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자든 반여성주의자든 한 가지 분명히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향상과 혼인률의 하락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결혼의 의미가 바뀌었다. 더이상 결혼같은 것 하지 않고도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다. 아마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는 이혼했거나 사별한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여성이 혼자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쉽기는 커녕 예전에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여성이 보호자 없이 혼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어떤 행동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는 이들이 지금도 적지 않다. 인도를 비롯한 저개발국가나 혹은 선진국에서도 빈민가 같은 소외된 그늘에서 그런 행동들이 지금도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이 무방비하게 혼자 있다는 자체가 그런 행동들을 자초하는 것이며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아직도 상당히 넓게 남아 있는 편이다. 그런데도 그런 남성들의 약탈행위마저도 때로 기다리고 반겨야 했던 것이 당시 여성들의 현실이었다.


아주 오래전 원시사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냥과 어로는 남성들의 몫이었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이후로도 모든 생산은 남성들의 노동력에 의지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전근대사회에서 인구통계를 낼 때면 여성은 배제한 채 그것도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들로만 인구를 헤아리는 경우마저 상당했었다.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과 만일의 상황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기준이 바로 이들 한창 일할 나이의 성인남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은 단지 그에 종속되어 남성들의 생산활동을 돕고 아이를 낳는 부수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여성들 역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남성의 생산력에 의지해야만 했었다. 남성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경우란 아주 예외적인, 어쩌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천대받는 직업들 말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러니까 여성에게는 의지할 남성이 있어야 하고, 그런 남성이 있다면 버림받지 않도록 더 조심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유명한 삼종지도다.


이슬람에서 괜히 일부다처제를 종교의 교리로 못박은 것이 아니란 것이다. 마호메트가 종교전쟁을 시작할 무렵 중근동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남성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 여성의 수가 반대로 크게 늘게 되었다. 여성만으로는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장사도 할 수 없다. 농사도 더 잘 지을 수 있고 장사도 더 크게 할 수 있는 남성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남성들은 필수적으로 복수의 여성들과 결혼해서 그들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 당나라의 균전제가 무너진 이유도 잦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성인남성들이 전장으로 끌려간 사이 남은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만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지며 빚을 지고 땅을 넘기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시민군도 비슷한 과정을 밟으며 다수 시민들이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반드시 기근이 일어나는 것도 같은 이유로 생산이 크게 줄어드는 영향이 크다. 그만큼 남성의 노동력이 전근대사회에서 가지는 가치란 절대적이었기에 여성은 반드시 남성과 결혼해서 그에 의지해야 했고 남성 역시 그런 여성을 부양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심지어 여성의 재가를 금지하던 조선에서도 소박맞거나 과부가 된 여성이 성황당에 서 있으면 처음 본 남성이 무조건 책임지고 거두어야 하는 의무가 지워지고 있었다. 그만큼 여성 혼자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보면 여성의 재가에 대해 원리적으로 엄격한 태도를 취하던 조선이었음에도 먹고 살기가 빠듯한 하층민 가운데서는 자유롭게 재가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자식의 장래를 걱정해야 하는 사대부의 아낙이 아니라면 그런 엄격한 도덕률따위 의미가 없을 정도로 먹고 사는 문제야 말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려서는 아버지에 의지하고, 자라서는 남편에 의지하고, 늙어서는 아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결혼을 해야 했고 자신의 남편이 된 남성에 복종해야만 했었다. 아직까지 생산이 오로지 남성의 노동력에 의지하며 남성들에 독점되어 있던 때문이었다.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지켜줄 남편이라도 있어야 험난한 세상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아마 답이 나올 것이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 아니 혼자 사는 쪽이 벌이에도 성취에 있어서도 더 유리하기까지 하다. 보다 국가라고 하는 시스템이 고도화되며 치안도 발달해서 혼자라도 또한 얼마든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전처럼 남성에 종속되어 남성에 의지하며 남성의 보호를 받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과연 전처럼 어쩌면 자신을 얽매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반드시 기대야 할 필요가 있을까. 결혼하게 되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도, 장차 자신의 수입에도 큰 손해가 뒤따른다. 혹시라도 결혼이 잘못되었을 경우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더이상 전처럼 여성이든 남성이든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인내하며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여성들만이 아니다. 많은 남성들도 그같은 현재의 결혼이라는 문화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기도 하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경제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여성도 충분히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남성들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고 기대려 한다. 이를테면 부양에 대한 거부다. 더이상 여성들을 일방적으로 부양하지 않겠다.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자존과 자립을 주장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가부장적 의무로부터 해방시켜달라. 


그래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다. 결혼이란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모두에게 너무나 부담스런 구속이었을 테니까. 다만 그럼에도 임신과 출산에 대한 부담이 일방적으로 여성에게만 지워진다는 것이 남성과 여성의 결혼에 대한 기대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남성들은 아직 결혼을 바라는 비율이 적지 않지만 여성은 그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아직 남성들에게는 결혼하는 것이 그나마 괜찮고, 여성들에게는 그조차 괜찮지 않다. 


그러면 답은 무엇인가. 그래서 현정부의 출산률정책에 공감을 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달라진 시대에 맞는 달라진 윤리와 달라진 문화와 달라진 정책들이 필요하다. 결혼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이 더이상 여성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더이상 전처럼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 살아가도록 할 수 없다면 여성들의 사회할동에 대한 사회적 제도와 관습과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어차피 지금 임금수준에서 남성 혼자 벌어서는 집에서 노는 아내와 아이들까지 모두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문제없이 경제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아예 근본적으로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출산률은 높여야겠고, 나와 내 아내는 출산휴가도 육아휴가도 써야 하는데, 그러나 정작 동료 여직원이나 남직원이 출산과 육아로 자리를 비우면 그것을 민폐로 여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동시장의 유연화다. 비정규직을 진짜 비정규직처럼 운용하는 것이다. 그저 해고하기 쉬운 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잠시 대체해서 사용할 수 있는 인력으로 계약직을 활용하는 것이다. 기간제라는 표현이 그런 점에서 더 정확한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신분이 불안정한 만큼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임시로 고용해서 사용한다. 고용률도 생산현장에서의 효율도 높일 수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닌 서로를 보완하는 개념으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원래 기간제란 그렇게 쓰이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더 싸게 쉽게 쓸 수 있는 인력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진 탓에.


과도기라는 말이 맞다. 이전과 사회가 요구하는 성역할이 달라졌다. 개인이 기대하는 성역할 역시 크게 달라졌다. 결혼의 개념도 달라졌다. 결혼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기대하는 것돌 역시 달라졌다. 그런데 아직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과거와 같은 결혼의 양식과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니까 차라리 아예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배제하면 어떨까. 결혼이 집안간의 결합이라면 개인간의 결합인 동거를 사실혼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여성가족부의 정책 가운데 동의하는 몇 가지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까 부담스러운 결혼이라는 제도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만나 함께 살면서 아이도 낳아 기를 수 있게 법으로 제도로 보장해준다. 선진국들에서 그렇게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과도기 동안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개인을 옭죄고 그럼으로써 개인과 개인의 인연까지 막는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


역사의 맥락에서 살펴본다. 과연 지금 혼인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동아시아 전체에서 그런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출산률도 따라서 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출산률이 아니다. 여성정책이어야 한다. 여성들이 달라진 세상에 맞게 거리낌없이 일하며 사랑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를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여성주의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별 거지같은 말도 안되는 여성주의를 싫어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를 지지한다.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면. 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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