 패할 때마다 장수들을 처형한 결과 명말 요동전선에서는 차라리 질 것 같으면 아예 항복해 버리는 이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기왕에 부정을 저질렀으니 어차피 처벌받을 것 더 큰 부정을 저지르자. 어차피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으니 그냥 아예 한바탕 반란이나 일으켜봐야겠다. 작은 선을 작다고 해서 무시하면 그 선마저 자리잡지 못하고, 작은 선과 작은 악을 구분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의 이기란 작은 악을 쫓아 더 큰 악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도 작은 잘못도 용납하지 못하는 엄벌주의에 대해 법이 너무 엄격하면 백성들이 서로 속이게 된다며 경계하고 있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서로 속이고 의심하고 모함하는 일들이 일상으로 벌어지며 오히려 사회 전체가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실제 사례를 지금 미국이 보여주고 있다. 엄벌주의로 어지간하면 감옥에 쳐넣었더니 그냥 아예 포기하고 범죄를 일상으로 저지르는 인간들만 늘어났다.

 

그러나 이상이 너무 고고하기에, 가진 바 신념과 지향이 너무나 순결하고 정의롭기에, 그런 너무 작은 선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기왕에 선을 행하려면 100을 행해야지 어째서 99로 멈추는가. 90에 멈추고 마는가. 80의 선과 70의 선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나아가 100이 아니라면 -100의 악과 크게 차이가 없다. 차라리 애매하게 어중간한 80이나 70에서 멈추느니 한 번에 100의 선을 이룰 수 있다면 -100도 나쁘지 않다는 극단적인 사고도 가능해진다. 바로 2찍 진보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차라리 김영삼 김대중보다 전두환을 더 좋아하고, 노무현 문재인보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더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한겨레 기자 하나도 인증한 바 있다. 차라리 이명박근혜 때가 더 나았다고. 왜냐면 그때는 진보의 목소리가 의미가 있었다. 진보가 주장하는 가치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현실이 진보가 추구하는 정의와 거리가 멀수록 진보의 목소리는 더 사람들에게 의미있게 들리게 된다. 그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게 한다. 이를테면 역사진화론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있었기에 이 땅에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더욱 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진보적 가치에 대한 요구 또한 크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현실이 지속되었다면 어쩌면 혁명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선 이들이 있다.

 

애매하기 때문이다.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대재해법에 대한 정의당과 한겨레의 태도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완전하지 않으니 기권하겠다. 어디 중대재해법 뿐일까? 대체휴무일에 대해서도, 최저임금에 대해서도, 근로시간 단축에 대해서도, 2찍 진보들은 한결같이 한 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루어주지 못하기에 문재인 정부를 심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윤석열이다. 차라리 문재인 정부의 애매함보다는 윤석열 정부의 극단이 2찍 진보들을 위해서도 더 나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 보니 정작 애매한 민주당과 한 편이 되기 싫어서 반대편의 극단에 있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억울할 수도 있다. 자기들은 그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를 게 없다 보니 민주당의 편을 들기 싫어 입다물고 있을 뿐인데, 아니 때때로 현정부와 여당의 편에 서기도 하는 것 뿐인데 언제부터인가 같은 부류로 오해받게 되었다.

 

물론 정의당만 그런 것은 아니다. 녹색당이 이번 정부 들어서 문재인 정부 만큼 정권을 비판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었다.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이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이유였다. 진보진영에서 나왔어야 할 당연한 비판들이 오로지 용혜인 의원을 통해서만 들려오고 있었다. 그만큼 정권이 바뀌고 심지어 민주노총마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조용해지고 말았다. 내가 살다살다 민주노총 이렇게 조용한 것 처음 보는 것 같다. 간첩몰이를 당하고 노조 간부가 자살하는 상황에서도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정권타도를 외치며 정권교체에 직간접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었다. 무엇이겠는가. 그런 놈들에게 민주당의 의석을 나누어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자칭 중도들도 흔히 말한다.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인데 왜 굳이 한 정당을 지지하는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같은데 왜 한 쪽의 잘못은 덮고 한 쪽의 잘못만을 비판하는가? 이 중도들도 심리는 비슷하다. 오롯이 아주 작은 오점조차 없이 정의로워야 정의롭다. 한 점의 오류도 없어야 오롯이 잘한다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면 모두가 쓰레기인 것이다. 옥석구분이 없다. 더 잘하고 못하는 게 없다. 그래서 윤석열인 것이다. 작은 잘못을 용납하지 못해서 큰 잘못과 같은 것으로 여기니 결국 큰 잘못만 남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괜히 민주당만을 지지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정치가 현실이 아닌 머릿속에 있다. 하긴 그러니까 여가부 폐지라는 구호에 넘어가서 최저임금과 주휴수당과 근로시간이라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런데도 자기는 중도니까 더 우월하다는 의식이 그런 교조적 선명성에 집착하게 한다.

 

오래전 자칭 진보들이 오히려 김영삼이나 김대중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더 좋아하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라 끄적여 보는 것이다. 2찍 진보들이 선택한 정권이 이승만의 신원을 위해 저리 열심이다. 이승만 뿐인가? 박정희와 전두환도 다시 포장되려 한다. 그렇다고 2찍 진보들이 그에 대해 어떤 비판의 말이라도 내놓느냐면 차라리 민주화세대를 더 욕하는 것이 원래 그놈들이었다는 것이다.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한 정의당이나, 민주화세대의 배제를 주장한 한겨레가 그 대표일 터다. 어째서 2찍 진보들은 윤석열을, 그리고 국민의힘을 선택한 것인가. 차라리 간첩으로 몰리더라도 그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그들의 세계가 그렇다.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다. 너무나 한심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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