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최근 TV드라마에서 가난하다고 묘사되는 대부분의 경우 나보다 사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더 많았다. 그만큼 내가 사는 꼬라지가 한심하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TV드라마를 만드는 작가나 제작진이 생각하는 가난의 수준이란 것이 내가 실제 겪고 있는 현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사회가 풍요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경제도 성장하고 따라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삶의 수준이라는 것도 높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갖추고 누리며 살아야겠다. 실제 나 역시 최저임금이 오르고 그에 따라 수입이 늘어나면서 현실에 대한 불만이 오히려 커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지금 사는 집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싼 맛에 구한 것인데 그래도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쓰는 것도 그래도 이런 정도는 사서 갖추고 쓰고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은 말한다. 나보다도 어른들을 일컫는 것이다. 자기 때는 단칸 사글세방에서도 잘만 벌어서 애도 낳고 집도 사며 살았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시작하려 해서는 안된다. 시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 어른들이라고 원시시대처럼 움막을 짓고 살라 하면 못사는 것이다. 조선시대처럼 화전을 일구고 살라 하면 역시 못사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어른들 세대들도 시골에서 못살겠다고 굳이 서울로 올라와 변두리를 전전하며 살았던 것이기도 하다. 당시 서울 변두리 달동네들의 환경을 본다면 도대체 뭐한다고 서울까지 올라와 그리 궁상떨며 살았었던 것인가 싶기도 한데, 하지만 그런 것들을 감안해도 서울과 시골의 차이는 당시부터 너무 크기도 했었다.

 

그래도 결혼하면 이 정도는 갖추고 살아야 한다. 조금 좁더라도 자기 집이면 좋고, 자기 집이 아니라면 그래도 조금 교통도 편리하고 널찍한 전세는 되었으면 싶다. 필수적으로 갖추었으면 싶은 가전제품이며, 가구며, 그리고 함께 누렸으면 싶은 삶의 수준이 있다. 아이를 낳아도 아이들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최소한의 것들이 있다. 이번 조국 논란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상실감과 박탈감의 이유다. 나도 이렇게 해주고 싶었는데. 나도 이렇게 해주었으면 싶었는데.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조국은 그럴 수 있었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바로 회복해서 그를 지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조국이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조국 딸이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조국이든 조국 딸이든 자신의 위치에서 단지 더 열심히 살았을 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결혼을 못하는 것이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것이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여전히 인구가 증가중인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아니 대부분 선진국들에서 이미 오래전 비슷한 과정들을 거친 바 있었다.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나라도 있고 그나마 조금은 사정이 나아진 나라들도 있다. 하지만 근본은 역시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양극화의 문제가 대부분 국민들에게 기대한 삶과 현실 사이에 괴리를 키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결혼해도 괜찮은 것일까. 집도 좁고 사는 것도 변변치 않은데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래서 프랑스 등 유럽의 선진국에서도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통해 그런 우려를 덜어주는 방법으로 출산률을 높이는 정책을 펴게 되는 것이다.

 

복지가 곧 출산률 정책이다. 결혼해도, 아니 결혼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데 전혀 어떤 고민도 걱정도 할 필요 없이 만들어주겠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가르치는 모든 과정들에 정부가 개입해서 개인들의 부담을 최소화시키겠다. 여기에는 주거정책도 일정부분 포함된다. 각종 육아 및 교육정책들도 기본으로 들어간다. 모두가 세금이다. 그냥 아이를 낳으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낳은 아이들에 대해서까지 국가가 국민에 대한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으라. 단순히 돈만 쥐어주는 출산정책은 영국의 예로 이미 그 부작용을 드러낸 바 있었다. 단지 더 많은 보조금을 노리고 낳은 대부분 아이들은 방치된 채 사회적인 문제로 자라나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 결혼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데는 계층간의 차이가 최소화되도록 하겠다. 당연히 최상류층이나 최하류층의 격차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서는 최대한 차이없이 아이를 기르고 가르칠 수 있도록 정부가 개입해서 그 격차를 줄여 보겠다. 기대하는 평균적인 삶이 실제의 평균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 것인가? 그런데 정작 한국 국민들은 그런 정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인가.

 

임대주택건설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대하는 것이 대부분 대한민국 국민들이란 것이다. 재정을 투입해서 계층간의 격차를 줄여주겠다 하면 그마저 배아파서 싫어한다. 왜 내 세금으로 저들의 삶을 돕는 것인가. 젊은 층에서조차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노력에 따른 격차를 당연하게 여기며 그것을 정의라 믿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젊은 층에서 노력으로 남들 위에 설 수 있도록 지원해야지 격차를 줄이기 위해 지원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마 마지막 남은 신자유주의의 성지가 아닐까.

 

정부에서 출산률 정책을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겠다 선언한 이유였다. 이 역시 소득주도성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삶 그 자체가 문제다. 그 삶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돈을 쓰는 걸 그리 싫어한다. 어려운 문제다. 쉬우면 내가 정치했다. 당분간은 이대로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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