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사실 공표를 제한하려는 법무부의 입장에 검찰과 언론이 반대하며 내놓은 이유란 대략 두 가지다. 검찰의 입장에서는 수사에 대한 압력이며 제약이란 것이고, 언론의 입장에서는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그냥 한 마디로 개소리들이다. 수사를 제대로 했으면 압력이든 제약이든 상관없을 것이고, 국민의 알 권리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검찰이 그동안 수사과정에서 확보한 사실들을 때로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언론에 흘려왔던 것은 언론을 이용해서 여론을 움직여 피의자를 압박하려는 의도에서였었다. 언론을 통해 철저히 검찰이 의도한 정보들만을 선택적으로 국민들에 전함으로써 피의자의 범죄를 기정사실로 만들고 범죄자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등에 업고 피의자의 기본적인 방어권조차 무력화시키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법으로 보장된 변호사의 선임조차 당당하지 못하기에 수사를 회피하고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이해하는 국민들마저 늘어난다.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것도,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는 것도 모두 피의자가 결백하지 못하기에 그리하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여기는 가운데 자신마저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는 그같은 상황을 끝까지 견디고 버텨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더욱 언론 역시 검찰과 함께 피의사실 공표를 제한하려는 법무부와 정부, 여당의 개혁안에 반대의견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언론은 여론재판을 주도하면서 판사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검찰의 의도대로 언론이 받아쓰면 그대로 대중은 믿고 판결까지 내리게 되었다. 언론이 유죄라면 유죄인 것이고 무죄라면 무죄인 것이다. 설사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도 도덕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최소한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 그를 단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판사보다도 더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판사는 오로지 법정에서 법적인 판단만을 판결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은 다르다. 감정과 정서에까지 호소하며 어떻게는 피의자를 유죄로 만들어 단죄할 수 있다. 한겨레 기자들이 편집국 임원들을 들이받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자신들도 피를 보고 싶다. 자신들도 선배들이 노무현을 오욕속에 죽게 만들었던 것처럼 자신들 역시 조국과 그 가족들을 죽여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마음껏 누려보고 싶다. 그런데 그런 권한을 인권을 이유로 제한하겠다 하니 언론이라고 좋을 리 있겠는가.

 

원래는 검찰 자신이 철저하게 관련한 증거와 증언을 화보해서 혐의사실을 밝히고 재판을 통해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자면 너무 번거롭고 성가시고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 테니까. 그래서 쉬운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설사 혐의를 입증하지 못해 기소까지는 못하더라도 여론재판을 통해 자신들이 수사한 정당성만큼은 지킬 수 있다. 자신들이 무능했거나 혹은 게을려서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어도 여론을 움직여 상대를 어떻게든 죄인으로 만들면 수사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문제들까지 함께 묻어 버릴 수 있다. 더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수사하려 할 때 여론의 지지는 그마저 정당화하는 든든한 근거가 되어 준다. 그러므로 자신이 없거나 확실하지 않다면 먼저 여론을 움직여 피의자를 압박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수단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

 

상관없는 주변인들까지 헤집어 괴롭힘으로써 피의자를 정신적으로 고립시키고 막다른 궁지로 내몰아 아예 저항을 포기케 하는 것은 검찰이 가장 애용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다. 피의자가 악인이라면 여론은 그마저도 옳다며 지지해 준다. 범죄자에게 인권이란 없다.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을 처벌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따윈 없다. 그런 대중의 여론을 믿는다. 별건수사라는 것도 그런 일환이다. 주변의 아주 사소한 문제들까지 샅샅이 뒤져서 그를 범죄로 만들고 그를 통해 법적으로 상대를 압박한다. 그야말로 사정이다. 원래는 인지되거나 고발된 사건에 대해서만 수사해야 하는데 범죄사실을 찾기 위해 개인의 사생활까지 모두 뒤지고 들춰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는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진짜 사소한 문제들까지 언론에 흘려 상대를 악마화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다. 과연 이런 수사방법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당연하게 허락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검찰이 말하는 엄정하고 공정한 객관적인 수사인가.

 

언론이 주장하는 알 권리라는 것도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국민의 알 권리란 엄밀히 철저한 사실과 진실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추측이 아니다. 주장이 아니다. '다비드상'의 사타구니만 확대해 찍어 놓고 음란하다 주장하는 것이 과연 국민이 알아야 할 사실인가? 양파를 볶고 있으니 카레를 만들려는 것이다. 밀가루반죽을 하는 것을 보니 칼국수를 해먹으려는 것이다. 살짝 보인 상대 카드의 문양이 검은 색인 것으로 보아 스페이드일 것이 분명하니 여기서 더 달려야 한다. 그런데 검은 색은 클로버도 있다. 설사 문양이 같아도 숫자에 따라 상대는 스트레이트도 될 수 있고 풀하우스도 될 수 있다. 칼국수를 먹는 줄 알고 김치를 꺼냈는데 팬케이크를 만든다. 그래서 그 알 권리라는 것이 얼마나 어떻게 국민에게 개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대부분 피의사실 공표를 통해 언론에 흘려지는 사실들이란 철저히 검찰의 의도에 의해 걸러지고 선택되어진 사실들이다. 오로지 피의자에게 불리한 - 정확히 불리하게 만들 검찰에게 유리해질 사실들이란 것이다. 그런 사실들을 국민들이 알게 되었다고 얼마나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 그렇게 검찰과 언론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국민의 판단이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낸다면 과연 그같은 사실들을 국민들이 굳이 아는 것이 어떤 공익적 의미와 가치를 가질 것인가. 제대로 언론이 취재해서 보도했어도 사실이 불완전하다면 국민의 사고와 판단을 왜곡시킬 수 있는데 그마저 검찰과 언론이라는 일방의 의도에 의해 취사선택된 정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뾰족한 모서리가 있으니 흉기를 들었을 것이다. 뾰족한 모서리는 삼각형에도 별모양에도 그밖에 수많은 형상들의 일부로 현실에 존재한다. 하지만 단지 그런 것이 보였기 때문에 그는 범죄자일 것이다. 검찰과 언론은 신인 모양이다. 사실마저 마음대로 창조한다.

 

스페이드의 비유가 어쩌면 가장 옳을 것이다. 자칫 평생 모은 재산을 잃을 수 있는 한 판 승부다. 우연히 카드의 문양을 살짝 보았다. 상대는 플러시가 아니다. 그러나 스트레이트일 수 있다. 풀하우스일 수도 있다. 포카드일수도 있다. 하지만 스페이드이니 플러시가 아닐 것이므로 여기서 레이스를 하면 이길 것이다. 그래서 망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물론 언론은 책임지지 않는다. 언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오보에 책임진 적이 없었다.

 

같잖은 것이다. 수사하기 싫고 능력도 안되는 자신의 비루함을 여론재판 뒤에 숨기려 한다. 진실따위 관심도 없이 그저 불러주는대로 편하게 기사를 쓰고 싶은 욕심을 국민의 알권리라는 방패 뒤에 감춘다. 국민을 핑계삼지만 사실 국민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국민이 안중에 있다면 먼저 국민의 시민으로서의 권리에 더 관심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국민이 알아야 하는 불완전한 사실과 시민으로서의 권리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가. 비례의 문제다. 자기들의 편리만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스스로는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들은 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진실을 알리고 있다.

 

아직 기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혐의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소장을 쓸 정도로 충분한 근거들이 준비되지 않아 아직 그를 위한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연 그런 단계에서의 사실들이 얼마나 의미를 가지고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재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사실들이란 것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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