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아마 거의 유일하게 정기준의 주장을 옹호하고 있었을 것이다. 백성은 현명해짐으로써 오히려 어리석어진다. 백성이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으면 오히려 기득권에 더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원래는 교활할 정도로 이기적이고 파렴치할 정도로 충동적이었던 백성이 이타를 배우고 이성을 배움으로써 지배자들의 입맛대로 통제될 수 있게 된다.

 

그때 그 예로써 들었던 것이 바로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이었다. 일본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농민들의 반란은 거의 일상이었다. 자기들끼리 전쟁한다고 다이묘들이 아예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뜯어가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거의 대부분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농민들 자신도 자기가 살아야 했으니까. 그런데 정작 문명화된 구일본제국 시절에는 일본 국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죽을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알아서 세금을 바치고 노동력을 바치고 심지어 죽는 것마저 영광으로 여겼었다. 국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국가를 이루는 한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고 죽는 것보다 국가의 이익과 영광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회사에 평소 불평불만이 그리 많았던 인간이 하나 있다. 나이도 좀 되는데 하여튼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혹시나 지난 대선에서 최소한 윤석열은 안 찍었겠지. 시절이 이러니 자백하더라. 자기 윤석열 찍었다고. 이유는 여가부폐지와 통일부폐지. 아니 돈 많이 안 주고, 사람 많이 안 쓰고, 대우도 좆같다고 그리 욕하더니만. 그러고는 임금이 줄어서 알아서 그만두는 사람 나오면 적당히 정리도 되니 회사를 위해서도 좋다고 떠들어댄다. 이제 20대인 젊은 친구는 아예 말할 것도 없다. 친중친북이 싫어서 윤석열 찍었다. 지금도 오르지 않은 임금과 기간제라 언제 잘릴 지 모르는 신분과 병가조차 못쓰는 열악한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정작 그보다 여가부와 친중친북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말해 주었다. 원래 거대서사는 쉽게 사람을 속인다.

 

솔직히 두 사람 모두 여가부가 있든 말든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다. 친북이 뭐고 친중이 뭐고 실제 사는데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시피 할 것이다. 그보다는 고용안정과 급여와 회사로부터의 처우가 더 일상에서 와닿을 것이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국가단위에서 움직이는 거대서사에 개인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진 무언가가 있는 양 쉽게 현혹되고 마는 것이다. 그저 내가 사는 것만 생각해야 하는데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자신도 희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차라리 같이 일하는 사람들 좀 내보냈으면 좋겠다. 대충 보면 알겠지만 평소 불평불만도 가장 많고 일도 너무 못해서 가장 먼저 잘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당연히 아직 기간제라면 말할 것도 없다. 자르면 기간제부터 자르지 정규직부터 자르겠는가. 그런데도 나 자신의 일상과 이익을 위해 투표한 것을 비웃는 심리를 보고 있으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어설프게 배우고 익힌 부작용이다. 괜히 쏟아져나오는 주장과 논리에 현혹되고 만 결과라 할 것이다. 그냥 모른 체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터다. 그러고보면 평소 불만 많고 아는 척 말만 많았던 사람들이 대개 2찍을 선택했었다. 너무나 이상이 고결해서 민주당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윤석열을 지지하고 그것을 합리화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논리로 자기는 중도층이니까 한 번은 한 쪽을 한 번은 다른 한 쪽을 지지하는 것이 옳다. 과연 그것이 자기 생각일 것인가.

 

듣자하니 태양광사업을 하는 회사들에서도 태양광을 악마화하는 보수여당과 후보를 지지한 인간들이 적지 않았다 한다. 뻔히 예산 줄이고 지원 줄이고 환경도 안좋아질 것이 예상됨에도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편의점 알바가 주휴수당 줄인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페미 때문에 잔업하느라 죽겠다는 IT 종사자들이 120시간 일하게 해달라 대통령에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에 수출하는 기업들이 탈중국을 선언한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어째서 이런 모순들이 나오는가. 자기 땅이 철원에 있으니 남북화해가 더 유리할 텐데도 북한에 적대해야 한다며 2찍을 선택하는 것도 같은 논리다. 민주당이 진보적이지 못하니 민주당을 응징하기 위해 그나마 이룬 진보를 모두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는 2찍 진보들 또한 다르지 않을 터다. 저들의 정의가 저들이 놓인, 그리고 추구하는 현실을 넘어선다.

 

아무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원래 국민교육이라는 자체가 국민 개개인의 능력계발을 위한 것이 아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민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국민교육도 거대서사가 더 중요했다. 국가와 민족이 개인의 앞에 있었다. 오죽하면 국제주의를 주창하던 사회주의자들마저 국가간 전쟁이 벌어지자 자원입대해서 알아서 죽어나갔겠는가. 그 정점에 파시즘이 있었을 것이다. 이념이라는 거대서사를 위해 개인을 말살하던 냉전시대도 다르지 않다. 어설프게 배워서 더 위험하다. 그 위험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이 사회는 여전할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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